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세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2022. 10. 18. 19:45사람과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폴세잔 -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Les Joueurs de cartes




제작시기1892년~1893년가격$250,000,000(2622억 원) )작가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

폴세잔,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캔버스에 유화 / 97×130cm



“세잔은 나의 유일한 스승이다. 물론 나는 그의 그림을 보았다.아니, 여러 해 동안 연구했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다.”-파블로 피카소



2011년 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20세기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둔 기획전을 열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정물화, 생트빅투아르 산과 함께 세잔이 아주 좋아하던 소재다. 그는 1890년대에 카드놀이를 하는 농민들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완성된 유화를 그리기 전에 드로잉과 수채화, 개별 인물 초상화도 수없이 많이 그렸다.



세잔이 인물을 이렇게 많이 넣어 그린 작품은 별로 없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도 사실 전체 장면이 완성된 것으로는 두 사람이 들어간 버전과 세 사람이 들어간 버전을 합해 딱 다섯 점뿐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파리 오르세 미술관, 런던 코톨드 미술관, 필라델피아 반스 재단 미술관에 한 점씩 있고, 나머지 하나는 그리스의 선박왕인 게오르게 엠비리코스가 소장하고 있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할 때 필라델피아 반스 재단 미술관에 있는 것과 게오르게 엠비리코스가 소장한 것은 전시하지 못했다. 반스 재단 미술관은 그림을 절대 대여해 주지 않고 게오르게 엠비리코스 역시 좀처럼 그림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천하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라도 이 그림을 빌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들을 흑백 사진으로 대체하여 전시했다.



그런데 대여조차 꺼리던 게오르게 엠비리코스가 죽기 직전인 2011년 말에 갑자기 이 그림을 팔았다. 그해 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크게 기획전을 연 것이 그림을 파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이 그림을 산 사람은 카타르 왕족이었다. 2014년 재개관하는 카타르 국립 미술관에 전시하기 위해 구매했다고 한다.

이 그림이 거래된 가격은 최소 2억 5000만 달러(2622억 원)에서 3억 달러(3147억 원)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 이전에 가장 비싸게 거래된 작품은 잭슨 폴록의 〈넘버 5〉로, 1억 4000만 달러(1468억 8000만 원)에 거래되었다. 그러니 이 그림은 2등과 거의 두 배 차이로 정상의 자리에 선 것이다.



세잔은 후기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다. 후기 인상파는 말 그대로 인상파 이후에 일어난 미술 운동 유파다. 인상파 화가들이 파리에서 한창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는 1870년대와 1880년대였다.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그 뒤를 이어 1880년대와 1890년대에 활약했는데, ‘후기 인상파’라는 이름은 사실 1910년 무렵에 붙은 것이다.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인상파 화가들이 과거의 미술과 결별하고 처음 시도한 것들을 대체로 이어받았다.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 소재를 선택한다는 점, 야외에서 직접 그림으로써 ‘덜 그린 듯한’ 느낌을 주는 점 등이 인상파와 닮았다. 하지만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인상파 화가들보다 개념적인 면이 훨씬 강했다. 이들에게는 인상파 작품이 너무 눈에 보이는 것에만 신경을 쓴 표피적인 그림으로 보였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강하게 반영했다. 반 고흐, 세잔, 고갱, 쇠라 등이 후기 인상파의 대표적인 화가들이다.



모네, 마네,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은 파리의 아카데미 화풍 전시이던 살롱 전시에서 거부당하자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여덟 번에 걸쳐 독립적인 전시회를 열었다. 세잔은 이 전시회에 세 번 참여한 뒤 1877년에 인상파 그룹과 결별하고 독자적 길을 갔다. 사실 세잔은 살롱 전시에 끼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세 번에 걸친 인상파 전시에서조차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 이후의 화가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준 대단한 역할을 했기에 ‘근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린다.



