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3. 17:43ㆍ책과논문
근세 일본의 서간(書簡)에 대하여
김 시 덕*
1. 들어가며
2. 근세 일본 서간의 역사와 양식
3. 근세 일본의 서간 문례집에 대해
1) 전근대 일본의 서간 문례집 개관 -
화한병립(和漢並立)의 서간 문화
2) 근세 일본의 서간 문례집 - 소식
왕래 의 사례
4. 근세 일본 서간 연구의 필요성
1) 아라이 하쿠세키의 경우
2) 가이바라 엣켄, 다케다 사다나오의
경우
5. 나가며
국 문 초 록
이 논문에서는 근세 일본의 서간 전반을 검토하였다. 우선 고대에서 근세
에 이르는 서간 양식의 변천을 소개한 뒤, 헤이안 시대 이래로 정훈왕래
고조조로에 소식왕래 등의 일본한문 및 가나・한자 혼용문 서간집이 성
립하는 한편 구소수간 척독쌍어 등의 중국 서간집이 도래함으로써, 근
세 일본에서 일본과 중국의 서간집이 동시에 읽히고 두 언어로 된 서간을
하나의 본문에 수록하는 서한초학초 와 같은 서간문례집이 성립하는 등
화한병립의 서간 문화가 성립하였음을 밝힌다.
다음으로, 근세 일본의 서간 문례집이 변화하는 양상을 구체적으로 검토
하기 위해 소식왕래 라는 서간집의 사례를 들었으며, 마지막으로 17∼18
* 고려대 일본연구센터 HK연구교수, hermod_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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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사이에 활동한 아라이 하쿠세키, 가이바라 엣켄, 다케다 사다나오 등
의 학자들이 집필하거나 접수한 서간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일본 역사・
문화 뿐 아니라 한국사・한일관계 연구를 위해서도 근세 일본 서간을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조선과의 외교에 임한 학자들의 공식적인 기록
에서 보이는 대(對) 조선관과, 그들이 일본 내부의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간
에서 보이는 입장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
는 이 시기의 한일 관계사를 이해하는데 시사점을 제공하며, 이러한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한문 이외에 일본식 한문과 가나・한자 혼용문으로 작성
된 근세 일본 문헌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주제어
서간, 서한초학초, 소식왕래, 아라이 하쿠세키, 가이바라 엣켄
근세 일본의 서간(書簡)에 대하여(김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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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이 논문에서는 근세 일본의 서간 문화 전반을 검토한다. 이를 위해 우선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는 서간 양식의 변천을 소개한다. 그런 뒤에,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이래로 정훈왕래(庭訓往来) 고조조로에(古状揃) 소식
왕래(消息往来) 등의 일본한문 및 가나・한자 혼용문 서간집이 성립하는
한편 구소수간(欧蘇手簡) 을 비롯한 중국 서간집이 도래함으로써, 근세
일본에서 일본과 중국의 서간집이 동시에 읽히고 두 언어로 된 서간을 하나
의 본문에 수록하는 서한초학초(書翰初学抄) 와 같은 서간문례집이 성립
하는 등 화한병립(和漢並立)의 서간문화가 성립하였음을 밝힌다. 마지막으
로, 17∼18세기 사이에 활동한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가이바라 엣켄
(貝原益軒) 등의 학자들과 관련된 서간을 예로 들어, 일본 역사・문화 뿐 아
니라 한국사・한일관계 연구를 위해서도 근세 일본 서간을 연구할 필요가 있
음을 지적한다.
2. 근세 일본 서간의 역사와 양식
근세 일본 서간의 원형은 나라시대(710∼794)에 비롯되었으며, 이것이
중세를 거쳐 근세에는 정형을 갖추게 되었다. 근세 서간의 전사(前史)를 사
토 신이치(佐藤進一)의 개설 고문서학 에 의거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
다. 나라시대에 사인(私人)이 발송한 서간은 장(状)・계(啓) 등으로 불렸으
며 6가지 형식이 존재하였는데, 헤이안 시대(794∼1185)에는 차츰 ( f )양
식이 주류가 되어 후세의 서장 양식을 결정지었다.
(a) 何某(발신인)謹啓・・・・・・・・・
・・・・・・・・・・・・・・・・・・・・・・・・・・・・・
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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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謹啓・・・・・・・・・事・・・・・・・・・
・・・・・・・・・・・・・・・・・・・・・・・・・・・・・
月 日 何某(발신인)
(c) 何某(발신인) 何某(수신인)
・・・・・・・・・・・・・・・・・・・・・・・・・・・・・
月 日
(d) 謹啓 何某(수신인)
・・・・・・・・・・・・・・・・・・・・・・・・・・・・・
月 日 何某(발신인)
(e) 何某(발신인)
・・・・・・・・・・・・・・・・・・・・・・・・・・・・・
月 日 何某(발신인)
(f) ・・・・・・・・・・・・・・・・・・・・・・・・・・・・・
月 日 何某(발신인)
何某(수신인)1)
이리하여 고대에 확립된 서간 형식은 그 후로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근
세까지 이어진다. 다음으로, 근세 서간의 양식과 언어 사용에 대하여는 개
설 고문서학 - 근세편 에 요령있게 설명되어 있으므로 인용한다.
