조속

2022. 12. 25. 22:11한국의 글,그림,사람


조속
趙涑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시대 조선 중기
출생-사망 1595. 11. 27 ~ 1668. 8. 5
분야 서예, 일반회화
직업 문인서화가
조선 중기에 활동한 문인서화가이다. 자는 희온(希溫)이고, 호는 창강(滄江) · 창추(滄醜) · 추옹(醜翁) · 취병(醉病),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금석학자이자 서화 수장가로도 알려져 있다.
부친 조수윤(趙守倫)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당색은 서인(西人)이었는데, 조속이 18세 때에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옥사(獄死)를 당하였다.
조속은 1623년 29세 때 인조반정에 참여해 성공했으나 녹훈을 사양하고 주로 지방관직에 나아갔다. 인조 · 효종 · 현종 실록에는 면모를 살필 수 있는 내용들이 산견된다.
33세 때 덕산 현감, 54세 때 김제 군수로 있을 때 암행어사 심택(沈澤)이 임금께 아뢰어 표리일습(表裏一襲)을 하사 받은 것, 58세 때는 세 차례나 장령을 제수 받은 것, 사후에 제수(祭需)를 내린 것, 타계 후 두 달 반 만에 이조판서에 추증된 것, 평생을 조촐하게 살아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 힘들었으나 태연한 것, 그가 죽자 자손이 제사를 못 지내고 추위와 굶주림을 면하지 못했다는 기사들을 통해 삶의 자세 등 개결한 선비의 면모와 인간됨을 엿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궤도(金櫃圖)>는 중국이 아닌 우리의 역사상 인물을 대상으로 한 고사인물도로 화면 상단에 방정한 서체의 어제(御題)가 있는 청록산수도이다.
이 외에 간송미술관 소장 <호촌연응도(湖村煙凝圖)>,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산수도>, 개인 소장 《영사첩》 중의 <산수도>와 <고군산도도(古群山島圖)> 등이 산수화로 알려져 있다. <금궤도>는 섬세한 필치와 금분(金粉)까지 사용한 화려한 설채의 청록산수도이다.
화면 상단에 조속의 생질서(甥姪壻) 김익희(金益熙)가 쓴 제사(題詞)는 인조의 어제시(御製詩)를 쓴 것으로 이 그림이 임금의 명에 의해 조속이 제작한 어람용 그림임을 밝혔다.
그러나 김익희가 제사에 적힌 이조판서의 직함을 지낸 것은 1656년이니 임금이 명을 내린 1636년과는 20년의 격차가 난다. 따라서 이 그림의 제작 연대에 대해서 이견이 있다. 제작연대를 1656년으로 보면 화가로서의 완숙기이기는 하지만 당시 조속은 눈이 나빠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하니 의문이 남는다.
서울대박물관 소장 <산수도>는 관인은 없으나 시대화풍이 비교적 선명하다. 조선 초기 안견파의 편파이단구도를 옆으로 확대시킨 것으로 간주된다.
《영사첩》 내의 <산수도>와 비교할 때 만월이 중천에 있는 야경(夜景)에 다리를 건너 다층탑이 보이는 산사(山寺)로 향하는 인물이 있는 점과 바위와 토파, 그리고 16세기 계회도를 통해서도 친숙한 쌍송(雙松)과 관목이 어우러진 수지(樹枝) 묘사에서 시대가 다소 앞선 고식(古式)을 드러내어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지팡이에 의지하고 동자를 대동한 삿갓 쓴 인물 등 주제의 측면, 화면 왼쪽을 비우고 오른쪽에 무게의 중심을 둔 화면의 공간구성과 구도에서 유사성이 감지된다. 이들은 필치에서 차이를 보이나 이들 산수는 화면 구성과 구도에서 친연성 내지 공통점을 보인다.
두 점의 소폭 <산수도>는 중기 화풍의 특징이기도 한 오른쪽에 무게를 두고 왼쪽을 비운 구도와 귀가(歸家)를 나타낸 주제 면에서도 같다.
그림의 크기가 다르며, 내용 그리고 필치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성에서 기인하거나 동일한 작가의 성향을 반영하듯 시점이나 점진적인 화면 전개 등 전체적인 구성과 구도는 닮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조속의 산수에서 주목되는 것은 진경화법의 선구자인 점이다.
'진경화법의 창안을 선도한 진경화법의 선구자'로까지 문헌의 기록을 찾아 회화상의 위상에 대해 자리 매김한 최완수는 <금궤도>를 통해서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정선의 《경외명승첩(京外名勝帖)》에서 보이는 청록산수화법의 유래까지 헤아리기도 했다.
조속의 아들 조지운은 지인 남학명(南鶴鳴)에게 부친의 화첩을 보여주며 실제로 경치 좋은 곳을 만나면 문득 말에서 내려 눈앞에 전개된 풍경을 화면에 담았고 이렇게 화면에 옮겨 그린 것이 금강산과 오대산 · 삼일포라고 말했다.
이 사실은 남학명의 문집 『회은집(晦隱集)』에 잘 나타나 있으니 1681년 조속이 그린 <장안사도>, <장안사동북망도>, <벽하담도>, <표훈사>, <표훈사문루동망도>, <자마하연북망도>, <마하연동남망도>, <삼일정동망도> 등 8폭으로 된 일련의 금강산도이다.
문집에는 중국에서 1609년 양이증(楊爾曾)이 편집한 『해내기관(海內奇觀)』과 같은 중국의 명산과 승경지를 설명과 함께 한 판화집과 같은 구체적인 책명이 언급되었다.
또한 강원 감사 이홍연(李弘淵)은 <묘리총도>를 보여주자 총도나 전도식이 아닌 장소마다 달리 그릴 것 등 사생(寫生)의 구체적인 묘사법 등을 언급하였다. 《영사첩》에 실린 <고군산도도>는 조속이 실제 경치를 보고 그린 점에서 주목된다. 김제 군수로 이곳에 족적(足跡)이 미쳤을 개연성이 크며 조속의 현존 유일의 실경산수화의 예가 된다.
마치 초본(草本)처럼 선묘 위주로 스케치 같이 그렸으되 높은 언덕 위에서 바다 쪽을 조망한 그림으로 포구(浦口)에 정박 중인 배들과 초옥, 그리고 파도를 배경으로 여러 섬들이 전개되었다.
처음 사생을 거쳐 초를 뜬 상태의 미완성으로 보이는 이유는 농담의 변화가 전혀 없이 고른 묵선에서 기인한 것이다.

