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협 - 식암집서息菴集序

2022. 10. 26. 23:06水西散人

息菴集序

근대 문장가 중 대가, 계곡과 장유
國朝近世文章 最推谿谷澤堂爲作家 余嘗妄論二氏之文 以謂谿谷近於天成 澤堂深於人工 比之於古 蓋髣髴韓柳焉

이후의 걸출한 인물 식암 김석주
二氏以後 作者多矣 然其能追踵前軌 卓然名世者亦少 最後乃始得息菴金公焉 公之文 雖天成不若谿谷 而人工所造 殆可與澤堂相埒 乃其瑰奇泬㵳之致 鼓鑄淘洗之妙 則又獨擅其勝云

조선의 문장이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와 그 원인
蓋嘗謂我東之文 其不及中國者有三 膚率而不能切深也 俚俗而不能雅麗也 冗靡而不能簡整也 以故其情理未晢 風神未暢 而典則無可觀 若是者 豈盡其才之罪 亦其所蓄積者薄 所因襲者近 而功力不深至耳

식암이 우뚝한 이유와 문장의 특징
公旣才素高 於學又甚博 而尤好深湛之思 鑱畫之旨 自少攻詞賦 已能一掃近世陳腐熟爛之習 而自刱新格 每試輒驚其主司 而一時操觚之士 競相慕效 以求肖似 及其爲古文辭 上溯秦漢 下沿唐宋 以放於皇明諸大家 參互擬議 究極其變 用成一家言 大抵本之以意匠而幹之以筋骨 締之以材植而傅之以華藻 卒引之於規矩繩墨 森如也 章箚 尤精覈工篤 其指事陳情 論利害辨得失 能曲寫人所不能言 往往刺骨洞髓 而要不失古人氣格 詩律亦沈健而麗絶 不作浮聲慢調

인공미에 있어선 최상이었지만 공무를 맡아 많이 지을 순 없었던 작품들
蓋其爲稿者凡二十五卷 而試求其一篇 近於膚率俚俗而冗靡者 無有焉 嗚呼 公之於文章 其人工至到 雖謂之奪天巧 可也 而於以接武谿,澤也 其可以無愧矣 然公蚤被枋用 身總軍國之重 鉛槧之業 太半爲籌畫韜鈐所奪 卒又限以中身 不得大肆志於結撰 而其所成就 猶足以跨越一世 焜耀後來 此豈不尤難也哉

식암 집안의 안타까운 후일담과 서문을 짓게 된 배경
始公旣沒 嗣子都事道淵 用鐵字印公全稿若干本 旣行於世矣 今靈光守洪侯璛 卽公侯芭 謂公文宜百世不朽 而集無板刻 難保於傳遠 甫上官 卽鳩工鋟榟 來問序於余 余竊念自公沒未幾 己巳之禍作 都事君以憂死 夫人竄海島 室家蕩析 爲世所悲 今雖世道更化 幽枉畢伸 而公家乃無一遺胤以尸其後事 洪侯獨以舊門生 能惓惓致力於遺籍 以爲永久圖 其義良足感人 是不可無一語以相其役 且自以平生素慕公文 而又嘗辱片言之奬 顧不得一奉藝苑緖論 以爲沒世恨 今而託名卷端 以效其區區之私 實與有幸 輒敢不辭 而爲之序如此 若公事業勳伐之盛 國史自有紀 玆不具論云 -『農巖集』


해석

근대 문장가 중 대가, 계곡과 장유

國朝近世文章 最推谿谷澤堂爲作家
우리나라 근대의 문장가로는 계곡(谿谷 장유(張維))과 택당(澤堂 이식(李植))을 가장 뛰어난 작가로 꼽는다.

余嘗妄論二氏之文 以謂谿谷近於天成 澤堂深於人工
나는 일찍이 두 분의 문장을 평하기를, “계곡은 자연미에 가깝고 택당은 인공미가 뛰어나니,

比之於古 蓋髣髴韓柳焉
옛 문장과 비교하자면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과 비슷하다.” 하였다.