서장(書状) 데가미(手紙)・서간(書簡)・서찰(書札)・척소(尺素) 등
으로도 부르며, 승려와 같은 사람이 쓴 한문체 서장은 척독(尺牘), 가
나(仮名)로 쓰거나 가나와 한자를 섞어서 여자가 쓴 서장은 쇼소쿠
(消息)라고 불리며, 모두 사문서(私文書)이다. 서장의 형식은 이미
앞 시대에 정비되었는데, 에도 시대에 식자율 상승에 따라 서장의 왕
1) 佐藤進一, 新版 古文書学入門 , 法政大学出版局, 2003, 101-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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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가 늘어나면서 서식이 고정・예식화하였고, 서찰례(書札禮)에 관한
서적도 이 시대에 다수 출판되었다. 특히 서찰 조법기(書札調法記)
신찬 용문장 명감(新撰用文章明鑑) 등을 비롯해 「중보기(重宝記
:조호키)」「왕래물(往来物:오라이모노)」와 같은 실용서 가운데에도
서찰 문례나 예식 등을 기록한 것이 많다. 후기에는 편지용지[料紙]
에 권지(卷紙)나 포장지[包紙] 대신 봉투[状袋] 사용이 증가하였다.
서장의 문장이나 서체도 신분사회의 고정화에 따라 엄격히 예식으
로서 중시되었다. 윗사람에게 안부를 묻는 경우에는 「御機嫌能・御安
体・御安全・御堅達・御勇健・御剛健」, 동급에게는 「御堅固御座候や・
御息災之由」, 아랫사람에게는 「御息災・御無為・無異義・異変無之・
相替事無之・不相替」가 된다. 물건을 보낼 경우, 윗사람에 대해서는
「献上・献進・奉進」, 동급에게는 「致進上候・進覧・送進・進上之」, 아
랫사람에게는 「送申候・差越候・差遣候」라는 용어를 쓴다. (중략)
문장뿐 아니라, 서체도 아랫사람에 대한 것일수록 글자를 흘려쓰
고 약자도 많아진다. 또한, 상대가 아랫사람이라도 정중하면 좋은 것
이 아니라, 아랫사람에게는 아랫사람에 대한 용어로 접하는 것이 신
분격식에 맞는 예의였다. 용건을 전하는 서장은 첫머리[書出]부터 시
작하는데 서찰 조호키 는 상대에 따른 첫머리의 차이를 10단계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예시한다. 극극상상(極々上々)의 상대 「一筆奉
啓上候」, 상상(上々) 「一筆啓上仕候」, 상(上) 「一筆啓上仕候」(상상
에 대한 것보다 글자를 흘려쓴다), 동급 「一筆致啓上候」, 중하(中の
下) 「一筆致啓達候」, 하상(下の上) 「一筆令啓達候」, 하중(下の中)
「一筆令啓候」, 하(下) 「一書申入候」, 하하(下々) 「一書申達候」, 부
하(家来) 「一筆申候う」가 된다. (중략)
결어에도 「恐惶謹言・敬具・草々・不具敬白・不一・穴賢・不備・不
具・頓首・あなかしく・かしく・かしこ・可祝(かしく)」 등 다양한 용
어가 상대와의 신분관계에 따라 사용된다.
일단 다 쓴 뒤에 미처 적지 못한 것을 더한 부분을 「追而書・追書・
尚々書」 등으로 부른다. 서장의 용지가 라이시[礼紙]2)를 포함해서
2) 서장 본문을 적은 종이에 덧 댄 빈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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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장이 될 경우에는 라이시에 적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는 소데가키[袖書]3)의 여백에 「尚々・猶々・返々・追て申」 등의 서두
를 적고, 본문보다 한 글자 분량만큼 내리고 글자도 작게 쓴다. 본문
의 행간을 침범하는 경우도 있다.4)
이처럼 근세 일본의 서간은 조선시대의 서간과는 서로 다른, 그러나 그
나름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작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규칙에
따라 작성된 서간의 실례를, 식민지 시기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한반도에 유
입된 뒤 현재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근세 일본 고문헌에서 인용한다.
1682년(숙종 8, 덴나[天和] 2)에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의 응대를
둘러싼 일본측의 상황을 전하는 미토공 조선인 증답(水戶公朝鮮人贈
答) 5)이라는 문헌이다. 당시 통신사 일행이 미토번(水戸藩)의 번주 도쿠가
와 미쓰쿠니(徳川光圀, 1628∼1701)에게 보낸 선물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
란을 기록한 것이다. 이 문헌은 현재 일본에서는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는
다.6) 이 문헌의 말미에는 에도를 떠나는 통신사 일행을 수행하는 쓰시마(対
馬) 제3대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真)에게 미토 미쓰쿠니가 보낸 서간이 실
려 있다.
한 말씀 적어 올립니다. 이번 조선인 내조에 임하여 소 요시자네
님께서 에도에 계시면서 진력하신 바, 모든 일이 잘 끝나고 돌아가시
게 되니 틀림없이 만족하고 계시겠지요. 전에 에도 성에서 갑자기 지
병이 재발하셨지만 즉시 쾌차하셨으니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먼 길을
3) 서간의 오른쪽 끝에 자구(字句)를 덧적은 것.
4) 日本歴史学会편, 概説古文書学-近世編 , 吉川弘文館, 1989, 323-325쪽.
5) 형태사항:32張, 24.2×16.9cm, 주기사항:壬戌(1682)八月二十一日-九月十二
日, 印記:烏江, 청구기호 BC-古朝51-나227.
