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광악(何光岳)의 『동이원류사(東夷源流史)』

2018. 4. 10. 11:56알아두면 조은글

중국 하광악(何光岳)의 『동이원류사(東夷源流史)』에서 말하는 해양 강국 백제에 관하여

 

1. 글 머리에

 

중국의 하광악(何光岳)이라는 학자가 쓴『동이원류사(東夷源流史)』를 읽어볼 계기를 가져다

준 것은 우연히 신문 보도를 통해 심백강 선생의 동이 관련 글을 접하고 자료를 입수하여

우리 고대사 관련 부문을 관심 있게 읽어 본 기억이 난다.

이 책의 서문에도 나와 있지만 1982년 3월 6일자 중국 《광명일보(光明日報)》에 제1면에

"농민 하광악이 역사지리학자가 되었다"라는 기사가 보도된 뒤 메스컴을 타고 하루아침에

유명한 스타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

 

책의 분량도 550여 쪽에 달하는데다 다운받은 원자료가 지질이 나빠서인지 소위 선명도가

형편없어 읽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주로 우리 고대사 관련 부분을 읽어 보았는데

인용서로 볼 때 고대 사적으로부터 현대인의 저술까지 모두 망라하였으며 대단한 실력을

가진 분으로 여겨졌다.

 

농민 역사지리학자라 하니 우리 고향 정읍 출신 박문기(朴文基) 선생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문화예술 방면에 일가견이 있고 그 방면 사람과 접촉이 많은 친구를 통해 박문기

선생이 은거하고 계시는 정읍시 신정동 농장까지 직접 찾아가 뵈온 적이 있다.

정규적인 학교교육으로는 초등학교만을 다니시고 오로지 한문만을 고집하여 배우셨다고

하는데 그의 한학에 대한 이해와 해박한 고대사 관련 지식은 이미 그가 지은『대동이(大東夷)』

라는 소설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또 수필가로 이름을 드날리어『숟가락』이라는

수필집도 내셨는데 아무튼 대단한 분이시다.

 

글을 대충 읽어 보았더니 한민족 우월주의에 푹 빠져 우리 고대사의 주역들은 거개가

중국에서 건너온 것으로 사람이라 단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주역들도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 간으로 인식하고 있어 다 믿을 것을 못 된다 하겠다.

 

2. 하광악(何光岳)은 어떤 사람인가

 

인터넷에서 퍼온 자료이다.

1939년생으로 호남 악양인이며 역사학자이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학업을 그만두고 집안이 가난해서 남의 위해 목동이 되었다. 자기 스스로 역사지리·고전문학

및 고문자학 등 여러 종류의 학과를 독학했다.

1956년 악양현 농업기술원으로 파견되어, 1958년 두 계절 늦은 볍씨인 "도종춘"을 발명,

농기참장으로 승진하였다. 1970년 악양시 북구 비서로 전보되었다가, 1977년 시문화관 간사로

임명되었다. 1978년 호남성 역사연구소 고대사연구인원으로 전보되었고, 1977년 전국

청년상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85년 전국총공회 자학성재(自學成才)로 금메달를 획득하였고,

1988년 호남성 우수사회과학원전문가라는 칭호를 받아 부소장·부연구원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염황문화연구소소장·연구원 및 호남성염황문화연구회회장·호남중국고대사연구회부이사장

·중국한민족학회부회장을 맡고 있다고 한다.

 

이미 《염황원류사(炎黃源流史)》·《상원류사(商源流史)》·《진조원류사(秦趙源流史)》·

《하원류사(夏源流史)》·《남만원류사(南蠻源流史)》·《동이원류사(東夷源流史)》·《백월원류사

(百越源流史)》·《초원류사(楚源流史)》·《중원고국원류사(中原古國源流史)》·《주원류사

(周源流史)》·《한원류사(漢源流史)》·《초멸국고(楚滅國考)》등이 있다.

공저로 《악양루기(岳陽樓記)》가 있으며, 《중국제왕대전(中國帝王大典)》·《중화성씨통서

(中華姓氏通書)》를 주편했다.

출판한 저술로 21부의 학술 전저가 있고, 발표된 논문만도 350편, 1천여 만 자에 달한다.

