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해자(說文解字)』의 본질

2016. 1. 27. 17:36水西散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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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서문을 대신하여

 

 

설문해자(說文解字)의 본질

 

스펙

특징

좋은 점

나쁜 점

특이점

 

 

<설문해자(說文解字)>A.D.100년 후한의 허신(許身)이 쓴 책으로 중국에서 천하제일종서(天下第一種書)’로 칭송되는 책이다. 그 원문에 청나라 때의 단옥재(段玉裁)가 주()를 단 것이 가장 유명하다. 만약 동양과 서양에 각각 한 권의 책만 남기라고 한다면 서양은 성경(聖經)일 것이고, 동양은 이 책이 될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한자가 있는 한 공자(孔子)는 잊을 수 있으나 이 책은 지울 수 없다.

()나라의 왕명성(王鳴盛), 설문해자정의(說文解字正義)서문에서 설문해자는 천하에 으뜸가는 책(說文爲天下第一種書)”이라고 칭송하면서, “천하의 책들을 두루 다 읽었다 하더라도 설문해자를 읽지 않았다면 책을 읽지 않은 것과 같고, 설문해자에 능통하다면 나머지 책들을 다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를 통유(通儒)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王鳴盛-說文解字正義:> 讀遍天下書, 不讀說文, 猶不讀也. 但能通說文餘書皆未讀, 不可謂非通儒也].

글자를 흔히 문자(文字)라고도 하는데 이때 문()은 상형문자를 말하고, ()는 상형문자 등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회의(會意)자나 형성(形聲) 문자를 말한다. 따라서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설문(說文)>은 무엇을 그린 것인지 설명을 하는 것이고, <해자(解字)>는 어떤 글자들이 결합된 것인지 분해했다는 말이다. , <설문해자(說文解字)>는 상형과 지사문자는 무엇을 본뜬 것인지 설명하고, 회의(會意), 형성(形聲)자는 무엇이 결합된 것인지 분해를 하는 책이라는 말이다.

(은 단체(單體)- 한 글자로 되어 있어 모양을 보고 설명해야 하는 한자. 상형과 지사 / 는 합체(合體)- 두 글자 이상이 결합되어 있어 분해해서 설명할 수 있는 한자. 회의와 형성)

허신은 고문학자다. 그는 오경무쌍허숙중(五經無雙許叔重)’으로 불릴 만큼 유가 경전에 달통한 사람이었다. 당시는 진시황이 전서(篆書)로 문자를 통일한 이후 약 300년이 지난 때였고, 이미 예서(隸書)가 통용되고 있어 전서(篆書) 조차 아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다.

 

스펙

 

1. 후한(後漢) 때 허신(許愼58~147)AD.100년에 완성했다.

2. 본문은 14, 각권 상·하인데, 11권은 상··하다. 15권은 서(), (), 540부수 외우기(?) 등을 모아 두었다.

3. 전통적으로 표제자의 수를 ‘9,353, 중문(重文)1,163, 해설한 글자는 133,441라고 했으나 역주자가 일련 번호를 붙여본 결과는 9,426자였다.

4. 허신의 착각으로 두 번 나오는 글자들이 5자가 있다.

()[56, 4510] ()[58, 114] ()[62, 204] ()[61, 584] ()[160, 273]

5. 원본은 일찍이 사라졌고 당나라 때의 잔편이 현존하는 최고본(最古本)이다.

6. 책에 따라서는 서현(徐鉉)이 새로이 첨가한 소위 신부자(新附字) 403자가 해당 부수의 끝부분에 들어있는 것들도 있다.

7. 현재의 판본들에는 <6서음운표(六書音韻表)><214부수 색인표>가 책 뒷 부분에 첨부되어 있다.

8. 경운루 장판본 <단옥재주 설문해자>14권의 끝은 752페이지다.

 

좋은 점

 

1. 당시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2. 중문(重文)으로 포함된 고자(古字), 주문(籒文) 등의 도움으로 갑골문이 단시간에 해독될 수 있었다.