6) 근세 미토번의 학문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인 秋山高志 水戸の文人―近世日本
の学府 , ぺりかん社, 2009에서도 “조선 통신사에 관한 미토번의 기록은 현재 발
견되지 않는다”(270쪽)고 하고 있으며, 李元植, 朝鮮通信使の研究 , 思文閣,
1997, 652쪽에는 서명과 쪽수, 소장처만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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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셔야 하니 보양하심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절을 통해 인사드리
는 김에 견직물 20필과 안주 한 가지를 보내드리오니 변변찮지만 진
람하소서. 이만 줄입니다. 1682년 9월 12일 미토 재상. 소 쓰시마 님
의 댁내 분들께
一 筆可啓連候。此度朝鮮人来朝ニ付、御在
府中は色々御心尽ニて候処、諸事首尾能
御暇被遣、御満足之段令察候。先以先頭は於
御城、俄ニ御持病指発候得共、早速快勝之事
珍重存候。遠路旅行御保養専一ニ候。飛脚之
印迄ニ在所へ絹弐拾疋肴一種惇少候得共、
令進覧候。恐々謹言。
九月十二日 水戸宰相
宗対馬殿
人々御中7)
이 서간에 보이는 “一筆可啓連候”, “恐々謹言” 등의 표현, 일자와 송수
신인명의 위치 등은 앞서 개설 고문서학 - 근세편 의 설명에서 확인한 작
성 규칙에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서간 말미에 “宗対馬殿/人々御
中”이라고 한 것은, 이 서간을 보내는 쪽에서 그 독자를 쓰시마번의 관련자
들 일반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뜻한다. 여기에 보이는 “御中”이라는 표현은
현재도 특정인을 지정하지 않고 기관 등에 막연하게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
쓰이며, 현대 한국어 편지 작성 예법의 “귀중”이라는 표현과 상통한다.
7)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구두점은 필자가 임의로 붙임. 이하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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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세 일본의 서간 문례집에 대해
1) 전근대 일본의 서간 문례집 개관 – 화한병립(和漢並立)의
서간 문화
헤이안 시대부터 학습용으로 엮은 서간(문례)집이 나타나는데 이들을 왕
래물(往来物:오라이모노)이라 한다. 헤이안 시대의 학자인 후지와라노 아
키히라(藤原明衡, 989?∼1066)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아키히라 왕래(明
衡往来:아키히라 오라이) 8),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무로마치시대(室
町時代)에 성립한 정훈왕래(庭訓往来:데이킨오라이) , 후술할 소식왕
래(消息往来:쇼소쿠오라이) 등이 대표적이다9). 특히 정훈왕래 는 조선
시대에 사역원의 왜학 교과서로도 이용되었다10). 또한 무사 정권이 장기간
지속된 일본 역사의 특성을 반영하여, 유명한 장군들이 작성했다고 전해지
는 서간을 모은 고조조로에(古状揃) 라는 서간문도 인기를 끌었다. 이들
서간(문례)집에 실린 문장은 주로 일본식 한문이나 가나/한자 혼용문이다.
한편, 구소수간(欧蘇手簡) 척독쌍어(尺牘双魚) 와 같은 고전 중국어
서간집이 도래하자, 일본판[和刻本:와코쿠본]이 간행되는 등 중국 고전의
수용이라는 차원에서 향유가 이루어졌다. 일본식 한문 및 가나/한자 혼용문
으로 작성된 서간(문례)집과 중국의 한문 서간집이 공존하게 되면서, 동일
한 내용의 서간을 일본식 한문 또는 가나/한자 혼용문과 한문으로 병립시킨
서한초학초(書翰初学抄) 와 같은 서간(문례)집도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
8) 운주 왕래(雲州往来:운슈오라이) 운주 소식(雲州消息:운슈 쇼소쿠) 등으로
도 불린다.
9) 日本古典文学大辞典 「往来物」(岩波書店, 1983).
10) “상정소(詳定所)에서 여러 학(學)의 취재(取才)에 있어 경서(經書)와 여러 기예
(技藝)의 수목(數目)에 대하여 아뢰기를 (중략) 왜학(倭學)은 소식서격(消息書
格) · 이로파본초(伊路波本草) · 동자교 노걸대(童子敎老乞大) · 의론통신(議論
通信) · 정훈왕래(庭訓往來) · 구양물어(鳩養物語) · 잡어서자(雜語書字) ”. 조
선왕조실록 세종 12년 경술(1430) 3월 18일(무오). 한국고전종합DB에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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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서간문을 익히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초급용으로는 서한초학초 나 서
찰조법기 , 고급용으로는 명가수간(名家手簡) 폐추첩(敝帚帖) 등이 존
재했다.
이들 서간집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근세 일본에서는 서간(문례)집이 주
로 간행본의 형태로 향유되었다. 이는 출판문화가 꽃핀 에도시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고도의 지적 소양을 갖춘 독자 뿐 아니라 데라
코야(寺子屋:일본식 서당)에서 쓸 교과서, 조닌(町人:상인 계급)을 위한
상업 거래 서간 문례집, 여성을 위한 교과서, 심지어는 연애편지 문례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자를 상정한 서간문례집이 출판되어 서간 문화의 대
중화가 이루어졌다. 근세 시기 일본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서간 문화
는, 조선시대와 근대 초기의 한반도에서 향유된 한문 서간 문례집 척독요
람(尺牘要覽) (성립시기 미상), 척독완편(尺牘完編) (1905), 척독대방
(尺牘大方) (1920∼30년대)이나 한국어 서간 문례집인 언간독(諺簡牘)
(조선후기), 증보 언간독 (조선후기) 등과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척독요
람 의 사례에서 보듯이 한반도에서는 주로 한문 서간의 문례집이 사본으로
유행한 데 반해, 일본에서는 한문과 일본어 서간 문례집이 주로 판본으로
향유되었음은 중요한 차이점이라 하겠다. 또한, 언간독 증보 언간독 등
의 한국어 서간문례집이 방각본의 형태로 향유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문헌
은 한일 서간의 비교 연구라는 관점에서 그 가치가 재평가될 여지가 있다.
