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8. 09:22ㆍ알아두면 조은글
제목: 중국서예의 역사
저자: 임 태승
출판사: 미술문화
출판일: 2006.12.5. 독서일 2015.8.23.
- 중국 서예사에서는 여러 서체 중에서 초서를 가장 높게 친다. 중국 최초의 서예이론서라 할 손과정의 <서보(書譜)>가 초서로 쓰여졌고, 중구 최후의 서예이론 집대성 저작인<예개(藝槪)>의 ‘서계’편에서도 유희재는 초서를 최고로 쳤다.
- 종요는 글씨 연습을 위해 16년간이나 집을 나 않았고, 잠자리에서도 손가락으로 이불에 획을 그어 이불이 온통 구멍이 났다고 한다.
- 구혈발총(嘔血發塚): 종요가 위탄의 책상에 채옹이 지은 필법 책을 얻어 보지 못해 상심해서 가슴을 쳐 멍이 들어 피를 토하고, 조조가 ‘오령단’을 주어 기사회생했다.
위탄이 죽자 묘를 파헤쳐 <필론>을 훔쳐냈다.
- 힘이 있어야 뛰어난 것이요, 힘이 없음은 곧 병통이다. (多力豊筋者聖, 無力無筋者病):
종요의 서법.
- ‘종장’(종요와 장지)과 ‘이완(왕희지와 왕헌지 부자)을 합하여 사현(四賢)이라 칭한다.
- 장지는 공부(솜씨)는 제일이나 천연(자연스러움)은 그 다음이고, 종요는 천연은 제일이나 공부는 그 다음이다. 왕희지는 공부는 장지에 미치지 못하나 천연은 그를 넘었고 천연은 종요에 미치지 못하나 공부는 그를 넘어섰다. : 양 나라 유견오 <書品>
(張工夫第一, 天然次之, 鍾天然第一, 工夫次之, 王工夫不及張, 天然過之, 天然不及鍾, 工夫過之)
- 서군(書裙-글씨를 써 놓은 치마): 왕헌지가 오흥태수로 있을 때 양흔이라는 어린 아이가 낮잠을 자는 사이 옷자락에 글씨를 써 주고 갔다.
- 진(秦)대에는 소전(小篆)과 진예(秦隸)가 주로 사용되었다. 전자가 관청의 정체라면 후자는 하급관리와 민간에서 통용하던 서체였다. 소전은 진 나라의 글자를 기초로 하여 육국의 글자체의 장점을 취해 만든 것이다. 진대 이전의 대전(大篆)과 비교할 때, 소전은 필획이 섬세하고 힘이 있다.
- 남북조 시기에 문화의 중심은 남조였다. 서예는 동진(東晉)의 전통을 계승하여 발전했다.
섬세하고 아리따운 것이 남조의 서풍이라면, 북조는 비교적 질박한 편이다.
남조의 서예가들은 주로 귀족계층인 반면, 북조는 평범한 인물들이다.
남조는 척독(尺牘: 편지)이 많았고, 북조는 석각이 많았다. 남조는 동진의 풍격을 따랐고,
북조는 한대의 전통을 이었다. 남조는 비(碑)를 세우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첩(帖)이 많아, ‘남첩북비(南帖北碑)’라는 말을 낳게 했다.
- 고구려 사신이 구양순의 글씨를 얻고자 청하니 당 고종 이연은 ‘구양순의 서명이 이렇게 널리 알려질 줄이야!(不意詢之書名遠播夷狄)’하고 찬탄했다.
- 글씨를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다. 서두르면 필세가 살지 않는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또한 늦추지 말라는 것이다. 지나치게 더디면 필세에 웅건함이 부족해진다.
(最不可忙, 忙則失勢. 次不可緩, 緩則骨痴); 구양순 <전수결>
- 구양순과 아들 구양통을 ‘대소구양(大小歐陽)’이라고 부르고, 구체(歐體) 또는 솔경체(率更體)라고 한다.
- 성당(盛唐)의 광초(狂草)의 대가 ‘전장취소(顚張醉素)’라 하였다. 전장은 장욱을 가리키고 취소는 희소의 이름이다. 당 문종이 삼절(三絶)을 삼으라는 조령(朝令)을 내렸는데, 시가의 이백, 검무의 달인 배민과 초서의 장욱이었다.
