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과 주자학의 공부방법

2017. 8. 29. 16:02성리학(선비들)

정제두와 송시열의 서신분석
- 양명학과 주자학의 공부방법을 중심으로

 

조남호*

 

 


Ⅰ. 서론
이 글은 정제두(1649-1736)의 질문과 송시열(1607-1689)의 답변을 중심
으로, 이들의 철학사상을 비교하는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기존의 정제
두에 대한 연구는 주로 양명학적 고찰이나 주자학과의 비교가 대부분이
다. 그 중에는 주로 정제두 자신의 철학사상 고찰이나 민언휘, 박심,1) 박
세채,2) 윤증3) 등의 편지에 대한 고찰이 주를 이룬다. 정제두가 양명학적
사고를 하기 전에 어떤 공부를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없다.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1) 김교빈, 「조선후기 주자학과 양명학의 논쟁」, 시대와 철학 (10권 2호, 1995)
2) 금장태, 「十七世紀末朴世采和鄭齊斗的陽明學論辯」, 朝鮮儒者對儒家傳統的解釋 , (臺灣 :
臺大出版中心, 2012),
3) 김교빈, 「명재 윤증과 하곡 정제두의 교유」, 시대와 철학 (21권 1호, 2010)
2 인천학연구 18(2013.2)
- 8 -

 


필자가 보기에 정제두에게 양명학적 사고는 공부의 결과로써 제시된 것이
다. 어떤 과정을 거쳐 양명학으로 연결되었는지 이 정제두와 송시열간의
편지가 보여주게 될 것이다. 양명학적 사고에서는 마음의 본체(心體)에 대
한 인식이 중요하다. 그러한 인식은 어떠한 공부를 통하여 이루어지는지
가 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 글은 정제두와 송시열의 사고를 비교함으로써
이들이 어떤 철학적 차이를 보여주는지도 알아볼 것이다.4)
정제두가 송시열에게 보낸 편지는 5편이 남아 있는데,5) 송시열이 정제
두에 보낸 편지는 1편만 남아 있다.6) 두 사람의 편지는 대부분 출처 진
퇴, 묘지명 부탁에 관련된 내용이고, 철학적인 내용은 병진년에 쓴 편지
한통이다. 송시열에게 남아있는 편지가 이것이다. 이 편지도 완전히 같은
것이 아니고 약간 다르다.7) 각각의 편지는 내용상의 차이를 보인 것은 아
니고 상세하냐 아니냐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은 첫 번째 편지속에 정제두의 양명학적 사고의 일단을 보여주는
내용이 있다. 편지의 내용은 몇 개의 조목으로 되어 있는데 순서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편지에는 정제두가 부치지 못한 글이 안(按)
이란 형식으로 있다. 이 형식은 언제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조금 더 정제
두의 사고가 진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형식도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4) 기존의 정제두의 양명학과 주자학의 비교를 분석하는 논문은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고 있
지 못하다.
5) 하곡집 권1 1. 「上宋尤齋問目」(丙辰,1676년, 尤庵 宋時烈 70세, 霞谷 鄭齊斗 28歲) 2.
「上宋尤齋書」(己未,1679년, 숙종 5년, 우암 송시열 73세, 하곡 정제두 31세) 3. 「上宋尤
齋書」(癸亥, 1683년, 숙종 9년, 송시열 77세, 하곡 정제두 35세) 4. 「復上宋尤齋書」 5. 「
答宋尤齋書」(甲子,1684년, 숙종 10년, 송시열 78세, 하곡 정제두 36세)
6) 宋子大全 卷119 「答鄭士昂」 (丙辰, 1676년, 尤庵 宋時烈 70세, 霞谷 鄭齊斗 28歲)
7) 송시열에 보낸 편지가 약간 상세하다. 어떤 이유에서 편지가 차이를 보이는지는 알 수
없다.
정제두와 송시열의 서신분석 ❚ 조남호 3
- 9 -

 

Ⅱ. 정제두 집안과 송시열
정제두와 송시열의 편지는 1676년에서 1684년까지이고, 정제두는 28세
에서 36세까지이고, 송시열은 70세에서 78세까지이다. 정제두는 24세 때
과거에 낙방하면서 과업을 그만두고, 28세 때 주자학에 의문을 가지고 송
시열에게 편지를 하게 되고, 34세 때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양명학자임을
밝혔다가.(「擬上朴南溪書」)다시 소생하게 되는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친다.
송시열은 69세때 장기로 유배되고, 72세때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典箚疑),
정서분류 (程書分類)를 지었다. 73세 때 거제도로 이배되었고, 「주자어류
소분」(朱子語類小分)을 완성하다. 또 주희의 연보와 실기(實紀)를 합쳐 「
문공선생기보통편」(文公先生紀譜通編」)을 편찬하였다. 74세때 석방되고,
77세에는 경연에 참석하고, 78세에는 윤증에게 답서를 보내어 절교를 하
였다. 정제두는 이 기간에 주로 주자학에서 양명학으로 전환하였고, 송시
열은 주자학에 관한 해설서를 편찬하여 주자학에 대한 해석권을 장악하려
고 하였다.
정제두의 두번째 편지(「上宋尤齋書」, 己未,1679년, 숙종 5년, 우암 송
시열 73세, 하곡 정제두 31세)는 정창징(鄭昌徵, 1615-1664)의 묘지석의
글을 써달라고 하는 것이다. 정창징은 정제두의 백부이다. 정제두의 할아
버지 정유성(鄭維城, 1596-1664)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는데, 정창징과
정상징(鄭尙徵, 1629-1653)이다. 정상징에게는 정제현(鄭齊賢, 1642~1662)
이란 아들이 있고, 그가 효종의 4녀인 숙희공주와 결혼하여 부마인 인평
위가 된다.
정제두 집안은 송시열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제두의 할아버지
정유성은 송시열과 같이 서인측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송시열의 체직
에 대한 부당성을 상소한다거나, 송시열이 관직을 떠나는 것을 만류하거
나, 공안개정 즉 대동법에 대해서 찬성하거나, 윤선도의 예론을 반대하고
4 인천학연구 18(2013.2)
- 10 -

 

송시열의 예론을 찬성하고( 현종개수실록 2년 5월 13일)있다. 이러한 관
계는 송시열로 하여금 정유성의 신도비명을 쓰고 있다.( 송자대전 권158
우의정(右議政) 정공(鄭公) 신도비명) 송시열은 김집, 김상헌, 정유성 그리
고 자기가 함께 어울렸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유성은 실무형 관료이고,
송시열은 정책형 관료이다.8) 정유성과 송시열은 서로 상보적인 관계였던
것이다. 정유성의 이러한 노력은 뒤에 정제두가 양명학을 공부하여 이단
을 몰렸을 때 윤휴나 박세당처럼 노론이 그를 적극적으로 배척하지 못하
는 배경이 된다.
송시열은 정제두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창징에 대한 묘지석의 글을
쓰지 않는다.9) 아마도 두가지 이유가 제시될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이 늙
어서 써줄 수 없는 상황인 것 같고, 다른 하나는 회니시비(懷尼是非)와 관
련이 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정유성은 송시열과 당론을 같이 했지만,
정제두는 소론쪽이었다. 정제두의 부인은 윤홍거(尹鴻擧)의 딸이고, 최명
길의 형인 최내길(崔來吉)의 외손녀이다. 윤홍거는 파평 윤씨 윤증의 아버
지인 윤선거의 사촌이다. 윤증과 송시열의 회니시비로 불리우는 논쟁을
하였고, 이는 노론과 소론의 당쟁을 불러왔다. 송시열과 윤증의 불화를 일
으킨 윤선거의 묘비문에 대한 논의가 이미 정제두의 첫 번째 편지를 쓰기
이전인 1674년경부터이고, 이 때 벌써 송시열과 윤증은 사이가 벌어졌던
것이다. 마지막 편지를 쓴 1684년에는 윤증과 절교까지 하게 된다. 정제
두는 윤증계열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송시열은 정창징의 표지석에
글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정제두의 아버지 정상징은 한산 이씨 이기조(李基祚, 1595~1653)
의 딸과 결혼을 한다. 이기조의 아들인 이성령(李星齡, 1632-1691)은 송시