2) 근세 일본의 서간 문례집 - 소식왕래 의 사례
여기서는 근세 일본의 서간문례집이 여러 집단의 수요에 맞추기 위해 다
양한 형태로 출판된 상황을 확인한다. 사례로 들 것은 에도시대에 널리 읽
힌 서간 문례집이자 서간문 용어 사전 소식왕래(消息往来) 이다. 전형적
인 형태의 소식왕래 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무릇 소식(消息)이란 가까운 곳 먼 곳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든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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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을 전하는 것이니 인간 만사의 근본이다. 서장(書状)・편지(手紙)의
첫머리에 쓰는 글은 “取扱文字” “一筆啓上仕” “致啓達” “令啓” “以
手紙申上”. (상대방의 편지를 가리켜서) “尊書” “尊翰” “貴書” “貴
札” “御状” “芳墨” “芳簡” “御紙面” “御剪紙” (상대방의 편지를 보
았다는 뜻을 표할 때에는) “拝見” “拝誦” “披見” “披閲” “各一覧”.
날씨를 언급할 때에는 사계절에 따라 하니, 봄에는 “余寒” “春寒”
“未余寒退兼”. 그보다 시간이 지났을 경우에는 “春暖” “暖気” “長
閑” “麗” “暮能”. 여름에는 (하략)
凡消息者(は)通二音信一、近所・遠国不レ限二何事一、人間万
用達之基也。先書状・手紙取扱文字、一筆啓上仕、致二啓達一、
令レ啓、以二手紙一申上、尊書、尊翰、貴書、貴札、御状、芳
墨、芳簡、御紙面、御剪紙、拝見、拝誦、披見、披閲、各一覧。
時候者(は)任二四季一、春者(は)余寒、春寒、未二余寒退兼一。
追レ日、春暖、暖気、長閑(のどか)、麗(うららか)、暮能(くらし
よく)。夏者(は)11)...(1a-2a)
뒤이어, 본문의 글자 옆에 해서(楷書)를 붙이거나 본문의 용어를 해설하
는 부분을 추가하여 독자들의 편의를 꾀하는 판본이 나타난다. 회보 소식
왕래(懐寳消息往来) (와세다대학 文庫30 g0098)는 해서를 본문 옆에 붙
이고 어구 해설을 본문 뒤에 추가한 형식, 소식왕래(消息往来) (와세다대
학 文庫30 g0109)는 어구 해설이 본문 상단에 있는 형식이다. 또한, 소식
왕래 화초(消息往来画抄) (와세다대학 文庫30 g0079)와 같이 본문에 나
오는 각종 사항을 그림으로 그려 넣은 형식도 있다.
한편, 데라코야의 교과서 수요를 노리고 다른 왕래물과 합철한 형태도 다
수 등장했다. 동자 고조조로에(童子古状揃) (와세다대학 文庫30 e0445)
는 또 하나의 전형적인 서간 문례집인 고조조로에(古状揃) 와 합철한 것
이고, 합서왕래(合書往来) (와세다대학 文庫30 g0111)는 소식왕래 소
11) 와세다대학 文庫30 e0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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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왕래 강석(消息往来講釈) 을 비롯해서 장사 왕래(商売往来) 명물왕
래(名物往来) 대일본 구니즈쿠시(大日本国尽) 편방관 즈쿠시(篇傍冠
尽) 성씨 즈쿠시(苗字尽) 어부내정명 즈쿠시(御府内町名尽) 등 각종
교과서류를 합철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형태의 소식왕래 가 본문의 내용을 바꾸지 않으면
서 독자의 흥미를 끌어내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궁리한 사례들을 살폈다.
이와는 달리 본문을 수정하는 형태도 존재했다. 여성 독자를 겨냥하여 여성
용 서간을 다수 수록한 여소식왕래(女消息往来) (와세다대학 文庫30
g0076), 그리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 변화된 세태를 반영하여 본문을 수정
한 개화 소식왕래(開化消息往来) (와세다대학 文庫30 g0086) 개명 소
식왕래(開明消息往来) (와세다대학 文庫30 g0103)과 같은 근대판 소식
왕래 등이 있다.
4. 근세 일본 서간 연구의 필요성
여기까지 근세 일본의 서간을 개괄하고 소식왕래 의 사례를 들어 구체
적 양상을 검토하였다. 그렇다면, 한국학 연구자들이 근세 일본의 서간문을
연구할 필요성은 무엇인가? 한 가지는 근세 일본의 학문 동향을 파악하기
위함이고 또 한 가지는 조선 조정이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에 대한 문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한일 관계사 연구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17∼
18세기의 전환기에 활동한 여러 학자들의 서간을 검토함으로써 이러한 주
장을 실증하고자 한다.
