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7. 11. 09:35ㆍ책과논문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홍인숙*
<차 례>
1. 서론
2. 근대 척독집, 20세기 한문서간 교본의 대중적 유행이라는 현상
3. 근대 척독집의 ‘척독유용론’을 통해 본 당대 ‘한문 교양’의 상황
4. 근대 척독집의 ‘한문 교양’의 대중화의 의미- ‘서간-글쓰기’ 능력에 방점
을 둔 한문의 ‘대중 교양’화
<국문초록>
근대 척독집은 한문 전통이 구습으로 타자화되기 시작한 1900년대 이후 50년대
까지 꾸준히 많이 팔린 한문서간의 학습서이다. 본고는 근대 척독집이 한문 소양
을 신장시켜주는 ‘한문 교양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는 데서 출발했다. 그리하여 구
시대 상층의 배타적인 지적 교양이었던 한문이 근대 이후 대중적 교양으로 부각되
는 과정과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우선 주요 척독집의 저자인 김우균, 노익
형, 지송욱, 고병교 등이 근대의 대표적인 출판업자 계층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척독집이 근대 출판업에서 상당한 이윤을 보장하는 책이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본고에서는 근대 척독집의 주요 저자 서문을 통해 척독의 유용성 논의를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한문 서간을 당대 대중이 꼭 갖춰야 할 교양으로 제시하는
과정에서 부각되는 것이 특히 ‘한문 글쓰기’의 능력이었음을 주목하였다. 이때 ‘쓰
기’라는 한문 문식성을 획득해야 하는 대상으로 지목된 이들에는 한문을 처음 배
우는 초학자, 젊은이 뿐만이 아니라 당대의 전통적 지식인층인 ‘유자, 선비’도 포함
되고 있었음을 밝혔다.
이러한 근대 척독집의 의미는 조선시대 상층 남성들의 배타적인 교양으로서의
한문을 근대의 대중 교양으로 전유하였다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특히 일상적 교
* 선문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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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수단으로 ‘서간’이라는 장르가 긴요하고 필요하다는 기능적 성격은 대중들에게
특히 강한 설득력을 가지게 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더욱이 ‘발췌, 인용, 편집, 생략’
등의 단순하고 쉬운 방법으로 한문의 ‘쓰기’가 가능하게 유도한 점은 근대 척독집
의 대중성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다고 보았다. 이렇게 한문을 근대의 대중교양으
로 정립한 척독집은 근대 조선의 비동시성을 체현하며 근대 한문의 문화적 위상과
변화를 복합적으로 조망하게 해준다.
주제어 근대 척독, 한문 교양, 한문 문식성, 한문 서간, 김우균, 노익형, 지송욱, 고병교,
척독완편
1. 서론
사대부로 표상되는 남성 지식인에 의해 독점되었던 고급한 상층 지식으
로서의 한문, 혹은 한문학의 영역은 근대 이후 일본과 서양의 신문물 앞에
서 구식 전통으로 치부되면서 그 입지를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육당과 춘
원이 1917년부터 靑春의 현상문예 심사에서 ‘純漢文不取’, ‘漢字약간석
근時文體’라는 기준으로 신문관의 문장 지향을 천명하고, 1931년 김태준이
朝鮮漢文學史에서 ‘文言體의 한문을 배와서 한문을 짓는 時代는 完全
히 살아저 버렷’으니 자신의 한문학사는 ‘조선漢文學의 決算報告書’1)라고
단언하는 장면은 근대 시기 구축(驅逐)되어야 할 것으로 지목된 한문과
한문학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근대 척독집은 이렇게 한문 전통이 타기해야 할 옛 것으로 타자화되기
시작한 1900년대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이후 약 40~50년간 지속적으로
1) ‘一. 普通文一行二十三字三十行以內, 純漢文不取, 入選賞金天貳圓地壹圓人
五十錢一. 短篇小說一行二十三字百行內外漢字약간석근時文體入選賞金天
參圓地貳圓人壹圓’, 每號懸賞文藝爭先應募하시오 , 청춘 7호, 1917.5; 金台
俊, 朝鮮漢文學史, 1931. 金性彦校註, 태학사, 1994, 13~14쪽.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93
활발하게 간행되었던 한문서간 교본이다.2) 구습으로 치부되었던 한문 글
쓰기의 전통이 척독집이라는 장르를 통해 근대시기 전체에 걸쳐 많은 독
자들에게 학습되고 소비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러한 면에서 근대
척독집은 ‘한문’이라는 전통적인 서기체계가 근대 전반에 걸쳐 단지 밀려
나고 쇠퇴해갔던 것만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그 존재를 유지하고 변전
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근대 조선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며 불균질한
면모를 고찰하게 해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3)
이 글에서는 근대 척독집의 ‘교본, 교재, 학습서’라는 기본적 장르성이
한문이라는 특정 소양을 신장시켜주는 ‘한문 교양서’로서의 성격을 내포
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교본으로서의 근대 척독집이
‘한문 리터러시’라는 구시대 상층의 고급 지식을 근대 이후 일반 대중들이
갖춰야 할 ‘대중적 교양’으로 부각시키는 과정과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즉 전통적이고 배타적인 지적 권위를 상징하던 중세 교양으로서의 한문
이 대중화와 탈권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근대 교양’4)으로 변화
2) 식민지 시기 민간에서 발행된 출판물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수행한 방효순의 연구
에 따르면 근대 척독집은 161종이 발행되었다고 한다. 방효순, 일제시대 민간 서적
발행 활동의 구조적 특성에 관한 연구 , 이화여대 문헌정보학과 박사논문, 2000, 64쪽;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과 각 대학도서관 사이트, 고서점 등을 주요 검색경로로 하
여 실제 텍스트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된 척독집의 목록은 약 74종이다. 물론 기존
연구 성과를 토대로 종합적인 발굴작업이 이루어진다면 실제 현존하는 척독집 목록
은 이를 훨씬 더 상회할 것으로 보인다.
3) 근대 척독집에 대한 최근 연구로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박은경, 文範과 時文으로
서의 근대 척독 연구 , 성균관대 석사학위논문, 2013; 박해남, 척독 교본을 통해 본
근대적 글쓰기의 성격 재고 , 반교어문연구 36, 반교어문학회, 2014; 김진균, 근대
척독 교본 서문의 척독 인식 , 한민족문화연구 46, 한민족문화학회, 2014; 홍인숙,
근대 척독집 성행의 문화적 의미와 근대 한문학사적 위상 , 한국고전연구 30, 한국
고전연구학회, 2014.
