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德懋 척독 연구

2018. 9. 4. 14:31책과논문

李德懋 척독 연구
-‘내면’, 혹은 ‘사적 자아’의 발견-


1)홍 인 숙 *


국문초록
서신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소통창구이지만 조선후기 문인들에게 그것은 적
극적인 문예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글은 靑莊館李德懋(1741~1793)의
척독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 특징과 독자성을 규명해보고자 한다.
이덕무의 척독에는 다른 작가의 어떤 척독에서보다 강하게 이덕무라는 작가
의 ‘인간적인 측면’과 ‘개인으로서의 표지’가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한 이덕무 척
독의 ‘개인적’ 특징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 그의 척
독에는 낭만적인 자기 고백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한 자기 고백의
내용에는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의 감정, 일상의 경험,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과
표현 등이 들어있다. 둘째, 그의 척독에는 주관적인 세계 인식의 경향이 강하게
발견되는데, 이러한 특징은 대단히 격조 높은 서정적인 표현으로 드러나고 있다.
셋째, 그의 척독에는 이덕무라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기호와 취향이 개
성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지인들에게 보낸 척독을 통해 드러나는 개인적 취향과
미각적 기호, 평소의 습관 등은 이덕무의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며 매우 친
밀한 대상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렇듯 사적이고 개인적인 특
성을 보여주는 이덕무의 척독은 백탑 시파의 다른 문인들이 남긴 척독들과도 분


* 이화여대 국문과 박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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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750) 서울시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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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히 변별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덕무의 척독은 평소에 그가 가지고 있던 문학론의 입장과 상충하는 문학적
실천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매우 흥미롭다. 그는 조선후기 소설 독서의
폐해를 비판한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그러나 그는 다수의 척독 작품을 통해 당
시에 소설과 함께 문체반정의 대상으로 심각하게 지적되었던 ‘소품체’ 작품을 오
히려 적극적으로 창작하고 있었다. 그의 문학론과 문학행위 사이의 이러한 모순
은 오히려 살아있는 인간의 복잡하고 상호 모순적인 ‘내면 세계’를 더욱 입체적
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로 만들어 준다.


주제어 : 이덕무, 척독, 개인적 표지, 내면, 사적 자아


1. 들어가는 말
서신은 기본적으로 사적인 소통창구이다. 서신에는 창작 주체의 자발성
과 고백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며 무엇보다도 작가 자신의 인간적
면모가 솔직하게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서신의 문학성을 보장해주는 근
거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고백적인 성격에 있을 것1)이다. 근본적으로 편
지는 그것을 보내는 사람의 ‘자발적인 자기 고백’이며, 자기를 드러냄으로
써 타인과의 ‘의사 소통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는 장르인 것이다. 이러한
서신의 성격이 가장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은 조선후기 後四家를


1) 안대회는 조선후기의 소품문의 ‘感性的글쓰기의 지향’을 지적하면서 그 고백적
성격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특히 일부 소품 작가는 자기 고백적이고
주관에 깊이 감염된 글을 씀으로써 이채를 띠었다. 절제를 미덕으로 하는 조선의 사
대부 문학에서 자기 고백적 산문의 출현은 18~19세기 산문영역의 뚜렷한 한 특징
으로 내세울 수 있다.’, 안대회(2003), 「조선후기 소품문의 성행과 글쓰기의 변모」, 조선후기 小品文의 실체 , 태학사, 39면.
李德懋척독 연구 3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새로운 문학 유파의 ‘척독’2) 작품에서라고 할 수 있
다. 연암그룹, 또는 백탑시파라고 불리우는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
공, 이서구 등은 패사소품 논쟁의 핵심에 서 있으면서 새로운 문학적 흐름
을 주도해나갔던 인물들이다.
이들 가운데 특히 靑莊館李德懋(1741~1793)는 정조의 총애를 받으
며 검서관으로 재직하였고 조선후기 소설 독서와 경학의 해이를 심각하게
비판한 인물이다. 그는 정조가 당시의 문풍을 ‘비루하고 기이하다’고 지적
한 비판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의 태도를 보이면서, 그러한 정책에 맞게 문
장을 고쳐나가야 할 것임을 다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모
순적이게도 그가 남긴 대단히 많은 수의 척독 작품들은 순정한 고문의 문
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강한 소품체 경향을 띠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이
덕무의 ‘문학론’과 ‘문학 행위’ 사이의 모순과 간극이 ‘척독’이라는 장르
에 집중되어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덕무는 「雅亭遺稿」卷七, 卷八, 卷十一, 그리고 「刊本雅亭遺稿」卷
之六, 卷之七에 이르는 다섯 권에 걸쳐 37명의 수신자에게 총 238편이라
는 많은 양의 척독 작품을 남겼다.3) 이러한 이덕무의 척독에 대한 기존


2) 척독에 대해서는 韓國漢文學硏究 31집에서 기획주제로 상세히 다루어진 바 있
다. 書와 구별되는 ‘척독’ 장르의 의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고 있다. 정민
(2003), 「연암 척독의 문예미」, 韓國漢文學硏究 31집, 韓國漢文學會, 52면. ‘척독
은 짧은 편지다. 허균은 자신이 엮은 明尺牘 4권 뒤에 쓴 발문에서 “單詞隻言으
로 이치의 핵심을 곧장 깨뜨려 사람의 뜻을 꺾어 굴복시키면서도 뜻은 말 밖에 있는
것”을 척독의 특성으로 찔러 말한 바 있다. 척독이 단지 짧기만 해서는 안되고, 意在
言外의 함축과 핵심을 찌르는 흡인력, 그리고 여운을 남기는 강한 서정성을 바탕으
로 함을 지적한 것이다.’; 심경호(2003), 「박지원과 이덕무의 戱文교환에 대하여」, 韓國漢文學硏究 31집, 韓國漢文學會, 106면. ‘척독은 흔히 書信의 代稱으로 쓰
였다. …… 송대에 이르러 문집에 척독이라는 표제가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명
나라 말에 척독은 書와 구별되어 短小精致한 예술양식으로 부각되었다.’
3) 「아정유고」의 권9, 권10의 결본 부분이 ‘書’ 장르를 싣고 있는 부분이라는 점을 덧
붙여 생각해보면 이덕무가 척독이라는 장르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힘써 창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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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는 이미 상당한 성과를 축적해 놓고 있다. 김성진은 조선후기 소품체
산문의 유형을 살피는 가운데 ‘尺牘類’에서 연암과 함께 이덕무의 척독을
대표격으로 다루었다.4) 권정원은 이덕무 척독의 전모를 다루면서 그 전반
적인 특징을 ‘內容의 眞率性’과 ‘表現의 審美性’이라고 보고, 이덕무의
척독으로 인해 척독이 본격 ‘文藝物’로 산문사에 자리잡게 되었다고 그
의의를 지적하였다.5) 또한 강명관은 이덕무의 대표적인 소품체 필기류인
「耳目口心書」와 「선귤당농소」가 ‘섬세한 묘사와 미세한 감정, 기이함의
추구’를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그의 척독에 나타난 비평양상이 공안파의
대표적 이론가인 원굉도의 영향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면서, 이덕무
가 문체반정의 주된 교정 대상으로 지목된 원인을 분석하였다.6) 한편 심
경호는 이덕무와 연암 박지원이 교환한 유일한 척독으로 남아있는 ‘山海
經補東荒’을 중심으로 이덕무와 연암의 사상과 학문, 그리고 독서의 경향
을 읽어내고 있다.7)
이러한 이덕무 척독의 기존 연구는 그의 척독 작품들이 문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본격적인 ‘문예물’이라는 점을 뚜렷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소품체의 유행이라는 조선후기 글쓰기의 변화 움직임과 관련하여 이덕무