1) 아라이 하쿠세키의 경우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는 쓰시마의 외교관이었던 아
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와 함께 17세기 일본의 저명한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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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 1621∼99)의 가르침을 받았다. 1711년에 방
일한 통신사와의 대담을 기록한 강관필담(江関筆談) 및 국서복호기사
(国書復号紀事) 쇼토쿠 조선빙사록 부언(正徳朝鮮聘使録附言) 등은 이
분야의 저명한 1차 문헌이다. 하쿠세키의 저술은 당대는 물론 사후에도 지
속적으로 간행되었으며, 「하쿠세키 총서(白石叢書)」라는 이름의 대형 사본
군을 이루어 후대의 지식인들에게 필사・향유되었다. 또한 그는 당대의 여러
학자들과 활발히 서간을 왕래하였는데, 이들 왕복 서간집은 신안수간(新
安手簡) 12) 신실수간(新室手簡) 13) 신복수간(新復手簡) 14) 등의 이름
으로 간행되거나 필사본으로 폭넓게 유통되었다. 하쿠세키와 여러 학자들
간의 서간집은 당시 이들이 역사서・사상서・문학서를 집필할 때 무엇을 생
각하고 어떤 정보를 입수하였으며 어떻게 인적 관계를 형성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이들 학자들은 대부분 조선의 통신사와 교섭하고 관련 문헌
을 남기고 있는데, 이러한 공적인 문헌들의 성립을 둘러싼 내밀한 정보가
왕복 서간집에는 생생하게 담겨 있다.
한국학 연구자들은 통신사들이 기록한 사행록(使行錄)과 일본인들이 기
록한 창화집(唱和集)에 주로 의존하여 통신사와 일본 학자들간의 학적 교
류에 대해 논해 왔다. 이들 사행록・창화집은 주로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서, 고전 일본어 및 일본 초서[くずし字]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학자들이
이용하기 편리하다는 점 역시 이러한 학적 경향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세 일본의 학자들은 문어 중국어와 일본식 한문, 가나・한자 혼용
문을 병행하여 서간을 작성했다. 따라서 한문으로 작성된 공적인 문헌과 함
께, 일본식 한문 및 가나・한자 혼용문으로 기록된 근세 일본의 서간문을 활
용함으로써 통신사 및 조일간의 문화교류에 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다.
12) 미토번의 저명한 학자였던 아사카 단파쿠(安積澹泊, 1656∼1738)와의 왕복 서간.
13) 당대의 저명한 사상가였던 무로 규소(室鳩巣, 1658∼1734)와의 왕복 서간.
14)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이자 임진왜란에 대한 중요 문헌 가운데 하나인 다이
코기(太閤記) 를 쓴 유학자 오제 호안(小瀬甫庵)의 후손인 오제 후쿠안(小瀬復庵)
과의 왕복 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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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1711년의 통신사에 대해 하쿠세키는 정덕 조선빙사록(正徳
朝鮮聘使録) 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문헌의 말미에는 정덕 조선빙사록
부언(正徳朝鮮聘使録附言) 이라는 부분이 덧붙여져 있으며 이 두 개의 기
록은 「하쿠세키 총서」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 부언 의 마지막 부분에는
일본 측이 통신사 일행에게 준 선물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일본 각지의 절경
과 일본 덴노(天皇)・학자・명장・열녀 등 일본의 고사를 그린 병풍 20폭을
주었으니, 이는 당시 일본 문화가 번성함을 이국인들에게 자랑하는 쾌거라
는 것이다.
또한 조선 왕에게 보내는 폐물로도 그 당시 여러 지역의 솜씨좋은
장인들이 만든 갖가지 칼과 금 병풍을 주셨다. 그 전까지는 전구년 전
쟁(前九年の戦い, 1051∼62), 후삼년 전쟁(後三年の戦い, 1083∼
87), 야시마 전투(屋島の戦い, 1185), 이치노타니 전투(一ノ谷の戦
い, 1184) 등의 전쟁 그림을 그릴 것을 명하셨는데, 이번에는 병풍
20폭에 일본 각지의 명승지, 기온에(祇園会) 축제, 화조풍월, 그리고
9폭에 15개는 성스러운 덴노의 상서로운 덕徳瑞이나 문사(文士), 명
장(名将), 현녀(賢媛), 열부(烈婦) 등 모두 일본의 고사를 제재로 하
여 후카미 겐타이(深見玄岱)에게 명하시고 각기 그 그림에 찬문을 쓰
게 하셨다. 실로 태평 시대의 흥성한 문화를 이처럼 외국에 전한 것은
이제까지의 외교 관계에서 고금에 비할 바가 없었다. 후세 학자들로
하여금 감격케 함이 가장 컸다.
又朝鮮王への幣物を賜ふ所も、当時諸国の良工名匠の作る所の
大刀長刀鎈、其外金屏を賜ふ。先例として前九年後三年、或は八
島一の谷等、戦争の図画を命せられけるに、此時は置屏風二十双
の内、日本の諸名過山水之通、祇園会花鳥等の外、九双に十五図
は聖天子の徳瑞、或は文士名将賢媛烈婦なと皆日本の故事にして
深見玄岱に命せられて、各其上に伝賛を題せしむ。誠に昭代文化
の盛る事聘事におゐては古今に比類なし。後世学者をして感激せ
大東漢文學 (第三十七輯)
78
しむる事是に極れり。15)
위의 문장을 보면, 외교적 의례를 무시하고 일본의 입장을 강요한 병풍
건에 대해 하쿠세키가 일방적으로 찬미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런데
신실수간 에 실려있는 하쿠세키가 무로 규소에게 보낸 서간 가운데 이 건
을 언급하는 듯한 내용이 보이는데, 이에 따르면 하쿠세키가 정덕 조선빙
사록 부언 에서 위와 같은 반응을 보인데에는 조선측에 대한 불만과 쓰시마
에 대한 경멸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 보낸 병풍 그림 건. 지금 다시 이 일을 살펴보더라도, 당시
마음쓰심이 심원하셨음을 알게 되어 눈물이 흐릅니다. 이 그림들은
하나 하나가 모두 생각하시는 바가 있으셔서 좋아하신 것입니다. 우
리나라에 대해 조선 사람들은 단지 거친 오랑캐라고만 생각합니다.
