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계집(德溪集)》 해제(解題)

2018. 10. 29. 15:26성리학(선비들)

덕계집(德溪集)》 해제(解題)


- 배운 바를 실천한 선비 출신의 관료 -
허권수 경상대학교 교수


1. 서언


《덕계집(德溪集)》의 저자 덕계(德溪) 오건(吳健)은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선비 출신의 관료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많은 선비 출신의 관료가 있었지만, 자신이 배운 바를 우직할 정도로 힘써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려서 부친으로부터 배운 가학(家學)의 바탕 위에서, 당시의 대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남명의 대표적인 제자가 되었다. 그 뒤 다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남명과 퇴계의 장점을 두루 흡수하여 갖추었다.
1572년(선조5) 남명이 서거한 뒤, 남명 문하의 장석(丈席)의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남명이 서거한 지 겨우 2년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남명의 뒤를 계승하여 남명학파에서 어떤 역할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남긴 《덕계집》은 문집 8권 4책, 연보 2권 1책, 보유(補遺) 신도비명(神道碑銘)을 합쳐 모두 5책으로 되어 있다. 1989년에 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 전신]에서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제38집으로 영인 간행해서 반포했다. 이번에 남명학연구소에서 번역하면서 이 문집총간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덕계집》을 번역 간행하면서, 그 책머리에 그의 생애와 학문, 문집의 내용과 가치를 소개하는 해제를 붙인다.
2. 전기적(傳記的) 고찰