는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권정원의 다음 논문에서는 이덕무 서신의 전체적인
개괄과 수신자별 분류, 수신횟수, 교유관계 등을 자세히 밝혀두고 있다. 權政媛
(2001), 「靑莊館李德懋의 尺牘硏究」, 東洋漢文學硏究 제15집, 6~14면.; 權政
媛(1996), 「靑莊館李德懋의 尺牘硏究」, 釜山大敎育大學院, 석사학위논문, 1996.
4) 金聲振(1991), 「朝鮮後期小品體散文硏究」, 釜山大博士學位論文, Ⅲ.小品體
散文의 類型3. ‘尺牘類’, 81~88면.
5) 權政媛(2001), 「靑莊館李德懋의 尺牘硏究」, 東洋漢文學硏究 제15집, 2001,
14~42면.
6) 강명관(2003), 「李德懋小品文硏究」, 조선후기 小品文의 실체 , 태학사.; 강명관
(2002), 「이덕무와 공안파」, 민족문학사연구 21집, 민족문학사학회.
7) 심경호(2003), 「박지원과 이덕무의 戱文교환에 대하여」, 韓國漢文學硏究 제31
집, 韓國漢文學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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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고 그것을 ‘실천’하는 주요한 장르로 기능하고 있
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준다. 따라서 이 글은 이덕무의 ‘문학론-
입장’과 ‘문학 행위-실천’ 사이의 간극이 ‘척독’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
의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하여, 그의 척독이 어떻게 작가의
‘내면’을 확보하고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개인’으로서의 표지를 담지하
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당시의 다른 작가들이 보여주었던 척
독8)과 또 다른 이덕무 척독이 가지고 있는 특징과 의미를 고찰하기 위한
것이다.


2. 문체 갈등에 개재된 ‘개인’으로서의 자기 인식
18세기에 들어와서 기존의 글쓰기가 다채로운 변화를 보이면서 새로운
문체와 문학 창작이 ‘소품문’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은 기지
의 사실이다.9) 또한 이러한 문학적 경향이 자신만의 창조적이고 개성적인
언어를 구사할 것을 주장한 명말 公安派의 문학이론에서 일정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는 사실 역시 기존 연구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10) 이러한
문단 상황에서 이덕무는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문인들에게 공안파의 대표
적인 이론가인 袁宏道나 陳繼儒에 직접 빗대어지는 작가였다.11)


8) 예를 들어 이덕무와 깊은 교분을 나누었던 백탑시파의 대표적 문인인 연암의 척독
은 다양한 수사 전략을 구사하면서 전혀 새로운 문체를 실험하고 척독 하나하나를
戱文이자 奇文으로 구성하고 있다. 또한 그의 척독은 작품 자체의 문학적 완결성을
지향하고 있다. 연암 척독의 수사적 전략과 문예적 성격에 대해서는 정민의 앞 논문
에서 매우 상세하게 고찰된 바 있다.
9) 안대회, 앞 논문.
10) 강명관, 앞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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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동시에 원굉도와 같은 문학적 지향을 가지고 있었던 김성
탄의 평비와 소설 문체에 대해서는 강경하고 확고한 반대 입장을 드러내
고 있기도 했다. 많은 연구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이덕무는 당대의 어떤 문
인보다 그 시대에 유행하고 있었던 稗史小品體, 즉 소설 문체에 대하여
강력한 배척론자였다.12) 이덕무는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시절의 저
술인 「嬰處雜稿」, 「耳目口心書」에서부터 ‘小說最壞人心術’, ‘小說演義
之風, 爲害不小’ 등의 언급을 통해 소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일관되게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소설을 찾는 사람들의 독서 경향을 크게 개탄
하면서 ‘經書’의 독서를 강권하고 절도를 취할 것을 권유하곤 하였다.13)
그런데 그 당시 새로운 글쓰기의 문체로 대두되었던 稗史小品體란 기
실 소설만도 소품만도 아닌, 그 둘을 포함한 ‘새로운 글쓰기’였다. 그 새로
운 글쓰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古文’의 대척점에 서있는 모든 글쓰기를


11) 대저 칭찬의 병이란 바로 속이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나를 袁宏道와 鍾惺
에 비유하니 어찌 그리도 과람합니까. 168면.; 그는 특히 尺牘題評을 잘하였는데,
작게는 한 글자의 짧은 말을 쓰는 것에서 길게는 여러 편을 종이를 이어붙여 쓴 것
까지 그 작고 섬세하고 얽혀있으며 미세한 것이 가히 경탄할 만하고 사랑할 만 하였
으며 종횡으로 백 가지가 나올 만큼 기묘하였으니, 거의 이군실과 진중순의 무리와
같거나 오히려 능가할 만 했다. ‘尤善尺牘題評, 小而隻字單辭, 大而聯篇累紙, 零
零 , 纏纏霏霏, 可驚可愛, 縱橫百出, 殆欲兼李君實陳仲醇輩, 而掩其長者矣.’,
朴齊家, 「雅亭集序」, 貞蕤集 , 국사편찬위원회.
12) 이덕무의 소설배척론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김경미(1991), 「이덕
무의 소설배척론 재고」, 고전문학연구 제6집, 한국고전문학회.; 전이정(2001), 「청장
관 이덕무의 소설론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이문규(2001), 「이덕
무의 소설배격론 연구」, 국어교육 105호, 263~292면.
13) 足下之病之崇乎. 金人瑞災人也, 西廂記災書也. 足下臥病, 不恬心靜氣, 澹泊蕭
閒, 爲弛憂銷疾之地, 而筆之所淋, 眸之所燭, 心之所役, 無之而非金人瑞, 而然猶
欲延醫議藥, 足下何不曉之深也. 願足下筆誅人瑞, 手火其書, 更邀如僕者, 日講論
語, 然後病良已矣. ‘與朴在善齊家書’, 「刊本雅亭遺稿」卷七, 靑莊館全書 .; 毛聲
山亦聖嘆者類, 其口業才則才矣, 往往露醜. 余嘗於人座隅, 見三國演義, 至七縱七
擒, 祝融夫人事, 評筆大醜, 我卽罵而擲去. ‘族姪復初光錫’, 「雅亭遺稿」卷七, 靑
莊館全書 卷十五
李德懋척독 연구 7


지칭한다. 小說과 小品文은 그 장르가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그 두 장르
의 ‘문체’가 모두 훗날 정조가 문체반정에서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했던 배
격의 대상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이었다. 따라서 소설배척론자라는 ‘문학적
입장’을 가진 이덕무의 문학 세계가 보다 정합적이기 위해서는 그의 문체
는 마땅히 ‘古文’의 격식을 따르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자신 역시 52세의 만년에 그토록 그를 총애했던 정
조에게서 ‘문체반정’의 대상으로14) 지목되고야 말 새로운 문체인 ‘소품체’
에 강하게 견인되고 있었다. 그는 <삼국연의>나 <서상기>와 같은 ‘稗
史’에 대해서는 젊은 시절부터 배척의 입장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으면
서도, 패사와 쌍을 이루었던 ‘새로운 문체’, 즉 ‘小品’에 있어서는 외려 적
극적인 ‘문학적 실천’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척독을 비롯한 그
의 많은 소품문들은 창작 연대가 20~30대의 젊은 시절에 집중되어 있으
며 문체반정이 일어나 자송문을 요구받은 시기는 거의 임종 직전의 시기
였다. 따라서 이덕무가 일관되게 배격 의사를 밝혀온 소설과 달리 ‘명말청
초의 문체’, 즉 소품체에 대해서까지 분명한 수정 의지를 밝힌 것15)은 거
의 죽기 직전에 이른 시기에서였다.
그렇다고 젊은 시절의 이덕무가 소품체의 문체를 쓰면서 내면의 갈등이


