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주지역 道學의 착근과 江岸學派의 성장

2018. 10. 29. 15:12성리학(선비들)

성주지역 道學의 착근과 江岸學派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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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우 락*

 

 

Ⅰ. 문제의 제기
Ⅱ. 성주지역의 유학적 기반
Ⅲ. 천곡서원 건립과 도학의 착근
Ⅳ. 성주 강안학파의 형성과 진통
Ⅴ. 성주 강안학파의 규모와 전개
Ⅵ. 남은 문제들

 


국문초록
본 연구는 성주지역에 道學이 착근하는 과정과 이 지역에서 江岸學派의
중심을 이루었던 寒岡學派가 어떤 시련 속에서 성장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다. 성주 유학은 가야산과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지리적 환경,
가야 고토 위의 신라 유학적 전통이라는 역사적 환경 하에서 전개된다.
성주 지역은 낙동강 연안에서 지방의 在地的 바탕을 확보한 사림파의 성
장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강을 중심으로 상하로는 기호학
과 영남학이, 좌우로는 퇴계학과 남명학이 서로 회통할 수 있는 지리적
환경 또한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다양한 성씨들이 어울려
살았고 또한 수많은 儒賢을 배출하였다.
영봉서원 설립과 이것이 천곡서원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성주지역의 도
통확립과 함께 도학이 어떻게 뿌리내리는 지를 확인할 수 있다. 황준량
등 신진 사림파에 의해 이조년 등 충절 성향의 인물이 배제되고 조선 도

 

* 경북대학교 국문과 교수 / 전자우편 jwl0412@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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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의 祖宗이라 할 수 있는 김굉필이 향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주
지역에서 발생한 이창록 사건과 박이립 사건은 당시 정구를 중심으로 한
성주 강안학파의 형성 과정에서 발생한 진통으로 파악된다. 정인홍 세력
의 침투에서 벗어나면서 성주지역은 정구의 학맥으로 단일화되고, 그 학
맥은 장현광에 의한 영남 理學과 허목에 의한 근기 실학으로 계승된다.
강안학파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원조와 이진상 등에 의해 새로운 국면
을 맞으며 시대적 응전력을 기르게 된다.
◈ 주제어 --------------------------------------------------------------------------------
성주, 道學, 강안학파, 한강학파, 가야산, 낙동강, 낙동강 연안, 기호학, 영남학,
퇴계학, 남명학, 영봉서원, 천곡서원,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미수 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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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문제의 제기
본 연구는 성주지역 道學의 착근 경위와 이 지역 江岸學派의 형성 및
전개를 밝히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 문제를 따지기 위해서는 성주와
金宗直(佔畢齋, 1431-1492)의 문하생들은 어떤 관계에 놓이며, 성주 지
역에서 江左의 퇴계학파와 江右의 남명학파가 회통하면서도 차별성을 갖
는 이른바 강안학파가 어떻게 형성되고 전개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논의의
초점이 놓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김종직 학단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활동
하면서 사림파에서 도학파로 성장해 가고 있었던 점에 착안한 것이다.
낙동강의 근원에 대해서는 태백산의 龍井[淵], 함백산의 너들샘 혹은
그 아래쪽의 龍沼 등으로 다양하게 이야기 된다. 이 가운데 너들샘이 가
장 먼 곳에 있어 지리학계에서는 대체로 이곳을 낙동강의 발원지로 본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지지󰡕 등에서는 물의 양이 풍부한 ‘黃池’
로 적고 있어 이곳은 역사적 의미가 깊다. 17세기 후반에 나온 󰡔東輿備攷
󰡕 등에서처럼 龍淵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이 있기도 하나, 이것은 지도 제
작에도 적용되어 󰡔輿地圖󰡕 등 다양한 고지도에서 ‘황지’로 표시하고 있
다.1)

 

낙동강의 ‘낙동’은 상주의 동쪽을 말한다. 󰡔택리지󰡕에서 ‘洛東者, 爲尙州
之東也.’라고 한 데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상주가 上洛ㆍ商
山ㆍ洛陽 등으로 불려왔으니, 낙동강은 바로 ‘상락 혹은 낙양의 동쪽을 흐
르는 강’이 된다. 이 때문에 고인들은 낙동강은 상주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큰 내가 셋이지만 첫째는 낙동강’이라
고 하면서 ‘그 근원은 셋인데 하나는 봉화현 북쪽 태백산 黃池에서 나오
고, 하나는 문경현 북쪽 草岾에서 나오고, 하나는 순흥 소백산에서 나와

 

1) 19세기 전반에 나온 󰡔輿地圖󰡕(영남대박물관 소장, 31.5×32.8cm)의 「慶尙道」
조는 그 대표적이다. 󰡔大東地志󰡕 「三陟」조에서도 ‘黃池’를 들어 ‘太白山之東支
有泉, 湧出成大池, 其水南流至三十餘里, 穿山山南出, 謂之穿川, 卽安東府界, 南
流爲洛東江之源.’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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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합하여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2)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낙동강 연안에 형성된 학파가 강안학파다. 이 학파는 鄭逑(寒岡,
1543-1620)와 張顯光(旅軒, 1554-1637), 그리고 그들의 문도를 중심으
로 낙동강 오른쪽의 강우학파와 낙동강 왼쪽의 강좌학파의 중간인 낙동강
연안 지역에 거점을 마련한 영남의 제3학파를 지칭한다. 이 지역은 금오
산 기슭의 길재로부터 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도통
연원을 이루면서, 16세기 이후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경쟁하고 협동하면
서 새로운 유교문화를 만들어 간 곳이라 할 수 있다. 李滉과 曺植의 제자
인 정구, 그와 사승관계에 있는 장현광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강안학파는
독자성을 이루며 보다 큰 영남학을 구축하였던 것이다.3)
강안지역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정우락에 의해 ‘강안학’이라는 용어와
함께 시작된 이래,4) 이에 자극을 받아 최근 낙동강 중류지역의 학문을 의
미하는 ‘낙중학’이 등장하기도 했다.5) 아직 그 방법론이 모색되는 단계에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논의를 통해 강의 ‘좌우’ 혹은 ‘상하’에서의 ‘岸’과
‘中’이 영남학을 새롭게 읽을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여기서 우리는 ‘사이’가 오히려 ‘중심’이 된 역사적 경험도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성주지역 도학의 착근에 대해서는 이 지역의 서원 건립과 일정한 관련

 

2) 󰡔世宗莊憲大王實錄󰡕 卷150, “大川三, 一曰洛東江, 其源有三, 一出奉化縣北太白
山黃池, 一出聞慶縣北草岾, 一出順興小白山, 合流至尙州, 爲洛東江.”
3) 이 같은 측면에서의 논의는 정우락, 「강안학과 고령 유학에 대한 시론」(󰡔퇴계
학과 한국문화󰡕 43, 경북대 퇴계연구소, 2008)과 「조선중기 강안지역의 문학
활동과 그 성격」(󰡔한국학논집󰡕 40, 계명대 한국학연구원, 2010)에서 이루어졌
다.
4) 정우락, 「강안학과 고령 유학에 대한 시론」, 󰡔퇴계학과 한국문화󰡕 43, 경북대
퇴계연구소, 2008.
5) 홍원식, 「영남 유학과 ‘낙중학’」, 󰡔한국학논집󰡕 40, 계명대 한국학연구원,
2010.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에서는 「‘낙중학’, 조선시대 낙동강 중류지역의
유학」(2010), 「'낙중학'의 원류, 여말선초 도학파들의 도학사상」(2011)이라는
주제로 기획 학술대회를 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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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있다. 여기에 착목하여 김소은은 16세기 성주지역에서의 교유와 서
원건립계획을 李文楗(黙齋, 1494-1567)의 󰡔黙齋日記󰡕를 중심으로 살폈
다.6) 이 논의에서 그는 영봉서원의 건립계획과 이에 대한 무산은 성주지
역 훈구세력의 퇴조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였다. 이것은 성주지역에서 도
학이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뿌리내리는가 하는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지
는 않았지만, 이러한 논의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강안’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성주지역 퇴계학파에 대한 연구
도 결국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정순우의 논의가 대표적이라 하겠는
데,7) 그는 퇴계학맥의 한 유파로 정구와 金宇顒(東岡, 1540-1603)을 떠
올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학문연원과 학문세계를 두루 다루었다. 이에서
나아가 영남 유교문화권의 지역적 특징에 대한 포괄적 논의가 김성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여기서 영남을 안동권ㆍ상주권ㆍ성주권으로 나누
어 영남학파의 상이한 사유체계와 문화양상을 따지는가 하면,8) 이 가운데
성주지역 유림층의 동향을 학맥ㆍ학풍ㆍ향전ㆍ향약을 중심으로 자세하게
논의하여9)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본 논의에서는 이상에서 거둔 성과를 일부분 수용하면서, 특히 도학이
성주지역에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착근하는가 하는 문제와 성주에서 강안
학파의 중심을 형성하였던 한강학파가 어떤 시련 속에서 성장하는가 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것은 사림파에서 도학파로 전개되는 한국유

 

6) 김소은, 「16세기 성주지역의 교유와 서원 건립계획-󰡔묵재일기󰡕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여름호 제26권, 한국학중앙연구원, 2003.
7) 정순우, 「星州地域의 退溪學脈 -寒岡과 東岡을 중심으로-」 󰡔퇴계학과 유교문
화󰡕 30, 경북대 퇴계연구소, 2001.
8) 김성윤, 「영남의 유교문화권과 지역학파의 전개-안동권,상주권,성주권을 통해
본 영남학파 사유체계의 지역적 특징과 그 전승과정에 나타난 문화 양상을 중
심으로」, 󰡔朝鮮時代史學報󰡕 37, 朝鮮時代史學會, 2006.
9) 김성윤, 「조선시대 星州圈 유림층의 동향-학맥,학풍,향전,향약을 중심으로」, 󰡔
역사와 경계󰡕 59, 부산경남사학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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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의 보편성을 성주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안학파가
성주지역에서 어떤 진통을 겪으며 성장하는가 하는 부분을 이해할 수 있
어 일정한 의의를 확보하고 있다 하겠다.

