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무 중유두류(重遊頭流)

2017. 6. 6. 13:27옛산행기

서계 박태무는 60세(1736년 가을) 때 두류산을 유람하고 기행시 36수를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유두류산기행(遊頭流山記行)』이다. 다시 69세(1745년)에 지리산을 유람하고 그 절반인 18수의 시를 남겼는데 여기 『중유두류(重遊頭流)』이다.

 

그의 유람 경로는 그가 쓴 詩로 보건대 「백운동 → 옥녀봉 → 불장암·만화담 → 송객정 → 삼장사 → 대원암 → 공전 → 오대사 → 가례암·백암 → 안계(옥종) → 진주」로 추정된다.

‘유두류산기행’의 계절은 가을이었고 ‘중유두류산’의 계절은 봄이다. 그의 시에, “화창한 봄날·연초록 산수유 잎·철쭉꽃(이상 ⑨번 시), 두견새(⑪), 봄놀이(⑭), 봄이 와도(⑯)…” 등의 구절을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2013년 그의 '유두류산기행'詩를 번역하면서 '중유두류'詩까지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얼마전 그의 사라진 글을 복구하면서 내친 김에 같이 번역하였는데, 그동안 경황이 없어 이제사 다듬어 올린다. 짐을 덜은 느낌이다.

 

 

① 白雲洞和河千期必淸(백운동화하천기필청)/백운동에서 하천기(이름은 필청)1)에게 화답하다

先生三入白雲洞(선생삼입백운동) 선생(*남명)이 세 번이나 들어간 백운동에는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만 천년동안 유유히 오가는데

爲問白雲雲不語(위문백운운불어) 흰 구름에게 물어봐도 구름은 말이 없고

獨立斜陽小子愁(독립사양소자수) 석양에 홀로 서서 시름겨워 하노라.

 

註1) 하필청(河必淸 1701-1758) : 자 천기(千期), 호 태와(台窩), 본관 진양, 거주 진주. 태와문집(台窩文集)이 있다.

 

② 觀上下瀑敬次南冥先生韻(관상하폭경차남명선생운)/위아래 폭포를 구경하고 삼가 남명선생의 시1)에 차운하여

山自悠悠水自悠(산자유유수자유) 산은 저절로 한가하고 물 또한 한가하게 흐르는데

白雲淸瀑洞天幽(백운청폭동천유) 흰 구름 맑은 폭포, 골짜기는 깊고

先生一去無消息(선생일거무소식) 선생은 한번 간 뒤 소식이 없으니

誰是千年隱者流(수시천년은자류) 그 누가 천년의 은자인가?

 

註1) 남명선생의 「유백운동(遊白雲洞)」시는 다음과 같다. 자세한 풀이는 문화유적명소/‘남명선생장구지소’를 참고하시라.

天下英雄所可羞(천하영웅소가수) 천하 영웅들이 부끄러워하는 바는

一生筋力在封留(일생근력재봉류) 일생의 공이 유(留)땅에만 봉해진 것 때문

靑山無限春風面(청산무한춘풍면) 끝없는 청산에 봄바람이 부는데

西伐東征定未收(서벌동정정미수) 서쪽을 치고 동쪽을 쳐도 평정하지 못하네.

 

여기서 남명의 운(韻)은 1,2,4구의 수(羞)·류(留)·수(收)이나 박태무의 운은 유(悠)·유(幽)·류(流)이다. 이처럼 차운(次韻)은 반드시 원시(原詩)와 똑 같은 글자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순서를 바꾸기도 하고[用韻], 같은 운에 속하는 다른 글자를 쓰기도[依韻] 한다.

 

③ 玉女峯(옥녀봉)/옥녀봉에서

川上亭亭玉女峯(천상정정옥녀봉) 시냇가에 우뚝 솟은 옥녀봉2)

依然浮在畵圖中(의연부재화도중) 의연하게 그림 속에 떠있는 듯 하구나!

