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장관 이덕무-仲虺之誥
2018. 9. 4. 14:35ㆍ책과논문
청장관 이덕무의 이름과 자는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 에 나오는 글입니다. 낙민
청장관 연보 무자년 공 28세
1월 초1일, 자(字)를 고쳐 명숙(明叔)을 무관(懋官)이라 하였다. 공의 자설(自說)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내가 16세에 관례(冠禮)를 행하고 자(字)를 명숙(明叔)이라 한 지 12년이 되었다. 그러나 자는 본래 구별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서로 섞여서 같거나 불분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열 가구 정도 되는 작은 마을에 사는 일족(一族)만 모여도 명숙으로 자를 하는 사람이 많다.
《서경》에 ‘덕무무관(德懋懋官)’이라 하였으니 이후로는 마땅히 나의 자를 ‘무관(懋官)’이라 하여 장차 보첩(譜牒)에 쓰고 도장에도 새길 것이니 나의 친척과 친구들은 나를 무관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덕을 힘쓰는 자에게는 관직을 주어 장려하고, 공을 힘쓰는 자에게는 상을 주어 장려한다.〔德懋懋官 功懋懋賞〕”라는 말이 나온다.
중훼지고(仲虺之誥)
편제(篇題)에 나오는 ‘선후(先後)’
○ 좌우(左右)라는 말과 같다.
“성탕이 걸을 추방하다.[成湯放桀]”의 주에 나오는 “후세에 명예를 좋아하는 선비[後世好名之士]”
○ 연왕(燕王) 쾌(噲)와 같은 부류를 가리킨다.
하늘을 가탁하여 속이다.[矯誣上天]
○ 《언해(諺解)》에서는, “하늘을 가탁하여 속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이는 주의 설을 따른 것인데, 주의 설이 본문에 어긋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어진 사람을 홀대하다.[簡賢]”의 주에 나오는 ‘하대(夏臺)’
○ 감옥의 이름인데, 황보밀(皇甫謐)은 말하기를, “땅 이름이니, 양책(陽翟)에 있다.” 하였다.
“덕에 힘쓴 이는 벼슬을 내려 힘쓰도록 한다.[德懋懋官]”의 주에 나오는 “무는 무성함이니, ‘이것은 너의 공이니, 힘쓰라.’는 뜻과 같다. 덕에 힘쓰는 자는 벼슬을 주어 힘쓰도록 하고, 일에 힘쓰는 자는 상을 내려 힘쓰도록 하였다.[懋茂也 與時乃功懋哉之義同 懋於德者 懋之以官 懋於功者 懋之以賞]”
○ 무재(懋哉)의 주를 살펴보면, 무(懋)는 힘쓰도록 하는 것인데, 이 주에서는 앞서 “무(懋)는 무성함이다.” 말하고서 또 “무재(懋哉)와 같다.”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한 벼슬을 내려 힘쓰도록 하고 상을 내려 힘쓰도록 한다는 것은 그 벼슬을 성대하게 하고 그 상을 성대하게 한다는 뜻과 다른 것 같다.
○ 경숙이 말하기를, “무(懋) 자의 뜻 중에 ‘무성하다[茂]’와 ‘힘쓰게 하다[勉]’는 전혀 다른 뜻인데, 이에 뜻이 같다 하니, 이는 참으로 보내온 편지에서 의심한 것과 같다. 또 보내온 편지에서 그 벼슬을 성대하게 하고 그 상을 성대하게 한다는 해석은 본주(本註)와 비교해 볼 때 더욱 간략하다.” 하였다.
갈백(葛伯)
○ 갈(葛)은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진류군(陳留郡) 영릉현(寧陵縣)에 있는 갈향(葛鄕)이다.
관(官) 자로 이름과 자(字)를 지은 일 -청장관전서 앙엽기 중
우리나라 사람은 매우 고루하여 견문이 적기 때문에 괴이하게 여기는 일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이름을 짓거나 자호를 짓는 데 있어서는 항상 쓰는 글자가 수십 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이 겸(謙)이면 자는 익(益), 이름이 정(鼎)이면 자는 화(和), 이름이 지(趾)이면 자는 미(美), 이름이 최(最)이면 자는 양(良)으로 짓는다. 이런 규칙에 벗어나면 아무리 아름다운 이름과 좋은 자라 하더라도 뭇사람들이 조소하니 어찌 그리도 고루한가.
나의 자는 무관(懋官)이다. 전례에 없는 것이라 남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싶어서 옛사람의 예를 인용하여 의혹을 풀까 한다.
