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6. 08:51ㆍ알아두면 조은글
지리산의 기개와 지조를 닮은 명암정식의 친필 글씨
1. [明庵鄭栻(명암정식)]
우리나라 산천을 돌아보면 경치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옛사람들이 이름을 새겨놓은 각자로 빽빽하여 그야말로 송곳 꽂을 곳이 없을 지경이다.
그 중에서 인물을 알아볼 수 있는 이름을 보면 거의 조선시대 인물들이다.
왜 신라나 고려시대 이름을 새긴 각자는 거의 없는 반면 유독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름을 바위에 남기려 했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첫손에 꼽고 싶은 것이 시대별 종교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라나 고려시대까지는 불교가 국교의 수준으로 왕족에서부터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정신세계를 지배했다면, 조선시대는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이 통치의 근간을 이루면서 유교가 평민들까지 지배한 인생철학이었다.
불교는 인간의 수명이 다하여 현세를 떠나더라도 극락이라는 내세에서의 왕생을 믿기 때문에 현세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욕구가 많지 않은데 비하여, 유교에서는 내세가 없으므로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이 수만 년 변치 않는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구가 컸을 것이다.
일반 서민들이야 석공을 부려 이름을 새길 경제적 사회적 여유도 되지 못했을 것이니 암각자로 남아 있는 이름들은 대부분 양반계급 이상의 선비들의 흔적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지리산에도 경치 좋은 곳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이름이 수놓고 있으니, 특히 천왕봉을 필두로 용유담 화개동천 세이암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천왕봉 일월대 주변의 각자들(<강호원>님 사진)
*용유담에 새겨진 각자들
*용유담 풍경
*화개동천 세이암 주변에 새겨진 각자들
*세이암 주변 풍경
1) 화개동천 세이암 주변에 있는 두 개의 [明庵鄭栻(명암정식)] 각자
바위에 새겨진 이름들을 보면 대부분 자신이 이름을 영구불멸로 남긴다는 비장감이 감도는 듯 활자로 찍은 것처럼 반듯한 정자체인 해서체가 대부분인데, 세이암 주변의 각자를 자세히 살펴보면 얽매임 없이 물 흐를 듯 때로는 투박하게 행서체로 눈에 띄게 새겨놓은 이름이 있으니 바로 구곡산에 무이구곡을 경영한 명암 정식 선생의 필체이다.
*세이암 뒤 [明庵鄭栻] 각자가 새겨진 바위
*세이암 두 개의 [明庵鄭栻] 각자)
*명암각자 지형도
이 바위를 자세히 보면 가운데 횡으로 좀 크고 깊게 새겨진 [明庵鄭栻] 각자가 있고, 그 바로 우측에도 두 줄로 얕게 새겨진 [明庵鄭栻] 각자가 있다. 얼핏 보아도 우측에 두 줄로 새겨진 각자가 먼저 쓰여져 있는 곳 옆에 훗날 횡으로 또 한번 새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명암선생은 말년에 가솔들을 이끌고 지리산 산중으로 들어가 지리산에 파묻혀 살만큼 지리산을 온 몸으로 사랑한 선현이었으며, 앞서 살펴본 대로 무심한 구곡산 계곡에 이름을 붙여 주자의 무이구곡을 후손들에게 남겨 놓았으니 오늘날 지리산 매니아들에게는 가마득한 대 선배로서 지리산품고 있는 역사와 지리산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려주신 분이다.
더군다나, 명암선생은 직접 지리산을 유람한 유산기 두 편을 남겼으니, 그 안에 담겨 있는 지리산 자락의 역사와 정보는 [지리99]에서 선현들의 발자국을 따라 지리산의 역사를 더듬어 가는 탐구산행의 귀중한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다.
명암선생이 남긴 두 편의 지리산 유산기를 살펴보면, 세이암 뒤에 어떻게 두 가지의 [明庵鄭栻] 각자가 있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먼저, 1743년(명암선생 별세 3년전인 61세때의 일이다.) 산청의 무이정사에서 출발하여 하동과 화개를 돌아 쌍계사와 불일암 등지를 유람한 [청학동록(靑鶴洞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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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3년 [청학동록(靑鶴洞錄)]
계해년(1743년) 4월 집안 조카 상기가 무이정사로 나를 방문하였다. 내가 “너는 청학동을 구경해 보았느냐?”라고 말했다. 상기가 “아직 못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내가 “청학동은 곧 산수가 제일가는 골짜기이다. 나는 수십 년 전에 가보았는데, 마음속에 늘 잊지 못하고 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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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정사에서 조카 상기(相琦)와 청학동으로 유람을 떠나기 전날의 기록인데, 명암선생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청학동이 있는 화개동천에 가본 적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글의 중간 부분에 칠불암에서 묵고 세이암에 오른 기록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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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암에서 묵었는데, 절간의 분위기는 예전과 같았고, 소나무 위의 달도 여전하였다.
