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숙민(1889), 하우식, <유산설(遊山說> [독서와 등산]

2017. 6. 6. 13:28옛산행기

유산설(遊山說) 유태회(양길)에게 주다

최숙민

 

근래 봄기운을 타고 두류산의 골짜기 발원지까지 갔었다. 돌아오는 길에 횡천을 지날 때 선비 유태회가 대하(*삼장면 대하를 말하는 듯)까지 따라와 마을 서당에서 얘기를 나누던 중, 독서의 방도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어려서 배움의 길을 잃고 백발이 될 때까지 들은 것이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그러나 일찍이 들으니, 검무(劍舞)로 글씨 쓰는 법을1)  설명할 수 있고 장작 패고 생선 굽는 것으로 역(易 *주역)을 논할2) 수 있다 했으니 나의 유산(遊山)으로 그대의 독서에 비유하고자 하는 것도 가(可)할 것이다.

두류산은 나의 향산(鄕山 *고향산 또는 사는 고장의 산)이다. 어려서부터 왕래하여 골짝의 이름이나 바위 이름도 환하게 알아 가리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진짜 경계는 지금에야 비로소 울타리 틈으로 엿본 격이었다.

대개 시작은 여러 가지 세속의 일로 인하여 노정을 헤아리고 일정을 재촉하며 마음은 바쁘고 뜻은 급하다. 험한 돌길을 반 보씩 걸어야 하는 어려움도 중도에 있다. 혹 장로(長老)들의 유람 행차를 따라갈 때 멈추지 않으면 한 두 번 자못 경치가 그윽하고 깊숙한 곳을 보게 되지만 또한 그다지 마음에 맞지 않아 매양 대원사 용추 등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다 문득 싫증이 나 물러나곤 한다.

지나간 해에 천왕봉에 올라 눈을 크게 하여 만 리를 휘둘러보고 내려와 조개동에 이르렀다. 그 어귀의 水石의 뛰어남은 이 산에서 으뜸이었으나 일정이 매우 바빠 다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아득한 생각이 날마다 일어나 정신은 그리로 가고 마음[*情]도 달려갔다.

금년 봄 우연히 산속에서 한 달을 노닐게 되었는데, 한가하여 하는 일도 없고 근심걱정도 없이 오직 높은 산 흐르는 물 가운데 아침저녁으로 물을 거슬러 발원지를 찾고 편안하고 담박하며 기분 좋게 지내는 것이 마음에 꼭 들어맞았다.

이에 가는 곳이 매우 험하다 해도 기이하게 느껴졌으며 (예전에) 싫증을 느끼던 것도 기쁜 탄식으로 바뀌었다. 앞뒤로 한 사람의 눈이 미치는 곳을 다 열지 않아도 보이는 것은 이와 같았으니 어쩌겠는가? 흉중의 한가하고 바쁜 것이 같지 않았다.

유산(遊山)이란 한가하고 쓸모없고 거친 일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독서란 정밀한 사업인데 어찌 떠들썩하고 어수선한 마음으로 할 수 있겠으며 몹시 바쁜 것으로 구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또 내가 처음 이 산에 들어올 때를 생각해보면, 이미 본 것으로 멈추면 중간에 그윽하고 깊숙한 경치를 볼 수 없고, 깊고 그윽한 곳을 본 것으로 멈추었다면 결국 오늘날의 이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대의 독서가, 내가 처음 이 산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지, 내가 깊고 그윽한 곳을 찾았을 때와 같은지, 내가 지금 이산에 들어올 때와 같은지 알 수 없다.

아니면 길이 험한 곳에서 싫증을 내고 있다면 내가 곤란을 겪은 적이 있기에 (말하건대) 삼가 물러나지 않고 밀치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장차 말이 없이도 뜻이 통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내가 어찌 감히 내 뜻에 계합한 것으로 이미 보았다고 하겠는가? 반드시 십파우협(十破牛脅)3) 백수귀래(白手歸來)4)라고 읊은 남명선생처럼 한 연후에야 진실로 보았다고 할 것이다.

그대가 사는 곳이 선생의 문과 담장 안에 있으니 독서하는 틈틈이 선생의 울타리 안에서 헤엄치고 놀며 성정(性情)을 도야한다면 장차 산과 책을 한꺼번에 얻을 것이다.

계합(契合)하고도 멈추지 않는 것은 산 밖의 사람이 잠시 와서 주변을 맴돌면서 (진경을 볼) 틈을 엿보는 것과 같다. 나는 장차 그대를 기다려 이 산의 끝까지 가볼 계획인데 바라건대 (그때에는) 나를 위해 힘써 주시게나.

기축년(1889) 2월26일, 계남옹(溪南翁)이 쓰다.

