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2018. 10. 29. 15:13성리학(선비들)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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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 호*

 

1. 머리말
2. 병호시비와 정재학파의 형성
3. 정재학파 성리설의 특징과 내용
4. 정재학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5. 맺음말

 


요 약 문
이 논문은 영남지역에서 퇴계학 이론을 중심으로 강한 위정척사운동과
의병운동을 전개했던 정재학파의 철학적 특징과 지역적 전개양상을 확인
함으로써, 근대 시기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유학자들의 시대인식
과 그에 대한 대응의 양상을 확인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이 논
문은 병호시비를 중심으로 정재학파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과 그 학파가
지향하고 있는 성리설의 특징,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위정척사 운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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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을 확인하고 있다. 정재학파는 퇴계학의 정통을 김성일과 이상정으로
세우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인적‧학적으로 강한 유대관계를 가지면서
이루어진 학파이다. 이것은 퇴계학의 적통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학파적 결속과 학통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
이다. 이러한 입장은 이황에 의해 제기되었던 ‘리의 능동성’을 견지하되, 이
현일에 의해 강조되었던 리기 각발의 입장을 보완한 이상정의 ‘리기호발설’
이라는 성리설에 바탕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성리설은 강한 정正의 수
호와 사邪에 대한 배척, 그리고 병호시비와 서원철폐반대운동 및 도통론과
같은 행위양상으로 드러났다. 이렇게 보면 정재학파는 다양한 역사적 변혁
기에 주자학적인 정학의 수호를 통해, 당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사람
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강조했던 정이 어떤 의미에서 주자학 내적
인 ‘도통’을 의미하기도 했고, 의병항쟁으로 이행되면서는 ‘주자학’이나 ‘유
학’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위정衛正 의식은 병호시비나 서
원철폐 반대 운동에 매어 달리기도 하고, 지속적인 상소운동이나 의병항
쟁으로까지 나아가기도 했던 것이다.
주제어 : 정재학파, 이상정, 유치명, 퇴계학, 도통론, 정학正學의 수호

 

1. 머리말
19세기 조선 유학은 밀려들어오는 서세동점의 기세 앞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 앞에 봉착해 있었다.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밀려
들어오는 서양의 압력은 지금까지 유학 내부의 싸움에만 매몰되어 있었던 유학
자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차원의 논의 앞에 서게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 앞에서 유학을 버리고 완전한 서구화를 선택하는 경우를 제외
하면, 유학자들의 선택지는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유학적 이념을
더욱 공고하게 구축하고, 철저하게 원칙적인 이념에 따라 현실 문제를 타개하려는
입장이다. 주자학적인 이념의 강조와 그에 따른 실천정신의 당위 설정을 통해
강한 행위양상을 촉발시켜 내고 있는 작업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기존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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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면서, 이 같은 유학을 새롭게 변화시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이론체계를 만들려고 하는 입장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유학의 유의미
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기존의 유학으로는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나온 것으로, 근대 시기 봇물처럼 터진 유교구신론과 공자교 운동 등
이 바로 이와 같은 작업의 결과이다. 셋째는 국망이라는 현실 앞에서라도 ‘유학
의 도는 지켜야 한다’는 선택으로, 이것은 당시의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오로지 유학의 도를 닦고 지키는 것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아도 전체적인 틀에서는 한국 근대
사의 다양한 운동과 연결된다. 첫째의 경우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과 연결되어
있으며, 둘째는 유교구신론을 바탕으로 한 애국계몽운동과 연결되어 있다. 셋째
의 경우는 현실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운동 양상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당시 뚜렷하게 이 같은 입장을 지향했던 사람들이 존재했다. 위정척사 운동은
퇴‧율학의 후예를 막론하고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지역 중심의 학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에 비해 애국계몽운동은 개명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점차 지역으로 번져가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이 운동은 양명학이
나 실학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이후 정통 주자학자들이 여기에 가세하는 형태로
드러났다.
이렇게 보면 서세동점기 조선 성리학자들의 시대적 대응은 주로 척사위정운
동이나 또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드러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운동의
대부분은 개인의 선택에 따라 이루어지기보다는 학파 단위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학파 내에서 선택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많을 경우는 학파의 분열로 이어
지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근대 시기 운동은 그 학파의 학문적 특징과 직접적으
로 연계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운동의 양상 역시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
서 근대 시기 성리학자들의 다양한 활동은 학파별 특징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재학파는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위정척사 운동의 선봉에 섰던 대표적인 학
파이다. 특히 이들은 퇴계학 이론으로 중무장한 채 강한 상소운동과 의병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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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함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학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이론적
특징과 그것에 바탕한 위정척사운동의 양상을 확인하게 되면, 근대 시기 유학자
들의 시대 인식과 그에 대한 대응의 한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영남지
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정재학파의 이론적 특징과 그에 따른 현실 대응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렇게 보면 정재학파에 대한 이해는 근세시기 유학자들의 급박한 현실 인식
과 성리학에 기반한 대응 양상의 큰 줄기를 살펴볼 수 있는 기반이 된다. 특히
이와 같은 이해는 서세동점이라는 강력한 힘에 의해서 굴절되고 파편화 되는
유학의 한 형태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전통사상과 새로운
사상이 혼재된 근세를 좀 더 분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정재학파의 성립(2장)과 그들 학파가 지향하고 있는 성리설의 특징을 살펴보고
(3장), 이를 기반으로 그들의 위정척사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검토(4장)해
보고자 한다.

 

2. 병호시비와 정재학파의 형성
정재학파는 19세기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당시 영남 유림의 종장宗匠
류치명柳致明(定齋, 1777~1861)의 호를 딴 학파이다. 이들은 영남만인소와 위
정척사운동, 의병운동 등을 주도하면서, 19세기 퇴계학맥을 대표하는 학파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들의 학파적 정체성은 퇴계학파의 전개와 분화과정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퇴계학파 전체를 대표한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이들은 퇴계학파 내에서 이황李滉(退溪, 1501~1570)의 종통이 김성일金誠
一(鶴峰, 1538~1593)에게 이어졌다고 보는 사람들로, 학파의 형성은 이를 중심
으로 한 인적 결집과 학문활동의 소산이다.
‘영남남인’과 ‘퇴계학파’는 용어는 달라도 내용은 거의 동치될 정도로 영남지
역은 퇴계학의 발전과 전개의 중심에 서 있다. 그러나 퇴계학은 그 학통의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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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조목趙穆(月川, 1524~1606), 김성일, 류성룡柳
成龍(西厓, 1542~1607), 정구鄭逑(寒岡, 1543~1620) 등과 같은 인물들을 통해
분화하면서 발전했다. 이 가운데 이황의 본향本鄕제자들로 이루어진 조목과 예
안지역 제자들은 인조반정으로 인한 북인세력의 몰락과 함께 절맥되었고, 정구
의 학맥 역시 상대적으로 크게 번성하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실제 퇴계학의
발전과 분화는 김성일과 류성룡의 후예들에 의해 주도된다. 이들 두 학맥은 지
연과 학연, 혼맥 등으로 서로 엮인 채 안동을 비롯한 영남지역에서 많은 제자군
을 형성함으로써, 퇴계학 전개와 발전의 직접적인 모태가 되었다. 이 가운데
김성일의 학맥은 안동지역에 안착하면서 조선후기 퇴계학을 대표하는 학맥 가
운데 하나로 자리를 잡았는데, 정재학파는 바로 이와 같은 김성일 학맥의 적전嫡
傳을 잇고 있다.
정재학파가 학파로서의 단합과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 것은 김성일과 류성룡
계열의 적통시비로 인해서이다. 이것은 김성일과 류성룡 사이의 관계와는 상관
없이1) 그의 후예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흔히 중앙정계 진출이 좌절된 영
남남인 내부의 문제로 정리된다.2) 여기에서 정재학파는 퇴계학의 종통이 김성
일 계열로 흐른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병호시비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들로,
이 과정에서 학적‧인적 단결이 이루어지고 학파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

 

