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안(謝安) 세설신화

2022. 9. 22. 19:24사람과사람들


◈ 백성의 편에 선 사안(謝安 320 ~ 385)


사안(謝安)은 동진시대(東晉時代) 중기의 정치가로 자는 安石으로 河南省 출신이다. 처음에는浙江省 會稽의 莊園에서 王羲之등과 유유자적하다가 40세에 출사하여 尙書僕射, 司徒, 太保등을 지냈다.
원래 陳郡 謝氏 謝安은 名門大族이 아니었으나, 謝安의 조부 謝衡이 西晉때
國子祭酒를 지낸 뒤로 西晉과 東晉의 교체시기에 謝衡의 아들 謝鯤과 謝鯤의

73) 《世說新語》 賞譽편 제62조.



아들 謝尙을 거치면서 점점 가문을 형성하였으며, 계략으로 군벌 ‘桓溫’의 찬탈
을 저지하는 동시에 조카인 謝玄74)을 기용하여 前秦 符堅의 대군을 淝水의 싸
움에서 격퇴하는 등 東晉왕조에 이바지하였다. 이에 謝氏집안은 東晉 제일의
名門大族이 되었다.

謝安은 《世說新語》에서 등장회수가 총 115회로 가장 많으며, 품평회수는 44회, 피품평회수는 14회이며 품평의 경우 대부분 好評을 했다.

사혁(謝奕)이 섬(剡)의 현령으로 있을 때, 한 노인이 법을 어겼다.
그래서 사혁이 독한 술로써 그를 벌주었는데, 이미 과도하게 취했
는데도 그만 두지를 않았다. 동생 태부(太傅 : 謝安)는 그때 나이
가 7‧8살쯤 되었는데, 푸른 바지를 입고 형의 무릎가에 앉아 있다
가 간언하길 : “형님! 노인네가 정말 불쌍합니다. 어찌 이렇게까
지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사혁이 이에 용모를 가다듬으며
말하길 : “동생아! 그를 놓아주고 싶으냐?”라고 하고 마침내 그를
보내주었다.

(謝奕作剡令, 有一老翁犯法, 謝以醇酒罰之, 乃至過醉, 而猶未己. 太傅時年七‧八歲, 箸靑布絝, 在兄膝邊坐, 諫曰 : “阿兄! 老翁可念, 何可作此?” 奕於是改容曰 : “阿奴欲放去邪?” 遂遣之.)75)

謝安은 謝奕의 동생인데, 집안 대대로 학덕이 있었다. 謝安은 사물의 이치에
널리 통달했으며 온아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녔다. 그가 4살 때 桓彝가 보고
칭찬하여 말하길 : “이 아이는 風骨이 뛰어나므로 틀림없이 王東海(王承)의 뒤
를 이을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安年四歲時, 譙郡桓彝見而歎曰, “此兒風神秀
徹, 後當不減王東海.”)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謝安의 기질과 성품은 어려서부터
주위의 인정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공(謝公 : 謝安)이 재상으로 있을 때, 병졸과 하인들이 도망가서 대부분 가까운 남당(南塘) 아래의 여러 선박 속에 숨었다.


74) 謝玄은 자가 幼度이며 鎭西將軍 謝奕의 셋째 아들이다. 지혜가 명민하여 현담에 능했다.
75) 《世說新語》 德行편 제33조.


어떤 사람이 일시에 수색하여 잡아들이자고 했으나, 사공은 허락하지 않고서 말하길 : “만약 이러한 무리들이 놓아두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자가 계시는 도성이라 하겠소?”라고 했다.

(謝公時, 兵厮逋亡, 多近竄南塘下諸舫中. 或欲求一時搜索, 謝公不許. 云 : “若不容置此輩, 何以爲京都?”)76)

