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通政大夫中樞院議官全州李公周國之墓

2018. 1. 9. 10:18알아두면 조은글

 

 

 


 

通政大夫中樞院議官全州李公周國之墓

 

淑夫人安東孫氏祔

 

& 墓碣銘 <幷序>

 

公諱周國 字華範 系國姓德陽君諱岐十▣代孫也 考諱漢謙 妣晉州姜氏 命貴女 以純祖肅皇帝 丙戌四月二日生公 公生有异質 早喪父 能知哀戚 及長 理産潤屋 賙窮恤乏 庤書育英 夫日齋潔不寐 嫁娶 夫貧無以嫁娶者 弟姪若壻 亦皆分田資生 事母盡志物之養 及喪 情文備至 誠禮無缺 恭兄友弟 睦族和隣 甞戒子孫 曰勿見利而生苟且之念也 一日盥櫛更衣 咸萃家人曰吾命止在今日 死生常也 庸何傷乎 但願若曺明農劬書 佃租必廉 莫貴於積善 難久者富 語畢而終 高宗皇帝丙午四月十六日也 壽八十一 金海郡柳下面 春花洞 戍原 卽公墓也 公筮仕孝陵參奉 壽陞通政大夫 中樞院議官贈 淑夫人 東萊鄭佑璉女 淑夫人 安東孫進鐸女 是公前後配 孫氏 有婦德 慶鉉 弘鉉 曺正 淳妻 皆其所生也 慶鉉 男承驥 女魚 命信 許磷 弘鉉男 承秀 承達 女金奎凡 盧禹鉉 乙林 普林 承驥出正林 承秀出餘皆幼 普林從師艮翁專精斯學 其進不可量 公不瀛之報 盖在斯也 以徐處士柄甲所爲公狀走千里謁余 鑱堅之文 有年所 今又踵門而求 顧余非不朽人 亦不忍終辭 銘曰

 


 

軒冕勳業

 

人知艶稱

 

事有終始

 

久矣鮮能

 

孔曰書云

 

孝友爲政

 

▣公▣▣

 

曰國是正

 

積善受報

 

錫類有慶

 

春花之阡

 

足法治平

 


 

首陽吳震泳

 

崇祿大夫 前判敦寧院事 海平尹用求書

 

丁卯八月 日

 


 


 


 


 


 

통정대부 충추원 의관 전주 이씨 이공 주국의 묘.

 

숙부인 안동 손씨 부장.

 

묘갈명(墓碣銘) 병서

 


 

