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5. 22. 16:38ㆍ알아두면 조은글
팔선도
팔선열전(八仙列傳)
팔선은 중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기행(奇行)과
속세를 초월한 것으로 알려진 8명의 신선이다.
이들 팔선은 종리권ㆍ장과로ㆍ이철괴ㆍ
한상자ㆍ여동빈ㆍ조국구ㆍ남채화ㆍ
하선고(女神仙)를 말한다.
민간에서 유행하는 팔선도 그림의 좌측에서부터
조국구(曺國舅)는 송나라 조황후의 아우로서
신선이 되어 운양판(雲陽板)을 가지고 있으며,
종리권(鍾離權)은 한나라 때 사람으로
부채를 가지고 있다. 한상자(韓湘子)는
한상의 존칭이고 당나라 때 인물로서
유명한 유학자이며 문장가인 한유의 조카인데
피리를 불고 있다. 한상자 그림 뒤에 있는
여동빈(呂洞賓)도 당나라 때 사람으로 등에
칼을 차고 손에는 불자(佛子)를 들고 있다.
유일한 여자 신선인 하선고(何仙姑)는 이름이
경(瓊)이며 당나라 때 사람으로 연꽃을 들고 있다.
그리고 남채화(藍采和)도 당나라 사람으로
청년의 모습을 하고 꽃바구니를 들고 있으며,
장과로(張果老)는 장과의 존칭으로 당나라 때
사람이며 나귀를 거꾸로 타고 어고와
간판을 가지고 있다.
이철괴(李鐵拐)는 절름발이로 어느 시대 사람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표주박과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
이들 팔선은 개별적으로 당나라와 송나라 문헌에
나타나다가 원나라 때부터 팔선으로 정리된 듯하며
중국의 소설, 희곡, 회화, 건축 등 여러 분야의
주제가 되어 왔다.
또한 민간에 널리 유전되어 오는
여러 가지 수많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여기서는 이들 팔선의 출생비화, 수도과정,
부명재색(富名財色)을 초월한 행위, 신통 자재한
인생항로, 시공을 초월한 기행(奇行)을 살펴보겠다.
제 일화는 고금에 널리 알려진 여동빈의 이야기이다.
제1화 여동빈(呂洞賓)
*여동빈 악양루에 오르다
신선 여동빈의 일화에 앞서 그의 호쾌함이 돋보이는
당시 한 수가 있다. 당나라 시대,
어느 날 동정호에 달이 휘영청 뜬 밤,
여동빈이 홀로 악양루에 올라 시를 읊었다.
자영(自詠) 스스로 읊노라
獨上高樓望八都 독상고루망팔도
墨雲散盡月輪孤 묵운산진월륜고
茫茫宇宙人無數 망망우주인무수
幾個男兒是丈夫 기개남아시장부
홀로 높은 누각에 올라 팔방을 바라보니
검은 구름 흩어지고 둥근 달만 중천에 외롭게 떠있다.
망망한 우주에 사람은 많고도 많은데
사내대장부라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 시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한 우주공간까지
이어지는 기개를 느끼게 하는 통쾌한 작품이다.
여동빈은 당(唐)시대의 대표적인 도사이며
민간에서는 팔선의 하나로 인구에 회자되었다.
도사 여동빈이 활약하던 그 당시는 황소(黃巢)의
난으로 세상이 뒤숭숭할 때였다.
그래서 혹자들은 이 시에서 여동빈이 황소의 난을
평정할 사람 하나 없는
현실을 탄식한 것으로도 해석한다.
여동빈이야말로 팔선 중에서 전해오는 일화와
사적이 가장 많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개가 여동빈을 보고 짖다니,
좋은 사람을 몰라본다”(狗咬呂洞濱, 不識好人心)라는
것이 있다.
그 정도로 여동빈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여동빈 성명 석자는 세간을 두루 돌면서
중생을 구도한 신선의 대표적 명칭이 되었다.
* 출생일화
여동빈의 본명은 경(?)이고, 자(字)는 백옥(伯玉)이며
또 다른 이름은 소선(紹先)이다.
출가 이후에는 이름을 암(岩)으로 고쳤고,
자는 동빈(洞賓)이다. 그는 당나라 후대,
관서 하중부 낙현사람이다.
현재 지명은 산서성 영락현이며,
그곳에 그가 태어난 것을 기념해서
만수궁(萬壽宮)을 세웠다.
그는 당나라 덕종 정원(貞元) 12년(797년)
4월 14일에 출생했다고 한다.
그의 모친이 여동빈을 낳을 때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고 자주색 구름이 하늘을 덮었으며
한 마리 선학(仙鶴)이 하늘에서 날아 내려와
침상으로 날아들다가 돌연 사라졌다고 한다.
*마조 도일(馬祖 道一)의 미래 예견
여동빈은 태어나면서부터 관상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고 한다.
즉 양쪽 눈썹이 길고 비스듬히 구레나룻과 이어졌고,
봉황의 눈매에 광채가 나며, 코는 높고 단정하며
왼쪽 눈썹과 왼쪽 눈 아래 검은 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이렇게 기이한 조짐을 갖고 태어난
이 아이를 매우 총애하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교롭게도
불교 선종 6조 혜능대사의 손(孫)제자인
마조화상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
동빈의 부친은 강보에 싸인 아이를 안고 와서
마조대사에게 보이면서 아이의 앞날을 물었다.
마조대사가 동빈의 운명을 점쳐본 후
“이 아이는 풍모가 맑고 기이하며,
골상 또한 평범하지 않으니,
풍진을 벗어난 뛰어난 인물이다.
아이가 성장한 후 우여즉거(遇廬則居,
여를 만나면 머물고)하고,
우종즉고(遇鍾則叩, 종을 만나면 두드려라)하라면서
이 여덟 자를 평생 꼭 기억하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고 한다.
나중에 마조대사가 예언한 그 여덟 자의 의미처럼
동빈은 과연 여산(廬山)에서 수행하였고,
종리권(鍾籬權)을 만나 도를 배웠다고 한다.
*주 : 마조 도일(馬祖 道一)
당나라때 승려로 750년 전후로 활약하였으며
속성은 마(馬)씨, 통칭 마조도일, 사천성 출신으로
19세 때 출가하여 선종 6조 혜능
문하의 남악 회양(南岳 懷讓)의 법을 이었다.
강서성 홍주를 중심으로 교화하였기 때문에
그 일파를 홍주종(洪州宗)이라고도 한다.
널리 알려진 문하생이 백장, 대매, 남천 등이며
남악의 종풍이 일시에 융성하였으며,
후일 임제종(臨濟宗)으로 발전하였다.
마조 천하라 하여 마조의 선풍이 온 세상을 덮었으며,
일상생활 속에서 선(禪)을 실천하는
새로운 선종이 이 무렵 시작되었다고 한다.
*여동빈의 젊은 시절, 두 차례 과거시험 낙방
여동빈은 어린 시절에 총명이 남달라
하루에 글자 만 자를 암송하고
말이 입에서 나오면 문장이 되었다고 한다.
성장한 후 신장은 8척 2촌에 목덜미는 기다랗고
이마는 넓었으며, 봉(황)의 눈과 광채가 나는 눈썹에
행동거지는 당당했다고 한다.
성격은 소박하였으나 말주변이 없었으며,
언사가 능숙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성년이 되어 김씨를 아내로 맞아 자녀 넷을 두었다.
당나라 무종(회창) 연간에 여동빈은 두 차례나
장안에 가서 과거를 보았으나
두 번 다 낙방하였다고 한다.
*장안 술집에서 선인(仙人) 종리권을 만남
여동빈이 두 번째로 장안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46세였다.