有水流觴洄九曲(유수류상회구곡)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면1) 아홉 굽이나 돌 것 같고

臨風却憶武夷翁(임풍각억무이옹) 불어오는 바람에 문득 무이옹(*朱子)이 생각나네.

 

註1) 구불구불한 물길에 술잔을 띄워 술을 마시는 풍류를 유상곡수(流觴曲水)라 하며, 왕희지(307-365)의 난정집서(蘭亭集序)에 처음 등장한다. 흔히 경주 포석정도 그 놀이의 흔적으로 본다.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연상하며 구곡·무이(옹)·옥녀봉이란 시어를 쓴 것 같다. 옥녀봉은 무이구곡의 2번째이다.

 

2) 옥녀봉은 전국에 무수히 많다. 朱子(1130-1200)의 영향으로 구곡이라 이름 붙인 데는 거의 다 옥녀봉이 있다. 성리학 정착 이후 구곡은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되었으며, “○○九曲”이라 이름붙인 곳은 전국에 100여 군데가 넘는다 한다.

 

또 풍수에서는 삼각형 모양의 단정하고 다소곳한 산을 옥녀봉이라 하여 길지(吉地)로 친다. 그래서 옥녀봉이 없는 고장이 없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옥녀봉이 어느 곳인지 정확히 지칭할 수는 없지만, 추측컨대 단속사지 뒤, 청계저수지 앞 414.4m 봉우리가 아닌가 싶다. 운리 쯤에서 바라보면 영락없이 미녀가 치마로 몸을 감싸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물론 지금도 그 동네 사람들은 옥녀봉이라 부른다.

 

옛기록을 좀 뒤적여봤더니, “대현촌(*청계저수지 부근) 아래에 옥녀봉이 있다, 안동 권씨(*입석이 집성촌이었다)의 선영으로 단속리에 있다, 봉우리 아래에 단속사터가 있다, 옥녀봉 아래에 정당매가 있다, 골을 雲谷(*지금의 운리)이라 하고 뒤의 봉우리를 옥녀봉이라 한다…” 등등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박태무가 백운동을 구경하고 내원사 계곡으로 향하면서 단속사지와 함께 들렀지 않나 싶다.

 

④ 訪佛莊庵和河觀夫大觀(방불장암화하관부대관)/불장암1)을 찾았을 때 하관부(이름은 대관)2)에게 화답하다

殘年無好事(잔년무호사) 남은 생애 좋은 일 없고

泉石最膏肓(천석최고황) 산수를 사랑하는 병3)이 최고로 깊었네.

落花看可愛(낙화간가애) 떨어지는 꽃도 사랑스럽고

芳草坐何妨(방초좌하방) 방초에 앉은들 무슨 상관이랴?

溪聲添宿雨(계성첨숙우) 시냇물 소리에 어젯밤 내린 비가 더해지고

山影帶斜陽(산영대사양) 산그림자는 석양 따라 길어지네.

雲壑迷歸路(운학미귀로) 구름 깊은 골짜기 돌아갈 길을 잃어

逢僧問佛莊(봉승문불장) 스님을 만나 불장암을 묻네.

 

註1) 불장암(佛庵)은 불장암(佛庵)으로 표기하는 게 맞을 것이다. 불장(佛藏)은 불경(佛經) 또는 부처의 가르침을 뜻하고, 또 다른 사람의 기록에도 다 불장암(佛藏庵)으로 되어 있으니까.

 

2) 하대관(河大觀 1698-1776) : 자 관부(寬夫), 호 괴와(愧窩), 본관 진양, 하동 안계 거주, 문집으로 괴와집(愧窩集)을 남겼다.

 

3) 천석고황(泉石膏肓) : 산수를 사랑하는 병이 깊어 고칠 수 없다는 뜻. 연하고질(煙霞痼疾)이라고도 한다. 고황(膏肓)은 심장과 횡격막 부위를 가리키며, 옛날에는 병이 여기까지 미치면 치유불가라 여겼다.