또 쓰시마 등지의 사람들도 무(武)만 뻐길 뿐, 만분의 일도 문화에 대
해 알지 못합니다. 요컨대 일본의 문화에 대해 알 수 있는 문헌이 없
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이 일본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다못해 그림이라도 보여주는 것보다 나을 것은
없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朝鮮えの御屏風之絵の事 (중략) 今更是を見候につけても、当
時御心を用ひられ候事の深遠に候ひし事共存出し、落涙に及び
候。此図共一々に 覚有之候ひし御好みに候き。本朝の事を朝鮮
のものともはたゝ〳〵一向のあらゑびすとのみ存候。又対州なと
の人も武をのみほこり候ひて、万分の一も此方の事ともしれぬ事
に候。畢竟しかるへき記載のものなく候事ゆへの義不及是非候。
せめて絵にてなりとも見せられ候はんにしくへからす候由の事に
候き。16)
15) 쓰쿠바 대학 소장 하쿠세키 총서 권12.
16) 쓰쿠바 대학 소장 하쿠세키 총서 권22.
근세 일본의 서간(書簡)에 대하여(김시덕)
79
하쿠세키는 조선인들이 일본을 “거친 오랑캐(あらゑびす)”라고 무시하
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으며, 조선인들이 이러한 일본관을 갖게 된 데에는
“문” 없이 “무”만 뻐기는 쓰시마 사람들 탓이 크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무
식한 쓰시마 사람들만 접한 조선인들이, 모든 일본인들이 다 칼만 휘두를
줄 알고 문화는 모르는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것이
다. 그래서, 전례처럼 각종 전투 장면 대신에 일본의 찬란한 자연과 문화를
병풍에 그려서 조선측에 알렸으니, 이 병풍 건은 눈물을 흘릴 정도로 기쁜
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정덕 조선빙사록 부언 에서 보이는 조선에 대한
우월감과 강압적인 분위기가 신실수간 에서는 현저히 약화되어 있다. 하
쿠세키는 외교적으로 매파로 알려져 있지만, 서간의 이 대목에서는 조일 관
계에 대한 그의 수세적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이 서간에 한정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학・한일관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문어 중
국어 이외에 일본식 한문과 가나・한자 혼용문으로 작성된 문헌을 함께 보아
야 하며, 특히 일본측 관련자들의 생각을 생생하게 알 수 있는 서간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2) 가이바라 엣켄, 다케다 사다나오의 경우
한편, 한국학・한일관계 연구에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근세 일본 서간군
이, 후쿠오카 번(福岡藩)의 유학자 다케다 사다나오(竹田定直, 1661∼
1745)의 장서로 구성된 규슈대학 다케다 문고에 포함되어 있다. 사다나오
는 후쿠오카 번의 번교(藩校) 슈유칸(修猷館)을 창설한 유학자인 동시에,
17∼18세기의 일본 유학계를 대표하는 가이바라 엣켄(貝原益軒, 1630∼
1714)의 제자로서 엣켄의 저술 작업을 근거리에서 보좌한 사람이다17). 엣
켄은 조선에서 파견된 통신사의 응접과 관련하여 활동한 사람으로, 임진왜
란에 참전한 후쿠오카 번의 번조(藩祖)인 구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나가
17) 다케다 사다나오의 약력에 대해서는 규슈대학 디지털 아카이브의 설명을 참조.
http://record.museum.kyushu-u.ac.jp/search/index.html
大東漢文學 (第三十七輯)
80
마사(長政)의 행적을 기록한 구로다 가보(黒田家譜) 를 편찬하고, 1705
년에 교토에서 간행된 류성룡 징비록(懲毖錄) 의 일본판에 서문을 썼으
며, 조선의 아동용 교과서인 유합(類合) 의 일본어판인 천자유합(千字類
合) 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사다나오 자신도 임진왜란에 대해 비판적인 입
장의 격조선론(撃朝鮮論) 이라는 문헌을 집필하였는데, 이 문헌은 통신사
에 의해 조선에 전해져서 이익의 성호사설 과 한치윤의 해동역사 에 인
용되었다18).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다케다 문고에 소장된 사다나오의 장서
군에는 임진왜란과 통신사에 대한 문헌이 산견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래
소개하는 서간이다(정리 번호 10278, 15.8×93.8cm).
예전에 조선에서 전쟁이 있었을 때 오가와 덴에몬(小河伝右衛門)
이 용천(竜泉)에서 활약한 바에 대해 가와시마 구칸 비망록(川嶋空
還覚書) 을 기록해서 올린 바 있습니다. (이번에) 어가보(御家譜)
를 어떻게 수정하려 하시는지요? 마침 좋은 기회이니 (관련 기술을)
수정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당시의 비망록이 이제는 당신 근처에 없
으리라 생각됩니다. 만약 이번 기회에 어가보 를 수정하시게 되어
그 책을 갖고 계신 것이라면, 구칸에게 명령해서 비망록을 바치도록
하십시오. 빠른 답신을 기다립니다.