3. 뜻을 알아야만 찾을 수 있었던 <이아(爾雅)>의 한계를 뛰어넘어 뜻을 몰라도 찾을 수 있는 부수(部首)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창안했다.

4. 예변(隷變))으로 인한 자형과 뜻의 혼란을 바로 잡았다.

5. 막연하게 전해지던 육서(六書)의 개념을 처음으로 해설했다.

6. 도저히 알 수 없다고 여져지는 부분은 궐()로 표기하고, 억지해설을 하지 않았다.

7. 당시에 존재하던 모든 글자를 대상으로 하여 표제자와 중문으로 배열하였다.

8. 문자해설의 절대적 권위로 군림했다.

 

나쁜 점

 

1. 90% 이상이 형성문자이고, 형성문자의 핵심은 성부(聲符)인데 형성문자를 구성하는 두 요소인 부수(部首)와 성부(聲符) 중에서 부수를 중심으로 정리하고 나머지 부분인 성부(聲符)를 숫자로 치환하여 찾게함으로써 성부라는 개념 자체를 숨겨버린 것은 한자를 어렵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2. 6×9×10=540이라는 수에 끼워 맟추기 위해 억지로 부수자를 늘였다.

3. 뜻으로 분류해 놓은 <이아(爾雅)> 보다는 쉬워졌지만 여전히 검색이 어렵다.

4.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 갑골학의 권위자 胡厚宣의 주장.

갑골문의 발견·연구에 의해說文解字가운데 적어도 10분의 2, 3은 정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허신의 이 책 속에는 종교적 미신의 색채와 철학적 주관에 의한 견해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5. 허신 혼자서 쓴 것으로 자료부족에 의한 오류가 있다.

6. 본의든 타의든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전통에 힘입어 절대권위로 군림하면서 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논쟁을 원천봉쇄했다. , 허신의 이 <설문해자>는 모든 책들을 다스리는 역할을 수행했다[以許書律群經]. 그러나 절대 권위는 절대 부패한다는 진리에 따라 결국 참위설에 근거를 제공하는 역설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설문해자>에 그렇다고 하면 반론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7. ‘오경무쌍허숙중(五經無雙許叔重)’으로 칭해질 만큼 유가경전에 달통한 학자였으므로 유가의 봉건사상이 기조에 깔려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는 흔히 생각하듯이 단순히 글자의 뜻이나 풀어주는 문자학 서적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봉건신분제 차별법 시행령 조례집, 나아가서는 이 세상 사용설명서에 가깝다. 이 차별화는 생활 전반, 의식 전반에 걸쳐 세밀하게 명문으로 규정된다. 이 규정을 어기는 것은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일족(一族)의 몰살을 초래하는 무모한 짓이다. 제왕의 권위를 등에 업은 자서(字書)들은 제사상의 홍동백서나 절하는 법, 축문 쓰는 법 등 제반 의식규정이 천래(天來)의 것이 아니라 유가(儒家)들이 제멋대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이제 설문해자(說文解字)곳곳에 담겨 있는 봉건신분제 차별법 시행령 조례집의 실례를 몇 가지 들어 보겠다. 생각보다 많아서 다 모으면 두터운 논문이 될 것이다.

 

- 봉건령 원론

(임금 왕)0074

왕은 천하가 돌아가는 종점이다. 天下所歸往也.

세 획을 관통시켰다. 畫而連其中謂之王.

세 개는 천, , 인이다. 三者天地人也.

세 개에 다 참여해서 통한 것이 왕이다. 而參通之者.

 

(성씨 성)7727

옛날의 신성한 사람이다. 古之神聖人.

어미가 하늘과 감응해서 낳은 아들이다. 母感天而生子.

그래서 천자라고 한다. 故稱天子.

춘추공양이라는 책의 설명에는 <春秋公羊>

성인은 애비 없이 하늘과 감응해서 난다. 聖人皆無父感天而生

 

(선비 사)0206(바를 정)1038

선비는 일하는 자다. 事也.

열 개를 추론하여 하나로 한다. 推十合一爲士.

()은 일()로 그치게 하는 것이다. , 是也. 從一. 一以止.

여기서 일()은 왕()이다.