1) 김성일과 류성룡은 함께 퇴계문하를 드나들던 동문관계로, 김성일은 류성룡에 대해서 ‘나의
사표師表’라고 했고 류성룡은 김성일에 대해 ‘나는 학봉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서로를 높였던
관계였다. 특히 류성룡은 일본에 부사로 다녀와서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했던 김성일을
임진왜란 중에 변호하였으며, 김성일 역시 류성룡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여기에 대해
자세한 것은 권오영, 󰡔조선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 돌베게, 2003, 299쪽 이하를 참조. 김성일과
류성룡의 서로에 대한 평가는 張興孝, 󰡔敬堂集󰡕卷1, 「錄‧鶴峯西厓兩先生言行錄」, “柳先生稱金
先生曰, 求爲執鞭, 不可得也. 金先生稱柳先生曰, 吾之師表, 互相推讓云.”이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홍원식은 이것을 대표적인 鄕戰의 한 양태라고 규정하며, 권오영은 중앙정계로 돌파구를 찾지
못한 재야 유림들의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이라고 본다. 여기에 대해 자세한 것은 홍원식, 「근대시
기 영남유학의 운동과 사상」, 󰡔한국유학사상대계Ⅲ󰡕, 한국국학진흥원, 2005, 567쪽을 참조. 권오영
의 입장에 대해서는 권오영, 위의 책, 29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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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학의 적통시비가 구체적인 양상으로 표출된 것은 19세기 초부터 본격적
으로 진행된 ‘병호시비屛虎是非’에서이다. 물론 적통시비가 이때 와서 갑자기 표
출된 것은 아니다. 호계서원이 사액을 받던 1676년부터 이미 그 단초는 발생하
고 있었다. 당시 도산서원에 이황과 더불어 유일하게 조목만이 배향되자, 안동
지역 퇴계학인들은 김성일과 류성룡을 배향할 서원을 건립하려고 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황이 공부했던 백련사 절터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세웠는데, 이것이
1676년 호계서원虎溪書院으로 사액되었다. 이 때 누구의 위패를 좌배향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 되면서 김성일과 류성룡의 제자들 사이에 신경전이 있었던 것이
다. 이 때 당시 영남유림의 종장이자 류성룡의 고제인 정경세鄭經世(愚伏, 1563
~1633)가 ‘나이에서는 비록 류성룡이 4살 적어 견수肩隨에 미치지 못하지만 벼
슬의 차이는 절석絶席에 해당하니 아마도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3)라는
입장을 제시하면서 류성룡을 좌배향하였다. 김성일 계열에서는 불만이 있었지
만, 당시 정경세의 위치 등을 감안하여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다시 불붙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약 130여 년이 지난 후,
‘소퇴계小退溪’로 불렸던 이상정李象靖(大山, 1711~1781)을 호계서원에 추향하려
고 하면서부터이다. 김성일은 오랜 관직생활로 인해 제자들이 주로 혈연과 지연을
통해서 형성되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제자가 장흥효張興孝(敬堂, 1564~1633)
이다. 당시 류성룡의 제자인 정경세가 고관高官을 역임하면서 영남유림의 종장
역할까지 했던 것에 비해, 장흥효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지역에서 제자를 양
성했다. 그러나 정경세 이후 류성룡 계열에서는 영남유림을 대표할만한 제자들
이 많이 배출되지 못했던 반면, 장흥효의 학맥은 그의 사위인 이시명李時明(石溪,

 


3)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서원, 한국사상의 숨결을 찾아서󰡕, 예문서원, 2000, 197쪽 참조. 참고
로 견수는 예법에 5살 이상 차이가 나면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걷지 않고 조금 뒤처져서 따라간다는
뜻으로, 류성룡이 김성일보다 4년 연하이므로 견수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이에 비해
절석이란 한나라 때 어사대부나 상서령 같은 고위직은 어느 자리를 가나 전용석을 마련하여 혼자
앉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류성룡은 영의정까지 지냈으므로 관찰사
를 지낸 김성일과 공적인 자리에서 동석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내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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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1674)을 거쳐 외손인 이현일李玄逸(葛菴, 1627∼1704)에게로 이어지고,
그 학맥은 다시 이상정에게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되면서 김성일 계열은 질적으로
나 양적으로 류성룡 계열을 압도할만큼 큰 학단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에서 그들은 다시 퇴계학의 종통을 김성일로 설정하려 했고, 이상정 사후 그 제자
들을 중심으로 이상정을 호계서원에 추향하려는 노력이 보태어진 것이다.
병호시비는 이러한 상황 위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1812년 예안향교禮安鄕校
에서 이상정을 호계서원에 추향하기로 한 후 1816년이 되면서 의성향교 등에서
다시 추향에 대한 논의를 정하였으며, 그 해 가을에는 청성서원에서 도회를 열
어 이 사실을 확인하였다.4) 그러나 병산서원측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통문을
돌리게 되었고, 이 때부터 본격적인 알력다툼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816년
12월에 호계서원에 있던 위패가 천동遷動되었다는 말이 나오면서 서로 더 이상
메꿀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싸움이 깊어지자
당시 경상도 관찰사까지 나서서 양측을 조정해 보려고 했지만, 병론屛論계열은
줄곧 정치력을 동원하여 호론虎論계열을 압박하였고, 호론 계열은 혈연과 학연
및 지연을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사이를 벌려 나갔던 것이다.5)
이후 1871년 호계서원이 훼철될 때까지도 시비는 지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여전히 그 앙금은 남아 있었다.
정재학파는 이 같은 병호시비의 과정에서 병론계열에 맞섰던 호론虎論계열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특히 정재학파의 종장인 류치명은 이상정의 호
계서원 추향을 주도했던 인물 가운데 한명인 류회문柳晦文(1758~1818)의 아들
로, 자신의 아버지를 이어 그 논쟁을 주도했던 것이다. 류치명은 이상정의 학문
을 높이고 추숭하는 서원의 강회나 도회에서 수준높은 질문과 토론을 통해 그
이름을 드러냈으며, 류장원柳長源(東巖, 1724~1796)의 󰡔상변통고常變通攷󰡕와 류

 

4) 여기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권오영, 앞의 책, 307~308쪽을 참조.
5) 여기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권오영, 위의 책, 301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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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휴柳健休(大埜, 1768~1834)의 󰡔이학집변異學集辨󰡕 교정에 참여하고 󰡔대산실기
大山實紀󰡕를 편집하여 간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상정을 잇는 영남유림의 종장으
로 자리를 잡았다. 정재학파가 형성되었던 배경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하나의 학파’로 묶이게 했던 주된 입장과 그들이 중시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들이 병호시비를 지속하면서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던 것은
퇴계학맥의 적통에 대한 인식이다. 실제 정재학파 대부분의 활동은 이황으로부
터 김성일을 거쳐 이상정에 이르는 길을 퇴계학맥의 종통으로 설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이와 같은 정통의식이 류치명에게 오면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다. 김성일의 제자였던 장흥효는 김성일 사후 류성룡의 문하에서 리기설理
氣說과 존심양성存心養性에 대해서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정구와도 짧은 기간이
었지만 적지 않은 문답이 있었기 때문에, 단순하게 김성일의 제자라고 말하기에
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런데 그의 외손인 이현일은 장흥효를 김성일의 적전
으로 명시하면서 김성일 계열로 설정해 버린다.6) 이것은 이현일 스스로가 김성
일의 학단임을 천명하는 것으로, 그에게는 이미 퇴계학맥의 종통에 대한 의식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이현일의 작업을 이어 종통의식을 발현시킨 사람은 그의 외증손인
이상정이었다. 이상정은 이황의 많은 제자 가운데 김성일이 그 학통을 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이황이 김성일에게 써준 「제김사순병명題金士純屛銘」7)을
든다. 이 ‘병명屛銘’의 내용이 주자학자들에게 도통道統전수의 중심 내용으로 이
해되었던 ‘16자 심법’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상정은 이황이 김성
일에게 써준 ‘병명’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여 「병명발휘屛銘發揮」를 저술하고, 이
를 통해 이황의 도통이 김성일에게 전해졌다고 주장한다. 이후 이상정의 문하에

 


6) 여기에 대해 자세한 것은 金鶴洙, 「17세기 嶺南學派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348쪽 이하를 참조.
7) 병명 자체의 내용은 李滉, 󰡔退溪文集󰡕卷44, 「箴銘‧題金士純屛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집 /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_ 63

 


서는 ‘병명’을 중심으로 한 논의가 계속해서 제기되었으며,8) 이러한 이유에서
‘병명’의 논의는 그 자체로 호론학맥을 정통으로 세우기 위한 노력으로 비춰졌다.
류치명은 바로 이와 같은 이현일과 이상정의 입장을 계승하여, 이를 논거로
병호시비를 진행했다. 그 역시 이황이 김성일에게 ‘병명’을 써 준 것은 은미한
뜻이 있다고 말하면서,9) 이러한 진전을 이어받은 이상정의 학문을 높이고 있다.
특히 류치명은 이상정의 학문을 그가 살았던 안동의 소호리蘇湖里를 본따 ‘호학
湖學’으로 규정하고,10) ‘퇴호학退湖學’의 정립에 최선을 다했다. 이후 류치명의
문인이었던 류치엄柳致儼은 이상정의 글에서 요점을 추려낸 󰡔호학집성湖學輯成󰡕
을 편찬하는데, 류치명이 이 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문을 하여 그 내용을 완성
시켰던 것도 이 때문이다. 정재학파의 학인들은 이러한 도통의식에 따라 내적으
로 학맥의 결속을, 외적으로는 병파학맥과의 적통시비를 진행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재학파의 학인들은 이와 같은 합일된 의식을 어떻게 유지하고
공유했을까? 여기에 가장 큰 공헌을 했던 것이 바로 서원과 향교를 중심으로
한 도회나 강회였다. 젊은 시절 류치명이 노회한 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도회에서 날카로운 질문과 사리가 분명한 토론을 진행하면서였다.
이후 서원과 향교에서의 도회를 주도하고 강의를 진행함으로써 자신의 학맥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49세 때 김성일의 아버지인 김진과 그 아들인 김극일을
비롯한 5형제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빈서원泗濱書院에서 이황이 가장 중시했
던 책 가운데 하나인 󰡔심경心經󰡕에 대해 강론했으며, 󰡔대산실기󰡕의 간행에 참여
한 이후에는 이상정의 학문을 깊이 체득하여 주희의 ‘옥산강의’를 중심으로 한
‘인의예지仁義禮知’ 관련 내용을 많이 강의했는데, 특히 이상정이 세웠던 고산서

 