先達而朝蘇<ママ>陣之処、小河伝右衛門、竜泉にて働之儀に
付、川嶋空還覚書進申候。如何御改被成御座候哉。此節能き序に
候条、御改被成候へかしと存候。其時分之覚書、もはや其許へは
18) 격조선론 에 대해서는 김시덕, 「조선후기 문집에 보이는 일본문헌 격조선론 에
대하여」, 국문학 연구 23, 국문학회, 2011·6에서 조선시대 문집에 전하는 형태
를 통해 원 일본 문헌의 형태를 예측한 바 있었다. 이 논문이 발표된 뒤, 논문에서
예상했던 형태와 거의 동일한 다케다 사다나오의 글을 방위대학교 이노우에 야스
시(井上泰至) 교수가 도쿄도립도서관에서 발견하였다. 이 발견에 대해서는 김시
덕, 「諜報活動から朝鮮にもたらされた 撃朝鮮論 情報収集径路の謎」, 秀吉の
対外戦争:変容する語りとイメージ--前近代日朝の言説空間 , 笠間書院,
2011에 수록되어 있다.
근세 일본의 서간(書簡)에 대하여(김시덕)
81
御座有間敷様に被存候。若此節御改メ被成候而、御書可有之御座
候者、空還へ申達、覚書取進可申候。早々御報相待候。19)
이 서간은 후쿠오카번의 사무라이인 가토 야자노조(加藤弥左之丞)가 사
다나오에게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20). 엣켄이 어가보(御家譜) 를 편찬하
고 사다나오가 이를 청서(淸書)한다는 소식을 들은 야자노조가, 오가와 덴
에몬(小河伝右衛門)이 임진왜란 때 용천(龍泉)에서 활동한 기록인 가와
시마 구칸 비망록(川嶋空還覚書) 을 예전에 주군 가문에 바친 적이 있으니
이번에 어가보 를 청서할 때 그 내용을 반영해주기를 바라고, 아마도 이
비망록이 주군 가문 쪽에는 없을 터이니 명령해서 다시 바치라 하시라고 부
탁하는 내용이다.
용천은 1593년 1월의 평양성 전투에서 이여송의 명나라 군대에 패한 고
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한양으로 철군하는 도중에 경유한 지역이다.
당시 배천(白川)에 주둔하던 구로다 나가마사 군은 고니시 군의 철군을 지
원하였는데, 이 때 오가와 덴에몬은 평양과 배천의 중간 지점인 용천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21). 에도시대에 각 번에서 번주 가문의 선조들에 대
한 사적을 정리할 때에는, 번주 가문에 전해지는 고문헌은 물론 여러 가신
들의 가문에 전래되는 문헌들까지도 널리 수집하였다. 사쓰마 번(薩摩藩)
을 다스린 시마즈 가문(島津家)의 조상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의
임진왜란 당시 활동을 정리한 정한록(征韓錄) 의 편찬 과정은 대표적인
사례이다22). 이 서간은 후쿠오카 번을 다스린 구로다 가문의 조상들에 대한
19) 川平敏文・大庭卓也・菱岡憲司 편, 福岡藩儒竹田春庵宛書簡集 , 雅俗の会, 2009,
83-84쪽의 번각에 의거하여 해독했음.
20) 이 서간의 배경에 대한 이상의 설명은 川平敏文・大庭卓也・菱岡憲司 편 福岡藩
儒竹田春庵宛書簡集 (雅俗の会, 2009) 83쪽에 의함.
21) 1593년 1월 퇴각 당시의 일본군 동향에 대해서는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편, 민
족전란사4 임진왜란사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7, 151-2쪽을 참조했음.
22) 정한록 의 편찬에 이용된 여러 가신 가문의 고문헌에 대해서는 김시덕, 임진왜
란 관련 일본문헌해제 - 근세편 , 도서출판 문, 2010에서 해제하였다.
大東漢文學 (第三十七輯)
82
기록인 구로다 가보 를 편찬할 때에도 정한록 편찬시와 동일한 과정이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야자노조의 서간에는 가와시마 구칸 비망록 의
구체적인 내용이 적혀있지 않으나, 구로다 가보 를 세밀히 검토하면 야자
노조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는지 어떤지, 만약 받아들여졌다면 그 내용이 어
떤 식으로 편찬에 반영되었는지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서간을 통
해 임진왜란에 관한 일본측의 초기 문헌 한 점의 서명(書名)이 확인되는 점
역시 큰 수확이다.
다케다 문고 소장 문헌 특히 서간군에 대해서는 규슈대학 도서관 및 관련
연구자들에 의해 대강의 사항이 밝혀져 있으나, 아직 상세한 검토는 이루어
지지 않은 상태라고 듣고 있다. 고전 일본어 문법 및 일본 초서, 일본 역사에
대한 이해를 가진 한국측 연구자들이 이 장서를 검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바가 크리라고 필자는 예상한다.
5. 나가며
이 논문에서는 근세 일본의 서간 문화 전반을 검토하고, 한국학 및 한일
관계 연구자들에게 근세 일본의 서간 연구가 필요한 이유를 제시하였다. 전
근대 일본에서는 고대 시기에 정훈왕래 고조조로에 소식왕래 등의 일
본한문 및 가나・한자 혼용문 서간집이 성립하는 한편 구소수간 척독쌍
어 등의 중국 서간집이 도래함으로써, 근세 일본에서 일본과 중국의 서간
집이 동시에 읽히고 두 언어로 된 서간을 하나의 본문에 수록하는 서한초
학초 와 같은 서간문례집이 성립하는 등 화한병립의 서간 문화가 성립하였
다. 한편, 17∼18세기 사이에 활동한 아라이 하쿠세키, 가이바라 엣켄, 다
케다 사다나오 등의 학자들이 집필하거나 접수한 서간을 통하여, 일본 역
사・문화 뿐 아니라 한국사・한일관계 연구를 위해서도 근세 일본 서간을 연
구할 필요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 이 논문은 2012년 10월 30일(화요일)에 투고 완료되어,
2012년 11월 2일(금요일)부터 12월 4일(화요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2년 12월 7일(금요일)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된 논문임.