공의 휘는 주국(周國), 자는 화범(華範) 세계는 조선 국왕의 성씨 덕양군(德陽君) 위 기(岐)의 십 몇 대 손이다. 아버지의 휘는 한겸(漢謙)이며, 비는 진주(晉州) 강씨(姜氏) 명귀(命貴)의 따님이니, 순조 숙황제(純祖肅皇帝) 병술년(1826) 4월 2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나면서 특별한 자질을 지녔으니, 일찍 아버지를 여이고 슬퍼할 줄을 알았다. 장성하여서는 재물을 운용하여 집안을 윤택하게 하였으며, 가난한 사람을 구휼하였고, 서책을 구입하여 인재를 양육하였다. 아버지의 기일이 되면 재결(齋潔)하며 잠을 자지 않았다. 장가 갈 적에 가난하여 장가가지 못한 자는 아우와 조카, 사위들에게도 모두 땅을 나누어서 살아 갈 수 있게 하였다. 어머니를 섬길 적에는 마음과 물질적으로 잘 봉양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만나서는 정성과 격식을 갖추기를 지극정성으로 하여 예모에 흠결이 없었다. 형을 공경하고 아우에게 우애가 있었고 친족과 이웃에게 화목하였다. 일찍이 자손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익을 보고 구차하게 얻으려는 생각을 가지지 말라.”라고 하였다. 어느 날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옷을 갈아입고서는 집안사람을 모두 모아놓고 말하기를 “내가 죽을 날은 바로 오늘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하늘이 정한 이치이니 어찌 상심할 것이 있겠는가. 다만 원하건대, 너희들은 농사에 힘쓰고 열심히 책을 읽으며, 소작인에게는 반드시 세곡을 작게 거두어라. 선을 쌓는 것보다 귀한 것은 없으니, 다스리기를 오래하는 자는 부귀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생을 마감하였으니 고종황제(高宗皇帝) 병오년(1906) 4월 16일이었다. 누린 수는 81세였다. 김해군(金海郡) 유하면(柳下面) 춘화동(春花洞) 술좌(戍座) 언덕이 바로 공의 묘소이다. 공은 처음 벼슬하여 효릉 참봉(孝陵參奉)이 되었고 장수하여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추증되었다. 숙부인은 동래(東萊) 정우련(鄭佑璉)의 따님이고, 또 다른 숙부인은 안동(安東) 손진탁(孫進鐸)의 따님이다. 이 분은 공의 전후 배필이다. 손씨 부인은 부인의 덕성을 지녔다. 경현(慶鉉), 홍현(弘鉉), 조정(曺正), 순처(淳妻)는 모두 손씨 부인의 소생이다. 경현(慶鉉)의 아들은 승기(承驥)이며, 따님은 어명신(魚命信), 허린(許磷)에게 시집갔다. 홍현(弘鉉)의 아들은 승수(承秀), 승달(承達)이고 따님은 김규범(金奎凡), 노우현(盧禹鉉)에게 시집갔다. 을림(乙林)과 보림(普林)은 승기(承驥)가 낳았고, 정림(正林)은 승수(承秀)가 낳았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보림(普林)은 간옹(艮翁)을 스승으로 삼아 배워 유학의 학문에 정밀하였으니, 그의 진보를 헤아릴 수 없다. 공이 남기신 보답이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서 처사(徐處士) 병갑(柄甲)이 지은 공의 행장을 가지고 천리를 달려 나를 찾아와서 단단한 돌에 새길 글을 부탁한 지가 여러 해 되었다. 지금 또 집에 찾아와 부탁하였다. 돌아보니 내 후대에 남길 솜씨를 지닌 자가 아니지만 또한 차마 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명에 이르기를,

 


 

軒冕勳業 헌면1)에 공훈을 이루었으니

 

人知艶稱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칭찬하였네

 

事有終始 일은 시작과 끝이 있지만

 

久矣鮮能 오래도록 능한 이 드물었네

 

孔曰書云 공자와 서경에

 

孝友爲政 효도와 우애로 정사를 한다 하였네

 

▣公▣▣

 

曰國是正 국가가 올바르게 되었다네

 

積善受報 선을 쌓으면 보답을 받으니

 

錫類有慶 석류2)의 경사가 있네

 

春花之阡 봄에 꽃 묘도을

 

足法治平 잘 닦아서 길이 보전하네

 


 

수양(首陽) 오운영(吳震泳)은 명을 쓴다.

 


 

숭록대부(崇祿大夫) 전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해평(海平) 윤용구(尹用求)는 쓰다.

 

정묘년(1927) 8월 어느 날.

 

 墓碣銘 <並序>

 