 

⑤ 敬次南冥先生聲字韻(경차남명선생성자운)/삼가 남명선생의 ‘성(聲)’字 운을 따라 짓다

洪鐘無大扣(홍종무대구) 거대한 종은 크게 치지 않으면

千古竟含聲(천고경함성) 천고에 끝내 소리만 품고 있울 뿐.

請看頭流山(청간두류산) 저 두류산을 보게나,

山豈學天鳴(산기학천명) 산이 어떻게 하늘이 우는 것을 배우는지.

 

註) 잘 알다시피 남명의 원시는 이렇다.

 

題德山溪亭柱(제덕산계정주)/덕산 시냇가 정자의 기둥에 쓰다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저 거대한 천석들이 종을 보게나

非大扣無(비대구무)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네.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어찌하면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 수 있을까?

 

⑥ 萬花潭(만화담)/만화담1)에서

天王峯下薩川湄(천왕봉하살천미) 천왕봉 아래 살천가를

綠玉穿霞步步遲(녹옥천하보보지) 녹색 구슬이 노을을 뚫고 흐르는 모습 보며 천천히 걸어

潭名紅到新春驗(담명홍도신춘험) 이름처럼 붉게 변한 깊은 물[萬花潭]에 이르니 새봄이 온 것을 알겠고

山色蒼因霽景奇(산색창인제경기) 비 개인 산색은 푸르러 경치 더욱 기이하다.

無非絶勝挽吾輩(무비절승만오배) 뛰어나지 않은 곳이 없는 경치가 우리를 이끌어

何幸淸遊及此時(하행청유급차시) 때맞춰 노닐게 하니 얼마나 행운인가!

遙望白雲深處去(요망백운심처거) 멀리 흰 구름은 깊은 곳으로 흘러가고

東風吹送萬花飛(동풍취송만화비) 동풍이 불어와 만 송이 꽃잎을 흩날려 보내네.

 

註1) 내원사 계곡 명옹대(明翁臺) 바위 이랫쪽에 ‘만화담(萬花潭)’ 각자(刻字)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산유화님의 지리다방/지리산 나들이 2탄(구곡계곡) 참조.

 

⑦ 佛莊庵喜金上舍伯厚來會(불장암희김상사백후내회)/불장암에서 김상사1) 백후(이름은 돈墩)를 만나 기뻐하며

千峯錦照耀(천봉금조요) 천 봉우리는 비단처럼 밝게 빛나고

萬壑玉紛流(만학옥분류) 만 골짜기의 옥 같은 물 어지러이 흐르는 곳,

巖間歸路細(암간귀로세) 바위 사이 오솔길을 돌아가니

林下小庵幽(임하소암유) 숲속에 작은 암자 깊이 숨어 있네.

故人來白髮(고인래백발) 어떻게 하면, 백발이 된 고인을 오게 하고

仙子自丹邱(선자자단구) 신선을 별천지에서 불러와

題品慈恩興(제품자은흥) 이 좋은 경치를 품평하는 그런 고마운 기회를 만들어

何如此勝遊(하여차승유) 이 절승에서 놀 수 있을까?

 

註1) 상사(上舍)는 진사나 생원을 말함. 김돈(金墩 1702-1770)은 자가 백후(伯厚), 호가 묵재(黙齋)로 산청 법물 사람이며, 묵재문집(黙齋文集)을 남겼다.

 

⑧ 送客亭(송객정)/송객정1)에서

南冥曾送德溪歸(남명증송덕계귀) 남명이 일찌기 덕계를 보내고 돌아온 곳

亭樹含情遠別離(정수함정원별리) 정자 옆 나무는 먼 이별의 정을 품고 있으리.

分付兒曺須勿翦(분부아조수물전) 아이에게 이르노니, 저 나무는 자르지 마라

此翁俱是士林師(차옹구시사림사) 두 어른 모두 사림(士林)의 스승이거니.