4) ‘근대 교양’에 대한 기존 논의에서 주목할 지점은 ‘교양’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전문적
지식에 대응하는 일반적인 지식’이라는 일차적 의미에 더하여 다분히 정치적이고 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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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는지, 그것의 문화적 의미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이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우선 1905년 출판된 근대 척독집의 효시인 김우
균의 척독완편을 비롯하여 그 이후 1950년대까지 발간된 근대 척독의
대중적 유행이라는 현상을 출판시장에서의 판매와 유통 상황, 저자의 계층
성 등을 통해 짚어본다. 그리고 근대 척독집의 주요 저자들의 척독에 대한
유용성 논의를 통해 한문 서간을 ‘대중이 갖춰야 할 교양’으로 제시하는
과정에서 부각되는 것이 특히 ‘한문 글쓰기’의 능력임을 살펴보고, ‘쓰기’
리터러시를 획득하고자 했던 이들 대중들 속에는 당대의 전통적 지식인인
‘유자, 선비’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밝히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근대
척독집이라는 장르를 통해 이루어진 한문 교양의 대중화의 의미는 ‘중세의
배타적인 상층 교양’이었던 ‘한문’이 ‘서간-글쓰기’ 능력으로 좁혀지면서
‘근대 대중의 교양’으로 전유되었다고 하는 점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올로기적인 개념으로 형성되고 활용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후발주자로서 민족국가
형성의 과정에서(독일의 Bildung), 또는 제국 내의 배타적인 엘리트주의의 형성 과정
에서(일본의 다이쇼 교양주의), 식민지 경성제국대학생의 입신출세의 좌절에 대한 차
별적 보상기제에서(경성제대의 교양주의), ‘차별화와 교화의 이중적 표지’이자,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활용된 ‘입신출세주의로서의 근대 교양주의’에 대한 논의는 다음을 참고
할 수 있다. 이향철, 근대 일본에 있어서의 ‘교양’의 존재 형태에 관한 고찰 , 일본역
사연구 31, 일본사학회, 2001; 신인섭, 교양개념의 변용을 통해 본 일본 근대문학의
전개양상 연구 , 일본어문학 23, 한국일본어문학회, 2004; 윤대석, 경성제대의 교양
주의와 일본어 , 대동문화연구 59, 성대 대동문화연구원, 2007; 소영현, 근대 인쇄매
체와 수양론․교양론․입신출세주의 , 상허학보 18, 상허학회, 2006.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95
2. 근대 척독집, 20세기 한문서간 교본의 대중적 유행이
라는 현상
한문서간을 쓸 수 있게 해주는 학습서이자 교본인 근대 척독집이 출판
시장에서 소위 ‘잘 팔리는 상품’임을 알게 해준 첫 책은 김우균(金雨均)의
척독완편(尺牘完編)이다. 이 책의 신문 광고는 대한매일신보에 ‘안두
(案頭)에 필비(必備)할 호서(好書)’5)로 광고되었던 것을 비롯해 皇城新
聞, 新韓國報, 國民報 등의 신문 매체를 통해 1906년부터 1914년
까지 지속적으로 등장했다.6) 김우균의 또 다른 척독서인 문명척독(文明
尺牘)의 서문에 따르면 1917년 당시 척독완편은 1905년의 초판 이후
6차례에 걸쳐 재판되어 7번째의 인쇄를 앞두고 있다고 했으며 이미 3만여
질이 팔려 장안을 뒤덮었다고 한다.7)
5) ‘今此局勢가 維新고 事爲가 繁劇 時代에 際야 吾人도 論交酬世의 道가 日
廣日多홈 尺牘을 不可不讀이라 本尺牘은 已爲刊行于世야 江湖의 好評을 博
得온 바 今에 國漢文으로 新編增補야 新舊尺牘에 牛耳가 되며 且近日新法
令의 緊要 者를 類聚附輯얏오니 一般人士 案頭에 必備 好書이’, 대
한매일신보, 1908.12.1.
6) 각 매체별 척독완편의 광고가 실린 일자는 이러하다. 皇城新聞, 1906. 3.15; 3.21;
8.22~25; 8.27~31; 9.1; 9.3; 9.5~8; 9.10~15; 9.17~22; 9.24~25 / 대한매일신보,
1908.12.1. / 皇城新聞, 1909.11.23~28; 11.30~12.5; 12.7~10; 12.12 / 書冊大發賣, 皇城新聞, 1910.4.5; 4.7; 4.9; 4.12; 4.14; 4.16; 4.19~23; 4.26~5.1; 5.3 / 表柳商店廣
告, 國民報, 1914.1.24.~8.1 / 新書籍發售廣告, 新韓國報, 1909.9.14~28 / 1910.
2.22.; 6.14.
7) ‘幾年의 間에 翻印이 凡六度오 三萬有餘帙에 達야 居然이 域內에 衣被지라
……坊友가 完編의 第七度印布을 苦請故로……’, 金雨均, 文明尺牘叙言, 文明尺牘, 1917; 척독완편의 서문에는 이 책의 편찬 및 간행 당시의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대해 ‘해내제가의 대찬상(海內諸家大讚賞)’을 받았다거나, ‘한 구절,
한 글자를 옥처럼 받들며 베끼는 자가 많아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片言隻字, 奉如拱
璧, 索抄者衆, 殆紙貴洛陽)’거나, ‘젊은이들이 다투어 베껴갔다(年少者無不欲學其
規式, 爭相抄寫)’는 등의 표현을 쓰고 있다.
96 한국고전연구 32집
문인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최남선의 시문독본이 1917년
에서 1923년까지 7판, 이광수의 무정이 식민지기 전체에 걸쳐 8판이 팔
렸음을 상기한다면8), 또한 1920년대 최대 베스트셀러로 10쇄 이상 인쇄
되었던 노자영의 사랑의 불꽃, 사랑의 선물의 판매량이 2만 부였다는
기록과 견주어보면9), 이름조차 낯선 척독완편이라는 책의 판매량이 이
러한 책들과 비견된다는 사실은 매우 새삼스럽게 다가온다.10) 더욱이 근
대 조선에서 대규모 인쇄자본이 등장하고 활판 인쇄가 일반화되며 생산
과 유통이 활발해지는 시기를 1920년대로 추정하는 연구를 참고한다면11)
척독완편의 판매가 1905년부터 1917년까지의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사
실은 놀랍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척독완편의 그러한 판매 호조가 이 책에만 국한
된 현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1910년대 출판 시장에서 근대 척독집은 민
간 출판사들이 펴낸 책들 중 가장 비중 있는 단행본 종류 중 하나였다. 기
존 연구에 따르면 1910년대 매일신보에서 광고 빈도수가 높은 서적
100종 중 11종이 척독서이며, 1920년대의 동아일보에서 4회 이상 광고
8) 김지영, 최남선의 <시문독본> 연구- 근대적 글쓰기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 , ‘한국
현대문학회/국제비교한국학회’ 학술대회 발표문, 2007.
9) 박지영, 1920년대 ‘책 광고’를 통해서 본 베스트셀러의 운명 , 대동문화연구 53집,
성대 대동문화연구소, 2006.
10) 다음의 판본 상황도 척독완편의 유통량을 짐작하게 해주는 주요한 지표이다. 현전하는 척독완편의 판본은 ①尺牘完編(1905년), ②新撰尺牘完編(1908/1912), ③增
補尺牘完編(1912/1913), ④增補字典尺牘完編(1912/1916/1920/1937)으로 최소 4
종 이상이며,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의 ‘한국고전적종합목록’의 제공자료 중 국립도
서관 및 각 대학도서관에 소장중인 척독완편은 44권 이상이다.
11) ‘1920년대 인쇄출판업계에는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의 자본이 등장함으로써 생산과
유통과정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다수의 영세상인들이 몰락한 반면 신구소설과
교과서를 중심으로 나름의 자본을 축적한 회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기훈, 독
서의 근대, 근대의 독서-1920년대의 책읽기 , 역사문제연구 7호, 2001, 17쪽; 천정
환, 1920~30년대 소설 독자의 형성과 분화 과정 , 역사문제연구 7호, 2001, 76쪽.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97
를 게재한 도서의 종별 분포에서 ‘실용’으로 분류된 책의 다수를 차지한
것 역시 척독서임을 알 수 있다.12)
이들 근대 척독집의 주요 저자는 출판업자 계층이었다. 척독완편의 저
자인 김우균(金雨均, 1874~미상)은 1910년 동문서림(同文書林)을 직접
경영했고, 1920~30년대 척독집의 주요 저자인 노익형(盧益亨, 1885~
1941)과 지송욱(池松旭, 1880년대 추정, 미상)은 각각 식민지 시기 최대
출판사였던 박문서관(博文書館)과 신구서림(新舊書林)의 운영자였다. 역
시 20~30년대 주요 척독집 저자로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 고병교(高丙敎,
1900년대 추정, 미상)는 회동서관(匯東書館) 운영자였던 고유상(高裕相,
1889년경~1962)의 장남이었고, 강은형(姜殷馨, 1900년대 추정, 미상)은
영창서관(永昌書館) 운영자였던 강의영(姜義永, 1897년경~1945)의 종질
로 그 자신 대성서림의 주인이었으며, 김동진(金東縉, 1885년 경~미상)은
덕흥서림(德興書林)의 운영자였다.13)
이러한 출판업 관련 인물들의 생애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정확하게
추적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 그래도 비교적 많은 자료가
12) 이경현, 1910년대 新文館의 문학 기획과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 서울대 박사논문,
2013. 이 논문의 2장 ‘1910년대 한국 근대문학 형성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1910~1917년
의 매일신보의 서적 광고를 통해 출판시장의 변화를 살펴보고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1910년대 매일신보 책 광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척독서의 종류만도 매년 30종에서
60종 사이이다.; 1920~1927년의 동아일보 책 광고에 대해서는 이기훈(2001)의 앞
논문 참고. 이 논문의 뒤에는 30페이지에 달하는 연도별 ‘동아일보 게재 서적광고’ 표가
실려 있어 근대 척독의 목록 보완작업에 큰 도움이 된다.
