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측천무후의 신양모첨(信陽毛尖) , 양귀비의 몽정차 (蒙頂茶) [차(茶) 이야기]

2017. 8. 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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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가 즐겨마신 당나라 최고 차(茶) 신양모첨(信陽毛尖)



측천무후가 사랑한 신양모첨.



차(茶)는 물을 만났다. 수(隋)나라가 건설한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를 비롯한 수로를 따라 이동하며 당(唐)나라 때 차는 중국 남쪽의 지역문화에서 대륙 전체의 문화로 확대된다.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한 폐해와 거듭된 고구려 원정 실패로 민심이 떠난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은 수나라를 창건한 문제(文帝)와 동서지간이다. 이들은 중국 내몽고 자치구에 있는 음산산맥(陰山山脈)의 천연요새 무천진(武川鎭) 분지를 중심으로 발호한 강력한 군사집단인 관롱집단(關隴集團)의 맹주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모두 관롱집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나라 최대 정치세력인 관롱집단을 무력화시켜 당나라의 맥을 끊고 주(周)나라를 세운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다.


차로 기력 회복한 측천무후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인 측천무후.



측천무후는 공자(孔子)가 이상향으로 삼았던 고대의 주(周)나라를 표방한 대주(大周)를 창업해 690년 9월 9일 측천금륜대성신황제(則天金輪大聖神皇帝)로 즉위했다. 정식 시호는 측천무후여황제(則天武后女皇帝)지만 말년에 당나라의 황후로 기록되기를 원해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라는 시호도 갖고 있다.

측천무후는 주나라 황제로 16년간 통치했지만 당나라 고종의 황후(皇后) 시절 29년과 황태후(皇太后) 6년을 더하면 50여년간 실질적으로 장기집권했다. 실권을 잃고 노쇠한 이후에도 복원된 당나라 중종의 태상황(太上皇)이 돼 죽을 때까지 위세를 떨쳤다.


측천무후는 당나라 개국공신으로 신흥귀족이 된 무사확(武士)이 관롱집단의 세력가 양달(楊達)의 딸과 재혼해 낳은 둘째딸이다. 측천무후의 본명은 무조(武照)인데 주나라 황제로 즉위하며 자신의 이름을 조()로 개명했다. 637년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14세의 어린 나이였던 무조를 후궁으로 받아들여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다. 12년 동안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있으면서 단 한 명의 자식도 낳지 못한 무미는 649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황실의 법도에 따라 감업사(感業寺)에 들어가 태종의 극락왕생을 빌며 비구니로 평생을 보내게 됐다.


무미를 비구니에서 황실로 다시 복귀시킨 사람은 당 태종에 이어 황제가 된 고종이었다. 고종은 황태자 시절부터 병석의 아버지를 간호하는 아름답고 어린 후궁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태종의 기일에 감업사로 행차한 고종에게 차를 대접하러 나타난 무미는 이미 성숙한 여인이었다. 고종의 감업사 나들이가 잦아지는 사연을 알게 된 고종의 황후 왕씨(王氏)는 화를 내기는커녕 황실법도를 무시하고 무미를 환속시켜 다시 황궁으로 들이는 데 적극 나섰다.

황후 왕씨는 고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숙비(蕭淑妃)를 견제할 사람이 필요했다.


무미는 황제의 사랑과 황후의 보호 속에 정이품 소의(昭儀)로 황실에 재등장했다. 황제의 여인 121명 중에서 여섯번째 서열에 만족할 수 없었던 무미는 황후의 힘을 빌려 소숙비를 몰아내고 이어서 황후도 폐서인시킨 후 잔인한 죽음을 맞게 했다. 관롱집단을 필두로 공신들의 필사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무미는 고종의 황후로 654년 10월 13일 등극했다. 측천무후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683년 12월 27일 고종이 서거할 때까지 전권을 휘두른 측천무후는 황태후로서 황제를 마음대로 갈아치우며 전횡을 일삼았지만 권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권력을 위해서 친아들을 죽일 정도로 무자비했던 측천무후는 황제인 아들도 믿지 못해 자신이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궤(四軌)라는 투서함을 활용해 밀고정치를 펼쳐 관롱집단을 비롯한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공포정치로 중신들도 떨었지만 측천무후도 늘 깨어있어야 했다.


