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복(嚴復) 論世變之極

2022. 10. 27. 09:16水西散人

엄복(嚴復) <논세변지극(論世變之極 세상변화의 빠름을 논함)>

  <논세변지극> 은 중국 근대의 저명한 사상가 엄복이 저술한 문장으로, 1895년에 발표했다. 이 해 2월부터 5월까지, 엄복은 천진의 <직보>에서 연달아 네 편의 문장을 발표했고, <논세변지극>은 그 중 한편이다. 이 글은 근대 중국에서 수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자세히 논술하였으며, 중국과 서방을 비교하며 중국인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呜呼!观今日之世变,盖自秦以来未有若斯之亟也。夫世之变也,莫知其所由然,强而名之曰运会。运会既成,虽圣人无所为力,盖圣人亦运会中之一物。既为其中之一物,谓能取运会而转移之,无是理也。彼圣人者,特知运会之所由趋,而逆睹其流极。唯知其所由趋,故后天而奉天时;唯逆睹其流极,故先天而天不违。于是裁成辅相,而置天下于至安。后之人从而观其成功,遂若圣人真能转移运会也者,而不知圣人之初无有事也。即如今日中倭之搆难,究所由来,夫岂一朝一夕之故也哉!
  아아!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진나라 이래로 이와 같이 긴급한 상황은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릇 세상의 변함은 사람들은 그 까닭을 모르고 억지로 ‘시세’라고 규정합니다. 시세가 이미 형성되면 성인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성인 역시 시세의 일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세의 일부인 이상, 시세를 몰아 그것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저 성인이라는 사람들은, 다만 시세의 경향만을 알고 그 행방을 예견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시세의 흐름을 알기 때문에 그 변화의 법칙을 따를 수 있고, 시세의 흐름을 알기 때문에 시세를 거스르지 않을 수 있으며, 그런 후에 시세를 조정하여 천하를 평안하게 합니다. 후세의 사람들은 성인이 이룬 업적을 보며 성인이 시세를 확실히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는 성인이 처음부터 그것을 바꾸지 못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중일 양국이 원수를 맺어 싸우고 그 연유를 궁구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겠습니까?

  尝谓中西事理,其最不同而断乎不可合者,莫大于中之人好古而忽今,西之人力今以胜古。中之人以一治一乱、一盛一衰为天行人事之自然;西之人以日进无疆,既盛不可复衰,既治不可复乱,为学术政化之极则。盖我中国圣人之意,以为吾非不知宇宙之为无尽藏,而人心之灵,苟日开瀹焉,其机巧智能,可以驯致于不测也。而吾独置之而不以为务者,盖生民之道,期于相安相养而已。夫天地之物产有限,而生民之嗜欲无穷,孳乳浸多,镌镵日广,此终不足之势也。物不足则必争,而争者人道之大患也。故宁以止足为教,使各安于朴鄙颛蒙,耕凿焉以事其长上,是故春秋大一统。一统者,平争之大局也。秦之销兵焚书,其作用盖亦犹是。降而至于宋以来之制科,其防争尤为深且远。取人人尊信之书,使其反复沉潜,而其道常在若远若近、有用无用之际。悬格为抬矣,而上智有不必得之忧,下愚有或可得之庆。于是举天下之圣智豪杰,至凡有思虑之伦,吾顿八紘之网以收之,即或漏吞舟之鱼,而已曝腮断鳍,颓然老矣,尚何能为推波助澜之事也哉!
  일찍이 중국과 서양이 사물을 처리하는 방식을 지적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달라서 전혀 상통할 수 없는 점은 바로 중국인들은 옛 것을 중시하여 현재의 시세를 등한시하고, 서양인은 현재로서 옛 것을 초월하려고 힘쓴다는 점입니다. 중국인들은 치세가 있으면 난세가 있고, 성세가 있으면 쇠락이 있다는 것을 하늘이 지배하는 자연의 순환으로 여기지만, 서양인들은 매일 무궁무진하게 진보하여 국가가 흥성하면 더 이상 쇠퇴하지 않을 것이며, 사회가 태평하고 창성하면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는다는 것을 학술 연구와 정치 교화의 최고 준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 중국 성인들의 마음은 “우리는 우주가 무궁무진한 보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 만약 우주를 계도한다면 기교와 지능에서 차츰 측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내버려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백성들의 생존이 서로 편안하게 하고 서로 기르는 것(相安相养)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의 물산은 한정되어 있지만, 백성들의 탐욕은 무궁무진하고, 인구는 날로 늘어나며 물산에 대한 발굴이 하루하루 확대되는 것은 결국 마침내 물자가 부족해지는 형세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산이 부족하면 반드시 다툴 수밖에 없고, 다투는 것은 사회의 안정에 있어 큰 재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멈추어야 할 곳을 알고 만족할 곳을 아는 것(知止知足)을 교육하고 감화하여 인민을 속세의 우매함 속에 안주하게 하는 것이 낫다고 여깁니다. 그러한 노동 인민은 어른을 존중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기 때문에 “춘추대일통”이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춘추대일통은 분쟁을 전면적으로 평정하는 국면입니다. 진이 병기를 녹이고 책을 불태우는 것도 분쟁을 평정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송대에 이르러서는 과거 시험을 만들면서 분쟁을 방지하는 것이 더욱 깊고 원대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봉하는 전적(典籍)을 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반복해서 깊이 그것을 연구하게 하는데, 전적의 도리는 항상 먼 듯 가까운 듯 하고, 유용한 듯 쓸모없는 듯 하는 사이에 있습니다. 기준을 세워 이러한 독서인들을 끌어들이면 가장 똑똑한 사람(上智)도 성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고, 가장 우매한 사람(下愚)도 혹 성공하는 경사가 있습니다. 그러한 연후에 온 천하의 지혜가 걸출한 사람과 조금이라도 특출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에게 팔고문의 큰 그물을 펼쳐서 그들을 포착합니다. 배를 삼킬만한 크기의 대어(유능한 인재)가 혹 빠져, 그들이 좌절을 겪고 늙어가는데, 어떻게 이것을 부채질 할 수 있습니까?