과거에 낙방하고 낙심한 가슴속에 쌓인
울적한 그 심정은 보지 않아도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오후 울적한 마음을 풀기 위해
발길이 가는대로 걷다가 어느 작은 술집에 들어갔다.
자작하면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심정은 마치 바람 따라 거리를 떠도는
가을 낙엽처럼 의지할 바 없이 쓸쓸하였다.
바로 이때 술집으로 긴 수염에 빼어난
눈썹, 안색이 붉으레하게 빛나는 도사복장을 한
노인이 걸어 들어와
여동빈의 맞은 편 빈자리에 앉았다.
세간의 다툼이 없는 듯 사리사욕이 없고,
온화함이 넘치는 듯한 그 노인의 풍모는
여동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마주하여 술잔을 권하면서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 선인 종리권 즉석에서 시를 짓다
술잔을 돌리면서 서로의 심사를 한마디씩 토로한 후,
풍채 좋은 노인은 돌연 시심이 크게 일어난 듯
술집 종업원을 불러 붓과 먹을 가져오게 하였다.
노인은 즉석에서 시를 읊으면서 붓을 들어
술집 벽 위에 다음과 같이 써내려 갔다.
坐臥常携酒一壺
좌와상휴주일호
不敎雙眼識皇都
불교쌍안식황도
乾坤許大無名姓
건곤허대무명성
疏散人間一丈夫
소산인간일장부
앉으나 누우나 언제나 한 호로의 술을 가지고 다녔고
두 눈으로는 황도(세상일)의 일을 모르도록 했다네
하늘과 땅은 이렇게 큰데 성도 이름도 없이
한낱 인간세상을 떠도는 한 사내일 뿐일세.
여동빈은 시를 음미해 보고는 노인의 시풍이
표일하고 호방함을 깊이 찬탄하였다.
여동빈은 두 손을 맞잡고 가슴까지 올려
절을 하고난 후 노인에게 물었다.
“비록 하늘과 땅이 이렇게 큰데
성도 이름도 없다고 하였지만,
후배인 저로서는 도장께서도 칭호가 있을 것 같아
묻자옵니다.
도장의 성명 삼자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노인은 두 눈에 미소를 띠면서
“나의 성은 종리(鍾離)이고 이름은 권(權)이요.
”라고 하였다.
여동빈은 ‘종리(鍾離)’ 두 글자를 듣자,
마음속에 마치 종이 울리듯 옛날 부모님이
늘 말씀하셨던 ‘마조(馬祖)선사의 예언’이 떠올랐다.
즉 “우여즉거(遇廬則居)하고 우종즉고(遇鍾則叩)하라”
(廬를 만나면 머물고, 鍾을 만나면 두드려라)
문 앞에 앉은 이 기이한 노인이
내가 마땅히 두드려야 하는 종(鍾)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 여동빈, 종리권에게 詩로 화답하다
여동빈은 어려서부터 들어왔던 예언이
적중하는 상황을 만나자 순간 멍하였다.
이때 종리 노인이 술잔을 들며
“자, 우리 술 한 잔 합시다.”하면서 술을 권한다.
술을 마신 후 종리 노인은
“자네도 시 한수 짓는 게 어떠한가?”하였다.
여동빈도 술 한 잔을 마시자 시심이 샘솟듯 올라와
붓을 들고 술집 벽 위에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生在儒家遇太平
생재유가우태평
懸纓垂帶布衣輕
현영수대포의경
誰能世上爭名利
수능세상쟁명리
欲侍玉皇歸上淸
욕시옥황귀상청
유가 집안에 태어나 태평시대를 만났건만
갓 끈을 걸어두고 허리띠를 벗어 놓았으니
삼베옷이 가볍다(벼슬하지 않은 포의를 비유)
누가 세상과 더불어 명예와 이익을 다투겠는가?
옥황상제를 모시러 상청경으로 되돌아갈까 한다.
종리권은 여동빈의 시를 한참 물끄러미 쳐다본 후
크게 기뻐하면서
“공자는 이미 도를 향하는 마음이 있는데,
나를 따라 세상을 버리고 입산하지 않겠소?”하였다.
여동빈은 머리를 흔들며
다만 집안에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고는
아무래도 속세를 떠나기가 어려운 듯이 말하였다.
종리권은 여동빈을 한번 척 보고는
그의 마음을 다 꿰뚫어 본 듯이 몸을 일으키면서
“그대와 나는 곧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
지금은 우선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내일 당신은 여기 적혀있는 이 여관의 주소로
나를 찾아오라.”고 말하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 여동빈, 종리권을 찾아가다
종리권과 헤어진 다음날 여동빈은 종리권이 준
주소를 들고 장안 근처 여관으로 찾아갔다.
찾아간 때가 정오여서 선인 종리권은 마침 방안에서
작은 화롯불을 피워놓고 부채질을 하면서
노란 조밥을 짓고 있었다.
서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여동빈은 갑자기 졸음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종리권이 보고는
"자네는 이미 피곤에 지쳐 자고 싶다는 생각뿐이니
저기 내 침상에 올라가 조금 자게나.
내게는 작은 베개가 있는데,
이름을 여의침(如意枕)이라고 하네,
자네는 여의침을 베고 자면서,
여의몽(如意夢)이나 한번 꾸게나."라고 했다.
*인생은 한낱 꿈인가 ?
여동빈이 여의침을 베고 눕자마자 몽롱해지더니
하염없이 잠속으로 곯아떨어져 꿈을 꾸었다.
여동빈은 젊어서 장안에 가서 진사시험을 보았다.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 후 권문세가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장가들고,
자식도 여럿 낳았다.
인간세상의 부귀영화가 한몸에 모이듯이
출세 가도를 달렸다.
평생의 소원을 크게 이루었다고 기뻐하였다.
바야흐로 만사가 순조로워 인생의 최고조를 만난 듯
득의양양할 때,
재앙이 하늘에서 내려오듯이 홀연
다른 당파의 모함에 걸려들었다.
천자의 노여움이 하늘을 찔러,
감찰기관으로 하여금 죄를 다스리게 하여
재산을 전부 몰수하였고,
아내와 자식들도 다 흩어졌으며,
그 자신도 재판을 받아 강제로 멀고먼 변방으로
쫒겨나게 되었다.
그 자신 혈혈단신, 그 고초는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인생의 무상함을 크게 탄식하다가
홀연 꿈에서 깨어났다.
여동빈은 잠에서 부시시 깨어나면서
“그 수십년의 인생살이 역정에서 부귀영화가
정녕코 한바탕 꿈에 불과하다는 것인가?”라고
스스로 자문해 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낮잠에 들기 전처럼 선인 종리권이 아직까지도
화롯가에 쭈구리고 앉아 노란 조밥을 짓고 있었는데
그 조밥이 아직 익지도 않았다.
* 선인 종리권을 스승으로 모시다
선인 종리권은 여동빈이 꿈에서 깨어난 것을 보고는
웃으며 읊조리듯이 말했다.
"노란 조밥이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꿈이 끝났다.
너의 오십년 부귀영화도 절정까지 갔다가
이렇게 결말나지 않았는가?"
여동빈은 본래 도를 향한 마음이 있었는데,
단지 지난 10년 간 어려운 고난이 있었고
그 고난에 대한 소득이 없어서
불만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생생하게 꿈속에서 점화(點火)되었고,
갑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깨닫게 되자
세상에 미련을 버리고 수도하고자 결심하였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 운방(雲房)선인 종리권에게
절하고 스승으로 모셨다.
*자네 황백술(黃白術)을 배우겠는가 ?
선인 종리권은 여동빈을 제자로 받아들인 후
여동빈에게
"천부적인 너의 좋은 자질을 보건대
세상을 제도하는 선(仙)술을 닦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욕칠정에 물들은 인간의 마음을
제거하기가 어려워 신선이 되기는 어렵다.