1) 가계와 생애
덕계(德溪) 오건(吳健)은 1521년(중종16) 경상도(慶尙道) 산음현(山陰縣 지금의 산청군(山淸郡)) 덕천리(德川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강(子强), 덕계는 그의 호,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시조는 오광휘(吳光輝)로 고려 때 좌복야 상장군(左僕射上將軍)을 지냈다. 그 이후 7, 8대에 걸쳐 벼슬이 계속 이어졌다.
덕계의 5대조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오인언(吳仁彦)이 거창현(居昌縣)에서 산음현 석답촌(石畓村)으로 옮겨 왔다. 증조부 오종은(吳宗誾)이 다시 덕천리로 옮겨 와 자리 잡았다. 조부 오식(吳軾)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부친 오세기(吳世紀)는 행실과 문장이 뛰어났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모친 팔거 도씨(八莒都氏)는 증산 훈도(甑山訓導)를 지낸 도영강(都永康)의 딸이다. 부녀자의 범절에 매우 밝았으며, 덕을 베풀고 자식을 훌륭히 길렀으니, 진실로 근본이 있었다.
덕계는 어려서부터 단중(端重)하고 총명하였다. 6, 7세 때부터 부친에게 글을 배웠는데, 기한을 정하여 독촉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외우고 익히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8세가 되자, 벌써 학자다운 모습이 갖추어졌다. 문장의 뜻에 의문이 있거나 모르는 곳에서는 반드시 끝까지 의문을 파헤치고 자세히 탐구하여 의심이 사라진 이후에야 그만두었다.
11세 때 부친상을 당했다. 부친의 병세가 위급해지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하늘에 기도하며 여러 번 머리를 조아렸다. 거상(居喪)하면서 매우 슬피 울부짖어 보고 듣는 이를 감동케 하였다. 14세와 16세 때 잇달아 조부모의 승중상(承重喪)을 입었는데, 모두 예법제도에 들어맞아 어른보다 못하지 않았다. 24세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죽을 마시고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상중에도 부친의 마지막 유언을 생각하고 독실하게 공부하여, 《중용(中庸)》을 천 번 읽고 사색하였다.
18세 때 조부상을 마치고 단성현(丹城縣)에 있는 정수암(淨水菴)에 들어가 글을 읽었다. 이때부터 전후 10여 년 동안 문을 닫고 바르게 앉아 쉬지 않고 글을 읽었다. 매일 밤 《중용》을 한두 번씩 외웠는데, 비록 다른 책을 읽거나 급박할 때도 항상 이렇게 하였다. 절의 승려와 한마디 말도 나눈 적이 없었다.
19세 때 스스로 ‘궁벽한 고을에서 스스로 터득한 공부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서 구졸재(九拙齋) 양희(梁喜)와 함께 경서 뜻의 의심스러운 것을 토론하였다.
21세 때 옥계(玉溪) 노진(盧禛)이, 덕계가 경서를 궁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한 번 만나 보고자 하여 찾아왔는데, 만나자 바로 오랜 친구처럼 경도되어 논변을 한참 동안 하였다.
25세 때 계조모상(繼祖母喪)을 당했는데 예법에 따라 상을 집행하며, 조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 전후로 다섯 번의 상을 당하였는데 스스로 정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명종(明宗)이 승하하였을 때는 상이 끝날 때까지 고기를 먹지 않았다. 1년이 지난 후 집안사람들이 질병으로 인하여 그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권했으나 끝까지 먹지 않았다. 그 충성과 효성, 독실함과 중후함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아마도 특별히 넉넉하였던 것 같다.
1548년(명종3) 진사(進士) 이광(李光)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부친과 종동서 간이 되었다.
1551년 진사 초시에 합격했다. 이해 처음으로 삼가현(三嘉縣) 토동(兔洞) 뇌룡사(雷龍舍)에서 강학하고 있던 남명(南冥)을 뵈었는데, 흥기한 바가 많았다.
1552년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뒤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는데, 사대부 가운데 경술(經術)에 뛰어난 사람들과 서로 어울려 강마(講磨)하여 깊이 인정을 받았다.
1558년 문과에 급제하여 1559년 권지 성균관 학유(權知成均館學諭)가 되었다가 곧 성주 훈도(星州訓導)로 나갔다. 부임해서 성주의 유생들을 뽑아서 네 등급으로 나누어 가르쳤다. 이때 한강 정구는 소년이었는데, 덕계를 따라 배웠다.
당시 성주 목사는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었는데, 뜻이 같고 기질이 서로 맞아 주자서(朱子書)를 함께 토론하였다. 황준량은 퇴계 이황의 제자였다. 덕계는 그를 통해서 퇴계를 알게 되어 나중에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 훈도되어 득력(得力)한 바가 더욱 많았다.
1562년 병으로 성주 훈도를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뒤에도 금계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심경(心經)》과 《계몽(啓蒙)》의 의의(疑義)를 질문하였다.
1563년 43세 때 덕계는 도산(陶山)으로 가서 퇴계를 만나 뵙고 주자서의 가르침을 들었다. 그리고 《심경》과 《근사록(近思錄)》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그 뒤 서신으로 《연평답문(延平答問)》에 대해서 질의를 하였다.
1564년(명종19)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제수되었는데, 이때부터 다시 조정에 나아가서 벼슬했다. 성균관의 학정(學正)ㆍ학록(學錄)이 되어 중학(中學)을 관장하였다. 날마다 학생들을 모아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가르쳤다. 공부하는 순서에 맞게 가르치고 끌어 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계가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는 동안 그의 학문적 수준을 듣고, 그 당시 이름난 사람들이 찾아와서 주자서, 《역전(易傳)》 등을 질문하기도 하고, 혹은 《심경(心經)》, 《근사록》, 《중용》과 《대학》을 토론하였다. 이때 덕계는 관직은 낮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은 것이 이러하였다.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총애를 받던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목 베라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6년 10월에 남명이 명종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왔는데, 한강(漢江) 가에서 맞이하여 10여 일 동안 남명을 모시고 안내했으며 돌아갈 때도 한강 가에서 전송했다.
1567년(명종22) 이후로 항상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었다. 그가 역임한 관직을 살펴보면, 사간원 정언 여섯 번, 예조 좌랑 네 번, 예조 정랑 한 번, 병조 좌랑 네 번, 호조 좌랑 한 번, 공조 좌랑 두 번, 이조 좌랑 한 번, 이조 정랑 세 번,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세 번,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한 번, 사간원 헌납 한 번, 사헌부 지평 한 번, 홍문관 교리 한 번, 홍문관 부응교 한 번, 의정부 검상 한 번, 의정부 사인이 세 번이었다. 홍문관에 재임할 때는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다.
1568년 선조(宣祖)가 즉위하자, 덕계는 학문에 힘쓰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라는 상소를 했다. 퇴계를 상례(常例)에 따르지 말고 접견하라고 선조에게 건의하였다.
1570년(선조3) 8월 어사 겸 재상경차관(御史兼災傷敬差官)에 임명되어 호남(湖南) 지방을 조사하여 실태를 파악하고서, 진산군(珍山郡)의 전부(田賦)를 감면해 줄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태인현(泰仁縣)으로 가서 일재(一齋) 이항(李恒)을 만나 뵈었다. 서울로 돌아와 남쪽 지방의 세금 포탈, 군역 기피 등의 폐단을 아뢰었다. 12월에는 퇴계의 부고를 듣고 곡했다.
1571년 덕계는, 선조가 퇴계 영전에 내리는 사제문(賜祭文)을 지어 바쳤다. 또 자신이 퇴계에게 드리는 만사(挽詞)를 지었다. 7월에는 선조가 구암(龜巖) 이정(李楨)에게 내리는 사제문을 지어 바쳤다.
1572년 병으로 이조 정랑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조정에는 서로 화합이 되지 않는 과격한 논의가 점점 일어났다. 덕계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벼슬을 버리게 되었다. 그 당시의 명사들이 모두 한강 가에 나와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이때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도를 배우는 것은 평생의 뜻이요, 시대를 걱정하는 것은 조그만 정성이라네.〔學道平生志 傷時一寸誠〕”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 덕계의 도를 배우려는 뜻과 시대를 걱정하는 정성을 잘 꿰뚫어 본 것이다.
고향에 돌아와 작은 집을 짓고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연못에 연꽃을 심고 물고기를 길렀다. 연못가에 소나무를 심고 국화를 심었으며, 두류산(頭流山)의 첩첩이 쌓인 봉우리와 경호강(鏡湖江)의 천 이랑 맑은 물굽이를 일상에서 늘 마주하고 아침저녁으로 감상하였다. 다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을 하면서 평생을 보낼 계획을 했다.
덕계가 고향에 정착하니 따라 배우는 유생들이 많이 몰려들어 그들과 서로 학문을 익히고 토론하였다. 선조의 소명(召命)이 계속 내려왔으나 병을 핑계 대고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에 내린 벼슬은 사헌부 장령 한 번, 집의 세 번, 의정부 검상 한 번, 사인(舍人) 여섯 번, 홍문관 전한 두 번, 응교, 성균관 사성 두 번, 직강(直講), 사예(司藝), 장악원 정, 종부시 정(宗簿寺正)이었다. 1년 남짓한 기간에 20번이나 관직에 제수했으니, 선조가 얼마나 간절하게 덕계를 필요로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덕계는 당쟁의 조짐이 이는 조정 관원들의 태도를 보고 출사(出仕)를 굳게 거절하였다. 이는 스승 남명이 출처대절(出處大節)을 극도로 중시한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덕계가 2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남명이 2월에 서거하였다. 4월에는 제자들이 모여서 남명의 장례를 치렀다. 덕계는 남명의 서거를 애도하는 만사(挽詞)와 제문을 지었다.
1574년(선조7) 3월에 옥계(玉溪) 노진(盧禛)과 함께 함양(咸陽) 청야사(淸野寺)에서 주자서(朱子書)를 강론하였다.
7월 7일에 병을 얻어 24일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4세였다. 고을 사람들이 목 놓아 울고 사림(士林)들이 서로 조문하였으며, 조정의 관료들도 놀라며 애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덕계의 병이 위독해지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각재(覺齋) 하항(河沆), 이인개(李仁愷), 이인제(李仁悌)가 처음부터 끝까지 간병하였고, 옥계는 날마다 자제들을 보내어 문병했고, 산음 현감 이원상(李元常)은 아침저녁으로 와서 문안했다. 경상 감사도 의원을 보내어 약을 조제하도록 했다.
한양(漢陽)에 있던 동료인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약포(藥圃) 정탁(鄭琢),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서천(西川) 정곤수(鄭崑壽) 등 수십 명이 각자 면포(綿布)를 내어 사람과 말을 고용해 한양의 의원을 보내 병을 진맥하고 약을 쓰게 했다. 그러나 그 의원이 도착하기 전에 덕계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덕계가 그 당시 사류(士類)들의 중망(重望)을 얼마나 많이 입고 있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10월 1일 선영의 남쪽에 안장하였다. 당시 월정 윤근수가 경상 감사였는데, 산음 현감과 함께 장례를 후하게 도왔다.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가 윤근수의 후임 감사로 와서 덕계의 비석을 만들었으나, 미처 세우지는 못하고 묘 앞에 묻어 놓았다.
1606년(선조39) 제자 한강(寒岡)이 여러 선비들과 함께 산음(山陰) 읍치(邑治) 북쪽 10리 되는 서계(西溪) 가에 서원을 세웠다. 1624년(인조2)에 위패를 봉안했고, 1677년(숙종3)에 사액(賜額)을 받았다.
그러나 덕계는 사후 증직(贈職)이나 시호(諡號)를 받지 못하였다. 그 인물의 비중에 비해서 관직이 낮았으므로, 후세의 관심을 크게 받지 못했고, 위상도 높지 못했다.