다음날 신흥암으로 내려가 세이암(洗耳巖)에 오르니, 현간대사(玄侃大師)가 웃으며 맞이하였다. 바위 위에 같이 앉아 끝없이 웃고 이야기하였으니,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별하게 되자 매우 섭섭해 하며 홍류교 위까지 따라 나와 전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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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수년 전에 방문한 이후 두 번째 방문이 되는 이때에 세이암에서 현간대사 일행들과 감흥에 젖어 [明庵鄭栻] 각자를 새겼을 것인데, 당연히 훗날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횡으로 크게 쓴 각자가 이때의 것이다.
[청학동록]에서 명암선생이 수십 년 전에 이미 청학동을 가보았다는 때의 기록이 바로1724년 [두류록(頭流錄)]이다.
이때는 명암선생이 아직 지리산으로 은거(1728년) 하기 전으로, 진주 옥봉에서 8월 2일 출발하여 입덕문을 지나 덕천서원 남대암을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가 8일만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8일 후인 8월 17일에 다시 행장을 꾸려 쌍계사 이남을 두루 구경하고 싶어서 청암 악양을 거쳐 쌍계사를 비롯하여 화개동천을 두루 유람하고 11일만에 귀가한 기록이다.
지금과는 생활여건이 전혀 다른 그 시절에 연달아 장기간 지리산행에 나섰다니, 이때로부터 4년 뒤 세속의 영락을 미련 없이 버리고 가솔들과 함께 지리산중으로 들어와 여생을 보내게 되었는지 명암선생의 지리산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이때 세이암을 찾은 [두류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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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년 [두류록(頭流錄)]
신흥암에 들어갔는데, 두 시내가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기이한 바위와 둥근 돌이 좌우에 평평하게 널려 있었다. 눈처럼 흰 물결 은빛 폭포가 명경지수 속으로 다투어 흐르니, 남명(南冥)이 말한 것처럼 “희뿌옇게 가로지른 은하수에 별들이 떨어지는 듯하고, 손님을 맞아 잔치를 벌인 요지에 비단 방석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 듯하다.”는 격이다.
그 가운데는 움푹하게 들어가 저절로 항아리처럼 된 것이 있는데 또한 가히 볼거리였다. 그 바위 위에 새겨진 세이암(洗耳巖)이라는 세 글자와 동구 밖 바위 면에 새겨진 삼신동(三神洞)이라는 세글자는 모두 최치원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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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선생이 1724년(42세때) 화개동천의 세이암을 처음 방문하여 주변 산수에 취하여 남긴 글씨가 우측의 두 줄로 된 [明庵鄭栻] 각자이다.
그리하여, 명암선생이 세이암 주변 바위에 두 개의 [明庵鄭拭] 각자를 남겨놓게 된 것이다.
두 각자의 필체에서 각 시기별 명암선생의 인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42세때의 필체에서는 속세에서 계속 연마해온 달필의 기운이 느껴지는 자신만만한 행서체인데 반하여, 유사한 행서체로 쓰기는 했으나 61새때의 필체는 달필은 아니지만 지리산에 은거한지도 십여 년 지난 황혼의 무렵이라 부질없는 욕심은 다 털어낸 듯 담백하면서도 한눈 팔지 않은 올곧은 기개와 지조가 서려있는 서미(書味)에서 지리산을 닮은 명암선생의 체취를 느끼게 한다.
*세이암 전경
계곡 가운데 넓은 바위가 세이암이며, 그 뒤에 삼각형 형태로 생긴 바위에 [明庵鄭栻] 각자가 있다.
*세이암 가운데 새겨긴 [洗耳巖] 각자
명암선생 각자를 자세히 보려면 계곡 중간에 있는 세이암으로 건너가야 하는데, 세이암으로 건너 뛰어야 할 거리가 아주 애매하다. 자칫 자만하거나 과욕을 부릴 경우 치명적인 부상을 입을 수 있으므로 아예 미련 없이 신발을 벗고 계곡으로 들어가 건너야 한다.