 

(선비 유)4743

선비는 흠뻑 젖은 사람이다. 儒者濡也.

선왕의 도()로 자신을 흠뻑 적신다. 以先王之道能濡其身.

 

(고을 읍)4743

선왕의 법제에 존비대소가 있다. 先王之制, 尊卑有大小.

존비대소는 왕명에서 나온다. 尊卑大小出於王命.

 

(백성 민)7967

백성은 중맹(衆萌)이다 , 衆萌也.

()은 이민위토개(以民爲土芥)와 통한다.

토개(土芥)는 흙덩이나 잡초처럼 하찮은 것. 초개(草芥)와 비슷하다.

()은 어리석어 무지한 모양이다 萌猶懵懵無知貌.

 

(복 복)0020 .

현명한 사람의 제사다. 賢者之祭也.

반드시 그 복을 받을 것이다. 必受其福.

세상에서 말하는 복이 아니다. 非世所謂福也.

복은 갖추는 것이다. 福者備也.

비는 온갖 것이 거슬림이 없는 것이다. 備者百順之名也.

거슬림이 없는 것을 비라고 한다. 無所不順者之謂備.

 

74[]을 익히면 왕에게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외딴 섬에 사는 사람들처럼 복종하게 된다.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206[]에서 왕의 수족(手足)으로서 일하는 것이다. 또한 는 섬긴다는 뜻이 숨어 있다. 20[]에서 슬쩍 제사를 끼워 넣어 조상을 내세웠지만 앞뒤가 통하지 않는다. 제사 잘 지냈다고 복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본심은 그 뒤의 비()와 순()이다. 어긋남이 없다는 것은 상전(上典)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했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어김이 없을 때, 그때 복을 받는다. 즉 하늘이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전이 주는 것이 복이다.

 

- 시행령 조례집

점치는 막대기()의 길이가 달랐다.

- 천자는 9(天子蓍九尺), 제후는 7(諸侯七尺), 대부는 5(大夫五尺), 사는 3(士三尺).

행동방식이 다르다. 여기서는 중국어의 특징인 소리로 뜻을 살펴보겠다. 사실이 이렇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줄로 알아라!’는 것이다.

- 천자는 목목하다(天子穆穆): , 화목하다.

- 제후는 황황하다(諸侯皇皇): , 크다.

- 대부는 제제하다(大夫濟濟): , 모두, 함께, 가지런하다.

- 사는 창창하다(士蹌蹌): , 바쁘다, 급하다. [행동거지]

()을 덮는 장식물[棺羽飾]

- 천자는 8(天子八), 제후는 6(諸矦六),

- 대부는 4(大夫四), 사는 2(士二).

(: 발인할 때 앞뒤에서 드는 기구)

- 천자는 8(天子八翣), 제후는 6(諸矦六翣), 대부는 4(大夫四翣).

죽음의 명칭이

- 천자는 붕(?), 제후는 훙(), 대부는 졸(),

- 사는 불록(不祿), 서인은 사().

쓰는 나무가

- 천자는 소나무(), 제후는 측백나무(),

- 대부는 란목(), 사는 버드나무().

술잔(酒器)

- 천자는 옥(), 제후와 대부는 금(), 사는 가래나무.

()을 둘러싸는 관이

- 천자는 4(四重), 제후와 3공은 3(三重),

- 대부는 1(一重) , 사는 없다(不重).

칼집 장식물이

- 천자는 상옥(上玉), 제후는 하옥(下玉),

- 대부는 란목(欒木), 사는 조개껍질(珧珌)

제기가

- 천자는 순옥(純玉),

- 상공(上公)은 옥 80%, 20%(四玉一石),

- ()는 옥 60%, 40%(, 三玉二石) ,

- ()은 옥 50%, 50%(用埓玉石半相埓也)

패옥(佩玉)

- 천자는 백옥(白玉)을 차는데, 검은 끈으로 수를 만든다. ()과 후()산현옥(山玄玉)을 차는데, 붉은색 끈으로 수를 만든다. 대부는 수창옥(水蒼玉)을 차는데, 명주실로 꼰 끈으로 수를 만든다. ()는 연()과 민()을 차는데, 면실로 꼰 끈으로 수를 만든다. 수라는 것은 옥을 꿰어서 서로 이어받은 것이다.(?사계전서? 패옥조에서 전재)

 

특징

 

1. 성훈(聲訓) : 음이 같은 글자로 한자의 뜻을 풀이한 것.