심리적 압박과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측천무후를 구한 것은 차였다. 정신이 혼미해져 병석에 누운 측천무후는 황실어의가 처방한 갖은 약재를 써봤지만 병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때마침 황실공차로 올라온 신양모첨(信陽毛尖)을 마신 측천무후는 머리가 맑아지며 병석에서 일어났다. 기력을 회복한 측천무후는 신양모첨의 생산지인 차운산(車雲山) 일대를 황가다원(皇家茶園)으로 지정하고 감사의 표시로 천불탑(千佛塔)을 세우게 했다.


중국 10대 명차에 올라


신선의 도움으로 차나무 씨앗을 물고 왔다는 화미조(畵眉鳥)의 전설을 품고 있는 신양모첨은 허난(河南)성 남쪽에 위치한 신양(信陽)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중국 녹차다. 신양은 다섯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차운산을 비롯해 산 이름에 구름 운(雲)자가 모두 들어있을 정도로 구름과 안개가 많아 차 재배에 적합한 곳이다.

신양모첨의 외형은 하얀 솜털로 덮여 바늘 끝 모양을 하고 있으며 녹차 중에서도 피로 회복과 면역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다경(茶經)을 편찬해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당나라의 육우(陸羽)와 송나라의 대문호인 소동파(蘇東坡)도 신양모첨을 녹차 중 최고라 칭송했다. 측천무후의 병을 고쳐 더욱 유명해진 신양모첨은 당나라 최고의 차로 부상했다.


신양모첨으로 원기를 되찾은 측천무후는 낙양(洛陽)을 신도(神都)로 개명해 주나라의 수도로 정하고 중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여성황제로 등극했다. 측천무후는 적인걸(狄仁杰) 같은 관리를 등용해 내치에 힘써 경제를 부흥시켰다.

말년의 측천무후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공학부(控鶴府)를 설치해 미소년 72명을 모아 동침하며 채양보음(採陽補陰)까지 시도했지만 705년 12월 16일, 82세로 사망한다. 측천무후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사라졌지만 측천무후가 총애한 신양모첨은 ‘중국 10대 명차’에 이름을 올리며 오늘까지 중국 녹차의 왕으로 사랑받고 있다.



▒ 서영수

동국대 영어영문학과,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 미국 시나리오 작가 조합 정회원, 중국 사천성 홍보대사, 차 칼럼니스트




[차(茶) 이야기]

당 현종(玄宗)이 양귀비에게 보낸 사랑의 묘약, 몽정차 (蒙頂茶)


하늘에 제를 올릴 때만 사용하는 몽정차를 키우던 황차원.



차(茶)가 중국에서 산업과 문화로 정립된 것은 당(唐)나라 때다. 지방특산물로 지방 관리가 진상하던 토산물 품목의 하나였던 차는 당나라가 들어서며 황실공차(皇室貢茶) 제도를 통해 재배관리와 제조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당나라는 황실귀족문화를 넘어 주요한 재화가 된 차에 대한 세금을 유통단계마다 부과했다. 세율도 점진적으로 높이며 경제지표와 국세수입의 주요품목으로 산정했다.


차로 세수 충당한 당 현종


건국 초기에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영토확장과 부국강병의 초석을 세웠다. 기행과 만행의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도 민생과 경제만큼은 활성화시켰다. 경제규모가 커지며 차 소비도 급증해 공급물량이 늘어났다.


당나라 문화와 경제를 최고점으로 끌어올린 당 현종(玄宗) 이융기(李隆基)의 통치비결은 나라 사랑이다. 또 당의 쇠락을 이끈 원인도 현종의 양귀비(楊貴妃)에 대한 빗나간 사랑의 결과다. 지도자의 사랑패턴에 따라 나라가 흥하기도 망하기도 한다.