14) 正祖, ‘李德懋朴齊家輩, 文體全出於稗官小品. …… 而此輩處地異他, 故欲以此
自標’, 「日得錄」, 홍재전서 .
15) 이덕무는 1793년 1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그 해 1월 초 박제가에게 보
낸 편지에서 남공철이 ‘고동서화’라는 표현으로 정조에게 문책을 받고 자송문을 지
어올린 사실을 전하면서 박제가에게도 죄과를 자인하는 글을 쓸 것을 권하였다. 이
서신에서 이덕무는 배격해야 할 문체로 ‘小說’뿐 아니라 ‘明末淸初의 저속경박한
말’을 지목하여 소품적 문체에 대한 경계를 명시하였다. 이렇게 그는 문체반정이 일
어났던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소품체’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부화한 말을 쓰지 말고 자구 간에는 소위 세속에서 말하는 小說과 명
말청초의 저속하고 경박한 말을 쓰지 않기를 바라오. 愼勿犯用俗所謂小說及明末淸
初一種鄙俚輕薄口氣’, ‘與朴在善齊家書’, 「刊本雅亭遺稿」卷七, 靑莊館全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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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없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다음의 척독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다른
작가의 작품을 평가하거나 본격적인 문체론을 펼치면서 문체에 대한 자의
식을 드러내고 있는 다음 척독에서의 갈등적 진술은 흥미롭다.
족하의 시와 素玩, 蘚書두 선비의 시를 읽고 다음과 같이 차탄했습니
다. ‘야, 이것은 옛 사람의 시다! 아니다, 옛사람은 다 죽어 한 명도 눈에 보
이지 않는데 어찌 지금 시를 지어 내게 보이겠는가? 지금 사람의 시다! 그
러나 천하에 모두 지금 사람들 뿐인데 어찌 지금 사람이 이렇게 좋은 시를
짓겠는가?’ 이래서 古今두 글자가 흉중에서 티격태격하여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16)
어떤 사람이 평지에 서서 두 華山이 하늘에 꽂힌 듯 수려한 빛이 서린
것을 보고도 눈을 막고 지나가며 ‘위험해, 위험해’ 하는 것과, 신선의 부엌
에서 나온 진수성찬이 잔뜩 차려있고 그 중에 脫粟飯이 있는데도 진미를
마다하고 밥을 먹는 것이 어찌 사람의 본래 마음이겠습니까. …… 나는 전
부가 평이한 것은 하고 싶지 않고, 전부가 기이한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러므로 4분은 평이하고 6분은 기이하여, 때로는 평탄한 길을 걷기도 하고
때로는 깊은 산에 들기도 합니다.17)
유득공에게 보낸 척독인 첫 예문과 윤가기에게 보낸 척독인 두 번째 예


16) 讀足下詩及素玩蘚書二士詩, 以爲古人詩, 古人已死, 眼中不見一古人, 何嘗今日
作詩示我. 以爲今人也, 盈天下皆今人也, 焉有今人吐出者箇好詩. 古今二字交戰
胸中, 無法可解. ‘書柳惠甫得恭’, 「雅亭遺稿」卷十一, 靑莊館全書 .
17) 今有人平地立見二華揷天, 秀色橫蟠, 掩目而過曰, 危哉危哉, 仙廚珍品, 羅列於
前, 間之以脫粟飯, 掉頭珍品, 而頓頓喫飯, 豈人情哉. …… 某全平不欲也, 全奇不
能也. 故四分平, 六分奇, 時行坦道, 時入深山. ‘書尹曾若可基’, 「雅亭遺稿」卷八, 靑莊館全書 .
李德懋척독 연구 9


문은 모두 연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직접적으로 발견되지는 않으나, 비교
적 젊은 시절에 서로 글을 돌려보고 평가를 받아보곤 하던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위 첫 예문에서 그는 유득공과 두 선비의 시를 읽고
‘古’와 ‘今’의 평어로 그들의 시를 평가하고 있다. ‘古人’은 모두 죽은 이
들이니 세상에서 옛사람의 시를 찾아볼 수가 없고 당대 사람인 ‘今人’들
에게서는 좋은 시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하면서, ‘今人’인 유득공이 ‘古人’
의 경지에 올랐다는 상찬의 평어로 ‘古人詩’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사용하는 ‘古’와 ‘今’의 평어는 좋고 나쁜 기준, 즉
명백한 문학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는 용어이며, 그에게 ‘古’라는 문학적
가치는 당대의 ‘今’의 문학이 흉내낼 수 없는 이상적인 표준으로 받아들
여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두 번째 예문을 보면 그는 자신이 창작할 때 이끌리는 표현 방
식이 ‘옛 것’의 기준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자각하고 있다. 이 예문에서는
‘平’과 ‘奇’가 중요한 작품 평가의 기준으로 등장하는데, 그 당시 ‘今’의
기준에서 ‘奇’는 떠오르는 새로운 미적 범주였음을 염두에 둘 때 ‘平’은
자연스럽게 ‘古’에 대응되는 미적 범주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앞서와 달리 평범함보다는 기이함에 이끌리는 것이 자연스
러운 인간의 본래 마음임을 역설한다. 그래서 기이하고 아름다운 산을 위
험하다고 비켜가거나 진미를 마다하고 밥을 먹겠다고 우기는 것이 ‘어찌
사람의 본래 人情이겠는가’하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덕무에게 ‘古’는
회복해야 할 문학의 이상적 표준이자 가치이지만, 실제로 그가 매혹되고
있었던 것은 ‘奇’의 미학이었다. 그래서 그는 ‘全平’도 하고 싶지 않고
‘全奇’도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두 미학적 범주 사이의 내적 갈등을 조
심스럽게 조율한다. 때문에 ‘平’과 ‘奇’를 각기 4대 6의 비율로 맞추어 때
로는 평평한 길을 가듯, 때로는 깊은 산 속을 가듯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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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덕무는 새로운 문체와 참신하고 기이한 표현에 매혹되었고 실
제로 그렇게 창작에 임하였지만 또한 스스로 그것을 견제하고 있기도 했
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자신의 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의 글을 비평할 때도 그대로 적용되어, ‘기이함’을 칭찬하기도 하지만 때
로는 매우 질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간혹 ‘기이함’을 경계하는 그의 글
자체가 지나치게 ‘기이함’의 미학으로 나아가는 자기 모순을 드러내는 경
우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의 글은 족질인 심계 이광석의 글이 지나
치게 난삽하고 기이함을 추구하고 있다고 충고하는 척독의 일부이다. 그
런데 이광석 문장의 기이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적시하기 위한 ‘소라구멍’
비유의 장황하고 구체적인 묘사는 결과적으로 평자인 이덕무 척독 문장의
기이함의 미학을 보여주는 데에 이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염소뿔처럼 꼬불한 소라 속을 꿰려면 아주 섬세한 실 끝에 밀랍을 발라
서 개미의 허리에 붙인 다음, 개미를 소라구멍에 넣고 훅 불면 개미가 그
길을 따라서 나갈 것이니, 이렇게 되면 실은 자연히 소라구멍을 꿰게 될 걸
세. 심계의 글은 마치 회오리 바람과 같고 잔잔한 파문과 같으며 교묘하고
주밀한 것이 마치 꼬불꼬불한 소라 속과 같으니, 내가 아무리 두 눈으로 호
시탐탐 노려본들 나는 섬세하기가 개미에게 붙인 실이 아닌데 어떻게 그 깊
은 소라 속을 알 수 있겠는가.18)
이렇듯 이덕무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소설 문체와 소품 문체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상이한 평가를 내리는가 하면, 소품체 문장을 선호하면서도