距駕洛古都西二十里 秋月山下 有里曰德亭 有君子人曰鳳亭李公 始余與公之次子普林濟卿友也 嘗入其境而問焉 則無少長 譚公仁孝德美 必津津若古事 及造其室而觀焉 則豊貌偉儀 氣溫語和 稱其爲寬厚長者 心固艶仰之 旣而與濟卿 結爲通家 往來觀聽者久 益信其淳心實德 爲今世所罕覯也 公旣歿 濟卿錄公羣行 求余銘其阡 則皆余耳熟而目稔者 豈敢辭 公諱承驥 字伯善 李氏 出自中宗王子德陽君岐 德陽之孫 龜原君 眺抗䟽爭 光海斁倫 龜原之玄孫 資憲春興 始南徙 於公間六世 曾祖漢謙 祖周國 參奉壽通政 考慶鉉 號農隱 妣淅江彭氏 儀俊女 甚有閨範 石農吳公 銘其墓 公生而雅重 有至性 課學勤而當敏 事親篤 有恩愛 父嘗患疝而劇 醫工殫技 將受療洋院 院者辭以難治 公積誠 乞哀月餘 始許試以術 經歲而克完 彼乃歎且賀 曰非以術也 誠所佑也 前後遭艱 持制甚苦 比終喪不近腥葷 毁瘠幾不支 長老及知舊 多迭勸從權 終不聽 晨夕哭墓 數里山頂 每冬雪急雨 里人見其累累然顚仆號哭  爲治路而表曰孝子路 盖後喪也 公年已踰五十 論者咸太息 以爲可補世敎 先是 公家以富厚慈善 聞於鄕里 凡竆乏之告者 假貸之求者 羇旅之託者 日塡於門 而公應之 各當其意 見人有憂惄然 若己病 故族戚知舊 待以嫁娶喪葬者多 而雖或見欺負累致窘跲不悔也 縱濟卿遊學大方 因以結納當世賢士友 則必豊贐裝欵 禮數以迎送之 家居謹禮 制嚴身敎 日必冠帶 拜廟應賓儀度秩如也 性和平坦夷 若無崖岸 而憤世慨俗意炳如也 雖世禍日迫 毅然持古義 不少撓 一方衣冠之族 多倚而爲重 公遽病且歿 迺回甲之歲 乙酉四月廾九日也 其病也齎藥問疾者 繮屬於路歿 而走哭相紼者 亦如之 余觀世之以善及人而見稱於人者 率多揚聲著色有意爲名 而無實以繼之 故始雖皎然 終必索然 若公之循常率性 無意爲名 而人自悅服者 豈非眞誠之入人深故耶 昔歐陽公表連處士墓 以達應山人之思 使公而遇歐陽其有兩處士乎 始葬華山先兆內 後遷于村左子原 配宋孺人祔焉 宋氏淸州人 殷昊女 治家有法 生先公五年 歿後公三年 三男乙林 普林 芳林 四女適宋炅復 曺快錫 柳祺鉉 申同澈 乙林 四男載燮 重燮 永燮 根燮 女金相贇 河丁逵 盧龍鉉 普林 三男 陽燮 雨燮 起燮 女曺增玒 芳林 一男 春燮 宋男裕進 裕坤 裕明 曺男世烈 渭烈 京烈 柳男 浩健 浩成 申男 相出 相兌 載燮男興圭 德圭祥圭 重燮男忠圭 永燮男大圭 陽燮男粲圭 哲圭 餘幷幼 銘曰

 


 

薰然而襲人者幽蘭之香耶

 

溫然而著外者璞玉之章耶

 

蘭可萎 玉可碎 惟德之感人者 終不可忘也

 

有思在鄕 有子式糓 後之人 必有摩挲於斯 而如其人之覿也

 


 

公歿後七年辛卯仲冬花山權龍鉉撰

 


 

墓碣銘 <並序>

 

 

 

가락국(駕洛國)의 고도(古都) 서쪽으로 20리 거리, 추월산(秋月山) 아래 마을을 덕정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군자가 바로 봉정(鳳亭) 이공(李公)이다. 처음 내 공의 둘째 아들 보림(普林) 제경(濟卿)과 벗이 되었다. 언젠가 그 경내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물으니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들 공의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덕스럽고 훌륭한 점을 칭찬하면서 반드시 가득히 고사와 같이 하였다. 그 집에 나아가 관찰하니 넉넉한 외모와 의젓한 모습 그리고 온화한 기운과 조용한 말씨는 넉넉하고 후덕한 장자(長者)가 되기에 알맞았으므로 내심 진실로 아름답게 여기고 흠앙하였다. 이윽고 제경과 우의를 맺고 통가(通家)하여 왕래하면서 덕을 관찰한 것이 오래되었으니, 더욱 그의 순박한 마음과 성실한 덕성은 오늘날에 보기 드물다는 것을 알았다. 공이 이미 돌아가시고 제경이 공의 여러 행적을 기록하여 나에게 공의 묘갈명을 부탁하였는데, 모두 내가 귀로 익숙히 듣고 눈으로 목격한 것이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공의 휘는 승기(承驥)이고 자는 백선(伯善)이며, 이씨이다. 중종(中宗)의 왕자 덕양군(德陽君) 기(岐)에서 나왔다. 덕양군의 손자 귀원군(龜原君) 조(眺)가 항소(抗䟽)하여 광해군(光海君)이 윤리를 무너뜨린 것에 대해서 쟁론하였다. 귀원군의 현손 자헌대부(資憲大夫) 춘흥(春興)이 처음 남쪽으로 이사하였으니, 공에 있어서는 6대 조이다. 증조는 한겸(漢謙)이고, 조부는 주국(周國)이니 참봉(參奉)으로 장수하여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아버지는 경현(慶鉉)이니 호가 농은(農隱)이다. 비는 석강(淅江) 팽씨(彭氏) 의준(儀俊)의 따님으로 매우 규방의 범절이 있었다. 석농(石農) 오공(吳公)이 그의 묘지명을 기록하였다.

