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19. 18:22ㆍ알아두면 조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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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평론가 윤덕노의 음食經제]
새해에 조기, 유자 먹으면 부자 된다
중국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중국인의 엄청난 씀씀이가 화제다. 한번 방문에 억대를 썼다는 요우커(遊客)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는데 돈을 쓰다 못해 별 이상한 쇼핑을 하는 사람도 다 있다.
짝퉁 조기, ‘부세’ 한 마리를 81만원에 산 관광객도 있다.
지난해 설날 무렵 제주도 수산물 경매시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얼핏 보면 벼락부자 왕 서방의 돈 자랑 허세처럼 보이지만 자세한 사정을 알고 보면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중국 비즈니스를, 다른 나라 문화를 이해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왕 서방은 왜 조기도 아닌, 짝퉁 조기 부세 한 마리를 81만원씩이나 주고 샀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한다. 중국도 다양한 종류의 새해 인사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꽁시파차이(恭喜發財)’라는 말이다. 부자 되라는 뜻인데 알고 보면 참 재미있는 인사법이다.
올 한 해 돈 많이 벌 것(發財)이니 미리 축하한다(恭喜)는 뜻이다.
선물시장에서 덕담을 내놓은 것 같다. 돈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면모가 새해 인사에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또 다른 새해 인사도 있다.
‘녠녠유위’, 연연유여(年年有餘)라고 한다. 풍성하고 여유로운 한 해를 보내라는 덕담이다.
그리고는 새해 식탁에 생선 요리를 차려놓고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먹으며 풍요로운 한 해를 소원한다. 새해와 생선요리가 어떤 관계가 있기에 생선요리를 먹으며 연연유여라는 인사를 하는 것일까?
여유롭다고 할 때의 여(餘) 자와 물고기 어(魚) 자는 중국말로 발음이 같다. 새해 식탁에 차린 생선 요리는 곧 연연유어(年年有魚)의 의미다. 생선 요리를 먹으며 만사 여유 있고 금전적으로도 풍요로운 한 해를 소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새해라고 아무 생선이나 먹으며 잘살기를 비는 것은 아니다. 지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새해에 특별히 먹는 생선이 따로 있다.
항저우 조기와 베이징 잉어
상하이와 항저우 같은 화동지방에서는 주로 조기를 먹는다. 가장 인기 있는 조기 요리는 조기 탕수육(糖醋黃魚)이다. 튀긴 조기에 달콤한 탕수 소스를 뿌린 것으로 고소하고 새콤한 맛이 별미다.
중국에서는 조기를 황어(黃魚)라고 한다. 우리는 조기가 몸에 이로운 생선, 기운을 차리는 데 도움을 주는 물고기라는 뜻에서 도울 조(助), 기운 기(氣)자를 써서 한자로 조기(助氣)라고 쓰지만 중국인들은 비늘 빛깔이 누렇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처럼 조기와 부세를 구분하지 않는다.
상하이, 항저우 사람들이 새해에 특별히 조기를 먹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기를 먹으면 부자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생선 빛깔도 누런빛이고 이름도 황어이니 조기에서 황금을 연상하는 모양이다.
조기를 먹는다는 것은 곧 황금이 입속으로 들어온다는 뜻이 된다. 이 때문에 중국인은 새해에 먹는 황어로는 조기보다 부세를 더 좋아한다. 부세가 조기보다 크기도 더 크고 비늘 빛깔도 더 누렇기 때문이다. 더 크고 반짝이는 황금을 상징하는 셈이다.
중국 관광객이 제주도 수산시장에서 큼직한 짝퉁 조기, 부세 한 마리를 81만원에 샀던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미신으로 보거나 중국 새해 풍습을 모르면 벼락부자 왕 서방의 돈 자랑이겠지만 중국 문화를 이해하면 간절한 새해 소원이다. 중국 관광객을 상대하는 어물시장이라면 조기보다는 노랗고 큼지막한 부세를 많이 준비할 일이다. 중국 사람들이라고 새해에 다 조기를 먹으며 부자 되기를 빌지는 않는다.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화북 지방 사람들은 새해에 조기보다는 잉어를 먹으며 한 해 큰 돈 벌기를 소망한다. 사실 바닷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진 화북지방에서는 바다 생선보다는 민물 생선을 더 많이 먹는다. 그중에서도 으뜸이 잉어인데 중국인들이 잉어를 좋아하는 데는 맛도 맛이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잉어는 한자로 리어(鯉魚)다. 이익(利益)이라는 단어와 중국어 발음이 같다. 그러니까 잉어를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익이 되는 것을 먹는다는 뜻이다. 이런 연유로 새해에 잉어요리를 먹으며 사업에서도 이익을 많이 내고 집안에도 이로운 일이 생기기를 비는 것이다.