 

Ⅱ. 성주지역의 유학적 기반
성주군은 지리적 측면에서 볼 때 경상북도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단은 선남면 도흥리, 서단은 금수면 영천리, 남단은 수륜면 백운리, 북
단은 초전면 소성리 등이다. 전체적인 지세는 높고 낮은 산에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남동부로 내려오면서 비교적 낮고 평평한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산과 하천이 두루 발달하고, 구릉지대 역시 잘 발달하여,
지방의 在地的 바탕을 확보한 사림파의 성장에 매우 유리한 지리적 환경
을 갖추고 있다. 성주의 유학은 이 같은 조건 하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하겠다. 李元禎(歸巖, 1622-1680)은 󰡔京山誌󰡕 서문에서 성주의 지리적
환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고을은 가야산 동쪽에 있으니 남쪽 지방의 요충지를 차지하여, 신라와 고
려 이래 수천 년이 지나면서 縣에서 郡이 되고, 군에서 府가 되고, 부에서 牧
이 되어 영토를 보유하여 정치적 교화를 펼칠 수 있는 곳을 잃어버리지 않은
곳이 바로 성주이다. 높고 낮은 산의 형세를 끌어들이고 감도는 伊川과 낙동
강이 띠처럼 두르고 있어, 사람은 그 기운을 모아 태어나고 나라는 이에 의지
하여 번영할 수 있었다. 선배의 훌륭한 업적을 빛내고 후인에게 드리운 이들
이 손꼽을 수 없을 정도이니, 같은 도에 있는 낙동강 왼쪽의 안동 및 낙동강
오른쪽의 상주와 더불어 서로 우열을 다툴만하다.10)

 

10) 李元貞, 󰡔京山志󰡕 <京山志序>, “邑於倻山之東, 而據南服樞轄之會, 羅麗以還,
凡歷數千載, 縣而爲郡, 郡而爲府, 府而爲牧, 保有境土, 而不失聽洽之所者, 星
州是已. 控引岡巒之體勢, 縈廻伊洛之襟帶, 人鐘亭毓之氣, 邦賴榮懷之慶, 光前
烈而垂后昆者, 指不暇屈, 與江左之花山, 江右之商顔, 相季孟於一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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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정은 여기서 성주의 지리적 환경을 비교적 간결하게 제시하고 있
다. 즉 가야산을 중심으로 한 여러 산들이 성주의 형세를 이루고, 낙동강
을 중심으로 강이 띠처럼 두르고 있으며, 그 산천의 정기가 모여 수많은
인물을 낳았는데, 이 인물들을 중심으로 국가가 번영할 수 있었다는 것이
다. 그리고 같은 경상도에서 낙동강의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우열을 가리
며 독자적인 위상을 점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江右 및 江左와는 다른 江岸의 문화가 성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는 자각이, 이원정이 살던 시대에도 이미 있어왔다던 사실을 주목할 필요
가 있다.
성주는 서쪽으로는 가야산이 우뚝하게 서서 기개를 드높이고, 동남쪽으
로는 이천과 백천이 넉넉하게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일찍이 가야산
은 신라 말 崔致遠(孤雲, 857-?)이 숨어들게 되면서 儒仙의 산이 되었고,
朴可權11) 역시 고려가 멸망하자 이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
다. 그리고 낙동강은 다른 지역과 활발한 교역을 이루면서 성장하였는데,
이 때문에 서울의 문화가 가장 신속하게 파급ㆍ수용될 수 있었다.12) 이러
한 현상은 조선조의 경우에는 더욱 명확하게 나타났다. 경상의 좌우도가
서로 만나고, 기호학파와 영남학파가 서로 소통하는 지역으로 성주가 자
리매김 되었기 때문이다.
가야 고토 위의 신라 유학적 전통 역시 성주의 주요 유학적 기반을 이
룬다. 성주 지역에는 철기시대의 소국을 모체로 하여 6가야의 하나인 星
山伽倻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즉 성주지역은 이 성산가야
의 고토를 기반으로 하여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일연의 󰡔三國遺事󰡕 「五
伽倻」조에는 오가야를 들어 ‘아라[‘야라’라고도 한다]가야[지금의 함안],

 

11) 박가권은 고려 말 開城判尹을 지냈으며, 이성계의 세력에 불복하고 내려와
가야산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지금의 수륜동으로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12) 이에 대하여 趙鏡夏는 「성산지 서문」에서 “지금 우리 영남의 70주 역시 당나
라의 영남처럼 재화와 보물을 실은 배들이 예로부터 바닷길을 오르내리며 교
역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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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녕가야[지금의 함녕],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지금의 경산, 또는 벽진
이라고도 한다], 소가야[고성]이다.’13)라고 하였고, 󰡔星山誌󰡕 역시 같은 사
고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합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로 하고 나라 이름을 伽倻라고 하였는데,
신라 儒理王 18년 때의 일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각각 돌아가 가야의 임금
이 되었으니, 고령은 대가야가 되고, 고성은 소가야가 되었으며, 성주는 碧珍
伽倻[󰡔三國遺事󰡕에는 星山伽倻라고 하였다.]가 되고, 함안은 阿那伽倻가 되
었으며, 함창은 古寧伽倻가 되었다.14)
󰡔성산지󰡕 「건치연혁」조의 기록이다. 이에 의하면 성산가야는 지금의
성주인 京山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벽진가야라고도 했다. 󰡔성산지󰡕의 같
은 조에도 “󰡔三國遺事󰡕에는 성산가야를 6가야의 하나라고 하였는데, 신라
가 병합하여 本彼縣으로 삼은 듯하다. 내가 󰡔삼국유사󰡕와 󰡔동국여지승람󰡕
을 살펴보니 모두 성주를 6가야의 하나라고 하였으나 나라 이름을 벽진가
야라 하기도 하고 성산가야라 하기도 하니 아마 같은 나라인데 이름이 둘
이었을 것이다.”15)라고 하면서 성산가야와 벽진가야를 같은 나라의 다른
이름으로 보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성산가야가 언제 멸망하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서기 562년
신라의 장수 이사부가 대가야를 공격하여 가야를 멸망시킬 즈음, 대가야
와 인접해 있던 성산가야가 먼저 신라에 복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로

 