근세 일본의 서간(書簡)에 대하여(김시덕)
83
필자는 중근세 일본 고문헌을 연구하고 있으나, 용어나 서체, 특수한 사
회적 맥락을 그 특징으로 하는 근세 일본의 서간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논문은, 근세 일본의 서간 연구에 대한 필
요성을 느끼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느낀 점을 한국학 연구자분들께 중간보
고한 것이라 하겠다. 부족하나마 근세 일본의 서간 문화를 개괄하려 한 이
논문을 통해 여러 연구자분들께서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셨다면, 이 논문은
최소한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홈페
이지(http://hermod.egloos.com/1934198)에는 서간을 비롯한 전근대
일본 문헌을 온라인상으로 열람할 수 있는 사이트가 정리되어 공개중이다.
이들 사이트를 통해 이 논문에서 언급한 일본 고문헌을 실제로 검토할 수
있다.
大東漢文學 (第三十七輯)
84
참고문헌
[1차 문헌]
필사자 미상, 水戶公朝鮮人贈答 , 1682년 이후 성립, 국립중앙도서관 BC-古朝
51-나227.
新井白石 저, 正徳朝鮮聘使録附言 ・ 新室手簡 , 白石叢書 , 18세기 중기 이
후 성립, 쓰쿠바 대학 イ320-40.
高井蘭山 저, 女消息往来 , 1805년 간행, 와세다대학 文庫30 g0076.
저자 미상, 消息往来 , 1818년 간행, 와세다대학 文庫30 e0392.
저자 미상, 懐寳消息往来 , 19세기 중기 간행, 와세다대학 文庫30 g0098.
저자 미상, 消息往来 , 19세기 중기 간행, 와세다대학 文庫30 g0109.
저자 미상, 童子古状揃 , 1850년 간행, 와세다대학 文庫30 e0445.
저자 미상, 合書往来 , 1850년대 후반 간행, 와세다대학 文庫30 g0111.
三亭春馬 저, 消息往来画抄 , 1861년 간행, 와세다대학 文庫30 g0079.
渡辺助次郎저, 開化消息往来 , 1877년 간행, 와세다대학 文庫30 g0086.
巻菱潭 저, 開明消息往来 , 1878년 간행, 와세다대학 文庫30 g0103.
[참고문헌]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편, 민족전란사4 임진왜란사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7
日本歴史学会편, 概説古文書学-近世編 , 吉川弘文館, 1989.
李元植, 朝鮮通信使の研究 , 思文閣, 1997.
佐藤進一, 新版 古文書学入門 , 法政大学出版局, 2003.
川平敏文・大庭卓也・菱岡憲司 편, 福岡藩儒竹田春庵宛書簡集 , 雅俗の会, 2009.
秋山高志, 水戸の文人―近世日本の学府 , ぺりかん社, 2009.
김시덕, 임진왜란 관련 일본문헌해제 - 근세편 , 도서출판 문, 2010
김시덕, 「조선후기 문집에 보이는 일본문헌 격조선론 에 대하여」, 국문학 연구
23, 국문학회, 2011·6.
김시덕, 「諜報活動から朝鮮にもたらされた 撃朝鮮論 情報収集径路の謎」, 秀
吉の対外戦争:変容する語りとイメージ--前近代日朝の言説空間 ,
근세 일본의 서간(書簡)에 대하여(김시덕)
85
笠間書院, 2011.
[참고 링크]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와세다대학 고전적 종합 데이터베이스 http://www.wul.waseda.ac.jp/kotenseki
/index.html
규슈대학교 디지털 아카이브 http://record.museum.kyushu-u.ac.jp/search/
index.html
大東漢文學 (第三十七輯)
86
ABSTRACT
영문제목
김시덕
In this paper, I investigated the history and change of epistle in
premodern Japan. The history of epistle in Japan began Nara Period and the
style established in this period continued to Edo Period, basically
unchanged. From Heian Period, letter-writers such as Teikin Ōrai, Kojō
Zoroe and Shōsoku Ōrai written in japanized version of classical chinese
and pure japanese have been formed. At the same time, collections of
letters of China such as Ōso Shukan and Sekitoku Sōgyo were introduced
into Japan in middle age. So, middle age and premodern japanse people
could use both letter-writers written in japanse and chinese and they made
an interesting letter-writer Shokan Shogakushō that contains japanese and
chinese texts of the same contents side by side. Shokan Shogakushō
represents the feature of premodern age Japan: a blending of japanese and
chinese style.
Then, for examining the change of letter-writers in premodern Japan, I
got the case of the group of Shōsoku Ōrai and letters that scholars in
17~18th Japan such as Arai Hakuseki, Kaibara Ekken and Takeda Sadanao
have written or received from their acquaintances. Through the examination,
I intended to emphasize the importance of letters in premodern Japan not
only for the studying japanese history and culture but also korean studies or
Korea-Japan relations in premodern age. The difference of their opinions of
Korea between official documents by them and private letters exchanged
Key Words:letters, Shokan Shogakushō, Shōsoku Ōrai, Arai Hakuseki,
Kaibara Ekken
근세 일본의 서간(書簡)에 대하여(김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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