너의 공행(功行)을 다 채우지 않아서
설사 신선이 되는 신선술을 배웠다 하더라도
실제 효과가 나타나기 어렵다.
그러니 내가 너에게 쇠를 금으로 만들고,
납을 은으로 만드는 황백술(黃白術)을
전수하는 것보다 못하다.
너는 이 황백술로 세상을 제도하고
사람을 이롭게 하라.
삼천 가지 공덕이 차고 팔백 가지 선행을 마치고 나면
내가 다시 와서, 그때, 너를 제도하겠다.
너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 종남산 학정봉 동굴에서 수련하다
사제의 예가 끝난 후 선인 종리권은 여동빈의
손을 끌고서 장안교외로 갔다.
그곳에서 순간적으로 공간이동을 하여
종남(終南)산 학정(鶴頂)봉 위의 동굴 밖에 도착했다.
동굴에 들어가니 햇빛이 비추어 들어오는데
포근하기가 봄날과 같았다.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큰 반석 위에 마주앉아
원화주(元和酒)를 석잔 마시고 있는데,
비취빛 저고리에 붉은 바지를 입은 사람이
구름을 밟고 기이한 향기를 풍기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와 선인 종리권에게
봉래산 천지회 모임에 같이 가자고 초대한다.
종리권은 수련서인 현결(玄訣)을 남겨놓고,
자주색 구름을 타고 하늘 저 멀리로 사라졌다.
며칠이 지난 후 종리권이 동굴로 되돌아 왔을 때
여동빈은 스승이 남겨놓고 간 현결(玄訣)을
숙독해서 경지가 전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스승과 이별 - 십년 후 동정호에서 만나기로 약속
스승과 함께 수행하고 있는 동안 청계선인 정사원과
태화선인 시호부가 선인 종리권을 만나러 왔다.
여동빈은 두 분의 선인에게 절을 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 당시 때는 바야흐로 봄이라 새들이 다투어 울고
시절이 호시절이라 선인 종리권은
흥에 겨워 시를 읊조렸다.
春氣塞空花露滴 춘기색공화로적
朝陽拍海岳雲歸 조양박해악운귀
봄기운이 공중에 가득하고 꽃에 이슬이 맺혀 떨어지는데
아침 해가 바다에서 솟아오르니 산 구름이 흩어지더라
스승 종리권은 여동빈에게 이 시를 동굴 입구에
새겨 놓으라고 했다.
이어서 종리권이 여동빈에게
“나는 하늘의 옥황상제를 배알하러 가려고 한다.
너는 이 동굴에서 오래 머물 필요는 없다.
십 년 후 동정호 악양루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영보부법(靈寶符法)이라는 도가 비전의
수련서를 주고,
삼원삼보(三元三寶)에 관한 설법을 하였다.
설법을 마치자 두 명의 천사가
금첩(황금으로 만든 초대장)을 받들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이어서 하늘에서 봉황과 난새가 출현하고
선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선인 종리권은
두 천사와 함께 천천히 하늘로 날아올라 사라져갔다.
스승 종리권이 떠난 후 여동빈은 동굴에서
몇 년을 머물렀다.
수련을 한 동굴이 거대한 암석 가운데 있어
여동빈은 동굴을 집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름을 경(瓊)에서 암(岩)으로 고치고
자(字)를 동빈(洞賓: 동굴속의 손님)이라 하였다.
또 동빈은 이곳에서 도가의 진전(眞傳)을 모두 얻었고,
수도하여 몸속에 음의 기운(塵陰)을 모두 몰아내었으며,
순양(純陽: 순수한 양의 기운)만 몸에 남아
도호를 순양자(純陽子)라고 하였다.
*십년 후 악양루에서 스승과 해후
종남산 학정봉 동굴을 나온 후 동빈은
누런 모자에 도사복장을 하고 호(號)를
회도인(回道人)이라 바꾸었다.
회(回)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口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암암리에 여(呂)자로 姓이
여(呂씨, 여동빈)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때부터 동빈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천하를 노닐면서
사해를 집으로 삼았다.
스승 종리권과 만날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동빈은 동정호로 갔다.
악양루에 올라 10년만에 스승 종리권과 해후하였다.
종리권은 동빈을 데리고 자기의 스승
고죽진군(苦竹眞君)을 알현하였다.
고죽진군은 동빈에게 도가의 비전인
일월교병지법(日月交幷之法)을 전수하였다.
*여산에서 천둔검법을 배우다
그 후 동빈은 스승과 사조와 헤어진 후
양자강 하류 지역에 있는 천하명산 여산(廬山)에
놀러갔다가 화룡진인(火龍眞人)을 만나
수련하게 되었다.
이 여산이야말로 일찍이 마조대사가 예언한
우여즉거(遇廬則居:여를 만나면 머문다)가 아닌가?
동빈은 여산에서 화룡진인에게서
천둔검법(天遁劍法)의 진수를 배웠다.
이때부터 동빈이 강호상에 노닐 때
항상 몸에 보검을 차고 다녔다.
선인 여동빈은 이 칼로 수많은 요마(妖魔)를 제거하고
허다한 공덕을 쌓았으므로 항상 등에
칼을 찬 모습으로 신선도(神仙圖)에 등장한다.
*구름 따라 무창 황룡산에 오르다.
하루는 여동빈이 구름 따라 노니면서
무창 황룡산으로 갔다.
멀리서 바라보니 산중 절위에 자주색 구름이
가득 덮여 있어 이인(異人)이 있음을 알고
문득 절 안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이름을 떨치던 유명한 황룡선사가
마침 법당에서 설법을 시작하려는 중이었다.
여동빈도 설법을 듣기 위해 사람 무리들 속에 묻혀
함께 법당으로 들어갔다.
황”오늘 여기에 법을 훔치려는 사람이 있는데,
이 늙은 중은 설법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여동빈, 황룡선사와 선문답을 하다
여동빈은 곧 자기를 가리키는 것을 알고
군중 속에서 나와 예를 취하면서 말하였다.
“화상에게 묻겠습니다.
一粒粟中藏世界 일립속중장세계
한알의 조 알갱이 속에 세계가 감춰져 있고
半升金當內煮山川 반승당내자산천
반 되 들이 솥으로 산천을 삶는다는
이 한 마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황룡선사가 껄껄 웃으며 여동빈을 가리키면서
“원래 당신은 시체 같은 죽지 않은 귀신이구나!”
여동빈 또한 노여움을 띠지 않은 채
눈썹을 펴면서 말하였다.
“화상은 내가 늙어도 죽지 않는 것을 조롱하지 말라.
나의 호주머니 안에는 장생불사의 약이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 황룡선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饒究經得八萬劫 요니경득팔만겁
당신이 설사 팔만 겁을 지내왔더라도
難免一朝落空亡 난면일조락공망
하루아침에 공망에 떨어지는 것을 면할 수 없다.
* 여동빈, 황룡선사와 법력을 겨루다
여동빈은 황룡선사가 기지와 총명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황룡선사의 법력이
얼마나 고명한가를 시험해보고 싶어서 등에
차고 있는 보검을 꺼내면서 말하였다.
“이 검은 내가 휴대하고 다니는 신령한 보검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능히 되는데 검을 칼집에서
나오라고 하면 곧 빠져 나오고,
칼집에 들어가라고 하면 곧 들어간다.
선사께서는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황룡선사가 빙그레 웃으면서
“비록 영물이지만 그것이 도력 있는 사람의
명령을 들어야 가능할 것 같은데,
당신이 먼저 한번 시험해 보시오.”하였다.
여동빈은 보검한테 칼집에서 나오라고 외치자
그 검은 칼집에서 스스로 나와 은빛을 뿌리며
절 대웅전 기둥으로 날아가 검 끝이
똑바로 나무로 깎은 용의 눈에 박혔다.