13) 이들 출판업자들에 대한 정보는 다음 논문들이 큰 참고가 되었다. 방효순, 앞 논문;
이종국, 개화기 출판활동의 한 징험-회동서관의 출판문화사적 의의를 중심으로 , 한
국출판학연구 49호, 2005; 최호석, 지송욱과 신구서림 , 고소설연구 19집, 2005;
최호석, 영창서관의 고전소설 출판에 대한 연구 , 우리어문연구 37집, 2010; 엄태웅,
회동서관의 활자본 고전소설 간행양상 , 고소설연구 29, 한국고소설학회, 2010; 근
대서지 편집부, 박문서관과 노익형 관련 자료 모음 , 근대서지 제6호, 2012.
98 한국고전연구 32집
남아있는 김우균과 노익형의 경우를 종합하면 대개 이들의 신분은 중인
층에서 평민 상인층까지에 걸쳐져 있으리라고 생각된다.14) 김우균은 부
친 김성진이 군수 출신이라고 하지만 모친이 대표적인 중인 가문인 천녕
현씨라는 점, 역관 출신인 스승 최성학에게 사사받은 점, 중인 출신 동료
들과 함께 스승의 척독 정리 작업을 진행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한
미한 양반 출신이거나 중인인 것으로 추정되며15), 노익형은 1905년 박문
서관 개점 전까지 ‘苧蒲廛傭兒, 客主집 居間, 雜貨營業’ 등을 거쳐온
경로를 보아 상인 출신으로 출판업을 시작한 경우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서점 운영과 출판업을 병행했던 이들 근대 척독
집 저자들이 독자가 선호하지 않는 책을 계속 찍고 있었을 리 없다는 점
이다. 이들은 당연하게도 인쇄된 출판물의 판매와 유통에 가장 민감했던
인물들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대 척독집 저자들의 인쇄, 출판,
서적업 종사 관련성은 근대 출판업계에서 약 40~50년에 걸쳐 척독집이
대량 생산되는 순환 구조를 만들었으며, 독자의 수요를 끌어내고 그들의
요구에 재빠르게 반응하며 지속적으로 변모되고 갱신되는 성향을 자극했
던 것으로 판단된다.
14) 김우균 및 노익형의 생애 사실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홍인숙, 근대 척독집 연구- 김우균의 <척독완편>을 중심으로 , 한국문화연구 19,
2010; 근대서지 편집부, 박문서관과 노익형 관련 자료 모음 , 근대서지 제6호, 2012.
15) ‘척독’이라는 장르와 중인 계층 사이의 오래된 연관 관계를 보여주는 다음의 연구 역
시 주목할 만하다. 류준경은 근대 척독집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후기의 대표
적인 방각본 간찰교본 簡式類編의 간행자인 李寅錫이 경아전 출신의 중인계층임
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기현은 19세기 중후반 여러 사람의 척독을 뽑아 편차한 한문
척독선집의 향유와 창작에 주요하게 관여한 이들이 중인인 趙熙龍, 李尙迪, 柳最鎭,
李基福등이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류준경, 지식의 상업유통과 소설 출판 , 고
전문학연구 제34집, 한국고전문학회, 2008; 류준경, 방각본 간찰교본 연구 , 漢文
古典硏究 18, 한국한문고전학회, 2009; 이기현, 19세기 중후반의 척독집 수용과 편
찬 , 한문교육연구 제28호, 2007.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99
실제로 1905년부터 1950년대까지 발간된 근대 척독집은 각 시대별 특징
이 뚜렷했으며16) 다양한 수준의 국한문체로 분기해 갔다.17) 심지어 척독집
16) 각 시대별 특징을 간략하게 제시하면 이렇다. 발흥기인 1900~10년대 척독집은 주로
500면 내외의 두꺼운 책에 순한문으로, 목차가 다소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으나 크게
보면 조선후기 간찰교본의 체제를 따라 편지 작성의 과정을 ‘투식구’와 ‘서간 예문’
부분으로 나누어 제시하는 경향을 취했다. 척독집의 대유행기인 20~30년대에는 편폭
이 대폭 줄어든 150면 내외의 분량에 한주국종체(漢主國從體) 국한문이 주를 이루었
고, 한글 독음 표기와 두주의 단어 풀이가 일반화되었다. 체제 면에서는 서간 예문만
병렬적으로 나열되는 간결한 구성이 일반화되었고, 척독집 상호간의 모방․재수록․재
편집이 자주 일어났다. 40~50년대 쇠퇴기에는 한 권의 척독집 안에 한주국종체(漢主
國從體)와 국주한종체(國主漢從體)가 1, 2부로 함께 들어있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17) 시기별 문체 변화에 대해서는 필자의 다른 논문인 1930년대 개별 척독집 연구- 이종
국(李鍾國)의 무쌍주해 보통신식척독(1930)의 특징 및 의의 의 3장에서 자세히 비교
논의를 진행한 바 있어 여기서는 대표적인 문체의 예시만 보이고자 한다. 초기(1900~
10년대, 한문 위주) : ‘別將三載, 懷想高情, 無時去念也, 但聞邇來 動止榮膺多福, 深
爲知己者慶. 動止 起居오 多福은 詩에 詒爾多福이라’, 玄采, 尺牘大成(1917)
‘問候門’ 중; ‘自汝發程後로風雨頻仍야爲念不尠터니第未知穩抵而客狀이何如며
所看事將有就緖之期也아其鬱其鬱이라吾一如前樣고’, 金雨均, 尺牘完編
(증보판, 1913) 중 ‘父在家寄子書’ /전성기(1920~30년대, 한글 독음 표기된 국한문체)
: ‘行次행차신後후로汽笛기적소만風便풍편에聞문하오면南門驛남문역을向
향야 祖父主조부쥬셔紛紛분분行客행객으로더부러同時下車동시하차셧거
니고疾走질주는人力車인력거를’. 盧益亨, 註解附音新式尺牘(1920) 중 ‘孫손
이在外재외祖父前조부전에上상書셔’; 人非利路인비리로면無以生存무이생존
이오人無貨利인무화리면徒爾死喪도이사상이라利之時義리지시의가豈不重且大與
기불즁차대여아……今聞吾兄금문오형이通衢大都통구대도에書肆셔사를宏開굉개
하야’, 池松旭, 附音註釋新式金玉尺牘(1923) 중 ‘友人우인의書鋪開設서포개설을
賀하하난書셔’ /쇠퇴기(1940 ~50년대, 한글 위주 한문병기) : ‘去月三十一日郵便上
函거월삼십일일우편샹함은伏料抵燭복료져촉이온바倐經兩週훌경량주에尙未承敎
復상미승교복오니下懷하회ㅣ悵缺無地창결무디이오이다更伏審雪寒복심셜한
에氣候萬康긔후만강시고旅次調節려조졀이均吉否균길부잇가’, 저자미상, 現代
美文學生日用片紙套(1946) 중 ‘祖父主前조부쥬전上白是샹시’; 전편轉便으로듯
사온즉則그사이디방地方에 행차行次하셧다하오니무슨일로어느디방地方에출장出張
하셧삽나잇가복불심차시伏不審此時에 긔테후만강氣體候萬康하압시고 숙모주叔母
主게압서도졔졀諸節이무손無損하시오며’, 저자미상, 現代美文學生日用片紙套(1946)
중 ‘생질甥姪이외삼촌外三寸게올니난편지片紙’
100 한국고전연구 32집
의 시대별 변화는 표제 면에서도 두드러졌다. 1900~10년대 초기 척독집이
주로 제목에 ‘완편(完編), 비문(備門), 대성(大成), 대방(大方)’, ‘신정(新
訂), 신찬(新撰), 신편(新編), 신식(新式)’ 등의 조어를 사용해 다양한 서간
들의 ‘완비됨’과 ‘새로움’을 어필하고자 했다면, 20~30년대 전성기 척독집
들은 ‘석자(釋字), 구해(句解), 부음(附音), 비음(備音)’ 등의 단어를 제목
에 넣어 한글 독음이나 단어 풀이가 있음을 명시하고 ‘배우기 쉬움’을 강조
하는 식이었다.