8) 이상정의 제자인 김굉은 김성일의 묘비명을 쓰면서 ‘병명’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으며, 이야순
은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屛銘圖」를 그렸으며, 류치엄은 여기에다 이황이 스스로 뽑아서 쓴
묘지명인 「自銘」과 김성일이 이황의 행사를 적은 글 가운데 핵심적인 내용을 뽑아서 「屛銘發揮圖」를
그렸다. 여기에 대해 자세한 것은 홍원식, 앞의 글, 568쪽, 각주 7)을 참조.
9) 홍원식, 위의 글, 같은 곳.
10) 권오영, 앞의 책, 33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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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에서의 강의가 유명하다. 류치명은 나이가 들어서도 강론을 그만두지 않을
정도여서, 84세의 노구를 이끌고 유생들과 함께 만우정晩愚亭에서 주희의 ‘인설
仁說’에 대해 강론하기도 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은 류치명의 활동은
이후 그의 제자들이 ‘서원’을 중시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운동에 끝까지
반대했던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류치명은 영남에서 학문적 위상이 대단히 높아졌다. 특
히 그는 1855년 장헌세자 탄생 120주년을 맞아 장헌세자를 부묘하자고 청한 영남
만인소에 관여하면서 정치적 위치까지 확고해졌다. 이 일로 인해 전라도 지도에
서 유배생활까지 하게 되면서, 이후 영남전역에서 그의 문하에 입문하는 유생들
이 많아졌던 것이다.11) 정재학파의 인적단위가 폭넓게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이
다. 문인록에 따르면 류치명은 그 제자의 수만도 550명을 헤아릴 정도이며, 이들
가운데 생원‧진사시 합격자가 34명이나 되었고 문과급제자가 11명에 달했다. 양
적‧질적으로 19세기 중엽 영남유림의 중추적인 학파로 성장했던 것이다.
이후 정재학파는 김흥락金興洛(西山, 1825~1912)과 김도화金道和(拓菴, 1825
~1899)를 비롯하여, 류치호柳致皜(東林, 1800~1845), 류치엄柳致儼(萬山, 1810
~1876), 이만각李晩慤(愼庵, 1815~1874), 권세연權世淵(星臺, 1836~1899), 류필
영柳必永(西坡, 1841~1924) 등과 같은 인물로 이어진다.12) 이들은 진성 이씨와
한산 이씨, 그리고 전주 류씨와 의성 김씨, 안동 권씨 등과 같은 명문가의 자제들
로, 이황과 이상정의 문집을 읽고 류치명과 함께 도회 및 강회를 하면서 적통의
식을 굳혀갔던 인물들이다. 특히 이 시기 서세동점이 본격화 되면서, 이들 대부
분은 내부적으로 적통의식을 키우고 외부적으로는 의병운동을 주도하면서 역사
의 전면에 등장한다. 김도화나 권세연 같은 인물은 이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

 

11) 권오영, 앞의 책, 351쪽 참조.
12) 국학진흥원에서 발간한 󰡔영남 지방의 퇴계학맥도󰡕에는 중요한 류치명의 직전제자 36명이 기재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다 기록할 수 없으므로, 자세한 것은 한국국학진흥원, 󰡔영남 지방의 퇴계학맥도󰡕,
한국국학진흥원, 2002 참조.
특집 /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_ 65

 

며, 류필영과 같은 인물은 파리장서 사건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던 것이다.
정재학파는 직전제자에 이어 재전제자13)에게까지 그 모습이 유지된다. 다만
재전제자로 가면서 현실인식이 바뀌어 공자교 운동을 전개하거나 의병운동을
떠나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인물들도 나오기 시작한다. 김도화
의 제자인 류인식柳寅植(東山, 1865~1928)은 스승과 절연하면서도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며,14) 김흥락의 문인이었던 송기식宋基植
(海窓, 1879~1949)과 이상룡李相龍(石洲, 1858~1932)은 적극적으로 공자교 운
동을 전개하기도 했다.15) 특히 이상룡은 이후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내면서, 독
립운동사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해 정재학파가 재전제자
대로 가면서 그 기본은 척사위정과 의병운동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당시의 현실
을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해 보려는 노력도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정재학파 성리설의 특징과 내용
정재학파는 퇴계학맥의 정통에 서 있는 학파로, 이들의 성리설 역시 퇴계학으
로부터 이상정으로 내려오는 이론적 특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정재
학파가 이상정을 퇴계학의 종통으로 놓으려는 과정에서 성리설 역시 철저한
‘대산학大山學’의 전승을 모토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은 류치명이 보기에 이상정

 

13) 󰡔영남 지방의 퇴계학맥도󰡕에 따르면 재전 제자들은 44명이 기재되어 있다. 자세한 것은 위의
학맥도 참조.
14) 여기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박원재, 「동산 류인식의 계몽운동과 유교개혁론」, 󰡔동양철학󰡕제26집,
한국동양철학회, 2006을 참조. 여기에서 박원재는 흔히 류치명의 재전제자에 해당하는 이들을
‘후기 정재학파’로 기술하면서, 직전제자 대에서 이루어졌던 척사위정이나 의병운동과는 궤를
달리하는 경향성이 발견되는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15) 여기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김종석, 「근대 안동지역 유학자들의 공자교 수양 양상」, 󰡔근현대
영남유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한국국학진흥원, 2009 참조.
66 _ 국학연구 제15집

 

의 성리설이 퇴계학을 가장 정확하게 잇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대
산학을 통해 퇴계학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학으로부터 대산학
을 거쳐 정재학파까지 이어진 성리설의 특징은 무엇일까?
퇴계학파의 성리설은 이황과 기대승奇大升(高峯, 1527~1572)간의 사단칠정
四端七情 논쟁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이 논쟁은 󰡔맹자孟子󰡕에서 성선론의 근거로
제시된 ‘선한 정情인 사단四端’과 󰡔예기禮記󰡕에서 제시된 ‘일상적 정인 칠정七情’간
의 관계를 리기론理氣論으로 어떻게 치환시켜 논의할 수 있을까에 관한 문제이다.
주자학에 따르면 사단이나 칠정 모두 원론적으로는 ‘정’이며, 이것을 리기론의
범주로 치환하면 ‘기氣’이다. 그러나 기는 선과 악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으
므로, ‘순선純善한 정’인 사단을 기로만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
만 그렇다고 ‘정’을 ‘리’로 이해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사단을 어떻게든 ‘리’와
관련시켜 해석하려는 입장과 ‘기’로 보되, 그러한 기 가운데 ‘순선한 것’ 정도로만
이해하려는 입장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황이 전자의 입장을 취한다면,
기대승은 후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황의 입장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려고 할 때 생기는 문제는 바로
‘리’의 개념이다. 주자학에서 리는 운동성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모든 드러남이
나 동정動靜 등은 기의 범주에 속한다. 그런데 사단을 리와 관련시켜 해석하려면,
사단은 리가 능동적 발현의 결과여야 한다. ‘리’ 역시 능동성을 가진 개념으로
설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단칠정 논쟁이 리의 동정여부에 관한 문제이면서 동
시에 ‘순수한 법칙인 리’와 ‘운동 개념을 가진 기’의 관계문제이기도 한 이유이다.
주자학에서 리기관계는 일반적으로 ‘불상리不相離’이면서 ‘불상잡不相雜’인 상태
로 규정된다. 리와 기는 결코 같은 존재가 아니지만, 어떠한 사물도 리와 기의
결합 아닌 것이 없다는 주자학 일반론이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리가
능동성을 가지려면 리와 기는 ‘서로 섞여 있지 않다(불상잡)’는 데 무게 중심을
두고 해석할 수밖에 없으며, 리기의 관계 역시 대대待對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밖
에 없다.
이황은 사단을 리의 능동적 발현에 따른 것으로 보고, 칠정은 기의 발현에

 


특집 /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_ 67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이것은 리기관계를 불상잡에 무게 중심을 두고 해
석함으로써 이 둘을 대대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16) 그리고 이와
같은 해석에 기반하여 리가 기를 주재할 수 있는 능동성을 가진 것으로 해석하
여, ‘리발理發’을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의 성이 능동적으로 자기 선함을 구현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선한 정은 리의 자발적 활동에 따른 결과이다. 따라
서 여기에서 기의 구속력은 약할 수밖에 없다.17)
이렇게 되면서 퇴계학에서는 인간의 선한 본성인 성性을 강조하고, 그것이
가진 능동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공부론을 설정하게 된다. 퇴계학에서 경敬공
부가 강조되었던 이유이다. 미발未發인 성을 잘 가꾸기만 하면 그 성에 의해 드
러난 정 역시 선하다는 생각은 미발지시未發之時 공부의 강조로 이행되는데, 이
와 같은 미발지시 공부가 바로 ‘경’이다. 이것은 ‘의가 발현될 때’ 그것을 선하게
하려는 ‘성의誠意’18)공부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마음과 경을 강조했던 이황의
철학적 입장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19)
이렇게 보면 퇴계 성리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리의 능동성’에 대한 인정이다.