조속은 『고씨화보(顧氏畵譜)』를 통한 남종화를 수용하였다. 고병(顧柄)이 모집(摹輯)한 『고씨화보』의 수용 측면에서 간송미술관 소장 <호촌연응도>는 주목되는 그림이다.
전칭작을 포함해 조속의 유작은 새 그림인 영모가 수적으로 많으며 그 다음이 묵매이며 산수이다. <고매서작도>는 한 마리 까치가 매화 가지에 깃든 그림이다. 여기서 매화는 어몽룡에 의해 정형화된 조선중기 묵매이다.
너른 여백, 자유롭게 뻗은 가지, 굵은 가지 가운데를 비운 비백처리, 성근 꽃 등 이는 동시대를 비롯해 후대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이어지는 양식이다. 영모의 측면이 아닌 사군자 화목에서도 중시되는 그림이다.
대지를 녹이며 새봄을 가져온 조화옹(造化翁)의 따사로운 온기를 전하는 매화꽃과 일견 무심한 듯 하나 봄을 맞이하는 듯 대춘(待春) 자세로 기쁜 손님을 마중하려는 듯 부리를 다문 까치의 진중한 자세는 양자 묘사에 있어 구별되는 농담 효과도 돋보인다.
이 그림에서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 매화와 까치 주위를 옅은 먹으로 바탕의 일부를 칠한 점과 매와 더불어 죽간(竹竿)은 나타나 있지 않으나, 하단에 담묵으로 대나무 잎을 함께 그린 점이다. 아들 조지운(趙之耘) 또한 가전화풍(家傳畵風)을 이어 영모와 묵매에 있어 부친에 방불한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다.
조속은 그림뿐 아니라 글씨에도 능하였다. 특히 초서를 잘 써 현재까지도 적지 않은 필적이 남아있는데, 《창강필적(滄江筆蹟)》(1646), 《창강묵묘(滄江墨竗)》, 《창강서첩(滄江書帖)》 (목판본)은 조속의 필적만 실린 단독 서첩으로, 조속의 글씨를 살피는데 긴요한 자료들이다.
이 가운데 《창강묵묘》는 우리나라 역대 명시 가운데 후대의 시평(詩評)에 자주 오르내렸던 칠언절구 11수를 추려 쓴 것으로, 중국의 당시(唐詩)나 송시(宋詩)를 베껴 쓰던 일이 일반화되어 있던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이다.
이는 조속의 글씨에서 조선적인 소재를 선택하고자 노력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수묵화조화에서 우리나라 고유의 정취 짙은 서정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던 조속의 작화 태도와도 일치한다


조속의 대표적인 필적 가운데 하나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다가(茶歌)>이다. 51세 되던 1645년에 쓴 가로로 긴 두루마리 글씨로, 원작은 당(唐) 노동(盧仝)의 시 「맹간의가 보내준 새 차에 사례하며 글을 쓰다(走筆謝孟諫議寄新茶)」이다.
조속의 글씨는 원대(元代)의 서예가 선우추(鮮于樞)의 초서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우추는 조맹부와 명성을 같이 한 원대의 서예가로, 초서는 오히려 조맹부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던 인물이다.
선우추의 초서는 조맹부의 연미(姸媚)한 필세에 비해 섬세하면서도 세련미를 덜어낸 단아한 필세를 특징으로 하는데, <다가>에서 보이는 군더더기 없는 말쑥한 필치는 선우추를 깊이 터득했음을 잘 보여준다.


한국 서예사에 있어 17세기는 복잡하고 다양한 여러 서풍이 혼재한 시기이다. 초서도 다양한 양상을 띠며 전개되었는데, 조속은 선우추의 초서를 수용하여 이를 조선적인 필치로 개성화시킴으로써 전래서풍과 엄연히 구별되는 서풍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조속의 글씨는 아들 조지운과 권상하(權尙夏) 등에 의해 그 명맥이 이어졌다.
이 밖에 조속은 서화감식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산견되며, 또한 우리나라 역대의 금석(金石)과 명적을 수집하여 만든 《금석청완(金石淸玩)》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금석청완》은 우리나라 금석 집첩(金石集帖)의 효시격으로, 우리나라 금석학의 토대를 놓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한국의 글,그림,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秋樹白雲圖(추수백운도)  (1) 2023.02.19
自撰墓誌銘-壙中本  (2) 2022.12.26
조지운  (0) 2022.12.25
김홍도 총석정도외  (0) 2022.10.19
남명 조식 산천재  (4) 2022.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