13) 一然, 󰡔三國遺事󰡕 卷1 「五伽倻」, “五伽倻, 阿羅[一作 耶]伽倻[今 咸安], 古寧
伽倻[今 咸寧], 大伽倻[今 高靈], 星山伽倻[今 京山 一云 碧珍], 小伽倻[今
固城].”
14) 󰡔星山誌󰡕 卷1 「建治沿革」, “生于金盒, 因姓金氏, 國號伽倻, 乃新羅儒理王十八
年也. 餘五人各歸爲伽倻主, 高靈爲大伽倻, 固城爲小伽倻, 星州爲碧珍伽倻[三
國遺事稱星山伽倻], 咸安爲阿那伽倻, 咸昌爲古寧伽倻.”
15) 󰡔星山誌󰡕 卷1 「建治沿革」, “三國遺事, 以星山伽倻, 爲六伽倻之一, 疑新羅取之,
爲本彼縣也. 愚按, 三國遺事輿地勝覽, 皆以星州爲六伽倻之一, 而其國號, 或稱
碧珍伽倻, 或稱星山伽倻, 蓋一國而二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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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성주 지역은 보다 발달한 신라문화와 접촉하면서 좀 더 정교한 형태의
유교 문화를 성장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신라의 화랑도는 風月徒
또는 風流ㆍ國仙 등으로 불리며, 유교적 덕목을 중시했다. 김부식이 󰡔삼국
사기󰡕에서 ‘혹 道義로써 서로를 연마하고, 혹 歌樂으로써 서로 즐기며, 산
수를 좋아하여 멀어도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를 통하여 그 사람됨을
알아서 善者를 가려 조정에 천거하였다.’16)라고 한 데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시대의 성주 유학은 신라 유학 일반의 것과 대동소이 하였을 것이
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신라의 유학은 崔致遠(孤雲, 857~?)이 <鸞郞碑
序>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그 정체성이 多衆的이다.17) 최치원이 이 글에
서 공자의 가르침을 가장 먼저 내세운 것을 보면, 이를 중심으로 해서 도
교와 불교를 통섭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신라 유교는 도교와
불교가 상호 침투하는 가운데 보다 넓은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김부식은 화랑의 제1조건으로 道義로써 서로를 연마하는 것을 들었고,
최치원은 유교의 忠孝를 화랑의 제1조건으로 들었다. 신라는 이 같은 다
중적인 화랑 정신에 기반하여 충효와 名節을 특별히 중시하였고, 또한 많
은 지도적 인물이 이것을 실천하며 가문과 국가를 위하여 활약하였던 것
이다. 물론 성주와 화랑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문헌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라의 전반적인 문화적 분위기, 혹은 영향관계 속에서 성
주의 유학이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성주 유학은 이상과 같은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환경 하에 발달하였다.
그 사이 성주를 관향으로 하는 수많은 성씨가 있어 왔고,18) 󰡔성산지󰡕에

 

16) 金富軾,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眞興王」,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
娛山水無遠不至,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
17) 이에 대해서는 정우락, 「가야산과 대가천, 그 다중적 정체성의 깊이」(󰡔별고을
성주의 시와 시인들󰡕 2, 강물처럼, 2012)에서 자세하게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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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하면 이 외에도 두 관향 이상이 되는 성씨만 해도 15곳이 된다.19) 성
씨가 많아지면서 거기에는 당연히 저명한 儒賢이 나왔다. 그 유현의 후손
이나 문인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유적지를 정비하거나 추모하는 건물을
세우기도 한다. 21개에 해당하는 서원의 건립은 그 대표적이다. 서원의
발달이 사림의 성장을 핵심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성
주의 인문지리적 환경 하에서 성장하였던 성주 유학의 강도를 바로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Ⅲ. 천곡서원 건립과 도학의 착근
고려 말 성리학이 도입될 당시부터 절의정신을 지키면서 유풍을 진작시
켰던 성주지역은 조선 초기 사림파가 등장할 때 많은 인물을 배출할 수
있었다. 사림파의 종장이라 할 수 있는 金宗直(佔畢齋, 1431-1492)의 아
버지 金叔滋(江湖, 1431-1492)가 성주 향교의 교수로 있었으며, 이 때
김종직도 와서 글을 읽었다.20) 이로써 김종직은 그가 24세 되는 1455년
에 <謁夫子廟賦>를 지어 당시 성주 향교의 분위기를 전하거나, 가야산과
관련한 여러 수의 시를 남길 수 있었다.

 

18) 姜氏ㆍ郭氏ㆍ金氏ㆍ都氏ㆍ朴氏ㆍ裵氏ㆍ白氏ㆍ石氏ㆍ施氏ㆍ呂氏ㆍ吳氏ㆍ柳氏
ㆍ李氏ㆍ林氏ㆍ全氏ㆍ鄭氏ㆍ崔氏ㆍ楚氏ㆍ韓氏ㆍ黃氏ㆍ玄氏 등의 서로 다른
성씨가 있고, 李氏는 다시 星州ㆍ碧珍ㆍ星山ㆍ京山ㆍ加利ㆍ廣平 등으로 나뉜
다.
19) 李氏(14)ㆍ金氏(8)ㆍ朴氏(7)ㆍ鄭氏(4)ㆍ宋氏(3)ㆍ裵氏(2)ㆍ崔氏(2)ㆍ徐氏(2)ㆍ柳氏
(2)ㆍ吳氏(2)ㆍ林氏(2)ㆍ趙氏(2)ㆍ安氏(2)ㆍ申氏(2)ㆍ辛氏(2)가 그것이다. ( )안의
숫자는 성관의 숫자이다.
20) 김종직은 인근의 고령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종직의 아버지 金叔滋가
고령 현감을 지낸 바 있고, 김종직 자신도 고령 출신의 훈구대신인 신숙주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종가가 고령에 있다. 이 지
역에 김종직의 제자그룹도 다양하게 형성되었는데, 이로 보면 성주와 고령을
중심으로 영남사림파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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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子光 등에 의해 무오사화의 빌미가 되고 말았던 김종직의 <弔義帝
文>, 그 창작 배경도 다름 아닌 성주의 踏溪驛이었다. 그는 이 글의 서문
에서 ‘정축년(1457년) 10월 일에 내가 密城으로부터 京山을 거쳐 踏溪驛
에서 자게 되었는데, 꿈에 한 神人이 七章服을 입고 헌칠한 모습으로 와
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楚 懷王의 손자 心인데, 西楚霸王 項籍에게 시
해되어 郴江에 빠뜨려졌다.”라고 하고는, 언뜻 보이다가 이내 보이지 않았
다.’21)라고 하면서, 느낀 바 있어 이 글을 짓는다고 했다. 이로써 우리는
사림파의 성장과 관련하여 성주가 얼마나 의미있는 지역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김종직과 교유하거나 그 문하에서 활동한 성주의 사림파로는 金孟性·金
宏弼ㆍ李鐵培ㆍ李承彦ㆍ李鐵均 등이 대표적이다. 김맹성은 성주의 志士에
살면서 김종직 등 사림파의 시판을 두루 걸어 두었고,22) 김굉필은 동문을
방문하여 관련 시를 남기기도 한다.23) 특히 김굉필은 성리학의 도통연원
으로 조선의 도학이 그에게서부터 시작된다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물론 그는 달성출신이지만, 박가권의 손자인 朴禮孫의 사위가 되었던 관
계로 그의 처외가가 있던 伽川을 오가며 자주 머무르곤 하였던 것이다.
성주지역 도학의 착근은 영봉서원을 건립한 후 이것이 우여곡절을 겪으
며 천곡서원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에서 구체화 된다. 성주에 귀양을 와 있
던 李文楗(黙齋, 1494-1567)은 1558년 盧慶鱗(四印堂, 1516-1568)24)이
성주의 목사로 부임하자 성주 이씨들의 서원건립운동을 시작하였고, 이에

 

21) 金宗直, 󰡔佔畢齋集󰡕 附錄, 「戊午史禍事蹟」, “丁丑十月日, 余自密城道京山, 宿
踏溪驛, 夢有神人, 被七章之服, 頎然而來, 自言楚懷王孫心, 爲西楚伯王項籍所
弑, 沉之郴江, 因忽不見.”
22) 󰡔星山誌󰡕 「叢談」조에 의하면, 김맹성이 지사면 마산촌에 살면서 문미에 선배
들의 시판을 걸어두었는데 김종직의 것이 많았으며, 죽은 후 그의 첩 꿈에
나타나 그 시판을 없애 화를 면하게 하였다고 한다.
23) 이에 대해서는 정우락·배창환 편, 󰡔별고을 성주의 시와 시인들󰡕 2(강물처럼,
2012)을 참고하기 바란다.
24) 노경린은 1556년에서 1560년까지 성주 목사로 재직하였다. 노경린의 후임은
이황의 제자 黃俊良이었고, 재임기간은 1560년에서 1563년까지였다.
56

 

대한 자문을 이황에게 여러 번 구하였다. 이문건은 성주 이씨 문열공 이
조년의 후손으로 조선 개국공신 이직의 직계손이었던 것이다.
이문건은 가문의 부흥에 힘입어 한편으로 영주의 白雲洞書院 건립에 고
무되고, 다른 한편으로 노경린의 선정을 위한 노력과 맞물리면서 영봉서
원 건립을 생각하게 된다. 당시 향현으로 지목되었던 사람들은 바로 그의
선조인 文烈公 李兆年과 文忠公 李仁復 등이었다. 서원의 건립 논의가 본
격화 되면서, 노경린은 안동의 이황에게 이조년과 이인복에 대한 향사를
포함한 서원건립에 관한 여러 사항을 품의하였다. 이에 이황은 사림의 자
부심으로 삼기에 족하다고 하면서 긍정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영봉서원의 창건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노경린의 사위인 李珥
(栗谷, 1536-1584) 등 신진 유학자들은 이조년의 영정에 염주가 들려져
있음을 지적하면서 拜佛한 인물을 서원에 제향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나
섰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성주에 자주 출입하였던 도학자 김굉
필이 다시 거론되면서, 이조년과 이인복, 그리고 김굉필을 함께 제향하기
로 한다. 이에 대하여 이황은 노경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말씀하신 한훤당 김 선생의 사당을 세우려는 문제는 대단히 좋습니다. 대
개 성주는 선생의 처가(처외가: 필자 주) 고장이니, 곧 거기에 왕래하면서
놀고 거처하던 곳에 남긴 향기가 있어 사람들이 생각하며 읊은 것이 있을 것
이므로 사당을 세워 현인을 존중하는 일은 더욱 마땅히 이것을 먼저하고 다
음에 다른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25)
성주에서 김굉필의 제향을 우선해야 한다는 이황의 생각이 읽힌다. 같
은 글에서 이황은 “김 선생의 도학연원에 대해서는 진실로 후학이 감히
추측할 수 없다 할지라도 先朝에서 추장한 뜻으로 미루어 본다면 단연코