 


8) 송시열의 개혁안에 관해서는 곽신환, 「우암 의리학의 연원과 후원」, 유학연구 (24,
2011) 285쪽
9) 정상징에 대한 묘지명은 김수항이 쓴다. 文谷集 권19 「高陽郡守鄭公墓誌銘幷序」
정제두와 송시열의 서신분석 ❚ 조남호 5
- 11 -

 

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을 때 정읍현감을 맡고 있었다. 그 때 송시열은
이성령의 후의에 감사를 표하고 있다.10) 이성령은 도교에도 관심이 있어
고 정제두는 그에게서 양생술을 배웠다.
이러한 친밀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정제두와 송시열은 다른 길을 갔다.
이러한 길의 차이는 당파의 격화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하고, 학문적으로는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이기도 하다.

 

Ⅲ. 양명학적 경향과 주자학적인 사고

 

1. 장량에 대한 평가

 

장량(張良)의 입장에서 진(秦) 나라는 원수입니다. 한(漢) 나라가 진 나
라를 이어서 일어나자, 그가 한 나라를 섬긴 것은 신하의 도리에 잘못이
없는 듯합니다. 또 양시(楊時)는 장량의 뜻은 한(韓) 나라를 위해 원수를
갚는 데 있었으니, 그가 한 고조(漢高祖)를 섬긴 것은 본심(本心)이 아니
었다.하고, 정자(程子)가 장량에 대해 진퇴(進退)와 편안하다고 한 말을
인용하여 실증하였으니.11) 이 말이 과연 장량이 한 나라 섬긴 것을 그르

 

10) 白井順, 「심육과 이진병과 이성령」, 하곡학과 한국성리학의 대화 제8회 강화양명학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2011, 164쪽
11) 이러한 주장은 구산집 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권13 「餘杭所
聞」 因言正叔云人言 沛公用張良, 沛公豈能用張, 用沛公耳. 良之從沛公, 以為韓報秦也.
既滅秦, 於是置沛公闗中, 辭歸韓而巳. 見沛公, 有可以取天下之勢, 故又從之, 巳取天下便欲
棄人間事, 從赤松游, 良不為髙祖之臣, 可見矣. 此論甚好, 以前無人及此. 曰此論亦未盡. 張
良葢終始為韓者, 方沛公為漢王之國, 遣良歸韓, 良因説沛公燒絶棧道, 此豈復有事漢之意?
及良歸至韓, 聞項羽以良從漢王, 故不遣韓王成之國與俱東至彭城殺之. 先是良說項梁, 以韓諸
公子横陽君成可立, 梁遂使良求韓成立為韓王, 良為韓司徒, 良以成見殺之, 故於是又間行歸
漢, 其意葢欲為韓報項羽也. 至漢髙祖用其謀, 巳破項羽, 平定天下, 從髙祖西都闗中, 於是
始有導引辟榖, 從赤松子之語. 葢為韓報仇之心, 於是方巳故也. 據良先説髙祖絕棧道, 然後
歸韓, 此亦似有意, 使韓王成若在良輔之, 并天下未可知. 良意以為可與之平天下者, 獨髙祖,
髙祖既阻蜀, 不出其他, 不足慮矣. 不幸韓王成為項羽所殺, 故無以自資而卒歸漢也. 如髙祖
6 인천학연구 18(2013.2)
- 12 -

 

게 여긴 것입니까?
張良之於秦讎也,漢代秦而興,則其事之,似非失於臣道,而龜山謂子房之
志爲韓報仇,事高祖,非本心,引程子進退從容之說以實之,此果以事漢爲非
耶?12)
장량은 한(韓)나라의 왕자로 진나라가 한(韓)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복수
하려고 한(漢)나라를 도와 천하 통일을 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서 정자는 장량은 유자이고 그의 진퇴는 매우 도리가 있었다. 13)왕안석
은 한나라의 존망이 오르고 내리는 가운데, 나는 이때에 매번 편안하였
다 14)라고 평가한다. 한고조가 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한 것이고, 장량은 본래 고조를 섬긴 것이 아니고, 한나라를 위하여
복수하고자 한고조를 관중에 보내고, 한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키자, 그는
신선이 되어 적송자와 노닐었다고 한다. 양시는 정자의 관점을 그대로 계
승한다. 이에 대해 정제두는 정주학의 이러한 평가가 문제가 있음을 지적
한다. 장량이 한나라를 섬긴 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亦自用張良, 不盡良之術, 亦不止於此, 須更有事在其臣, 髙祖非其心也, 不得巳耳.
12) 송시열의 송자대전 에는 하곡집 과 약간 다르다. 송자대전 卷119 「答鄭士昂」 한국
문집총간 108-116(서울 : 민족문화추진회, 1993) 張良之於秦, 讎也. 及漢代秦而興, 則委
質於漢, 似無失於臣道. 或者有以二君爲嫌則如何?又龜山謂子房之志爲韓報仇, 其事高祖, 非
本心也. 事旣成, 自託神仙之說, 以遂其不欲事漢之本心, 引程子進退從容有儒者氣象語曰,
惟程子知之. 不知此說果以事漢爲非耶? 其意如何?
13) 하남정씨유서 19-89(북경 : 중화서국, 2004) 張良亦是箇儒者, 進退間極有道理. 人道漢
高祖能用張良, 却不知是張良能用高祖. 良計謀不妄發, 發必中. 如後來立太子事, 皆是能使
高祖必從, 使之左便左, 使之右便右, 豈不是良用高祖乎? 良本不事高祖, 常言爲韓王送沛公.
觀良心, 只是爲天下, 且與成就却事. 後來與赤松子遊, 只是箇不肯事高祖如此.
14) 하남정씨유서 18-209(북경 : 중화서국, 2004) 王介甫詠張良詩, 最好, 曰:「漢業存亡俯仰
中, 留侯當此每從容.」 人言高祖用張良, 非也. 張良用高祖爾. 秦滅韓, 張良爲韓報仇, 故送
高祖入關. 旣滅秦矣, 故辭去. 及高祖興義師, 誅項王, 則高祖之勢可以平天下, 故張良助之.
良豈願爲高祖臣哉? 無其勢也. 及天下旣平, 乃從赤松子遊, 是不願爲其臣可知矣. 張良才識
儘高, 若鴻溝旣分, 而勸漢王背約追之, 則無行也. 或問:「張良欲以鐵鎚擊殺秦王, 其計不巳
疎乎?」 曰:「欲報君仇之急, 使當時若得以鎚擊殺之, 亦足矣, 何暇自爲謀耶?」
정제두와 송시열의 서신분석 ❚ 조남호 7
- 13 -

 