즉 이들 척독집은 국한문의 서간 쓰기를 배우고자 하는 당대의 대중 독
자들의 수준과 요구에 발빠르게 부응하는 장르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근대 척독집은 독자들에게 국한문 서간의 글쓰기 및 문체의 규범을 ‘용이
성과 편의성’ 위주로 정립하고 독자들의 접근을 쉽게 함으로써 한문 문식
성의 대중화를 주도해나갔던 장르였던 것이다.18)
3. 근대 척독집의 ‘척독 유용론’을 통해 본 당대 ‘한문 교
양’의 상황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근대 조선의 전 시기에 걸쳐서 출판시장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의 베스트셀러였던 근대 척독은, 그러나 하나의 본격
적인 장르로 인정받기보다는 늘 약간의 하대의 대상이 되곤 했다. 조선후
18) 근대 척독의 유행에 일본 에도시대부터의 전통적인 학습서인 ‘往來物(오우라이모노)’
와 척독집 유행의 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을 해준 하지영 선생에게 감사를 전한다.
일본 근대 척독집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차후 연구에서 별도로 다루어 볼 주제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근대 조선에서의 척독집 성행의 배경에 조선후기 간찰교본의 전통
및 척독 선집의 편찬과 같은 문학적 전통이 있었음을 우선 전제한 상태에서 근대 일본문
물의 수입과 영향을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往來物’에 대해서는 츠지모토 마사시
지음, 이기원 옮김, 일본인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지와사랑, 2009, 37~43쪽 참고.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101
기 서간 교본인 척독요람이나 초간독 같은 책이 고서점에서 헐값에
거래되는 흔해 빠진 책이라는 뜻으로 ‘섭치’ 취급을 받았다는 점, 박문서
관 주인인 노익형이 돈을 벌기 위해 ‘경서, 척독류’로 출판을 시작했다고
회고하고 있는 점 등은 근대 척독에 대한 폄하의 시선의 일단을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다.19) 이는 같은 시기 본격적인 학습서 역할을 했던 장르였
던 ‘독본’과 ‘한문 작문교본’20)의 위상이나 이들 텍스트에 대한 문화적 시
선과도 상당히 대비되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근대 척독집의 서문에는 종종 척독의 기본적인 ‘필요성과
유용함’을 설득하고자 하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근대 척
독집의 서문들과 일부 근대 척독집의 본문 서간에서 간간이 볼 수 있는
척독 장르에 대한 메타적인 언급들을 통해 척독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강
조하는 ‘척독 유용론’이 설파되고 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1절에서는 이
러한 척독 유용론의 논리 속에 한문서간의 ‘쓰기 능력’이 곧 ‘교양 수준을
판단하는 척도’로 지목되고 있으며 따라서 누구나 반드시 갖추어야 할 소
19) 장유승,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글항아리, 2013; ‘노익형은 잘 팔리는 책 만드는 일
을 우선했던 것 같다.……초기의 박문서관은 개화기 여느 출판사와 마찬가지로 위인
전기나 교과서류 및 經書, 尺牘類들로 출판을 시작하였다.’, 博文書館과 盧益亨관
련 자료 모음 중, 근대서지 6호, 2012, 803쪽.
20) 근대 독본 및 한문 작문교본의 위상과 문화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구자황, 최남선의 <시문독본> 연구-근대적 독본의 성격과 위상을 중심으로 , 과학과문화 통권9호, 2006; 문혜윤, 문예독본류와 한글 문체의 형성 , 어문논집
54, 민족어문학회, 2006; 김지영, 최남선의 <시문독본> 연구- 근대적 글쓰기의 형성
과정을 중심으로 , ‘한국현대문학회 / 국제비교한국학회’ 학술대회 발표문, 2007; 구자
황, 근대 독본의 성격과 위상(2) - 이윤재의 <문예독본>을 중심으로 , 상허학보 20,
상허학회, 2007; 구자황, 근대 독본의 성격과 위상(3) - 1930년대 독본의 교섭과 전변을
중심으로 , 반교어문연구 29, 반교어문학회, 2010; 임상석, 1910년 전후의 작문 교본
에 나타난 한문전통의 의미 , 국제어문 42, 국제어문학회, 2008; 임상석, 1920년대
작문교본, 實地應用作文大方의 국한문체 글쓰기와 한문 전통 , 우리어문연구 39
집, 우리어문학회, 2011.
102 한국고전연구 32집
양으로 부각되고 있음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2절에서는 척독을 필요로
했던 수요층 중에 ‘신진, 학생’ 뿐만이 아니라 당대 ‘유림과 선비’들이 포
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의 한문 문식성이 주로 ‘읽기’에 치우쳐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1) 척독의 필요성: ‘갖춰야 할 교양’이 된 ‘한문 쓰기’ 능력
근대 척독집에서 척독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채택했던 언술은
척독이라는 것이 ‘작은 기술’일 뿐이지만 ‘꼭 필요하다’는 식의 논리였다.
① 척독은 짧은 글이니 큰 문장과 비교하면 체와 격이 다르고, 춥고 더운
계절인사나 경조사를 알리는 사이에 일에 따라 정이 통하면 그것으로
족하다.21)
② 이 책은 깊은 문장과 심오한 뜻으로 영예를 구하거나 미를 훔치고자
함이 아니요, 외진 마을 먼 시골에서 일용하는 수응(酬應)의 도구로
도움을 주기에는 넉넉하게 남을 것이다.22)
③무릇 다른 이와 교제함에 척독이 아니면 대략 마음을 논하고 일을 서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편지를 보내서 천만 리에 떨어져 있지만 그리워
하는 곡진한 정을 전하고 얼굴을 맞대 이야기하듯 기뻐했으니 이것이
진준과 위척이 편지를 쓰는 이유였다.23)
위 ①과 ②에서 척독의 필요성에 앞서서 먼저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은
21) ‘況尺牘短篇也, 與大文字, 體格有異, 寒喧哀慶之間, 隨事通情足矣, 焉用程式爲
哉. 然民生久矣, 雖尋常往復, 羣分類聚, 具收幷畜.’, 李容稙, 尺牘重刊序, 增補
字典尺牘完編, 1912.
22) ‘是編之作, 非深文奧義, 欲以干譽而掠美, 其在僻巷遐鄕, 以資其日用酬應之具,
則綽綽然有餘.’, 高應源, 尺牘完編跋, 尺牘完編, 1905.
23) ‘夫與人交際, 非尺牘, 率莫巾論心而叙事. 故裁魚寄雁, 或在千萬里, 相思繾綣之
情, 驩如面譚. 是以陳遵之善書, 韋陟之牋記.’, 崔性學, 自序, 尺牘完編, 1905.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103
‘척독’이라는 장르의 범주와 역할에 대한 선 긋기이다. 여기서 척독과 구
별해야 하는 대상은 ‘큰 문장’, 즉 ‘깊은 문장과 심오한 뜻으로 영예나 미
를 추구하는 글’이다. 이들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척독은 깊고 심오한 글,
즉 고상한 문예나 본격적인 문학과는 ‘체와 격(體格)’이 원래부터 다른
‘짧은 글’일 뿐이며, ‘계절인사, 경조사’에 정을 전하는 도구이자 ‘벽항하향
의 수응 수단’에 불과한 글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근대 척독집 편저자들이 척독을 폄하하고 그 한계를 지적하는
듯한 발언의 목적은 척독이 고상한 시문이나 형이상학적인 학문 탐구의
‘어렵고 대단한’ 문장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생살이의 ‘필요’에 따른 ‘실용
적 용도’를 가진 글이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한
문 글쓰기이긴 하지만 심오한 한문 역량을 요구하지 않으며 일상적 필요
와 연결되어 있는 장르라는 것을 설득하기 위한 포석인 것이다.