18) 有欲貫螺室之回旋若羊角者, 纖綸之緖, 接之以密, 迺膠夫蟻子之腰, 送之螺穴而
吹焉, 蟻子尋其路而出, 絲於是貫其中矣. 心溪之文, 若旋風焉, 若輪漪焉, 巧且密
焉者, 螺室之回旋也. 不侫之雙眸, 雖耽耽如虎, 其纖悉, 非密蟻絲也, 安知螺室之
邃哉, ‘書族姪復初光錫’, 「雅亭遺稿」卷之七, 靑莊館全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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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표현의 정도가 지나쳐서는 안된다고 검열의 기제를 작동시켰다. 참신
하고 기이한 표현에 매혹당하는 자신의 내면을 조심스럽게 조율하려 노력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과잉된 수사적 문체를 경계한다면서 그 자신이
극단적인 소품체적 미학을 추구하는 창작을 하기도 했다. 이덕무의 척독
들은 이렇듯 복잡한 속내로 얽혀있는 이덕무의 문학론과 문학적 실천 사
이의 무의식적 갈등과 자기 모순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19)
그러면 그의 척독에 이렇듯 문체에 대한 고민과 갈등이 많이 드러나고
있으며, ‘문학론-입장’과 모순된 ‘문학적 실천-창작’을 보인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명말청초의 공안파 및 경릉파의 문체가 기존의 다른
누구도 쓰지 않은 尖新한 표현을 중시한다는 특징은 결국 가장 개인적인
자기 표현으로서의 개성을 드러내기에 용이하다는 점과 맞물려 있다. 젊
은 시절의 이덕무의 척독 소품에서 소품체 문체에 대한 갈등과 자의식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은, 그러한 갈등 속에서 이덕무가 ‘개인’으로
서의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실제로 그
의 척독에서 읽어볼 수 있는 ‘개인’의 표지란 어떠한 것인지 다음에서 살
펴보기로 한다.


3. 이덕무의 척독에 나타난 ‘개인’의 표지
이덕무의 척독은 유독 그의 성격과 사람 됨됨이와 같은 인간적인 측면
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의 척독에서 읽을 수 있는 그러한 자신에 대한


19) 이러한 그의 척독의 내적 갈등 양상은 본격적인 詩學的해석을 가능하게 해줄 것
으로 보인다. 시학적 작품 해석의 가능성은 나중의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12 韓國漢文學硏究33輯


표현은 ‘누구와도 같지 않은 사람‘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의 드러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자기 표현을 통해 나타나는 그의 고유한
개별자로서의 면모를 ’개인‘의 표지라고 보고, 자기 고백, 세계 인식, 기호
와 취향의 면에서 그의 ’개인‘으로서의 면모를 각각 살펴보기로 한다.


1) 자기 고백의 낭만성
이덕무는 親友들에게 수백통에 달하는 편지들을 남기고 있는데 그 가
운데에서도 가장 많은 수의 편지가 족질이었던 心溪李光錫을 수신자로
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광석에게 보낸 그의 척독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그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는 내용들이며, 그러한 자신의 감정의 진폭을 조금
도 숨기지 않고 전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이광석에게 보낸 척독
에는 ‘사람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넘칠 듯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이광석에게 보낸 척독을 보면 보통 친지간에 오갈 만한 가문의 일이나 평
범한 근황을 담은 내용보다는, 내면 세계의 섬세한 변화를 담은 그리움의
토로와 상대의 학문과 정신의 안부를 진지하게 묻는 내용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늘 외로이 앉아서 자네를 생각하다가 끝내 볼 수가 없을 때에는 ‘저 사
람도 나를 생각하기를, 내가 자기를 생각하는 듯이 하겠지’ 생각하면, 그제
야 마음이 편안해지더군. 우리 두 사람의 생각이 하늘에 뻗치는 무지개나
안개가 된다면 아무리 천 리 먼 곳이라도 날아가서 만날 수 있겠지.20)


20) 每孤坐悔伊人, 終不可見則曰, 彼伊人亦懷我, 其如我也, 始怡然爾. 夫惟二人者
思也, 若化爲亙虹蔚霞, 雖千里悠邈, 可飛而接也. ‘族姪復初光錫’, 「雅亭遺稿」卷
七, 靑莊館全書 .
李德懋척독 연구 13


나는 글 보는 것이 둔하고 거칠어서 지난 번 자네의 글도 내가 잘못 본
것일세. 심계의 글이라면 아무리 생소하고 난삽한 어려움도 사양치 않을 것
이네. 왜 긴 편지를 지어보내지 않는가?21)
위 척독에서 읽을 수 있는 족질에 대한 이덕무의 애정은 매우 각별하다.
그는 상대를 그리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별한 뒤 시간이 劫을 지나는
듯 지루하다’고 하기도 했고, 상대방의 ‘얼굴이 열 겹의 깁에 싸인 등 안
에서 흔들리는 듯 떠오른다’고 하여 오래 만나지 못해 얼굴조차 가물가물
해졌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곡진하게 그리고 있기도 하다.22) 첫 번째 예문
역시 이덕무가 이광석에 대한 자신의 절절한 마음을 드러내는 편지 중 하
나이다. 연모하는 마음에 가까운 감정 고백은 곧 사랑을 먼저 고백하는 자
가 가지게 되는 취약한 위치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
는 그리움의 감정이 자신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고 토로하고는, 다시 그런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달래고 자위하는 심
리적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두 번째 예문은 이덕무가 이광석에게 문장이 지나치게 기이하다고 힐난
한 장문의 편지 뒤에 실려있다. 이광석의 답신이 늦어지자 자신의 편지로
인해 조카의 마음이 상했을까 염려한 이덕무는 조급한 후회의 감정을 드
러내며 스스로를 탓하고 있다. 자신의 시각이 둔하고 거칠기 때문에 글을
잘못 본 것이지 이광석의 글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로,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고 글에 대한 비판을 취소하기까지 한다. 그의 척독은 이렇


21) 不佞看書魯?, 夙昔尊帖, 乃錯看也. 然心溪之文, 心則不辭生澁之誚也. 長牘何不
搆送. ‘書族姪復初光錫’, 「雅亭遺稿」卷七, 靑莊館全書 .
22) 自別吾心溪, 日永如度劫, 未菩之花, 已蕊銷瓣釋, 而靑子綴樹樹, 遂想心溪之鬢
鬚顔頰, 기旎滉漾, 如十重紗援紅燈, 廣州二婆子, 面如縐鐵, 忽立砌頭, 致我尺牘,
躍然奉咏, 又試想之, 十重紗除五重矣. 何日握脘, 盡除此紗. ‘族姪復初光錫’, 「雅
亭遺稿」卷七, 靑莊館全書 卷之十五.
14 韓國漢文學硏究33輯


듯 후회의 감정을 비롯하여 섭섭함이나 노여움과 같은 취약한 인간적 감
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을 종종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덕무의 척독은 자신이 겪고 있는 구체적인 생활의 어려
움과 삶의 좌절감을 일화적으로 구성하는 내용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음
예문은 이덕무가 이서구에게 보낸 척독의 일부로, 가난한 지식인의 오래
된 풍류담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자기 경험의 고백이 드러나 있는 경
우이다.
내 집에 가장 좋은 물건은 다만 「맹자」7책 뿐인데, 오랫동안 굶주림을
견디다 못하여 돈 2백 닢에 팔아 밥을 잔뜩 해먹고 희희낙락하며 영재에게
달려가 크게 자랑하였소. 그런데 영재의 굶주림 역시 오랜 터이라, 내 말을
듣고는 즉시 「좌씨전」을 팔아 그 남은 돈으로 술을 사다가 나에게 마시게
하였으니, 이는 자여씨가 친히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생이 손수 술을
따라 나에게 권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소. 그리하여 맹씨와 좌씨를 한없이
찬송하였으니 우리가 1년 내내 이 두 책을 읽기만 하였던들 어떻게 조금이
나마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겠소? 글을 읽어 부귀를 구하는 것은 요행을 바
라는 술책이요, 당장 팔아서 한때의 취함과 배부름을 얻는 것이 보다 솔직
하고 가식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참으로 알았소. 족하는 어떻게 생
각하시오?23)
이 척독은 초시에 합격한 34세 이전, 적어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23) 家中長物, 只孟子七篇, 不堪長飢, 賣得二百錢, 爲飯健噉, 嬉嬉然赴泠齋, 大夸
之. 泠齋之飢, 亦已多時, 聞余言立賣左氏傳, 以餘錢沽酒以飮我, 是何異子輿氏親
炊飯以食我, 左丘生手斟酒以勸我, 於是頌贊孟左千千萬萬. 然吾輩若終年讀此二
書, 何嘗求一分飢乎. 始知讀書求富貴, 皆僥倖之術, 不如直賣喫圖一醉飽之樸實
而不文飾也. 嗟夫嗟夫, 足下以爲如何. ‘與李洛瑞書九書’, 「刊本雅亭遺稿」卷六, 靑莊館全書 .
李德懋척독 연구 15