2) 사우관계(師友關係)와 성학(成學)과정
덕계는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덕계가 남명을 처음 만난 것은 31세 때였고, 퇴계를 처음 만난 것은 43세 때였다. 남명이나 퇴계에게 의문나는 것을 질문하고 학문의 바른 방향을 제시받은 것이지, 구체적인 학문의 체재는 그 이전에 다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6세 때부터 부친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여 《대학》ㆍ《논어》 등의 책을 읽었는데, 11세 때 아버지가 별세하였다. 부친이 별세하면서 “네가 어디서 학문을 하여 사람이 되겠는가.”라고 하여, 덕계가 장차 학문을 이룰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14세 때 조모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었는데, 의지할 데가 없어 배움의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부친이 임종 때 걱정하던 말을 매번 생각하면서 구슬피 탄식하였으나, 곤궁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스승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집안의 책을 찾다가 낡은 《중용》 한 책을 얻게 되었는데, 단정히 앉아서 그 소주(小註)까지도 다 읽었다. 밤낮없이 천 번을 읽으니 구두(句讀)가 어느덧 익숙해졌다. 처음에 글의 의미를 찾아낼 적에는, 한 자 한 구절에서 실마리를 찾아 분석했는데 시간을 들여 외우고 생각하니 캄캄하던 것이 열리고 의심되던 것이 사라져 마침내 환하게 드러나서 훤히 관통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방법을 《논어》나 《맹자》 등 다른 책에다 적용하니, 단칼에 대나무가 갈라지듯 이해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14세 때 진사인 외숙 도양필(都良弼)에게 《주역》을 배웠다. 이때부터 여러 경사(經史)나 제자서(諸子書)를 모두 스스로 완숙하게 이해하였으며, 침잠하여 연구하니 거침없이 진보하였다.
18세 때 단성현(丹城縣) 척지산(尺旨山) 정수암(淨水菴)에 들어가 공부한 것이 전후 10여 년인데, 문을 닫아걸고 단정히 앉아 글을 읽었다. 낮에는 무릎을 움직인 적이 없고 밤에는 편안히 베개를 베고 잔 적이 없었다. 어떤 때는 낮은 목소리로 읽고 외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고요히 묵상하기도 했는데, 절의 승려와 말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것이 몇 달간 계속되기도 하였다. 경전을 연구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자득한 것이 진실로 많았다.
진사 초시에 합격한 31세 때 삼가현(三嘉縣) 토동(兔洞) 뇌룡사(雷龍舍)로 남명을 찾아뵈었다. 덕계는 남명을 따라 배우면서 발전한 바가 많았다.
32세 때 진사 회시에 합격하였고, 36세 때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 경학에 조예가 있는 사대부들과 서로 어울려 강마(講磨)했는데, 덕계는 매우 추중(推重)을 받았다.
39세 때 성주 훈도(星州訓導)로 부임하여 성주 목사로 재직하던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을 만났다. 금계는 퇴계의 제자로 학문적으로 퇴계와 많은 강론을 하여 왔다. 덕계는 금계와 뜻과 기질이 맞아 같이 주자서를 토론하였다. 주희의 글 가운데 있는 ‘주경궁리(主敬窮理)’, ‘함양(涵養)’, ‘미발전기상(未發前氣像)’ 등의 말을 더욱 깊이 음미하여 성현이 전한 뜻과 맞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덕계 자신이 지난날 힘써 공부했던 것이 오히려 ‘구이지학(口耳之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라는 점을 절감하면서, 의심나면 생각하지 않음이 없고 생각하면 터득하지 않음이 없었다. 터득하지 못하면 침식을 잊기에 이르렀으며, 터득하면 조심스럽게 삼가며 잃을까 두려워하였다.
금계가 퇴계에게 서신을 올리면서 ‘오건(吳健)이라는 사람과 함께 주자서를 강독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알리자, 퇴계가 금계에게 주는 답장에서 “들으니 오자강(吳子强)이 나를 찾아오려는 뜻이 있다 하는데, 매우 기다려지는구려. 그 사람이 능히 이렇게 분발한다니, 정말 한 번 만나 나의 막히고 인색함을 열었으면 하는데, 언제 이 소원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소.”라고 하였다. 퇴계가 덕계에게 대단히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덕계는 43세 때 드디어 도산(陶山)으로 가서 퇴계를 뵈었다. 퇴계 문하에 들어가 훈도를 받아 개발되고 힘을 얻은 것이 더욱 많았다. 이때 주자서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또 《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덕계를 두고, 퇴계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자강(子强)은 자성(資性)이 박실(朴實)한 데다 또 우리 유학에 힘쓰는 것이 간절하고 독실하니, 정말 유익한 벗이오. 귀하게 여길 바는 전에 금계(錦溪)와 서로 논의하면서 먼저 배웠던 학설에 얽매이지 않고 곧 앞의 잘못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믿는 것이오. 이 정도에 이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바요. 그러나 나의 학설에 틀린 곳이 있으면 역시 억지로 동의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익한 바가 적지 않았소.”, “《중용》과 《대학》에 대한 자강(子强)의 공부는 매우 정심(精深)하니, 이는 갑자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고요한 가운데서 체인(體認)하고 연구하여 오래 축적한 공력(功力)이 아니면, 이런 경지에 쉽게 이를 수 없을 것이오.”라고 했으니, 퇴계가 덕계의 학문을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퇴계를 만난 이후로 덕계는 식견이 더욱 진보하였고 학문도 더욱 조예가 깊어졌다. 지난날의 규모와 비교해 보면 다시 한 단계 품격이 높아진 것이다.
덕계는 퇴계에게 《연평답문(延平答問)》의 의문나는 점에 대해서 문목(問目)을 보냈고, 퇴계는 상세히 답변하였다. 이 문답은 〈연평답문질의(延平答問質疑)〉란 제목으로 《덕계집》과 《퇴계집》에 다 실려 있다.
44세 되던 해 7월 덕산사(德山寺)에 모여서 남명을 모시고 지냈다. 남명이 서신을 보내 덕계를 부른 것이다. 이때 각재(覺齋) 하항(河沆)과 유사명(柳思明)도 같이 모였다.
45세 때 서울에서 벼슬하고 있는 동안 남명의 편지를 받았는데, 덕계는 자신의 일기에 “남명 선생께서 서신을 보내 가르침을 주시어 혼미하고 게으른 것을 깨우쳐 분발시켜 주는 것이 지극하다. 비록 천리 밖에 있지만 마치 선생을 직접 대한 것 같다. 추상열일(秋霜烈日) 같아 늠연(凜然)히 머리칼이 서니 나약한 나를 일으킬 수 있도다.”라고 썼다. 비록 스승 남명과 떨어져서 지내도 서신을 통해 이렇게 절실한 감화를 받았으니, 평소 얼마나 남명에게 패복(佩服)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9월 병으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양성헌(養性軒) 도희령(都希齡), 매촌(梅村) 정복현(鄭復顯)과 함께 지곡사(智谷寺)에서 며칠 동안 남명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이계(伊溪) 김우홍(金宇弘)이 함양 군수로 있었는데, 그 아우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 와서 같이 지냈다. 덕계는 남계서원(灆溪書院)에서 옥계(玉溪) 노진(盧禛)을 만나 동강 형제와 함께 강론하였다. 덕계는 남계서원에 머무르며 옥계, 개암(介庵) 강익(姜翼)과 《연평답문(延平答問)》 및 주자서(朱子書)를 강론하였다.
46세 되던 해 1월 남명이 서신을 보내 덕계를 초청했으므로, 지곡사로 가서 남명을 만났다. 옥계와 동강도 참석하였고, 유림들이 많이 모였다. 5일 동안 머물며 남명의 가르침을 받다가 돌아왔다. 남명은 덕계가 서계(西溪)에 집을 지으려는 의도를 알고 직접 와서 둘러봤다.
51세 때인 12월에 퇴계의 부고를 듣고, 그 이듬해 3월에 만사 두 수를 지었다.