 

 공은 태어나면서 아중(雅重)하였으며, 지극한 품성을 지녔다. 학업은 부지런히 하였고 민첩하였으며, 어버이 섬기기를 독실하게 하여 하늘에서 은혜를 받는 경우가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이 산증을 심하게 앓았는데 모든 의술을 다 동원하여 치료하였지만 고치지 못하였다. 장차 서양 의원에게 치료를 받으려 하였는데, 의사가 고치기 어렵다는 말로 사양하였지만 공이 정성을 다하여 애걸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비로소 치료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한 해가 지난 뒤에 완치되었는데, 의사들이 도리어 탄식하고 축하하면서 의술로 치료한 것이 아니라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이라고 말하였다. 전후로 부모님의 상을 당하였을 때 자신을 지키는 것을 매우 고통스럽게 하였으니, 삼년상을 마칠 때까지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아 야위어 거의 지탱하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노인과 지인들이 대체로 번갈아 가며 임시방편으로 상례를 거행할 것을 권하였지만 끝내 듣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묘소에서 곡하였는데, 수 리에 있는 산 정상에 늘 매년 겨울에 눈이 내리고 소나기가 와도 왕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가 계속해서 넘어지며 통곡하는 것을 보고 길을 단장하여 효자로(孝子路)라고 표시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는 공의 나이 이미 50세가 넘었는데, 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크게 한숨을 쉬면서 세상의 교화에 도움이 될 만하다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의 집안은 부유하고 인심이 좋은 것으로 향리에 소문이 났다. 무릇 궁핍하여 도와주기를 청하는 자와 돈을 빌리는 자, 나그네살이를 부탁하는 자가 날마다 문을 가득 메웠지만 공이 응대하여 각각 구하는 사람의 뜻과 같이 해주었고, 사람들이 근심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신의 병처럼 여겼다. 그러므로 친척과 지인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장사를 치를 때에 연락하는 자가 많았으니, 어떤 때에는 속임을 당하여 여러 번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제경이 큰 고을로 유학을 가서 당대의 어진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이들에게 반드시 넉넉히 노자를 주고 정성스럽게 선물하여 예법에 맞게 맞이하고 전송하였다. 집안에서 거처할 때면 삼가고 예를 갖추어 절도 있고 엄정하게 하여 날마다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가묘에 절하였고, 빈객을 응접할 때면 매우 절도가 있었다. 성품은 화평하고 온화하여 끝이 없는 듯하였지만 세속이 변해가는 것을 분개하고 탄식하여 마음에 항상 밝게 하였으니, 비록 세상의 재앙이 날로 임박하더라도 의연히 고의(古義)를 지니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으니, 온 고을에 의관을 갖춘 이들이 많이 의지하고 중하게 여겼다. 공이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바로 환갑 때로, 을유년(1945) 4월 29일이었다. 공이 병들었을 때 약을 가지고 병문안 하는 자가 길에 끊어지지 않았고, 돌아가시자 달려가 통곡하며 상여줄을 잡는 자도 이와 같았다. 내 세상에 선으로 남을 도와주고 남에게 칭찬을 받는 자를 보았지만 대체로 소문을 내어 명성을 날리는데 뜻을 두었고 실제로 계속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므로 시작할 때에는 비록 환하게 빛났지만 끝에 가서는 쓸쓸하였다. 공과 같은 이는 변하지 않는 하늘의 법도를 따르고 본성대로 하여 명성을 내는 데에는 뜻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스스로 좋아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 어찌 진실되고 정성스러움이 사람에게 깊이 들어가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 구양 공(歐陽公)이 연 처사(連處士)3)의 묘소를 징표하여 응산인(應山人)의 생각을 드러내었으니, 공으로 하여금 구양공을 만나게 하였더라면 아마 두 처사가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화산(華山) 선영 내에 장사지냈다가 뒤에 마을의 왼쪽 자좌(子座) 언덕으로 이장하고 배위 송 유인(宋孺人)를 부장하였다. 송 씨(宋氏)는 청주(淸州) 인이니 은호(殷昊)의 따님이다.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태어난 것은 공보다 5년 먼저이고 돌아가신 것은 공보다 3년 뒤였다. 아들 셋을 낳았으니, 을림(乙林), 보림(普林), 방림(芳林)이고, 딸 넷을 낳았으니, 송경복(宋炅復), 조쾌석(曺快錫), 유기현(柳祺鉉), 신동철(申同澈)에게 시집갔다. 을림(乙林)은 아들 넷을 낳았으니, 재섭(載燮), 중섭(重燮), 영섭(永燮), 근섭(根燮)이며, 달은 김상윤(金相贇), 하정달(河丁逵), 노용현(盧龍鉉)에게 시집 갔다. 보림(普林)은 아들 셋을 낳았으니, 양섭(陽燮), 우섭(雨燮), 기섭(起燮)이며, 딸은 조증강(曺增玒)에게 시집갔다. 방림(芳林)은 아들이 하나이니, 춘섭(春燮)이다. 송경복의 아들은 유진(裕進), 유곤(裕坤), 유명(裕明)이며, 조쾌석의 아들은 세열(世烈), 위열(渭烈), 경열(京烈)이고, 유기현의 아들은 호건(浩健), 호성(浩成)이며, 신동철의 아들은 상출(相出), 상태(相兌)이며, 재섭(載燮)의 아들은 흥규(興圭), 덕규(德圭), 상규(祥圭)이며, 중섭(重燮)의 아들은 충규(忠圭)이며, 영섭(永燮)의 아들은 대규(大圭), 양섭(陽燮)의 아들은 찬규(粲圭), 철규(哲圭)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명에 이르기를,