  嗟乎! 此真圣人牢笼天下,平争泯乱之至术,而民智因之以日窳,民力因之以日衰,其究也,至不能与外国争一旦之命,则圣人计虑之所不及者也。虽然,使至于今,吾为吾治,而跨海之汽舟不来,缩地之飞车不至,则神州之众,老死不与异族相往来。富者常享其富,贫者常安其贫。明天泽之义,则冠履之分严;崇柔让之教,则嚣凌之氛泯。偏灾虽繁,有补苴之术;萑苻虽夥,有剿绝之方。此纵难言郅治乎,亦用相安而已。而孰意患常出于所虑之外,乃有何物泰西其人者,盖自高颡深目之伦,杂处此结衽编发之中,则我四千年文物声明,已涣然有不终日之虑。逮今日而始知其危,何异齐桓公以见痛之日,为受病之始也哉!
  아아! 이것은 정말로 성인이 천하 사람들을 가두고 분쟁을 평정하며 화란을 없애는 지극한 술책이지만, 백성들의 지략은 나날이 열악해지고 이로 인해 인민의 힘은 나날이 쇠약해집니다. 결국 외국인과 하루의 생명(一旦之命)조차도 다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은 성인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바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주관대로 다스리고 있으니, 바다를 넘는 기선이 오지 않으며, 축지(縮地)하는 비거(飛車; 기차) 오지 않으며, 신주(神州; 중국)의 많음으로도 늙어 죽을 때까지 이족과 서로 왕래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귀한 사람들은 그저 그들의 재부를 향유할 뿐이며, 가난한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의 가난에 안주할 뿐이었습니다. 상하의 도의를 알면 질서가 분명해지고, 부드러운 겸양의 교화를 추구하면 분쟁을 멈출 수 있습니다. 재해가 비록 잦은 오지라도 그것을 메울 방법이 있고, 도적이 많더라도 토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비록 큰 치세라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백성들은 서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재앙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타나더니, 서양인들이 홀연 나타나 우리 사회로 들어와서 우리 사천 년의 전장 제도가 흐트러져 사라질 것만 같은 걱정을 할 줄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오늘에 와서야 그 병폐를 알게 되었으니, 제환공이 말한 “고통을 느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치료를 받는다.”라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夫与华人言西治,常苦于难言其真。存彼我之见者,弗察事实,辄言中国为礼义之区,而东西朔南,凡吾王灵所弗届者,举为犬羊夷狄,此一蔽也。明识之士,欲一国晓然于彼此之情实,其议论自不得不存是非善否之公。而浅人怙私,常詈其誉仇而背本,此又一蔽也。而不知徒塞一己之聪明以自欺,而常受他族之侵侮,而莫与谁何。忠爱之道,固如是乎? 周孔之教,又如是乎?
  무릇 중국인과 서양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흔히 그 본질을 설명하기 어려워서 고생스럽습니다. 중국과 서방의 서로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사실을 잘 살피지 않으며, 중국은 예법과 도의를 중시하는 곳이지만, 동남 서북은 우리 왕조의 위령(威灵)이 도달하지 않는 오랑캐의 땅이라 말하니, 이것이 제 1의 폐단입니다. 도리에 밝고 식견이 있는 사람으로서, 중국과 서방 서로의 실정을 온 국민이 객관적으로 보려면, 그의 평의는 부득불 시비와 좋고 나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공정한 평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얄팍한 사람이 사리사욕을 고집하여, 뜻 있는 선비를 책망하며, 원수를 미화하고 뿌리를 저버리는 일을 삼으니, 이 또한 하나의 폐단입니다. 자신을 속이는 잔꾀에 안주해 다른 이들의 모욕을 당하는 줄 모르니, 충성과 인의의 도의가 본래 이런 것입니까? 주공과 공자의 교화가 또 이와 같단 말입니까?