이융기는 친족끼리 죽고 죽이는 피바람 속에 살얼음판을 딛고 과감한 군사행동으로 황권에 접근했다. 말년의 측천무후가 마지못해 황제로 복권시킨 중종(中宗)을 독살한 중종의 황후 위씨가 제2의 측천무후를 노릴 때 이융기는 황실근위부대를 먼저 장악해 황후 위씨와 딸 안락공주(安樂公主)를 일시에 제거했다.

이융기는 당나라의 실세인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太平公主)와 연합해 당나라 5대 황제로 예종(睿宗)을 옹립했다. 예종은 큰아들의 양보로 셋째 아들 이융기를 태자로 책봉할 수 있었다.


이융기를 독살하려는 태평공주의 야심을 간파한 예종은 복위 2년 만에 27세에 불과한 이융기에게 제위를 떠맡기듯 물려줬다. 이로써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의 시대가 열렸다.

정적이 된 태평공주와 무씨일가를 멸족시킨 현종은 경세제민(經世濟民)에 힘써 당나라를 세계 최고의 부유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 당시 당나라의 경제력은 전 세계 GDP의 25%에 육박했다.


차를 뜻하는 한자는 표준어와 방언을 포함해 여러가지 글자와 발음이 있다.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차(茶)’도 현종 이전에는 ‘도(荼)’와 ‘차(茶)’를 혼용해 사용했다. 현종이 서문을 작성한 <개원문자음의(開元文字音意)>라는 책을 통해 차를 ‘차(茶)’로 규정해 오늘까지 통용되고 있다.


현종은 차에 세금을 부과해 세수(稅收)에 충당했다. 차에 붙는 10%의 세금을 피해 밀거래도 성행했다. 당의 도읍(都邑) 장안(長安)에서 산동의 태산까지 차 마시는 문화가 일상화됐다.

국가적인 차원은 아니었지만 티베트 말과 당나라 차를 교환하는 한장차마무역(漢藏茶馬貿易)이 시작됐다. 이는 실크로드와 이어지는 차마고도(茶馬古道)의 효시가 된다.


현종은 당나라의 부국강병과 태평성대를 이끌었지만 지나친 풍류와 여인 사랑으로 당나라를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뜨렸다. 측천무후의 조카 무혜비(武惠妃)와 사랑에 빠진 현종은 무혜비의 계략에 속아 조강지처인 황후 왕씨(皇后 王氏)를 폐하고 왕자를 셋이나 죽였다. 무혜비는 자신이 낳은 수왕(壽王) 이모(李瑁)를 태자로 세우려 했지만 실패하고 악몽에 시달리다 급사하고 만다.


현종을 보필하던 환관 고력사(高力士)는 전국에 미인을 찾아오는 화조사(花鳥使)를 파견하고 자신이 직접 푸젠성(福建省)까지 가서 날씬하고 가무에 능한 강채평(江采萍)을 발굴해왔다.

차에 조예가 깊던 현종은 차를 즐기는 단아한 강채평을 총애하며 매일 차로 승부를 겨루는 투차(鬪茶)로 시름을 잊고 세월을 보냈다. 현종은 차와 시를 좋아하는 강채평을 매비(梅妃)라 칭하고 황궁 안에 매화를 심어 그곳에 살게 했다.


현종은 화청지(華淸池)에서 무혜비가 낳은 아들 이모와 동행한 며느리 양옥환(楊玉環)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황제만이 누릴 수 있는 귀한 진상품을 며느리에게 선물로 보냈다.

하늘에 제를 올릴 때만 사용하는 진귀한 몽정차(蒙頂茶)와 공이 가장 큰 신하를 선별해 1년에 한 번만 특별히 하사하던 황실공차를 아낌없이 보내며 사랑의 메신저로 활용했다.