공자 소관(公子少官)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효공(孝公)이 공자 소간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서 제후(諸侯)들을 봉택(逢澤)에 모으도록 하였다.” 했다. ㆍ장관(長官) 감양(甘暘)의《집고인보(集古印譜)》동인귀뉴(銅印龜鈕)에 보인다. ㆍ승관(承官) 한(漢) 나라 때 사람이다. ㆍ사의관(師宜官) 사의(師宜)는 성이다. 한 영제(漢靈帝) 때 남양(南陽) 사람인데 글씨를 잘 썼다. ㆍ독고천관(獨孤天官 당(唐)나라 때 사람이다. ㆍ유관방(惟官方) 송 나라 소흥(紹興 : 송 고종(宋高宗)의 연호) 연간에 남안군(南安郡)을 다스렸는데,《만성 통보(萬姓統譜)》에 보인다. ㆍ서관(徐官) 《고금인사(古今印史)》를 지었다. ㆍ조관흠(趙官欽) 원(元) 나라 사람 만계학지최(萬計學之最)인데《용촌집(榕村集)》에 보인다. ㆍ야율관노(耶律官奴) 자는 희은(希隱)인데 침착 후중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벼슬은 절도사(節度使)였다.《요사(遼史)》에 보인다. ㆍ유관이(劉官二) 명 나라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때 사람인데 효릉위백호(孝陵衛百戶)를 지냈다.《표수현지(漂水縣志)》에 보인다. 조관(趙官) 명 무종(明武宗) 정덕(正德) 6년(1511)의 진사출신(進士出身)이다. 《명사(明史)》에 보인다. ㆍ왕사관(王士官) 명 나라 때《구양남야집(歐陽南野集)》에, 왕사관에게 주는 편지가 있다. ㆍ손관(孫官) 자는 덕무(德懋)로 평호(平湖) 사람인데 고문(古文)을 잘하고 해서(楷書)를 힘차게 썼다.《정단간공집(鄭端簡公集)》에 보인다. ㆍ왕무관(王懋官) 만력(萬曆 :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연간 유생(儒生)이었는데, 중봉(重峯) 선생의《조천일기(朝天日記)》에 보인다. ㆍ주관(周官) 산수인물화(山水人物畵)를 잘 그렸고 장영(張靈)과 동시 사람인데,《단청지(丹靑志)》에 보인다. ㆍ주관(周官) 명 나라 때 효자(孝子)로 신도현(新都縣) 사람이다. ㆍ왕관생(王官生) 임진왜란 때 명 나라 장관(將官)이었다. 《상촌집(象村集)》에 보인다. ㆍ사무관(司懋官) 호는 건암(建菴)으로 사천(四川)의 기주(夔州)사람. 유격자군(游擊將軍)으로 임진왜란 때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왔다.《상촌집》에 보인다. ㆍ염무관(閻懋官) 명 나라 사람으로 절개를 지켜 죽었다. ㆍ이관(李官) 명나라 만력 연간 사람으로 전서(篆書)와 예서(隷書)를 잘 썼는데, 《소청문집(邵靑文集)》에 보인다. ㆍ심관제(沈官弟) 명 나라 때 규수(閨秀)로 산음(山陰) 사람. 도주수비(道州守備) 지서(至緖)의 딸. 글을 잘 알고 병법(兵法)에 통했다. 15세 때 아버지가 요인(猺人)과 싸우다 죽으니, 그가 출전하여 승리하고 아버지의 시체를 빼앗아 돌아왔다.
《청일통지(淸一統志)》에 보인다. ㆍ주관(朱官) 명 나라 안장(安莊) 사람. 운남(雲南) 빈천(賓川)을 다스릴 때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했다.《청일통지》에 보인다. ㆍ낭관(郎官) 명 나라 때 광녕현(廣寧縣) 사람인데 무과(武科)에 합격했다.《성경통지(盛京通志)》에 보인다. ㆍ주관(周官) 만력 연간에 영수지현(靈壽知縣)을 지냈는데 호타하(滹沱河)에 비(碑)가 세워졌고《삼어당집(三魚堂集)》에 보인다. ㆍ능관구(凌官球) 관구는 세소(世韶)의 자(字)이다. 명 나라 때 사람으로 벼슬은 지사(知事)에 이르렀다.《명시종(明詩綜)에 보인다. ㆍ장무관(張懋官) 명 나라 때 사람으로 장 무상(張懋賞)의 아우인데, 유적(流賊)이 북경(北京)을 함락할 때 형제가 모두 집에서 죽었다. ㆍ장관옥(張官玉) 명 나라 인사시인(因社詩人)이다. ㆍ곽옥관(霍玉官) 지관(之琯)의 자가 옥관이다. 청 나라 순치(順治 : 청 세조(淸世祖)의 연호) 연간의 진사(進士)로 범양현 지현(范陽縣知縣)을 지냈는데, 치적(治績)이 있었다.《청일통지》에 보인다. ㆍ오불관(吳不官) 이름은 시덕(時德).《시지이집(詩持二集)》에 보인다. ㆍ조유관(趙有官) 청 나라 때 금현(錦縣)사람인데 무과 진사(武科進士)였다.《성경통지》에 보인다. ㆍ주관(周官) 청 나라 때 섬서(陝西) 영하(寧夏) 사람인데 영해현전리(寧海縣典吏)를 지냈다.《성경통지》에 보인다. ㆍ임관(林官) 후관(侯官) 사람인데, 시소병(柴紹炳)의《족장도설(族葬圖說)》에 보인다.ㆍ황관서(黃官敍) 청 나라 때 광창현(廣昌縣) 효자(孝子) 황원길(黃元吉)의 아버지이다.《목당집(穆堂集)》에 보인다. ㆍ원성관(袁聖官) 《위백자집(魏伯子集)》에 원성관에게 주는 시가 있다. ㆍ정관오(鄭官五) 이름은 협(陜)으로, 민(閔) 땅 사람인데 장백행(張伯行)에게 배웠다. ㆍ주용관(周龍官)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를 편수하고 벼슬은 한림원검토(翰林院檢討)였다. ㆍ심난관(沈蘭官) 육기(陸圻)의《명보록(冥報錄)》에 보인다.
나의 짧은 견문으로는 이 정도만 기억된다. 또 우리나라에도 다음과 같은 사람이 있다.
관창(官昌) 신라 때 충신(忠臣)이다.《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인다. ㆍ김의관(金義官) 신라 때 이찬(伊飡)을 지냈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인다. ㆍ김관일(金官一) 경주 김씨 족보에 보인다.
'책과논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朝鮮 漢文簡札의 존경·겸하 표시 부호 연구 (0) | 2018.09.04 |
---|---|
寒暄箚錄 (0) | 2018.09.04 |
李德懋 척독 연구 (0) | 2018.09.04 |
근세 일본의 서간(書簡)에 대하여 (0) | 2018.09.03 |
척독 교본을 통해 본 근대적 글쓰기의 성격 재고 (0) | 2018.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