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延平答問》跋

2018. 10. 29. 16:35성리학(선비들)

《延平答問》跋

《연평답문(廷平答問)》에 대한 발문

延平李先生, 挺絶異之資, 躬聖學之奧, 上承伊洛之傳, 下啓考亭之緒, 其功盛矣. 而不自著述, 故其論道講學之言, 後世罕得聞焉.

연평(延平)1) 이(李)선생은 뛰어난 자질로 성학(聖學)을 깊이 연구하여, 위로는 이락(伊洛:程子)2)의 전통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고정(考亭:朱子)의 실마리를 계발(啓發)하였으니, 그 공이 성대한데 스스로 저술(著述)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논도(論道)・강학(講學)한 말을 후세에서 드물게 들을 수 있다.

*挺[뺄 정], 絶異(절이):독특하고 비범함. 奧[속 오]:오묘(奧妙)함. 罕[그물 한]:적다. 드물다.


滉頃來都下, 始於天嶺朴希正處, 得見是書, 書凡三篇. 曰《師弟子答問》者, 晦菴夫子手編師說也. 曰《後錄》者, 後人追錄晦菴稱道師說并遺文遺事也. 曰《補錄》者, 琴川周木所編, 所以補《後錄》之未備者也.

나는 전번에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천령(天嶺)3) 박민헌(朴民獻, 字 希正, 1516∼1586)에게서 이 《연평답문》이란 책을 얻어 보았는데, 책은 모두 3편으로 《사제자답문(師弟子答問)》은 회암부자(晦菴夫子)가 손수 사설(師說)을 편찬한 것이고, 《후록(後錄)》은 후세 사람들이 회암이 칭도(稱道)한 사설(師說) 및 유문(遣文)・유사(遣事)를 추록(追錄)한 것이고, 《보록(補錄)》은 금천(琴川) 사람 주목(周木)4)이 편찬한 것으로 《후록》의 미비한 것을 보충한 것이다.

*都下(도하):도읍. 수도. 稱道(칭도):늘 칭찬해 말함.


乃告於希正, 圖所以刊行是書者, 會淸州牧李君剛而, 以事至京師, 希正亟以是囑之. 李君亦喜符宿心, 旣還州數月, 功已告完. 乃寄書徵跋文於滉.

이에 희정(希正:朴民獻)에게 알려서 이 책을 간행할 것을 도모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마침 청주목사(淸州牧使) 이강이(李剛而)5)군이 사무적인 일로 서울에 오자, 희정이 자주 이 책을 간행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李)군도 역시 오래 전부터 마음먹어 오던 일이라 기쁘게 생각하고, 그 고을에 돌아간 지 몇 달 만에 간행의 일을 이미 완성하고, 나에게 편지를 부쳐 발문(跋文)을 부탁하였다.

*會[모일 회]:공교롭게도. 때마침, 亟[빠를 극]:자주. 囑[부탁할 촉], 符[부신 부]:꼭 들어맞다. 부합하다. 宿心(숙심):평소의 생각. 평소의 희망. 徵[부를 징]:요구하다. 跋文(발문):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大綱)이나 간행과 관련된 사항 등을 짧게 적은 글.


滉自惟懵陋, 何敢贅一辭於大賢傳道之書耶. 然而是書所以刊行首末, 則與有知焉, 故不敢固辭, 而於此又有所感焉.

나는 자신을 생각함에 몽매(蒙昧)하고 고루(固陋)한데, 어떻게 감히 대현(大賢)이 도(道)를 전한 책에 한마디 말을 붙일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이 책의 간행(刊行) 전말(顚末)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기 때문에 감히 고사(固辭)6)하지 못하고 이에 또한 느끼는 바가 있었다.

*懵[어리석을 몽], 贅[혹 췌]


夫晦菴夫子, 未見先生之前, 猶出入釋老之間, 及後見先生, 爲學始就平實, 而卒得夫千載道統之傳. 是則凡晦菴之折衷羣書, 大明斯道於天下者, 皆自先生發之, 而其授受心法之妙, 備載此書.