이후의 걸출한 인물 식암 김석주

二氏以後 作者多矣
두 분 이후로 작자가 많이 나오긴 했지만

然其能追踵前軌 卓然名世者亦少
전대 작가의 궤적을 따라 세상에 뛰어나게 이름이 난 사람은 드물다.

最後乃始得息菴金公焉
그러다가 최근 들어서야 비로소 식암 김공을 얻게 되었다.

公之文 雖天成不若谿谷 而人工所造 殆可與澤堂相埒
공의 문장은 자연미가 계곡만 못하긴 하나 인공미의 경지는 택당과 비견될 만하고,

乃其瑰奇泬㵳之致 鼓鑄淘洗之妙
아름답고 기이하며 맑고 광활한 운치와 언어를 구사하고 다듬는 절묘한 솜씨는

則又獨擅其勝云
또 독보적인 수준이다.



조선의 문장이 중국에 미치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와 그 원인

蓋嘗謂我東之文 其不及中國者有三
나는 일찍이 우리 동방의 문장이 중국 문장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였으니,

膚率而不能切深也 俚俗而不能雅麗也
경박하여 진지하지 못하고, 비속하여 단아하지 못하고,

冗靡而不能簡整也
번잡하여 간명하지 못한 것이 그것이다.

以故其情理未晢 風神未暢
그 때문에 정서와 논리가 분명하지 못하고 문채와 운치가 시원스레 펼쳐지지 못하여

而典則無可觀
법칙이 볼 만한 것이 없다.

若是者 豈盡其才之罪
이러한 것이 어찌 모두 그 재주가 짧아서이겠는가.

亦其所蓄積者薄 所因襲者近
학문을 하여 축적된 것이 적고 본받은 것이 근대의 것이어서

而功力不深至耳
공력(功力)이 깊고 지극하지 못해서일 뿐이다.



식암이 우뚝한 이유와 문장의 특징

公旣才素高 於學又甚博
공은 재주가 본디 뛰어나고 학문에도 매우 박식한 데다

而尤好深湛之思 鑱畫之旨
깊고 맑은 생각과 분명하게 구분하는 뜻을 좋아하였다.

自少攻詞賦 已能一掃近世陳腐熟爛之習
어려서부터 사부(詞賦)를 익혀 근대의 진부하고 퇴폐한 습관을 일소하고

而自刱新格
스스로 새로운 격조를 개발하였다.

每試輒驚其主司 而一時操觚之士
그래서 시험을 치를 적마다 시험관을 놀라게 하고 당대의 문필가들이

競相慕效 以求肖似
앞다투어 모방하여 그와 비슷하게 되려고 하였다.

及其爲古文辭 上溯秦漢
고문(古文)을 짓는 데 있어서는 위로 진한(秦漢)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下沿唐宋 以放於皇明諸大家
아래로 당송(唐宋) 시대까지 내려와서 명대(明代)의 대가(大家)들에 이르렀다.

參互擬議 究極其變
공은 이들을 서로 견주어 비평함으로써 문체의 변화를 철저히 연구하여

用成一家言
일파(一派)의 이론을 형성하였으니,

大抵本之以意匠而幹之以筋骨
문학적 구상을 기초로 하고 중심 뼈대를 근간으로 하여

締之以材植而傅之以華藻
무게 있는 소재로 이야기를 얽고 아름다운 수식으로 문장을 구사하며,

卒引之於規矩繩墨 森如也
마지막으로 법식과 규칙에 엄격히 맞추어 질서가 정연하였다.

章箚 尤精覈工篤
소장(疏章)과 차자(箚子)는 더더욱 논리가 정연하고 사실적이었으니,

其指事陳情 論利害辨得失
사건을 지적하고 실정을 진술하며 이해(利害)를 논하고 득실을 구분하여

能曲寫人所不能言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자세히 묘사함으로써,

往往刺骨洞髓 而要不失古人氣格
왕왕 폐부를 찌르면서도 옛사람들의 격조를 잃지 않았다.

詩律亦沈健而麗絶
그리고 시(詩)는 깊이가 있고 웅건하며 아름다웠으니,

不作浮聲慢調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한 성조(聲調)는 결코 쓰지 않았다.