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서얼들의 곤핍한 삶을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경험했던 이덕무의 삶의 흔적은 그의 척독 곳곳에서 벗들에게 땔나무나
보리쌀을 빌려줄 것을 청하는 내용으로 드러나 있다. 그런 빈곤을 견디던
어느 날 이덕무는 오랫동안 굶주리던 끝에 결단을 내려 집안에서 제일 쓸
만한 물건인 「孟子」를 팔아 밥을 해먹고, 유득공을 찾아가 그것을 크게
자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유득공 역시 선비가 책을 팔았다
는 사실에 대해 책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덕무의 말에 옳다꾸나 합세하
여 즉시 「左氏傳」을 팔아 함께 술을 마셨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리
고 맹씨와 좌씨가 자신을 직접 먹여준 것이나 다름없으니, 한없는 칭송이
나온다는 호기로운 넉살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장난스러운 태도는 곧 삶의 가식적인 태도를 은근히 경
원하는 자유인의 면모로 넘어가면서, 동시에 한없이 글만 읽게 만드는 제
도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1년 내내 굶주리며 책을 읽기
만 한다고 살 방도가 생기지 않는다면 차라리 책을 팔아 끼니를 마련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글을 읽어 과거를 보고 입신양명하는 꿈
이야말로 오히려 ‘요행을 바라는 술책’이라는 말에는, 과거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庶孼’, 반쪽 양반들의 현실이 그
대로 투영되어 있다. 이렇듯 이덕무의 척독은 그 자신의 신분적 한계와 가
난함에 대한 뼈아픈 인식을 배면에 깔고 있는 개인적 경험의 고백을 ‘호
기로운 풍류담’으로 짐짓 과장되이 드러내는 면모를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이덕무의 척독은 그 자신의 ‘사람됨’에 대한 고백을 흥미
롭게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덕무가 26세에 「이목구심서」를 완성하자
연암이 그 책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다음의 글은 이덕무가 자기 저술을 빌
려주는 과정에서 그와 연암 사이에 몇 번의 척독이 오가게 되었으며, 그러
던 끝에 ‘산해경’의 문체를 빌려 ‘山海經補東荒’이라는 희문을 짓게 되기
까지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덕무의 평소의 자


16 韓國漢文學硏究33輯


기 인식과 그것의 고백은 매우 흥미롭다.
일찍이 나에게 「이목구심서」를 보여달라고 서신이 세 번이나 왔기에 내
가 승낙하여 보내주고 나서 다음날 서신을 보내 찾아오며 이르기를, “귀와
눈은 바늘구멍 같고 입은 지렁이구멍 같으며 마음은 개자만 하니, 대방가의
웃음을 자아내기에 알맞을 뿐이다.” 하였더니, 미중이 나의 서신 사이에 註
를 달기를, “이 벌레의 이름이 무엇인지 博物者는 해명하라.” 하였다. 그래
서 내가 또 서신을 보내기를, “한산주 조계종 본탑 동쪽에 옛날 어느 이씨
가 벌레 한 마리를 길렀는데 벌레 이름은 섭구이며, 성품이 양보를 잘하고
숨기를 좋아한다.”하였다. 그러자 미중이 희롱삼아 山海經補를 지으면서
나라는 사람이 섭구벌레라 풀이하였으므로 내가 다시 희롱삼아 郭景純注
를 모방하여 나의 책이 섭구벌레라고 변론하였다. …… 살펴보면 섭구벌레
는 생김새가 모나고 침착하며 색은 하얀데 무수한 검은 반점이 있다. 길이
는 周尺으로 한 자가 채 못되고 그 몸피는 반자쯤 되는데 脈望을 잘 기르
며 헝겊상자 속에 자기 몸을 숨기고 있다. 옛날 성품이 蘊藏하고 退讓한
어떤 이씨가 그 벌레가 몸을 잘 감추는 것이 자기와 같음을 사랑한 나머지
가만히 길러 번식을 시켰으므로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서
로 관섭되고 있다.24)


24) 朴美仲甫與不侫同閈, 晨夕談文, 雅或相似, 文爲謔, 聊自寓心. 嘗要不佞耳目口
心書, 書凡三至, 不佞諾焉, 翌日不佞, 貽書索之曰, 耳目如針孔, 口如蚯蚓竅, 心
如芥子大, 只足以取大方之笑. 美仲注不佞書間曰, 此蟲何名, 博物者辨之. 不佞又
貽書曰, 漢山州曹溪宗本塔東, 古有李氏蓄一蟲, 蟲名囁구. 性善讓而好藏也. 於是
美仲戱譔山海經補, 釋不佞之人, 爲囁구蟲也. 不佞又戱擬郭景純注, 辨不佞之書,
爲囁구蟲也. …… 按囁구蟲, 形方而帖然, 色白有無量黑斑. 長周尺一尺弱, 狹半
之, 善飼養脉望, 隱身巾篋間. 古有李氏, 性蘊藏退讓, 愛蟲之隱身類己也, 潛畜而
滋蕃之, 視聽言思, 宲相關涉. 「山海經補東荒」, 靑莊館全書 卷六十二.
李德懋척독 연구 17


이덕무가 자신의 저술인 「이목구심서」를 ‘귀와 눈은 바늘구멍 같고 입
은 지렁이구멍 같으며 마음은 개자만하다’고 묘사하자, 박지원은 이덕무의
말장난을 가장한 겸손함을 짐짓 모르는 체 하며 그 벌레의 이름을 밝히라
고 답장을 하였다. 위 예문에서 두 사람 사이의 입씨름은 ‘섭구벌레’가 무
엇을 비유하였는가를 두고 일어나는데, 이덕무는 애초부터 그것이 자신의
‘책’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는 반면, 박지원은 이덕무라는 인간 자체가 섭
구벌레라고 비유하고 있다. 입씨름의 결론은 이덕무 자신의 ‘나와 같은 점
이 있다’는 고백을 통해 ‘섭구벌레’라는 비유가 그 자신과 동일시하는 맥
락에서 사용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 글을 통해 이덕무가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섭구벌레’ 같은 자기자신의 모습은 어떠한가. 섭구
벌레의 성품은 ‘양보를 잘 하고 몸을 잘 감춘다’는 점이며, 그걸 기르는
자신의 성품은 ‘蘊藏하고 退讓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설왕설래 중에 문
학적 표현을 통해 걸러진 이덕무의 자기 형상화는 남들 앞에 잘 나서지
않고 겸손한, 얌전하고 사심 없는 선비의 모습이다.
이렇게 그의 척독은 이덕무라는 인간의 자기 고백을 여러 가지 방식의
문학적 표현을 통해 감정의 진폭을 넓혀 보여주고 있다. 이덕무는 그가 느
끼는 벗들에 대한 인간적인 그리움의 감정을 섬세한 표현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삶의 경험을 고백하는 방편으로 삼고 있기도 하며, 또 자기 정체성
에 대한 인식과 자아상의 형상화를 문학적 표현을 통해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에게 척독은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낭만적으로 드러내고 고백
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세계 인식의 주관성
이덕무의 척독은 또한 뛰어난 서정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18 韓國漢文學硏究33輯