책 상자 지고 낙동강 가로 찾아뵙고서 / 負笈尋淸洛
스승으로 섬기며 강론하여 뜻 구하였습니다 / 摳衣願講求
빈집에 고요히 앉아 계신 모습 보았고 / 堂空看靜坐
넓은 강에서 모시고 배로 천천히 돌며 놀았습니다 / 江闊侍洄游
객지에서 지내며 도산을 그리워하던 날이요 / 羈枕懷山日
배를 타고 한양을 떠나가시던 때여 / 仙槎去國秋
우러러 생각해도 이제는 끝났나니 / 瞻思今已矣
길이 슬퍼하여 눈물 거두기 어렵습니다 / 長慟淚難收
〈만퇴계선생(輓退溪先生)〉


책 상자를 지고 도산서당(陶山書堂)으로 퇴계를 찾아가 제자가 되어 강의를 듣던 때를 회상하며 퇴계와의 인연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스승을 그리워해도 이제는 어쩔 수가 없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면서 아쉬움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 덕계는 남명에게 먼저 제자로 입문하여 자주 만나고 오래 배웠지만, 퇴계의 학덕을 흠모하는 마음도 대단히 간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조(宣祖)가 퇴계의 영전에 사제(賜祭)할 때 선조를 대신해서 덕계가 사제문(賜祭文)을 지었는데, 그 글 속에서 덕계는 조선 유학에 있어서 퇴계의 학문적 공적ㆍ위상ㆍ영향 등을 잘 요약하였다.


정자ㆍ주자의 바른 말씀과 / 程朱格言
공자ㆍ맹자의 정미(精微)한 뜻을 / 鄒魯微旨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여 / 硏精覃思
표면으로부터 속뜻까지 궁구하였소 / 自表究裏
함양한 것이 깊고 쌓은 것이 두터워 / 養深積厚
충실하게 스스로 터득하였소 / 充然自得
큰 일을 맡았나니 / 擔荷大事
끊어진 학문을 멀리서 이었다오 / 遠紹絶學
비록 크게 펼치지는 못하였지만 / 雖未大施
국가에 법도가 되었다오 / 表儀家國
〈사제판부사이황문(賜祭判府事李滉文)〉


정자ㆍ주자는 물론이고 공자ㆍ맹자의 학문을 정심(精深)하게 연구하여, 겉으로 드러난 뜻과 속뜻까지 다 궁구하여 주자 이후 끊어진 학문을 다시 이었다고 하였으니, 퇴계를 주희의 학문적 계승자로 평가한 것이다. 덕계가 품정(品定)한 퇴계의 학자로서의 위상이다.
2년 뒤 남명이 서거했을 때 덕계는 만사 두 수를 이렇게 지었다.


하늘을 받치는 태산 같은 기둥 / 喬岳擎天柱
황하처럼 천하에 두루 통하는 법도 / 長河緯地章
호연한 기상은 우주에 충만했고 / 浩然充宇宙
분명한 생각은 세밀한 것까지 꿰뚫었습니다 / 明了徹毫芒
나라 정사를 도우는 정승이 되지는 못했지만 / 未作調羹傅
어찌 세상 버리고 떠나는 은자가 되겠습니까 / 寧從入海襄
우리 백성들은 이미 복이 없나니 / 斯民已無祿
하늘의 뜻은 또 아득하기만 하군요 / 天意又茫茫


준엄한 절조는 사람들이 다투어 우러렀지만 / 峻節人爭仰
특별한 공부는 뭇사람들이 엿보지 못했습니다 / 奇功衆莫窺
스승 자리 과감하게 버리는 용기 가졌고 / 皐比撤來勇
불상처럼 미동도 않고 고요하게 사색하셨습니다 / 泥塑靜中思
신묘하게 깨달아 천기에 정통하였고 / 妙契天機熟
선비들의 그릇된 학문 길이 탄식하셨습니다 / 長嗟士學非
집안의 일상생활에 대한 가르침도 / 家庭灑掃訓
정말로 옛사람의 법도를 얻었습니다 / 眞得古人規
〈만남명선생(輓南冥先生)〉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흠앙(欽仰)하는 남명의 지절(志節)은 이 세상을 지탱하는 큰 기둥이었고, 남명의 언행은 세상에 두루 통하는 법도였다. 비록 나아가 정승 정도의 높은 위치는 못 맡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등진 은자는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남명이 조선의 조정에 발탁되지 못하고 죽은 것은 백성들이 복이 없어 그런 것이라는 점을 밝혀, 남명의 지절의 우뚝함과 사회적인 영향을 밝혔다. 남명이 출사(出仕)를 하지 않고 지내자 세상 사람들이 은자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덕계는 남명이 국가와 민족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덕계는 남명과 퇴계를 스승으로 모시고서 학문을 이루었지만, 그 밖에도 어릴 적의 스승인 외숙 도양필(都良弼)이 있었다.
스승을 제외하고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벗으로는 가까운 곳에 살았고, 동시대에 사환(仕宦)을 했던 옥계(玉溪) 노진(盧禛)을 칠 수 있다. 그 밖에 개암(介庵) 강익(姜翼), 각재(覺齋) 하항(河沆), 약포(藥圃) 정탁(鄭琢),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낙천(洛川) 배신(裵紳) 등인데, 대부분이 남명 문하의 동문들이다. 퇴계의 제자로는 월천(月川) 조목(趙穆),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 등과 교류가 친밀하였다.


3) 학문과 사상, 정계에서의 역할
덕계는 젊은 시절 자학(自學)으로 학문적 기초를 쌓은 뒤 남명과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고 나서 학문이 한 단계 더 발전하였다. 덕계는 학문을 이론 전개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그의 문집에는 이기심성(理氣心性)을 논하는 글은 거의 없다.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수양론적인 학문이었다. 그는 학문을 이렇게 생각하였다.


학문의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경건한 데 입각해서 생활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옛날 학자 가운데 정자(程子) 같은 경우는 “책을 읽어 의리를 밝히기도 하고, 고금의 인물을 평론하여 그 잘잘못을 구별하기도 하고, 사물에 접하여 그 마땅함과 마땅하지 않음을 판단하기도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이치를 궁구하는 일입니다. 옛날 학자 가운데 ‘주일무적(主一無適)’으로 말한 정자(程子)가 있고, ‘정제엄숙(整齊嚴肅)’으로 말한 정자가 있고, ‘상성성법(常惺惺法)’으로 말한 사양좌(謝良佐)가 있고, ‘마음을 수렴하여 하나의 사물도 용납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윤돈(尹焞)도 있습니다. 이것은 경건한 데 입각해서 생활하는 공부입니다. 이 두 단계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새의 양 날개와 같아서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없앨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원을 함양하는 것이고, 학문을 하는 데 입문하는 곳이며, 천하의 모든 일이 나오는 곳이고, 치란(治亂)과 흥망이 나누어지는 곳입니다.
〈청궁리거경차(請窮理居敬箚)〉


덕계는 학문을 크게 궁리(窮理)와 거경(居敬) 두 가지로 보았는데, 그 실행하는 방법은 모두 정자(程子) 등 선유(先儒)의 설을 따랐다. 이 두 가지는 그 가운데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세상 모든 일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그러나 덕계 자신의 학문에 대한 독창적인 견해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선유들이 내놓은 이론을 체인(體認)하여 익히려는 것이었다.
덕계는 한미한 가문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학문에 정진하고 과거에 합격하여 진발(振發)한 인물로 철저하게 현실에 바탕한 실천을 위주로 하였다. 우국연민(憂國憐民)의 사상이 그의 시문 곳곳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국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의 고통상을 걱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의 〈청간상후재이관조세전(請看霜後災以寬租稅箋)〉에서 이렇게 간언하였다.