대개 회암부자가 연평선생을 만나기 전에는 여전히 석로(釋老:佛敎와 道敎)의 사이를 드나들었는데, 뒤에 연평선생을 만나게 되면서 학문이 비로소 평실(平實)해져서 끝내는 천년토록 전하는 도통(道統)을 얻었다. 이것은 회암이 군서(羣書)를 절충(折衷)하여 사도(斯道)를 천하에 크게 밝힌 것인데 모두가 연평선생으로부터 출발된 것이고, 그 주고받은 묘(妙)한 심법(心法)이 이 책에 갖추어 실려져 있다.

*平實(평실):평탄하고 실함. 문장이 소박함. 心法(심법):마음을 성찰하고 수양하는 방법.


今驟讀其言, 平淡質愨, 若無甚異, 而其旨意精深浩博, 不可涯涘. 推其極也, 可謂明並日月, 幽參造化, 而其用功親切之處, 常不離於日用酬酢․動靜語默之際.

지금 그 말을 갑자기 읽어보면 평담질각(平淡質慤)하여 매우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으나 그 뜻은 정심호박(精深浩博)하여 범위를 엿볼 수 없다. 그 지극한 면을 추구해 보면 밝음은 일월(日月)과 맞먹고 심오함은 조화(造化)에 참여한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용공친절(用功親切)한 곳은 항상 일용수작(日用酬酢)・동정어묵(動靜語默)의 사이에서 떠나지 않는다.

*驟[달릴 취], 平淡(평담):성품이 온후하고 담박함. 평범함. 慤[성실할 각], 質慤(질각):꾸밈이 없고 진실됨. 旨意(지의):주된 뜻. 의도. 精深(정심):정밀하고 심오함. 浩博(호박):매우 넓고 번다함. 涯涘(애사):물가. 끝. 한계. 用功(용공):노력을 기울임. 친절(親切):매우 가까움. 친근함. 딱 맞음. 분명함. 酢(작):응대하다. 酬酢(수작):응대함. 대음함.


此先生靜坐求中之說, 所以卓然不淪於禪學, 而大本達道, 靡不該貫者也.

이는 연평선생의 정좌구중설(靜坐求中說)7)이 탁월하여 선학(禪學)에 빠지지 않았으며, 대본달도(大本達道)8)가 관통(貫通)되지 않은 것이 없었던 이유이다.

*淪[물놀이 륜]:빠지다. 靡[쓰러질 미]:아니다. 該貫(해관):통달함. 관통함.


嗚呼. 周程旣往, 一再傳而大義已乖, 微先生, 孰得而反之正乎? 發聖人之蘊, 教萬世無窮者顏子也, 而先生庶幾近之.

아, 주정(周程:周濂溪와 程顥・程頤)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고, 한두 대(代)를 전해 와 대의(大義)가 이미 무너졌으니, 연평선생이 아니었으면 그 누가 도통을 얻어 올바른 길로 되돌릴 수 있었겠는가? 성인의 온축(蘊蓄)된 인덕(仁德)을 발휘(發揮)하여 만세토록 무궁히 가르치는 분은 안자(顔子:顏淵)이니, 연평(延平)선생이 거의 안자(顔子)에 가깝다.

*乖[어그러질 괴], 蘊[쌓을 온], 庶幾(서기):비슷함. 가까움. 어쩌면. 아마. 혹시.


然則是書之行, 其爲後學之惠, 宜如何哉. 高山仰止, 雖未覩冰壺秋月之象, 萬古一心, 寧不有作興於西林感慨之詩者耶.

그렇다면 이 책을 간행하는 것은 후학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높은 산을 우러러도9) 비록 빙호추월(氷壺秋月)10) 같은 기상은 볼 수 없으나 만고(萬古)의 한 마음이 어찌 서림감개시(西林感慨詩)11)에서 흥기(興起)됨이 있지 않겠는가?

*覩[볼 도], 作興(작흥):정신이나 기운을 단번에 일으킴. 흥기(興起)함.


嘉靖三十三年歲次甲寅秋九月旣朢, 眞城李滉, 謹跋.