1993년 부랑운·양백 등 30여 명의 교수가 장춘에서 "동북하광악연구회(東北何光岳硏究會)를

만들고, 아울러 《농민사학가하광악(農民史學家何光岳)》이란 책을 썼다.

1998년 11월 2일 양문충·나석현·유인상 등 260여 명이 "호남성하광학연구회(湖南城何光岳硏究會)"를

발족시키고 《사학기재하광악(史學奇才何光岳)이란 책을 펴냈다.

 

3. 지리용어 사지(四至)의 이해

 

원래 사지(四至)라는 말은 집이나 토지 등 부동산의 경계를 표시하는 말이었다. 이것이 확대되어

어떤 나라의 강역을 표시하는 데 쓰인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사방 경계에 대한 표시의 뜻으로 사표(四標)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사지(四至)와 같은 말이다. 예를 들어 예날 토지매매 문건을 보면 매매 목적물을 특정하기

위해 사표라는 말이 꼭 들어갔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밑줄 친 부분은 이두로 써 있다.

 

"光緖十六年 庚辰十一月 日 處明文:

右明文事段移置次, 自己買得田在威化面, 下端員奈字行, 東二十七田, 一日耕。四標段, 東車益煥田,

南賣州田, 西車益煥田, 北賣主垈田, 四標分明, 遂如價折則, 錢文一百二十兩, 準計俸上是遣,

本文記段, 都文記中故周爻背頉爲去乎 。日後彼此雜談隅是去等, 持此文記, 貌如告官卞政事。

自筆田一行放賣主 申雲祥 (압)

間人 金守得 (압) "

 

이를 오늘날의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광서 16년 경진 12월 일 ×× 아무개 한테 증서

상기 증서하는 일로 말하면 옮기어 살 요량으로 자신이 산 밭, 위화면(威化面) 하단 둘레

내(奈)자 줄의 동쪽 27 밭 하루갈이이다. 사표(四標)로 말하면, 동쪽은 차익환(車益煥)의 밭,

남쪽은 판 임자(賣主)의 밭, 서쪽은 차익환(車益煥)의 밭, 북쪽은 산 임자(買主)의 터와 밭,

사표를 분명히 해서 값을 정하기는 돈 120량인바 따져서 받아들이고, 원 문서로 말하면 전체

문서 가운데 들기 때문에 꺽자를 쳐서 그 후문에 사유를 기록한다. 이 뒤에 피차 딴 소리하는

구석이 있거든 이 문서를 가지고 고대로 관청에 고소해서 핵변한 일.

자필 밭 한 줄을 판 임자 신운상 수결

중개인 김수득 수결

 

이 고문서는 1백여년 전 우리 선대들이 부동산을 매매하면서 매매 당사자들끼리 작성한

문서를 관에 제출, 관의 인증을 받아 일종의 부동산등기 문서로써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부동산등기부처럼 거래가 될 때마다 덧붙여 나갔다. 매수인을 공란으로 한 것은

일종의 중간의 생략등기가 가능하도록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홍기문, 《리두연구》,

한국문화사, 406쪽 참조)

본문에 가운데 매매 대상을 특정하기 위해 동 · 서 · 남 · 북의 토지 소유자를 명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우리가 사서를 읽을 때는 가끔 사지(四至)라는 말이 나오고 또 팔도(八到)라는 말도

나오는데 합칭하여 사지팔도(四至八到)라고 한다.

《사해(辭海)》에 의하면 사지팔도(四至八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사지팔도(四至八都). 고대의 지지(地志)에서는 "사지(四至)"(동·서·남·북) 혹은 "팔도(八到)"

(동남·서남·동북·서북 네 귀퉁이)를 합해 써서 주·현과의 방위 거리를 표시하였으며, 합하여

사지팔도(四至八到)라 하였다.

원나라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정(四正: 동·서·남·북)을 사용, 사방의 주·현의 지계와의 거리를

표시하여 '某方至某處界幾里'라고 하는 것을 이름하여 사지(四至)라고 하였다.