 

【註】

 

1) 당나라의 명필 장욱(張旭)이 기녀 공손대랑의 검무를 보고 초서가 진척되었다는 얘기가 전한다.


2) 고대에는 거북껍질이나 소뼈를 불로 지져 갈라지는 모양을 보고 점을 쳤다 한다. 그것을 기록한 것이 《易》이고. 그래서 장작이 쪼개지는 모습이나 생선이 익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그 징조를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비유.

 

3) 제목 없음

頭流十破牛脅(두류십파사우협) 죽은 소 갈빗대 같은 두류산 골짝을 열 번이나 답파하였고

嘉樹三巢寒鵲居(가수삼소한작거) 썰렁한 까치집 같은 가수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

이 시는 유두류록 끝부분에 나오며 현재 두 句만 전해진다. 여기서 가수는 선생의 고향, 지금의 합천 삼가를 말한다. 선생은 어릴 때 여기서 자라다 벼슬하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갔고, 26세 때 부친의 사망으로 시묘살이 겸 고향에 내려와 지내다가 30세에 처가동네인 김해 탄동에 산해정을 짓고 옮겨갔으며, 45세 때 모친의 별세로 귀향하였고 48세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61세에 덕산의 산천재로 오기 전까지 여기서 지냈다. 위 시에서 가수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다는 말은 아마 이러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이 시를 기록한 때가 덕산에 터를 잡기 이전인 1558년(58세) 때였고, 일찌기 이런 시를 지은 적이 있다고 했으므로 그 이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시가 등장하는 『유두류록』에 이미 지리산을 열 한번 올랐다고 했으므로 그 이전에 지은 것임은 확실하다.

 

4) 德山卜居(덕산복거) / 덕산에 거처를 정하고서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봄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리오마는,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다만 천제(天帝) 사는 곳과 가까운 천왕봉을 사랑해서라오.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사) 맨손으로 돌아와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은하수처럼 맑은 물 십 리나 되니 마시고도 남겠네.

 

최숙민(崔琡民 1837-1905). 구한말의 유학자. 호 溪南. 본관 全州. 하동 옥종 거주. 조선말의 대학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학맥을 이었다 한다. 문집으로 《계납집(溪南集)》을 남겼다. 옛산행기방에 그의 『명옹대기(明翁臺記)』가 있다.

 

 

유산설(遊山說)

하우식

 

놀러다니기[遊]를 좋아하는 객(客)이 있어 나에게 묻기를, “그대는 유산(遊山)의 즐거움을 아는가?”하였다. 나는 “객의 즐거움을 묻고자 합니다.”하였다.

객은 말하였다. “대저 산에서 노닐고 경치를 구경하는 것은 꽃이 피면 비단옷을 입은 것 같고 구름이 둘러싸면 쪽진 머리 같고 나뭇잎이 지면 초췌한 것 같고 눈이 쌓이면 화장한 얼굴 같으니, 이런 것이 사시(四時)의 풍경이네. 괴상한 것 기이한 것 서 있는 것 가로누운 것 등 그 모습이 천 가지 만 가지로 모두가 내 가슴을 트이게 하고 내 눈을 시원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러한 것들이 어찌 즐거움이 아니겠으며, 아마 주인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내가 말하였다. “내가 비록 유산의 즐거움은 모르지만 유산의 이치에 대해서는 간략히 들었던 바, 객이 즐거워하는 것은 내가 들은 것과 다르다.” 객이 말하였다. “무슨 말인가?”

내가 말하였다. “유산하는 법은 빨리 가려 하지 않고 지름길을 좋아하지 않으며, 한 사물을 만나면 반드시 그 사물의 이치를 생각하고 한 경치를 만나면 반드시 그 경치의 풍취를 다해야 한다. 초목의 무성함과 조수(鳥獸)가 날고 달리는 것을 보면 천지가 만물을 낳는 이치를 생각하고 내가 세상과 중화하는 덕을 기르며, 산봉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암석이 깎아지른 듯 서 있는 것을 보면 천지의 유구한 이치를 생각하고 나의 굳세고 큰 기운을 기른다. 비록 몸이 피로하고 뜻이 게을러도 반드시 단단하게 발꿈치를 붙여서 길을 반쯤 가다 그치지 말고 한발 한발 나아가야 한다. 한번 정상에 오르면 그때에는 흉금이 더없이 넓어지고 안계(眼界)가 광활하게 트인다. 천지에 가득 찬 이치는 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천지에 가득 찬 일도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어찌 불성실하게 처하겠는가? (처하는 곳이) 높을수록 내려다보이는 것은 더욱 작아진다. 옛사람들은 유산은 독서와 같다고 하였다. 산에서 노닐 때 산은 산대로(나는 나대로)이고 독서를 할 때 책은 책대로(나는 나대로)라면 어찌 옳겠는가? 독서를 하는 까닭은 성인을 본받기 위해서이다. 유산하는 사람은 반드시 부자(夫子 *공자)께서 태산에 오른 것처럼1) 한 뒤에야 비로소 그 道를 얻었다 할 것이다. 어찌 경치와 사물을 구경하고 마음과 눈을 상쾌하게 하는 것으로 스스로 즐거움을 삼을 것인가?”