③에서는 그러한 일상적 교유의 도구로서의 척독의 유용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마음을 논하고 일을 전하는 것(論心而叙事)’,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주앉아 말하는 것 같은 기쁨을 주는 것(驩如面譚)’이라는 점이
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 소식을 전한다는 것, 그로 인해 서로의 안부와 존
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고 만남의 기쁨을 전해주며 일의 사정을 알려준
다는 것은 편지라는 소통 수단의 가장 근본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자,
‘실용’이라는 현실적 필요에 정당성과 설득력을 실어주는 기본적인 수사
적 표현이었다.24)
24) 안부와 소식을 전하는 기능을 들어 척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표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尺牘은 萬家平安의 喜를 傳고 千里跋涉의 勞를 代니’, 金雨均, 緖
言, 新撰尺牘完編, 1908; ‘至於河山遙隔, 渴塵頓消, 魚雁可憑, 夢魂相接. 委曲
宛轉, 簡繁俱該, 懃懃懇懇, 其感人者深, 莫尺牘若耳.’, 玄采, 尺牘大成序, 尺牘
大成, 1917; ‘書中所錄事實은 一一詳記하야 完若面接直聞에 頗無疑訝未解者하
니’, 李鍾國, 無雙註解普通新式尺牘, 1930; ‘夫四海之人, 勢不可一室之居, 則不
104 한국고전연구 32집
④ 시국이 유신되고 시무가 매우 바빠져서 사귐을 논하는 도리가 날로 넓
어지고 일에 수응하는 방법도 날로 많아지니 필히 읽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척독이다.……어찌 부화한 옛 것만을 숭상하고 새로움의 정수를
싫어하리오.25)
⑤ 지금 천하 형세를 돌아보니 변화가 날로 빨라지니 부득불 그 사이에
더하거나 깎아낼 것이 있다. 고루함을 헤아리지 않고 1년간 고심하여
사례(四禮)에 대한 질문, 변자유편(騈字類編)의 풀이, 당송 명인의
초서 중 본보기가 될 만한 것에 이르기까지 쓸데없는 것을 없애고 정
수만을 뽑으며 또 그 문장의 심오한 것을 발췌하여 조목으로 풀고 자
세히 설명하였다.26)
⑥ 또 사람은 귀천과 노소의 차이가 없을 수 없는데 한 단계의 어른과 한
갑자의 어른이 있으면 공경하는 바에도 차이가 있다. 공경하는 예절도
현재 통용되는 방식이 있으니 편지를 쓰는 자가 어찌 시의에 맞게 함
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27)
그런데 근대 척독집의 필요성과 유용함을 결정적으로 설득한 것은 안
부와 교류라는 편지의 기본 기능에 대한 단순하고 평면적인 이유가 아니
라 바로 ‘시대의 변화에 맞춘 필요’였다. 이것은 근대 척독집에 대한 당대
得不以文字代言語, 是名爲書牘, 書牘非事情之最切者乎.’, 鄭萬朝, 最新尺牘大
觀序, 韓幾堂, 最新尺牘大觀, 1923.
25) ‘局勢가 維新고 時務가 劇忙니 吾人도 論交之道가 日廣고 酬事之路가 日
多니 不可不必讀 者이 尺牘이라……엇지 浮華를 尙古고 精粹를 厭新리
오.’, 金雨均, 緖言, 新撰尺牘完編, 1908.
26) ‘所顧今宇內形勢, 日趨於變, 不得不有增刪於其間者. 不揣孤陋, 苦心歲餘, 擧凡
四禮之相問, 騈字之釋義, 以及唐宋名人章草之可爲典型者, 祛冗撮精, 且摘其文
典之深奧, 條觧而縷釋之.’, 金雨均, 自序, 增補字典尺牘完編, 同文書林, 1912.
27) 且人不能無貴賤少長之等夷, 而一階之尊, 一甲之長, 所敬有差, 其敬之之節, 自
有現時通行之式, 爲書牘者, 何可不務適其時宜乎. 鄭萬朝, 最新尺牘大觀序, 韓
幾堂, 最新尺牘大觀, 1923.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105
독자들의 폭발적인 수요를 이끌어낸 요인이며, 시대별로 지속적인 척독집
의 자기 변화와 갱신을 가져온 원인이기도 했다.
④에 따르면 척독의 유용성은 감정 교류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국세(局勢)와 시무(時務)’가 급변하여 각종 사회적인 교류 역시 급격히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한문서간을 쓸 때도 ‘부화한 옛날 식’
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써야 하니 척독은 ‘반드시 읽어야 할 것(不
可不必讀)’이 되었다는 것이다. 급변하는 시대에 따라 그에 맞는 편지쓰
기-글쓰기의 새로운 규범과 지식이 필요하다는 수사는 확실히 독자들의
수요를 자극하는 표현이었다. 세상이 달라졌는데 시대에 맞지 않는 과거
의 척독집에 있는 예전 식대로 글을 써서는 안되며, 변화한 시대에 맞게
새로 쓴 척독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종다양한 새로운 척독집의 끊임
없는 간행의 배경에는 이러한 ‘시대변화에 부응한다’는 명목으로 소비 욕
구를 자극하는 척독집 필요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⑤와 ⑥에서는 그렇게 새롭게 편집되는 방향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부분이다. 무엇이 어떻게 새로운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 있어야
만 독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⑤는 그 새로움을 ‘쓸데없는 것을
빼고 핵심만 모았다(祛冗撮精)’, ‘어려운 부분을 뽑아내 조목별로 풀어 설
명했다(摘其文典之深奧, 條觧而縷釋之)’는 것으로 집약한다. ‘핵심 정리
와 쉬운 풀이’라는 표현은 독학으로 한문서간의 쓰기 능력을 빨리 획득해야
하는 독자, 학습자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설득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⑥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 시대에 새로 나온 척독집의 필요를 설득
하고 있다. 그것은 ‘예절도 그 시대에 통용되는 방식이 있다(其敬之之節,
自有現時通行之式)’는 것이다. 시대 변화에 따른 친소․존비의 예법과 용
어의 변화를 ‘시의에 맞게’ 쓸 줄 아는 것이 한문서간의 쓰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는 설명은 충분히 독자들에게 의미있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잘
106 한국고전연구 32집
쓰지 않는 어휘와 벽자, 관용구, 상하 위계를 표현하는 차별적 용어 등을
쓰는 한문 편지 특유의 관습을 생각할 때28), 특히 그 시대에 주로 사용하는
표현과 관용적 문법에 ‘맞게 써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기준이었다.29)
⑦ 자기 집안의 왕복 서찰로 시작하여 어른, 평교, 아랫사람에 사용하는
문자의 존비와 청탁을 자세히 분간하여 학습하라. 사람의 문견이 있는
지 없는지 알고자 하면 그 사람의 서찰을 보면 저절로 알 수 있다. 부
형이나 어른께 쓸 문자를 평교와 아랫사람에게는 쓰지 못하니 대가들
의 안목 있는 서간을 유심히 펼쳐보아 그 기두와 안부의 예를 가장 긴
밀하게 잘 익히라.30)
⑧근래 각 학교의 학생들이 신학문에는 과연 성취한 효과가 있어 그 웅변
고담이 족히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러나 한문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아서 집안 내의 서찰에서 친구 간의 편지까지 어구가
말이 되지 않고 어로(魚魯)를 분별하지도 못하며 또 글씨의 자획은 거
칠고 졸렬하며 틀리기까지 하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이런 사람이
설령 조정과 사회에 나아간다 해도 한문에 전혀 무식하니 다만 입으로
만 하는 피상적인 학문으로 능히 일을 처리하겠느냐.31)
28) 벽자와 어려운 한문 문구를 주로 쓰는 한문 서간 특유의 과시적, 차별적 성격에 대한
언급은 김효경, 18세기 간찰교본 <簡式類編> 연구 , 규장각 9집, 2003, 참고.
29) 조선후기 간찰에서도 이러한 ‘달라진 현실’에 맞게 써야 한다는 표현을 찾을 수 있다.
조선후기 간찰교본 중 하나인 簡式類編에서는 평교를 하는 친구 사이에도 존경용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든가, ‘上白是’라는 표현은 하층이 상전에게 올리는 서간에
서만 쓰고 사대부가의 편지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식의 변화를 언급하고 있다. 류
준경, 앞 논문(2009), 283쪽.
30) 始自家間往復으로 以至尊丈平交手下에 使用 文字의 尊卑와 淸濁을 仔細分
揀學習라 人之聞見의 有無를 知得코져 면 其人의 書札를 見면 自可知矣라
父兄이나 尊丈前의 用 文字를 平交와 手下에 用지 못나니 大方家眼目이
有 書簡을 留心披閱야 其起頭와 安候의 例를 最緊熟習고, 李鍾國, 無雙註
解普通新式尺牘, 1930, 2번 서한.