송시열의 답변
장량의 일에 대해서는 이미 정자의 정론(定論)이 있는데, 다시 무슨 말
을 덧붙이겠는가? 또 장량은 천하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때를 당하여
다만 군막(軍幕) 안에서 여러모로 전략을 짜냈을 뿐이니, 일찍이 한(漢)
나라와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있지는 않은 것이네. 그가 유후(留侯)에
봉해지자, 또 그 식읍(食邑)도 받지 않고 이내 벽곡(辟穀)을 하였으니, 한
(漢) 나라에 신하 노릇한 실상이 어디에 있는가. 대체로 학자들은 성현이
논의해서 확정한 것을 마땅히 독실히 믿고 굳게 지켜야지, 가벼이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되네. 한 고조(漢高祖)가 삼걸(三傑)에 대하여 소하(蕭何)와
한신(韓信)의 경우는 직접 이름으로 불렀지만, 장량의 경우는 자방이라는
자(字)로 불렀다. 이것만으로도 한 고조가 그를 신하로 여기지 않았음을
볼 수가 있다.
張良事, 旣有程子定論, 復何贅焉? 且良當天下未定, 只運籌帷幄而已, 則未
嘗有君臣之分矣. 及其封留, 則又不食其邑而便辟穀焉, 何處有臣於漢之實耶?
大抵學者於聖賢論定處, 當篤信而固守, 不可輕加疑議也. (漢祖之數三傑也,
蕭,韓則名之, 良則字之. 此亦可見漢祖, 亦未嘗臣之也.)
송시열은 장량에 대한 논의는 이미 정자가 결정을 지었는데 새롭게 의
문을 제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리고 한고조가 장량
을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로 부른 것은 장량을 신하로 여기기 않은 증거
라고 한다. 장량에 대한 논의는 그의 제자와의 편지에서 다시 한번 더 이
루어진다. 장량이 원수를 갚고자 한 것에 대해서 한고조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속이는 것(譎)에 가깝다고 비평하면서도, 장량에 대한 평가는 변하지
않는다.15)

 

15) 宋子大全 권114 「答曹可運」 辛亥秋夕日 張良事程子, 朱子論之詳矣. 然若曰正大光明,
有所歉焉則可也. 甚非從容云, 則從容正子房之所長也, 故朱子曰子房不如孔明之正大, 孔明
8 인천학연구 18(2013.2)
- 14 -

 

장량에 대한 논의는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본심에 대한 것이다.
과연 장량의 본심이란 무엇인가이다. 본심이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궁극
적인 마음에 대한 논의이다. 궁극적인 마음이란 현상적인 마음과는 다른
차원의 마음인 것이다. 양명학에서는 본심, 진심이란 개념을 쓴다. 다른
하나는 아마도 청나라에 대한 평가와 관련이 되어 있는 것 같다. 당시는
청나라를 섬기면서 명나라 부흥을 이야기하는데, 청나라를 섬기는 데 그
연호를 쓸 것인가 말것인가가 논의거리였다. 청나라를 인정하는 문제는
청나라 연호를 쓰는 문제와 연결이 된다. 정제두는 청나라 연호를 쓰자는
사람은 쓰고, 쓰지 말자는 사람은 쓰지 말자라는 입장을 고수한다.16) 이
는 자신의 주체적인 결단에 의해서 어느 쪽을 결정하고, 서로 비방하지
말하자는 것이다. 반면에 송시열은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고 숭정기원후
몇년라는 식의 사용을 주장한다.

 

2. 상복과 개가

 

군신과 부부는 의(義)만을 가지고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맹자에게 토
개니 구수(仇讎)니 하는 주장이 있다.17) 옛날에 부인은 일단 소박을 당하
면 또 그 남편쪽(夫黨)의 상복도 입지 않는 법이니, 18)대체로 의(義)가 이

 

不如子房之從容. 且來諭所謂不與韓成圖雪讎恥云者, 恐未詳究當時事實也. 當初子房請於項
梁立韓成爲韓王, 而無尺土一民之權, 則於何藉賴而成其志哉? 其歸漢王, 蓋不得已也. 故其
言曰良爲韓王送沛公, 此其實情也. 及其藉漢滅秦之後, 始欲與韓成爭衡天下於劉項之間, 辭
漢歸韓, 則韓成爲楚所殺, 是楚於良亦一秦矣. 是故復藉漢滅楚, 以報其讎, 其義皎如日星矣.
其背鴻溝之約, 乃小事耳, 何足病其大節哉? 然先儒已有非之者, 此則責賢者備之意也. 大槩
藉漢滅秦滅楚, 以報君仇, 而終身不言, 微近於譎, 故朱子曾有所論, 而程子亦曰張良用高祖,
二夫子之言, 可謂無復餘蘊矣. 至於四皓之事, 則栗谷先生曾有所論, 試觀之如何. 若其神仙
之托, 先儒於通鑑論之詳矣. 朱子亦曰張良一生在荊棘裏, 故殺不得云, 而未有貶辭, 今何必
於無過中求過耶?
16) 하곡집 권2 「答閔彥暉書」
17) 맹자 이루하3 孟子告齊宣王曰:「君之視臣如手足;則臣視君如腹心;君之視臣如犬馬,
則臣視君如國人;君之視臣如土芥,則臣視君如寇讎。」
18) 예기 喪服小記 婦當喪而出,則除之
정제두와 송시열의 서신분석 ❚ 조남호 9
- 15 -

 

미 끊어졌으면 또한 반드시 개가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를 보니, 대
부분 후세와 같지 않지만 왕촉(王蠋)의 말 한마디가 있고부터 드디어 고
칠 수 없는 올바른 도리로 여긴 것 입니까? 아니면 후세에 천하를 한집안
으로 여겨 일부종사(一夫從事)하는 것을 귀히 여긴 때문에 형세가 그렇게
되어서 그런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 옛날 성현이 도리어 이 점에
대해 신중히 하지 않은 것입니까?
君臣、夫婦,主於義,故孟子有土芥寇讎之說;古者婦被出,除其夫黨服,
蓋已見絶則亦將改適矣。觀於此義,多與後世不同,而自有王蠋一言,遂以爲
不易之經道,抑以家天下而貴從一,故勢使之然乎?不然,豈上世聖賢,反不
愼於是也?19)
정제두는 이곳에서 이혼한 여자의 문제를 다룬다. 남녀의 관계는 혈연
관계가 아니라 의로써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천륜의 관계가 아니라 상
호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혼한 여자는 전 남편쪽의 상복도 입을
필요가 없고, 개가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옛날에는 시행되었지만, 왕
촉의 말(忠臣不事二君,贞女不更二夫)20) 이후로는 시행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한다.