재물이 생긴다는 유자의 인기
새해를 전후해 홍콩 여행을 하면 시장에서 유자나무 분재를 많이 볼 수 있다. 과일 시장에도 유자가 많이 보인다. 홍콩뿐만 아니라 인접한 중국 광동지방도 마찬가지다. 홍콩을 비롯한 광동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유자나 유자가 들어간 음식을 좋아한다. 특히 해가 바뀔 무렵이면 유자로 만든 음식을 먹고 유자차를 마시며 심지어 유자 잎을 끓인 물로 세수를 하고 목욕도 한다. 이렇게 하면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을 막고 행운을 불러 부자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시 나름의 이유가 있다.
노랗게 잘 익은 유자는 둥근 황금 덩어리와 많이 닮았다. 그렇기 때문에 금빛 유자를 먹으며 하늘의 도움을 받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품는다. 황금 닮은 유자를 먹으며 큰돈 벌기를 비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굳이 하늘의 도움은 또 무슨 소리냐 싶지만 역시 사연이 있다.
한자로 유자의 유(柚) 자는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할 때의 우(佑) 자와 중국어 발음이 같다. 그러니 유자를 먹으면 하늘의 도움을 받아 재물이 생긴다고 믿는 것인데, 어느 정도의 재물을 모을 수 있냐하면 금옥만당, 집안을 금과 옥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유자가 금옥만당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금옥만당하면 많은 사람들이 홍콩 영화제목을 떠올리지만 사실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금옥만당 막지능수(金玉滿堂 莫之能守),
즉 집안에 재물이 가득해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뜻으로 다음 구절이 부귀하여 교만해지면 스스로 허물을 남기게 된다는 말이다. 유자를 먹으며 부자 되기를 꿈꾸는 한편으로 교만을 경계하는 경구로 삼는 것이다.
유자 먹으면 부자 된다는 말은 사실 유자가 그만큼 귀했기에 생긴 속설이다. 따뜻한 남쪽나라 아니면 유자나무가 자라지 않기에 옛날에는 부자가 아니면 먹을 수조차 없는 과일이었다.
때문에 유자는 얼었어도 선비 손에서 놀고 탱자는 잘생겼어도 거지 손에서 논다는 속담까지 있었으니 생김새는 비슷하더라도 유자와 탱자는 노는 급 자체가 다르다. 유자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홍콩은 물론이고 광동 지방도 중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평균 소득이 높다.
어쨌거나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다른 나라의 풍속을 왜 이렇게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우리하고도 밀접한 관련이 없지 않다.
최근 우리나라 남해안 지방에서는 중국의 이런 풍속 때문에 적지 않게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해안 지방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자 재배지역이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중국인들이 옛 풍습을 떠올린 것인지 새해가 되면 유자 주문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덕분에 유자차와 유자청 수출로 소득을 올리고 있으니 남의 나라 풍속이고 음식문화라고 해서 무시할 것도 아니다.
혹시 새해에 중국인과 식사할 일이 있으면 디저트로 과일을 먹을 때 이왕이면 감을 먹을 것을 권한다. 그것도 두 개를 먹으면 더욱 좋다.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만사형통,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 나가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만사가 뜻대로 풀릴 때를 한자로는 만사여의(萬事如意)라고 쓴다.
하는 일마다 뜻대로 풀리라고 할 때는 사사여의(事事如意)다.
그런데 중국말로 일 사(事) 자와 감 시(柿) 자는 발음이 같다. 때문에 감 두 개(柿柿)는 하는 일마다 뜻대로 풀리라는 덕담의 의미를 갖는다. 얼핏 말장난처럼 들리기도 하고 또 중국만의 풍속일 것 같지만 옛날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삼국에서 통용되었던 덕담이다.