31) 近來各學校學生이 新學問에 果然成效가 有고 其雄辯古談이 足히 世人을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107
⑨ 척독은 사람의 혀이니 사람이 혀가 없으면 말을 할 수 없고 말을 할
수 없으면 교제를 할 수가 없으니 이러면 어떻게 인류사회에 서겠는가.
또 척독을 혀에 비해 봐도 특히 긴밀하여 벙어리가 말을 할 수 없어도
척독에 능하다면 혀 대신 마음과 뜻을 통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문명국
사람들이 어린 아이 때부터 척독 배우기를 먼저 하는 것이다.32)
‘당대의 관습에 틀리지 않게 쓸 것’이라는 기준의 내용은 ⑦에서 좀 더
구체화되어 제시된다. 그것은 ‘존장, 평교, 수하(尊丈平交手下)’의 관계에
맞게 쓸 것, 문자의 ‘존비와 청탁’을 정확히 할 것, ‘기두와 안부’에 유의할
것 등과 같은 한문서간 쓰기의 규범이다. 아울러 이 예문에서 특히 주목
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한문서간 쓰기의 능력이 그 사람의 ‘문견(聞見)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보고 들은 것(聞見)’, 즉 그
사람의 지적, 학문적 배경을 알고 싶으면 그의 서찰을 보면 된다는 말은,
‘한문서간’이 곧 한 사람의 ‘교양 수준’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고 있음을 알
려주는 것이다.
⑧과 ⑨는 이러한 교양으로서의 한문 글쓰기 능력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⑧에서는 당시 신학문을 배운 학생들이 ‘웅변고담’에는 능하지만 한문
능력이 떨어짐을 ‘눈뜨고 볼 수 없(寓目키 不堪)’을 정도라고 개탄한다. 이
들의 서간이 ‘어구가 말이 되지 않고 비슷한 글자를 구별하지도 못하며 자획
도 거칠고 졸렬하니’ 이런 인물이라면 ‘조정과 사회에서의 역할’을 제대로
壓伏나 然이나 至於漢文에 全不留心야 家內及朋友間短札에 語句가 全不
成說고 魚魯를 莫辨며 字畫이 畫荒拙걸 야 寓目키 不堪니 設令此人
이 出야 朝廷及社會에 立면 其漢文이 全無고 惟但히 口舌及皮相의 學으로
能히 濟事냐, 玄采, 尺牘大成, 1917.
32) 尺牘, 人之舌, 人而無舌, 言語不能, 言語不能, 交際不能矣, 如此則何以立於人類
社會, 此尺牘比於舌, 尤爲喫緊, 卽啞者雖不能言, 如能於尺牘, 可以代舌而通情
意, 故文明國人, 卽自童穉, 先學尺牘矣. 玄采, 勸學尺牘, 尺牘大成, 1917.
108 한국고전연구 32집
할 리 없고 ‘일을 해낼(濟事)’ 능력도 없으리라는 것이다. 이 예문에 따르면
‘한문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것’은 곧 ‘입으로만 하는 피상적인 학문(口舌
及皮相의 學)’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며, 사회에서 요구하는 공적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근본 능력으로서의 교양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나아가 ⑨에서는 척독이라는 한문 글쓰기 능력의 필요성을 ‘인류사회
와 문명’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척독을 곧장 ‘사람의 혀(人之舌)’에 등치시
킨 이 글의 논리에 따르면, 혀가 없으면 말을 할 수 없고 교제도 할 수 없
으므로 ‘인류사회’에 설 수가 없게 된다. 이 때문에 ‘문명국’에서도 어린아
이부터 척독 쓰기를 배운다는 것이다. 즉 한문서간의 작문 능력은 ‘인류사
회’와 ‘문명’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갖춰야 할 교양’이 된 것이다.
2) 근대 유림의 한문 교양: ‘읽기’ 위주의 한문 문식성
이러한 척독 쓰기의 필요성에 대한 언술을 보면 원래 척독집의 예상 독
자는 앞서의 예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청년학생’ 계층이다. 꼭 신학문
을 배운 청년학생이 아니어도 대부분의 근대 척독집에서 구체적인 독자
대상으로 지칭하고 있는 표현은 이제 막 ‘배움을 시작한 이’라는 뜻의 ‘초
학(初學)’33)이 가장 많다. ‘초학’과 유사한 표현으로 ‘연소학천자(年少學
淺者)’34), ‘가숙아배(家塾兒輩)’35), ’신진후학(新進後學)’36), ‘부녀동치(婦
33) 척독집의 학습 대상을 ‘初學’으로 밝히고 있는 글은 다음과 같다. 趙秉式, 序, 尺
牘完編, 1905; 崔性學, 自序, 尺牘完編, 1905; 高應源, 尺牘完編跋, 尺牘
完編, 1905; 玄采, 尺牘大成序, 尺牘大成, 1917; 李鍾國, 無雙註解普通新式
尺牘, 1930, 8번 서한.
34) 李容稙, ‘年少學淺者, 依倣之具, 則亦足爲學生界一要覽.’, 尺牘重刊序, 增補
字典尺牘完編, 1912.
35) ‘不過爲家塾兒輩之初梯耳.’, 金雨均, 自序, 增補字典尺牘完編, 同文書林, 1912.
36) ‘新進後學, 雖欲援古徵今, 于何摸倣.’, 閔種默, 序, 池松旭, 新編尺牘大方, 1915.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109
女童穉), 초부목수(樵夫牧豎)’37)와 같은 표현들이 쓰이기도 했는데, 결국
이러한 말들을 종합해보면 근대 척독집의 본격적인 예상 독자층은 바로
‘한문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사람’, 즉 한문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세대와
계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변화된 시대의 사회상 교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또한 시의에
맞는 한문서간의 규범을 갖추기 위해, 나아가 조정과 사회, 인류의 문명
사회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 위해, ‘한문서간의 쓰기 능력’이라는 교
양을 구비하고 싶어했던 이들, 근대 척독집을 필요로 했던 수요층은 이보
다 훨씬 광범위한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⑩모두 옛 책에 능하다고 칭송받고 능히 많은 책을 두루 통했다며 훌륭한
문장을 깊이 음미하고 ‘장자’며 ‘이소’를 거론하지만, 주고받는 편지글
에 이르러서는 그 투식에 어두워서 오히려 붓을 놓기를 면치 못하니
하물며 여염의 선비에 있어서랴.38)
⑪그런데 우리 조선인은 척독을 작은 기술로 여겨 그 기술을 전혀 못하지
는 않았으나, 옛 것에 박학하고 지금 것에 달통하여 스스로 글을 잘한
다고 내세우는 자도 이것에 있어서는 항상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막히
며 마음과 손이 응하지 않고 속에 품은 생각을 펼치지 못한다.39)
⑫ 사람들이 척독은 족히 배울 만하지 않다고 하면서 버려두고 돌아보지
않아 노사숙유라는 자들도 시부와 표책에는 능하지만 친구 간에 서찰
37) ‘婦女童穉와 樵夫牧豎라도 旨意를 自解하야 瞭然無疑할지라’, 池松旭, 附音註釋
新式金玉尺牘, 1923.
38) ‘皆見稱於古藉, 能博涉群籍, 含英咀華, 僕命莊騷, 至於往復之詞, 昧其套式, 猶未
免擱筆, 況委巷之士乎.’, 崔性學, 自序, 尺牘完編, 1905.
39) ‘迺者我鮮人, 視尺牘爲小技, 而全不下工, 其博古達今, 自號能文者, 獨於此而每
瞠然自沮, 心手不應, 衷懷莫宣.’, 玄采, 尺牘大成序, 尺牘大成, 1917.