중원이 난리를 당하여 晉의 백성들이 고향을 떠나 강남으로 와서 건국한 때
부터 호족들이 토지를 겸병하여, 어떤 유민들은 유랑하면서 호적에도 오르지
못했다. 太元 연간에 밖으로 강성한 氐羌族을 막아내고 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三吳77)지방은 특히 철저히 하여 그 호구제도를 바로 잡았다. 그 중에는 당시
강산에 은둔하면서 도성을 왕래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後將軍 謝安은 당시 이
러한 유민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謝安과 같이 있는 자리
에서 도망친 자를 숨겨주는 죄를 마땅히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謝安은 언제
나 후덕한 정치로 백성들을 감화시켰으며 번거롭고 자질구레한 일은 덮어두었
다. 또한 강성한 외적이 침입해 와도 민심을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왕우군(王右軍 : 王義之)이 사태부(謝太傅 : 謝安)와 함께 야성(冶
城)에 올랐는데, 사태부는 유연히 고원한 생각에 잠겨 세속을 초
탈한 뜻이 있었다. 왕우군이 사태부에게 말하길 : “하우(夏禹)는
왕사(王事)에 진력하여 손발에 굳은살이 박혔고, 문왕(文王)은 저
녁 늦게야 식사할 정도로 하루 종일 한가한 겨를이 없었습니다.
지금 도서의 사방에 보루가 많이 세워져 있으니, 마땅히 사람들은
스스로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도 공허한 담론을 하느라 실무를 제
쳐 두고, 헛된 문장을 짓느라 중요한 업무를 방해하니, 아마도 지
금에 적절한 일이 아닌 듯 합니다”라고 하자, 사태부가 답하길 :
“진(秦)이 상앙(商鞅)을 등용했지만 두 세대만에 망했으니, 어찌
청담이 환난을 부른다고 하겠소이까?”라고 했다.

(王右軍與謝太傅共登冶城. 謝悠然遠想, 有高世之志. 王謂謝曰 :“夏禹勤王, 手足胼胝. 文王旰食, 日不暇給. 今四郊多壘, 宜人人自效. 而虛談廢務, 浮文妨要, 恐非當今所宜.” 謝答曰 : “秦任商鞅, 二世而亡, 豈淸言致患邪?”)78)

76) 《世說新語》 政事편 제23조.
77) 會稽, 吳興, 丹陽을 말함.


위 문장에서는 王羲之와 謝安 두 사람의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王羲之는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여 역사적 사실을 인용해 완곡하게 건의하였으나 謝安은
유유히 세속을 초월한 태도로 역시 역사적 근거로 秦이 망한 것은 淸談이 아니
라고 하며 淸談을 옹호하고 있다. 그 이유는 왕실의 권위와 豪族간의 세력균형
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淸談에 심취하고 후덕한 정치
를 하여 호족과 왕실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사공(謝公 : 謝安)이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잠시 후 사현
(謝玄)이 회수(淮水)에서 보낸 사신이 도착했다. 서찰을 다 보고
나서 묵묵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바둑판을 향했다. 손
님이 회수에서의 승패를 물었더니, 대답하길 : “조카들이 적을 대
파했다는군요”라고 했다. 안색이나 행동거지가 평상시와 다름 없
었다.
(謝公與人圍棊, 俄而謝玄淮上信至. 看書竟, 黙然無言, 徐向局. 客問淮上利害, 答曰 : “小兒輩大破賊.” 意色擧止, 不異於常.)79)

前秦(351-394)은 氐族의 苻氏가 세운 정권이었으므로 苻秦이라고도 한다. 이
때의 황제는 苻堅으로 영특하고 후덕했으며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
고 있었다. 일찍이 苻堅은 서울에 볼모로 잡혀가 성장했기 때문에 중국적 교양
이 풍부했으며, 그가 황제에 올랐을 때에는 이전의 황제들이 취했던 이민족 말
살 정책은 기피했으며 오히려 鮮卑, 羌, 羯, 匈奴 등 여러 민족의 지도자를 중
용하는 한편 한족 출신의 정치가나 장군까지도 요직에 기용하였다. 그가 내세
운 대안은 바로 여러 민족을 단결시켜 천하가 마치 한 집안처럼 생활하는 국가
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長安 사람 王猛80) 을 중용하여 재상에
임명하고 국정을 위임하였다. 王猛의 字는 景略으로 北海 출신이다.
78) 《世說新語》 言語편 제70조.
79) 《世說新語》 雅量편 제35조.
80) 王猛은 중국 前晋의 재상으로 苻堅의 초빙을 받고 中書侍郞이 된 후, 峻嚴하게 정치를 하여 苻堅으로 하여금 후고의 염려를 없게 하였다.