사정 사우를 합하여 8방의 성관(城關)과의 거리를 표시하여 '某方到某城(關)幾里'라고 하는

것을 팔도(八到)라고 하였다. 지(至)와 도(到)의 구분은 맨 처음 《통전(通典)》에서 보이기

시작을 했고, 팔도(八到)의 표목은 처음으로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에서 보이기

시작하였다. 사지팔도가 연이어서 표시된 것은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모두 일반적으로 지계까지 이르는 거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지·팔도에 대한 확정적 의례(義例: 제작의 요지와 편집격식)를 가지게 된 것은 《대원일통지

(大元一統志)》에서였으나 나중에는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에서 팔도(八到)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주경(州境): 동서 6백 48리 남북 3백 60리

팔도(八到): 서북쪽은 상도까지 3천 5백 30리, 서북쪽으로 동도까지 2천 6백 70리, 동쪽으로

명주까지 2백 75리, 동남으로 태주까지 4백95리, 서남쪽으로 무주까지 390리, 서북쪽으로

항주까지 1백 40리

 

4. 백제(百濟)의 사지(四至)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의하면 백제의 사지를 특히 이지(里至)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백제의 강역을 말하는 것이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필자가 역주한 책에 자세히

언급이 되었다.

백제의 강역에 대해서는 사서마다 표현이 서로 달라 우리에게 많은 혼동을 가져다준다.

그 이유는 중국에서 백제전을 쓰는 조대에 따라 그 강역이 약간씩 증감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① 《후주서(後周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백제는 마한에 속했던 나라요,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자가 대방에 나라를 처음으로

세우니 그 땅의 경계는 동쪽으로 신라에 닿아 있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접해 있으며, 서쪽

남쪽으로는 모두 대해(大海)를 한계로 하였다."라고 하였다.

 

②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땅은 장안의 동쪽, 6,200리 되는 곳에 있다. 동·북쪽은 신라(新羅)에 이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은 바다를 건너 왜국(倭國)에 이르고, 북쪽은 바다를

건너 고구려(高句麗)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③ 《태평환우기(太平?宇記)》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나라는 동서가 4백 리요, 남북이 9백 리이다. 신라(新羅)와 접해 있고, 북으로

고구려(高句麗)와 1천여 리 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대해(大海)를 한계로 하여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는데 소해(小海)의 남쪽에 처해 있으며,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바로

왜국(倭國)이다.(其國東西四百里, 南北九百里。接新羅, 北距高麗千餘里, 西限大海, 過海至越州,

處小海之南, 南到海卽是倭國。)

 

자료 ②를 보면 백제의 서쪽에 있는 월주(越州)가 그 강역에 포함되는 것으로 볼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데 반하여 자료 ③을 보면 월주(越州)나 왜국(倭國)은 전후의 이런저런 수식어로

인해 문리상으로 백제의 강역으로 판단하기에는 어렵게 여겨진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제2장 백제의 위구격토(魏寇擊退)와

해외식민지(海外植民地) 득획(得獲)이라는 장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선 역대 이래로 바다를 건너 영토를 둔 자는, 오직 백제의 근구수왕(近仇首王)과

동성대왕(東城大王)의 양대이다. 동성왕(東城王) 때는 근구수(近仇首) 때보다 더욱 광대하였던

고로, 《구당서(舊唐書) · 백제전(百濟傳)》에 백제의 지리를 기하여 가로되, '西渡海至越州,

北渡海至高麗, 南渡海至倭。'라 한바, 월주(越州)는 금 회계(會稽)니, 회계 부근이 모두 백제의

소유이었나니,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고도를 환(環)한 수천리가

다 백제지(百濟地)라 함이 이를 가리키는 것이요, 고려(高麗)는 당인(唐人)이 고구려(高句麗)를

칭한 명사니, 고구려의 국경인 요수(遼水) 이서 - 금 봉천(奉天) 서부가 다 백제의

소유이었나니, 《만주원류고(滿州源流考)》에 금주(錦州)·의주(義州)·애훈(愛?) 등 지(地)가

다 백제라 함이 이를 가리킨 것이요, 왜(倭)는 금 일본(日本)이니, 상인(上引)한 《구당서

(舊唐書)》의 상 양구에 의하면 당시 일본 전국이 백제의 속국이 되었던 것이 무의(無疑)

하니라."라고 하였다.