인공미에 있어선 최상이었지만 공무를 맡아 많이 지을 순 없었던 작품들

蓋其爲稿者凡二十五卷 而試求其一篇
공의 유고(遺稿)는 모두 25권인데, 그중 한 편을 구하여 읽어 보니

近於膚率俚俗而冗靡者 無有焉
천박하고 비속하고 화려함에 가까운 점을 볼 수 없었다.

嗚呼 公之於文章 其人工至到
아, 공은 문장에 있어 인공미가 지극하여

雖謂之奪天巧 可也
조물주의 솜씨를 빼앗았다고 해도 무방한 정도로서,

而於以接武谿,澤也 其可以無愧矣
계곡과 택당의 뒤를 이었다고 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然公蚤被枋用 身總軍國之重 鉛槧之業
그러나 공은 일찍 과거에 급제하여 등용되어서 군무(軍務)와 국정(國政)의 중책을 담당한 까닭에,

太半爲籌畫韜鈐所奪
문장을 짓는 일은 대부분 국정을 계획하고 군사를 훈련하느라 하지 못하였다.

卒又限以中身 不得大肆志於結撰
더구나 공은 중년의 나이로 별세하여 문장을 짓는 데에 크게 힘을 쏟지 못하였다.

而其所成就 猶足以跨越一世 焜耀後來
그런데도 공의 성취는 한세상을 뛰어넘어 후세에까지 빛나기에 충분하니,

此豈不尤難也哉
이 어찌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식암 집안의 안타까운 후일담과 서문을 짓게 된 배경

始公旣沒 嗣子都事道淵
공이 막 돌아가신 뒤에 공의 맏아들 도사(都事) 도연(道淵)이

用鐵字印公全稿若干本 旣行於世矣
금속활자로 공의 전고(全稿) 약간 책을 인쇄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今靈光守洪侯璛 卽公侯芭
현재 영광 군수(靈光郡守) 홍후 숙(洪侯璛)은 공의 후파(侯芭)로서,

謂公文宜百世不朽 而集無板刻
공의 문장은 영원히 전해져야 하는데 문집의 판각(板刻)이 없어

難保於傳遠
멀리 전수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甫上官 卽鳩工鋟榟 來問序於余
그는 영광으로 부임해 가자마자 장인(匠人)을 모아 판각을 시작하고 나에게 와서 서문을 요청하였다.

余竊念自公沒未幾 己巳之禍作
내가 생각건대, 공이 별세한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년(1689, 숙종15)의 화가 발생하여

都事君以憂死 夫人竄海島
도사군(都事君)은 근심으로 세상을 떠났고 부인은 바다 속 섬으로 유배를 갔다.

室家蕩析 爲世所悲
이렇게 온 집안이 뿔뿔이 흩어지자 세상에서는 공의 집안을 가련하게 여겼다.

今雖世道更化 幽枉畢伸
이제 세도(世道)가 회복되어 억울한 죄명이 모두 풀리긴 했지만

而公家乃無一遺胤以尸其後事
공의 집안에는 뒷일을 주관할 자손이 하나도 없다.

洪侯獨以舊門生 能惓惓致力於遺籍 以爲永久圖
오직 홍후가 옛 문인으로, 정성스럽게 공의 유고에 공력을 들여 영원히 전할 계획을 하고 있다.

其義良足感人 是不可無一語以相其役
그 뜻이 실로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니, 한마디 말을 하여 그 일을 돕지 않을 수 없다.

且自以平生素慕公文
그리고 나는 평소에 공의 문장을 좋아하였고

而又嘗辱片言之奬 顧不得一奉藝苑緖論
또 일찍이 공에게 짤막한 격려의 말씀만 들었을 뿐, 문학에 관한 말씀을 듣지 못한 것이

以爲沒世恨
평생의 한이 되었다.

今而託名卷端 以效其區區之私 實與有幸
이제 책머리에 내 이름을 붙이고 내 마음을 바칠 수 있게 되었으니,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輒敢不辭 而爲之序如此
그래서 감히 사양하지 않고 이와 같이 서문을 쓰는 바이다.

若公事業勳伐之盛 國史自有紀 玆不具論云 -『農巖集』
공의 거룩한 사업과 공로는 국사(國史)에 기록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히 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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