 

註1) 《진양속지》에 “주(州 *진주)의 서쪽 삼장면 덕교리에 있다. 오덕계 건(德溪 吳健, 1521-1574)이 남명을 뵙고 돌아갈 때면 남명이 반드시 여기에서 보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그 이름을 얻었다.” 하였다. 이후 송객정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⑨ 宿三藏寺(숙삼장사)/삼장사에서 자며

萬疊孱顔裏(만첩잔안리) 만 겹이나 둘러싸인 높고 험한 산속에

三藏大耳基(삼장대이기) 삼장사는 삼장 대이1)가 터를 잡은 곳

本來幽邃勝(본래유수승) 본래부터 그윽하고 깊은 절경인데

方値艶陽時(방치염양시) 때마침 시절은 화창한 봄날이라

軟綠茱萸葉(연록수유엽) 연초록 산수유 잎 돋아나고

深紅躑躅枝(심홍정촉지) 철쭉꽃2)은 빨갛게 피었네.

胸中無世累(흉중무세루) 가슴 속엔 번잡한 세상사 없어

夜靜話厖眉(야정화방미) 고요한 밤 눈썹 긴 노승과 이야기 나누네.

 

註1) 삼장 대이(三藏大耳)스님은 서천(인도)에서 당나라로 와 타심통(他心通)에 통달했다고 자랑하다가 당시의 유명한 선승(禪僧) 혜충국사에게 혼이 난 스님인데, 그 스님이 삼장사를 세웠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아마 인도스님 연기조사가 화엄사를 세웠다는 설화처럼 그런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삼장사의 절이름 유래에 관해서는 지명탐구방의 「삼장사(三壯寺)인가, 삼장사(三藏寺)인가?」를 참조하시라.

 

2) 철쭉은 보통 소리 나는대로 척촉(躑躅)으로 표기하는데, 원전(原典)에서는 艸(艹)+鄭 艸(艹)+躅(척촉)으로 표기되어 있다. 인터넷에서는 이 한자를 표기할 방법이 없어 그냥 躑躅으로 고쳐 표시하였다.

독성이 있는 철쭉꽃을 염소가 먹으면 마비증상이 있어 다리를 쩔뚝거리며 맴돈다고 하여 꽃이름이 쩔뚝꽃>철쭉꽃이 되었다는 그럴싸한 설이 있다.<민간어원설>

 

⑩ 訪大源庵(방대원암)/대원암을 찾아

幾重山又幾重溪(기중산우기중계) 몇 겹의 산과 또 몇 겹의 시내를 지나

山盡溪窮又一溪(산진계궁우일계) 산이 끝나고 시내가 다한 곳에 또 하나의 시내가 있고

溪上有山山有室(계상유산산유실) 시내 위에 산이 있고 산속에 집이 있으니

莫向廬山訪虎溪(막향여산방호계) 구태여 여산의 호계1)를 찾을 것 없다.

 

註1) 중국 동진(東晋)의 慧遠스님(334-416)은 강서성 여산(廬山)에 동림사(東林寺)를 짓고 열반할 때까지 30여년 동안 벗어나지 않았다. 손님을 보낼 때에도 절앞 호계(虎溪)의 돌다리는 건너지 않았는데, 어느날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 두 사람이 방문했을 때 청담에 열중한 나머지 두 사람을 보내면서 무심코 호계(虎溪)를 건너고 말았다 한다. 범이 포효하는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된 세 사람이 크게 웃었다는 고사가 있다. [虎溪三笑]

 

⑪ 聞子規(문자규)/두견새 소리를 듣고

恣意煙霞久不歸(자의연하구불귀) 마음껏 산수에 놀며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더니

子規啼送不如歸(자규제송불여귀) 두견새 울면서 돌아가라고[不如歸]1) 하네.

不如歸坐書牀下(불여귀좌서상하) (방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收斂身心定所歸(수렴신심정소귀) 몸과 마음을 다잡아 돌아갈 곳을 정하였네.