 

25) 李滉, 󰡔退溪集󰡕 卷12 <答盧仁甫>, “示喩金先生廟享事, 甚善甚善, 夫先生之於
貴府, 旣曰妻鄕, 則其往來遊處之所, 必有遺塵剩馥在人思詠者矣. 則於立廟尊賢
之擧, 尤當以是爲先, 而次及於其他, 可也.”
57

 

근세 道學의 宗이라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조선의 도학연원은 김
굉필에게서 시작된다고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사정을 거쳐 이황에게 영
봉서원의 기문을 부탁하자, 이황은 이를 지어, 이조년과 이인복의 충절과
김굉필의 도학을 동시에 찬양하였다.
이황이 <영봉서원기>까지 썼음에도 불구하고, 제향인물의 위차 문제를
두고 의외의 분쟁이 발생했다. 즉 연대를 우선할 것인가, 도학을 우선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었다. 노경린과 성주 이씨들은 나이를 우선으
로 하여 3인 제향을 주장했고, 여타의 신진 사류들은 김굉필의 도학을 강
조하였다. 원래 3인 합향을 승인하였던 이황은 입장을 바꾸어 김굉필을
상좌에 두고 이조년과 이인복을 남향으로 한 후, 그 사이에 병풍을 막아
존봉케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이 논란은 결국 송사로 이어져 영남
일대의 중요한 사건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1560년 이황의 제자 황준량이 성주목사로 부임한 후에도 이 문제는 지
속적으로 논란이 되었다. 이러한 논란을 거쳐 결국 서원에는 김굉필을 홀
로 모시고, 이조년과 이인복은 서원 옆에 사우를 세워 따로 모시는 것으
로 가닥을 잡았다. 이후 정구가 와룡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이황에게 품의
하여 程頤와 朱熹를 追奉하고, 서원의 이름도 서원 자리인 雲谷坊과 그
앞을 흐르는 시내인 伊川에서 따 川谷이라 하였다. 이는 정이와 주자를
거쳐 김굉필에게로 도통이 이어진다는 정구의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
다.26) 천곡서원에 대하여 󰡔성산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가) 川谷書院은 벽진면 해평동에 있었다. 嘉靖 무오년(1558)에 목사 盧
慶鱗과 고을 사람들이 세우기 시작하여 錦溪 黃俊良이 이어서 공사를 마쳤
다. 처음에는 편액을 迎鳳書院이라 하고 장차 文烈公 李兆年ㆍ文忠公 李
仁復ㆍ文敬公 金宏弼을 봉안하려 하였으나,그 뒤에 소장하고 있던 두 李氏
의 영정에 염주가 있다는 선비들의 의론에 따라 배척하였다.27)

 

26) 정구의 학문연원과 도통의식은 우경섭, 「한강 정구의 학문연원과 도통적 위
상」, 󰡔한강 정구󰡕, 예문서원, 2011, pp.43-59를 참조할 수 있다.
58

 

(나) 정구가 臥龍의 고사를 인용하여 퇴계 이황에게 품의하여 伊川과 雲
谷을 봉안하니 지명이 우연히 같았기 때문이다. 김굉필은 그대로 종향하였
다. 선조 때에 사액한 편액을 마루 북쪽에 걸었고, 동벽에 걸린 편액은 이황
이 쓴 것이다. 인조 계해년(1623)에 조정에 청하여 문목공 정구를 종사하고
또 조정에 청하여 문강공 장현광을 종사하였다. 퇴계 이황의 기문이 있다.28)

 

(다) 忠賢祠가 천곡서원 옆에 있었다. 문열공 이조년ㆍ문충공 이인복ㆍ문
충공 이숭인을 향사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졌다.29)
위의 자료는 천곡서원의 위치, 이조년과 이인복이 성주의 신진사림에
의해 배척되었던 사실, 서원의 이름을 ‘천곡’이라 하고 程頤와 朱熹를 봉
안한 연유, 이후 정구와 장현광을 추향하였던 사정, 이조년과 이인복을 서
원 옆의 충현사로 모시고 이후 이숭인을 추봉하였던 사실 등을 두루 전하
고 있다. 천곡서원이 성주 유학과 도학의 본거지가 되자 이를 중심으로
성주 사림을 향현으로 봉안하는 일도 진행되었다. 이는 천곡서원 옆에 ‘향
현사’를 세우는 것으로 구체화 되었다. 󰡔성산지󰡕는 그 흔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鄕賢祠가 천곡서원 옆에 있었다. 止止堂 金孟性ㆍ杏亭 都衡ㆍ圓亭 呂希臨
ㆍ忠肅公 宋希奎ㆍ七峰 金希參ㆍ臺巖 洪繼玄을 향사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졌
다.30)

 

27) 󰡔星山誌󰡕 」, “川書院, 在碧珍面海平洞, 嘉靖戊午, 牧使盧慶鱗, 與州人
創建, 黃錦溪俊良, 繼之以訖. 功初扁曰迎鳳書院, 將奉安文烈公李兆年·文忠公李
仁復·文敬公金宏弼, 其後士論,以所藏二李之眞有數珠, 故斥之.”
28) 󰡔星山誌󰡕 「校院」, “鄭逑引臥龍古事, 稟于退溪李滉, 奉安伊川雲谷, 以地名之偶
相同也. 因以金宏弼從享, 宣廟朝賜額掛諸堂北, 又有懸東壁者, 李滉筆也. 祖癸
亥, 請于朝以文穆公鄭逑從祀, 又請于朝, 以文康公張顯光從祀, 有退溪李滉記.”
29) 󰡔星山誌󰡕 「校院」, “忠賢祠, 在川谷書院傍, 享文烈公李兆年·文忠公李仁復·文忠
公李崇仁, 今廢.”
30) 󰡔星山誌󰡕 「校院」, “鄕賢祠, 在川谷院傍, 享止止堂金孟性ㆍ杏亭都衡ㆍ圓亭呂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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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현사에는 김굉필과 도의로 사귀었던 김맹성, 김굉필의 제자 도형, 조
광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여희림, 도형의 제자로서 윤원형을 강
하게 배척하였던 송희규, 主敬공부에 독실했던 김희삼, 김맹성의 외손으로
서원 자리인 운곡에 살았던 홍계현 등이 모셔졌다. 이들은 모두 성주의
이름난 도학자로서 김굉필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정자와 주자의 도통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향현사에 따로 모
셔두고, 성주의 선비들은 향현으로 이들을 기렸던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천곡서원 건립을 둘러싼 심각한 갈등이 있었으며, 이
들은 각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서원의 명칭이 ‘영봉’에서
‘천곡’으로 바뀌며 도학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영봉’은 지
역의 산명에서 이름을 딴 것이고, ‘천곡’ 역시 지명을 딴 것이지만31) 성리
학의 도통선상이 있는 ‘伊川’ 程頤와 ‘雲谷’ 朱熹를 염두에 둔 것이니, 천
곡서원의 ‘천곡’은 ‘영봉’이라는 이름이 갖는 성주의 지역적 특수성보다 성
리학적 보편성을 더욱 많이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영봉서원을 천곡서원으로 바꾼 것은 서원의 성격을 도학적으로 명확히 규
정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제향인물과 관련된 논란을 일으키며 성주의 도통을 적극적으로
확립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충절의 성격을 지닌 이조년과 이인복 등 성
주 이씨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서원의 건립이 성리학의 발달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성주와 지역적 연고가 있으면서 조선 도학의 조종이라
할 수 있는 김굉필을 추봉하게 된다. 여기서 비로소 갈등이 생기게 된다.
고려 말의 충절과 조선 초의 도학이 서로 부딪히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
다. 이 둘의 경쟁과 갈등에서 결국 도학이 승리하게 된다. 서원에는 정이
와 주희를 추봉하고, 정구와 장현광을 이어서 배향하여 성주의 도통이 어
떻게 형성되고 전개되었던가 하는 점도 명확하게 보였다.
臨ㆍ忠肅公宋希奎ㆍ七峰金希參ㆍ臺巖洪繼玄, 今廢.”