 

송시열의 답변
예경(禮經)에, 한번 더불어 짝이 되었으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으며, 남
편이 죽어도 재가하지 않는다. 21)는 글이 있는데, 왜 왕촉의 말로 인해서

 

19) 송시열의 송자대전 에는 하곡집 과 약간 다르다. 송자대전 卷119 「答鄭士昂」, 古
者君臣夫婦, 只從義合, 故有仇讎一夫之說, 國士衆人之語. 而婦被出, 又除其夫黨服. 蓋義
旣絶則亦必改適矣. 自有王蠋之一言, 後世遂以爲不可易, 而未嘗言古義也. 是蓋後世之義,
實爲經道耶? 抑或以後世家天下而貴從一, 故勢有使之之故耶? 正是經道則古之聖賢反不愼於
此耶?
20) 史記 田單列傳
21) 禮記 郊特牲
10 인천학연구 18(2013.2)
- 16 -
드디어 재가

 

하지 않는 것을 고칠수 없는 도리로 여기게 되었다고 말하는
가? 예경에 진실로 부인이 소박을 당하면 그 남편쪽의 복(服)을 입지 않
는다.는 설이 있네. 그러나 반드시 개가를 하게 한다는 설이 어찌 있겠는
가? 대체로 남편에게 소박을 당하고 나서는 남편쪽의 상복을 입지 않는
것은 현실을 따르는 뜻이요, 남편쪽의 상복을 입지 않으면서도 재가하지
않는 것은 한 남편을 따르는 뜻이니, 이는 병행되어도 서로 모순되지 않
는 것이네.
禮經有一與之齊。終身不改。夫死不嫁之文。何以言因王蠋之說而遂以不嫁
爲不易之理乎。禮經固有婦被出而除其夫黨服之說。然亦豈有必使之改嫁之說
乎? 夫見絶於夫而除其服者。循實之意也。除服而猶不嫁者。從一之意也。此
並行而不相悖也。
송시열은 우선 전거의 문제를 제기한다. 왕촉의 말 이외에 남편이 죽어
도 재가하지 않는다는 예기의 말을 들어서 정제두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
고 비판한다. 이혼해도 남편쪽의 상복을 입지 않는 것과, 재가하는 것은
다르다고 한다. 상복을 입지 않지만 재가하지 않는 것은 일부종사의 뜻이
라고 한다. 현실적인 이유와 일부종사의 양립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두고 정제두와 송시열이 다른 입장
을 개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구체적인 사건을 알 수 없고, 주자
학과 양명학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주자학에서는 재가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일부종사를 강조하여 사회적
질서 즉 가부장적 질서를 강조하는데 비해, 양명학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중시한다. 따라서 양명학에서는 이혼을 하는 경우, 남편쪽의 상복을 입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재가를 해야 한다고 한다. 주자학에서는 욕망을 부정적
인 것으로 보고 있는데 비해 양명학에서는 욕망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정제두와 송시열의 서신분석 ❚ 조남호 11
- 17 -

 

그렇다고 양명학에서 욕망을 전부 인정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양명학에서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여, 제멋대로 행동하였다고 하는 주장은 주자학
의 편견에 불과하다. 양명학에서는 욕망을 인간이 생활하는데 기본적인
것이고, 또한 도덕을 실천할 수 있는 동력으로 보고 있다. 욕망을 처음부
터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욕망을 다스릴 때 처음부터 눌러서
금지할 것인가, 아니면 천천히 천리를 실천하고자 하는 힘을 키워서 욕망
의 힘을 뺄 것인가에 따라 주자학과 양명학의 차이가 드러난다.

 

3. 사적인 생각과 공적인 생각

 

정제두의 질문:

 

무필 무고(毋必毋固)는 사적인 일에 대하여서만 말하는 것입니까? 아무
리 의리(義理)에 지당한 일이라 할지라도 모름지기 고(固)와 필(必)이 없
어야 하는 것입니까?
絶四之固必,謂事之私者耶?雖義理之至當者,亦當毌固必與?
여기서 무필무고는 논어 자한편 에 나오는 내용이다. 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공자는 네가지 사적인 생각, 기필함, 고집, 자아가 없다
는 것이다. 정제두는 기필과 고집은 부정되어야 한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점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송시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송시열의 답변
의(意)·필(必)·고(固)·아(我)의 주희 주(注)에 이르기를, 의(意)는 사
적인 생각이다.[私意]. 그렇다면 그 아래 필·고·아 세 가지는 진실로 이
12 인천학연구 18(2013.2)
- 18 -

 

하나의 의(意) 자로부터 일관되는 뜻이네. 만일 의리의 지당한 것이라도
고·필하는 마음을 둘 수 없다면, 성현이 어째서 선(善)을 가려서 고집(固
執)한다. 하였겠으며, 또 어째서 구하면 반드시 얻는다.[求必得之]고 하였
겠는가?
意必固我,註意私意也,然則其下必固我三者,固自此一意字一串貫下矣。
若於義理之至當者,不可有固必之心,則聖賢何以曰:擇善而固執?又何以
曰:求必得之耶?
여기서 주는 주희의 집주이다. 주희는 네가지가 각각 독립된 것이 아니
라 일관됨을 주장한다. 사적인 생각으로부터 출발하여, 사건에 앞에서는
기필함이 나오고, 사건 뒤에 고집으로 발전하며, 사적인 생각이 이루어진
뒤에 자아로 이르게 되고, 다시 그것이 사적인 생각을 낳게 되어 서로 연
결된다는 것이다.22) 송시열은 이것이 일관되었다고 주장한다.
송시열은 사적인 고집과 기필은 인정하지 않지만, 정당한 고집과 기필
은 인정한다. 이어서 정제두가 질문한 정당한 것을 고집하는 것과 기필하
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정당한 고집의 예로 중용 의 誠之者 擇善而固
執之者也. 를 인용하고, 정당한 기필에 대해서는 대학 전5장 주희의 주
석 好色, 人所同好, 好則求必得之 를 인용한다. 여기서 두 사람의 질문대
답은 끝이 난다.

 

정제두의 재답변

 

내 생각에 만약 사적인 나라고 말하면 생각하지 말라(무의) 두 글자면
다한 것이지, 하필이면 고와 필을 말하고, 말라라고 말한 것인가? 대개 비

 

22) 주자어류 36:20 (북경: 중화서국, 1986)意, 私意之發. 必, 在事先;固, 在事後. 我, 私
意成就. 四者相因如循環. 논어집주 四者相爲終始, 起於意, 遂於必, 留於固, 而成於我
也. 蓋意必常在事前, 固我常在事後, 至於我又生意, 則物欲牽引, 循環不窮矣
정제두와 송시열의 서신분석 ❚ 조남호 13
- 19 -

 

록 정당하더라도 만일 , 고집하거나 기필한다는 뜻이 있다면 이미 사적인
것이다. 고집하는 경우도 지키는 것이 돈독한 것을 말하지, 마음의 고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按:若謂私已,則只一無意二字已盡之,何必曰固曰必,而謂無之耶?蓋雖
正當者,如一有固必之意,則已是私耳。至於固執之者,言其所守之篤,非謂
有心之固也”
정제두는 무의가 사적인 생각을 없애는 것이라면 나머지 무필 무고가
필요없다는 주장이다. 그런데도 성인이 무필 무고를 말한 이유는 무엇인
가 하는 점이다. 우선 무의를 재검토해 보자. 공자가 말하는 생각하지 말
라는 이것을 표현한 말이라는 것이다. 정제두는 공자가 생각하지 말라 다
음에 고집하지 말라 기필하지 말라를 한 것은 그런 생각자체도 버리라는
것이다. 고집과 기필이라는 생각도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정당한 것도
고집과 기필이 있으면 사적인 생각이라는 것이다. 정제두에게서 네가지를
하지 말라라는 절(絶)은 바로 이러한 사고로 들어가는 공부인 것이다. 양
명학에서 말하는 존천리거인욕이란 말은 주자학과 같은 의미이지만, 궁극
적인 체험을 통해 조금의 사적인 생각도 없애라고 하는 사고이다. 논어
에서 말하는 사비(四非, 비례물시, 비례물청, 비례물언, 비례물동)가 감각
기관에서 인욕을 제거하는 것 즉 외부적인 것이라면, 사절은 내부적인 마
음에서 인욕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제두는 대학 과 중용 의 고
집과 기필은 내부적인 마음에서 인욕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소신의 문
제라는 것이다. 양명학에서는 사적인 마음을 심층차원에서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심학에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서 생각은 이성
적인 사고 판단을 의미한다. 조선 심학에서 추구하는 마음은 주자학적인
의미에서 의식이 작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심층 의식을 뜻한다. 심학에서
14 인천학연구 18(2013.2)
- 20 -