황룡선사가 가볍게 웃으면서 오른손을
들어 올리면서 가운데 손가락으로 기둥에
박힌 보검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가 보건대 네가 이 검을 능히 칼집에서
끄집어낼 수는 있으나 다시 꼽을 수는 없다.”
여동빈이 잠시 놀라다가 큰소리로 웃으면서
보검을 보면서 “칼집으로 들어가라.”고 외쳤다.
그러나 보검은 기둥에 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 검은 여동빈이 여산에서 검술을 배우고 하산한 후
줄곧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어서
그 신령스럽기가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제 더는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여동빈이 그 황룡선사의 도와 법이 높고
깊음에 탄복하고 그 자리에서 절하여 사과하면서
불법을 가르쳐 줄 것을 청하였다.
황룡선사는 여동빈의 마음이 진심과 성의 있음을 알고는
그 자리에서
“당신은 이미 반 되 들이 솥으로 산천을 삶고
또 어떻게 한 알의 조 알 속에 세계를
감출 수 있는가를 듣지 않았는가?
내가 말한다면,
그 뜻은 즉 먼저 마음속에 아무런 물건(욕심)이
없어야만 능히 삼라만상을 둘러싸 안을 수 있다.
”고 알려주었다.
여동빈은 황룡선사의 깊은 뜻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오도송을 지었다.
*황룡선사의 가르침에 오도송을 짓다
황룡선사의 ‘먼저 마음속에는 물건(욕)이
없어야만(先要心中無物) 바야흐로 삼라만상을
싸안을 수 있다(方能包羅萬象)’는
한마디에 크게 깨달은 여동빈은
즉석에서 오도송을 지었다.
棄却瓢囊擊碎琴 기각표낭격쇄금
從今不戀汞中金 종금불연홍중금
自從一見黃龍後 자종일견황룡후
始覺當年錯用心 시각당년착용심
하나있는 표주박 주머니도 버리고,
거문고도 깨뜨려 버렸다.
이제부터 불사약(금단)에 더는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네
이제 황룡선사를 한번 만나본 후
비로소 그 당시 마음 잘못 쓴 것을 깨달았다네
여동빈은 낭랑히 오도송을 읊으면서
황룡선사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표연히 떠나갔다.
* 여동빈, 신선이 되어 올라가다
여동빈은 세상에서 백여 세까지 지내다가
무창 황학루 3층 누각 위에서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고 한다.
신선이 된 후 여동빈은 걸핏하면
인간 세상에 나타났다고 한다.
역대로 그가 인간 세상에 와서 놀다가 세상과 사람을
제도한 전설이 너무 많아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중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 여동빈, 200여년 후 송(宋)나라 때 악양루에 출현
송(宋) 경력 4년(1044년), 등자경은 중앙 정치무대에서
쫓겨나 파릉군 태수가 되었다.
부임한 다음해 그가 다스리던 파릉군은
정치를 잘하여 백가지 폐단이 바로 서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때 등자경은 당나라 때 연국공 장열(張說)이 세웠던
악양루가 낡아 보수를 하였다.
악양루 보수가 끝난 날 큰 잔치를 열었다.
연회가 막 시작되려고 하는데 등자경은 문득
이름만 적힌 명첩 하나를 받았다.
그 위에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고 다만
‘화주(華州)도사가 삼가 문후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등태수는 사람을 보내 그 도사를
악양루 위로 올라오게 하였다.
얼굴을 보니 긴 수염이 가슴까지 드리웠고
등 뒤에는 장검을 메고 있는데 그 모습이 청수하고
기이한 도사였다.
도사는 누각 위로 올라와 등태수와 마주하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아 호쾌하게 술을 마시고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좌중을 압도하였다.
악양루 중창 경축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술에 취한 후 각자 붓을 들고 시와 글을 짓기 시작했다.
화주도사 또한 붓을 들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朝游東海暮蒼梧 조유동해모창오
袖裏靑蛇膽氣粗 수리청사담기조
三醉岳陽人不識 삼취악양인불식
郞吟飛過洞庭湖 랑음비과동정호
아침에 동해에서 놀다가 저물어
창오군(광서성)으로 간다.
소매 속 들어있는 단검(푸른 뱀)은
담력과 기력이 더욱 호쾌하다.
악양루에서 크게 세 번 취했으나
사람들은 내가 여동빈인 것을 모르는데
낭랑히 시를 읊으면서 동정호를 날아서 지나갔다.
등자경은 화주도사의 시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는
즉시 그 자리에 있던 화공에게 화주도사의
취한 모습을 급히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등태수는 친히 예를 취하면서 나아가
화주도사에게 성명을 물었다.
화주도사는 이미 모든 것을 알려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 성은 ‘여’요 이름은 ‘암’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마치고 큰 소리로 웃으면서 작별을 고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등자경과 그 자리에 있던 문사들은 이때서야 비로소
그 도사가 당나라 때의 유명한 도사
여동빈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일화를 기리기 위해 이 악양루 우측에는
삼취정(三醉亭)이 세워져 있다.
이 삼취정은 청나라 건륭 40년(1775년)에 세워졌고,
그곳에는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모양의
여동빈 상과 그가 쓴 시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 이무기를 단검으로 만들다
앞에서 나온 詩
‘수리청사담기조’(袖裏靑蛇膽氣粗:
소매 속 들어있는 단검(푸른 뱀)은
담력과 기력이 더욱 호쾌하다)에서
청사(靑蛇)와 관련하여 고사가 전해져 온다.
일찍이 파릉현(현재 악양) 성 남쪽 백학산에는
큰 호수가 두 개 있었는데,
그 호수 가운데 이무기가 있어 민간에
피해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던 여동빈이 법술로 이무기를
다스려 단검으로 만들어 항상 소매 속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 여동빈 점쟁이로 변신
남송 때 비릉시에는 점을 잘치는 사람이 있었는데,
머리에는 푸른 두건을 메고
몸에는 누런 도복을 입고 있었다.
스스로 지명(知名)선생이라 하였다.
비릉군 태수 호도는 지명선생이 점을 기가 막히게
잘 친다는 소문을 듣고,
지명선생을 청해서 점을 쳤다.
지명선생이 ‘당신의 수명은 매우 길고,
곧 당신의 관직에 변동이 있다.
변동 시기는 청명절 전 5일
또는 청명 후 7일이다.’고 하였다.
고을 태수 호도는 청명 5일 전에 과연
그가 자리를 바꾸어 형문군 태수로 간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청명 후 7일이 되자 정식으로 이동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호도는 지명선생의 신기막측한 점술에 탄복하여
사람을 보내 그를 찾았으나
이미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호도는 후에 형문군 태수가 된 후 친구한테
남경의 석각에 새겨진 여동빈 상을 탁본한 그림을 받았다.
지명선생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때서야 지명(知名) 두 글자 중에는 지(知)자에
‘口’, 명(名)자에 ‘口’가 있어 두 구(口)자를 합한즉
‘여(呂)’자가 아닌가? 호도는
그가 친히 겪은 이일을 자기 문집에 남겨 놓았다.
*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가?
여동빈이 하루는 구름 따라 북방으로 갔다.
하루는 거지 한 명이 길바닥에서
굶주려 아사 직전까지 간 것을 보았다.
이미 거의 숨이 끊어질 듯하였다.
불쌍한 중생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여동빈은 법술을 사용해서 거지를 구해냈다.
그 자리에서 돌을 금으로 만들어
거지에게 주어 살아가도록 하였다.
뜻밖에 황금을 얻은 거지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곧 그 거지는 욕심이 발동하여 여동빈에게
‘돌을 황금으로 만드는 손’을 달라고 하였다.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인간의 욕심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니!