2) 무이구곡에 있는 명암선생의 글씨
앞 편의 글에서 살펴본 대로, 명암선생은 무이구곡의 아홉 구비 이름을 짓고 1742년(60세) 세 아들에게 9곡을 세 개씩 나누어 글을 쓰게 하여 석공 김인발(金仁發)이 바위에 새기도록 하였는데, 무이구곡에 아들들 글씨 이외에 명암선생 친필도 있다.
무이구곡에 있는 [明庵鄭栻] 각자
무이구곡의 중간쯤에 아들들이 글을 새길 때 특유의 명암선생 필체로 새겨진 [明庵鄭栻] 각자가 무이구곡의 수무장처럼 당당하게 새겨져 있다.
*무이구곡의 [明庵鄭栻] 각자
*무이구곡의 명암정식 각자와 괴석담 지형도
무이구곡에 있는 도솔암을 향하여 올라가면, 도솔암 바로 아래 도솔암교를 건너게 되는데 이 다리를 만나기 전 20미터 아래 도로와 계곡에 맞물려 누워있는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明庵鄭栻] 각자의 필체에 이르러 일체의 입신양명을 버리고 지리산중에 은둔한지 십여 년이 지난 때인지라 명필은 아니지만 명암선생의 인생이 담긴 듯 대쪽 같은 기개와 지조를 느끼게 하는 필체이다.
봉우리는 높고 골짜기는 깊어 품은 넉넉하나, 불의가 난무하는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영달을 쫓는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수천 년 묵묵히 서 있는 지리산의 기개와 지조가 아니겠는가.
지리산을 닮은 명암선생의 인생역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일체의 기교를 배제하고 투박한 듯하면서도 칼날같이 명쾌한 명암선생의 서미(書味) 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 글씨를 보면, 명암선생이 다음해(1743년) 세이암에 새겨놓은 각자의 필체를 이해하게 된다.
다시 세이암에 새겨진 [明庵鄭栻] 각자를 다시 자세히 살펴보자.
*세이암에 새겨진 두 개의 [明庵鄭栻] 각자
가운데 큰 글씨가 1743년 42세때 새긴 것이고, 우측 글씨가 1724년 61세때 새긴 각자이다.
1724년 42세때 처음 방문하여 새긴 각자는 완전한 행서체인데 반하여 1743년 61세때 새긴 각자는 기존에 있던 각자의 행서체에 대응하여 행서체로 쓰고자 하여 행서체의 글꼴을 갖추고는 있으나, 그때는 이미 지리산중에서 살아온 지 16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리산 서체가 몸에 배여 있어 1724년 세이암 각자의 필체와 1742년 무이구곡에 새긴 각자에서 볼 수 있는 필체가 혼합된 서체가 되었던 것이다.
두 각자의 필체에서 각 시기별 명암선생의 인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42세때의 필체에서는 계속 연마해온 달필의 기운이 느껴지는 자신만만한 행서체인데 반하여, 61새때의 필체는 달필은 아니지만 지리산에 은거한지도 십여 년 지난 황혼의 무렵이라 부질없는 욕심은 다 털어낸 듯 담백하면서도 한눈 팔지 않은 올곧은 기개와 지조가 서려있는 서미(書味)에서 지리산을 닮은 명암선생의 체취를 느끼게 한다.
무이구곡의 [武夷九曲} 각자
무이구곡에 있는 [明庵鄭栻] 각자 옆에 새긴 [武夷九曲(무이구곡)] 각자도 명암선생의 필체임을 알 수 있다.
새겨진 각자의 깊이만 가지고 어느 것이 먼저인지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필체로 보면 [武夷九曲] 각자가 이른 시기에 새긴 것이 아닌가 한다.
무이구곡의 [恠石潭] 각자
무이구곡 아홉 구비에 새겨진 각자를 찾아 무이구곡을 올라가다 보면 무이구곡에 속하지 않은 각자가 하나 보이는데 광풍뢰 아래에 있는 [恠石潭(괴석담)] 각자이다.
*무이구곡의 [恠石潭] 각자
무이구곡 아홉 구비의 이름은 명암선생의 세 아들이 각각 세 군데씩 나누어 쓴 글씨이다.
명암선생의 아들들이라 글씨가 대부분 반듯하고 얌전한 전형적인 해서체인데, 괴석담 각자는 이들과 확연히 다른 필체이다.