- , 만물을 토해내기; 때문이다.

- , 만물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 ,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이다.

- 주로 천문, (), 음양오행, 신비적인 색채를 가진 명사 등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 유자(儒者)들의 정치의식[왕권에 아부]이 드러나기도 한다.

- 한자의 신비화, 참위설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2. 540부수 : 6 × 9 × 10 = 540

- 최초로 한자를 분류하는 기준으로 부수를 설정한 공로는 있다.

- 더불어 성부를 기준으로 삼지 않아서 어려운 쪽으로 몰고 간 죄도 있다.

- 540개의 부수는 실제로는 별 의미연관이 없는 연결이다. [자 다음 ]

- 그 증거로 부수글자 밖에 없는 부수가 약 36개나 있다. 또 부수글자에 속한 글자가 하나 밖에 없는 부수가 156개나 된다.

- 부수라는 개념설정[편방편자법]?이아(爾雅)?의 류개념類槪念과 명학名學의 영향을 받았다.

- 순환하는 원환지(圓環智: Encyclopedia)를 시도했다.

[에서 시작하여 12의 마지막 글자인 로 종결되어 다시 ]

 

3. 6(六書) : 애매모호한 이론,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많다.

- 전주는 호훈(互訓; 우리집은 교회 옆, 교회는 우리집 옆)처럼 정의한 것이 많다.

육서六書의 정의는 모호하기도 하고 또 모순도 많지만 전통적으로 아무런 비판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우선 전주와 가차는 기실 조자 규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육서에 포함되어 온 것은 아마 ?시경?육서를 모방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다음은 구석규(裘錫圭)중국문자학(李鴻鎭 譯, 신아사, 2001)에서 말한 육서六書의 문제점을 몇 개 발췌한 것이다.

 

1. 육서설에 따르면, 의부(意符)로 만든 글자 곧 우리가 말하는 표의자(表意字)는 상형지사회의의 세 가지로 나누지만, 그러나 이 삼자 사이의 한계선은 결코 명확하지 않다.[p.174]

2. 요컨대, 회의와 상형의 한계선도 역시 명확하지 않다.[p.176]

3. 육서설로 표의자의 결구를 분석하는 어떤 사람들은 또 무슨 상형 겸 지사”, “회의 겸 지사등의 명목으로 생각해 내었는데, 이것은 바로 육서설로 표의자의 유별(類別)을 구분하는 불합리함을 설명해 준다. 육서 중의 전주는 문제가 더욱 크다. “전주라는 명칭의 글자 그대로의 뜻은 육서 가운데 가장 애매모호하다.[p.176]

 

<> 04. 六書배분표
갑골문 277 20 396 334 0 129 70 1,226 字數
22.59 1.63 32.30 27.24 0 10.52 5.71 %
육서략 608 107 740 21,810 372 598 0 24,235
2.50 0.44 3.05 90 1.53 2.47 0 % 鄭樵
설문해자 364 125 1,167 7,697


9,353
3.89 1.33 12.47 82.29


% 許愼

상형 지사 회의 형성 전주 가차 미상 총계

 

90%에 달하는 형성자의 이름은 하나뿐인데, 10%에 불과한 나머지의 이름이 5개나 된다. 이것도 부족하여 상형자를 증체상형/생체상형/순상형등으로 또 세분한다.

 

4. 목적 : 한자의 본의(本意: 성현의 뜻)를 추구한 최초의 책.

- 經藝之本, 王政之始[유교경전의 올바른 해독]

- 본의(本意)와 인신의(引伸意)

() 乳也. 젖먹이다. 문자

() 伐木聲也. 나무 베는 소리. 장소

() 恤問也. 위문하다. 있다

() 酒味厚也. 술맛이 진하다. 혹심하다

() 酒色也. 술빛. , 배우자

- //������설문해자?, ?운서, 절운?, ?爾雅?