있다. ‘개인’으로서의 정서 표현을 직정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이러한 서정
성은 곧 인식 면에서 ‘세계의 자아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라 할 수 있다. 서정적 표현을 통해 세계 인식의 자기중심성을 확인하는
‘개인’을 보여주는 예를 다음의 척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여름이 절반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날씨가 맑네. 심계는 부모님 모시는
일은 여전한가? 요즘은 무슨 일을 하는가? 나는 신음하고 소리지르던 버릇
은 조금 그쳤고, 望奠의 哭을 오늘로 끝냈네. 지난해 이 맘 때는 약을 받드
느라 경황이 없었는데, 물색이 완연히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네. 그래도 처
마 끝의 해 그림자는 예전 그대로이고, 원추리 잎은 푸르게 자라 섬돌과 가
지런하니, 이리저리 둘러보며 슬피 흐느끼게 되고 오장은 녹는 듯 하이. 온
세상이 큰 항아리 속이라면 인생은 큰 하루살이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절실
히 깨닫고 있다네. 심계가 아니면 누가 내 말을 알겠는가?25)
위의 인용문은 이덕무가 25세에 모친상을 당한 뒤의 슬픔을 담아 족질
이광석에게 보낸 척독의 전문이다. 짧은 길이의 산문 속에 어머니를 사별
한 자식의 애통함과, 가까운 이의 죽음을 통해 느끼게 되는 삶의 허무함에
대한 깨달음이 높은 차원의 문학성을 획득하며 표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 안부 인사로 조카가 부모님 봉양을 잘 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
는 것은, 역시 자신이 모실 어머니가 안 계신 哀子가 되었음을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그나마 병든 어머니를 봉양할 수 있었던 한 해 전


25) 初夏半而猶淸, 惟心溪侍事住吉, 近日爲何事也. 德懋呻呌者少止, 然顧今日望奠
之哭. 從자而訖, 往年此時, 侍藥焦遑, 物色宛如隔晨. 簷頭之照影依然, 萱葉抽綠,
如砌而齊, 轉眄悲呌, 隨而鑠腑. 盖覺世界爲大瓮中, 人生爲大蜉蝣, 只如斯, 只如
斯而已矣. 非心溪, 其誰知吾言. ‘族姪復初光錫’, 「雅亭遺稿」卷七, 靑莊館全書
卷之十五.
李德懋척독 연구 19


의 일을 떠올리며 새삼스럽게 자신의 주변을 둘러본다. 어머니가 거처하
던 萱堂의 원추리 잎이 섬돌 옆에 나란히 자라 있다는 표현은 그 곳에 계
시던 어머니의 부재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켜준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그는 삶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절대적인 한계를 절감하고, 유
한한 삶에 대한 허무주의적 인식에 도달했음을 ‘온 세상은 큰 항아리이며
인생은 하루살이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다.
을유년이 마치 꼬리도 잡을 수 없이 구멍으로 다 들어간 뱀처럼 가버렸
으니, 이 아우는 무슨 정황이 있겠습니까? 눈물만 흐르는군요. 섣달 그믐밤
에 초연하게 홀로 앉아 등불로 눈을 삼고 붓으로 혀를 삼아 손 가는 대로 7
조의 小文을 쓰고 누웠는데 모두 슬픈 말 뿐입니다. 내가 목석같은 사람이
아닌데야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26)
위 예문 역시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를 보내면서 자신의 심경을 쓴 편지
이다. 이 글 역시 비유적 표현들의 참신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그로 인
한 슬픔의 감응력도 배가되어 전달되고 있다. 한 해가 흔적도 없이 가버리
는 느낌을 뱀이 구멍으로 들어가버리듯 사라졌다고 표현하면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의 마지막 그믐밤을 보내는 외로움을 드러낸다. 그 슬픔을 글로
적는 모습을 ‘등불로 눈을 삼고 붓으로 혀를 삼아’ 썼다고 묘사하여 부모를
잃은 자식의 애통함을 절실하게 고백하는 글을 썼음을 짐작케 해준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또 여름이 되었소. 그대를 따라 經史를 토론하지 못
하는 것은, 내가 천 그루 도화 속에서 미친 듯이 痛飮하거나, 창문을 닫고


26) 乙酉望望然去, 蛇尾不可握, 而沒入壑矣, 第有何況味乎. 只淚飜瀾耳. 除夜悄然
孤坐, 以燈爲眼, 以筆爲舌, 隨脘襍寫七條小文而臥, 語皆悲酸耳. 不侫非木人石
膓, 安得不然哉. ‘尹曾若可基’, 「雅亭遺稿」卷八, 靑莊館全書 卷之十六.
20 韓國漢文學硏究33輯


굶주리고 누워 貧士傳이나 읽으며 於陵家李螬의 글자 주를 내고 있기 때
문이오. 여러 韻士들의 시권을 보내니 한 번 보고 돌려주기 바라오.27)
위 예문은 이서구에게 보낸 척독 중 한 全文이다. 편지의 주된 전언은
이서구가 청한 모임에 참석하기 힘들다는 말인데, 이 척독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용건보다 더 비중있게 전달되는 정서의 섬세한 표현에 있다.
‘세월이 덧없이 흘렀다’는 서늘한 말로 운을 뗀 이 척독은 모임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를 그저 ‘천 그루 복숭아꽃 속에서 미친 듯 술을 퍼마시고 있
거나, 문 닫고 굶은 채 누워 빈사전을 읽으며 오릉의 집에 벌레먹은 오얏
에 대한 주를 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이 미묘한 울림을 주는 것은 모임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가 어떤 구체적인 다른 일 때문이 아니라 깊은 내적 고민 때문임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 그루의 복숭아꽃 속에서 미친 듯 술을 퍼마신
다는 표현은 정신적인 방황과 갈등을 환상적인 이미지와 뛰어난 시각적
환기력으로 전달해준다. 또 굶은 채로 ‘창문을 닫고 가난한 선비들의 이야
기나 읽으며 주를 내겠다'는 표현은 가난한 선비가 느끼는 세계와 자아 사
이의 단절감과 격절감, 소외된 심정을 탁월하게 전달해내고 있다.
이렇듯 이덕무의 척독에 나타난 서정적인 표현들은 단순히 문학적 완성
도를 높이는 데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척독이 보여주는 서정성
은 궁극적으로 그의 자아와 세계가 맺는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 관계
의 방향이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자기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구심점
으로 하여 조직되는 ‘세계의 자아화’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27) 流年鼎鼎, 朱夏又屈. 不從足下談經討史, 只緣不侫狂顚痛飮, 千株桃花之中, 不
爾則杜牖飢臥, 讀貧士傳, 箋注於陵家李螬字耳. 諸韻士詩卷送去, 一覽而還之.
‘與李洛瑞書九書’, 「刊本雅亭遺稿」卷六, 靑莊館全書 .
李德懋척독 연구 21


