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路傍松

2020. 12. 1. 12:42한시

소나무바라보며

바닷바람 불어오니 솔바람 소리 비장하고
산에 뜬 달 비치니 솔 그림자 수척하네
허나 곧은 뿌리 땅 속 깊이 뻗어 있어
눈서리도 그 풍도를 다 지우지는 못하네

海風吹去悲聲壯
山月孤來瘦影疎
賴有直根泉下到
雪霜標格未全除

 

이 시는 기묘사화로 김정이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도중 해남의 어느 바닷가에 있는 소나무를 보고 지었다 한다. 시 전체가 자신을 노래하고 있는데 실제 그가 본 소나무의 모습도 꼭 이럴 것만 같다. 겨울철 거센 해풍에 의연한 소나무의 모습과 뜻을 품었지만 큰 세파에 휩쓸리고 있는 저자의 상황이 겹쳐있다. 역경 속에서 품위를 잃지 않는 정신이 돋보인다. 『대동야승』의 「김정전(金淨傳)」에는 이 시와 함께 다른 두 편의 시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다른 시들은 좀 더 구슬프고 애처로워 소개하기가 꺼려진다. 이 때 김정은 아직 한창 나이인 34세였고 이태 뒤에 제주도에서 사사되었다.

한편 23세 때 정도전이 쓴 시를 보면 이 시와는 반대의 기상이 있다. 1364년 여름 전교 주부(典校注簿)로 개경에 있을 때 지은 시이다.

푸른 소나무 길 옆에서 자라니 蒼松生道傍
자귀와 도끼질을 면할 길이 없네 未免斤斧傷
그러나 굳고 곧은 자질을 지녀 尙將堅貞質
횃불이 타는 것을 도와주네 助此爝火光
어떻게 하면 아무런 재앙 없이 安得無恙在
곧은 줄기 하늘 높이 솟아올라 直爝凌雲長
때가 와서 큰 집을 지을 때 時來竪廊廟
우뚝이 대들보 재목으로 쓰일 건가 屹立充棟樑
어느 누가 이러한 뜻을 알아 夫誰知此意
가장 높은 언덕에 옮겨 심어 줄는지 移種最高岡
「고의(古意)」,『삼봉집(三峰集)』

같은 제목 아래 거문고로 자신을 의인화한 시가 또 한 편 있는데 “지금 백아는 어디 있는가. 온 누리에 지음이 없구나.[伯牙今何在? 知音四海空.]”라는 표현을 보면 당당한 자부와 거침없는 패기가 드러나 있다. 갓 벼슬하여 세상에 뜻을 펴 보려고 하는 사람과 뜻이 꺾여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는 사람의 심경은 자연 다르고 그에 따라 보는 눈이 이처럼 다르다. 소나무를 말하였으나 사실 자신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은 50세 무렵에 한서암(寒栖庵)을 짓고 거기에 대나무, 소나무, 매화, 국화, 오이를 심고 시를 한 수씩 지었는데 소나무를 심고 지은 시가 이렇다.

나무꾼은 쑥처럼 천하게 보지만 樵夫賤如蓬
산 늙은이는 계수나무처럼 아낀다네 山翁惜如桂
푸른 하늘 높이 솟아오를 때까지 待得昂靑霄
풍상을 몇 번이나 겪어야 할 것인가 風霜幾昂靑霄
「소나무를 심으며[種松]」,『퇴계집(退溪集)』