 


 

薰然而襲人者幽蘭之香耶 훈훈하게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은 난초의 향기가 아니랴

 

溫然而著外者璞玉之章耶 온화하게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옥의 광채가 아니랴

 

蘭可萎 난초는 시들고

 

玉可碎 옥은 부서지네

 

惟德之感人者 오직 덕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을

 

終不可忘也 끝내 잊을 수 없네

 

有思在鄕 그의 살던 곳을 그리워 하니

 

有子式糓 자식은 선한 성품 물려받았네

 

後之人 후인 가운데

 

必有摩挲於斯 반드시 이 비석을 어루만질 자 있으리니 

 

而如其人之覿也 그 사람과 같음을 보리라

 


 

공이 돌아가신 지 7년 뒤 신묘년(1951) 중동(仲冬)에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은 찬하노라.

 

& 友斯契案序

 

五倫之有朋友 如五行之有土 非土 五行無以用 非友 五倫無以明 故其序 雖居於末 而其道則實貫於五者 友之義 顧不重歟 雖然 友之道亦多矣 有道義者焉  有市井者焉 道義之友 所講者 在於彜倫道德之重 而講明之 而躬行之 而提唱之 故人倫以明而世道以扶 市井之友 所趨者 在於勢利權謀之末 而陷溺之 而誘惑之 而煽亂之 故人倫以乖而世道以敗 所關 豈細故哉 顧今西潮日驅 所謂社會團軆之說 充滿一世 乖人倫 敗世敎之類 日新月盛 則是皆市井之友爲之倀也 然則居今之世 有意於明人倫 扶世敎 則必也先明友道 而講明於道義者歟 金官之長有坊 有數十人士 醵金設契 爲春秋相會之資 而名其帖曰友斯 蓋取孟子善士斯友善士之義也 吾知諸公之取義 必以道義相期 而市井爲戒也 則明人倫 扶世敎之責 亦不可以不思也 其會必於李氏華山齋者 以李氏孝友敦睦之風 有可以爲主者也 其義亦美矣哉 余特有感於斯 故爲之言如此 若其䂓約節目之詳 必有諸公之所講定者 非余所敢贅云

 


 

赤豕梧秋花山權龍鉉序

 


 

 우사계안서(友斯契案序)

 


 