가만 보면 꾸밈 없이 자신 있게 쭉쭉 쓴 명암선생의 필체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명암선생의 각자는 대부분 어디에 새겨놓았다고 기록을 남겼는데, [괴석담]을 기록한 글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쭉 보아온 명암선생의 필체에 익숙해졌다면 저 각자 앞에 명암선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3) 찾지 못한 대원사 앞 계곡의 [明庵鄭栻] 각자
명암선생의 시문(詩文)을 모아 만든 [명암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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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사 앞의 반석에 이름을 쓴다.
맑은 샘 하얀 돌 참된 신선에 알맞기에
일부러 이름 남겨 만고에 전하고자 한다.
삼천리 요지 멀다고 말하지 말거나.
벽도화(碧桃花-먹으면 오래 산다는 복숭아)같이 생긴 달 타고 돌아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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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선생이 대원사 앞 계곡의 하얀 돌에 이름을 남겼다고 기록해놓았으니 분명 예의 [明庵鄭栻] 각자일 것이다.
[하얀돌]에 새겼다고 하였는데, 깊은 계곡에 많은 암반 중에서 흰색도 있기 마련이라 어디에 새겨놓았는지 막연하긴 한데, 대원사 앞 계곡에는 [흰색 암반]이 보통명사가 아니라 특정 암반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명암선생 후세대에 사용된 예가 있으니, 응윤경암(應允鏡巖:1743~1804) 스님의 대원암기(大源庵記)와 월촌 하달홍(月村 河達洪:1809~1877)선생의 [장항동기(獐項洞記)]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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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윤의 대원암기
동쪽 냇물의 자연은 더욱 뛰어나서 용추 아래로 수리 사이에는 모두 넓적 바위에 물이 굽이치며 흘러 용이 지나가듯 꿈틀꿈틀 흘러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돌로 된 항아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서 8-9휘 정도는 담을 수 있으며, 암자의 승려가 매번 무우(김치)를 담가두는데 매우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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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달홍의 [장항동기]
(대원사) 암자의 북쪽에는 계곡물이 부딪쳐 폭포가 쌓여 있고 (폭포의) 웅덩이는 맑고 투명하며 거울 같은 바위는 모두 흰색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하고 기뻐하여 종일토록 떠나지 못하게 한다. 또 양쪽 계곡은 푸른 산이 천길 벼랑으로 서 있어, 추연히 남명(南冥)선생의 기상을 다시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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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암선생의 바로 다음 세대의 인물들이 대원사 앞 계곡을 묘사한 문장인데, 아쉽게도 명암선생이 새겨놓았다는 [明庵鄭栻] 각자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한 분은 불자이고 한 분은 하동에서 유람 온 유생이라 지리산중에 칩거고 있던 명암선생에 대하여 무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위에 인용한 두 방문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대원사 앞 희 바위는 지금의 육각정 바로 뒤에 있는 백반석이 틀림없어 보인다.
*대원사 앞 계곡의 백반석
대원사 계곡 암반은 철분이 많은지 대체로 누른 색인데 이 바위만큼은 눈에 띄게 흰색이다.
사진에서 우측 바위는 퇴적토로 일부가 덮혔다.
대원사 앞 계곡 흰 바위에 새겨놓았다는 [明庵鄭栻] 각자를 찾기 위하여 이곳에서부터 위쪽으로용소를 지나 송정선생이 언급한 사각 반석에 이르기까지 수 차례에 걸쳐 계곡의 암반들을 샅샅이 뒤졌으나 이직 찾지 못했다.
한가지 미흡한 점이 있다면, 백반석의 일부가 퇴적토에 의하여 매몰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곳에 대한 수색과 혹시나 모를 백반석의 하류에 대한 조사를 숙제로 남겨둔다.
*대원사 앞 계곡 지형도
4) 지리산 이외에 있는 [明庵鄭栻] 각자
설악산 계조암에 있다는 [明庵鄭栻] 각자
[明庵鄭栻] 각자를 찾는 일이 재미있는 것은 지리산 이외에도 우리나라 산천을 두루 유람한 명암선생이 각 곳에 [明庵鄭栻] 각자를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명암선생은 지리산이 좋아 식솔들을 거느리고 지리산중으로 은거했을 뿐만 아니라, 천성이 자연을 좋아하고 산행이 드문 시대에 우리나라 여러 명산을 오르며 국토를 직접 체험하고 일일이 기록으로 남겼으니 체면이나 따지는 양반과 달리 편법을 모르는 근면하고 성실한 선생의 성품을 엿보게 한다.