가정 33년 갑인(甲寅) 9월 16일에 진성(眞城) 이황(李滉)은 삼가 씀.


  滉又按此書舊本,《後錄》在《師弟子答問》之前. 竊意兩篇皆先生之精蘊, 雖不可以賓主本末論, 然一則當時言語或手札, 一則出於《追錄》, 其先後次第, 決不可移易, 而所編如此, 非中原書本故然也. 乃書肆糚帙之人, 誤而倒換之耳.

  나는 또 이 책의 옛 판본(板本)을 상고함에, 《후록》이 《사제자답문》의 앞에 있으니 가만히 생각하건대, 두 편은 모두 선생의 깊은 속뜻인 바, 비록 빈주(賓主:主客)・본말(本末)을 가지고 논할 수는 없으나 하나는 당시의 언어(言語)나 수찰(手札)이고, 다른 하나는 《추록(追錄)》에서 나온 것이다. 그 선후 차제(次第)는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인데 편집한 바가 이와 같으니, 중원(中原:中國)의 책(冊)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이에 인쇄소의 제책(製冊)한 사람이 잘못 거꾸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인 것이다.

  *肆[방자할 사]:점포. 시장, 書肆(서사):서점(書店). 倒換(도환):교환함.


  改置前書, 雖不可易言, 今旣刊行是書, 則何可尙仍其誤, 而莫之釐乎? 滉曾以是告於希正․剛而, 皆不以爲不可, 旣從而正之矣, 聊識于此, 以俟後之君子有所考云爾. 滉, 謹書. <出處 : 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三>

  이전의 책을 바꾸어 놓는 일은 비록 쉽게 말할 수 없으나, 지금 이 책을 이미 간행하니 어찌 오히려 그 잘못을 그대로 따르고 정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것을 희정(希正)과 강이(剛而)에게 알리니 모두 불가하다고 여기지 않아 이미 따라서 바로잡고 오로지 여기에 기록하여 후세 군자가 상고함이 있기를 기다리노라. 황은 삼가 쓰다.

  *仍[인할 잉]:거듭하다. 聊[귀 울 료]:잠시. 오로지. 俟[기다릴 사]


1) 연평(延平):주자의 스승 이동(李侗)의 호.




2) 이천(伊川) 정자(程子) : 정이(程頤, 1033~1107)로, 자는 정숙(正叔), 호는 이천, 시호는 정공(正公)이며,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사람이다. 형 정호(程顥)와 함께 주돈이(周敦頤)에게 수학하였으며, 형과 함께 ‘이정(二程)’으로 불렸다. 오랫동안 낙양에서 강학하여 이정의 학문을 ‘낙학(洛學)’이라 불렀다. 저술로 《역전(易傳)》ㆍ《춘추전(春秋傳)》 등이 있다. 후인들이 정호(程顥)의 저술과 합하여 《이정전서(二程全書)》를 편찬하였다.




3) 천령군(天嶺郡) : 현 경상남도 함양군의 고호이다.




4) 주목(周木): 명(明)나라 효종 때 사람으로 자는 근인(近仁), 벼슬은 참정(參政)에 이르렀고, 일찍이 연평(延平)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5) 이정(李楨) : 1512(중종7)~1571(선조4). 조선의 문신․학자. 자는 강이(剛而), 호는 구암(龜巖). 담(湛)의 아들, 송인수(宋鱗壽)․이황(李滉)의 문인. 1536년(중종31) 진사(進士)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3사(司)의 벼슬을 거쳐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으나 취임치 않았다. 성리학(性理學)에 밝았다. 사천(泗川)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6) 고사(固辭) : 고사(固謝). 거듭 사양함. 《禮記 ‧ 曲禮上》: “凡與客入者, 每門讓於客. 客至於寢門, 則主人請入爲席,


                     然後出迎客,客固辭.” 孔穎達 疏: “固,如故也. 禮有三辭: 初曰‘禮辭’, 再曰‘固辭’, 三曰‘終辭’.”