- 시로 말하자면 두자미(두보)요, 글로 말하자면 한퇴지요, 글씨는 안노공(안진경)이요, 그림으로 말하자면 오도자라. 소식<東坡題跋>
- 안진경의 안서(顔書)는 ‘잠두연미(蠶頭燕尾)’필법은 점획에 힘이 넘치기에 ‘안근(顔筋)’이라 불렀다. 안진경은 해서의 조형에 있어서도 전서와 예서의 특징을 취했다. 정면에 힘을 주기 위해 좌우의 수직 획은 대략 활 모양을 띠었고, 또한 횡필(橫筆)은 가벼이 하고 수필(竪筆)은 두텁게 함으로써 글자마다 돋을새김을 한 입체감을 주었다. 이런 특징으로 그의 필세는 ‘입목팔분(入木八分)’이라는 말을 얻기도 했다.
- 초당 시절엔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 설직, 육간지 등이, 중당 시절엔 안진경, 장욱, 희소, 이양병 등이, 만당에는 유공권이 각자 독특한 풍격을 보였다.
- 나의 서예는 기존의 그 어떤 틀에도 구애 받지 않는다. (我書意造本無法); 소식.
- 문인화는 북송 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첫째, 작가는 화공이나 궁정화원이 아닌 사대부였다. 둘째, 문인화는 사대부가 글을 읽고 학문을 연마하는 밖의 소일거리이자 자아 표현의 방편이었다. ‘묵희지작(墨戱之作)’이라고 했다. 중국 고대 화가는 제왕을 위해, 종교를 위해 그렸을 뿐 정신 세계가 아니었다. 몇몇 사대부들이 전통의 율을 벗어나 회화를 순전히 자기 영역 속에 자리 잡게 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소식(蘇軾)이다.
- 소식은 작화(作畵)에 있어서 신운만 염두에 두었을 뿐 형식은 저만큼 내쳤다.
대나무를 그릴 때 밑에서 끝까지 한 줄로 그렸는데, 이를 희안타 여겨 미불(미불)이 어찌 그러할 수 가 있냐고 묻자 소식의 대꾸는 이렇다.
‘대나무가 자랄 때 언제 마디를 좇아 자라더냐?(竹生時何嘗逐節生) : 미불<畵史>’唐畵.
- 화공이 그린 공장화(공장화)를 폄하하였는데, 그 이유는 내면의 깊이가 없기 때문에 몇 번만 보면 실증이 나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인화(사인화)는 작가의 내면 세계(의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 ‘시속에는 그림이 있고, 또 그림 속에는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하며 왕유를 문인화의 비조로 숭상했다.
- 소식이 과거 시험장에서 흥이 돋아 대나무를 시원하게 쳐 올리고 싶었는데 먹이 없었다.
채점할 때 쓰는 주필(朱筆)로, 새까만 먹으로 대나무를 그리는데, 붉은 색인들 어찌 먹을 대신할 수 없으랴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죽(朱竹)이라는 화법이 생겨났다.
- 서체는 모름지기 가늘고 힘차야 한다. (書貴瘦硬) : 두보.
- 만당(晩唐)과 오대(五代)로부터 송(宋) 초에 이르기까지 서단은 여전히 가늘고 날렵한(淸瘦) 기풍을 답습했다.
안진경의 ‘두터운 넉넉함(豊肥)’, 이옹의 ‘활달한 기백(豪葝)’, 유공권의 ‘당당한 힘(웅건)’에 이왕의 야들야들 어여쁜 자태(風姿嫵媚)’하며 북비. 한비의 ‘고졸한 듯, 넉넉한 듯, 그러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품격(古拙. 寬博. 方整) 등의 특징을 섭렵해 ‘억센 듯싶으면서도 수양버들 하늘거리는
듯 아름다우며, 풍만한 듯싶으면서도 부드러운 맛(剛健妸娜. 豊膄圓潤)’의 특징을 가진 ‘소체(蘇體)’를 개발했다.
- 당대의 글씨는 옥과 같고, 송대의 글씨는 수정과 같다. (唐書如玉, 宋書如水晶)
: 주성연 <臨池管見>
- 공자의 학문은 옥과 같고, 맹자의 학문은 수정과 같다. (孔子之學如玉, 孟子之學如水晶): 주자어류.
- 남만 쫓다가는 결국 그를 넘어설 수 없는 것, 스스로를 일궈야 비로소 자신이 서는 법이다.
(隨人作計終後人, 自成一家始遍眞) : 황정견.
- 조맹부는 남송 쇠퇴기와 원이 흥하는 시기에, 전(篆), 주(籒:대전), 분(팔분서), 예(隸), 진(眞:해서), 행(行), 초(草)등을 두루 섭렵하고, ‘이옹의 팔뚝 힘에 왕헌지의 손놀림 (用大令指於北海腕)’의 조체(趙體)를 완성했다.
- 조맹부의 부인 관도승과 함께 부부능서였으며 (夫婦能書)과 아들 조옹을 포함해 ‘일가능서(一家能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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