객이 예예 하면서 물러났다. 이에 유산설을 지어 독서하는 사람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註】

 

1) “공자께서 노나라 동산에 올라가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기시고, 태산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기셨다. 그렇기 때문에 바다를 구경한 자에게는 웬만한 물은 물 같지가 않고, 성인의 문하에서 노닌 자에게 어지간한 말은 말 같지가 않다.” 《맹자(孟子)》 『진심장(盡心章) 상편』에 나오는 말이다.   [孔子登東山而小魯 登泰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難爲水 遊於聖人之門者難爲言]

 

하우식(河祐植 1875-1943) : 자는 성락(聖洛), 호는 담산(澹山) 또는 목재(木齋). 본관은 진양(晉陽), 현 진주 대곡면 단동(단목)에 거주하였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간재(艮齋) 전우(田愚),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조선 말기 대표적인 남명학파의 한 사람으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유고로 『담산집(澹山集)』이 있다.

 

 

遊山說 贈柳泰回 陽吉

崔琡民

近乘春氣窮頭流洞之源歸過橫川柳生泰回從至臺下村塾話次叩讀書之方余少而失學無聞到白何以知之嘗聞之劍舞可以解書法析薪烹魚可以論易請以吾之遊山諭子之讀書可乎頭流吾鄕山也自少往來洞名巖號歷歷可指然其眞境今日始得闖其藩籬蓋始也多因俗營計程趲日心忙意促崎嶇石逕跬步是艱中間或隨長老遊觀之行亦不止一二頗見景致幽邃而亦不甚契於心每至大源龍湫等地輒厭倦退步頃年上天王峯放眼萬里下至朝開洞口水石之勝甲於玆山行期忙迫不能盡觀而歸自此遐想日起不覺神往而情馳今春偶得山中一月之遊心界閒曠無營爲思慮之雜惟朝暮於高山流水之間溯流窮源優游澹泊怡然有所契於是向之崎嶇者爲奇厭倦者爲悅噫前後一人之眼地不改闢而所見若是何哉胸中之閒忙不同也夫遊山是荒閒無用粗底事猶如此況讀書精底事業豈可以紛擾雜亂之心忙迫以求之哉且念吾始入玆山也謂之已見而止則中間幽邃不可得見見幽邃而止則今日之佳境終不可得也吾不知子之書爲吾之始入玆山時耶爲吾之見幽邃時耶爲吾之今日玆山耶或尙在崎嶇厭倦之中則吾是折肱愼勿退步挨前而進將有默契焉者矣雖然吾豈敢以吾之所契者爲已見也十破牛脅白手歸來必如南冥夫子然後爲眞見也子之所居卽夫子門墻之內讀書之暇間以游泳淘瀉性情則山與書將一擧而兩得矣其所契不止如山外人暫來闖藩籬者也吾將待子而爲究竟玆山之計幸爲我勉之己丑二月念六溪南翁書

 

遊山說

河祐植

客有好遊者問於余曰子知遊山之樂乎曰請問客之樂客曰夫遊山翫景或花開而錦繡者或雲擁而藏鬟者或木落而憔悴者或雪積而粧顔者此四時之景而若夫怪者奇者立者撗者氣象萬千無非壯我之懷快我之目若此者豈非樂也主人其亦有意乎余曰余雖未知遊山之樂略聞遊山之理若客之所樂異乎吾之所聞客曰何謂也曰夫遊山之法無欲速無好徑遇一物必思其物之理得一景必盡其景之趣見草木之茂盛鳥獸之飛走則思天地生物之理而養吾中和之德見峯巒之不動巖石之壁立則思天地悠久之理而養吾剛大之氣雖或身疲志倦必牢着脚跟勿半途而止步步前進一登頂上則於是乎胸次恢恢眼界寬闊凡盈天地之理莫非吾之固有盈天地之事莫非吾之所當爲則豈不誠所處益高則視下益小者乎古人云遊山似讀書遊山而山自山讀書而書自書惡乎其可哉且夫讀書所以學聖人也遊山者必如夫子之登泰山然後始可謂得其道矣豈可以景物之翫心目之快自以爲樂哉客唯唯而退遂爲之說用規于讀書者

<원문/경상대학교 문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