 

註1) 고대 중국 촉(蜀)나라 임금 망제(望帝)는 임금 자리에서 쫒겨나 신세를 한탄하며 울다가 죽었는데, 그의 영혼은 두견새가 되어 밤마다 ‘불여귀(不如歸 돌아가고 싶다)’하면서 목에 피가 나도록 울었다고 한다. 접동새·자규(子規, 蜀子規)·귀촉도(歸蜀途)·두우(杜宇)·망제혼(望帝魂) 등으로도 불린다.

 

⑫ 歸到公田省墓(귀도공전성묘)/돌아오다가 공전1)에 이르러 성묘하다

慟哭荒山雨露濡(통곡황산우로유) 황량한 산, 비와 이슬에 젖어 통곡하는데2)

斑衣兒已白頭鬚(반의아이백두수) 색동옷 입었던 아이는 어느덧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세었다네.

年來久曠晨昏拜(년래구광신혼배) 근래 오랫동안 아침 저녁3)으로 성묘해야 하는 도리를 빠뜨렸으니

慙愧人間不孝吾(참괴인간불효오) 참으로 인간으로서 불효한 내가 부끄럽구나.

 

註1) 공전(公田)은 지금의 내공·외공을 가리킨다.

2) 조상의 무덤을 모신 산이 찾는 이 없어 황량하고 게다가 비와 이슬에 젖은 것을 보고 통곡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3) 신혼(晨昏)은 혼정신성(昏定晨省)으로, 저녁에는 잠자리를 살피고 아침 일찍 문안을 드린다는 뜻. 효도하는 구체적 방법으로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는 자주 조상묘를 찾아뵈야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⑬ 五臺寺老杏(오대사노행)/오대사의 늙은 은행나무

擇不處仁焉得智(택불처인언득지) 어진 곳을 가려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1)

昌平門外講壇高(창평문외강단고) 창평2)의 문 밖 강단은 높은데

何事蔥林無味地(하사총림무미지) 무슨 일로 무성한 나무가 의미 없는 땅에서3)

等閒生長倚空皐(등한생장의공고) 아무렇게나 자라 빈 언덕에 기대어 섰나?

 

註1) 출전은 《논어》「이인(里仁)」편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智?(이인위미 택불처인 언득지)”이다.

옛날부터 이 문장의 해석에는 논란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2가지 해석만 보자. 먼저 주자의 해석은 이렇다. “마을은 인후한 풍속이 있는 것이 아름다우니, 마을을 택하여 인후한 곳에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

다산은 “仁에 거처하는 것이 아름답다. 거처할 곳을 택하되 仁에 거처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라 하였다. 맹자가 공자의 말을 풀이하여 “仁이란 사람의 편안한 집(仁者人之安宅也)”이라 한 것을 근거로 삼고, 군자의 도는 어디서든 자신에게 달린 것이지 사는 곳 탓을 할 게 아니라는 뜻에서 그렇게 해석하였다.

다산의 해석이 훨씬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지만 여기서는 전자의 뜻으로 쓰였다.

 

2) 창평은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 추읍의 창평이다. 서너 살 때 인근의 곡부로 이사하여 자랐다고 한다. 강단(講壇)은 학문하는 장소를 말한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 단(壇)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하여 행단(杏壇)도 강단의 뜻으로 쓰인다.

 

3) 그래서 서원이나 향교의 문 앞에는 붓을 거꾸로 세운 모양의 나무를 심었는데 학자수(學者樹)라 하며, 주로 은행나무나 회화나무를 심었다. 따라서 공자의 고향 창평의 강단에나 있어야 할 오래된 은행나무가 쓸데없이 절에 있는 것을 탄식한다는 뜻이다. 성리학자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⑭ 家禮巖(가례암)/가례암에서

人而無禮死其宜(인의무례사기의) 사람으로 예(禮)가 없으면 죽어야 마땅한데

知禮之家此世稀(지례지가차세희) 예를 아는 집안은 지금 세상에 드물다오.