 

16) 자세한 것은 奇大升, 󰡔高峯集󰡕, 「兩先生四七理氣往復書上」, “然而所就而言之不同, 則亦不容無別.
從古聖賢, 有論及二者, 何嘗必滾合爲一物, 而不分別言之耶?” 참조. 이 말은 사칠논쟁에서 이황
이 기대승에게 한 말이다.
17) 이황은 사단과 칠정의 ‘所從來’를 강조하면서, 어떤 것은 리의 구속력이 강하고 어떤 것은 기의
구속력이 강함을 강조한다. 여컨대 그는 사칠논쟁 과정에서 “이 둘이 비록 리와 기 이외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따라 나오는 바(所從來)’로 인해 각각 그 주된 것과 그 중요한
것을 가리켜 말한다면 어떤 것은 리가 되고 어떤 것은 기가 된다고 해도 어떻게 이것을 틀렸다
하겠습니까?”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 주된 것과 중요한 것에 따라 구속력의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자세한 것은 위의 책, 같은 곳, “二者雖曰皆不外乎理氣, 而因其所從來, 各指其所主與所
重而言之, 則謂之某爲理某爲氣, 何不可之有乎.” 참조.
18) 이황의 공부론이 흔히 ‘경’공부론으로 이해된다면, 이이는 ‘성의’공부에 대한 강조로 드러난다.
이것은 미발 공부에 대한 강조와 이발공부의 강조라는 두 가지 양상으로 갈라지는데, 여기에는
바로 리에 대한 능동성의 인정 여부가 중요한 이론적 근거가 된다.
19) 이것이 바로 이황이 󰡔심경부주󰡕를 중시했던 이유이다. 󰡔심경부주󰡕는 주자학 체계 내에서 ‘경공부’
에 대한 강조2를 위해서 편집된 것으로, 특히 󰡔심경󰡕에 주석을 달아 󰡔심경부주󰡕를 편집했던
정민정의 입장은 더욱 ‘경공부’에 경도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 자세한 것은 홍원식 외, 󰡔심경부주
와 조선유학󰡕, 예문서원, 2008, 52‧266쪽 참조.
68 _ 국학연구 제15집

 


이것은 리에 직접적인 운동성을 부여하거나, 혹은 직접적인 운동은 아니라고 하
더라도 기를 조절하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표상화 된다.
그런데 적어도 전자는 주자학의 통상적 리 개념을 벗어나는 것이며, 후자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퇴계학’만의 중요한
특징이 형성되고 있다. 이황은 리기 관계 역시 ‘불상잡’에 무게 중심을 두고 해석
함으로써, 대대관계로 이해한다. ‘혼륜渾淪’보다는 ‘분개分開’가 강조되는 것이다.
이것은 심성론 영역에서 사단을 리에 분속시키고 칠정은 기에 분속시켜 이해하
게 하며, 수양론 영역에서는 ‘주경철학’에 대한 강조로 드러난다.
정재학파의 성리설 역시 이와 같은 퇴계학파의 이론적 특징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정재학파는 퇴계학파의 이 같은 이론을 직승直承한 것
이 아니라, 이상정을 통해 수용한다. 그런데 이상정의 성리설은 퇴계학 내부의
종통의식이 발현되고 있는 이현일의 성리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성립되
었기 때문에, 이황의 성리설이 가진 특징은 수용하지만 이론의 형태는 한 차례
굴곡을 겪게 된다.
이현일의 성리설은 퇴계학과 율곡학의 차이를 더욱 벌려가는 입장에 서 있다.
그는 사칠논쟁에 관한 논의에서 이이李珥(栗谷, 1536~1584)의 입장을 강하게
비판하는데, 그 비판의 요점은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에 분속시키지 않고 일도
一途로만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현일은 우선 “주자께서는 원
래 사단과 칠정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분속시키고 서로 대대시켜서 말씀하
셨다.”20)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단과 칠정을 대대관계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대개 그 소종래所從來에는 각각 그 주된 것이 있으니,
이것은 그 근본부터 그러하다.”21)라는 입장을 제기한다. 그는 이와 같은 입장을

 

20) 李玄逸, 󰡔葛庵全集󰡕卷18, 「雜著‧栗谷李氏四端七情書辨」, “朱子固以四端七情分屬人心道心,
而相對說下矣.”
21) 위의 책, 같은 곳, “蓋其所從來各有所主, 自其根本而已然.”
특집 /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_ 69

 


공고히 하기 위해 「율곡이씨사단칠정서변栗谷李氏四端七情書辨」을 집필하는데, 이
내용의 핵심은 사단과 칠정의 분별 및 리기호발을 옹호하려는 것이다.22)
지금 리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다시 그 소종래에 따라 각각
그 근거가 있다는 사실을 분별하지 않고, 인심과 도심의 근원은 하나이며 그것이
발하여 인욕으로 흐른 이후에야 비로소 인심과 도심의 구별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발하기 전에는 리와 기는 혼륜하여 하나였다가 발한 연후에
천리와 인욕을 구별하려는 것이 된다.23)
‘발’하기 전부터 인심과 도심의 근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대목
이다. 이것은 리와 기 역시 근원에서부터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리와 기를 혼륜
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이현일은 좀 더 강하게 “리와
기는 결단코 두 개의 존재이니, 비록 그것이 기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리는
원래부터 리이고 기는 원래부터 기이어서 서로 섞이지 않는다.”24)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이현일의 입장은 이후 리기호발이 아니라 ‘리기각발理氣各發’에 가깝
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리와 기를 분개해서 본 것이다.
이상정은 바로 이와 같은 이현일의 성리학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이상정은 이현일의 성리학이 ‘각발’에 가깝다는 비판을 수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문성文成(李珥)의 무리가 오직 혼륜의 논의만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후대 그것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잘못됨을 지적하고 오류
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증왕부曾王父(이현일)께서 고심
하고 힘을 다해 그 평생의 힘을 모두 사용하여 혼륜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말하

 


22) 금장태, 「李玄逸의 四七論」, 󰡔韓國儒學의 再照明󰡕, 동양문화국제학술회의논문집, 1980, 229쪽 참조.
23) 李玄逸, 앞의 책, 같은 곳, “今以不相離之故, 而不復辨別其所從來者各有根柢, 以爲人心道心其
源則一, 旣發而流於人欲然後方有人心道心之別云爾. 則是未發之際, 理氣混爲一物, 及其旣發
然後方揀別天理與人欲也.”
24) 李玄逸, 위의 책 卷19, 「愁州管窺錄」, “竊謂理與氣, 決是二物, 雖其方在氣中, 理自理, 氣自氣,
不相夾雜.”
70 _ 국학연구 제15집

 

고 분개만을 상세하게 말했으며 다른 부분만을 밝히되 같은 점에 대해서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25)라고 말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이상정은 이현일
의 입장을 옹호하면서도 그 내용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극복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상정은 사단칠정에 대해서 우선 “두 정情(사단과 칠정)이 발하
는 것은 머리를 나란히 해서 함께 움직이거나 두 고삐를 나란히 해서 함께 나오
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각각 한 쪽을 차지하고서 스스로 동하거나 정靜하는 것도
아니다.”26)라고 말한다. 혼륜한 것으로만 볼 수도 없고 분개인 상태로만 볼 수도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리와 기가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것만 보고 사단 또한 기
가 발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니, 그 폐단은 대충
섞어서 구별이 없는 것이다.”27)라는 비판과 “혹 나누어진 것만을 위주로 하여
서로 합일되어 있지 않다고 하고, 심지어 칠정은 성이 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고 하면 다름만 보고 같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그 폐단은 소활疏濶하여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다.”28)라는 비판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이상
정은 리기 관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저들이 말하는 ‘같음’은 ‘같음’만 있고 ‘다름’은 없는 것이지만, 내가 말하는 ‘같음’
은 같으면서도 다른 것입니다. 또 저들이 말하는 ‘하나’는 ‘하나’이면서 ‘둘’이
아닌 것이지만, 내가 말하는 하나는 하나이면서 둘인 것입니다. 저들은 혼륜만
있지만 저는 (혼륜을 말할 때)분개도 겸해서 말합니다. 저들은 단지 (기발일도라는)
하나의 도만 있지만 저는 (리기)호발을 겸해서 말합니다.29)

 

25) 李象靖, 󰡔大山先生文集󰡕卷39, 「雜著‧四端七情說」, “自夫文成之徒, 專主渾淪之論, 則後之議者, 不
得不摘其偏而訂其謬. 此曾王父, 所以苦心極力, 以用其一生之力, 其略渾淪, 而詳分開, 明其所異,
而不甚言所同.”
26) 李象靖, 위의 책, 같은 곳, “二情之發, 非齊頭俱動並轡偕出, 又非各占一邊而自爲動靜也.”
27) 李象靖, 위의 책, 같은 곳, “彼見理氣之不離而爲四端亦氣發者, 固見一而不知二, 其弊也鶻
侖無別.”
28) 李象靖, 위의 책, 같은 곳, “而其或專主分開, 不相統一, 而至謂七情不可謂性發, 則又見異而不知
同, 其弊也疏濶不情.”
29) 李象靖, 위의 책 권20, 「答李希道」, “夫彼所謂同, 同而無異, 而吾所謂同, 同而異. 彼所謂一,
특집 /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_ 71

 