또 한 번은 여동빈이 기름장사로 변신하여
기름을 팔면서 악양에 갔다.
기름을 사는 사람들마다 더 달라고 요구했다.
다만 한 노파만 기름을 사면서 더 달라고 하지 않았다.
여동빈은 그녀가 신선공부를 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제도하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가서
한 줌의 쌀을 우물 속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당신은 이 우물물을 팔면 부자가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 노파는 여동빈이 간 후 우물속의 물이
전부 미주(美酒)로 변한 것을 알았다.
그 노파는 우물속의 술을 팔아 일 년 후에 부자가 되었다.
그 후 어느 날 여동빈은 그 노파 집에 갔는데
마침 노파가 없고 그녀의 아들이 집에 있었다.
여동빈이 ‘당신들 집은 지난 일 년 동안
술을 팔아 부자가 되었는데,
느낌이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그 노파의 아들은 ‘좋기는 좋은데 단지
돼지 먹일 술 찌꺼기가 없어서 힘들다.’고 하였다.
여동빈이 탄식하면서
‘인심이 탐욕스러워 부끄러움도 모른다.
’고 하면서 손을 들어 우물 속의 쌀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며 갔다.
노파가 외출에서 돌아와서야
우물속의 술이 모두 물로 변한 것을 알았다.
* 욕심은 끝이 없는가?
인간들에게 실망하면서 여동빈은 구름처럼
천지(天地)를 내 집으로 삼아 운유(雲遊)하였다 한다.
여동빈과 얽힌 이야기는 끝이 없으나
이 정도로 그칠까 한다.
*중생들이여, 시간을 아껴 수행하라
여동빈은 중생들이 명리재색(名利財色)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헛되이 죽음으로 가는 것은
경계한 듯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후학을 경계하게 하였다.
순양여조시(純陽呂祖詩)
人身難得道難明 인신난득도난명
塑此人心訪道根 진차인심방도근
此身不向今生度 차신불향금생도
再等何時度此身 재등하신도차신
사람 몸 얻기 어렵고 도 밝히기도 어려워라
사람마음 따라 도의 뿌리를 찾나니
이 몸을 이 생애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하리요
이 인간의 몸 받기가 정녕 어려운데 중생들이여,
정법을 만나 수행을 통해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시라!
간절히 희망하면서 신선 여동빈 편을 마칩니다.
제2화 】장과로(張果老)
당 현종과 마주하다
그 당시 현종은 동쪽 수도인 낙양에 머무르고 있었다.
장과로가 낙양에 도착한 후,
그는 현종 때 만든 집현전(集賢殿) 서원으로 모셔졌다.
연후에 가마를 타고 입궁하여 황제를 알현하였다.
얼굴을 마주하자 당 현종은
장과로에게 공경스럽게 예를 표했다.
성긴 흰 머리털을 다 뽑고,
까만 머리털을 다시 나게 하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현종은 장과로의 하얀 머리털과
몇 개 남지 않은 이빨을 보면서
“선생은 득도한 고인이라고들 합니다.
어찌하여 머리털과 이빨이
이리도 노쇠했습니까?” 물었다.
장과로는 문득 현종의 이 질문이 장과로 자신을
의심한다는 뜻이 있음을 알아채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산에 사는 신은 이미 쇠로의 나이에 들었고,
몸에는 의지할 만한 도술이 없습니다.
머리털이 하얗고 이빨이 흔들리는 것이
폐하를 혐오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혐오스럽게 만드는 이 이빨과 머리털은
없애버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말을 마치고 현종의 면전에서 손을 들어
얼마 남지 않은 희끗희끗한 머리털을
깨끗이 뽑아버리고,
또 입안에 남아있는 치아를 전부 뽑아 버리자
입안이 피로 가득하였다.
현종은 설마 장과로가 면전에서 이러한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면서
“선생은 어찌 이렇게 잔악하십니까?
우선 좀 쉬다가 잠시 후 다시 봅시다.”
하고는 자리를 떴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현종은 장과로를 다시 청했다.
다시 보았을 때는 거의 몰라보게 되었다.
즉 장과로의 머리에는 새까만 머리가
이미 길게 자라있었고,
입안에는 새하얀 이빨이 새로 나 있었다.
나이가 40대 정도로 젊어진 것 같았다.
그래서 현종은 장과로가 보통 사람과 확실히 다르다고
인정하면서 이로부터 더욱 존경하였고,
시간만 나면 장과로를 입궁케 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현종, 옥진 공주를 장과로에게 시집보내려 하다
어느 하루, 태상시 소화, 비서감 왕형질이 함께
장과로를 방문하였다.
장과로와 이들이 한담하고 있는데 돌연 장과로가
크게 웃으면서 뚱딴지같이 한마디 던진다.
“공주를 처로 둔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두려운 일이야!”
소화ㆍ왕형질 두 사람은 서로 놀라면서
장과로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세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때 태감이 찾아왔다.
장과로에게 “현종황제께서 옥진(玉眞) 공주가
어려서부터 도교를 독실하게 믿으니
옥진 공주를 선생님께 시집보내려고 하는데
선생님의 뜻은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장과로는 큰소리로 웃고는
“나는 이미 나이가 대단히 많은 고령자이고,
권세 있는 사람에게 아부할 수 없으며,
공주의 청춘을 그르칠 수 없다.”면서 사양하였다.
심부름 온 태감은 궁으로 돌아가 현종에게
그대로 아뢸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현종은 공주를 장과로에게 시집보내기로
혼자 마음먹었고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소화ㆍ왕형질은 이때서야 비로소
장과로의 “공주를 처로 둔다면 가히 두렵다.
”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고 이 늙은이야말로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귀신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과로 , “나는 요(堯) 임금 때
(B. C. 2300년경) 출생한 사람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신기한 일들이 알려지자
조정의 공경백관들은 장과로가 신기 망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장과로를 찾아와
인사를 하였다.
이들은 장과로의 출생ㆍ경력 등을 알고 싶어 했고,
도술수련의 요결을 가르쳐 줄 것을 요청했다.
도술에 대해서 장과로는 일률적으로 얼버무리는 등
사람들이 그 오묘함을 모르도록 하였다.
또한 자기의 생애에 대하여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곧 “나는 상고 삼황오제시절 요(堯)임금 때
병자(丙子)년에 태어나서 요임금과 함께
정사를 보면서 시중의 벼슬을 지냈다.”고 하였다.
(장과로의 나이는 약 3,000세 정도였다고 추정)
팔선열전 제3화 철괴리(이 현)
동자의 안내로 화산으로 들어가다
이 현(철괴리)은, 태상노군이 자기를 영접해 오라고
두 동자를 보낸 것을 알자 기쁘기 그지없었다.
마음속으로 ‘태상노군께서 나를 알아보고
또한 사람을 보내 나를 영접하는 것을 보니
나는 필연코 노자와 크나큰 연분이 있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였다.
이 현은 두 동자의 뒤를 따라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르며 어딘지도 모르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노자를 스승으로 모시다
동자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이윽고 노자가 은거하여
수도하고 있는 그윽한 초당에 도착했다.
초당 안에 들어가니 노자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비록 수염과 머리칼은 하얗게 세었으나,
피부는 젊은 처녀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정신은 충만하고 넘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다.
노자 옆에는 푸른 눈에 눈썹이 빼어나게 가지런한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노자는 팽조의 스승이신 완구(宛九)선생이라고
소개했다.
팽조(彭祖) : 고대선인, 전설에 따르면 성은 전(?),
이름은 견(?)이다.