110 한국고전연구 32집
한 편에는 그 마음을 통하지 못하는 자가 많습니다. 그러니 마음 속에
할 말이 만 마디 있은들 장차 무엇에 쓰겠습니까.40)
⑬ 소위 속학자들은 입으로는 오경의 장구를 외고 손으로 과문의 여섯 문
체를 늘어놓지만 서한을 쓰려 종이를 마주하면 끙끙거리면서 혹 말이
뜻에 닿지 않기도 하고 혹 정해진 방식에 어긋나기도 하여 자기의 졸
렬함을 드러내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니 그 부끄러움이 또한 심하지
않은가.41)
⑩에서 지적되는 것은 당대에 자기의 학문 수준을 자랑하는 선비들도
한문으로 제대로 된 서간 쓰기를 못하고 있다는 상황이다. ‘옛 책에 능하
고 많은 책을 두루 섭렵(見稱於古藉能博涉群籍)’한 선비들이 막상 ‘일
상에서 왕래하는 글(往復之詞)’을 쓸 때는 붓을 놓아버린다(未免擱筆)는
것이다. ‘수많은 옛 책들(古藉群籍)’을 해박하게 꿰고 있다는 말이나, ‘깊
이 음미함(含英咀華)’, ‘장자와 이소를 거론함(僕命莊騷)’이라는 표현으
로 드러나고 있는 이들의 한문 문식성의 수준은 상당히 오랫동안 한문 교
육을 받아왔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한문을 익혀온 이들, 심지어 그 자신은 한문을
잘한다고 자부하기까지 하는 이들이 일상의 편지조차 쓰지 못한다는 현
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음미한다’는 행
위가 ‘작문․저술(쓰기)’의 영역이 아니라 ‘해독․이해․감상(읽기)’의 영
역이라는 점이다. 즉 이 예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당대 유자들 중 상당한
40) ‘世人謂尺牘不足學, 等棄不顧, 至於老士宿儒, 能於詩賦表策, 而知舊間一札不通
其情緖者多, 然則胸中雖有万言, 將焉用之.’ 玄采, 勸學尺牘答書, 尺牘大成,
1917.
41) ‘向所謂俗學者, 口誦五經章句, 手列科文六體, 而於書牘臨紙戞戞, 或辭不達意,
或違戾程式, 顯己拙而貽人笑, 不亦可羞之甚乎.’ 鄭萬朝, 最新尺牘大觀序, 韓
幾堂, 最新尺牘大觀, 1923.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111
수준의 한문 해독력과 감상 능력을 갖추고 있는 이들도, 실제 한문으로
자유롭게 문장을 작성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사실
이다. 그러니 한문 읽기의 수준이 그보다 못했을 평범한 ‘여염의 선비들
(閭巷之士)’같은 이들의 경우에는 한문서간의 쓰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
까웠으리라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⑪에서 ⑬에 이르는 예문들이 지적하고 있는 상황 역시 같은 현실이다.
여기서 표현되고 있는 유자들 역시 ‘글에 능하고 밝은’ 이들이다. 이들은
‘고금에 밝고 스스로 글 잘한다고 내세우는 자(博古達今自號能文者)’들
이며, ‘시부와 표책에 능한 나이 지긋한 선비와 유자들(老士宿儒能於詩
賦表策)’, ‘입으로 오경장구를 외우고 손으로는 과문 여섯 체를 줄줄 늘어
놓는 (口誦五經章句手列科文六體)’ 학자들이다.
그런데 이렇듯 ‘고금’에 해박하고 ‘시부와 표책’에 능하며 ‘경전과 과문’을
줄줄 외는 이러한 ‘노사숙유(老士宿儒)’들이, 한문서간 쓰기를 앞두고는
‘눈만 멀뚱히 뜨고 막혀서는 마음과 손이 서로 응하지 못하(瞠然自沮心手
不應)’는가 하면, ‘종이만 펴놓고 끙끙대며 말이 안 맞거나 법식이 틀려서
(臨紙戞戞, 或辭不達意, 或違戾程式)’ 웃음거리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
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이한 상황은 이 선비들의 한문 문해 능력이 ‘읽기’
영역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스스로 글에 능하다고 칭한다(自號能文)’는 말에서의 ‘능문(能文)’은 한문
의 읽기, 즉 ‘해독․이해․감상’에 능하다는 뜻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⑬에서 당대 유자들의 한문 리터러시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보
다 근접한 예상을 할 수 있게 제시된 표현은 ‘구송(口誦)’과 ‘수열(手列)’
이라는 단어이다. ‘구송’은 말 그대로 ‘입으로 읊기(誦)’라는 낭송 행위이
며, ‘수열’은 ‘늘어놓는다(列)’는 글자로 보아 스스로 한문 문장을 짓는 행
위라기보다는 ‘글씨를 베끼거나 옮겨 쓰기’를 하는 행위로 보이기 때문이
112 한국고전연구 32집
다. 즉 이 시기 대부분의 유자들의 한문 능력은 주로 ‘낭독-해독-이해와
감상’으로 이어지는 ‘읽기’ 영역의 능력이었으며, 한문으로 ‘쓰기’를 하는
경우에는 자기가 문장을 짓는 주체로서 작문이나 저술을 수행하는 것이
라기보다는 남의 글을 옮겨 쓰거나 베껴 쓰는 ‘필사’에 가까운 행위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까지의 선비, 문인들이 한문으로 된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리라는 기대를 깨뜨린다. 이들 근대 조선의 유자와 선비들에게는
육체에 각인된 표상처럼 한문으로 자연스럽게 작문을 수행할 수 있는 리
터러시 능력이 획득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42) 이들의 한문 문식성은 대
체로 ‘읽기’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요컨대 한문으로 된 글의 문면을
해독하는 차원을 넘어서 한문학의 미적 전통과 수사적 표현에 대한 배타
적 감식안을 발휘하는 고차원적인 ‘읽기’ 능력을 가진 경우에도, 자신이
생각한 바를 적절한 어휘를 구사하여 한문의 통사구조에 맞게 배치하는
글쓰기-작문의 영역에는 이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던 당대의 많은 선비들에게 한문 서간, 즉 ‘한문
으로 글쓰기’라는 것은, 그것을 하지 못하면 웃음거리가 되는 것, 즉 반드
시 갖춰야 할 중요한 교양의 영역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초학, 신진’이라
언급되었던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세대의 청년 학생과 함께, 서간
42) 이러한 당대 양반층의 한문 작문 능력의 저하 현상이 근대 초입에 갑자기 일어난 일
이었던 것은 아니다. 숙종 6년(1680) 당시 음석과 구두만을 묻는 과거시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李端夏가 ‘七書에 통달한 자도 간찰을 짓지 못한다’고 한 말(김효경의 앞
논문 참고)은 체계화된 성향으로 한문 작문의 아비투스를 체현하고 있는 상층 지식인
의 비율이 17세기의 조선에서도 그다지 높지 않았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더욱
이 조선후기 이후 양반층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면서 한미한 지방 사족들 중에서는 양
반으로서의 경제적 수준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조선후
기 양반 계층의 한문 문식성, 특히 ‘쓰기’의 일반적인 수준은 생각보다 낮은 것이었을
수 있다. 또한 이는 거꾸로 ‘한문’을 쓸 줄 안다는 것, 즉 한문으로 문장을 쓰고 글을
짓는다는 것이 상당히 고급하고 배타적인 능력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113
이라는 양식의 한문 글쓰기를 습득하게 해주는 근대 척독집의 매우 중요
한 수요 계층이 되었다.
근대 척독집의 척독 유용론은 결국, 이 시기에 ‘한문 교양’이라는 것의
기준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것을 필요로 했던 계층과 대상은 누구였는지
를 알려준다. 그것은 자신의 일상 안부를 ‘한문’이라는 서기체계에 담아
전달할 수 있는 기본적인 ‘쓰기’ 능력, 즉 ‘한문 작문’의 능력이었으며, 그
것을 필요로 했던 이들은 ‘청년학생, 신진초학’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학문
의 진입 세대뿐만이 아니라 한문으로 된 ‘작문 리터러시’를 획득하지 못했
던 당대의 많은 ‘선비들, 향반 유림’이었다는 사실이다.
4. 근대 척독집의 ‘한문 교양’의 대중화의 의미- ‘서간-글
쓰기’ 능력에 방점을 둔 한문의 ‘대중 교양’화
앞서 근대 척독집이 광범위한 유통 및 판매량을 보였으며 출판업에 종사
했던 다수의 척독집 저자들이 대중들의 수요를 자극하고 이끌어왔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또한 근대 척독집이 ‘한문서간의 쓰기’라는 기술을 독자에게
그들이 꼭 갖춰야 할 교양으로 제시했음을 살펴보고, 그 ‘대중’들 속에는
학생층을 비롯하여 한문 전통에는 익숙하지만 한문 작문의 능력을 갖추지는
못했던 당대의 선비, 유림의 상당수도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점을 지적했다.