方丈有巖巖有號(방장유암암유호) 방장산에 바위가 있고, 그 바위를 예암(禮巖)이라 부르니

春遊非爲訪林菲(춘유비위방림비) 봄놀이는 숲 우거진 곳 찾을 것 아니다.

 

※ 2013년 초 ‘부춘동’이란 글에서 가례암과 백암에 대하여 제법 상세히 언급했는데 사고 때 사라졌다. 나한테도 원고가 남아 있지 않아 다시 살릴 수도 없고 2탄을 쓸 수도 없어 아쉽다. 

 

⑮ 白巖(백암)/백암에서

澄波洗復洗(징파세부세) 깨끗한 물결에 씻기고 또 씻겨

曾不點塵留(증부점진류) 일찌기 먼지 한점 남지 않았네.

深䆳頭流麓(심수두류록) 깊고 깊은 두류산 기슭

淸高錄事遊(청고녹사유) 맑고 높은 한녹사 거닐던 곳,

有懷空谷暮(유회공곡모) 해질녘 빈 골짜기에 감회가 일어

無語遠山愁(무어원산수) 말없는 먼 산을 바라보니 시름겹구나.

事與巖俱白(사여암구백) 녹사와 바위 모두 깨끗한데

巖前雲水悠(암전운수유) 바위 앞엔 구름과 물만 유유히 흐르네.

 

※ 백암(백암동천)에 관하여는 산행기/‘맹세이골과 백암동천(산유화)’과 ‘고기~묵계마을~장재기~백암동천(해영)’을 참조하시라.

 

⑯ 安溪感懷(안계감회)/안계에서의 감회

不忍春來獨自哦(불인춘래독자아) 봄이 와도 차마 홀로 읊조리지 못해

安溪無主尙淸波(안계무주상청파) 안계에는 주인1)이 없는데 맑은 물만 여전하구나.

一聲悽愴山陽笛(일성처창산양적) 산 남쪽에서 들리는 한가락 구슬픈 피리소리에

萬事悠悠夕日斜(만사유유석일사) 만사는 아득히 멀어지고 저녁 해 기우네.

 

註1) 여기서 주인은 양정재 하덕망(河德望 1664~1743)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덕망은 그가 존경하던 선배로 안계에 광영정을 짓고 모한재를 지키며 평생을 보냈다. 박태무와 1736년 지리산 유람에 동행하였고, 많은 시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이때는 하덕망이 죽은(1743)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다. 그래서 ‘봄이 왔어도 차마 홀로 읊조리지 못한다’고 풀이하였다.

 

⑰ 別安溪諸益(별안계제익)/안계에서 여러 벗들과 헤어지며

人間多別路(인간다별로) 인간 세상에는 이별의 길 많은데

溪上去留懷(계상거류회) 시냇가에서 떠나고 머무는 회포를 나누네.

好會重有約(호회중유약) 좋은 만남 다시 약속하기를

淸秋慕寒齋(청추모한재) 맑은 가을날 모한재1)에서 모이기로 하였네.

 

註1) 모한재(慕寒齋) : 하동 옥종 안계리에 위치. 남명 이후 제일인자로 일컬어지는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1593-1666)가 창건하여 강학(講學)하던 곳이다. 모한이란 명칭은 주자의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모한대 앞 바위에 새겨 놓은 영귀대(詠歸臺)란 글씨는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글씨라 한다.

 

⑱ 歸園(귀원)/동산으로 돌아와서

萬壑煙霞宿債酬(만학연하숙채수) 만 골짜기 안개와 노을에 놀겠다는 묵은 빚을 갚았으니

殘年活計便休休(잔년활계편휴휴) 남은 날의 살아갈 계획은 편히 쉬고 쉬는 것

頭流山在詩篇裏(두류산재시편리) 두류산을 시편 속에 담아 왔으니

從此松牕足臥遊(종차송창족와유) 이제부터 소나무 창 아래 누워 노닐기[臥遊] 족하리.

 

<원문 : 경상대학교 문천각, 영인본에 따라 일부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