3) 기호와 취향의 고유성
이덕무의 척독은 또한 그 개인이 가지고 있는 구체적인 기호와 취향,
그리고 그의 기질과 사람됨을 종종 보여준다. 그것은 좋아하는 것과 싫어
하는 것, 즐기는 것과 혐오하는 것을 분명한 개성으로 가지고 있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자 자신만의 취향을 가진 ‘개인’으로서의 모습이다.
내가 단 것에 대해서는 狌狌이가 술을 좋아하고 원숭이가 과일을 즐기는
것과 같으므로 내 친구들은 단 것을 보면 모두 나를 생각하고 단 것이 있으
면 나를 주곤 하네. 그런데 초정만은 그렇지 않다네. 그는 세 번이나 단 것
을 먹게 되었는데 나를 생각지도 않고 남이 내게 먹으라고 준 것까지 수시
로 훔쳐먹곤 한다네. 친구의 의리라는 것은 친구의 허물을 고쳐주는 것이니,
그대는 초정을 깊이 질책해주기 바라네.28)
저는 평생에 단 것을 즐기는데 보내주신 烏椑1백 개는 1개를 먹을 때마
다 한 번씩 그대를 생각하게 되니, 1백 개를 다 먹게 되자면 생각 또한 1백
번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 보내주신 네 개의 박은 許由가 걸던 일과 顔淵
이 마시던 일을 할 수 있으니 어찌 그리도 고상합니까? 남만의 후추는 단심
처럼 붉으니, 두 마음이 서로 비침이 또 어찌 그리도 참답습니까?29)
이덕무는 무척 단아한 선비로 알려져 있다. 박제가가 남긴 이덕무에 대


28) 鄙人之於甘也, 如狌狌之於酒也, 蝯之於菓也, 凡吾同志, 見甘則思之, 有甘則貽之.
楚亭乃忍, 三度當甘, 不惟不思不貽, 有時而偸吃他人遺我之甘. 朋友之義, 有過則
規, 願足下深責楚亭. ‘與李洛瑞書九書’, 「刊本雅亭遺稿」卷之六, 靑莊館全書 .
29) 不侫平生嗜甘, 惠餽烏椑百枚, 一啖一思足下, 滿百則思亦百回矣. 又來四瓢, 可
奉以爲許由之掛, 顔淵之飮, 何其高也. 南蠻椒, 赤如丹裏, 兩心相照, 又何眞也.
‘姜斯文世輝’ 「雅亭遺稿」卷十一, 靑莊館全書 卷之十九.
22 韓國漢文學硏究33輯


한 글에서 그의 외모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부분을 보면, 단척이었던 박제
가에 비해 그는 키가 크고 야위었으며 학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단 맛을 좋아하는 취향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의외로우면
서 흥미롭다. 단 것을 좋아하는 취향은 그 당시에도 상당히 특이한 일로
기억되었던지 후일 그의 아들이 남긴 ‘先考府君遺事’에서도 단 것을 좋
아했던 이덕무가 꿀을 한 되까지 먹었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30)
위의 예문은 그의 독특한 취향이었던 단 맛에 대한 일화를 스스로 보여
주는 내용으로, 앞에 나온 인용문은 이서구에게 보낸 척독 가운데 한 통의
全文이다. 이 편지의 용건은 간단하다. 다른 말은 한 마디도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단 것을 초정이 챙겨주지도 않고 오히려 훔쳐먹으니 그를 책망
해달라는 것이다. 그는 단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을 익살스럽게도 ‘성
성이와 원숭이’에 비유하면서 다른 친구들은 자신이 단 것을 너무 좋아하
기 때문에 단 것이 생기면 곧장 자신을 떠올리고 종종 갖다준다고 하였다.
그런데 박제가는 자기가 단 것을 좋아하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유의하
지도, 생각지도 않고 주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외려 자기가 먹을 것을 훔
쳐먹는다면서, ‘친구의 의리’까지 들먹이며 심히 과장된 어조로 박제가의
행동을 꾸짖어주기를 청하고 있는 것이다. 원망과 하소연을 가장한 戱作
의 이 편지는 짧은 길이에 걸맞게 단순한 문장 구조가 반복되면서 매우
경쾌하게 읽히며, 동시에 이덕무라는 인간을 미각적 기호 하나로 매우 친
근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두 번째 예문에서 그는 감 한 상자를 받고
감격해 마지 않는다. ‘한 번 먹을 때마다 그대를 생각할테니 백 개를 다
채우면 생각 또한 백 번을 할 것’이라는 순진한 고마움의 표현 역시 이덕
무의 소박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


30) 嗜甘啖蜜至一升, ‘先考府君遺事’, 「雅亭遺稿」卷之八, 靑莊館全書 .
李德懋척독 연구 23


저는 서법에 대해서는 조예가 없어서 간혹 팔을 내저어 글씨를 쓰면, 모
두가 나비 수염이나 사마귀 다리 모양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족하께서 좋
은 종이를 많이 보내주셔서 저로 하여금 종이를 버리게 하시니, 천하의 일
은 참으로 못할 일이 없군요.31)
전에 남의 책을 빌어다 읽는 사람을 보고 나는 그가 너무 부지런하다고
비웃었는데, 이제 문득 나도 그를 답습하여 눈이 어둡고 손이 부르트는 지
경에 이르렀으니, 아, 참으로 사람은 자신을 요량하지 못하는 것이오.32)
어떤 이가 나에게 素冊을 주기에 그것을 벼루 머리에 두고 한적할 때 글
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면 고인들의 득의한 名文을 아무 것이나 뽑아 낭독
하고 나서, 급히 먹을 갈아 세대를 구별하지 않고 그 글을 쓰면 마음이 몹
시 즐거웠소. 이 때에는 비록 좋은 술과 아름다운 꽃이라도 이 즐거움과 바
꿀 수 없었소.33)
위 첫 번째 예문은 종이를 보내준 상대방에게 잘 전해 받았다는 내용을
전하는 답신이다. 그런데 엉뚱하게 자기가 글씨에 조예가 없어서 글씨를
쓰는 족족 ‘나비 수염이나 사마귀 다리’처럼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는 말
부터 시작한 이유는 그 뒤의 문장을 읽어야 알 수 있다. 좋은 종이를 많이
보내주어 무척 고맙다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고맙다는 말 역시 꺼내어


31) 鄙人於書法鹵?, 或運腕, 盡成蜨鬚蜋股. 足下多費妙楮, 使之汚染, 天下事眞無所
不有也. ‘趙敬菴衍龜’, 「雅亭遺稿」卷十一.
32) 古有傭書而仍讀之者, 僕嘗笑其太劬, 今忽自蹈, 幾至眼眵手胝, 嗟乎人固不自量
也. ‘與李洛瑞書九書’, 「刊本雅亭遺稿」卷之六, 靑莊館全書 .
33) 有人饋吾以素冊者, 置硏之北, 蕭閒岑寂時, 讀書之心, 油然而生, 雜抽古人得意
文, 朗然而讀, 急磨墨書之, 不計世次, 心甚樂焉, 伊時, 雖佳酒美花, 無以易此好
也. ‘與李洛瑞書九書’, 「刊本雅亭遺稿」卷之六, 靑莊館全書 .
24 韓國漢文學硏究33輯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글씨를 잘 쓸 줄도 모르는 사람에게 좋은 종이를
마구 버리게 하니 세상에 참 못할 일이 없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으로 말
뒤에 대신 숨겨 전달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좋은 종이를 받고 기뻐한 것은 두 번째 예문과 세 번째 예
문에 나타난 그의 버릇 때문이다. 사실 이덕무는 스스로 ‘看書痴’라고 희
화화한 自傳을 지을 만큼 책을 많이 읽었던 사람이고 그만큼 척독에도 그
가 빌려서 주고받는 책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 예문에서 그가 전하고 있는 것은 책을 빌려 읽는 독서광의 수고
로움, 즉 ‘謄鈔’하는 어려움이다. ‘눈이 어둡고 손에 굳은살이 박히는’ 지
경까지 빌린 책을 옮겨적는 수고로움은 그러나 세 번째 예문에서는 책 읽
는 선비의 운치있는 습관으로 상당히 흥겹게 묘사되고 있기도 하다. 흰 책
을 벼루맡에 펴두고 있다가 마음에 드는 古人의 ‘得意文’을 읽게 되면 얼
른 먹을 갈아 그것을 베껴두는 즐거움이 ‘佳酒美花’와도 바꿀 수 없는 것
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듯 그의 척독은 이덕무라는 문인, 작가의 기호와 취향들을 매우 구
체적이고 현실감있는 모습으로 접하게 해준다. 그의 사람됨과 기질의 고
유함이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장르인 척독은 취향이라는 인간적 기호로
이덕무라는 사람을 보다 친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4. 이덕무 척독의 의의
: ‘내면의 발견’과 ‘사적 자아’의 문학적 표현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덕무는 젊은 시절의 척독에서부터 ‘참신하고
기이한 표현’, 즉 소품적 문체에 대한 매혹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李德懋척독 연구 25