신은 엎드려 바라건대, 위로 천시(天時)를 보고 아래로 백성의 고통을 걱정하여, 심사하여 결정하라는 명령을 특별히 늦추십시오. 이로써 곡식의 징수를 바로잡으시면 겨울에 땅을 갈고 여름에 김을 매어 백성은 곡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덜어서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면 탄식이 들판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때에 맞춰 처리하는 조치가 적당할 뿐이겠습니까. 또한 나라의 근본이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백성들이 재해를 당한 실정을 잘 파악하여 세금 징수를 바로잡으면, 백성들의 생활이 개선될 수 있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질 수 있다고 선조(宣祖)에게 경각심을 갖도록 덕계는 강하게 건의하였다.
〈교경기도관찰사김덕룡서(敎京畿道觀察使金德龍書)〉를 보면, 그의 정치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농사짓고 누에치는 것은 입고 먹는 것의 근본이니, 장려하고 독촉하여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학교는 교화(敎化)의 근원이니 사람을 키우는 데 의당 그 방법을 다해야 한다. 곤궁한 사람에게 자식처럼 혜택을 베풀어 하소연할 데 없다는 원한이 없게 해야 한다. 한미한 처지에 있는 훌륭한 사람을 드러내어 어진 인재를 버려둔다는 탄식이 없게 해야 한다. 이익을 추구하고 권세에 아부하는 사람은 쫓아낼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힘을 믿고 약자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칠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맡은 지역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신중하고 견고하게 하려고 해야 한다. 무기를 갖추는 데 있어서는 견고하고 예리하게 하려고 해야 한다. 사졸들이 백성들을 침탈하는 우려가 없게 하고, 군대는 기율을 분명히 해야 한다.


덕계는 이상적인 이론에 치우친 학자가 아니고, 현실을 아는 실천주의자였다. 그래서 현실정치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순서를 알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농상(農桑)에 힘써야 백성들이 먹고살 수 있다. 그다음에는 학교를 일으켜 교화를 펼쳐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 곤궁한 사람을 구제하고 숨은 인재를 발굴하고 세상 도덕윤리를 바로잡아야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되 군인들의 난동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고 보았다.
덕계가 호남 지방에 어사(御史)로 나가서 백성들의 하소연을 듣고 국왕에게 아뢴 계사(啓辭)에 이런 내용이 있다.


근년에는 관례로 정포(正布) 90필을 주고서 그 군역을 대신 세우니 곤궁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때에 준비하여 보낼 수 없으면 죄과를 신문하여 나무라고 처벌하며, 속전(贖錢)을 징수하는 것 또한 지독합니다. 백성의 생활이 곤란한 것이 이런 데서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공물(貢物)의 경우, 서울의 20개 관아 및 훈련원,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과 각 감영(監營)에 납부하는 것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괴롭고 버티기 어려운 것은 풍저창(豐儲倉)과 장흥고(長興庫)에 바치는 종이ㆍ유지(油紙)ㆍ돗자리, 혜민서(惠民署)에 바치는 애기풀ㆍ백복령ㆍ당귀, 내섬시(內贍寺)에 바치는 참기름, 사복시(司僕寺)에 바치는 말덕석 10개, 의영고(義盈庫)에 바치는 밀랍, 장원서(掌苑署)에 바치는 홍시ㆍ배〔梨〕ㆍ개암 등의 물품입니다.
도망간 사람의 토지는 아직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백성에게 주고서 그 세금을 받아 냅니다. 저희들은 동분서주하면서 요역(繇役)에 응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또 어찌 다른 사람의 농지를 경작하여 먹고살 수 있겠습니까. 단지 쉬운 곳을 골라서 개간할 따름입니다. 이와 같이 버려 두고 경작하지 않은 것이 8, 9년, 혹은 5, 6년, 혹은 3, 4년이 됐지만 거기에 미칠 여력이 없습니다. 혹 토지가 없는 사람은 그 땅에 농사지어 먹고살 수 있겠지만, 한 번 몇 마지기를 개간했다 하면, 여러 해 내지 않은 세금을 반드시 그 사람에게 덤터기를 씌우니, 누가 다시 그곳에 발을 들여놓아 스스로 화를 당하려 하겠습니까. 이것이 황무지가 예전 그대로인 까닭입니다.
…중략…
한 알도 입에 들어갈 것이 없는데 각종 명목의 세금이 있어,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이미 극도에 이르렀으니, 저희들은 무엇에 의지하여 생활하겠습니까.
〈어사겸재상경차관시계(御史兼災傷敬差官時啓)〉


덕계는 어사로 나가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직접 면담하고서 백성들의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국왕에게 상세히 보고하였다. 덕계 자신이 어려서 시골에서 어렵게 자랐기 때문에 농민들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이 있었던 것이다. 역대로 많은 어사들이 올린 장계(狀啓)가 있지만, 덕계의 장계처럼 백성의 입장에서 정확하고 철저하게 실상을 보고한 것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덕계처럼 원리원칙을 지키며 바르게 살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덕계가 하는 일을 두고 심하게 화를 내었다.


이미 6품직에 승진하여 청요직(淸要職)을 맡아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어, 공정한 도리를 펼치기에 힘썼다. 사람됨이 순실(淳實)하고 과감하여 일을 만나면 바로 밀고 나갔지, 돌아가거나 꺾이지 않았다. 그러자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노진(盧禛)은 덕계와 옛날부터 친분이 있었다. 덕계를 꾸짖어 “자네는 시골에서 출세해, 와서 청요직에까지 이르렀으면 자네한테는 과분한 것이다. 마땅히 몸을 사리고 조심을 해야지 어째서 멋대로 자기 의견을 고집해서 스스로 여러 사람들의 노여움을 사느냐.”라고 했다. 그래도 덕계는 고치지 않았고, 여러 사람들의 노여움은 더욱 심해졌다. 그때 임금의 뜻도 사류(士類)들에게 염증을 내었고, 속류(俗流)들의 세력이 더욱 성해져 갔다. 덕계는 어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이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권6 1장


덕계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이 배운 바대로 실행하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이다. 그러나 조정 관원들 가운데는 덕계를 이해하기는커녕 화를 내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선조(宣祖)도 바른 선비를 싫어하는 기미를 보이자, 어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덕계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뜻을 펼 수 없으면서 조정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녹만 받아먹겠다는 것이니, 시위소찬(尸位素餐)일 따름이다. 스승 남명의 출처대절(出處大節)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 그대로 조정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덕계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온 이후로 다시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일해 보겠다는 큰 뜻을 가졌지만, 현실은 뜻과 같지 않았던 것이다. 은자는 아니지만 벼슬은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점은 남명이나 퇴계나 다 마찬가지였는데, 덕계도 두 스승이 갔던 길을 따랐던 것이다.