 

는 의식의 배후의 단계를 불교나 도교의 방법을 써서 직접적으로 깨닫는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곧 제육식의 기능이 멈추고 칠식이나 팔식의 기능
이 작동하는 것과 같다. 이성적인 기능은 오히려 궁극적인 차원으로 가는
것을 방해한다. 그것이 정지해야만 마음 속 깊은 층차로 내려갈 수 있다
는 것이다. 이성의 기능에서 중요한 것이 분별하는 작용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고 계산하는 작용이다. 또한 이러한 기능은 자아의 분열된 모습을 초
래한다. 이러한 일상적 자아의 모습을 넘어서야 진정한 내면의 자아를 만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언경은 이러한 상태 생각하지 말고 욕망하지도
말라 (無意無欲)이라고 표현한다.23)
그런데 무의를 해석하는데 다른 해석도 있다. 나여방은 생각하지 말라
는 것도 없어야 한다고 한다. 생각하지 말라는 금지하라는 뜻이 있는데
이것은 본체가 아니라는 것이다.24) 이는 정자의 견해와 일치한다. 25)성인
의 생각이 없는 경지를 표현한 것이다. 생각하지 말라는 의지가 들어간데
비해, 생각이 없다는 의지도 없는 자연스런 경지라는 것이다. 본체를 깨닫
고 나면 자연스런 마음의 추동력에 의해서 가기 때문에 의지가 개입할 여
지가 없다는 것이다. 정제두의 무의에 대한 사고는 아직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다. 아마도 그가 양명학을 깨닫기 전의 단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자학에서 무의와 양명학에서 무의는 다른다. 주자학에서 무의는 단순
하게 사적인 내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양명학에서는 그러한 나 자체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자학에서는 사적인 생각과 공적인 생각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이야기하는데, 양명학에서는 공적인 생각도 사적인 생각일

 

23) 宋煥箕(1728-1807) 性潭先生集 ,卷19,「東岡南公墓碣銘并序」,한국문집총간 244(서울 :
민족문화추진회, 1994) 「平居終日危坐,略無惰容。嘗以為平生用力,無意無欲而已。又嘆
曰無容力之地 為安排所礙﹔不可遏之機 為習累所蔽。」
24) 이경룡, 나근계어록휘집 (서울 : 신성출판사 2006) 476쪽 羅子曰:「孔子之所絕者四,
是毋意、毋必、毋固、毋我,四者俱沒有的。蓋一有毋意、毋必、毋固、毋我,便非空空本
體,況此毋字,有禁止意,如何解曰:孔子毋意、必、固、我也哉?」
25) 하남정씨외서 3-48 (북경 : 중화서국, 2004)毋意毋非禁止之辭, 聖人絶此四者, 何用禁?
정제두와 송시열의 서신분석 ❚ 조남호 15
- 21 -

 

수 있고 그것을 넘어가야 , 진정한 깨달음이 온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선
무악(無善無惡)이다. 그런 점에서 정제두는 아직 주자학을 벗어나지 못했
지만, 양명학적 사고로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4. 사려분요(주관의 갈등과 분열)

 

정제두의 질문

 

주역 고요히 움직이지 않다가 감응하여 드디어 천하의 일에 통한
다. 하였고 정자는 확연히 크게 트여서 사물이 오면 순응한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그 마음이 본래 비고 고요하여[虛靜] 사물에 따라서 대응하는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주희도 마음에는 하나의 사물도 두어서는 안 된
다. 사물에 매여 있는 경우가 세가지이다. 미래의 사물이 오지 않았는데
기대하는 것, 과거의 사물에 이미 응하였는데 여전히 남아 있는 것, 현재
의 사물에 바르게 응하였는데 생각이 편중된 것은 모두 사물에 얶매여 있
는 것이다. (또 이러한 사물이 있는데 다른 사물이 와서 응하면 차이가
난다. 성인의 마음은 환하게 비고 밝아서 털끝만한 형적(形迹)도 없어 사
물이 오면 그때마다 사물에 따라 모두 응하지 못함이 없으니 이 마음에
원래 이런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하였다. 주희의 주장은 여기서 그친
다.) 대개 성현의 이 뜻은 마음은 텅비고 고요하기를 바래서 사물에 따라
서 응할 뿐이지 사물을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는 모두 밖의 대응(酬酢)을 주로 하여 말한 것이지, 내 스스로 생각을 일
으킨 곳[起念處]을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무릇 사람은 의당 마음속에 기억
해 두고 잊어서는 안 될 일이 매우 많은데, 예를 들면 아버지와 형제의
나이나 친구의 기탁물을 받아 적고 기억하는 것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
까? 어떤 일은 마땅히 고쳐야 하고, 어떤 임무는 실천해야 하고, 장차 실

 

16 인천학연구 18(2013.2)
- 22 -

 

천하는데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있고, 시작했지만 끝내지 못한 경우가 있
는 이러한 일은 모두 먼저 일을 처리해서 이 마음에 남기지 않을 수 없으
니, 다만 한가하거나 자질구레한 일을 생각없는 가운데 대응하는 것과 같
지 않습니다. 지금 만약 그 완급을 논하지 않고 모두를 마음에 남기지 않
고 반드시 급박하게 면전에 이르기를 기다린 이후에 응하면 이미 빠뜨리
고 잊어버리는 일이 많아서 끝내는 폐지되게 될 것이요, 만일 먼저 헤아
려서 항상 마음속에 남겨둔다면 사물이 이르러 오기 전에 먼저 생각이 일
어나는 일도 있을 것이고 이미 지나갔다가 다시 오는 일도 있어 오만 가
지로 어지러워(紛擾)하여 마음이 안정될 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
게 해야 이 어지러움으로 인하여 마음의 본체를 잃어버리는 걱정을 없애
고 빠뜨리거나 잊어버리는 폐단도 없앨 수 있겠습니까?

 

易言:"寂然不動,感而遂通",程子言:"廓然大公,物來而順應"26),朱子
言:"心不可有一物,其繫於物有三,或事未來而期待,或事已應而長存,或正
應事而意有偏重,都是爲物所繫"(又曰:"便有這箇物事,及別事來到,應之便
差。聖人之心,瑩然虛明,隨物隨應,元不曾有這箇物事"。O朱子說止此)。27)
蓋聖賢之意,心欲虛靜,只隨事物而應之,不可有其事於心也。然此皆就論於
外物酬應之處,而非指自我起念者言之也。凡事之當記留心中不可忘者甚多,
如籍記父兄之年、承受朋友之寄,何可忘也?至於某事之當修、某務之當行,
或有將行而有待者,亦有經始而未了者,如此等類,皆不可不先事經營,留在
此心,非止如閒漫細事,隨來接應於無意之中也。今若勿論其緩緊,一切不
26) 이정문집 2-1 「答橫渠先生定性書」(북경 : 중화서국, 2004)
27) 원문은 주자어류 16-155 心不可有一物, 外面酬酢萬變, 都只是隨其分限應去, 都不關自
家心事. 才係於物, 心便爲其所動. 其所以係於物者有三: 或是事未來, 而自家先有這箇期待
底心; 或事已應去了, 又卻長留在胸中不能忘; 或正應事之時, 意有偏重, 便只見那邊重, 這都
是爲物所係縛. 旣爲物所係縛, 便是有這箇物事, 到別事來到面前, 應之便差了, 這如何會得
其正! 聖人之心, 瑩然虛明, 無纖毫形跡. 一看事物之來, 若小若大, 四方八面, 莫不隨物隨
應, 此心元不曾有這箇物事.
정제두와 송시열의 서신분석 ❚ 조남호 17
- 23 -