 

31) 서원이 있던 곳의 지명이 雲谷坊이고 이곳 앞을 흐르는 물의 이름이 伊川이
었기 때문이다.
60

 

셋째, 서원의 세력기반은 신진 사림파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점이다. 성
주에 오랜 기반을 둔 성주 이씨는 성주의 중심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
의 서원건립 시도가 위차 문제를 두고 신진 사림파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
었고, 이에 그들은 당초의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노경린의 후임으로
이황의 제자 황준량이 새로운 성주목사가 되면서 천곡서원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성주 이씨라는
씨족집단이나 지역적인 특수성이 講明道學이라는 사림파의 명분에 밀릴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넷째, 성주 유학은 도통선상에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공존을 모색하였다는 점이다. 성주에는 천곡서원이 세워지고 여기에 제향
된 인물을 중심으로 도통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천곡서원에는 향현사를
따로 두어, 거기에 제향된 인물들이 도통선상에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성주의 주요 학맥을 이루고 있는 것 또한 수용하고 있다. 김굉필
의 제자 도형에서 송희규로, 송희규에서 김희삼으로 이어지는 향촌 사회
의 사승의식이 그것이다. 이것은 드러난 도통의 관계로 단일화할 수 없는
향촌 사회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것이며, 아울러 서원에서 향사되는 인
물과 공동의 노선을 펴면서 성주 향촌 사회의 구심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Ⅳ. 성주 강안학파의 형성과 진통
정치사상사적 측면에서 강을 중심으로 영남을 둘로 나누어 이해하고자
하는 생각은 16세기 이후 이황과 조식이 학단을 이끌면서 더욱 뚜렷해졌
다. 퇴계학파는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에, 남명학파는 진주를 중심
으로 한 경상우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때로 갈등하고 때로 화합하면서 독
특한 영남의 유학사상사를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강을 사이에 둔 대립은
鄭仁弘(來庵, 1536-1623)을 두고 심각하게 일어났다. 이에 대한 자료를
잠시 보이면 다음과 같다.

 


(가) 江左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來庵선생을 공격하려고 하자, 趙月川이 그
것을 굳게 금하여 중지시켰고, 또 成均館 가운데 퇴계선생의 영정을 걸려고
하였는데, 일이 잘못되어 건물 처마에 아래에 두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상
한 일이라 할 만하다.32)
(나) 대개 曺南冥이 晦齋에게 불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인홍이 老先生
(이황: 필자 주)을 모욕하고 헐뜯는 것 또한 심했다. 마침 오현 종사를 청하
는 날을 맞아 정인홍이 국정을 전횡하여 비록 드러나게 저지하는 일은 없었
지만 자못 의심스러운 점은 있었다.33)
강우가 모두 정인홍에 대하여 옹호하거나 강좌가 모두 정인홍을 비판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학파적 영향력 아래 강의 좌우는 대립했다. 위의
자료는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가)는 정인홍을 신명으로
생각했던 그의 제자 정경운이 쓴 󰡔고대일록󰡕의 일부로, 강좌의 유생들이
정인홍을 비판하였던 상황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이황의 제자인 金富
倫(雪月堂, 1531-1598)의 아들 金坽(溪巖, 1577-1641)이 쓴 󰡔溪巖日錄󰡕
의 일부로 정인홍에 대한 반감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영남을 하나의 통일된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노력은 성주의 江岸學派에
의해 적극적으로 시도되었다. 그 중심에는 이황과 조식의 고제인 정구와

 

32) 鄭慶雲, 󰡔孤臺日錄󰡕 乙巳年(1605, 宣祖38) 12月 8日條, “聞江左儒生上䟽, 欲
攻來庵先生, 趙月川固禁中止, 又館中掛退溪先生, 行事差誤, 處于殿廡下云, 可
怪.”
33) 金坽, 󰡔溪巖日錄󰡕 戊申年(1608, 선조41), 7月 27日條, “盖曺南冥, 旣不滿晦
齋, 而鄭也侮毁老先生又甚. 適當從祀上請之日, 鄭也專國, 雖無顯顯沮止之事,
頗有可疑.”
62

 

김우옹이 있었다. 정구는 21세에 이황을, 24세에 조식을 스승으로 모시며
이들의 학문을 폭넓게 수용하여 대성한다. 김우옹 역시 이황과 조식의 제
자로서 두 스승의 학문을 통일된 체계 속에서 수용한다.34) 정구는 이를
이황의 正脈과 조식의 高風이 그에게 계승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김
우옹의 제문을 통해 제시된 이 정구의 고풍과 정맥에 대한 논의는 정인홍
에 의해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령은 󰡔계암일록󰡕에서 이에 대하여 다
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지난번에 東岡 金宇顒 공이 세상을 떴을 때, 한강이 輓詩를 지었는데, “퇴
도의 정맥을 영구히 경모하고, 山海의 고풍을 특별히 흠모하네[退陶正脈終天
慕, 山海高風特地欽]”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인홍이 더욱 성을 내어 ‘高風正
脈에 대한 辨’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跋’을 짓고 또 다시 ‘續跋’을 지으
면서 미친 듯한 언사와 터무니없는 말을 하여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였다.35)

 


정인홍의 정구에 대한 공격은 정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가는 강안학파
에 대한 반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남명집󰡕 발간을 두고 발생했던 이
들의 불편한 관계는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김우옹의 죽음에 대한 정구의
만사를 두고 정인홍은 영남지역에서 일대 논란을 벌였다. 특히 성주지역
에서는 정구와 정인홍의 대립이 심각하게 일어났는데, 17세기 초에 발행
하였던 李昌祿 사건과 朴而立 사건이 이를 대변한다. 이 사건은 성주지역
향촌 사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학파적 쟁투이며, 또한 강안학파 형성에 따
른 일련의 진통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구체적으로는 정인홍의 문도들

 


34) 李玄逸(葛庵, 1627-1704) 역시 이에 근거하여, “일찍이 남명 선생의 문하에
서 수학하여 이미 立身行己와 出處進退의 의리를 알게 되었으며, 다시 문순
공 퇴계 선생을 찾아뵙고 성현이 전하는 도통의 진결을 듣고 持敬과 窮理가
도에 들어가고 덕에 나아가는 요체임을 알았다.”(李玄逸, <東岡文集跋>, 󰡔東
岡集󰡕 所收)라고 하였다.
35) 金坽, 󰡔溪巖日錄󰡕 戊申年(1608, 선조41) 10月 16日條, “頃年, 金東崗宇顒公
之卒, 寒崗作輓詩, 有退陶正脈終天慕, 山海高風特地欽之句, 仁弘尤忿, 旣作高
風正脈卞, 又作跋又作續跋, 狂辭悖語, 不可掛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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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구를 비난하고, 이에 대하여 정구의 문도들이 다시 반격하는 상황으
로 전개되었다. 이에 대한 사정은 생원 宋遠器(啞軒, 1548-1615)가 올린
상소문36) 등에 잘 드러난다.
이창록 사건은 1609년 임해군이, 1614년 영창대군이 피살되면서 일어
났다. 이창록은 이에 대한 통분의 발언을 하였는데 주변에서 이것을 듣고
관에 고변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鄭活이나 成卞奎 등 남명학파가 중
심이 되었고, 박이립도 개입되어 있었다. 박이립은 이를 통해 이창록을 옹
호하는 세력을 제거하고 향촌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인홍의 문인인 성변규 등 북인계열의 사인들과 행동을 같
이 하였다. 全恩論을 주장하였던 정구는 그들의 최후 표적이었다. 󰡔성산지
󰡕 「烈女」조에 전하는 다음 일화는 이를 잘 대변한다.

 

私婢 玉今은 李昌祿의 첩으로 明巖의 上溪村에 살았다. 처음에 창록은 광
해군 때 母后를 폐하고 형제를 죽이는 일을 반대하는 상소를 맡아서 초안하
였다. 창록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가 鄭仁弘에게 고하여 큰 옥사를 일으켰는
데, 鄭逑를 모함하기 위한 것이었다. 李爾瞻의 무리가 사람을 시켜 은밀하게
창록을 꾀며 “만약 정구를 끌어들이면 살 수 있다.”라고 하였으나, 창록은 따
르지 않아 마침내 가혹한 형벌을 당하였다. 또 그 첩을 국문하고 꾀며 “네가
만약 정구가 시켰다고 자백하면 죽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화가 더
욱 혹독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옥금이 “정구는 실로 그 일을 모르니, 첩
이 어찌 죽는 형벌이 두려워 큰 군자를 모함하겠는가?”라고 하고, 끝까지 따
르지 않고 고문으로 옥에서 죽었다.37)

 