4) 사림(士林)들의 덕계(德溪)에 대한 평가
덕계는 배운 바를 실천에 옮기려고 하여 언론이 강직했기 때문에 미워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많은 동료나 후배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약포(藥圃) 정탁(鄭琢)은 이렇게 평했다.


덕계가 시강(侍講)이 되어 경연에 입시하였는데, 강론(講論)이 정숙(精熟)하니 당시에 명망이 아주 높아졌다. 이조의 낭관(郞官)이 되어서는 인재를 쓰는 것이 구차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은 대부분 바꾸고 바로잡았는데, 판서가 간혹 꺼리는 기색을 보이기는 했으나 역시 감히 화를 내지는 못했다. 대각(臺閣)에 출입할 때는 그 당시의 소차(疏箚)가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는데, 바른 논의가 곧고 끊는 듯하여, 그 당시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를 거리끼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 가운데 혹 기뻐하지 않은 자도 많이 있었으나 공은 끝내 변하지 않았다.
《덕계집》 권7 10장, 〈덕계행장〉


덕계는 경연에 입시하여 강의도 잘했고, 이조의 정랑이나 좌랑을 맡아 공정한 도리를 펼치려고 노력했으며,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올리는 소차를 다 자신이 지었으니, 문장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정에서 자신의 소신을 변치 않은 바른 처신을 하였다고 약포가 칭찬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이렇게 평했다.


오건(吳健)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왔다. 선비들이 그가 어질다는 것을 대부분 알고 사관(史官)에 천거하였으나, 사관은 재능을 시험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오건은 나아가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내가 무엇 때문에 천고(千古)의 시비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야 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이 되어서는 공정한 도를 넓히기에 힘썼다. 사람됨이 순수하고 착실하며 과감하여 일을 만나면 곧장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건은 뜻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29 〈경연일기(經筵日記)〉 5장


오건이 돌아가자 사류들이 대부분 애석해하였다. 기필코 다시 등용하고자 하여 잇달아 시종(侍從)의 직위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고향에 가서 산 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율곡전서》 권29 〈경연일기〉 54장


덕계는 순수하고 착실하며 과감하여 공정한 도리를 넓히기에 힘쓰는 등 바르게 행신(行身)하여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는데,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니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였다. 그 뒤 20여 차례에 걸쳐 벼슬로 계속 불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율곡도 매우 아까워하고 있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자기 자제들에게 적어 준 글 가운데서 덕계를 남명과 퇴계의 문하에서 가장 우수한 제자로 쳤다. 그러나 일찍 세상을 떠나 제자를 남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덕계(德溪) 오건(吳健)이 학행(學行) 면에서 가장 우수하였다. 두 분 선생의 문하에 모두 나아가 종유(從遊)하였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후세에 전해지는 바가 없다.
《택당별집(澤堂別集)》 권15 7장, 〈시아대필(示兒代筆)〉


후세의 학자로 《덕계연보》의 발문을 쓴 노주(老洲) 오희상(吳煕常)은 덕계에 대해서 포괄적인 평을 남겼다.


이때 덕계는 남쪽 지방에서 일어났다. 깊은 학문과 곧은 지절(志節)로 조정에서 떨쳐 개연히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고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경연과 대각(臺閣)을 출입하면서 나아가서는 훌륭한 말을 다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논의가 분열되어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숨어 도(道)를 강마(講磨)하고 뜻을 구했다. 여러 번 불러도 다시 나아가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덕계선생연보발(德溪先生年譜跋)〉


유교의 이상을 실현해서 정치를 바로잡겠다는 집념을 갖고 경연과 대각 등에서 소신껏 일했지만,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덕계를 아는 모든 사우들은, 덕계를 순수하고 진실하며 과감하여 배운 바대로 실행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공정한 도리를 넓히려 노력하였고, 학문과 문장에도 뛰어났다는 평가를 했다.
3. 《덕계집(德溪集)》에 대한 고찰


1) 간행경위
《덕계집》은 원집(原集) 8권, 《연보(年譜)》 2권, 권(卷)을 이루지 못하는 보유와 신도비명을 합하여 모두 5책이다. 그러나 덕계의 시문은 그동안 많이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동강집》에는 덕계와 주고받은 서간이 3편 있으나, 《덕계집》에는 1편밖에 실려 있지 않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원집은 서발(序跋) 등이 없어 정확하게 언제 간행되었는지 알 수 없다. 1829년(순조29)에 쓴 강고(江皐) 유심춘(柳尋春)의 〈연보서문〉에 “문집이 간행된 지 100여 년이 되었다.”라고 한 기록을 볼 때, 문집은 1729년(영조5) 이전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796년(정조20) 편찬이 완성된 서유구(徐有榘)의 《누판고(鏤版考)》에 《덕계집》이 수록되어 있고, 그 주석에 “산청(山淸) 서계서원(西溪書院)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했으니, 이 책은 영조(英祖) 초기에 목판으로 간행되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연보》는 유심춘의 〈연보서문〉에 1829년에 간행된 것으로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경상 우도(慶尙右道) 지역을 대표하는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의 《겸재연보(謙齋年譜)》 1663년(현종4) 조에 “덕계(德溪) 오 선생(吳先生)의 연보를 편차(編次)하고 이어서 문집을 수정(修正)하였다.”라고 하고, 그 소주(小注)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덕계 선생에 대해서 극도로 존모(尊慕)해 왔다. 산음(山陰 산청(山淸))의 서계서원(西溪書院)은 덕계 선생을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선생은 그때 원장으로 있었다. 산음과 함양(咸陽) 두 고을의 선비들이 바야흐로 《덕계집》을 간행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선생에게 문집을 정리하고 연보를 편차해 줄 것을 요청했다.
《겸재집(謙齋集)》 부록 《연보(年譜)》 권1 35장