이 책에 대한 주석을 한 이만열 교수는 문맥상으로 고구려와 월주와 고구려와 왜가 백제의

소유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신채호 저·이만열 주석,《주석조선상고사(注釋朝鮮上古史)》

하, 형설출판사, 320쪽 각주 915 참조)

 

과연 이만열 교수의 주석대로만 해석해야 하는가? 신채호 선생의 해석과 똑같은 주장을 한

청나라의 학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독자들도 새삼 놀라울 것이다.

그는 바로 《계동록(啓東錄)》이라는 책을 쓴 임수도(林壽圖)라는 사람이다. 필자는 그 사람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는데 이번에 윤내현 교수가 쓴 《한국열국사연구(韓國列國史硏究)》

라는 저서를 읽던 중, 백제가 요서를 경략한 증거로 중국의 각종 사서를 열거한 가운데

필자가 지금까지 몰랐던 《계동록(啓東錄)》이란 책 이름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언제인가 필자가 수집한 길림문사출판사에서 이주전 교수 주편으로 펴낸 장백총서

(長白叢書) 가운데《송막기문(松漠紀聞)》 등과 합철 된 자료였던 것으로 생각되어 확인해

보니 거기에 문제의《계동록(啓東錄)》이 들어 있었다. Ssreader.com을 통해 수집한 매우 얻기

어려운 자료이다.

 

임수도(林壽圖)의 주장은 이렇다. 아마 《구당서(舊唐書)·백제전(百濟傳)》에 근거를 두고,

"동북으로 신라(新羅)에 이르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왜국(倭國)에 이르고,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려(高麗)(고구려)에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고구려·왜국인을 겸유(兼有)하고, 역시 그 중간에 중국인(中國人)도

있었다.(東北至新羅, 西到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故兼有新羅、高麗、倭國人,

亦間有中國人。"라고 하였다.(이수전 주편, 《계동록(啓東錄)》, 길림문사출판사, 172쪽 참조)

 

그러나 이 글을 읽어 보면 백제의 이웃에 신라가 있고, 바다를 격하여 월주·왜국·고구려가

있었기 때문에 그 나라에는 신라·왜국·고구려 사람들이 있고, 간간히 중국 사람도 있어서

나라의 구성원이 다양하다는 뜻이지 이들 나라를 식민지로 했다는 의미로 확대해석할 수 없는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고 본다. 물론 겸유(兼有)라는 것은 겸해서 소유한다, 차지한다는 뜻도

있으나 백제가 고구려와 한 때 자웅을 결한 일은 있지만 고구려를 신속시킨 일도 없으며,

이런 맥락에서 보면 월주나 왜국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한편,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월왕 구천의 고도를 환한 수천리가 다 백제지"라는 근거는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지만, 거기에는 이런 기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문헌통고(文獻通考)》(원나라 마단림이 지은 책, 필자주)에 당나라(진나라의 오기, 필자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약유(略有)하였을 뿐만 아니라 백제도 요서(遼西) 진평(晉平)을

약유(略有)했다.(《文獻通考曰: 唐時高舊麗旣略有遼東, 百濟亦略有遼西晉平。)"는 기록에 대한

편자의 안어(案語)에서, '삼가 생각건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가 끝날 때까지

중국을 침략한 적이 없었던 즉 요서(遼西)와 월주(越州)가 어떻게 백제에 의해서 경략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신당서(新唐書)》·《문헌통고(文獻通考)》에 그렇게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에 이르기를, '고구려 백제가 전성할 때 강병

백만이 남쪽으로 오·월(吳越)을 침입하고, 북으로 유(幽)·연(燕)·제(齊)·노(魯)를 뒤흔들어 중국의

커다란 두통거리였다.'라고 엮은즉 요·월(遼越)이 일시적으로 점유된 것은 의심할 바 없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리 역사에 유독 그러한 사실이 누락되고 말았다."라는 기록이 있기는 한데 아마

이를 두고 무엇인가를 착각하신 듯하다.

 

5. 하광악(何光岳)이 말하는 왜지역에 있던 백제의 후국(侯國)

 

이제 하광악의 주장을 들어 보기로 하자.

"서기 5세기 때, 백제의 도성이 일찍이 고구려에 의해 함락을 당하자, 일단의 백제인들이

남쪽으로 대마도 해협을 건너 일본 구주섬(九州島)으로 옮겨 들어가서, 지금의 웅본(熊本) 지구와

좌하(佐賀)·장기(長崎) 등 복강현(福岡縣) 서부와 서로 이웃해 있는 지역인 비지(肥地)에서

살았다. 비지(肥地)는 또 다른 이름으로 비전(肥前, ひぜん)·비후(肥後, ひご )라고 하였다.