반 고흐의 그림이 화가 개인의 심리 상태가 많이 들어간 듯 뜨겁고 정열적인 것이라면, 세잔의 그림은 좀 더 이성적으로 계산된 듯한 차가운 것이다. 그리고 입체 공간을 면과 선으로 분할해 그렸기 때문에 그의 그림에서는 입체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세잔이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그린 시절은 파리 생활을 접고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간 뒤였다. 그는 엑상프로방스에서 “나는 여기에서 태어났고 여기에서 죽을 것이다”라며 소박한 이웃들을 그렸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은 농촌에서 나고 자란 세잔이 시골 이웃을 얼마나 좋아하고 존경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카드놀이는 유럽 농민들이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 나서 으레 하는 흔한 유희였다. 이미 17세기부터 서양 미술의 단골 소재였다. 세잔은 이 ‘카드놀이’라는 소재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길을 찾은 듯하다. 농민들의 투박하고 순수한 모습, 카드놀이에 열중한 자세에서 삶의 무게와 힘겨움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세잔이 이 소재에 집중한 것이 50대 초반이었으니 작가 개인에게도 진한 삶의 무게를 그려 내는 소재로 더욱 와 닿았을 것이다.



세잔은 정물화나 풍경화를 그릴 때 그림의 소재보다는 화면을 어떻게 구성하고 쪼갤지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에서도 그런 면이 보인다. 카드놀이 하는 모습 자체가 테이블을 중심으로 양쪽 대칭이 되는 구도이기 때문에 화면의 구성에 관심이 많은 세잔에게 더없이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등장하는 그림을 별로 그리지 않던 그가 유독 이 소재에는 집중할 수 있었다.



세잔은 “옛것을 버리지 않고 유지하며 늙어 가는 이들의 모습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에 등장하는 인물들, 즉 이웃 농민들의 모습을 한 사람씩 따로 많이 그렸다.



피카소가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세잔은 시대를 앞서 간 화가였지만, 정작 그 자신은 역설적으로 옛것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과거 미술 스타일과 결별하는 새로운 그림으로 피카소와 이후 추상 미술에 큰 영향을 준 세잔이 한편으로는 과거와 전통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그림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구매자들 이야기다. 사실 이 그림의 거래가 알려져 진짜 정상의 자리에 오른 것은 이 그림의 구매자인 카타르 왕족이다. 카타르는 이슬람 왕족이 통치하는 인구 180만 명의 작은 중동 국가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알고 보면 대단한 나라다. 방대한 양의 천연가스와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자원 부국이다. 2012년 기준 1인당 국민 소득이 10만 4655달러(1억 1000만 원)로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부유하다. 중동을 대표하는 방송사인 알자지라의 본사가 있고, 2008년에는 이슬람 미술관, 2010년에는 아랍 근대 미술관이 들어서며 중동 지역의 문화적 허브로 부상했다. 2022년 월드컵 유치국이기도 하다. 이 카타르가 2000년대 들어 세계 미술 시장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는데,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입증한 것이 바로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거래였다.



인상파(Impressionism)

19세기 후반기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경향으로, 이후 서양 미술에서 화가의 주관적이고 자유로운 표현이 한층 성장하면서 다양한 미술 사조가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1874년 인상파 화가들의 첫 전시에서 모네가 그린 〈인상, 해돋이〉라는 그림을 보고 프랑스의 미술 평론가인 루이 르루아가 ‘인상주의자들의 전시’라고 비꼬는 것에서 ‘인상파’라는 말이 비롯되었다. 해 뜨는 바다 풍경을 그린 〈인상, 해돋이〉는 햇살이 부서지는 바다 표면, 노 젓는 뱃사공, 배, 하늘 등을 짧게 툭툭 치듯 느슨한 붓질로 느낌만 쓱쓱 표현한 그림이었다.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피사로, 모리조, 드가 등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은 이와 같이 붓을 쓰는 방법이 느슨했으며, 형상을 또렷하고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이런 화풍은 당시 파리 분위기에서 ‘정통’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파리에서 열리던 아카데미 화풍의 국가 공인 전시인 살롱 전시에서도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은 받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 화가들은 1874년부터 1886년까지 12년 동안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전시를 8회에 걸쳐 열었고, 첫 전시에서 ‘인상파’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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