36) 이 상소문은 󰡔조선왕조실록󰡕 광해 2년(1610)조 경술조에 실려 있다.
37) 󰡔星山誌󰡕 「烈女」, “私婢玉今, 李昌祿之妾也. 居明巖之上溪村, 初昌祿在光海時,
直斥廢母殺兄弟之事草疏, 有與昌祿不好者, 經告鄭仁弘, 搆成大獄, 盖欲因誣鄭
逑也. 李爾瞻輩, 使人陰誘昌祿, 曰 若援鄭逑則可生矣. 昌祿不從, 竟被酷刑, 又
鞫其妾而誘之, 曰 汝若以鄭逑敎誘爲供, 則可無死, 不然, 禍尤酷矣. 女曰 鄭逑
實不知其事, 妾奈何畏歿身之誅, 誣陷大君子乎? 終不從, 栲死獄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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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록 사건을 계기로 하여 성주목은 고령현에 예속되었다. 뿐만 아니
라 고변한 사람들에게는 포상을 하고, 성주에 대해서는 유생이 그 문제의
발단이었기 때문에 성주 선비들에 대해서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停擧의 처벌을 내렸다. 고령현에 예속된 성주는 큰 읍이 작은 현에 붙은
격이므로, 고을을 다스리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이 때문에
1616년(광해군 8) 정월에 성주를 新安縣으로 강등시켜 유지케 하였다.38)
인조반정 이후에는 성주에 대한 불이익을 시정하면서 정거를 풀어 製述을
시행케 하기도 했다.
박이립이 정구를 비판한 것은 1609년 겨울부터였지만, 박이립에 대한
평판은 그 이전부터 정구의 문도 사이에서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長兄과 송사를 일으켰고 과거 시험장에서 考官을 구타하기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 朴希亮이 讀會에 참여하였으나 성실하지 못
하다 하여, 정구의 문도들이 그가 사는 곳에 말뚝을 박고 출입을 통제하
려 했던 사실이 󰡔광해군일기󰡕에 전한다. 이것은 星州假牧을 지냈고, 의병
활동을 통해 강력하게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정인홍의 지역적 기반과
맞물려 있는 것이라 하겠다.

 


정구에 대한 박이립의 공격은 정구의 제자 李堉(心遠堂, 1572-1637)을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육은 정구와 교유하였던 李勝(晴暉堂,
1552-1598)의 아들로 스승 정구가 세상을 뜨자 心喪을 입었던 사람이기
도 하다. 박이립은 그를 공격하면서 그 영향이 정구에게 미치게 할 생각
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감사에게 정구가 자신을 해치려할 뿐만 아니
라, 정구의 全恩說이 군주를 무시한 데까지 이르렀다는 주장을 폈다. 정구
의 전은설은 광해군이 형제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하여 임해군에 대한 처
38) 성주는 정치적인 문제로 인한 다양한 강등과 회복의 경험을 갖고 있다. 즉,
성주목은 1614년에는 李昌祿 사건으로 新安縣으로 강등되었다가 인조반정으
로 회복되었고, 1631년에는 朴訢이 역모로 처형되면서 성산현으로 강등되었
다가 1640년에 회복되었다. 그리고 5년 뒤인 1644년에는 李綣의 역모로 성
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3년에 다시 성주목이 되었다.
리를 온건하게 하기를 바라는 상소였다.39)

 


박이립의 기도는 정구를 역모와 은근히 접목시켜 군주를 자극하고 향권
을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사실 당시는 이미 전은론의 정당성이 천명되면
서 할은론과 전은론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던 일련의 긴장이 소강상태에 접
어들고 있었던 시기이다. 이에 박이립은 이를 다시 거론하면서 광해군을
자극하고자 했던 것이다. 감사는 박이립의 나이가 70이 넘어 刑訊할 수
없다40)는 내용으로 回啓하자 광해군은 그를 죄로 다스리지는 않았다. 당
시 실록의 기록은 이렇다.

 


성주 유생 정준민 등이 상소하여 兇人 朴而立의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였
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정구가 향리에 돌아와 있었는데, 鄭仁弘의
門徒가 미워하여 헐뜯고 배척하였으나, 정구는 쟁론하지 않았다. 박이립이
몹쓸 행실이 있으면서 정인홍의 당인들과 함께 정구가 불측한 일을 했다고
날조하고 또 姓字를 讖說에 맞추어 계속 낭설을 퍼뜨리니, 정구가 관부에 나
아가 대죄하였다. 감사가 그 사실을 듣고 조정에 보고하자 왕이 감사에게 조
사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감사가 이립의 나이가 70이 넘어 刑訊할 수 없
다는 내용으로 회계하자 왕이 그만두고 다스리지 않았다. 이에 준민이 상소
하여 다시 끝까지 조사하도록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왕이
이미 정구의 恩義를 온전하게 해야 한다는 논의를 혐의했고 또 정구가 정인
홍과 너무 반목하는 것을 이유로 더욱 소원하게 대하자, 정구는 화가 미칠까
걱정하여 깊은 산중으로 옮겨가 문도들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41)

 

39) 이에 비해 대북파는 임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割恩論을 펴면서 왕권
확립이론을 내세웠다. 곧 형제 사이에서도 王法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형
벌을 가해도 倫氣를 그르치지 않아야 한다는 이론이다.

 

40) 송원기의 주장대로라면 박이립은 1550년생으로 61세다.
41) 󰡔조선왕조실록󰡕 광해 31권, 1610년 7월 28일(신미), “星州儒生鄭俊敏等, 上
疏請治凶人朴而立之罪, 王不許. 時, 鄭逑退歸鄕曲, 鄭仁弘門徒, 憎疾詆斥, 逑
不與之校. 而立有惡行, 與仁弘之黨, 誣言鄭逑有不測之事, 且以姓字應讖, 唱說
不已, 逑詣府待罪. 監司聞之, 王使監司覈治之, 監司以而立年過七十, 不可刑訊
回啓, 王置而不問. 俊敏上疏請更窮問, 王不許. 王旣以逑全恩之論爲嫌, 又以逑
與仁弘太左, 待之益疎, 逑恐禍及, 移居深山中, 謝遣門徒.”
66

 


사태가 이렇게 되자 생원 정준민 등이 감사의 조사에 문제를 제기하면
서 박이립을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광해군은 허락하지 않았고, 송원
기 역시 거듭 상소를 올려 박이립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거듭된 상소는 조정을 협박하는 것과 같아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는 비답만 받았을 뿐이다.42) 인조반정 후 박이
립은 中道付處되었다. 정구를 모함했고, 이창록 사건을 날조했다는 것이
그 죄목이었다.
성주 지역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은 향촌 사회의 주도권 장악과 맞물
려 있다. 1620년(광해군 12) 정구가 사망하면서 그의 문도들은 다시 구심
점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것은 정구의 문도들이 그의 스승 정구가 강도하
던 곳을 기념하여 다양한 사업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1627년
에는 백매원에 있었던 檜淵草堂 자리에 檜淵書院을 건립하면서 향론을 장
악하게 되었다. 이로써 성주를 중심으로 낙동강 중류 그 연안지역에서는
한강학파의 세력이 확대되었고, 성주는 강안학파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이
다.
박이립과 이창록 사건은 정구를 중심으로 한 강안학파의 형성과정에서
생긴 일련의 진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강좌지역의
퇴계학파와 강우지역의 남명학파는 이황과 조식의 생존 당시에는 세력이
거의 대등하였으나, 이후 남북으로 나뉘어 상당한 갈등관계에 놓이게 되
었다. 17세기 이후 그 중간 점이지대인 강안지역에 이황과 조식을 함께
스승으로 모신 정구를 중심으로 강안학파가 형성되면서 진통이 따르기는
하였으나 통합과 소통의 노선을 확보하게 된다.

 

42) 󰡔조선왕조실록󰡕 광해 33권, 1610년 9월 18일(경신)에는, “이 일은 조정에서
이미 참작하여 처치하였다. 그런데 그대들이 이렇게 협박하는 상소를 올려
대들면서 꼭 자기들의 뜻대로 행하게 하려 하다니 뒤에 폐단이 있을 듯도 하
다. 안심하고 조용히 있으면서 스스로 몸을 닦도록 하라.”라며 비답을 내리고
있다.
67

 