문체에 대한 일말의 유보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었다. 개인적인 자기 표현
으로서의 개성이 첨신하게 드러나는 소품체 문체에 대한 이덕무의 이러한
매혹과 갈등은 곧 개인으로서의 자기 인식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그리
하여 이덕무의 척독에 나타난 개인의 표지를 ‘자기 고백의 낭만성’, ‘세계
인식의 주관성’, ‘기호와 취향의 고유성’으로 각각 나누어 살펴보았다.
이덕무의 척독에서 보여준 이러한 특징들은 지금까지의 공식적인 한문
학 장르에서 내놓고 표현하지 않았던 개인의 사적인 감정과 인식, 그리고
일상 속에서의 소소한 경험들이 문학의 범주 안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보
여준다.34) 또한 나아가 그러한 사적이고 일상적인 것의 문학적 형상화가
얼마나 뛰어난 문예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지 까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
은 그의 척독이 드러내고 있는 개인의 ‘내면’이라는 공간의 발견과, ‘사적
자아’의 문학적 발현에 힘입고 있다.
여기서 ‘내면’이라는 말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속마음만을 가리키는 것
은 아닐 것이다. 한 인간이 그의 내부에서 순일하지 못한 자기를 발견할
때, 그리하여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는 갈등을 느끼거나 상충되는 욕망을
드러내게 될 때의 ‘모순된 실존의 겹과 결’을 소위 ‘개인의 내면’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후기 글쓰기의 변모가 이덕무
에게 초래한 갈등은 그의 ‘문학론’과 ‘문학 행위’ 사이의 괴리였다.


34) 안대회는 청장관전서 에 누락되었던 그의 소품문 ‘적언찬’을 소개하면서 이덕무
소품문의 미학이 주변적이고 소소한 관심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우
주나 세계, 심성과 정치, 윤리와 도덕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고 서술하는 儒經과는
다르게 이들은 작게는 鶴이나 메추라기, 劍, 귤, 물고기, 뱀과 같은 미미한 사물에서
부터 사대부의 취미생활과 풍속에 관심을 기울였다. 유가를 신봉하는 사대부의 담론
에 끼이기 어렵거나 끼인다 하더라도 문장으로 서술하기를 꺼려한 내용까지 저술의
영역에 포함시켰다. 주변적인 관심사가 드디어 문학언어의 힘을 빌려 大雅之堂에
오른 것이다. 零零하기 짝이 없지만 세계의 세부가 얼마나 다채롭게 구성되었
는가를 보여주는 저술이 아닐 수 없다.’ 안대회(2004), 「이덕무 소품문의 미학」, 한
국고전문학회 24집, ??~??면.
26 韓國漢文學硏究33輯


그의 척독이 보여주고 있는 ‘문학론-입장’과 ‘문학 행위-실천’ 사이의
이러한 균열은 곧 구체적인 상황 속에 존재하는 ‘개인’과 ‘내면’의 문제를
보다 잘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척독은 자신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
내고, 그로 인해 갈등을 일으키는 ‘개인의 내면’이라는 공간이 생겨나는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척독이 보여주고 있는 그 ‘개인의 내면’이라
는 공간은 결국 이덕무라는 작가의 살아있는 인간적 면모를 담아낼 수 있
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심리적 두께를 확보하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척독을 통해 선비로서, 먼저 학문의 길을 걸은 선배 학자
로서, 연장자로서의 공적인 자아를 걷어내고, 인간적인 취약함을 느끼고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개별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움, 애통
함, 개인적 감정의 술회들이 직정적이고 감각적인 표현들로 나타나 있는
편지를 통해 자신이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는 주체라는 것을 숨김없이 드
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
이는 서정적 자아의 등장이나 어느 누구와도 다른 개성적인 ‘기호’와 ‘취
향’으로 존재하는 인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역시 이덕무의 척독이 가지
고 있는 ‘개인’의 표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척독이 보여주는 바, 격정적
인 감정을 느끼고 고뇌하는 내면세계를 가진 이러한 자아는 이덕무라는
문인, 학자의 또 다른 자아, 내밀한 고민을 가진 ‘사적 자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척독이라는 장르는 이덕무를 비롯한 연암 그룹의 문인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문학양식’으로 애호되었다.35) 그 중에서도 이덕무는
그 자신의 감성과 인간적 면모라는 자기정체성을 척독이라는 장르를 통해
인상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척독은 ‘내면’, 혹은 ‘사적 자아’라고 부를 수
있을 자기 인식을 통해 어느 작가보다도 ‘개인적 고백’의 측면을 강렬하게


35) 정민, 앞 논문, 83면.
李德懋척독 연구 27


드러내고 있으며, 그로써 척독 갈래 자체의 장르적 성격을 첨예하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덕무의 척독은 새로운 문체에 대한 감각적인 접근을
보여주었던 그 일군의 작가들 중에서도 ‘고백’이란 무엇인지, 고백해야 할
개인의 ‘내면’이란 어떤 것인지를 뛰어난 문학적 성취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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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德懋척독 연구 29
Abstract
A Study about ‘Chuck-Dok(尺牘, Short Letters)’
of Yi, Duk-Moo
-Discovering Internal Self-Identity and Private Ego-
36)Hong, In-Sook*
Letters are basically private communication ways among general
persons, however the ‘Chuck-Dok(尺牘)’, ‘Short Letters’ are regarded as
literary art in the late Chosun Period. This essay aims at searching for
specifics and originalities of Yi, Duk-Moo(李德懋, 1741-1793)’s letters.
Yi’s letters are rich in human warmth, and they have shown
distinctive feature of individual signs much more than any other letters
written in the late Chosun Period. Considering Yi’s letters in detail,
there are three characteristics of individual aspects. Most of all, Yi’s
letters have shown romantic confession of his own emotion and
experience. He wrote about some delicate feelings at a moment, missing
his friends, and recognizing his own identity in his letters. Secondly, he
* The Department of Korean Language and Literature, Ewha Womens University / Docter
Course / okiff@freechal.com
30 韓國漢文學硏究33輯
took a subjective view of observing things around him and he
described those things refined style in his letters. Thirdly, he expressed
himself through his unique tastes, habits, and inclination. He was a
dignified and serious scholar, but his letters shows us his another
sensitive tendency, that is ‘internal self identity’, and ‘private ego’.
Yi Duk-moo was belonged to ‘Baek-Tap Si Pa(Poetry Group of
White Tower白塔詩派)’, and they owned literary intention jointly. But
among their works, Yi’s letters was most self expressive and
confessive.
In the late Chosun Period, Jung-Jo(正祖, 1752-1800, the 22th king in
Chosun Dynasty) practiced the ‘Policy of the literary style(文體反正)’,
so prohibited ‘novel style(小說體)’, and ‘literary sketch style(小品體)’.
Yi Duk-moo was a faithful follower of that policy, and he criticized
harmful influence of the ‘novel style(小說體)’. But on the contrary,
writing in his own literary works, he prefered to ‘literary sketch style
(小品體)’, especially in his letters. As a consequence, it follows that his
letter shows a complicated and inconsistent ‘internal self-identity’.
Key words : Yi, Duk-Moo, Chuck-Dok(Short Letters), Internal Self-
Identity, Private E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