정치와 군사가로서의 재능이 있었으며 東晋의 장군 桓溫이 東晋에 와서 벼슬할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王猛은 苻堅에 중용되어 前晋을 부흥시켰고 횡포 胡族을 즉시 처형하는 과감한 정치와 교육의 진흥, 수리 시설 개발, 농업 등
부국강병에 힘써 이민족의 영토는 더 이상 늘지 않았다. 이에 東晋은 압력을
받게 되었고 오직 東晋과 대치한 나라는 前晋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
히도 375년 前晋의 승상인 王猛은 病死를 하였다. 유언으로 東晋과 대치하지
말고 異民族의 세력을 누르도록 권고했다. 하지만 苻堅은 욕심을 내어 천하통
일의 군주가 되고 싶었다.

많은 중신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했지만, 慕容垂와 姚萇과 함께 보병 60여 만,
기병 27만 등 막대한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여 淮水81)에 도달하여 무사히 강을
건너 끝내는 그 支流인 淝水82)을 사이에 두고 東晋軍과 대진하게 되었다.
처음 符堅이 남으로 침공해 왔을 때 도성이 크게 동요했다. 그러나 당시 東
晋의 재상 謝安은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수레를 준비하라고 명하여 별장으로
나가 형의 아들 謝玄과 함께 바둑을 두었다. 그 날 밤에 돌아와 곧장 符堅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였으며 심사숙고 끝에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그의 동생 謝石을 토벌 대장군, 그의 조카 謝玄을 선봉장에 임명하는 한편 그
의 아들 보국 장군 謝琰까지도 종군시켜 도합 8만이 일치단결하여 前晋군을 맞
아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적극적인 공격을 취했다. 또 廣陵에 주둔하는
정예 부대, 이른바 北府군을 출동시키고 劉牢之가 사령관을 맡았다. 하지만 前
晋軍은 여름이 지날 무렵부터 행동을 개시했으므로 淝水까지 오는 동안 더위로
많은 병사들이 병을 앓고 의기가 저하되었으며 혼합 민족 군대였으므로 民族愛
같은 것이 없어 3개월 동안의 싸움은 東晋의 승리로 끝나고 90만 대군을 거느
리고 출진했던 苻堅의 군사는 겨우 10만의 군사만이 생존하여 長安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를 淝水의 大戰(383년)이라 한다.


81) 淮水는 河南省 남부의 桐柏山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류를 합친 후 洪澤湖를 거쳐 江蘇省을 지나 대운하로 흘러 이어짐. (淮河)
82) 淝水는 중국 安徽省의 중부를 흐르는 두 강. 合肥市 북쪽의 鷄鳴山에서 발원하며,하나는 東流하여 巢湖로, 다른 하나는 北流하여 淮河로 감.

이 때 謝安은 또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淮水에서 승리를 알리는 서신을 謝玄
이 가졌는데, 謝安의 태도나 표정에서는 기뻐하는 어떤 기색도 나타내지 않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계속 바둑에 열중했다. 바로 이 故事가 그의 높은 기량을
증명해 주는 부분이다.

淝水에서 패주한 苻堅의 세력은 날로 약해지자 慕容垂와 姚萇은 苻堅을 배반
하여 그들의 세력은 날로 강해져, 결국 난을 일으켜 苻堅은 천하의 주인이 되
는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48세의 나이에 죽고, 淝水대전이 끝난 2년 후 謝安도
죽음을 맞이한다.

淝水는 지금까지는 前晋과 東晋의 국경선을 정하는 경계선이었으나 淝水의
大戰이 끝난 후 이 국경선은 중국 역사상 이 시대를 구분하는 하나의 경계선으
로서 영원히 기록되게 되었다.

지도림(支道林 : 支遁)․허(許 : 許詢)․사(謝 : 謝安)등 명현들이
모두 왕(王 : 王濛)의 집에 모였다. 사안(謝安)이 사람들을 돌아보
며 말하길 : “오늘은 가히 명사의 모임이라 할 만합니다. 시간은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으며 이 모임 역시 진실로 늘 있기 어려
우니, 마땅히 함께 담론을 벌려 마음속의 생각을 펼쳐보도록 합시
다”라고 했다. 허순(許詢)이 곧 주인에게 “『장자(莊子)』가 있습
니까?” 하고 물었더니, 마침 「어부(漁父)」 한 편을 찾아내 왔다.
사안이 표제를 보고 나서 곧 좌중의 사람들에게 각자 해석을 해
보라고 했다. 지도림이 먼저 해석하여 칠백여 언을 지었는데, 서
술이 정미(精美)하고 재기가 기발하여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이윽고 좌중의 사람들이 각자 생각을 다 피력했다. 사
안이 묻길 : “경들은 다 말씀하셨습니까?”라고 하자, 모두들 말하
길 : “오늘의 담론에서는 다 피력하지 못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라고 했다. 사안이 나중에 문제점을 지적한 뒤 스스로 자신의 생
각을 서술하여 만여 언을 지었는데, 재기넘치는 필봉이 수려하여
더 이상 건드릴 수 없었으며 게다가 의기(意氣)까지 깃들어 있어
서 흔연히 스스로 만족해 했다. 그래서 좌중에서 흡족해 하지 않
는 사람이 없었다. 지도림이 사안에게 말하길 : “당신은 일거에
핵심을 찔렀기 때문에 더욱 절로 훌륭한 것이오”라고 했다.