당나라는 차를 생산하는 지역을 크게 8구역으로 나누고 다시 64개 지역으로 세분한 후 가장 뛰어난 16곳에서 생산된 차를 황실공차로 지정했다. 처음에는 민간에서 재배하고 만든 차를 지방관리가 진상하는 민공(民贡) 형태였지만 품질의 균일화와 정해진 날짜에 일정량을 공급하기 위해 중앙정부에서 황차원(皇茶園)을 지정해 직접 재배하고 감독했다. 차를 만드는 생산설비도 나라에서 직접 건설하고 전문 인력을 투입해 황실공차를 만드는 관배(官焙)의 형태로 바뀐다.



현종과 양귀비가 처음 만난 화청지에 있는 양귀비의 동상..


당나라 쇠락 이끈 양귀비


이모를 변방으로 보내고 양옥환을 도교사원의 도사(道士)로 잠시 출가시킨 현종은 도교 사원인 태진궁(太眞宮)을 황궁 안에 만들어 양옥환을 불러 밀회장소로 사용했다.


현종은 매비의 질투와 만류를 무시하고 745년 양옥환을 귀비로 책봉했다. 양귀비의 등장으로 매비의 짧은 봄날은 사라졌다.


차를 즐겨 날씬한 매비는 가고 술을 좋아하고 통통한 양귀비(楊貴妃)의 시대가 열렸다.

61세의 현종이 맞이한 양귀비는 27세였다. 현종은양귀비를 말을 이해하는 꽃, 해어화(解語花)로 불렀다. 중국 4대 미녀 중에서 꽃도 마주치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는 수화(羞花)의 주인공이 양귀비다.


현종의 총애를 독차지한 양귀비는 친족들로 조정을 구성했다. 구밀복검(口蜜腹劍)의 원조인 재상 이임보(李林甫)가 죽자 양귀비의 건달 오빠 양교(楊釗)가 재상이 돼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란 시호를 받아 전횡을 일삼았다.


나이 많은 현종의 눈을 피해 양귀비는 거구의 안녹산(安祿山)과 사랑놀이에 빠졌다. 변방의 절도사였지만 당나라 전체 군사력의 40% 이상을 장악한 안녹산은 사사명(史思明)과 함께 안·사의 난을 일으켜 순식간에 장안으로 쳐들어온다.


피난길에 나선 현종은 마외역(馬嵬驛)에서 근위부대와 신하들의 압박을 못 이겨 양귀비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다. 환관 고력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귀비는 배나무에 비단 천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의 죽음과 더불어 당나라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 서영수

동국대 영어영문학과, 한국영화감독협회 이사, 미국 시나리오 작가 조합 정회원, 중국 사천성 홍보대사, 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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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정차 몽정차는 최초의 황실공차로서 몽정설아와 몽정황아가 유명하다. 고산지대의 녹차 답게 몽정설아의 맛은 풋풋하고 달콤하다. 몽정황아는 약발효차로서 부드럽다.




/ ECONOMY 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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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妃 江采萍



江采萍(公元710年-公元756年),號梅妃,閩地莆田(今福建莆田)人,唐玄宗寵妃之一。在今莆田亦稱江東妃(興化平話:Gang-dang-hui)。帝王後妃八大才女之一。[1]


江采萍自幼陪穎,父親極賞識,自小就教她讀書識字、吟誦詩文。九歲時,就能背誦《詩經》中記載周文王後妃事迹的《周南》和《召南》兩部分詩。

十四歲,善吟詩作賦,自比晉朝才女謝道韫,不僅長于詩賦,還精通樂器,善歌舞,琴棋書畫無所不通。


開元中,唐玄宗遣高力士出使閩越,江采萍被選入宮。唐玄宗愛如至寶,大加寵幸賜東宮正一品皇妃,號梅妃[2] 。


梅妃喜梅,氣節若梅。後被楊貴妃貶入冷宮上陽東宮。公元756年(天寶十五年),安祿山發動叛亂(史稱安史之亂),唐玄宗落逃沒帶冷宮中的梅妃,梅妃白绫裹身,投井自盡

冷宮에서 몸을 하얀 끈으로 묶고 우물에 빠져 자진했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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