일본인들은 옛날에 비인(肥人)을 훈독하여 박인(?人, 구마노-히도, 필자주)이라고 하였으니,

《만엽집(萬葉集)》같은 데서 옛날에 비인(肥人)을 훈독하여 "박인((?人)"이라고 하였는데, 곧

백제의 8대성의 하나인 백성(?姓)이다. 백(?) · 박(?)은 고대 맥인(貊人)의 후예로 생각된다.

비인(肥人)이 비후(肥侯)를 건립하였으니 백제의 후국(侯國)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스카(飛鳥)지구 다까(高)시군에서 살던 백제 이민 소가씨(蘇我氏)는 그 원조가 바로

춘추시대 소국(蘇國)의 후혜로서 하남(河南)을 거쳐서 백제(百濟)로 건너갔다가 다시

일본(日本)으로 전입하였으며, 일본국왕 대신이었던 왕인(王仁)도 전국시대 제국(齊國) 왕족의

후예로, 산성일대(지금의 경도지구)에 정착하여 살았다. 오늘날의 일본에 부씨(夫氏)가 있는데

바로 부여(夫餘) 왕족의 후예이다.(하략) ."라고 하였다.

 

김석형이라는 북한 학자가 쓴 고대 한일관계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7세기 이후의 지방 국명에는 쯔구젠(筑前)·쯔구고(筑後)의 두 개 지방 국이 있는데 이것은

쯔구시(筑紫)를 두개로 갈라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5세기경까지 소급해서 큐슈의 이름을

쯔구시(筑紫, つくし)라고 했다는 근거는 없다. 이 시기의 큐슈의 이름은 모르는 것이다.

후꾸오까 현의 서쪽으로 인접하고 있는 지대는 히젠(肥前)·히고(肥後)의 두개 지방국으로

불리웠고 오늘의 시가, 나가사끼, 구마모도의 3현을 포괄한다.

하나로 통털어 부를 때는 이를 비로 부르며, 이를 《일본서기(日本書紀)》나 《고사기(古史記)》

에서는 히로 훈독하고 오늘에도 그렇게 읽는다. 그러나 비인(肥人)은 원낙 "히노히도"가 아니라

고훈에는 "고마노-히도"였다고 한다. 따라서 앞서 쓴 바 비인(肥人)은 고마히도 즉 고마 사람인

것이며 비국(肥國)은 고마의 나라, 고마 사람의 나라였다.

 

고마는 일본 고문헌들에서 고구려 또는 고려에, 그리고 구다라를 백제에 해당시키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고마는 백제다. 즉 큐슈 섬의 서쪽 부분이 고마의 나라, 백제의

나라로 야마도 사람들이 부르던 때가 있었다고 본다. 이는 야요이시대 이래 이곳이

한국으로부터 큐슈로 통하는 서쪽 항로에 해당하며 마한 계통 사람이 많이 정착했던 곳이요,

5세기의 후나야마 고분의 주인공의 가장 가까운 통치지역이기도 하였다.(김석형 지음,

《고대한일관계사》, 한마당, 304~305쪽 참조)

 

6. 백제가 진(晉)나라 때 요서 진평을 약유하였다는《송서(宋書)》 등의 기록은 도대체

   무엇인가?

 

위와 같은 백제의 요서 경략 기사는 《송서(宋書)》 뿐만 아니라 남북조시대 남조의 여러

나라에 들어 있다. 본란을 통해서도 여러 번 언급되었으므로 중언부언하지 않겠다.

문제는 《남제서(南齊書)》의 사서 중 고구려와 백제 관련 기록에 관한 한 쪽 분량의 기록이

완전히 깎여 나갔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당나라 때《진서(晉書)》를 비롯해서《북제서(北齊書)》

등 7서(書)의 편찬에 직·간접으로 관여한 당태종 이세민의 치졸하기 짝이 없는 역사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재야사학자 문정창 선생은 그의 《일본고대사연구(日本古代史硏究)》에서 《남제서(南齊書)》

결락 부분과 관련, "백제군이 북위군을 격파하기까지의 상세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을 머리

부분인데 그 1권이 당태종과 그 어용학자들에 의해 삭제되어 버렸다고 하였다.