오륜(五倫) 가운데 붕우유신(朋友有信)이 있으니 오행(五行)에 토(土)가 있는 것과 같다. 토가 아니면 오행에 쓰임이 없고, 벗이 아니면 오륜은 밝힐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순서가 비록 끝에 서술되어 있지만 그 도는 실로 다섯 가지를 관통하는 것이니 벗의 의리가 중요하지 않은가. 비록 그렇지만 벗의 도리는 또한 많다. 도의(道義)로 벗을 사귀는 경우가 있으며, 시장에서 어울리며 벗하는 경우가 있다. 도의로 사귄 벗은 강론하는 것이 인륜과 도덕의 중한 것에 있으므로 강론하여 밝히고 몸소 실천하며 앞에서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륜이 밝아지고 세도가 부지된다. 시정에서 사귄 벗은 추구하는 것은 말단적인 이익과 권모술수에 있으므로 함정에 빠뜨리고 유혹하며, 선동하여 어지럽힌다. 그러므로 인륜이 무너지고 세도가 사라지니 관계 된 것이 어찌 작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돌아보면 지금 서양의 문물이 날로 들어와 이른바 회사니 단체니 하는 말들이 세상에 가득하여 인륜을 무너뜨리고 세교를 사라지게 하는 따위가 날마다 달마다 성행하니 이것은 모두 시장에서 어울리며 벗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인륜을 밝히고 세교를 부지하는 데 뜻을 두는 것은 반드시 먼저 붕우의 도리를 밝히고 도의를 강론하여 밝히는 것일 것이다. 금관장(金官長)의 가계에 수십 인의 선비가 모여서 돈을 갹출하여 계를 만들고 봄과 가을로 서로 모이는 경비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표지에 우사(友斯)라는 명칭을 붙였으니, 대개 <<맹자>>에 “훌륭한 선비라야 훌륭한 선비들과 사귈 수 있다는 뜻을 취하였다.”4) 내 여러 공이 의를 취함에 반드시 도의로 서로 기약하고 시정에서 벗을 사귀는 방도를 경계한다는 것을 아니, 인륜을 밝히고 세교를 부지하는 책임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모임은 반드시 이씨 화산재(華山齋)에서 한 것은 이씨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벗에게는 우애가 있고 이웃에게 돈독한 기풍은 이 모임을 주관할 수 있기 때문이니, 이 뜻은 또한 훌륭하다. 내 특별히 여기에 감격하였으므로 이렇게 기록한다. 계의 상세한 규정과 조항은 반드시 여러 공이 의론하여 정한 것이 있으니, 내가 감히 쓸데없이 말 할 것이 아니다.

 


 

적시(赤豕) 7월 화산(花山) 권용현(權龍鉉)은 서문을 쓰노라.

 


 

 

1) 헌면(軒冕) : 수레와 면류관이라는 말로, 관작과 봉록 등 높은 벼슬을 뜻하는데, 《장자》 선성(善性)에 “헌면이 몸에 있는 것은 본래 성명처럼 내 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외물이 뜻밖에 우연히 와서 잠시 붙어 있는 것이다.〔軒冕在身 非性命也 物之儻來寄也〕”라고 하였다.

 


 

 

2) 석류(錫類) : 효자(孝子)의 덕행이 널리 퍼져 후손에게까지 미치는 것을 말한다. 《시경》 〈기취(旣醉)〉에 “효자의 효심이 끊이지 아니하니, 길이 너의 족류(族類)에게 복이 미치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 하였다.

 


 

 

3) 연처사(連處士) : 이름이 순빈(舜賓), 자는 보지(輔之)이며, 응산(應山) 사람이다. 구양수(歐陽脩)가 연처사묘표(連處士墓表)를 지었다.

 


 

 

4) 맹자에……취하였다 : 《孟子 萬章 下》에 “한 지방의 훌륭한 선비라야 한 지방의 훌륭한 선비들과 사귈 수 있고, 한 나라의 훌륭한 선비여야 한 나라의 훌륭한 선비들과 사귈 수 있고, 천하의 훌륭한 선비여야 천하의 훌륭한 선비들과 사귈 수 있다. 천하의 선비들과 사귀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여 다시 위로 올라가 고인(古人)을 논하는 것이니, 그 시를 외고 그 저서를 읽고도 그 사람을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런 까닭에 그 사람이 산 시대를 논하는 것이니, 이는 위로 사귀는 것이다.[一鄕之善士斯友一鄕之善士 一國之善士斯友一國之善士  天下之善士斯友天下之善士 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 하였다.

 

 

통정대부 묘갈명 외(원문)손왕호.hwp


출처 : 고전번역연구소
글쓴이 : 수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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