리와 기의 관계를 혼륜과 분개 양 측면에서 함께 파악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서 이상정은 사단과 칠정 역시 혼륜과 분개간 모두를 통간通看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대목은 비록 혼륜의 측면만을 강조하지는 않지만 퇴계학의
사칠론에 율곡학적인 부분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리와 기를 결단코
‘다른 존재’로 이해하려고 했던 이현일과는 달리, 율곡학 계열의 비판을 수용하
여 퇴계학을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30) 이러한 측면은 이후 현실인식과 그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도 이현일에 비해 한 층 완화된다.31)
정재학파는 퇴계학과 율곡학의 비판적 종합을 거친 이상정의 성리설을 그대로
수용한다. 이와 같은 모습은 이상정의 성리설을 같이 받아들였지만 리의 독자성과
능동성에 초점을 맞추었던 한주학파와 비교될 수 있다. 한주학파는 대산학에 들
어 있는 리의 능동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정재학파는 대산학의 철저한 계승
에 무게 중심이 가 있는 것이다. “퇴계 선생을 존신하는 자들 가운데에도 종종
그 중中만을 말하였으니, 대산大山선생에 와서 리기동정理氣動靜설이 있었다.”32)
라는 그의 말은 성리학의 정통이 이황에서 이상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류치명은 바로 이러한 ‘리기동정설’을 정통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류치명은 이진상과의 문답과정에서 ‘호발’에 ‘각발’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대답하기를 “사단과 칠정이 발하여 나오는 묘맥은 확연히 다르니, 하나는 리를 주로
하는 것이 있고 하나는 기를 주로 하는 것이 있어서, ‘호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一而不二, 而吾所謂一, 一而二. 彼但有渾淪, 而吾以分開者而兼言, 彼但有一道, 而吾以互發者
而兼論.”
30) 김낙진, 「定齋 柳致明과 西山 金興洛의 本心 중시의 철학」, 󰡔율곡사상연구󰡕제16집, 율곡학회, 2008,
103쪽 참조.
31) 설석규, 「정재학 위정척사론의 대두와 성격」, 󰡔근현대 영남유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한국국학진흥원, 2009, 97쪽 참조.
32) 柳致明, 󰡔定齋集󰡕卷19, 「理動靜說」, “以尊信退陶者, 而亦往往爲其所中, 至大山先生, 爲理氣動靜說.”
72 _ 국학연구 제15집

 

대개 사단이 발할 때에는 천리가 무성하게 유출하여 심이 그것을 감싸둘 수 없고
기가 손과 발을 붙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리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칠정이
발할 때에는 형기가 격하게 넘어 들어오면서 리가 그것을 관섭管攝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리가 발할 때도 있고 기가 발할 때도 있으니,
어찌 호발이라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33)
류치명은 ‘사단이 리발’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 근거를 ‘리를 위주(主理)
로 한다’라는 사실에서 찾고 있다. 칠정이 기발인 이유 역시 그것이 ‘기를 위주(主
氣)’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류치명은 ‘주主’로 한다는 말의 의미가 척발剔拔이
아니라 ‘분개分開’라고 말한다. “척발설이란 리와 기가 서로 이루어 가는 가운데
그 리만을 도출시켜서 말하는 것이고, 분개설이란 사단과 칠정이 서로 호발하는
곳에서 두 개의 조각으로 나누는 것을 말한다.”34)라는 류치명의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그는 ‘주로 한다’는 말에 대해 “‘주로 한다’라는 말은 (리와 기를)
겸하여 말하되 더 중시하는 바가 들어 있다는 것이지, 어느 한쪽만을 말한 것이
아니다.”35)라고 말함으로써, ‘주로 한다’는 의미가 ‘호발’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와 같은 입장 위에서 그는 리의 동정動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본체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원래 그러한 것이어서 실제로는 기를 주로 하게
되니, 그러므로 리는 동함과 정함이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신묘한
묘용을 갖게 되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또한 혹여라도 (리의 묘용이)줄어드는
경우는 없어서, 이것을 가지고 바로 두루 미치면서도 정미하고 절도가 있다고
말하니, 리에 동함과 정함이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만약 리에

 

33) 이상하, 「한국 성리학 主理論의 발전 上에서의 大山 李象靖」, 󰡔대동한문학󰡕, 대동학문학회, 2006,
각주29)에서 재인용. 여기에서 밝힌 원전의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이진상, 󰡔한주집󰡕초간본,
한적, 40권 7판, “答曰, 四七發出之苗脈, 灼然不同, 一主乎理, 一主乎氣, 故謂之互發. 蓋四端發時,
天理譪然流出, 心包畜不住, 氣着脚手不得. 故謂之理發. 七情發時, 形氣激越出來, 理亦管攝他不
得. 故謂之氣發. 有理發時者, 有氣發時者, 豈非互發乎?”
34) 류치명, 앞의 책 卷4, 「與李忠立別紙」, “剔拔說者, 就理氣相成之中而挑出其理之謂也, 分開說者,
就四七互發之處而劈作兩片之謂也.”
35) 류치명, 위의 책 卷4, 「答李忠立」, “凡言主者, 以兼說而所重亦有在耳, 非單言之名也..”
특집 /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_ 73

 

동함과 정함이 없다고 말하면 이것은 (리를)죽은 재처럼 무정한 사물로만 생각
하는 것이며, 기는 연유하는 바가 없이 동하고 정하는 것이 된다. 리는 살아 있는
것이니, 그 흘러내림의 충만함이 넓디 넓어서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어찌
막연하게 움직임도 없는 것일 수 있겠는가?36)

 

류치명은 역시 이상정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리의 발’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
는 ‘리발’의 의미를 ‘기의 영향력보다 리의 영향력이 강한 상태’로 규정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리의 능동성’과 ‘자발성’을 인정하고 있다. 리는 기를 제어하고
통어함으로써 리의 모습 그대로 드러낼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리의 동정動靜이
라는 말이다. 류치명은 이와 같은 이해의 근거를 주희가 “리에도 동함과 정함이
있기 때문에 기에 동함과 정함이 있는 것이니, 만약 리에 동함과 정함이 없다면
기에 어떻게 저절로 동함과 정함이 있겠는가?”37)라고 했던 말에서 찾고 있다.
이렇게 보면 정재학파 성리설은 리기호발의 강조를 통해 ‘각발’로 이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이상정에 의해 이루어졌던 퇴‧율
철학의 비판적 합일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류치명은 퇴계학의
기본 입장을 유지하여, 리기호발을 통한 ‘리발’을 인정한다. 물론 그 의미가 리의
직접적 발현이 아니라 기를 제어하고 통수하는 것이지만, ‘제어’나 ‘통수’와 같은
행위주체로서의 리는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전히 리기불
상잡에 무게 중심을 두고 해석하며, 리기를 대대관계로 바라본다. 이것은 자연
스럽게 서원의 강회나 도회를 통해 주경철학을 강조하거나 󰡔심경부주󰡕를 중시
하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이후 정재학파 문인들에게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의병활동

 

36) 류치명, 위의 책 卷19, 「理動靜說」“而其本體之無爲者自若也, 實主於氣, 故謂之無動靜也. 而其
至神之妙用, 又未嘗或損也, 是其爲言周徧精切, 而理之有動靜者, 益可見也. 如曰理無動靜, 則是
特認爲死灰無情之物, 而氣便無所自而爲動靜矣. 大抵是理活物也, 洋洋乎流動充滿, 無乎不在,
是豈漠然無爲者哉.”
37) 류치명, 위의 책, 같은 곳, “朱子曰, ‘理有動靜, 故氣有動靜, 若理無動靜, 氣何自而有動靜乎?’”
74 _ 국학연구 제15집

 

으로 이름이 알려진 류치명의 고제 김도화도 주희가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라는 말과 이황이 “사단은 리가 발하매 기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매 리가 그것을 타는 것이다.”라고 했던 말에
따라38) ‘리발’을 인정하면서, 그 근거를 류치명과 마찬가지로 ‘리를 위주로 함
(主理)’에서 찾는다.
발發하는 바를 따라 그 묘맥苗脈을 궁구해 보면 그 가운데 직발直發해서 리를 위주
로 하는 것이 있으니, 측은惻隱‧수오羞惡‧사양辭讓‧시비是非 이 네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또 혹 특정 상황에 따라 기를 위주로 하는 것도 있으니, 희노애구애오욕
喜怒哀懼愛惡欲 이 일곱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일에 따라 감응하는 과정에서 서로
바탕이 되기도 하고 타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리를 주로 하는 것과 기를 주로
하는 것은 나누어진다.39)

 

“사단이 성명에 근원하므로 리가 발한 것이며, 칠정은 형기에 따르기 때문에
기가 발한 것이다.”40)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은 김흥락이 “리체의 밖에 별도로 일원의 리가 있는 것은 아니니, 불상리에
나아가 불상잡을 본다고 말할 뿐이다.”41)라고 하면서 불상리를 전제하되 그
속에서 리와 기를 구분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 류치
명의 재전 제자인 권상익權相翊(省齋, 1863~1935) 역시 “심은 리와 기를 겸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옛날 성현들이 심에 대해 논하면서 혹 리를 위주로 한 적도
있고 기를 위주로 한 적도 있다.”42)라고 말하면서 이 둘을 고르게 이해할 것을

 

38) 金道和, 󰡔拓菴集󰡕卷10, 「說‧四七理發氣發說」, “朱子曰,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 退溪先生曰,
四端, 理發而氣隨之, 七情, 氣發而理乘之.”
39) 金道和, 위의 책, 같은 곳, “而卽其所發而究其苖脈, 則或直發而主理者有焉, 惻隱羞惡辭讓是非四者
是也. 或緣境而主氣者有焉, 喜怒哀懼愛惡欲七者是也. 隨事而感互相資乘, 而但於其中有主理主氣
之分耳.”
40) 金道和, 위의 책, 같은 곳, “四端之原於性命者爲理發, 七情之緣乎形氣者爲氣發.”
41) 김낙진, 앞의 글, 117쪽에서 재인용.
42) 權相翊, 󰡔省齋集󰡕卷5, 「答丁君瑞問目」, “心自是兼理氣者, 故從上聖賢論心, 或有主理言時, 或
특집 /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_ 75

 

권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권상익은 기 한쪽만으로 본 것에 대해서는 ‘율곡학파’
를 조술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이진상이나 곽종석郭鐘錫(俛宇, 1846~
1919)이 주장했던 심즉리心卽理에 대해서는 ‘잘못된 것을 펴다가 너무 지나쳐
버린 것’이라고 말한다.43)

 

이와 같은 입장을 종합해 보면, 정재학파의 성리설은 퇴계학파의 특징으로
지칭된 ‘리의 능동성과 자발성’에 대한 인정을 위해 제기된 다양한 이론적 장치
들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상정에게 오면서 ‘리기호발’을
특히 강조되는데, 이것은 이현일에 비해 율곡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퇴계학의 근본적 특징 자체를 바꾸고 있지는 않다.
이 때문에 정재학파 역시 리의 능동성을 바탕으로 한 수양론과 리를 정正으로
보고 그것의 자발적 활동을 통해 사邪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은 바뀌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은 강한 원칙론의 고수와 사에 대한 배척으로 드러난다.