Ⅴ. 성주 강안학파의 규모와 전개
성주지역은 兩岡, 즉 鄭逑(寒岡, 1543-1620) 및 金宇顒(東岡,
1540-1603)과 그들의 문도를 중심으로 소통과 통합의 영남학을 만들어
가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향촌 사회에 있어서 일련의 갈등과
충돌은 피할 수 없었는데, 이미 앞서 살펴본 바대로 이창록 사건과 박이
립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이들은 이황과 조식의 양 문하에 들면서 영남의
통합노선을 구축하였다. 정구와 김우옹은 어릴 때부터 이웃해 살면서 절
친하게 지냈으나, 김우옹이 벼슬을 하면서 주로 성주 지역을 떠나있게 되
는데 비해, 정구 역시 외직 등을 역임하기는 하였으나 성주라는 지역을
바탕으로 많은 문도를 길러냈다. 우선 이 兩岡의 문도에 대해서 파악해
둘 필요가 있다.
정구는 한강정사ㆍ회연초당ㆍ천곡서원 등에서 문하생을 기른다. 그의
문도는 󰡔회연급문록󰡕을 통해서 그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은 처음
에는 50명의 인원을 등재하는 것으로 그쳤으나, 정구의 종손인 鄭煒(芝厓,
1740-1811) 대에 와서 170명을 추가하였고, 후손 鄭在夔(省齋,
1857-1919) 대에 와서 60명을 추가하였으며, 다시 후손 鄭宗鎬(磊軒,
1875-1956)와 鄭在華(厚山, 1905-1978) 대에 와서 단자를 받아 40명을
추가하였다. 이렇게 해서 논란이 있는 장현광을 제외하더라도, 그의 문도
는 도합 342명에 달한다. 이러한 한강학파는 임란 때 순국한 金誠一이나,
관직생활로 일생을 보낸 柳成龍의 학맥과 견주어 볼 때 퇴계학파와 남명
학파를 통틀어 가장 큰 학파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김우옹은 20세 되던 해에 정구와 함께 성주교수로 부임한 조식의 제자
吳健(德溪, 1521-1574)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24세 때 회령포 만
호 金行의 딸이면서 동시에 조식의 외손녀인 김씨와 결혼하게 된다. 이
해 겨울에 조식의 문하에 나아가 직접 배우게 되고, 조식은 그를 특별히
아껴 평소 차고 다니던 惺惺子라는 방울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27
세에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갔다가 평소 존경하였던 이황을 배알하면서 사
제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보듯이 그는 영남학의 양대 산
맥이라 할 수 있는 조식과 이황의 제자가 되어 퇴계학과 남명학을 동시에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조식의 직전제자인 金耼壽(西溪, 1535-1603)를 주목할 필요
가 있다. 그는 조식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아들을 따
라 예안으로 가게 되면서 이황의 제자들과 교유하며 퇴계학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가학으로 시작한 그의 학문은 李文楗이 성주로 유배를 오자 책
을 지고 가서 수학하면서 본격화되었다.43) 구체적인 성리서를 접한 것은
조식의 제자 오건과 이황의 제자 황준량 등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부터였
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성주 강안학파의 중심을 이루었던 정구
학맥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성주가 정구의 본향이면서
가장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안학파의 종장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정
구는 그 제자들의 범위가 성주를 중심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었고, 정인
홍 및 북인과의 경쟁 구도 속에서 그의 학문 세력을 장악해갔다. 인조반
정 이후에는 정인홍의 북인세력이 거의 소멸되면서 성주는 범 퇴계학파
내지 강안학파의 중심이 된다.
정구의 학맥은 성주권(185명)을 중심으로 해서 인근의 안동권(35명),
진주권(26명), 경주권(44명) 등으로 광포되어 있었다. 칠곡에 살았던 李潤
雨(石潭, 1569-1634)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이윤우가 정구를 찾아 갔
을 때, 정구는 그에게 학문의 순서를 정해 주는 등 면려하기를 아끼지 않
았다고 한다. 정구의 학통이 이윤우-李道長(洛村, 1603-1644)-李元禎(歸
巖, 1622-1680)에게로 이어지고, 이윤우는 회연서원에 종향되는 은전을
입기도 했다. 또한 장현광의 손자 張銾(訴梅堂, 1622-1705)이 이원정의

딸에게 장가들게 되면서 인동 장씨와 혼맥을 갖게 된다. 이는 정구와 장
현광에 의한 이른바 한려학파 내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
이라 할 수 있다

 

 

43) 李象靖, <行狀>(󰡔西溪集󰡕 卷3), “黙齋李公文楗, 嘗謫居州境, 公負笈往從, 李公
深可愛敬.”
69

 

󰡔성산지󰡕에 정구의 제자로 등록된 사람은 도합 70인이다. 이 책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야 하겠지만 정구와 그 문도들로 구성된 제1세대 성
주 강안학파의 규모를 대체적으로 확인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여기에는
사촌 간에는 물론이고 崔𨏈과 崔轔, 李天培와 李天封처럼 형제가 함께 문
하에 든 경우도 있고, 宋光廷과 宋時詠, 李潤雨와 李道長과 같이 부자가
함께 문하에 들기도 했다. 당대 성주의 선비들은 모두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성주는 정구와 그 문도들의 학문
적 거점 지역이었던 것이다.
정구와 그의 문도들로 구성된 성주의 강안학파는 정구와 정인홍의 갈등
과정에서 당연히 정인홍을 배척하며 스승 정구를 변호하는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金輳와 같이 정인홍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거
나, 朴羾衢와 朴翂衢처럼 절교시를 지어 정인홍과 결별한 데서 이것을 분
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박이립 사건이 일어났을 때 상소문
등의 글을 써서 스승을 적극적으로 변호하기도 했다. 宋遠器와 李忠民, 그
리고 張鳳翰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정구의 문도들
은 북인과 결별하고 자연스럽게 남인으로 좌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성주의 강안학파는 정구를 위한 다양한 사업 혹은 이와 유관한 일
을 하며 그들의 학문적 결속력을 다져나갔다. 정구의 탄생지인 사월, 강학
처인 회연서원ㆍ사창서당ㆍ무흘정사 등을 비롯하여 무흘구곡, 인현산의
묘소 등 정구와 관련된 유적이 있는 곳을 모두 소중히 가꾸어 나갔으며,
그들 역시 그의 후손들에 의해 향사되었다. 회연서원[이윤우 제향]은 물
론이고, 덕천서원[김주, 김즙, 김천택 제향], 도천서원[배상룡, 배상호 제
향], 매양서원[송원기 제향], 신계서원[이경, 이숙, 이육, 이학 제향], 덕
암서원[이주, 이천배, 이천봉 제향], 이양서원[장봉한, 장이유 제향], 오암
서원[최항경, 최은, 최린 제향], 한천서당[이정현 제향], 회연서원 별사[이
서 제향] 등이 대체로 그러한 곳이다. 각 문중에서는 이러한 서원을 중심
으로 성주의 강안학적 전통을 살려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정구의 성주 학맥은 배상룡과 최항경, 그리고 이서 등을 중심으로 강한
결속력을 지니고, 徐思遠(樂齋, 1550-1615)과 孫處訥(慕堂, 1553-1634)
등의 대구 지역 사인들로 뻗어나가게 된다. 그러나 그의 학맥이 학문적으
로 더욱 풍성하게 된 것은 제자이자 질서의 관계에 있었던 인동의 張顯光
(旅軒, 1554-1637)과 거창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와서 정구에게
입문하게 되었던 기호지역의 許穆(眉叟, 1595-1682)을 통해서였다. 이들
에 의해 한강학파가 낙동강 연안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즉 장현광을 통해 영남 理學의 전통이 강안학의 주요 거점으
로 새롭게 구축되기 시작하였고, 허목을 통해 근기실학 계열로 발전해 나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현광과 허목이 성주에 학문적 거점을 마련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지
만, 정구와 장현광, 장현광과 허목의 문인들이 서로 중첩관계를 가지면서
한강학파가 성주를 중심으로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장현광
은 정구의 행장을 쓰면서 스승의 생애를 정리하였고, 이어 정구와 함께
천곡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정구가 꾸준한 관심을 가졌던 지역학을 바탕으
로 성주의 읍지를 편찬한다. 그리고 정구가 짓던 행장을 받아 김우옹의
행장을 완성하기도 한다. 허목 역시 정구의 문집에 대한 서문을 적으며
스승의 사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후 회연서원과 관련
된 다양한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그의 스승을 기렸다.