우리나라 옛날 그림에 감 두 개를 그린 그림이 있는데 역시 같은 의미고 개업을 축하할 때 감이 그려진 동양화를 선물로 건네는 이유도 사업이 뜻하는 대로 이뤄져 부자 되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옛날 양반집에서는 새해 음료로 반드시 수정과를 준비했다.수정과는 곶감을 넣어 만드니 새해에는 하는 일마다 순조롭게 이뤄지라는 덕담의 의미를 담은 것일 수도 있겠다. 재미삼아 알아본 음식문화지만 단순히 흥밋거리 이상일 수도 있다. 제주도의 짝퉁 조기 부세, 남해안의 유자를 보면 그렇다.
[음식평론가 윤덕노의 음食經제]
바닷가재의 천로 역정 노동자 음식에서 부자의 요리로
“빵을 달라, 아니면 죽음을….”
프랑스 혁명 때 민중이 외쳤다.
그러자 왕비였던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트아네트가 유명한 한마디를 던졌다.
“빵이 없으면 대신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
프랑스 민중은 분노했고 혁명이 퍼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세상 물정 모르고 빵 대신 케이크를 먹으라고 흰소리를 했다며 세대를 이어 빈축을 사고 있다. 실제로 앙투아네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서 지금까지도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약 150년 전,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새로운 삶을 찾아서 신대륙 아메리카로 이주민들이 몰려오기 시작할 무렵, 개척시대의 미국에도 빵이 넉넉하지는 못했다. 때문에 먼저 신대륙으로 건너 온 개척민들이 가꾸어 놓은 농장에서 일하던 가난한 이주민들은 배를 곯아야 했고, 농장주에게 빵을 달라고 외쳤다. 그러자 농장 주인은 빵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빵이 없으니 대신 바닷가재를 드세요.”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농장주의 헛소리였을까? 1620년, 102명의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영국을 떠나서 오랜 항해 끝에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 항구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영국을 떠난 이주민들이 계속해서 신대륙으로 건너와 정착을 한다. 메이플라워호의 필그림처럼 처음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은 원주민의 도움을 받으며 스스로 농경지를 개척해 농장을 일구었지만 나중에 온 이주민들은 이미 만들어진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새 삶을 개척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최초의 청교도로서 초대 플리머스 총독이며 또 최대 농장 주인이 된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가 갓 도착한 이민자들을 모아 놓고 농장에서의 새 삶을 소개했다.
“여러분에게는 앞으로 식사 때마다 따뜻한 물 한 잔과 바닷가재를 한 마리씩 제공할 것입니다.”
고향인 영국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먹었던 거친 빵 대신에 앞으로 식사 때마다 맛있는 바닷가재를 한 마리씩 먹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신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아메리칸 드림이 실현된 것 같았겠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식사 때마다 나오는 바닷가재는 고생문이 활짝 열렸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무렵 매사추세츠에 있는 한 농장에서는 노동자들이 바닷가재 때문에 파업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스트라이크의 원인은 식사 때문이었는데 바닷가재가 너무 자주 제공됐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바닷가재는 먹지 못하겠다. 이제는 빵을 달라.”
배부른 노동자의 터무니없는 투정 같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노사갈등의 핵심 쟁점이 식사문제, 그것도 식사로 나오는 바닷가재가 문제가 됐다. 농장 노동자들의 요구조건 중 하나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바닷가재를 내놓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주일 내내 빵 대신 바닷가재를 먹어야 했던 노동자들이 내건 조건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개척 초기에 농장 주인들은 왜 노동자들이 먹기 싫다는 바닷가재를 그렇게 자주 제공했던 것일까?
지금은 바닷가재가 미국 대통령의 취임 만찬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요리며 어디에서나 고급 음식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아메리카 대륙 개척 초기, 바닷가재는 가난의 상징이었다. 하인과 어린이, 노동자, 그리고 죄수들이 주로 먹었던 음식이었다. 이 무렵 노동력이 떨어지는 어린아이는 보호대상이 아니었기에 가장 형편없는 음식을 먹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바닷가재였다.