소나무에서 시련과 극복을 보고 있지만 자못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사람의 성장을 염두에 둔 우의적 발상이다. 도연명도 저 유명한 『귀거래사』에서 “날은 어둑어둑 곧 해가 지려 하는데, 외로운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서성거리네.[景翳翳以將入, 撫孤松而盤桓.]”라고 하였고 소동파도 그의 시에서 “사람들은 모두 느릅나무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울창한 그늘이 생기기를 앉아서 기다리지만, 나는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심어 놓고, 변치 않는 이 마음을 지킨다.[人皆種楡柳, 坐待十畝陰, 我獨種松柏, 守此一片心.]”라고 하였으니, 옛 문인들이 소나무에 자신의 모습을 많이 투영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소나무가 이렇게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대상으로만 다가온 것은 아니다. 고인들이 매화를 매형(梅兄 매화 형), 대나무를 차군(此君 이 사람)이라 하였다면 소나무를 친근하게 창염수(蒼髥叟 푸른 수염을 단 노인)라 부르기도 했다.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숙기(曺淑沂)가 청허정(淸虛亭)이란 정자를 짓고 누정기를 요청해 오자 성현(成俔)이 기문을 지어 주었다.

“나는 들으니, 조후(曺侯) 는 마음을 맑게 하여 자신에게 임하고 마음을 비워 남을 대하며, 그 맑고 빈 마음으로 정무를 보기 때문에 외물의 누가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한다고 한다. 군무(軍務)를 보는 여가에 이 정자에 올라가면 소나무의 그늘이 땅에 가득 펼쳐져 있고 시원한 바람이 절로 일어나, 한적하기가 마치 산림에 은거해 있는 사람의 거처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 시끄러운 세속의 잡사를 잊을 수 있다.”

이어 시를 붙여 주었다.

정자 높고 그늘은 시원하여 亭高地爽
삼복염천도 걱정이 안 되네 不怕景炎
조후가 배를 드러내고 누워 侯臥坦腹
날마다 창염옹을 바라보리 日對蒼髥
「충청도절도사 정해진 청허정기(忠淸道節度使靜海鎭淸虛亭記)」, 『허백당집(虛白堂集)』

이처럼 소나무는 긴장을 풀고 정신을 맑게 하는 여름날의 풍취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편이 오늘날 현대인에겐 더 실감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이번 연휴에 하회의 부용대에 올라가 하회마을을 내려다보니 겸암 유운룡이 비보림으로 심었다는 솔숲이 마을 경관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난 소나무 숲은 이처럼 비보림으로 조성되어 가꾸어진 것이 많다. 소나무는 무덤이나 궁궐, 누정 등 의미 있는 인공적인 구조물 옆에 적당히 서 있을 때 특히 아름답고 숭고해 보여 자신이 본래 타고난 품위를 제대로 발산하는 듯하다. 요지연도나 십장생도 등에는 잘 생긴 소나무가 그려져 있고 동궐도엔 소나무가 잔뜩 그려져 있어 궁궐을 신선 세계로 표현하였나 하는 의심을 주기도 한다. 김홍도나 정선은 실제 소나무보다 소나무를 더 소나무답게 그려 놓았고 이인상은 소나무에 자신의 지취를 표백해 놓았다. 특히 이런 그림에 그려진 소나무는 고고한 기상과 함께 탈속적인 느낌을 준다.

세상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은자의 품위를 보여주는 당시를 한 편 소개한다. 지금에 비하면 아주 한가했을 것 같은 당나라 시대에 조용히 물러나 살려는 욕망이 이렇게 컸나 싶기도 하고 현대인의 요란한 마음을 씻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우연히 소나무 그늘 아래 와서 偶來松樹下
돌을 베고 편히 잠을 자네 高枕石頭眠
산중이라 달력도 없으니 山中無曆日
추위가 다 해도 세월 가는 줄 모르네 寒盡不知年
「남에게 답함[答人]」, 『오언당음(五言唐音)』

산중에 사니 추위가 가고 더위가 오는 계절은 대강 알아도 세속의 시간은 잘 모른다. 그 행적이 묘연한 태상은자(太上隱者)의 솜씨이다.

위에서 소개한 시들은 모두 소나무를 소재로 하고 있거나 소나무가 시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시들이다. 그러나 처한 상황과 삶을 보는 눈에 따라 같은 나무를 참으로 다양하게 인식하고 있다. 나의 소나무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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