장현광과 허목의 흔적을 성주에서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장현광의
경우 외조부 이팽석을 따라 성주의 암포촌에서 살면서 성주 선비 이천배
와 도의로 사귄다. 그리고 이천배를 비롯하여 이감·이천봉·이침·이태연 등
의 묘갈명을 짓기도 하며, 이주·이지화·장이유·여효증·이창진·송시영 등 많
은 성주 문인을 기른다. 허목 역시 가야산을 유람하면서 스승 정구를 떠
올리기도 하고, 장응일을 임금에게 추천하기도 하며, 이윤우·배상룡·이도
장·이홍우 등의 묘갈명을 짓기도 한다. 그의 성주 문인으로는 배정휘·이담
명·김시영 등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성주지역에는 李源祚(凝窩, 1792-1871)가 등장하여
회연서원과 청천서원 등에서 강회를 열고, 정구의 무흘정사에 見道齋라는
편액을 써서 달며 그의 문도들과 성주에 새로운 학풍을 일으켰다. 1809년
增廣文科에 급제한 그는 鄭宗魯(立齋, 1738-1816)의 문인으로, 柳範休(壺
谷, 1744- 1823)와 柳致明(定齋, 1777-1861)을 따라 공부하였다. <復性
圖說> 등에서 보듯이 主敬을 근본으로 하며 궁리하였고, 당대의 현실적
상황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1862년 봄에 농민들이 봉기하자
조정에서 三政의 득실을 논하는 책문을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이에 이원
조는 근본을 깊이 탐구하여 경계로 삼을 것을 권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
종이 등극하여 교서를 내려 의견들을 올리게 하자, 다시 一本四要를 말한
봉사를 올려 당대의 현실구제책을 구체적으로 논하기도 했다.
성주지역에서 이원조와 도의로 사귀었던 사람은 李大榮과 金昊誠 등이
대표적이며, 그의 성주 문인으로는 李震相과 李注相 등 집안의 자제들뿐
만 아니라 金瓙·白鑾洙·石燦求·金寅吉·姜文煥 등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다.
이원조는 성주지역에서 많은 글을 남기기도 했다. 대과와 소과에 급제한
이 고을 사람들이 함께 지어 修契하는 곳인 蓮桂堂과 李彦富의 서재인 遯
庵에 기문을 짓거나, 李源祜ㆍ李命龍ㆍ李命夔ㆍ張以兪 등의 행장 및 呂孝
思ㆍ李鍾英ㆍ李ㆍ李簬ㆍ李驎 등의 묘갈을 짓고, 다양한 성주선비 문집
의 서발을 쓴 것은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특히 이진상은 이원조와 유치명의 학맥을 잇고 있으면서도 그 스스로는
정구를 학문 연원으로 표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武屹契를 만들어 한강학을
계승하고자 했다. 이는 그가 이정현과 이원조를 통해 내려오는 가학적 전
통을 매우 소중히 하였음을 방증한다. 그는 정구 이후 가장 강력한 강안
학단을 이끌기도 했다. 독실한 실천력을 갖고 있었던 都漢孝, 청렴ㆍ검소
하고 의리에 투철하였던 李九相, 문학과 행의로 세상에 드러났던 李奎熙,
李重夏에 의해 발탁된 李基容, 고을 사람들이 그의 법도와 조리를 존경했
던 李德厚 등은 모두 그의 성주 제자들이었다.
17세기의 성주 강안학파는 정구를 중심으로 한 한강학파로 환치가 가
능하다. 김우옹의 제자인 김주·도세순·송원기·이육 등이 모두 정구와 중첩
적인 사승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성주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서
한강의 제자들로 파악된 사람은 185인에 이르며, 󰡔성산지󰡕에 등재된 인물
만 하더라도 70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장현광과 허목은 대표적인 인물이
다. 이들은 성주와 깊은 관련을 맺으면서 영남 이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근기 지방으로 한강학맥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에 이
르러 성주 강안학은 이원조와 이진상 등에 의해 부흥된다. 이러한 과정에
서 성주 강안학파의 종장인 정구는 여전히 강한 구심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Ⅵ. 남은 문제들
본고는 道學이 성주지역에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착근하는가 하는 문제
및 성주에서 江岸學派의 중심을 이루었던 寒岡學派가 어떤 시련 속에서
성장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이를 통해 사림파에서 도학파로 전
개되는 한국유학사의 보편성을 성주지역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안학파가 성주지역에서 어떤 진통을 겪으며 성장하는가 하는 부분을 이
해할 수 있었다.
성주 유학은 가야산과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지리적 환경, 가야 고토
위의 신라 유학적 전통이라는 역사적 환경 하에서 전개된다. 성주에는 지
역의 비옥한 在地的 바탕을 확보한 사림파의 성장에 매우 유리한 지리적
환경을 갖추고 있으며, 강을 중심으로 상하로는 기호학과 영남학이, 좌우
로는 퇴계학과 남명학이 서로 회통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다
양한 성씨들이 어울려 살면서 수많은 儒賢을 배출하였다. 특히 川谷書院
등 21개에 해당하는 서원이 건립되면서 성주의 유학은 빠르게 발달해 갈
수 있었다.
영봉서원에서 천곡서원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성주지역의 도학이 어떻게
뿌리내리는 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황준량 등 신진 사림파에 의해 이조
년 등 충절 성향의 인물이 배제되고 조선 도학의 祖宗이라 할 수 있는 김
굉필이 향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주 지역에서 발생한 이창록 사건
과 박이립 사건은 당시 정구를 중심으로 한 성주 강안학파의 형성에 따른
진통으로 파악된다. 정인홍 세력의 침투에서 벗어나면서 성주지역은 정구
의 학맥으로 단일화되고, 장현광과 허목에 의해 영남 理學과 근기 실학으
로 계승된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원조와 이진상 등에 의해 강안학은
새로운 시대적 응전력을 기르게 된다.
본고가 성주 지역을 중심으로 강안학적 측면에서 다룬 것이지만 더욱
깊이 따져야 할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첫째, 성주지역의 강안학적
특징을 따지는 것이다. 강안학의 일반적인 특징에 대하여 필자는 고령 유
학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학계에 제출한 바 있다. ‘회통성-畿嶺學 및 退南
學의 융합’, ‘실용성-博學에 바탕한 실천정신’, ‘독창성-세계에 대한 새로
운 인식’이 그것이다. 이것은 성주의 강안학에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
다. 성주 지역이 고령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 회통성과 실용성, 그리고
독창성이 고령지역에 비해 더욱 활발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둘째, 본고가 지니는 거시사적 한계를 극복하는 일이다. 본고는 성주지
역의 유학적 기반을 지리적인 측면과 역사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시대적 흐름에 따라 천곡서원의 건립에 따른 도학의 착근, 정구를 중심으
로 한 성주 강안학파의 형성과 전개를 다루었다. 그러나 본고는 이 분야
연구의 지형도를 그린 측면이 강하므로, 이에 대한 정밀한 추가 논의가
미시적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컨대, 성주지역에서의 김종직 학단이
갖는 학문적 의미 등을 면밀히 따지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자세
하게 다루어 본 연구의 논지를 더욱 보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성주 강안학파의 개별 인물에 대한 심층적 연구를 하는 일이다. 󰡔
성산지󰡕에는 정구의 직전 제자들이 70명이나 등재되어 있다. 이윤우ㆍ배
상룡ㆍ최항경ㆍ김천택 등 허다한 문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강안학
파의 핵심 인물이라 하겠는데, 그 일부가 연구자의 기호에 따라 단편적으
로 검토되기는 하였으나, 강안학이라는 전체적 범위에서 개별 인물이 연
구되지는 않았다. 또한 역사적 추이에 따라 이들의 학문과 사상이 어떻게
계승되고 변용되는가 하는 문제를 따지는 데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한말까지 진지하게 계승되어 왔던 성주 지역의 강안학은 이로써 그 정체
가 명확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성주는 유학사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는 사실은 재언을 요하
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주’와 ‘유학’을 주제어로 내어걸고 진지하
게 고민한 적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문제적 상황 속에서 이 분야 연구는
지속되어 마땅하다. 성주가 영남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이점
을 고려한다면, 성주는 마땅히 강안학의 거점이 될 수 있다. 아울러 연구
의 범위 또한 영남 혹은 한국 전체로 확대되어 갈 수 있어야 한다. 소통
과 상생을 위한 강안학은 이러한 비전을 갖고 진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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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A Study on the Settlement of Moral Philosophy(道學)
and the Formation of Gangan School(江岸學派) in the
Seongju Area
Jeong, Woo-rak
This study set out to investigate the settlement process of
moral philosophy in the Seongju area and what kind of hardship
the Hangang School, which made up the central force in the
area along with the Gangan School, went through in the process
of growth. In Seongju, Confucianism developed in the unique
geographical environment around Mt. Gaya and the Nakdong
River and in the historical environment of Shilla's Confucian
heritage in Gaya's native land. The Seongju area provides a
geographical environment very favorable to the growth of the
Sarims, who secured their foundation as local powers along the
coasts of the Nakdong River. There were open communication
channels along the river between Giho School and Yeongnam
School up and down and between Toigye School and
Nammyeong School right and left. In that environment, the area
was home to many different families and produced a good
number of prominent Confucian scholars.
The process of setting up Yeongbong Lecture Hall and turning
it into Cheongok Lecture Hall gives some clues to un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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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moral philosophy took root in the Seongju area. In the
process, the new Sarims including Hwang Jun-ryang excluded
loyal characters such as Lee Jo-nyeon and pushed Kim
Going-pil, the royal ancestor of Joseon's moral philosophy, to
the margin. In addition, the Lee Chang-rok event and Park I-rip
event that took place in the Seongju area seem to have been
the labor pains originated in the formation process of Seongju
Gangan School centered around Jeong Gu. The Seongju area
became unified by the academic connections of Jeong Gu as it
grew out of the invasive influence of Jeong In-hong and
incubated Geungi Shilhak by Yeongnam Ihak and Heomok by
Jang Hyeon-gwang. In the latter half of Joseon, Ganganhak was
faced a new phase by Lee Won-jo and Lee Jin-sang and
increased the abilities to take up a challenge of the times.

출처 : 장달수
글쓴이 : 낙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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