  公等念之,今之夷狄,非犹古之夷狄也。今之称西人者,曰彼善会计而已,又曰彼擅机巧而已。不知吾今兹之所见所闻,如汽机兵械之伦,皆其形下之粗迹,即所谓天算格致之最精,亦其能事之见端,而非命脉之所在。其命脉云何?苟扼要而谈,不外于学术则黜伪而崇真,于刑政则屈私以为公而已。斯二者,与中国理道初无异也。顾彼行之而常通,吾行之而常病者,则自由不自由异耳。
  여러분들께서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의 오랑캐는 옛날의 오랑캐와 같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 서양사람들을 보기를, 단지 계산에 능하고 기교를 부리는 데 능한 줄로만 알고 있지만, 내가 지금 보고 들은 바로는 서양문명의 지엽말단에 지나지 않으니, 곧 이른바 쳔문역산과 자연과학에 가장 능통하다는 것은 그들이 잘하는 일의 단초일 뿐, 그것이 (서양문명이 융성하는) 관건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관건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핵심만 이야기하자면, 학술 연구에서는 과학을 숭상하고, 형법과 정령에서는 사적인 것보다 공적인 것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중국이 정책을 처리하는 방도와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항상 성공적으로 운용되고 우리가 실패하는 까닭은, 저들은 자유롭고 우리는 자유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夫自由一言,真中国历古圣贤之所深畏,而从未尝立以为教者也。彼西人之言曰: 惟天生民,各具赋畀,得自由者乃为全受。故人人各得自由,国国各得自由,第务令毋相侵损而已。侵人自由者,斯为逆天理,贼人道。其杀人伤人及盗蚀人财物,皆侵人自由之极致也。故侵人自由,虽国君不能。而其刑禁章条,要皆为此设耳。中国理道与西法自由最相似者,曰恕,曰絜矩。然谓之相似则可,谓之真同,则大不可也。何则?
  무릇 자유라는 것은 실로 중국의 역대 성현들이 두려워한 것으로, 일찍이 교육하지 않던 것입니다. 저 서양인들이 말로는, 하늘이 사람을 낳음에 하늘이 주는 권리를 제각기 가지게 하고, 자유를 얻은 사람이 온전하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은 개인의 자유를 얻고, 각국은 각국의 자유를 얻었으며, 서로 침략하여 해를 끼치지 않도록 힘을 쏟았습니다.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며 인륜의 도덕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살인, 상해, 절도의 행위는 모두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한 나라의 군주라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법령과 금령, 장정과 조례가 모두 대체로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중국의 윤리 도덕 관념과 서구의 자유 관념이 가장 유사한 점은 바로 용서와 법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가하나 그들이 진짜로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어째서입니까?


  中国恕与絜矩,专以待人及物而言。而西人自由,则于及物之中,而实寓所以存我者也。自由既异,于是群异丛然以生。粗举一二言之:
중국인의 용서와 법도는 다른 사람을 대우하고 사물을 접하는 데만 특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인의 자유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실상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자유에 대한 이해가 다른 것은 중국과 서방 간에 상당히 다른 부분에서 차이를 낳습니다. 대략 몇 가지만 들어서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则如中国最重三纲,而西人首明平等;中国亲亲,而西人尚贤;中国以孝治天下,而西人以公治天下;中国尊主,而西人隆民;中国贵一道而同风,而西人喜党居而州处;中国多忌讳,而西人众讥评。其于财用也,中国重节流,而西人重开源;中国追淳朴,而西人求欢虞。其接物也,中国美谦屈,而西人务发舒;中国尚节文,而西人乐简易。其于为学也,中国夸多识,而西人尊新知。其于祸灾也,中国委天数,而西人恃人力。若斯之伦,举有与中国之理相抗,以并存于两间,而吾实未敢遽分其优绌也。(하략)
  예를 들어 중국인은 삼강오상을 가장 중요시하고, 서양인은 평등을 먼저 강조합니다. 중국인은 친족을 가장 중요시하고, 서양인은 현자를 숭상하며, 중국인은 효도에 의지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반면, 서양인은 공(公)에 의하여 천하를 다스리고, 중국인은 군주를 숭상하는 한편, 서양인은 민권을 중시하고, 중국인은 정령이 일치하고 풍속이 일치하는 것을 중요시하지만, 서양인은 무리를 지어서 모여 살면서 각기 자신들의 정치를 하는 것을 좋아하며, 중국인들은 금기시하는 것이 많은 반면, 서양인들은 풍자적으로 비판합니다. 재화의 사용에 관련해서는, 중국인은 절약을 중시하지만, 서양인은 수입의 증대를 중시하며, ... 사물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중국인들은 겸손하고 자기 생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찬미하는 한편, 서양인들의 주장은 직접적입니다. 중국인들은 번잡한 예절을 숭상하는 반면 서양인들은 간이함을 숭상합니다. 학문에 있어서도 중국인들은 박식을 자랑하고 서양인들은 혁신적인 사람을 존경합니다. 재앙에 대처함에 있어서도 중국인들은 하늘에 맡기는 반면 서양인은 사람의 힘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이러한 예시는 중국의 도덕 윤리와 서로 어긋나지만 나는 그 둘 사이에서 감히 그들의 우열을 가릴 수 없습니다 ...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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