(支道林․許․謝盛德, 共集王家. 謝顧謂諸人 : “今日可謂彦會, 時
旣不可留, 此集固亦難常. 當共言詠, 以瀉其懷.” 許便問 : “主人有
『莊子』不?” 正得「漁父」一篇. 謝看題, 便名使四坐通. 支道林先
通, 作七百許語. 敘致精麗, 才藻奇拔, 衆咸稱善. 於是四坐各言懷畢.
謝問曰 : “卿等盡不?” 皆曰 : “今日之言, 少不自竭.” 謝後麤難, 因
自敘其意, 作萬餘語. 才峯秀逸, 旣自難干, 加意氣擬託, 蕭然自得,
四坐莫不厭心. 支謂謝曰 : “君一往奔詣, 故復自佳耳.”)83)

위에서 담론을 벌이고 있는 장소는 王濛의 집으로 여러 淸談家가 모인 자리
에서 즉석에서 주제를 선택해 각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함으로써 평소 자신의
재능과 소양을 과시하였다. 모두들 뛰어난 淸談家이지만 謝安의 재기 넘치는
문사와 의기는 좌중을 압도했다. 또한 <文學志>에서는 「謝安은 풍모가 수려
하며 玄談에 뛰어나다(安神情秀悟, 善談玄遠)」고 평했다.

특히 行書에도 능하여 戴逵와 음악과 글씨에 대해 담론하고, 顧愷之의 그림
을 평가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그의 높은 예술적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공(謝公 : 謝安)이 자제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묻길 : “『모시
(毛詩)』중에서 어느 구절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하자, 사알(謝遏 : 謝玄)이 읊길 : “‘옛날 내가 떠날 때는 버드나무
한들거리더니, 오늘 내가 올 때는 눈비 흩날리네〔昔我往依依. 今
我來思, 雨雪霏〕”’라고 했다. 사공이 말하길 : “큰 책모로 정령
(政令)을 제정하고, 원대한 계획을 제때에 반포하네〔訏謨定命, 遠
猷辰告〕. 이 구절에는 아인(雅人)의 깊은 뜻이 두루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謝公因子弟集聚, 問 : “『毛時』何句最佳?” 遏稱曰 : “‘昔我往矣,
揚柳依依. 今我來思, 雨雪霏霏.’” 公曰 : “‘訏謨定命, 遠猷辰告.’” 謂
此句偏有雅人深致.)84)


83) 《世說新語》 文學편 제55조.
84) 《世說新語》 文學편 제52조.
謝玄은 毛詩 중에서 가장 훌륭한 부분을 문학성이 뛰어난 구절로 선택한 반
면에 謝安은 謝氏 가문의 자제들에게 국가 경영의 원대한 꿈과 이상을 심어줄
수 있는 부분을 제시해 자신의 교육 목표를 밝히고 있다. 이는 儒家의 덕목으
로 자제들의 덕행을 고취시키고 家學을 전수하는데 노력하여 혼란한 정치와 왕
조가 끊임없이 경질되는 상황에 문벌을 유지, 보호하기 위함이다. 즉 교육을 통
하여 자제들이 가문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키우기 위한 儒術
인 것이다.

또, 자식을 가르칠 때도 자신이 일하는 것을 자식들이 눈으로 모두 듣고 보
는데도 본받지 않으면 엄한 훈계도 소용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몸소 실천하
여 가르치는 ‘身敎’에 중점을 둔 것으로 당시 시대정신의 반영과 걸맞게 자제들
을 하나하나를 독립된 인격으로 생각하여 존중해 주었다.