 

4. 정재학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정재학파는 자신들이 퇴계학의 적전嫡傳임을 강조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퇴계학의 성리학적 특징에 따른 현실인식과 대응까지도 동일한 유산으로 물려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퇴계 성리설의 특징은 ‘리의
능동성’을 중시하여, 리에 기가 따라올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현실에서의 다양한 변화 양상을 고려하여 시의적절한 답을 찾아가기보다, 원칙
을 중시하고 그 원칙에 따라 현실을 변화시켜 가려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리를
기와 다른 존재로 설정하고 그것에 능동성을 부여함으로써 기는 자연스럽게

 

有主氣言時.”
43) 權相翊, 위의 책, 같은 곳 참조.
76 _ 국학연구 제15집

 

리의 능동성에 따라 자기 역할을 하는 정도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재학파의 성리설은 세계를 바라보고 변화시키는 주체와 방법에
도 영향을 미친다. 정재학파의 성리설에 따르면 리理는 정正의 근거이며, 기는
리의 능동성에 따라 변화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정을 잘 수호함으로써 사를
바꾸어 갈 수 있다는 논의로 발전하면서, ‘위정衛正’이후 ‘척사斥邪’할 수 있다는
입장을 띠게 된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을 지키는 작업이
며, 이것을 통해 사를 변화시켜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현실의 문제에 따른 대응이 아니라 성리학적 원칙론의 고수
이다. 따라서 이들은 현실에 대한 인식에 앞서 ‘무엇이 정正인가?’를 먼저 묻고,
그것을 중심으로 현실을 해결하려고 한다. 정재학파의 위정척사 운동은 바로 이
와 같은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번 장에서는 그들이 설정한 ‘정’이 무엇인지
를 살펴보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 대응양상을 확인해 보기로 한다.
이미 앞에서도 확인했듯이 정재학파가 학파적 단위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퇴계학으로부터 대산학으로 이어지는 ‘퇴호학退湖學’을 ‘정
통’으로 정립하려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정재학파의 학통을 퇴계학의 도통으
로 설정함으로써, 당시대 도통을 자임하기 위한 것이다. 사실 주자학자들에게 있
어서 도통의식은 성리학의 설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주희는 요순堯舜으로부
터 공자와 맹자를 거쳐 북송오자로 이어지는 도통을 자신이 이어간다고 생각하면
서 주자학을 정립했기 때문이다.44) 이러한 도통은 주자학 성립시기 노불老佛로
대표되는 이단과의 지루한 싸움의 과정에서 정통론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었
으며, 그들은 그 원류를 이단과 맞섰던 맹자에게서 찾고 있다.45) 이 때문에 주자

 

44) 이와 같은 도통의식과 구체적인 도통의 전수과정은 주희가 쓴 「中庸章句序」에서 볼 수 있다.
자세한 것은 朱熹, 󰡔中庸章句󰡕, 「中庸章句序」를 참조.
45) 이단에 대한 맹자의 가장 대표적인 언급은 󰡔孟子󰡕, 「滕文公下」, “聖王不作, 諸侯放恣, 處士橫議,
楊朱墨翟之言, 盈天下. 天下之言, 不歸楊則歸墨. 楊氏, 爲我, 是無君也, 墨氏, 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 公明儀曰, ‘庖有肥肉, 廐有肥馬, 民有飢色, 野有餓莩, 此率獸而食人也.’ 楊
墨之道, 不息, 孔子之道不著, 是邪說誣民, 充塞仁義也. 仁義充塞, 則率獸食人, 人將相食. 吾爲此
특집 /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_ 77

 

학자들에서 도통과 이단은 항상 병칭竝稱될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퇴계학파의 인물들에게 있어서 주희의 도통이 이황에게로 전해졌다는 인식은
이미 전제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문제는 이황 사후 퇴계학인들 가운데 누가
이황의 도통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병호시비의 위차문제 역시 누구를 이황
의 도통 전수자로 볼 것인지에 대한 것이며, 이것은 논쟁 당사자가 스스로 그 시대
도통을 자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김성일 계열과 류성룡 계열 모두가
서로를 ‘이단’으로 여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도통의 전승’이라는 측면에서는
물러설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이것은 논쟁 진행 당사자가 그 도통을 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가리는 문제이므로 더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정재학파의 성립은 이황의 도통이 김성일에게 전수된 것으로
바라보려는 입장에서 시작되었다. 이황이 김성일에게 주었던 ‘병명’이 중요한
논거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그 내용이 도통전승의 상징으로 이해되었던
16자 심법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인식 속에는 이황으로부터 이
상정으로 내려오는 ‘정학正學’에 대한 수호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하면 당시 어지러운 정치적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인식은 류치엄이 지은 󰡔호학집성󰡕에서 “지금 양학洋學
이 서양학이 일세를 덮고 있지만, 감히 영남의 한 조각 땅도 엿보지 못하는 것은
오직 선정先正(이황)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젖어 들어있기 때문만이겠는가?
또한 선생(이상정)이 그것을 제창하여 밝혔기 때문이기도 하다.”46)라는 말에
서 잘 확인할 수 있다. 이황에서 이상정으로 이어지는 정학이 양학의 침범을

 

懼, 閑先聖之道, 距楊墨, 放淫辭, 邪說者不得作. 作於其心, 害於其事, 作於其事, 害於其政,
聖人復起, 不易吾言矣. 昔者, 禹抑洪水而天下平, 周公兼夷狄驅猛獸而百姓寧. 孔子成春秋而
亂臣賊子懼. 詩云, ‘戎狄是膺, 荊舒是懲,’ 則莫我敢承, 無父無君, 是周公所膺也. 我亦欲正人
心, 息邪說, 距詖行, 放淫辭, 以承三聖者, 豈好辯哉, 予不得已也. 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
참조.
46) 柳致嚴, 󰡔湖學輯成󰡕卷8, 「敎學」, “向來洋學, 壞襄一世, 而不敢窺嶺南一片地者, 豈獨先正之敎
有以漸人哉, 亦以先生倡而明之.”
78 _ 국학연구 제15집

 

막고 있다는 것으로, 이 말 속에는 도통의 확립에 의해 이루어진 정학이 어지러
운 다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식이 들어 있다. 이렇게 보면 당시 정재학파
에게 있어서 위정은 ‘올바른 도통의 확립’이며, 병호시비는 바로 이와 같은 이해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류치명을 비롯한 정재학파 내에서는 이단에 대한 인식 역시 뚜렷하
다. 류치명은 류건휴의 󰡔이학집변󰡕 교정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 책은 조선 유학
사에서 가장 방대한 이단異端 비판서로 그 분량과 대상에 있어서 다른 이단 비판
서들과 비교할 수 없다.47) 이 책은 주희의 저작들과 더불어 󰡔학부통변學蔀通辨󰡕
및 󰡔이학변정異學辨正󰡕 등과 같은 책을 참고 했는데,48) 이를 통해 류치명은 「독진청
란학부통변讀陳淸瀾學蔀通辨」을 쓰기도 했다. 특히 여기에서 류건휴는 상산학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데, 이것은 퇴계학에 상산학적 요소가 있다는 비
판으로 벗어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류치명 역시 「독진청란학부통변」에서 주륙
학의 차이점을 분명히 하려 했다.49) 더불어 ‘천주학’에 대한 비판 역시 ‘이단’이라
는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정학의 수호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단학
이 여전히 판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인식을 우리는 쉽게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류치명이 평생을 걸고 진행했던 병호시비는 도통에 근거해서 정
학을 수호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시의 복잡한 현실에 대해 이단이 판
치고 정학이 제대로 서 있지 않기 때문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
은 정학을 세우고 그 가르침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것이며, 이를 위해 중요한

 

47) 권오영, 앞의 책, 339쪽.
48) 柳健休, 󰡔異學集辨󰡕, 「異學集辨序」 참조.
49) 󰡔異學集辨󰡕은 총 6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권1은 노자와 장자, 열자 및 묵자 등을 비롯한 선진
시기 이단이며, 권2와 권3은 불교비판이다. 그리고 권4는 상산학 비판인데, 권4 전체를 여기에
배분하고 있다. 이는 권5에서 王學과 蘇學, 그리고 史學 모두를 한권으로 엮고 있는 것과 차이가
있다. 그리고 권6에서는 당시 유행했던 천주학 및 사장학을 이단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류치명의 「讀陳淸瀾學蔀通辨」에 대해서는 柳致明, 󰡔定齋集續集󰡕(한국문집총간 298)권8, 「讀陳
淸瀾學蔀通辨」을 참조.
특집 /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_ 79