1663년(현종4) 《덕계집》과 《덕계연보》를 간행하는 일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 문집이 간행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고, 연보는 착수하지 않았던 것이다. 1829년(순조29) 간행된 《연보》에 《덕계집》이나 《연보》 간행에 관한 기사가 전혀 없다. 1829년 지어진 《연보》 서문과 1827년에 간행된 노주(老洲) 오희상(吳煕常) 발문에 연보가 그때 ‘처음으로 편차되어 간행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덕계연보》는 1829년 후손 오사덕(吳思德)과 이기일(李奇一) 등이 산음(山陰) 고을의 사림들과 발의하여, 여러 기록을 모아 유심춘(柳尋春)에게 편차를 부탁하였다. 유심춘은 문집에 들어 있는 강대수(姜大遂)가 지은 〈행장〉에서 사실을 연대적으로 고찰하고, 아울러 제현(諸賢)들이 기록한 실적을 모아 한 편의 초고를 만들었다. 그것을 《연보》 권1로 하고, 《덕계집》의 부록에 수록되지 않은 지구(知舊)와 제자들의 만사(挽詞)와 제문(祭文)을 모아 《연보》 권2로 편집했다. 덕계의 시 14수를 모아 《덕계집보유(德溪集補遺)》로 만들었다.
필자가 소장한 《덕계집》에는 유심춘의 글이 발문으로 되어 오희상(吳煕常)의 발문 뒤에 붙어 있다. 그 뒤에 《덕계집보유(德溪集補遺)》가 들어 있다. 유심춘의 문집 《강고집(江皐集)》 권9에도 〈덕계선생연보발(德溪先生年譜跋)〉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규장각본 《덕계연보》 첫머리에 유심춘의 서문이 붙어 있다. 권2의 26장과 27장 사이에 1896년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가 지은 〈덕계선생신도비명(德溪先生神道碑銘)〉이 4장 들어 있다. 맨 마지막 27장과 28장에 오희상이 지은 발문이 붙어 있다. 〈신도비명〉은 나중에 판각하여 끼워 넣은 것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을 대본으로 해서 영인한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에 수록된 《덕계집》과 아세아문화사 《남명집(南冥集)》 속에 함께 영인되어 있는 《덕계집》은 〈신도비명〉이 중간에 끼어 있다.
그러나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덕계집》 5책본 가운데 제4책의 7권과 8권 사이에, 규장각 소장본에는 없는 권7의 18장, 19장, 20장, 21장 등 4장이 더 들어 있다. 17장은 제2행에서 문장이 끝나 그 이후는 공백이고, 맨 마지막 행에 권7이 끝났음을 알리는 ‘덕계선생문집권지칠(德溪先生文集卷之七)’이라고 판각해 놓았다. 18장부터는 서제(書題)가 ‘덕계선생문집권지칠’로 되어 있다. 여기에 실린 글은 〈청액상소(請額上疏)〉, 〈사제문(賜祭文)〉이다. 아세아문화사영인본에도 들어 있다.


2) 문집의 내용과 가치
《덕계집》은 서문이나 발문이 없다. 본래 《주자대전(朱子大全)》이나 《퇴계집(退溪集)》 등 도학자(道學者)의 문집에는 서문이 없는 것이 정상이다.
맨 첫머리에 총목차가 실려 있다.
문집은 4책인데, 제1권에는 시, 부(賦), 표(表)가 실려 있다. 시는 체제별로 나누어 수록했는데, 오언절구 11수, 오언율시 14수, 칠언절구 67수, 칠언율시 18수, 오언배율(五言排律) 2수, 칠언장편 2수로 모두 114수이다. 문집을 편찬할 때 도학자는 시를 시대별로 배열하고, 전문 시인인 경우 시체별(詩體別)로 분류하는 것이 원칙인데, 덕계집은 시체별로 배열하여 편집되어 있다.
부는 4편, 표는 3편이다.
제2권에는 교서(敎書), 축문(祝文)ㆍ제문(祭文)이 실려 있다. 교서 2편, 축문 21편, 제문 14편이 실려 있다.
제3권에는 소차(疏箚) 6편이 실려 있다.
제4권에는 계(啓) 37편이 실려 있다.
제5권에는 사장(辭狀) 9편과 정묘일기(丁卯日記) 4개월 치가 실려 있다.
제6권에는 퇴계와 주고받은 〈연평답문질의(延平答問質疑)〉와 서신 11편, 서문 1편, 논(論) 3편, 책제(策題) 1편이 실려 있다.
제7권부터는 부록으로, 덕계가 지은 글은 아니고, 그의 사우들이 그를 두고 지은 전기자료(傳記資料)이다.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가 지은 〈행장〉, 제자들이 지은 〈행록(行錄)〉, 종제 오한(吳僩)이 지은 〈행록〉, 율곡과 각재(覺齋) 하항(河沆)이 지은 〈유사략(遺事略)〉, 약포(藥圃) 정탁(鄭琢)이 지은 〈실적대략(實跡大略)〉, 모계(茅谿) 문위(文緯)가 지은 〈서계서원춘추향사축문(西溪書院春秋享祀祝文)〉,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가 지은 〈향사축문〉이 실려 있다.
제8권 역시 부록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 사우와 제자 17명이 지은 제문 17편, 옥계(玉溪) 노진(盧禛) 등 13명의 만사(挽詞) 17수가 실려 있다.
연보는 2권 1책인데, 첫머리에 강고(江皐) 유심춘(柳尋春)의 서문이 붙어 있다. 제1권은 《연보》이고 제2권은 연보의 부록으로 성암(省庵) 김효원(金孝元) 등 사우와 제자 7명의 만사와 입재(立齋) 노흠(盧欽) 등 사우 31명의 제문 24편이 실려 있다.
《보유》에는 문집에 실리지 않은 덕계의 시 14편이 실려 있다.
그다음에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실려 있고, 맨 마지막에 노주(老洲) 오희상(吳煕常)이 지은 〈연보발(年譜跋)〉이 붙어 있다.
제1권에 실린 시는 대부분 서정적인 감회를 읊은 시가 많다. 그리고 사우(師友)들과의 교왕(交往) 등 덕계의 의식구조나 활동상황을 알 수 있는 시가 많다. 퇴계와 남명의 만사가 각각 2수가 있는데, 그의 사승관계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 남명과 관계되는 시가 2수 있다. 그 외에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 각재(覺齋) 하항(河沆), 김희년(金禧年) 등과 관계된 시가 있다. 노경린(盧慶麟), 낙천(洛川) 배신(裵紳),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등 퇴계와 남명 제자들의 작고를 애도한 만사가 있다. 또한 자신의 고향 주변의 경물(景物)을 읊은 시가 상당수 있다.
그의 시는 평이하면서도 담박(淡泊)하여 전형적인 사림파(士林派)의 시가라 할 수 있는데, 당시 현실문제와 관계된 시는 의외로 적다.
《덕계집》에 실린 중요한 문장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활수부(活水賦)〉는 주희(朱熹)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의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라는 구절을 부연해서 지은 부(賦)로, 사람의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 서술한 글이다. 덕계의 성리학적인 관점을 볼 수 있다.
〈불성무물부(不誠無物賦)〉는 《중용(中庸)》의 ‘불성무물(不誠無物)’이란 구절을 부연해서 지은 부인데, 천지만물의 운행과 사람의 언행에 있어서 ‘성(誠)’의 중요성을 강조해서 서술한 글이다.
〈금등부(金縢賦)〉는 《서경(書經)》 〈금등(金縢)〉의 내용을 부연하여 지은 부(賦)이다. 나라를 책임진 대신은 남이 알아주던 모르던 자신의 충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청간상후재이관조세전(請看霜後災以寬租稅箋)〉은 백성들이 뜻하지 않게 서리가 내려 재해를 당했으니, 백성들의 세금을 경감해 주라는 건의를 한 것인데,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의 고통상을 걱정해서 일을 결정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제2권에는 교서(敎書) 두 편이 실려 있는데, 국왕을 대신해서 지은 글로 관찰사의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사제판부사이황문(賜祭判府事李滉文)〉은 선조(宣祖)의 명으로 지은 글이지만, 퇴계의 학문ㆍ덕행ㆍ위인ㆍ출처 등을 잘 요약해서 서술하였다.
〈제남명선생문(祭南冥先生文)〉은 남명의 자품과 학행, 출처대절(出處大節), 유림에서의 영향, 자신에 대한 훈도 등을 회상하여 서술하였다. 덕계가 남명에게 얼마나 경도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글이다.
〈제황금계준량문(祭黃錦溪俊良文)〉은 덕계가 성주 훈도로 부임했을 때 목사였던 금계(錦溪)와 함께 강학하던 일을 회상하며 갑자기 돌아간 것을 슬퍼한 글이다.
제3권의 소차(疏箚)에는 덕계의 정치사상이 들어 있는 글이 많다.
〈청진학납간소(請進學納諫疏)〉는 선조가 즉위하던 해에 선조 임금을 훌륭한 임금으로 만들기 위해서 ‘학문에 힘쓰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일 것’을 건의하는 상소다. 덕계는 학문에 힘쓰기 위해서는 마음을 겸손하게 가져야 하고, 간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덕계의 충간(忠懇)이 절절하게 나타난 글이다.
〈논국혼비례소(論國昏非禮疏)〉는 조선왕조에서 시행해 오던 왕비간택의 방식이 옛날 예법에 맞지 않고 사리에도 맞지 않으니, 시정하라고 선조에게 건의하고 있다. 이는 조선의 왕비간택제도에 대해서 근본적인 개혁을 요청하는 강한 주장이다.
〈청궁리거경차(請窮理居敬箚)〉는 선조에게 공부하는 방법과 순서를 제시한 글이다.
제4권에 들어 있는 계(啓)에는 덕계의 현실정치에 대한 대처방안이 들어 있다.
〈어사겸재상경차관시계(御史兼災傷敬差官時啓)〉는 1570년(선조3) 호남(湖南) 지방으로 재해(災害) 조사를 나가 백성들의 고통상을 직접 목도하여 그 실상을 국왕인 선조에게 사실대로 아뢰고, 그에 대한 선조의 조처를 촉구한 글이다. 덕계의 연민의식(憐民意識)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논포조포졸폐막계(論逋租逋卒弊瘼啓)〉는 세금을 내지 못해 도망간 백성이나 군역(軍役)을 피해 도망간 군졸들이 내야 할 세금을 이웃이나 친척들에게 거두어 백성들을 괴롭히는 폐단을 시정해야 한다는 건의를 한 글이다. 이는 조선왕조의 장기적인 문제점이었는데, 덕계가 적나라하게 지적하였던 것이다. 이 계사(啓辭)로 말미암아 덕계는 남명으로부터 “그대 같은 사람은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소.”라는 칭찬을 들었다.
〈청출석상궁계(請出石尙宮啓)〉는 세 번 올렸는데, 간신들과 결탁하여 조정의 정치에 관여하여 해악을 끼치는 석 상궁(石尙宮)을 쫓아내라고 선조에게 건의하였다. 퇴계가 경연(經筵)에서 선조를 설득하여 덕계의 건의대로 시행될 수 있었다.
〈청물승급종친내관등계(請勿陞級宗親內官等啓)〉는 모의전(慕義殿)에 번(番)을 드는 종친과 환관들을 승급시키자, 그렇게 하는 것은 관직의 무게를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선조에게 시정을 건의한 글이다.
〈청국혼상검계(請國昏尙儉啓)〉는 왕실의 혼사를 검소하게 해서 나라의 비용을 절약할 것을 건의한 글이다.
〈청명비변사조치비어계(請命備邊司措置備禦啓)〉는 국적을 모르는 외국 선원들이 우리나라의 섬을 침범하여 약탈해 가는데도 국가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사실을 개탄하고, 비변사에서 방어대책을 세울 것을 건의하는 글이다.
제5권에 실린 사장(辭狀)은 덕계가 관직을 사임하면서 올린 글인데, 대부분이 자신의 건강 때문에 직책을 감당할 수 없어 사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나타내었다.
〈정묘일기(丁卯日記)〉는 덕계가 주서(注書)로 있을 때 쓴 일기다. 덕계의 일기는 본래 《역년일기(歷年日記)》라 하여 병인년(1566, 명종21), 정묘년(1567)의 일기가 남아 있었다. 문집에는 그 가운데서 정묘년 1월부터 6월까지의 일기만 뽑아 수록하였다. 기간도 6개월분만 수록하였고, 내용도 발췌하였으며, 문장도 산절(刪節)하여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병인년(1566, 명종21) 일기에는 남명(南冥)이 명종(明宗)의 부름을 받아 서울에 들어오는 과정부터 서울에서 활동하는 상황과 돌아가는 일정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문집에서는 채록하지 않았다.
이 일기는 비록 2년 정도의 짧은 기간의 기록이지만, 당시 임금의 동정, 조정 관원들의 활동상, 정치현안문제, 인물평 등등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율곡(栗谷)의 《경연일기(經筵日記)》,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 등과 함께 선조 초년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문집에서는 분량을 줄이기 위해서 너무 일부만 실어 아쉽다.
제6권에는 첫머리에 〈연평답문질의(延平答問質疑)〉가 실려 있는데, 《연평답문》에 대해서 덕계가 퇴계에게 질문한 문목(問目)에 대해 퇴계가 답변한 것이다.
〈여도동서원유생서(與道東書院儒生書)〉는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시호(諡號)를 받들어 내려왔던 덕계가 시호를 받들어올 때 쓰였던 능화판 비단을 도동서원에 기증하겠다는 뜻을 전한 글이다.
〈송이종숭상이학론(宋理宗崇尙理學論)〉은 송나라 이종(理宗)이 이학을 숭상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표면적으로만 숭상한 것이고, 진정으로 숭상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한 논설문이다.
4. 결어