사태부(謝太傅 : 謝安)가 동산(東山)에 은거하고 있을 때, 손흥공
(孫興公 : 孫綽)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바다에 배를 띄우고 유람
했다.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렁이자, 손흥공과 왕희지(王羲之) 등
은 모두 다급한 기색을 띠면서 곧장 배를 돌리라고 소리쳤다. 그
러나 사태부는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어 시를 읊조리면서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뱃사공은 사태부가 느긋한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는 멈추지 않고 계속 갔다. 이윽고 바람이 거세지면서
파도가 더욱 맹렬해지자, 사람들은 모두 소란스럽게 움직이면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래서 사태부가 천천히 말하길 : “이
래가지고는 아마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텐데!”라고 했다. 사람들
은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즉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래서 사태부
의 기량(器量)이 충분히 조야(朝野)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謝太傅盤桓東山時, 與孫興公諸人汎海戲. 風起浪涌, 孫․王諸人色
並遽, 便唱使還. 太傅神情方王, 吟嘯不言. 舟人以公閑意說, 猶去不
止. 旣風轉急, 浪猛, 諸人皆諠動不坐. 公徐云 : “如此, 將無歸!” 衆
人卽承響而回. 於是審其量, 足以鎭安朝野.)85)

사공(謝公 : 謝安)이 동산(東山)에서 기녀들과 함께 생활하자, 간
문제(簡文帝 : 司馬昱)가 말하길 : “안석(安石 : 謝安)은 반드시
〔산에서〕나올 것이다. 이미 사람들과 함께 즐기고 있으니 또한
사람들과 함께 근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謝公在東山畜妓, 簡文曰 : “安石必出. 旣與人同樂, 亦不得不與人
同憂.”)86)

85) 《世說新語》 雅量편 제28조.
86) 《世說新語》 識鑒편 제21조.


처음 謝安은 會稽郡 上虞縣에 살면서 산림에서 유유자적하면서 문장을 짓고
철리를 분석하는 것을 스스로 즐겼다.

때론 支道林․王羲之․許詢과 함께 유람하곤 했다. 집을 나가서는 산과 강에서
고기 잡고 사냥했으며, 들어와서는 담론하고 글을 지었는데, 일찍이 세상에 나
가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없었다. 또한 宋 明帝의 文章志에 따르면 謝安은 세
상 일 밖에 마음을 놓아두고 세간의 예절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기녀들과 함
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데리고 마음대로 유람했다고 한다.

이렇게 20여 년 동안 유유자적하였으며, 6~7년 동안 여러 번 벼슬에 招徵되었
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비록 그를 탄핵하는 上奏文이 이어지고 게다가 禁錮
刑87)까지 받았지만, 謝安은 태연히 신경 쓰지 않았다.

사공(謝公 : 謝安)이 동산(東山)에 있을 때, [출사하라는] 조정의
명이 누차 내려졌으나 [사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중에 환선무
(桓宣武 : 桓溫)의 사마(司馬)가 되어 장차 신정(新亭)을 출발할
때, 조정의 관리들이 모두 나와서 [그를] 전송(餞送)했다. 당시 어
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있던 고령(高靈 : 高崧)도 전송하러 갔는데,
그 전에 얼마간의 술을 마셨기 때문에 술기운을 빌어 조롱하길 :
“그대는 누차 조종의 뜻을 어긴 채 고고하게 동산에 누워있었기
에, 사람들이 매번 말하길 : ‘안석(安石 : 謝安)이 [동산에서] 나오
려 하지 않으니 장차 백성들을 어떻게 하나?’라곤 했는데, 이제는
백성들이 장차 그대를 어떻게 해야 하오?”라고 하자, 사공은 웃기
만 하고 대답하지 못했다.

(謝公在東山, 朝命屢降而不動. 後出爲桓宣武司馬, 將發新亭, 朝士
咸出膽送, 高靈時爲中丞, 亦往相祖. 先時, 多少飮酒, 因倚如醉, 戲
曰 : “卿屢違朝旨, 高臥東山, 諸人每相與言 : ‘安石不肯出, 將如蒼
87) 禁錮刑 :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하는 형.

謝安은 약 354 ~ 360년 사이에 尙書郞․琅邪王友․吏部郞 등에 초징 되었으나 번
번이 거절하여 결국 종신토록 禁錮刑을 당함.