선생이 산행후 남긴 기록으로는 앞서 인용한 지리산의 두 산행기 이외에, 경주 토함산에서부터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면서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 금강산 등을 산행한 기록인 관동록(關東錄)을 비롯하여 가야산록(伽倻山錄), 남해 금산록(錦山錄), 월출산록(月出山錄)이 있다.
1727년 관동지방의 산을 돌아보고 남긴 [관동록]에 보면, “{설악산} 계조암 돌문 바깥 돌 표면에 큰 글씨로 내 당호(堂號)와 이름 네 글자를 써 새겼다.”고 [明庵鄭栻] 각자를 남겼다는 기록이 있으나 새겼다는 장소는 명확한데 아직 확인하지 못하였는데 후일에 보충할 숙제이다.
가야산 홍류동에 있다는 [明庵鄭栻] 각자
1725년 가야산을 탐방하고 남긴 [가야산록]에도 “해환이란 중이 있는데, 글자를 잘 새기는 중이었다. 홍유동의 돌 표면에다가 나의 당호(堂號)와 성명을 새겨주었다.”고 역시 [明庵鄭栻] 각자를 새겼다는 기록이 있으나 어디인지 명확하진 않지 않아 확인하지 못했는데 홍류동이라 하였으므로 이 역시 풀 수 있는 숙제로 남겨둔다.
금산 보리암 옆에 있는 [明庵鄭栻] 각자
1725년 남해 금산을 올랐다가 남긴 [금산록]에는 당호와 성명을 새겼다는 기록은 없지만, 보리암 바로 입구에 [明庵鄭栻] 각자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금산 보리암 입구에 있는 [明庵鄭栻] 각자
*보리암에서 주차장 방향으로 나가는 입구에 [明庵鄭栻] 각자가 있는 바위 주변
거창 수승대에 있는 [明庵鄭栻] 각자
우리나라에서 단위 면적당 이름을 새긴 각자가 가장 많은 곳 중에 하나가 거창 수승대이다.
당대에 내노라 하는 선비들이 수승대 유람 왔다가 이름을 남겨 놓았는데, 한참 잦아보면 [明庵鄭 栻] 각자도 볼 수 있다.
*수승대
*수승대에 빈틈 없이 새겨져 이는 각자들
*수승대 아래쪽에 있는 [明庵鄭栻] 각자
2. 내원사 앞 명옹대(明翁臺)
명암선생이 남긴 [고월원 김공에게 올리는 서신]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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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과 개골산을 지팡이 하나로 떠도는 신세였다가 늦게 두류로 들어와 빗장 걸린 바위문 속에 泉石이 뛰어난 곳을 얻었으니 백운동입니다. 그 골짜기 시내 가운데 바위 하나가 구불구불 비스듬히 누웠는데 위는 평평하고 아래는 둥글어 삽십여 명이 앉을 수 있습니다. 전후좌우로 석벽이 감싸 돌고 만폭과 옥류가 만든 세 연못은 거울을 대하는 듯합니다. 돌 위에 나의 자호(自號)인 명옹대 세 글자를 새겼고, 돌 아래에 만화담(萬花潭) 세 자를 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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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면 내원사로 들어가는 반야교를 다 건너면 좌측 계곡의 너른 반석 위에 [明翁臺(명옹대)] 크게 새겨놓은 글자가 보이고 그곳으로 내려가는 돌계단이 있다.
*내원사 앞 [明翁臺] 각자
힘있게 써내려 간 글씨가 무이구곡에서 보았던 [明庵鄭栻]
에서 와 같은 명암선생의 올곧은 체취가 잘 묻어있다.
*명옹대 지형도
*명옹대 바위 모습
위에 인용한 명암선생의 글에 “돌 위에 나의 자호인 명옹대 세 글자를 새겼고, 돌 아래에 만화담 세 자를 세겼습니다.”고 되어 있는데, 만화담 각자를 찾으려면 계곡 건너편으로 내려가서 자세히 보면 아래쪽 수면과 맞닿은 부분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예의 명암선생 필체의 [萬花潭]을 찾아 볼 수 있다.
반야교를 도로 건너 주차장 방향으로 조금 진행하면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명옹대 아래 [萬花潭] 각자
무이구곡 [제월대]와 마찬가지로 [만화담] 각자에서 보았듯이, 만화담도 물 속에 잠겼다를 반복하는 곳이라 각자가 희미하다.