《덕계집(德溪集)》은 비교적 체재가 잘 갖추어진 전통적인 문집이다. 남명(南冥)의 제자나 후학들은 문집의 양이 적은 데 비해서, 《덕계집》은 적지 않은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덕계집》은 남명학파(南冥學派) 및 경상 우도(慶尙右道)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조정의 정치상황 및 유림사회의 동향을 알아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 그의 언행은 학자관료의 전형이었으므로 그의 시문을 정밀하게 연구하면 한국 선비의 사고와 언행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6월 28일


[주-D001] 10월 …… 놓았다 : 
《덕계연보》 권1 〈연보〉에 나온다.
[주-D002] 부친이 …… 없었다 : 
《덕계집》 권7 〈행장(行狀)〉에 나온다.
[주-D003] 진사 …… 많았다 : 
〈덕계행장〉, 《덕계연보》 등에 모두 덕산(德山)으로 가서 조식을 찾아뵌 것으로 되어 있으나, 1551년(명종6) 당시 조식은 삼가현(三嘉縣) 토동(兔洞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뇌룡사(雷龍舍)에서 강학하고 있었다.
[주-D004] 연평답문(延平答問) : 
《덕계연보》에 《연평문답(延平問答)》으로 되어 있으나, 《연평답문》의 잘못이다.
[주-D005] 연보서문 : 
필자 소장의 《덕계연보》와 유심춘(柳尋春)의 《강고집(江皐集)》에는 발문(跋文)으로 되어 있다.
[주-D006] 1663년 …… 있다 : 
안정(安柾) 《덕계집(德溪集)》 해제, 한국문집총간 해제집 제2책.
[주-D007] 역년일기(歷年日記) : 
1987년까지도 산청군 산청읍에 사는 오건의 방손 오규환(吳珪煥) 씨가 오건 친필의 일기를 소장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행방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