7) 정좌구중설(靜坐求中說) : 조용히 앉아서 중도(中道)를 구하라는 설. 《주자어록(朱子語錄)》에 “명도(明道)가 사람을 조용히 앉아 있기를 가르치니 연평(延平)선생도 사람을 조용히 앉아 있기를 가르쳤다”는 말이 보인다.




8) 대본달도(大本達道) : 《중용(中庸)》에 “중(中)은 천하의 대본이고, 화(和)는 천하의 달도다[中也者天下之大本 和也者天下之達道]”라는 말이 보인다.




9) 《시경》 〈거할(車舝)〉에 “높은 산을 우러러보며 큰 길을 걸어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구절이 있다. 높은 산은 고상한 덕행을 가리키고 큰 길은 정대하고 광명한 행위를 가리킨다.




10) 빙호(冰壺) : 맑은 얼음 호리병을 말하는 것으로, 맑고 고상한 인품을 가리킨다. 밝은 가을 달과 함께 빙호추월(冰壺秋月)이라고도 하는데, 송(宋)나라의 학자 주송(朱松)이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인품을 기리면서 “선생은 빙호추월과 같아서 한 점 티가 없이 맑게 비치니, 우리들이 따라갈 수가 없다”라고 하였던 고사에서 나왔다. 《宋名臣言行錄 外集 卷11》




11) 서림(西林)은 송나라 때의 학자 주희(朱熹)가 이동(李侗)을 배알하고 수학할 적에 머물던 절 이름이다. 이때 「題西林可師逹觀軒(제서림가사달관헌:서림원의 유가(惟可) 대사(大師)의 달관헌(達觀軒)에 쓰다)」이라는 시를 지었다.

    古寺重來感慨深 옛 절에 다시 오니 감개가 깊은데,

    小軒仍是舊窺臨 작은 집은 옛날에 지내던 그대로이네.

    向來妙處今遺恨 지난날 묘처라고 여겼던 것이 지금은 한으로 남나니,

    萬古長空一片心 만고의 하늘에 한 조각 마음이로다.


    퇴계선생께서는 월란암(月瀾庵)에 우거(寓居)면서 주자(朱子)의 시를 차운하셨다.

    和西林院詩韻 二首○三月寓月瀾庵  「西林院詩」에 차운하다. 2수○3월에 월란암에 우거하다

    似與春山宿契深。봄 산과 깊이 약속한 것처럼

    今年芒屩又登臨。올해도 짚신 신고 다시 올라 왔네.

    空懷古寺重來感。공연히 ‘옛 절에 거듭 온 느낌’을 추억하나

    詎識林中萬古心。‘서림(西林) 가운데의 만고(萬古) 마음’ 어찌 알랴


    從師學道寓禪林。스승 따라 도를 배우러 절간에 우거하며

    壁上題詩感慨深。벽 위에 써 놓은 시는 감개(感慨)가 깊도다

    寂寞海東千載後。적막하게 해동에서 천 년이 지난 뒤에

    自憐山月映孤衾。산 위에 뜬 달이 이불에 비치니 절로 가련하다


   *考證:(一統志)西林寺在廬山。與東林寺相對。○案朱子年譜。庚辰冬。見李先生于延平。退寓舍傍西林寺惟可師之室。有題達


     觀軒詩。卽前韻。壬午春。迎謁于建安。遂與俱歸。復寓西林。又題二首。一是前韻。一是後韻。

    


    《일통지》 서림사는 여산(廬山)에 있으니 동림사(東林寺)와 서로 마주하고 있다. ○주자(朱子)의 연보(年譜)를 살펴보니 경진년(1160) 겨울에 이(李)선생을 연평(延平)에서 뵙고 물러나 서림사(西林寺) 유가(惟可) 대사(大師)의 집 곁에 우거(寓居)하였는데 달관헌(達觀軒) 시를 지었으니 곧 앞의 운(韻)이다. 임오년(1162) 봄에 건안(建安)에서 영접(迎接)하여 알현(謁見)하고 드디어 함께 돌아가서 다시 서림사에 우거하며 또 두 수를 지으니 하나는 앞의 운이고 다른 하나는 뒤의 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