열선전에 의하면 ‘5제 중의 한 분인 전욱의 현손이고
육종씨(陸終氏)의 가운데 아들이며,
하나라로부터 은나라 말까지 약 800여세를 생존,
항상 계지(桂芝)를 먹고,
도인행기(導引行氣)를 잘했다고 하며,
민간에서는 방중술과 관련 소녀경에 등장’하고 있다.
완구(宛九)선생 : 고대선인, 洞仙傳에 완구선생은
제명환(制命丸)을 먹고 득도했다고 하며,
은나라 말년에 그의 나이는 이미 천여세였다.
그는 비술을 제자인 강약춘 등에게 전했는데,
선약을 복용 후 삼백년이나 살았는데
마치 15세 동자와 같았다고 한다.
팽조도 일찍이 완구선생을 사부로 모시고 수도하였다.
이 현(철괴리)은 경건하고도 공손하게 두 신선에게
절을 올리며 대도의 요결에 대해 가르침을 청했다.
노자와 완구선생 두 신선은
이 현에게 대도요결에 대해 한바탕 강의를 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이 현에게 되돌아가서
지금 가르쳐준 법에 따라 열심히 수련하라고 당부했다.
이 현, 수련이 깊어지고, 제자를 받아들이다.
화산에서 돌아와 이 현은 두 신선의 가르침에 따라
수련을 하면서 하나하나 몸소 자세히 체득해 나갔다.
지난번보다 힘써 공부하면서 더욱 부지런히
수련하였는데 점차 음신(陰神)이 마음대로 육체를
떠났다가 되돌아오는 경지까지 수련되었다.
이렇게 오래 수련해 나가다보니 이 현의 도가 높고
깊은 경지까지 갔다는 소문이 원근에
점차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양자(楊子)라는 젊은이가 찾아왔다.
양자는 이 현에게 절을 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도를 배우겠다고 한다.
이 현은 양자를 가만히 살펴보니 도를 향한
그 마음이 가상하고 자질도 괜찮아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스승과 제자가 함께 기거하면서 수행하였다.
노자와 완구선생 두 신선이 방문하다.
이 현이 어느 하루 산위를 산보하고 있는데
홀연히 상서로운 구름이 멀리서 피어올랐다.
노을빛 같은 연하가 빙빙 돌면서 올라오는데,
공중에서 두 사람이 학을 타고 오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학 위에 탄 두 사람은
바로 태상노군과 완구선생이었다.
이 현은 황망히 앞으로 나아가 절하면서
두 신선을 영접하였다.
이곳까지 찾아온 두 스승을 보자,
그 기쁨과 반가움을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제4화 종리권(鍾離權)
폭우로 길을 잃고 헤매던 중, 벽안의 노승을 만나다.
종리권은 팔선 중 하나이다.
흔히 신선 여동빈의 스승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보통 민간에서는 '한나라 때 사람 종리'라는 의미로
한종리(漢鍾離)라고 부르기도 한다.
종리권(鍾離權)에서 성은 종리(鍾離)이고,
이름이 권(權)이다.
자(字)는 운방(雲房)이다.
경조 함양(지금의 협서) 출신으로 후에
이름을 각(覺)으로 고쳐 종리각(鍾離覺)으로
바꾸었으며 자(字)도 적도(寂道)라 하였고
도호(道號)를 정양자(正陽子)라고 하였다.
원나라 시대에 전진도(全眞道)에서는
정양(正陽)조사로 받들어 모시었다.
종리권의 부친은 한(漢)나라 때 열후의 벼슬에 봉해져
벼슬이 중군태수(中郡太守)까지 올랐다고 한다.
출생일화
종리권이 태어날 때,
산모가 거처하던 지붕 위 하늘에는 기이한 빛이
수 미터 솟구쳐 그 모양이
작렬하는 불빛과 같았다고 한다.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솟구치는 화염 때문에
불이 난 것으로 오인할 정도였다.
그는 두개골이 둥글고 이마가 넓고,
눈은 오목하고 코가 높았다.
귀는 크고 두터우며 눈썹은 짙고도 길었다.
얼굴은 붉고 기골이 남달라서,
마치 세살 정도 된 아이와 같았다고 한다.
더욱 괴상한 것은 종리권은, 태어난 후 며칠동안
울지 않고 젖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7일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침상에서 뛰어내려오면서
'몸은 자부(선계)에서 놀았고,
이름은 옥경(옥황상제가 계시는 곳)에 올라있다
'(身遊 紫府, 名書玉京)고 외쳤다.
그 목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종을 두드리는 것과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뛰어다닐 수 있었는데 어른처럼 빨라
아이들이 쫒아갈 수 없을 정도였고,
다 큰 아이들처럼 말을 하고 밥을 먹었다고 한다.
성장한 후에 종리권은 벼슬에 나아가,
관직이 간의(諫議)대부에 올랐다.
간관 업무를 수행하던 중 모함을 받아서
좌천되어 강남으로 귀양간 적도 있었다.
전투 중에 폭우로 길을 잃고
귀양에서 돌아온 종리권은
진(晉)의 장군으로 복직했다.
대장군이 되어 전군을 호령하게 되었다.
그 당시 토번이 국경을 넘어 침입해 들어와,
종리권은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했다.
어느 날, 양쪽 군대가 대치하여
일진일퇴 교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이 불면서
하늘과 땅이 캄캄해졌다.
앞뒤 분간이 어려워지고 양쪽 군대 모두
더는 싸움을 할 수 없었다.
군사들은 자기 몸 가누기도 어려워 군대의 대오가
스스로 붕괴되어가는 형국이 되었다.
종리권이 타고 있던 말 또한 겁을 먹고
미친 듯이 날뛰었다.
비바람이 한바탕 지나간 후,
종리권은 단기필마로 자기 혼자만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꾸불꾸불한 험난한 깊은 산골짜기 속이어서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종리권은 말을 몰아 산골짜기를 벗어나
자기가 지휘해온 군대를 찾기 위해 안간 힘을 다했다.
그러나 그 계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빙빙 돌 뿐이었다.
호승(胡僧)을 만나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나무가 무성한 숲속이라 골짜기에는
어두움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하루저녁 묵을 인가조차 보이지 않자 종리권은
말을 세우고 어찌하면 좋을지,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저 멀리 산모퉁이에서
스님(胡僧) 한 분이 나타났다.
멀리서 바라보니 그 호승은 푸른 눈에 높은 코,
헝클어진 머리칼을 눈썹부위까지 흐트러뜨리고,
몸에는 풀로 짠 옷을 걸치고
손에는 죽장을 짚고 있었다.
그 스님은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종리권 앞으로 걸어왔다.
제5화 하선고(何仙姑)
여성의 수련에 각별한 관심
당나라 측천무후가 불렀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하선고의 도력이 세상에 알려졌다.
오래지 않아 측천무후도 하선고의 신통함과
기이한 행적을 듣고서 관리를 파견하여
하선고를 장안으로 불렀다.
관리 일행과 함께 장안으로 오던 중에
하선고가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파견 관리들이 백방으로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실망하여 궁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백일비승 하여 신선의 반열에
측천무후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당나라 중종 경룡(景龍)년간에 신선 철괴리가
하선고를 인도하여 백일비승(白日飛昇)하여
신선의 반열(仙班)에 들었다. 후에 당나라,
송나라 때 하선고는 장안 승선관(昇仙觀),
강서 마고단(痲姑壇)에서 현신하였다고 한다.
여성 전도에 특히 관심을
하선고는 호남과 광저우 일대에서 대부분 활동하였다.
여자로서 성선(成仙)한 신선이 드문 가운데
하선고는 자연히 부녀(婦女)에게 전도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 당시 당광정이라는 여자가 몸에 혈질(血疾)이라는
병이 있어 연달아 8~9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모두 요절했다.
당광정은 스스로 전세의 죄업이 무거움을 알고는
자기 남편에게 수도하겠다는 뜻을 이야기하고
집을 떠났다.