 

것은 ‘도통’을 명확히 확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은 류치명 사후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서원철폐에
반대하는 운동에서도 잘 나타난다. 류치명 사후 정재학파의 학인들이 가장 관심
을 쏟았던 것은 김성일을 배향하고 있는 임천서원의 사액賜額이었다. 특히 이들은
당시 정통성 시비의 대상이었던 병산서원이 사액될 것이라는 소문에 더욱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50) 이 때문에 당시 영남유림의 공통 과제인 장헌세자의 전례문
제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듭 임천서원의 사액을 청하고 다양한 정치적 통로를
통해 이 문제를 관철시키려고 하였다.51) 류치명으로부터 이어진 ‘정학에 대한
수호’가 정학을 대표하는 김성일의 배향과 사액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은 바로 이 시기에 내려졌다. 이것은 당시 배
향과 사액을 통해 정통을 수호하려 했던 정재학인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
었다. 이렇게 되면서 ‘정학에 대한 수호’는 이제 ‘서원을 보존하려는 운동’으로 형
태를 바꾸게 되었으며, 이것은 당시 병인양요(1866)나 신미양요(1871)와 같은 외
세의 침략보다 그들에게는 더 큰 문제였다. 도통확보의 구심점이 되었던 서원을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서원철폐가 진행되고 있
었던 1870년에도 계속 임천서원의 사액을 청할 정도였으며, 이 과정에서 병산서
원과의 알력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52) 서원 수호 운동이 청액과 병호시
비의 지속이라는 두 가지 양상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또한 호계서원에는 경상감
영에서 11차례나 훼철 공문을 보냈지만 훼철하지 않자 그 책임을 물어 류치임을
비롯한 관련자 6명이 투옥될 정도로 버텼으며, 김성일의 종손이자 류치명의 고
제였던 김흥락에게도 공문을 보내 훼철을 권했지만 끝까지 반대하였다.
호계서원의 훼철 후에도 정재학파의 학인들은 서원의 복설을 강조한다. 류치

 


50) 권오영, 앞의 책, 360쪽.
51) 여기에 대해 자세한 상황과 과정은 권오영, 위의 책, 359쪽 이하를 참조할 것.
52) 권오영, 위의 책, 같은 곳, 참조.
80 _ 국학연구 제15집

 

명의 고제인 김대진金岱鎭(訂窩, 1800~1871)은 1871년 신미양요가 일어나던 해
자신의 죽음을 앞둔 마지막 상소에서도 서원복설을 강조하고 있다. “옛날에 서
원이 있었을 때에는 선비들이 모두 서원을 의지하고 돌아갈 곳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선비들로 하여금 그 의지하고 돌아갈 곳을 잃게 하였으니, 어찌 국가가
즐거울 바가 있겠습니까?”53)라는 김대진의 말은 서원을 중심으로 선비들이 도
학으로 돌아가고, 이것을 통해 국가가 바로 설 수 있다는 인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정학의 주체인 선비들이 돌아갈 곳, 그리고 그들이 양성되고 올바로 설 수
있는 곳이 필요함을 이들은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류치명의 재전제자인 권상익 역시 “옛날 서원은 경서를
읽고 선비를 기르기 위해 설치하였으나, 후대에 선현先賢들을 추숭하고 기리는
곳이 된 이유는 단지 그 덕을 떠올리고 그들이 행한 공功에 보답하기 위함만은
아니다. 앞으로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추모의 정을 떠올리고 뜻을 일으키게 하
여서 그것을 배우고 본받게 하려는 것이다.”54)라고 말하면서 정학의 주체인
선비들로 하여금 선현들의 뜻을 받들어 일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입
장 속에는 서원이 도술道術을 일으키고 덕업을 숭상하는 정학의 기초라는 인식
이 들어 있다. 이 때문에 이후 공자교 운동과 더불어 독립운동사에 굵직한 족적
을 남겼던 이상룡李相龍(石洲, 1858~1932)도 서원복설을 강조하면서 “삼가 생
각건대 서원제도는 그것을 일으킴으로써 도술을 변치 않게 하고, 덕업德業을 숭
상하고 공로에 보답하는 전형은 그것을 들어서 예교를 크게 밝히는 것이니, 이
는 진실로 성현의 어진 규범이요 왕정의 급선무입니다.”55)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 역사가 격동기에 휩싸이면서 1876년 본격적인 개화정책이 추진

 

53) 金岱鎭, 󰡔訂窩集續集󰡕卷1, 「疏‧請復祠院疏」, “而旣有院矣, 士皆以院爲依歸, 則使士而失其依
歸者, 豈國家之所樂爲乎.”
54) 權相翊, 󰡔省齋集󰡕卷9, 「東山書堂記」, “古者書院爲讀書養士而設, 而後代之所以崇祀先賢者, 不
惟爲象德報功而已. 將使學者有所想慕興起而師法之也.”
55) 이상룡(안동독립운동기념관 편), 󰡔국역석주유고󰡕상, 경인문화사, 2008, 262쪽.
특집 /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_ 81

 

되고, 일제의 강점 노력 역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서 류치명의 고
제인 이돈우李敦禹(肯庵, 1807~1884)는 상소를 통해 “군사를 모집해서 훈련을
실시할 것”을 제시하면서, “옛날의 척사는 단지 언어와 문자로 했을 뿐이지만,
지금의 척사는 부득불 군사 훈련으로 급선무를 삼아야 한다.”라고 말했다.56) 이
들의 현실 인식이 밀려오는 외세에 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척사 역시 중요함
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돈우의 이와 같은 척사에 대한 생각 속에
는 여전히 ‘정학’에 대한 숭상이 선행되어 있다.57) 척사의 기본 조건이 위정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들은 여전히 주자학의 도통의 보존과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서원 복설의 중요성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때가 되면서 위정뿐만 아니라 척사 역시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으며,
그에 대한 구체적 방안 역시 논의되고 있다.
이와 같은 와중에서 영남유림 전체가 ‘척사’의 기치를 높이 든 사건이 일어난다.
1880년 말 주일청국공사관인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의 내용이 알려지면서이
다. 이 책은 조선이 살기 위해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관계를 맺어야 하며, 미국과
연합하여 남진하는 러시아를 막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개항의 대상을
확대하려는 정부의 논리에 근거를 마련해 준 것으로 보았던 영남유림에서는
여기에 대해 강력한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형태가 ‘영남 만인소’로 드러
난다. 이 때에는 병파와 호파의 봉합을 위해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이 소수가 되
어 진행함으로써 어느 정도 봉합되는 양상을 보였으며,58) 이후 여러 차례 복합
상소 운동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서도 병파와 호파는 내부적으로
‘학애學厓’와 ‘애학厓學’의 서차 문제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 1883년 병산서원 향
사일에 병파에서 류성룡을 단독으로 문묘에 종사하려고 시도하자, 호파에서는

 

56) 권오영, 앞의 책, 376쪽에서 재인용.
57) 권오영, 위의 책, 같은 곳, 참조.
58) 이 상소는 승정원에 접수되지 않았지만, 草本이 문제가 되어 소수인 이만손과 제소자 강진규는
유배를 가게 된다. 홍원식, 앞의 글, 602~603쪽 참조.
82 _ 국학연구 제15집

 

다시 호계서원의 복설문제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척사’ 앞에서 모두가 힘을
모으는 과정임에도, 내부적으로는 ‘위정’을 위한 도통의 확립을 중시했던 것이
다. 이것은 여전히 ‘위정’의 개념이 ‘자기 도통의 확립’과 그것의 ‘수호’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위정을 중시하는 성리학자들의 일단을 볼 수 있게 한다.59)
원칙론의 고수와 그에 따른 현실 변화 추구가 이때까지도 정재학파 내부에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894년 갑오경장과 1895년 민비 시해 사건, 그리고 그해 11월에 내려
진 단발령은 이제 더 이상 이들로 하여금 정통론에 매몰되어 있을 수만은 없게
했다. 서원훼철로 인해 이미 구심점을 잃고 있었던 영남사림에게 단발령은 평생
을 지켜왔던 유학의 기본 원칙에서 벗어나게 하는 명령이었다. “신체발부는 부
모로부터 받은 것이어서 훼손할 수 없다.”는 이 원칙론은 단순하게 머리카락을
자르는 문제가 아니라, 유학의 근본 도가 무너질 수 있는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김도화‧김흥락‧류지호 등은 ‘호계통문’을 발송하여, ‘단발령을
계기로 우리의 예법과 풍속이 붕괴될 것을 깊이 우려하여 결사적인 의병운동이
필요하다’60)는 사실을 역설했다. 도통의 문제가 아니라, 그 상위 개념인 유학의
도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류치명의 아들인 류지호의 계획과 지도에 따라 을미의병이
정재학파를 중심으로 거병하게 된다. 여기에는 김도화와 김윤모‧김흥락‧류지
호‧김양진 등 류치명의 핵심 제자들이 관여하였고, 류치명의 직전제자인 권세
연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안동부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더불어 이전에 벌어졌
던 ‘병호시비’의 양상 역시 봉합되면서, 병파 역시 의병운동에 참여한다. 1896년
권세연이 의병장에서 사임하면서 류치명의 제자인 김도화가 의병장이 되었고,
병파인 류난영과 류도성이 여기에 참여하여 함께 의병을 이끌게 된 것이다. 여