 

留必待迫至面前之後而, 應之,則已有爽時遺廢之患矣;又若先自經營,常常
留心,則心中紛然多端,將無有寧靜時,其於聖賢之訓相去遠矣。何如則心旣
無紛擾有物之失,而事亦可免於遺廢耶?28)
정제두는 마음에 생각이 많아서 어지러운 경우가 많았나 보다. 그래서
성인의 글을 보았는데 의문이 났던 것이다. 주역이나 정호, 주희의 글을
보고서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주역은 고요하게 있다가 감응하라고
하고, 정호는 마음을 탁트이게 하여 공적으로 대응하면 밖의 사물도 그에
알맞게 적응한다고 한다. 주희는 네가지 감정(忿懥·恐懼·好樂·憂患)이
하나라도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한다. 정제두는 이러한 주장들이 성현의
말로 모두 마음을 비워서 고요하게 하면 대상에 적응할 수 있는 문제로
보았다. 여기서 마음을 비워서 고요하게 하는 것은 앞서 말한 네가지 끊
는 것과 연관이 된다.
그런데 정제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주장들이 모두 마음이 외
부 사물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생각에 관한 것이고,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답을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꼭 기억해야 할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잊어버려야 할 일이다. 부모의 나이 등은 기억해야 하는데 이것을 마음속
에 담아 두어서는 안된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다 일을 중간에 끝내지 못
하면 마음에 남아 있는 것 등의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28) 송시열의 송자대전 에는 하곡집 과 약간 다르다. 송자대전 卷119 「答鄭士昂」, 曰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曰 廓然大公, 物來順應. 皆言其心本虛靜, 隨事物而應之
也. 朱子亦曰 心不可有一物. 聖人之心, 瑩然虛明, 無纖毫形迹, 事物之來, 莫不隨物隨應,
此心元不曾有這箇物事. 又曰。事過則不留於心可也, 亦謂其隨至隨應, 而不可常有於心也.
然此皆主外面酬酢而言, 未嘗言自我起念處也. 凡人有當記留于心中而不可忘去者甚多, 此皆
自我起念而當記在心中者, 不是外面來感者也. 此類多在心中, 頭緖不一. 若一齊放下, 必待
至面前而後應之, 則事多遺忘, 終必廢閣. 若患其遺忘而記留心中, 則其未來而先起者有之,
已過而復來者有之, 紛擾多端, 心無寧靜之時, 不知如何? 可以無紛擾失本體之患, 而亦無遺
忘之弊耶?
18 인천학연구 18(2013.2)
- 24 -

 

렇다고 먼저 헤아려서 마음에 남겨두면 마음속이 어지러워져 편안하지 않
게 된다. 마음에서 어지럽지 않고, 일에서 빠뜨리지 않는 경우가 가능한
것인가를 문제삼는다. 그는 마음 안에서 두 가지 현상 즉 기억해야 될 것
을 잊는 현상과 잡념이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정
제두는 마음과 대상의 관계를 문제삼지만 마음안의 생각에 초점이 맞추어
져 있다. 마음과 대상의 문제라면 이미 정호나 주희의 주장도 하나의 해
결책이 될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열쇠라고 보지는 않았다.

 

송시열의 답변
이 문단에서 인용한 여러 주장은 모두 적중한 말이네. 보내온 글의 뜻
을 자세히 보니, 그 핵심은 외물과의 대응과 내 스스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의 서로 다른 점에 있었을 뿐이었네. 그러나 내 스스로 생각을 일으키
는 것 또한 어찌 외물에 말미암지 않겠는가? 비록 상고(上古)의 일을 생
각한다 하더라도 상고 역시 외물이며, 하늘 밖(天外)의 일을 생각한다 하
더라도 하늘밖 역시 외물인 것일세. 천리의 인·의·예·지와 내 마음의
사단 칠정이 모두 사물인데, 어찌 사물을 놓아두고 내 스스로 특별히 일
으키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이 생각이 사물로 인해서 일어나
는 것을 안다면, 자네가 의심하고 있는 것은 환연히 얼음 녹듯 풀릴 것이
네. 이 뜻은 이이 선생이 일찍이 이황의 주장을 논변한 데서 자세히 말하
였네.
答書曰:此段所引諸說,皆得之,而細看來意,則其緊要處,在於外物酬
酢、自我起念之同異而已,然自我起念者,何嘗不因於外物耶? 雖思上古之事
上古亦外物也,雖思天外之事,天外亦外物也. 天理之仁義禮智、吾心之四端
七情,莫非物也,何嘗遺物而有自我別起之念乎? 旣知此念之因物而起,則來
諭所疑,渙然冰釋矣,此意,栗谷先生嘗於論卞退溪說,詳言之矣.
정제두와 송시열의 서신분석 ❚ 조남호 19
- 25 -

 

송시열은 먼저 성인의 말은 적절한 것임을 주장하여 정제두가 성인의
말을 의심하는 것을 지적한다 . 다음으로 정제두가 마음과 대상의 관계인
가 아니면 마음안의 생각인가라는 문제에서 전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음의 생각도 대상과 관계 속에서 나타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마
음과 대상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송시열은 생각이 일어나는 것
은 이발의 문제라고 본다. 생각이 작동하는 상황에서는 공적인 것과 사적
인 것을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송시열은 이 문제를 사단과 칠정의 문제로 보고 있다. 그는 이이와 성
혼의 편지를 제시한다. 이황이 사단은 마음 속에서 발동하는 것, 칠정은
마음밖의 외물에 대해서 발동하는 것이라고 하자, 성혼은 이것을 가지고
이이에게 질문을 한다. 이이는 사단과 칠정 모두 마음 밖의 사물에 대해
서 반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9) 이이와 송시열은 모두 사단칠정 모두
마음 밖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문제로 보고자 한다. 사단이나 칠정
이 다른 감정이 아니고 기원도 같다고 하는 것이다. 이이와 송시열은 모
두 경험적인 사고에서 입각해있다.

 

정제두의 재답변

 

29) 栗谷先生全書 卷10 「答成浩原壬申」 退溪與奇明彦論四七之說, 無慮萬餘言. 明彦之論,
則分明直截, 勢如破竹. 退溪則辨說雖詳, 而義理不明, 反覆咀嚼, 卒無的實之滋味. 明彦學
識, 豈敢冀於退溪乎? 只是有箇才智, 偶於此處見得到耳. 竊詳退溪之意, 以四端爲由中而發,
七情爲感外而發, 以此爲先入之見, 而以朱子發於理發於氣之說, 主張而伸長之, 做出許多葛
藤. 每讀之, 未嘗不慨嘆, 以爲正見之一累也. 易曰, 寂然不動, 感而遂通. 雖聖人之心, 未
嘗有無感而自動者也, 必有感而動, 而所感皆外物也. 何以言之? 感於父則孝動焉, 感於君則
忠動焉, 感於足則敬動焉, 父也君也兄也者, 豈是在中之理乎? 天下安有無感而由中自發之情
乎? 特所感有正有邪, 其動有過有不及, 斯有善惡之分耳. 今若以不待外感由中自發者爲四端,
則是無父而孝發, 無君而忠發, 無兄而敬發矣, 豈人之眞情乎? 今以惻隱言之, 見孺子入井, 然
後此心乃發, 所感者, 孺子也, 孺子非外物乎? 安有不見孺子之入井, 而自發惻隱者乎? 就令
有之, 不過爲心病耳, 非人之情也.
20 인천학연구 18(2013.2)
- 26 -