천릿길이 멀다하지 않고 하선고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또 송나라 때 이정신이라는 사람의 처가
임신을 했는데 출산일이 되었으나
아이는 나오지 못하고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선고를 청해 도움을 받게 되었다 .
하선고가 출산 현장에 와서 임산부에게
"당신은 일찍이 임신한 여종 한 사람을 학대하여
죽게 한 사실이 있다.
이제 그 업보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하선고가 법술을 써서 아이를 낳게 하였으나
세상에 나온 아이는 죽어 있었다.
아이 몸 위에는 채찍 흔적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하선고의 내력에 대한 다양한 견해
사실 하선고의 도술이나 신선으로서 자취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많지 않다.
또 하선고의 출신에 대한 기록도 분분하여
사실을 쉽게 구분하기도 어렵다.
하선고의 본관이 광주(廣州)가 아니고
순주(循州), 영주(永州)라는 설도 있다.
어떤 기록에는 하선고의 성이 조(趙), 이름은
하(荷)라고 적혀있다.
이름 하(荷)자(팔선도 그림 속에는 손에 연꽃을
들고 있으므로)가 잘못 와전되어
하(何)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어떤 기록에는 하선고의 이름이 이랑(二娘)이고
신발을 짜서 생업으로 삼고 스스로 수련하여
도를 얻었다고 한다.
당나라 현종 개원 연간에 사자를 파견하여
장안으로 다시 초청했다.
이 초청이 그녀를 희롱한다는 생각이 들자
장안으로 오는 도중에 사라졌다고 한다.
결국 팔선으로 선정되다
당나라, 송나라 연간에 여덟 신선이 모두 다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는
하선고는 그 팔선의 행렬에 들지 못했다.
누가 팔선에 속하는가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었으나
명나라 이후가 되어서야 팔선이 정해졌다.
이때부터 여자 신선 하선고와 7명의 남성 신선들
즉 팔선에 대한 고사 전설이 부단히
더해지게 되었으며 제각기 자기 재간을 나타내게 되어
그 내용이 더욱 풍부하고 다채롭게 되었다.
한편, 현재 중국 광주 증성현(增城縣)에는
하선고의 사당이 있고,
매년 음력 3월 7일 하선고의 탄신일이 돌아오면
4만여 읍민들이 모여 기념 창극을 하고
경축행사를 올리는 것이 풍속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제 6화 남채화(藍采和)
남채화 이름의 유래
팔선도(八仙圖)에서 석자 길이의 긴 박자판(拍板)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이 남채화(藍采和)이다.
박자판(拍板)은 옛날 사람들이 노래를 부를 때
박자를 맞추기 위해 두드리는 악기이다.
남채화는,
원래 그의 이름이 아니며
그가 노래를 부를 때,
후렴처럼 화음을 맞추는 뜻이 없는 소리였다.
그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답답가 남채화'(踏踏歌 藍采和)라고 외치며
장단을 맞추었으므로 그 당시 사람들이
그를 남채화(藍采和)라고 불렀다.
여름에 두꺼운 솜옷을 입고
남채화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당나라 말기,
오대의 사람들은 그가 헤져서
너덜너덜한 남색 긴 장삼을 걸치고 성안과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에 출몰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남색 장포를 입고 세 치나 되는 넓은
허리띠를 둘렀는데
그 허리띠는 자세히 다가가서 보면
먹으로 검게 물들인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남채화는 한쪽 발에는 비교적 괜찮은
가죽장화를 신었으나,
다른 쪽은 양말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고 한다.
또한 보통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작열하는
무더운 여름에는 남색 장포 안에 솜을 가득 넣어
두껍게 입고 다녔으나 삭풍이 몰아치는 엄동설한에는
너덜너덜한 홑겹의 장삼을 입고 다녔다.
괴상한 것은 여름에는 땀을 흘리지 않았고
겨울에는 도리어 온몸에서 열기가 솟아올랐다고 한다.
박자판을 두드리며 거리를 활보
남채화가 박자판을 두드리고 노래하며 거리를
활보할 때마다 한 무리의 남녀노소가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박수치며 웃었고
한편으로는 그와 장난을 치곤하였다.
남채화가 노래를 하지 않을 때는,
그에게 농담을 거는 자들에게 한 마디씩
입에서 나오는 대로 던지는 말이 풍자가 있고
재치가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포복절도하게 하였다고 한다.
답답가(踏踏歌) 부르는 남채화
남채화가 거리를 활보하면서 불렀던 노래는
매우 많고도 다양했다고 한다.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답답가(踏踏歌) 남채화(藍采和)'로
시작하는 노래이다
답답가(踏踏歌) 남채화(藍采和)
世界能幾何(세계능기하)
세계가 그 얼마이던가?
紅顔一春樹(홍안일춘수)
붉은 얼굴 한 그루 봄나무
流年一擲梭(유년일척사)
흐르는 세월은 한 번의 북질
古人混混去不返(고인혼혼거불반)
옛 사람들은 혼돈 속에서 가고 돌아오지 않는데
今人紛紛來更多(금인분분래갱다)
지금사람들 분분히 오는 이 많더라.
朝騎鸞鳳到碧落(조기난봉도벽락)
아침에 난 새와 봉황을 타고 하늘에 오르고
暮見蒼田生白波(모견창전생백파)
저녁에 바다를 보니 흰 파도가 인다.
長景明暉在空際(장경명휘재공제)
햇볕은 하늘가에 오래도록 밝게 빛나는데
金銀宮闕高嵯峨(금은궁궐고차아)
금은궁궐은 높아 우뚝하구나.
주는 돈, 긴 끈에 꿰어 끌고 다니다
노래를 부르며 성안을 다니다보면
그에게 돈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돈을 긴 끈에 꿰어 끌고 다녔는데
가끔 돈이 떨어졌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길을 가다가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줄에 꿴
돈을 전부 다 주었다.
돈 쓸 곳이 없으면 그 돈으로 술을 사서 마셨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의 남채화를 보았는데,
그들이 노인이 된 후에도 그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용모는 여전히 옛날과 같았다고 하며
조금도 노쇠한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선학(仙鶴)을 타고 사라지다
어느 하루 남채화가 주루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사람들 눈에 띄었다.
남채화가 술에 취해 있는데 홀연히 퉁소와
생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지며 하늘로부터
선학(仙鶴) 한 마리가 술집 창문을 통해
남채화 옆으로 날아와 앉았다.
술을 마시던 남채화는 술잔을 놓고 박수를 치며
큰 소리로 웃으면서
“왔구나! 왔구나!”를
두어 번 반복하고는 몸을 날려
선학의 등 위에 올라탔다.
선학은 길게 한번 울고는 남채화를 등에 태우고
공중으로 사라졌다.
이때부터 거리에서
"답답가 부르는 남채화"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제7화 한상자(韓湘子) 이야기 
팔선열전 한상자 시가 새겨진 푸른 꽃이 피어나
한유, 한상자에게 이별시를 지어주다
한유는 귀양길에서 남관(藍關)을 지나다가
큰 눈을 만나 길을 잃고 진퇴양난에 빠졌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음에 직면해 있을 때
홀연히 조카 한상자가 나타나 구조되었다.
한유가 탄 말의 고삐를 잡고 길을 안내하여
정주까지 무사히 도착한 후 이별을 하게 되었다.
이별을 앞두고 한유가 조카 한상자에게 즉석에서
7언 율시 아침에 구중궁궐 황제께 올린 상서
한한 수를 지어 주면서 아쉬워하였다.
시(詩)에서 이르기를,
一封朝奏九重天 일봉조주구중천
아침에 상소문 한통을 천자에게 올렸더니만
夕貶潮陽路八千 석폄조양로팔천
저녁에는 조양으로 팔천리 귀양길에 올랐구나.