 

59) 자세한 과정에 대해서는 권오영, 앞의 책, 380~381쪽 참조.
60) 권오영, 위의 책, 383쪽.
특집 /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_ 83

 

기에는 병파와 호파 모두 이제 더 이상 ‘정학’의 수호가 ‘도통이나 서원의 보존’
에만 머물 수 없다는 인식이 내재되어 있다. 물론 근 100여 년 이상 지속되었던
병호시비로 인해 이들이 효과적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하지 못한 점은 있지만,
그래도 이제 더 이상 ‘정학’의 개념이 도통의 수호 속에만 머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후 정재학파는 다양한 분기 현상을 보여준다. 주류는 여전히 ‘위정척사’의
기치 위에서 의병운동을 진행하고, 일제 강점 이후에는 독립운동으로 그 양상
을 변모시켜 가는 데 있었다. 더불어 정재학파의 기본 입장을 받아들이면서도,
현실문제 앞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활동의 영역을 바꾸어 가는 입장들이 생겨
나기도 했는데, 이를 통해 정재학인들의 활동은 다양한 프리즘으로 나누어지
게 된다. 이상룡과 같은 인물은 서원철폐에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면
서 정재학인으로서의 활동을 하다가, 국망 이후에는 공자교 운동을 선택하기
도 하고 상해임시정부에서 국무령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류인식이 전개
했던 애국계몽운동이나 송기식 등에 의해 받아들여졌던 공자교 운동은 비록 후
기 정재학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기는 하지만, 이들은 정재학파의 정통론에 서
있었다기 보다 현실 운동과정에서 새로운 전회가 일어났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61)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보면, 정재학파는 퇴계학에 의해서 주창되었던 리의 능동
성과 그에 따른 수양론의 형식을 다양한 역사적 현실 속에서 실천해 갔던 학파로
볼 수 있다. 리인 ‘정학’에 대한 수호와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을 배척하는 ‘척사’의
정신이 다양한 형태로 드러났던 것이다. 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병호시비나
61) 류인식 같은 경우는 스승과 의절하면서도 애국계몽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신채호와의 만남이었다. 이처럼 당시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던 학문적
사조에 따라갔던 인물들이 있었고, 이것은 정재학파의 모습이 다양한 양상으로 파생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류인식의 사상적 전회에 대해서는 柳寅植, 󰡔東山文稿󰡕,
「上金拓庵先生」참조.

 

84 _ 국학연구 제15집

 

서원철폐 반대 운동, 영남 만인소 운동 및 의병운동까지 이어지는 노정은 ‘정’의
발현을 통해 사를 없애려는 다양한 노력의 양상들로 이해할 수 있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정재학파의 성립과 성리학적 특징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현실인식 및 그 대응 양상을 살펴보았다. 우선 이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그 의미를 정리해 보기로 하자.
정재학파의 형성은 퇴계학의 정통을 김성일과 이상정으로 세우기 위한 노력
의 과정에서 인적‧학적으로 강한 유대관계를 가지면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당
시 류성룡을 퇴계학의 적통으로 인식하는 병파와의 시비로 이어졌는데, 그 대표
적 양상이 바로 병호시비였다. 병호시비는 흔히 대표적인 향전의 양상으로 이해
되고 있지만, 동시에 이것을 학파 내부에서 본다면 학파의 결속을 다지고 학통
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의 표출이기도 했다. 정재학파는 이와 같은 노
력 위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정재학파는 성리설에 있어서도 퇴‧율 철학의 비판적 수용을 통해
좀 더 완비된 형태의 퇴계학을 만들어가려 했던 이상정의 성리설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 퇴계학에 대한 율곡학의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한 상태에서 율곡학과의
차이를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들이 강조했던 ‘리기호발’은 이
황에 의해 제기되었던 ‘리의 능동성’은 견지하되, 리 자체가 운동성과 활동성을
가지지 않는 원칙론을 수용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따라서 정재학파에서 이루
어졌던 ‘각발’에 대한 견제는 율곡학이 ‘주기主氣’만을 강조한다는 비판인 동시에
이현일이 리 일면만을 강조해 온 것에 대한 자기 반성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정재학파에서는 ‘리기호발’을 통해 리가 기를 통제할 수 있는 이론적 장치를 마
련하고, 이러한 점에 있어서 리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이황으로부터 이상정으로 이어진 리기론의 정수라고 생각했다.
특집 /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_ 85
이렇게 되면서 정재학파의 성리설은 이현일의 성리설에 비해서는 한층 완화된
형태의 ‘리발’을 인정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을 기반으로 퇴계 성리
설의 중요 특징인 ‘리의 능동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리와 기는 대대관계로 이해하
였다. 이러한 이론적 구조는 리를 정으로 치환시키고, 이것을 바탕으로 사를 배척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낳았다. 정재학파에서 보여준 강한 원칙론의 고수와 이단에
대한 배척은 이러한 이론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9세기 정재학파에서 이루어졌던 병호시비와 서원철폐 반대 운동, 영남 만인
소 운동, 의병 운동 등은 바로 이와 같은 성리설에 기반한 것이다. 병호시비와
서원철폐 반대 운동은 ‘정’의 개념을 ‘도통’에서 찾으면서, 그것을 수호하기 위한
노력의 한 형태였던 것이다. 요순으로부터 주희를 거쳐 이황에게까지 이어졌던
도통을 김성일과 이상정으로 잇기 위한 노력이 결국 서원의 위차 수호나 서원보
호 운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서원 철폐를 반대하고,
철폐된 이후에는 그것을 복설하려는 노력은 정학의 맥을 잇는 선현들에 대한
배향과 그것을 지켜갈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서 서원은 ‘위정’의 상징적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이 개항확대와 단발령 등으로 이행되면서, 이들은 ‘유학의
도’를 정학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척사의 기치를 높이 들게 된다. 도道
가 없는 외세의 침탈에 문호를 열고, ‘도道의 상징’이었던 머리카락의 훼손 위기
는 더 이상 좁은 의미의 정인 ‘도통’의 시비에 머물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영남만
인소 운동이나 의병운동은 이와 같은 인식 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철저한 위정
론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강한 척사의 노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정재학파는 다양한 역사적 변혁기를 맞이하여 주자학적인 정학
을 통해 그것을 극복하려 했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강조했던
정正이 어떤 의미에서 주자학 내적인 ‘도통’을 의미하기도 했고, 의병항쟁으로
이행되면서는 ‘주자학’이나 ‘유학’을 의미하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위정 의식은 병호시비나 서원철폐 반대 운동에 매어 달리기도 하고,
지속적인 상소운동이나 의병항쟁으로까지 나아가기도 했던 것이다. 정재학파
86 _ 국학연구 제15집
의 위정척사 운동은 바로 이와 같은 특징 위에서 구현되고 있으며, 이것은 당시
기호학파 계열과는 궤를 같이 하는 측면도 있지만 동시에 상당히 다른 측면도
상존하고 있다.
특집 / 정재학파 성리학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_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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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s _ 89
A local progression and philosophical
characteristic of Jeongjae School's
Neo-Confucianism
Lee, Sang-ho
(Korean studies
Advancement Center)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o identify recognition of the time
of Confucianist which had moved around Gyeongsang province in the
modern age, and an aspect of maneuver against the recognition, as
identifying Jeongjae School's philosophical characteristic and local
progression, which developed powerful Wijeongcheoksa(衛政斥邪)
activities and The Volunteer Corps Movement(義兵運動), based on
Toegye's Philosophy in Gyeongsang province. For the purpose, in
this essay I identify feature of neo-confucianism which Jeongjae
School is aiming at, and a course which Jeongjae School is formed
around Byungho Dispute, and aspect of Wijeongcheoksa activities
which is based on the Jeongjae School. Jeongjae School is the school
which is formed with strong bilateral ties, humanly and academically,
in course of effort to stand legitimacy of Toegye's Philosophy as Kim
Seong-Il and Yi Sang-Jeong. This effort arises from perception gap
about the main line of descent of Toegye's Philosophy, and it comes
from effort to defend school unity and legitimacy of scholastic mantle.
This standpoint is based on Yi Sang-Jeong's the Theory of Mutual
90 _ 국학연구 제15집
Occurrence of Li and Ki, which makes up for standpoint of each occurrence
of Li and Ki that is stressed by Yi Yoen-Il, sticking to
‘Activity of Li’ which was raised by Yi Hwang. And this confucianism
showed as aspect like protection of righteousness and exclusion
of wickedness, and Byungho Dispute and a movement against abolition
of confucian shrine and Taotung(道統) doctrine. Jeongjae School
can be called school which will settle matter at that time, through
protection of political philosophy in Zhuxi Studies at various historical
changing age. Righteousness which the school emphasized meant
‘Taotung’ in Zhuxi Studies(朱子學) in a sense, meant ‘Zhuxi Studies’
or ‘Confucian’, translating into the loyal troop resistance. And this
spirit of excluding the unrighteous is implicated in Byungho Dispute
or a movement against abolition of confucian shrine, advanced forward
continuous movement of presenting a memorial to the king(上
疏) or the loyal troop resistance.
Key word: Jeongjae School, Yi Sang-Jeong, Yu Chi-Myeong,
Toegye's Philosophy, Taotung doctrine, protection
of political philosophy

출처 : 장달수
글쓴이 : 낙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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