 

이른바 고요함(적연) 탁트임(확연)은 마음이 사욕이 없고 고요하여 얽
매임이 없다는 뜻이지, 사물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
다.(이것은 마음의 본체로 말하는 것이지, 사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은 사람의 마음이 항상 가지고 있는 것인데 어찌 사물에 대한 생각을
끊고서 고요함을 구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마음에는 사물이 없을 수
없고, 다만 사욕이 없어야 한다. 사욕이 없기 때문에 그 본체는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주희가 말한 하나의 사물도 없다는 사욕에 얽매
임을 경계한 것이다. 마음의 본체는 과연 얽매임이 없고 고요하여 움직이
지 않으면 사물에 대한 생각이 많더라도 어찌 고요함에 방해가 되겠는가?
이것이 정호가 말한 「정성서」의 뜻이다.
按:所謂寂然、廓然者,是心無私欲寂然無纍之意,非謂不念事物也(是以其
心體言,非以其事物言也)。事物則人心所常有,豈有斷置事物之念,而求爲寂
然者乎?然則心未可無事物,只要無私欲,無私欲,故其體寂然不動。朱先生
所云("不可有一物"),亦戒其有私欲之纍也,心體果能無所纍而寂然不動,則
事物之念雖多,何妨於寂然?此定性書之意也。
송시열이 정제두가 성현이 말한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 것에 자극
을 받아, 정제두는 자기 속내를 드러낸다. 마음에 잡다한 생각이 있는 것
은 어쩔 수 없다. 이것을 없애려고 해서는 안된다. 사물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사적인 욕망이 문제인 것이다. 사적인 욕망을 제거해서 없애야 하
는 것이다. 사적인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탁트
이게 해야 한다. 이것은 마음의 본체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고
요함이고 탁특임이다. 성현의 말을 부정하다가 다시금 성현의 말을 재해
석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한 본체가 확립되어야 사물에 대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제두와 송시열의 서신분석 ❚ 조남호 21
- 27 -

 

정제두는 먼저 마음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부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것
을 부정하면 할수록 더욱더 잡념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마음
의 본체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그런데 초학자는 마음의 본체로는 직접적
으로 들어갈 수 없다. 잡념이 생기는 것을 계속 관찰하다보면 생각이 끊
어지는 무념무상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이 본체이다.
양명학에서는 본체에 대한 직접적인 체인을 강조한다. 양명학에서 본체
는 주자학적인 의미에서 의식이 작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심층 의식을 뜻
한다. 정제두는 마음의 본체를 깨닫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30)아직 정제두는 거기까지 이론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이것이 정
호가 말한 마음이 고요하거나 움직이거나 안정되게 되는 방법이라고 한
다. 나중에 정제두는 「정성서해」(定性書解)31)와 「정성문」(定性文)이라 글
을 지어서 자신의 이론을 확립한다. 사물은 마음이 가지는 것이고, 마음
이 사물을 주재할 있다. (크게는 인륜적인 사물부터 작게는 온갖 작용까
지, 가까이는 몸부터 멀리는 여러 사물까지, 만나는 호오와 득실은 모두
사물이다) 만물은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으니, 마음 속에 어찌 사물을
적게할 수 있겠는가! 32)

 

30) 이러한 논의는 불교나 도교적인 체험을 염두에 둔 것이다. 정제두는 이러한 체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양명우파도 이러한 체험을 공유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양명우파는 고요
한 본체를 체험하는 것에 대한 공부를, 양명좌파는 그러한 체험보다는 직접적인 활용을
강조한다. 정제두를 양명우파적인 사고로 규정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조남호, 「霞
谷學與霞谷學派的淵源和特徵」 朝鮮儒者對儒家傳統的解釋 , (臺灣 : 臺大出版中心, 2012,)
232-245쪽
31) 「하곡집」, 권16
32) 하곡집 권8 존언 16、定性文 天地萬物,孰爲之主?曰:惟人心,乃其神首(一作卽是其
神)。帝降其哀,天縱其明,維皇之極、維帝之則、有生之源、有物之君(一作天)。是能體物,
是能命物,萬理以備(一作生),萬事以興(一作敘),有萬其品,皆是其物(一作之鍾),有萬其
倫,皆斯之用。天下之本,於是而出,擧天地間,無能喩者。立其大者,物莫能奪。性苟得
定,物無不職。物致其知,性斯天出。立心克己,戒懼存省。苟不至德,至道不凝(天地萬
物,心是其精,天地萬物,心爲其神,蓋乎天地萬物之精,發而開竅于心,賦而命德于性,一
點靈明,慼通爲竅,天則之眞,無不具足,以爲天地萬物之主宰,以爲天地萬物之權衡故
也)。17、又一本 物者心之有,心所以宰物(大而倫事,少而百用,近而身體,遠而衆物,所遇
之好惡得失,皆物也)。萬物無得動吾心,心中寧有可少物!性定物順,斯至性(至知性),知惟
22 인천학연구 18(2013.2)
- 28 -

 

송시열이나 정제두 모두 정호의 「정성서」를 두고 자신의 생각을 개진한
다.33) 송시열은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것은 마음이 외부 사물과의 관계에
서 제대로 적응하면 된다고 하는 사고이고, 정제두는 마음의 내부 생각의
문제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송시열은 마음의 문제를 밖의 대상과 관련해
서 해결하고자 한다. 이는 주자학적인 사고로 격물과 상통한다. 주자학에
서 격물은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
면 할수록 내 마음의 이치가 밝아진다고 한다. 감정의 문제도 외부 사물
과의 관계속에서 올바른 이치를 추구하게 되면 감정의 문제를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정제두는 마음의 문제는 안의 생각과 관련해서 해
결하고자 한다. 이는 양명학적인 사고로 격물과 상통한다. 내 마음속에 떠
오르는 생각을 바로 잡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5. 독서와 일

 

정제두의 질문

 

정자(程子)가 말하였다.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로 쓸 수가 없다. 이것
은 일마다 하나를 주로 한다는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무
에 번다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무가 이미 없애 버릴 수 없으면 독서하여
리를 논하는 것도 마땅히 늦추어서는 안되니, 여기에 전념하려고 하면 저
기에 전념할 수 없고 마음이 저기로 들어가면 여기로는 들어올 수 없으
니, 어지러워 하다가 그만두게 되어 전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감정과

 

其主(一體要),愼惟功,日新須要(一體知),日日新,苟不至德,道不凝。18、又一本 天地萬
物,其神在心,是能生物,萬理以形,有萬其倫,皆心之用,尊立其大,物無能動,性苟得
定,物無不職(吾之性得定,則物皆無不得者),物致其知,性斯天復(於物各致其知,則性斯至
於命矣。所謂聖人盡性以至於命也),立心克已,戒懼存省,苟不至德,至道不凝。
33) 정성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손영식, 이성과 현실 , (울산 : 울산대출판부, 1999)
167-169쪽
정제두와 송시열의 서신분석 ❚ 조남호 23
- 29 -

 

의지를 나누어 그 마음을 둘로 나누는 근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모두 공
부이지만, 서로 방해가 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程子謂:"人心不可二用",此固以逐事主一言之也。然如今又有事務繁多者
矣,事務旣不可廢,讀書講理亦未宜緩,而或專於此則不能專於彼,入於彼則
不能入於此,紛紜作輟,非惟無以並專,將不無分精(情)34)岐意二用其心之患
矣。俱是工夫而相妨若此,則奈何?35)
주자학에서 성현은 마음을 하나로 해야만 한다고 한다. 하나로 하는 방
법은 마음을 경건히 해야 한다. 그러게 되면 두가지로 마음을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36) 그런데 이러한 방법으로도 정제두의 마음은 안정되지 않
았다. 정제두는 마음과 대상의 문제를 조금 더 분명하게 제시한다. 한편으
로는 독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일을 처리해야하는 상황이 나온 것이
다. 여기서 하나를 하면 다른 하나를 집중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
다. 이 속에서 마음이 안정되지 못한 것이다.