生何?’ 今亦蒼生將如卿何?” 謝笑而不答.)88)

그러나 桓溫이 서쪽 변방에 있을 때, 그의 훌륭한 명성을 흠모했기 때문에
조정에 상신하여 謝安을 자신의 사마로 임명해달라고 청했다. 謝安은 세상이
아직 태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천하를 바로잡고 구제하는 데 뜻을 두었고
동생 謝萬이 北征에 실패하고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린 謝氏 가문을 위해 謝萬
이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 나이 40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 직무에 응했다.
환공(桓公 : 桓溫)이 병사를 매복시켜 놓고 잔치를 열어 조정의
인사들을 널리 초청했는데, 그것을 기회로 사안(謝安)과 왕탄지
(王坦之)를 주살하려고 했다. 왕탄지가 몹시 다급해 하면서 사안
에게 묻길 : “어떤 계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소?”라고 하자, 사안
은 안색에 변함이 없는 채로 문도(文度 : 王坦之)에게 말하길 :
“진(晉) 조정의 존망이 이 한 번의 행동에 달렸소!”라고 했다. 그
리하여 함께 나아갔는데, 왕탄지는 두려워하는 모습이 표정에 그
대로 나타났지만, 사안은 늠름한 태도가 얼굴에 더욱 드러났다.
계단을 바라보고 자리로 가면서 [사안이] 낙양(洛陽) 서생의 창법
으로 “도도한 저 큰 물결이여”라는 시를 읊었다. 환온은 그의 광
대하고 심원한 기품에 주눅이 들어 곧장 복병을 해산시켰다. 왕탄
지와 사안은 예전부터 명성을 나란히 했는데, 이 일을 가지고 비
로소 그 우열을 가리게 되었다.

(桓公伏甲設饌, 廣延朝士, 因此欲誅謝安․王坦之. 王甚遽, 問謝曰 :
“當作何計?” 謝神意不變, 謂文度曰 : “晉阼存亡, 在此一行!” 相與
俱前. 王之恐狀, 轉見於色, 謝之寬容, 愈表於貌. 望陛趨席, 方作洛
生詠, 諷 “浩浩洪流.” 桓憚其曠遠, 乃就解兵. 王․謝舊齊名, 於此始
判優劣.)89)


88) 《世說新語》 排調편 제26조.
89) 《世說新語》 雅量편 제29조.
90) 두 사람 모두 어린 군주를 잘 보필하여 국사를 훌륭하게 처리했음
《世說新語》劉孝標 注의《晉安帝紀》에 따르면 簡文帝(司馬昱)가 붕어할 때,
桓溫에게 遺詔를 내려 諸葛亮과 王導의 故事90)에 따르도록 했다. 桓溫은 크게
분노했는데, 그것이 자기의 권력을 빼앗기 위하여 謝安과 王坦之가 건의한 것
이라고 생각했다. 도성으로 들어가 先帝의 國葬에 참석했을 때, 백관들은 길옆
에서 그에게 절했으며 지위와 명망이 있는 자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안색이 변
했다. 어떤 사람은 이때부터 桓溫이 王坦之와 謝安을 살해하려고 했다고도 한
다.

결국 謝安의 노력으로 桓溫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姑孰으로 돌아가 病死하
여 東晉왕조는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그 후 謝安이 널리 얻은 인심으로 수많
은 문하생들이 채용될 수 있었으며, 후덕한 정치로 백성들을 감화시켰다.

謝安은 王導 이후의 최고의 재상으로 아량이 넓고 기품이 있으며 풍격이 조화
로 왔고 그의 가슴속에 품은 생각이 매우 시원스러웠으며 문학적 자질은 물론
예술적 자질도 갖추었다.

특히 音樂, 行書, 淸談에 뛰어나 <風流宰相>으로 존경받았고 문벌세족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뛰어난 淸談 실력으로 淸談을 주도하였으며 가문의 자제들을 독립된 인격으로 존중하고 웅대한 꿈과 이상을 심어주는 교육의 장면에서 훌륭한 교육자로서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정치가로서 충성심도 엿볼 수 있고 淝水大戰을 승리로 이끈 戰術家이기도 하다.

이에 후세에 大臣의 모범이 되었으며 太傅로 추증되었다.

경희대학교 李宣和 석사학위 논문,
<世說新語>의 인물고사연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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