바닷가재가 이렇게 천대를 받았던 이유는 단 하나, 너무나 흔했기 때문이다.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정도가 아니라 걸어 다니면 발에 채일 정도로 바닷가재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지금도 바닷가재는 미국 북동부의 메인 주에서 잡히는 것을 최고로 여기지만 개척시절 메인 주와 매사추세츠 주에는 바닷가재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바닷가재가 얼마나 흔했는지는 새로 도착한 이주 노동자들에게 매일 식사로 따뜻한 물 한 잔과 바닷가재를 제공하겠다고 했던 초대 플리머스 총독 브래드포드의 저서에 기록이 남아 있다.
<플리머스 농장에 관하여(On Plymouth Plantation)>에 “인디언들이 바닷가재를 주워 바닥에 잔뜩 쌓아 놓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해변에 바닷가재가 멋대로 돌아다닐 정도로 흔했다는 이야기다.
청교도들의 초창기 미국 이민 기록이 또 하나 있다. 브래드포드와 함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청교도 지도자 에드워드 윈슬로(Edward Winslow)가 남긴 편지다. 여기에도 여름이면 해변이 바닷가재로 넘쳐났다는 기록이 나온다. 비슷한 시기인 17세기 초반, 토마스 히긴슨(Thomas W. Higginson)이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이주민들의 상황을 묘사한 책이 있다. <미국 개척민(A Book of American Explorers)>이라는 책으로 여기에도 바닷가재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바닷가재가 너무나 흔했기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바닷가재를 먹는 대신에 밭에 비료로 뿌리기도 했고 집게발은 잘라서 낚시 바늘로 쓰거나 담뱃대로 이용했다. 노동자에게 끼니마다 제공됐던 바닷가재는 아메리칸 드림의 아이콘이 아니라 활짝 열린 고생문의 상징이었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속담이 있는데 바닷가재가 여기에 해당된다. 매일 빵 대신 바닷가재를 먹어야 했기에, 신물이 날 정도로 먹기가 싫어 결국 “바닷가재 대신 빵을 달라”며 파업까지 벌였던 천덕꾸러기 바닷가재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미국에서 용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 전역에서 바닷가재가 고급 요리고 인기를 얻게 된 것인데 어떻게 갑자기 개천의 미꾸라지가 용으로 변신한 것일까?
바닷가재는 주로 미국 북동부 메인 주와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에서 잡힌다. 차가운 바다 깊은 곳에서 사는 바닷가재가 육질이 좋아 인기가 높기 때문에 수요가 많다. 그런데 예전 미국과 캐나다 북동부 해안에서 잡은 바닷가재는 산 채로 운송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산지에서는 발길에 채일 정도로 공급이 넘쳤지만 조금만 떨어진 곳에는 아예 공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바닷가재가 산지에서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던 것이다.
유통 개선으로 고급 음식으로 재탄생
이랬던 바닷가재가 19세기 중반, 기술혁신이 이뤄지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820년 스맥(Smack)이라고 하는 바닷가재잡이 전용어선이 등장했다. 배에다 수조를 갖춘 어선으로 덕분에 바닷가재를 산 채로 운반할 수 있어 뉴욕 등지로 싱싱한 바닷가재를 공급할 수 있게 됐다. 이 무렵부터 동부의 인구밀집 지역인 뉴욕과 보스턴 등지에서 바닷가재 수요가 늘어났다.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기 직전인 1842년, 미국 북동부 메인 주에서 잡은 바닷가재가 최초로 산 채로 철도를 통해 중부 중심도시인 시카고까지 운송됐다.
당시 동부에서 중부까지 활어를 운송한다는 것이 특별했는지 시카고의 유력 신문, 시카고 트리뷴은 이 사실을 뉴스로까지 보도했다. 드디어 통조림이 아닌 살아 있는 바닷가재로 만든 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미국 북동부에 지천으로 널려 있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던 바닷가재가 중부 시카고에서는 부자들이 먹는 대표적 고급 요리로 변신했다.
1869년, 미국 대륙횡단 철도가 완성됐다. 메인 주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잡히던 바닷가재의 수요가 미국 전체로 넓어졌다. 그러다 보니 바닷가재 수급에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수요가 공급을 훨씬 초과하면서 바닷가재의 가격이 뛰었다.이후 바닷가재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고급 요리가 됐다.
바닷가재가 레드오션에서 벗어나 블루오션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관 및 운송 기술의 발달이 바닷가재의 가치를 바꿨다. 가치이동(Value Shift)이 이뤄진 것이다.
/ Luxmen.m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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