本爲聖朝除弊事 본위성조제폐사
상소는 원래 조정을 위해 그릇된 일을
바로잡기 위함이었는데
豈將衰朽惜殘年 기장쇠후석잔년
늙고 쇠잔한 몸으로 귀양길에 올랐으니
어찌 말년이 애석하지 않은가
雲橫秦嶺家何在 운횡진령가하재
구름 빗긴 고갯길(진령)위에 서니 고향은 어디메뇨
雪擁藍關馬不前 설옹남관마불전
눈이 남관을 가로막아 말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知汝遠來應有意 지여원래응유의
네(한상자)가 멀리서 온 뜻이 응당 있을 터이니
好收吾骨瘴江邊 호수오골장강변
풍토병이 있는 이곳 강가에서 (내가 죽거든)
나의 뼈를 잘 수습해 다오.
시를 읽으면서 서로 위로하며
눈물을 뿌리면서 이별하였다.
흰 목단 꽃이 푸른색으로 바뀌고,
꽃잎에 글자가 새겨져
한유의 귀양지에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해 봄, 집에서 보낸 편지가 조양에 닿았는데,
한유에게 기이한 이야기 하나를 전했다.
“집 마당에 있던 그 흰 목단 꽃이 금년 봄에 피었는데
그 색깔이 전부 푸른색(碧色)이며
또한 꽃의 네 면에는 다섯 가지 색깔이 섞여있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푸른색 목단 꽃의
매 꽃잎 위에는 모두 파리 머리만한 작은 해서
글씨로 14자가 씌어져 있습니다.
그 14글자는
"雲橫秦嶺家何在 (운횡진령가하재)
雪擁藍關馬不前 (설옹남관마불전)"인데
새겨진 글자는 천의무봉한 서법으로 정교하여
능히 사람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편지에 적혀 있었다.
이 편지를 받은 한유는 비로소 한상자가
기연을 만나 이미 신선이 되었음을 시인하였다.
만약 신선이 아니라면 어떻게 능히 금년에
지을 시(詩)를 작년에 미리 알 수 있단 말인가?
아울러 시구를 꽃 잎 위에 나타낼 수 있다니!
한상자, 숙부 한유를 수도의 길로 인도
일설로는, 이런 일이 있고나서 한유도 일심으로
도문에 들었다고 한다.
한상자는 한유를 인도하여 팔선의 일원인
종리권, 여동빈 두 분 스승을 만나게 했다.
두 분 신선께서 한유에게 전생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한유는 높은 학식과 지혜가 있고 또한 태어나면서
도가와 선연(仙緣)이 있어,
자연스럽게 오도(悟道)했다고 한다.
수도한지 불과 10년 만에 심성을 확철대오 하였다.
후에 하남 숭산 소실산에서 득도하고
태백성군(太白星君)의 인도하에 하늘에 올라
옥황상제를 알현하고
원래의 천직(天職)을 찾았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전해지고 있는
"한상자가 문공 한유를 제도한 일장 고사"이다.
제 8화 조국구 우화등선(羽化登仙)하다
옥황상제를 알현하다
철괴리, 장과로, 종리권, 여동빈,
하선고, 남채화, 한상자, 조국구 등
팔선 모두 도를 이루었다.
더 없이 쾌청하고 좋은 날을 택해
드디어 승천하였다.
그 날, 원시천존, 태상노군, 요지 서왕모,
구천현녀, 기타 신선 영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옥황상제를 모시고 하늘의 조회를 갖게 되었다.
옥황상제께서 팔선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작위를 내렸다.
옥황상제께서 팔선의 거처를 마련해 주다
작위를 내린 후, 옥황상제께서는
팔선 개개인 신선들에게 머물 곳(洞府),
하나씩을 선처해 주었다.
태백금성(太白金星) 이장경(李長庚)을 특별히 파견하여
하늘의 장인들을 데리고 가서 천하의 여덟곳
명산에 머물곳(洞府)을 건축하게 하였다.
그래서 천하 명산 여덟 곳에 공중누각을 세우고
여덟 신선이 그곳에 각각 머물게 하였다.
철괴리는 화산(華山)의 자운동(紫雲洞)에
동부를 지어 머물게 되었으며,
장과로를 위하여 무당산(武當山) 백로암(白露巖)에
궁전이 지어졌다.
남채화는 왕옥산(王屋山) 추운곡(추雲谷)에,
여동빈은 아미산(峨眉山) 견운애(견雲崖)에
머물게 되었다.
하선고는 여산(廬山) 옥실동(玉室洞)에
한상자는 숭산(嵩山) 벽운봉(碧雲峰)에
거처하게 되었으며,
종리권은 종남산(終南山) 일선천(一線天)에
조국구는 형산(衡山) 오묘봉(五妙峰)에
각각 머물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팔동(八洞 )에 거주하고 계시는 신선"인 '
팔동신선(八洞神仙)이시다.
後記, 팔선내력
전해 내려오는 기록에 따라 팔선의 내력에 대해
소략해 보겠는 바,
장과로는 천지가 개벽할 때 한 마리 쥐였는데
공덕을 쌓아서 승화하여
박쥐(선복:仙, 박쥐 복)가 되었다가 몇 생을 거쳐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선과(仙果)를 이루었다고 한다.
철괴리는 원래 옥황상제의 사향리(司香吏)였는데
직무를 태만히 하여 인간세상으로 떨어져
여러 생을 거쳤으나 본성이 어둡지 않아 마침내
태상노군에게 제도되어 팔선의 영수가 되었다.
하선고는 원래 옥황상제의 사화녀(司花女)였는데
잘못을 저질러 인간으로 전생하여
현녀랑랑(玄女娘娘)이 되었다가 제도되어
신선의 반열에 올랐다.
종리권은 태상노군의 청우동자(靑牛童子)였는데
노는데 정신이 팔려 청우가 하계로 달아나
요괴가 되었기에 벌을 받고
인간세상에 귀양 왔다고 한다.
후에 동화제군(東華帝君)에게 제도되어 신선이 되었다.
한편 동화제군은 일체 범속을 제도하겠다는 뜻을 세워
선계의 영수 지위를 버리고 인간 세상에 투생하였는데
전생하기 전에 종리권과 서로 스승과 제자가 되기로
약조하였다고 한다.
동화제군이 전생한 사람이 바로 여동빈이라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여동빈은 종리권에 의해 제도되어
선계에 올랐다.
남채화는 피발대선(披髮大仙)이 전생하여
신선이 되었다고 하며
한상자는 옥황상제 전각의 비서랑(秘書郞)이었는데
전당강(錢塘江) 조수, 다스림을 소홀히 하여
그 죄로 상수(湘水)의 백학(白鶴)으로 화생하였다가
종리권과 여동빈 두 신선의 제도를 받았다고 한다.
조국구는 진한귀사(秦漢鬼師) 왕일지의 후생으로
철괴리의 제도를 받았다고 한다.
이상 여덟 분 신선이 모두 전세의 업을 다 갚고
신선이 되어 책봉을 받고 천하 명승지 팔동(八洞)에
각기 거주하면서 이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지 않고
때때로 세상을 순행하며 권선징악(勸善懲惡)을
행하고 있다 한다.
(팔선 열전 끝)
[출처] [팔선열전八仙列傳]
'알아두면 조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초 김석곤의 글씨 (0) | 2017.06.06 |
---|---|
청학동으로 들어가는 [석문(石門)] (0) | 2017.06.06 |
입춘첩구절 (0) | 2017.02.23 |
福如东海长流水寿比南山不老松외 조은시귀절 (0) | 2017.02.23 |
숫자의비밀 (0) | 2017.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