이러한 근대 척독집의 의미는 확실히 조선시대에 상층 남성들의 배타적
인 지적 능력이었던 한문을 근대의 대중 교양으로 전유하였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한문’이라는 전통적 권위의 서기체계가 왜
다른 어떤 장르도 아닌 ‘근대 척독집’이라는 장르를 통해 대중화될 수 있었
는가. 이 글에서는 그 계기가 바로 ‘서간’이라는 기능적 문종의 단일 장르에
114 한국고전연구 32집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 그리고 ‘한문 쓰기’ 능력의 간략한 수행 방법을 효율
적으로 전달했음을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삼고자 한다.
사실 한문 전통의 권위를 본격적으로 계승하고 근대라는 거대한 문화
전환의 상황에 정면으로 대응하면서 국한문체로 전환하기 위한 주체적인
노력을 했던 근대 출판물은 ‘한문 작문교본’이었다. 이들 작문 교본은 한
문 문체에 대한 근대적 모색과 탐구를 실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전통적인
한문학 분류에 의거한 정통 산문체제를 취사선택하면서 새로운 분류체제
를 구성하기 위해 치밀한 고민을 했다.43) 그러나 한문산문 분류의 정통성
의 승계와 국한문체의 변모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이들 작문교재는 대중
들에게는 다가가기 어려운 장르였다.
이에 비해 근대 척독집은 당송고문을 전범으로 삼으며 ‘論, 說, 記, 傳,
頌, 銘’ 등의 정통 한문산문의 분류체계를 근간으로 했던 작문교본과 달
리 ‘서간’이라는 한 장르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들에게도 접근할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근대 척독집이 집중한 ‘서간’ 장르의 일상적
교류 수단이라는 기능적 성격 또한 대중들에게 그것이 자신의 삶에도 필
요한 기술이라는 것을 설득하기에 용이한 것이었다. 더욱이 근대 척독집
은 실제 한문 교육의 배경이 낮은 수준의 독자들에게도 ‘한문 글쓰기’를
현실화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상에 척독 활투 각 종류와 함께 그 밑에 척독려구를 보충해 놓은 부분이
구비되어 있으니 편지를 연습할 때 몇 구절을 뜻대로 취하여 쓰되, 그 시작과
결미 부분의 정식을 생략할 수 있고 중간 부분도 가감하고 순서 배치를 스스
로 할 수 있으니 다만 순서대로 글을 지어 변환하여 활용할 수 있다.44)
43) 한문 작문교본의 문체 탐구, 한문 전통의 수용과 모색에 대해서는 임상석의 연구에서
상세하게 고찰된 바 있다. 임상석, 국한문체 작문법과 계몽기의 문화 의식 , 한국언어
문화 제33집, 한국언어문화학회, 2007; 임상석, 앞 논문, 2008; 임상석, 앞 논문, 2011.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115
위 예문에서 볼 수 있듯 근대 척독집은 한문 서간의 법식과 규범을 독
자가 틀리지 않게 따라할 수 있으면서도 자기 뜻에 맞게 쓸 수 있도록 ‘발
췌와 인용, 생략과 가감, 편집과 배치’라는 단순하고 쉬운 방법으로 한문
의 ‘쓰기’라는 행위가 가능하게끔 유도했다. 즉 근대 척독집은 이러한 간
단한 방법으로 당대의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과거의 권위를 체현하고 있
는 ‘한문 서간’이라는 ‘글쓰기’를 수행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얻게 해주었
고, 자신의 지적 수준을 차별화할 수 있는 기표로서 ‘한문 서간’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근대 척독집이 취한 이러한 한문의 ‘쓰기 리터러시’의 대중화 전략이
당대 독자들에게 한문으로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쓸 수 있는 ‘한문 작문
능력’을 익히게 해주었던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는 한문이라는 ‘문’의
체계에 대한 읽고 쓰기의 기본 학습과 한문적 소양이라는 문화적 기반이
뒷받침된 진정한 ‘작문 능력’이었다기보다는, ‘모방과 편집’의 방법으로 파
편화되고 단순화된 ‘수행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척독집은 ‘서간-쓰기’ 능력의 필요성을 부각시
키면서 ‘한문을 근대의 대중 교양으로 정립’하는,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에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척독집은 근대 조선의 동시적인 것의 비동
시성을 체현하며, ‘근대 한문’의 문화적 위상의 변화와 대중의 관련성을 흥
미롭게 바라보게 해주는 자료인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근대 척독집의
출판 시장에서의 대중적 유행 현상과 함께 척독 유용론을 통해 읽어볼 수
있는 당대 한문 교양의 상황을 분석했다. 또한 ‘서간’의 장르성과 ‘쓰기’ 리
터러시 능력의 필요성을 설득하면서 근대 척독집이 한문 교양을 근대 대
44) ‘以上에 尺牘活套各類와 幷히 以下에 尺牘麗句拾遺等이 俱備얏스니 修書時에
幾句와 幾節을 隨意取用되 其起頭結尾에 定式이 略有고 至於中間에 加減과
顚倒를 自任며 但히 順序成文야 變換活用이 可오’, 玄采, 尺牘大成,
1917, 20쪽.
116 한국고전연구 32집
중45)의 교양으로 정립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본고에서 미처 살펴보지 못
한, ‘근대 교양’의 매개체이자 ‘대중화된 소비재’로서의 근대 척독집의 양상
과 한문 교양의 변화의 의미에 대해서는 후고를 기약하고자 한다.
45) 근대 조선의 ‘대중’이라는 대상을 개념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여가, 도시
거주, 현금구매력을 가진 비농업인구(전체 인구의 15%~30%)’로 볼 수도 있고, ‘보통
학교 교육을 마친 이들(1910년대 이후 매년 10~25만명)’로 추정할 수도 있다. 다만
‘대중’을 정의할 수 있는 핵심 요소를 그들의 ‘성층상의 지위에서보다 취향과 행동과
문화적 향유체계’로 보는 관점은 유의미하다고 생각된다. 천정환, 앞 논문, 2001, 80쪽,
86쪽, 88쪽.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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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한국고전연구 32집
ABSTRACT
Popularization of 'Chinese Cultural Studies' Viewed through Modern
Study Materials for Writing Letters in Chinese and the Significance
Hong, In-sook
Chinese character was the cultural studies exclusive for the upper class
during the Middle Ages. However, during the modern period of Korea, it
came to be popular cultural studies through the Chinese letter textbook,
Modern Study Materials for Writing Letters in Chinese. This research
investigated the phenomenon of spread of modern study materials for
writing letters in China since 1900. Through this, this research searched
the point that the ability to write Chinese letters came to stand out as
'refinement of the modern people’.
Modern study materials for writing letters in Chinese was a popular
practical book, a kind of best-seller that sold the most among the modern
publication. The first modern study materials for writing letters in Chinese,
Kim, woogyun's <Complete version of Cheokdok(尺牘完編, Chukdokwanpyun)>
was sold as many as Choi, nam-seon's <Simundokbon(時文讀本, the Anthology
of ContemporaryWriting)> or Lee, gwang-su's <Mujeong(無情, Heartlessness)>.
The point that major writer of modern study materials for writing letters
in China was a publisher proves that the Study materials for writing letters
in Chinese left the publisher with profit.
The three points that this research intended to focus on and determine
in respect of this spread phenomenon of Modern study materials for writing
letters in Chinese are as follows. First, literacy of 'writing' Chinese letters
stood out as an important refinement of the public during that time.
Second, among those who intended to acquire ability of writing Chinese
letters, there were 'classical scholars', traditional intellectuals of that
period. Third, 'Study materials for writing letters in Chinese' was popular,
since the functional character of the genre, 'letter', was cognized necessary
근대 척독집을 통해 본 ‘한문 교양’의 대중화와 그 의미 121
by the modern people.
Through this Modern study materials for writing letters in Chinese, the
public of that period got closer to 'Chinese characters' that symbolized the
authority of the past, accordingly, Chinese characters became the refinement
of the public. This has a significance to newly view the existing recognition
of literary history that modern Chinese characters have merely declined.
Key Words Modern study materials for writing letters in Chinese, Chinese cultural
studies, Chinese literacy, Chinese letters, Chukdokwanpyun(尺牘完編)
논문투고일 : 2015. 10. 28
심사완료일 : 2015. 12. 2
게재확정일 : 2015.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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