명암선생이 명옹대가 백운동에 있다고 하여 현재 덕산 옆 단성면 백운리 백운계곡 일대에 있다는 뜻이 아닌가 혼돈이 오긴 하였지만 명옹대 각자가 새겨진 바위 아래 만화담 각자가 있으니, 더 이상 좌고우면 할 필요 없이 내원사 입구의 명옹대가 명암선생의 명옹대임이 명확하다.
다만, 현재 백운동으로 불리는 단성면 백운리 백운동이 아닌 이곳도 명암선생은 백운동이라 불렀다는 기록만 기억해두자.
명옹대에 관한 후답자의 기록이 하나 있으니 1877년 허유(許愈:1833-1904)선생의 [두류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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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허유의 [두류록]
(순두류에서 국수봉을 넘어) 내원(內源)에 이르니 냇가에 흩어져 있는 온갖 바위들이 곳곳마다 사랑스럽고, 냇가의 버드나무는 푸른 빛깔이 시들며, 산의 나무]는 점점이 붉게 물드는데, 들판에 우거진 풀 사이로는 종종 홀로 외로이 서 있는 탑이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이 옛날 절터였음을 알게 해주었다.
20리쯤 가서 만폭동(萬瀑洞)을 지났는데, 만폭동 어귀에는 정명암(鄭明菴)의 명홍대(冥鴻臺-明翁臺의 오기로 보인다.)가 있다. 이 대는 바위인데, 위에는 몇 자 높이의 외로운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대 아래에는 물이 빙빙 돌면서 흘러가니 술잔을 흘려 보낼 만하며 경치 또한 뛰어나다.
명암은 나의 외가 쪽 선조인데, 명나라가 망한 뒤 벼슬자리에 나아가려 하지를 않고, 자연 속에서 방랑하며 생애를 마쳤다. 그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유명한 산과 큰 물가에는 명암이 글자를 새겨 넣은 돌이 없는 곳이 없다고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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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주 촉석루에 남아 있는 명암선생의 흔적
평양 부벽루와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인 진주 촉석루에도 명암선생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진주 촉석루
1) 진주 촉석루 중수기
진주 촉석루는 임진왜란 때 치열한 진주성 전투 와중에 전소된 이후 몇 차례의 중수와 소실을 거듭 하였다.
촉석루에 올라가면 지리산에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는 송정 하수일(松亭 河受一:1553~1612)선생의 [촉석루중수기]와 함께 1725년에 글을 지은 명암선생의 중수기가 걸려있다.
한국전쟁 때도 진주가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면서 해강 김규진선생의 [矗石樓(촉석루)] 편액을 딜거 있던 촉석루가 소실되면서 두 분의 [촉석루중수기] 원본은 불타 없어지고 1960년 촉석루를 다시 복구하면서 [촉석루중수기]도 복원해 놓은 것이다.
*촉석루에 걸려 있는 명암선생의 [촉석루중수기] 복원본
이 중수기에는 마지막 관지에 [수양정식(首陽鄭栻)]이라 써 놓았다. 명암선생은 황해도 해주 정씨인데 해주의 정씨 세거지의 옛이름이 수양이라 그렇게 써 놓은 것이다.
2) 의암사적비명(義巖事跡碑銘)
촉석루 앞 의암 바로 뒤에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 편액을 달고 있는 비각 안에 [의암사적비명]의 제액을 달고 있는 비석이 있는데, 명암선생이 1725년에 지은 글이다.
*촉석루 의암을 내려다 보는 곳에 있는 [의기논개지문]
임지왜란 때 왜장을 유인하여 같이 남강으로 뛰어들어 자결한 의기 논개의 이야기는 진주에서 구전으로 간신히 전하고 있던 것을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寅:1559~1623) [어우야담(於于野談)]에 기록하였는데, 명암선생이 이를 찾아내고 논개의 유적지를 고증하여 그 내막을 [의암사적비명]을 찬하여 비를 비를 세움으로써 비로소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하여 오늘날까지 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참고문허
1. 허권수 역 [명암집]
2. 동북아전통문화연구회 [명암정식선생의 도학과정충대절사상]
3. 최석기 [선현들의 지리산 유람록]
4. 이재구 역 [하달홍의 장항동기]
5. 이재구 역 [명암의 고월원 김공에게 올리는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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