 

송시열의 답변

 

34) 의미상 情으로 써야 한다.
35) 송시열의 송자대전 에는 하곡집 과 약간 다르다. 송자대전 卷119 「答鄭士昂」, 程
子曰, 人心不可二用. 用之於一事, 則他事不能入. 此言心之體也. 敬之所以必主一而無適
者, 亦此也, 不可緩也. 欲專於此則不能專於彼, 方入乎彼, 則不能入於此, 非徒不能以並
專, 亦不無分精岐意二用其心之患, 奈何?
36) 하남정씨유서 15-177 學者先務, 固在心志. 有謂欲屛去聞見知思, 則是「絶聖棄智」. 有欲
屛去思慮, 患其紛亂, 則是須坐禪入定. 如明鑑在此, 萬物畢照, 是鑑之常. 難爲使之不照. 人
心不能不交感萬物, 亦難爲使之不思慮. 若欲免此, 一本無此四字. 唯是心一作在人. 有主.
如何爲主? 敬而已矣. 有主則虛, 虛謂邪不能入. 無主則實, 實謂物來奪之. 今夫甁甖, 有水
實內, 則雖江海之浸, 無所能入, 安得不虛? 無水於內, 則停注之水, 不可勝注, 安得不實? 大
凡人心, 不可二用, 用於一事, 則他事更不能入者, 事爲之主也. 事爲之主, 尙無思慮紛擾之
患, 若主於敬, 又焉有此患乎? 所謂敬者, 主一之謂 敬. 所謂一者, 無適之謂一. [且欲涵泳主
一之義, 一則無二三矣. 一作不一則二三矣. 言敬, 無如聖人之言. 一無「聖人之言」四字. 易
所謂「敬以直內, 義以方外」, 須是直內, 乃是主一之義. 至於不敢欺·不敢慢·尙不愧於屋漏,
皆是敬之事也. 但存此涵養, 久之自然天理明.
24 인천학연구 18(2013.2)
- 30 -

 

정자가 구사(九思)에서 각각 그 한 가지를 전심하도록 한 훈계가 있으
니, 이 뜻을 알면 자네가 병통으로 여긴 것에 대해 저절로 그 약(藥)을 알
게 될 것이네.”
答書曰:程子於九思,有各專其一之訓,知此則來諭所病,自知其藥矣。
송시열은 이에 대해 주자학적인 관점에서 정호의 관점을 준수하라고 원
론적인 답변만을 하고 있다. 정호는 논어의 구사를 인용하면서 각각의 일
에 전념하라고 한다.37) 논어 의 구사는 볼때는 명철한지 생각하고, 들을
때는 분명하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안색은 온화한지 생각하고, 외모는 공
손하지 생각하고, 말은 충직하지 생각하고, 일처리는 공경한지 생각하고,
의문에는 질문을 생각하고, 분노에는 나중의 곤경을 생각하고, 재물을 보
면 의로움을 생각한다는 것이다.38) 각각의 일마다 전념하지 못하는데서
문제라는 것이다. 송시열은 정제두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
면 이해했는데도 모른 척한 것이지 모른다. 다만 정제두를 깨우쳐주지 못
한 것이다.

 

정제두의 재답변

 


사무처리는 독서의 작용이고, 독서는 사무처리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여,
서로 바탕이 되어 그 완급, 진퇴, 넉넉함과 뺌에 따르면 둘은 서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대립적인 것으로 여기
면 비록 서로 병통이 되지 않더라도 가능하겠는가? 아 어찌 사무처리나
독서만이 그러하겠는가?

 

37) 하남정씨외서 2-18 (북경 : 중화서국, 2004)九思各專其一<伯淳>
38) 孔子曰: 君子有九思: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정제두와 송시열의 서신분석 ❚ 조남호 25
- 31 -

 

按以事務爲讀書之: 用,讀書爲事務之源,互爲之資,而亦隨其緩緊,進退
饒減,則二者又可以相益矣。如或不察乎是而背馳焉,則雖欲不相病,得乎?
噫!奚獨事務、讀書之爲然哉?

 

이에 대해서 정제두는 사무처리나 독서가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
니라 독서를 근원, 사무처리를 작용으로 이해한다. 이는 지행합일적인 사
고와 연관된다. 독서(지)와 사무처리(행)가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지행합
일은 현상적인 차원에서 하나가 아니라 본체의 차원에서 볼 때 하나이다.
정제두에게서는 아직 이에 대한 논의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차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주자학과 양명학의 근본적인 문제
가 드러난다. 양명학에서 마음의 어지러움은 일마다 경건해서 되어야 하
는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마음의 본체를 깨닫게 하는 문제이다. 그렇
지 않게 되면 일에 매여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반면에 주자학에
서는 마음의 본체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을 처리하다보면 깨달
음이 온다고 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마음의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인 기준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Ⅳ. 결론
정제두는 서인 명문가의 자제로 송시열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그는 남언경, 최명길등의 심학적 사고를 양명학적 사고로 재정립하면서 이
론의 정점에 도달하였다.39) 그가 양명학적 사고를 처음부터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내면적으로 마음의 사려분요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

 


39) 조남호, 「霞谷學與霞谷學派的淵源和特徵」, 朝鮮儒者對儒家傳統的解釋 , (臺灣 : 臺大出
版中心, 2012) 229-232쪽
26 인천학연구 18(2013.2)
- 32 -

 

는 이것을 풀길이 없어 당시 학계의 최고봉인 송시열에게 질문을 한다.
직접적인 자신의 절박한 문제를 기술하기 보다는 유가 경전이나 주희의
저작등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장량의 본심, 이혼한 여자
의 상복과 개가, 사적인 생각과 공적인 생각, 사려분요, 독서와 사물처리
등의 차례로 질문을 한다. 이는 본체의 마음과 그것의 현실적 적용, 그리
고 그것을 이르기 위한 공부방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정제두는 아직
양명학적인 개념이나 학문체계를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속에
는 충분히 양명학으로 발전될 수 있는 단서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정제
두는 양명학을 묵수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인 고민 속
에서 해석하고자 했던 것이다. 양명학은 양지라는 개념적인 이해보다는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송시열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쉽
게 주자학적인 답변을 하고 만다. 주자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제두의
실존적인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좀 더
논쟁을 지속하지 못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작업은 박세채와 민언
휘에 의해서 좀 더 치열하게 전개된다. 송시열의 과제가 이들에게 맡겨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제두와 송시열의 대립은 양명학과 주자학적인 사
고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양명학의 실존적인 고민과 그에 대한 주자학
의 체제 수호적인 객관적인 사고를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