- 예변(隸變)에 의한 자형의 혼란, 뒷 부분 참조.

[馬人], [十又], [], [1점 누락]

 

5. 시대적 배경

- 금문학의 부패(?), 왕망(8~23)의 고문 우대

- ?이아?, ?방언?의 완성 후 대략 100여년

- 이사(李斯)의 문자통일 후 대략 300

- 허신은 고문학자

 

훈고학의 일례로 옛날을 상고해 본다는 뜻의 曰若稽古넉자를 무려 3만여 자로 풀이하기에 이른다. ‘개천에서 용 나듯이 아무 뜻도 없었던 문장[微言]이 공자가 손질했었다는 단순한 그 이유만으로 거기서 뽑아낸 문장은 왕권을 합리화하는[大義] 데 편리하게 활용되었다.

 

단순한 記日의 문장에서천자는 땅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내용을 해석해낸 것이 바로 훈고작업이다.”

 

더욱이 漢代에는 복서(卜筮)와 결합된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과 천인감응(天人感應) 사상(思想)이 유행하면서 우주의 모든 생성원리를 로 파악하고 -陰陽-五行의 구조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동중서의 이러한 천인감응사상을 바탕으로 무제(武帝)시기에는 천명(天命)에 근거한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이 확립되었고, 천인감응설이 점차 신비화되어 정치 권력과 결탁하면서 참위설(讖緯說)로 발전하였다.

 

예서(隸書)는 전서(篆書)의 많은 부분을 생략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전서에서 예서로 변화하는 과정을 흔히 예변(隸變)’이라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전서의 존재를 망각하고 많은 부분이 생략된 예서를 기준으로 한자의 구성을 잘못 해석하고, 나아가 이렇게 판단한 글자 뜻으로 경전의 뜻을 끼워 맞추고 있었다.

 

()는 중()자를 굽힌 것이라고 하거나,

()자를 지()와 구()의 결합이라고 하거나,

()자는 마(), (), ()의 결합이라고 하거나,

()자는 인()이 십()을 잡고 있는 것이라고 하거나,

()자에서 네 다리만 있고, 꼬리를 뜻하는 한 점이 모자란다는 것들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옳고 그름에 표준은 예서(隸書)에 의한 자원풀이, ‘간교하고 사악한 論說은 위에서 말하는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금문파(今文派)의 경전왜곡을 뜻한다. 이때 유가 경전은 이미 성현의 말씀과는 거리가 멀었고 과거급제를 위한 참고서, 그것도 속성 참고서에 불과했다. 여기에 한자 본연의 특성인 이미지로 의미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가차현상도 힘을 보탠다. 그러면서 허신 자신도 한쪽으로 치우쳐 거의 유가 경전만 인용하고 있다.

 

허신은 이러한 일들로 느끼는 바가 있어설문(說文)을 지었던 것이니, 그의 의도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사로운 주장만을 내세우기 때문에, 옳고 그름에 표준이 없어지고, 간교하고 사악한 논설만이 판을 치는(人用己私, 是非無情, 巧說邪辭)’현상을 두절시키고서, 전체 인민의 공구인 문자로 하여금 진일보한 통일을 이룩하게 하는 데에 있었다.”

 

 

특이점

 

1. 동이(東夷)

()나라 무왕(武王)이 동이족인 은()나라를 점령한 후 그들을 모두 죽이지는 않고 송()나라을 건국해서 살게하였지만 그들을 멸시하여 어리석은 일들은 모두 송나라 사람의 소행으로 꾸몄다. 수주대토(守株待兎)나 송양지인(宋讓之仁) 등이 대표적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가장 크게 착각하는 부분은 우리만 동이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많은 동이족이 중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6299東方之人也从大从弓

 

2245西戎羊穜也从羊儿羊亦聲南方蠻閩从虫東南閩越北方狄从犬犬部】。東方貉从豸西方羌从羊此六穜也西南僰人焦僥从人葢在坤地頗有順理之性唯東夷从大人也夷俗仁仁者壽有君子不死之國孔子曰道不行欲之九夷乗桴浮於海有㠯也.? 古文羌如此不得其說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정작 ()자 아래에서는 글자구성만 설명을 했는데 오랑캐를 뜻하는 강()자 아래에서는 잔뜩 칭찬을 늘어놓았을까?”하는 점이다. 중국고래의 역사서술법,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칙이 있었다.