그와 같은 사실은 중국의 사서 《사원(辭源)》은 "南齊書, 唐代已佚一卷。"이라 기록하였다고

새로운 사실을 폭로했었다. 그는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중화민국 대북 상무인서관에서

1958년에 간행된 《사원(辭源) 정통합편(正統合編)》, p.239이라고 정확하게 쪽수까지 밝혔다.

(문정창, 《일본고대사연구(日本古代史硏究)》, 인간사, 115쪽 참조)

그런데 현재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상무인서관 《사원(辭源)》합정본(合正本)은 1998년

수정판이라서 그런지 《남제서(南齊書)》 관련 항목에 이런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다.

다만, 목덕전(穆德全)이 쓴 《이십오사강의(二十五史講義)》에서는 "남제서는 나중에 1권이

망일되었고, 현재 《이십사사(二十史史)》에 들어 있는 《남제서》는 59권만 있는데 없어진

1권은 아마도 소자현(蕭子顯)이 원래 썼던 서록 1권이 아닌가 한다." 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문정창 선생의 주장과 같이 백제군이 북위군을 격파하는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주장과는

다르지 않나 생각된다.(목덕전, 《이십오사강의(二十五史講義)》, 하남대학출판사, 4쪽 참조)

 

필자는 최근 《요동지(遼東志)》 백제관련 항목에도 "百濟晉時略有遼西晉平。"이란 기록이

있음을 확인했다. 이같은 사실은 이미 명나라 때까지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사실인데 오늘날

중국 학자들은 백제가 무슨 힘이 있어 중국의 영토를 침범했겠느냐면서 아예 그런 주장 자체를

일축해 버리고 있다.

가정연간에 발간된 《요동지(遼東志)》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저들은 백제가 요서 진평을 약유했다는 기록이 들어 있는 양나라 소역이 그린《직공도(職貢圖)》

가 불타버린 것을 기화로 송나라 때 다시 모사하면서 백제사신도(백제국사)와 관련된 기술에서

"百濟"를 "樂浪"으로 슬쩍 바꿔치기를 했다. 저들의 낙랑군이 어떻게 같은 군현을 약유했다는

것인지 꾀를 쓴다는 것이 죽을 꾀를 써서 역사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고 모든 사람을 잠깐 속일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아래 사진을 잘 보시면 그들의 치졸한 방법이 과연 어떠했던 것인지 확연히 알 수 있다.

《직공도(職貢圖)》란 무엇인가. 이는 원래 남북조시대 양(梁)나라의 화가요, 곧 양나라

원제(元帝)이기도 한 소역(蕭繹)(508~555)이라는 사람이 그렸던 그림이었다.

원래는 35개국의 사신이 중국 양나라에 사절로 와서 조공을 한 사절들의 모습을 그렸는데

현재는 12개국의 사신의 그림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직공도(職貢圖)》는 소역(蕭繹)이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있을 때 그렸던 그림이라는

말이 있다. 양나라 태청 3년(549) 후경(侯景)의 난군이 건강(建康)을 쳐서 함락시켰을 때

양무제는 후경(候景)으로부터 자살을 강요당했는데 그 경위는 이렇다.

소역은 552년에 왕승변(王僧辨) 등을 보내여 후경을 토벌케 하고, 같은 해 황위를 이었다.

555년에, 서위군(西魏軍)의 강릉(江陵) 공격으로 수도는 함락되자 소역은 피살되기 직전에

궁정에 소장된 명화 및 각종 전적 24만 권을 전부 불태워 없애버렸다.

서위(西魏)의 병사들이 타고 남은 잿더미 속에서 가까스로 구해 낸 4천축의 잔권 중에는 바로

뒷날까지 유전되어 왔던 그 나머지 12개국의 사신의 모습을 담은《직공도(職貢圖)》가 들어

있었는데 나중에 이를 기초로 여러 왕조에서 모사하였다고 한다.

위에서 보여준 그림도 그 가운데 하나로 현재 중국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사람이 일생동안 알아야 할 100폭의 중국명화(人一生要知道的中國名畵)》, 중국화평출판사,

25~27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