 

1. 爲中國僞恥 : 중국의 수치는 숨긴다.

2. 矜華而陋夷狄 : 중국은 높이고 외국을 깎아 내린다.

3. 祥內略外 : 중국 내부의 역사는 상세히 적고 외국의 역사는 간단히 적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자가 영원히 사는 나라(君子不死之國)”라고 극찬을 했다. 본심이었다면 이()자 아래에서 하는 것이 정상이 아니었을까? 이것은 어쩌면 지우려다가 미쳐 지우지 못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단옥재(段玉裁)도 이()자 아래의 주()에서는 夷俗仁仁者壽有君子不死之國按天大地大人亦大大象人形而夷篆从大則與夏不殊夏者中國之人也라고 말하며 이()자의 ()는 하() 와 같고, ()는 곧 중국인이라고 합리화를 시도하고 있다.

 

2. 조선(朝鮮)

본문 중에는 ?小者自關而西秦晉之間謂之箄:(?)의 작은 것을 관서(關西)의 진진(秦晉)지방에서는 비()라고 한다.처럼 어느 지방에서는 어떤 말을 뭐라고 한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조선(朝鮮)”이라는 말도 아래문장들을 포함하여 도합 30번 정도 나온다. 당시는 공용어였다는 말일까?

- 북연조선지간(北燕朝鮮之間) 北燕朝鮮之間謂之豭. 4

- 동북조선열수지간(東北朝鮮洌水之間) 燕之東北朝鮮洌水之閒謂之? 4

- 조선열수지간(朝鮮洌水之間) [] 北燕朝鮮洌水之閒曰斟. 14

- 조선위(朝鮮謂) 朝鮮謂兒泣不止曰咺. 4.

- 연지외교조선열수지간(燕之外郊朝鮮洌水之間) [] 燕之外郊朝鮮洌水之閒曰掬. 2

 

3. 단옥재(段玉裁)

단옥재 집안은 대단히 다혈질적이었던 모양이다. 단옥재가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 다리에 종기가 나서 고생을 했는데 친척 중에 미신을 믿는 사람이 있어서 조상묘를 이장(해야 된다고 했다. 이장하려다 산()주인과 불화가 생겼는데 단옥재의 삼촌이 그를 때려서 죽게 했다고 한다. 이 일로 전 가족이 고향을 떠나게 되어 생계가 몹시도 어려워진 것 같다. “재빈병교가지중거세(在貧病交加之中去世)”라고 했다. 가난과 질병이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1780년에 시작하여 30년이 지난 1808년에 완성한 원고를 18154월 완간하고 5개월 후 9월에 숨졌다. 천하제일종서(天下第一種書)라는 책을 쓴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최후였다.

 

<단옥재주>를 읽다보면 그의 다혈질이 여러 곳에서 느껴진다. 단옥재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면 천박한 놈, 얄팍한 놈이라고 직역해도 될 천인(淺人)이라는 단어가 무려 342번이나 사용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1. 淺人所改 얄팍한 놈이 고친 것.

2. 爲淺人增竄 얄팍한 놈이 몰래 끼워 넣어 늘린 것.

3. 淺人妄 얄팍한 놈이 함부로 ~한 것. [17]

- 淺人妄竄改之 끼워넣고 고친 것.

- 淺人妄疑之 의심한 것.

 

한자의 문제점 몇 가지

 

1. 갑골문과 ?설문해자?

 

갑골문의 발견으로 ?설문해자?의 위상이 많이 흔들렸다. 많은 이들이 갑골문을 내세워 ?설문해자?를 비웃기 때문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매우 가소로운 현상이다. 첫째로, 갑골문 자체가 ?설문해자?가 있어서 단시간에 해독할 수 있었다. 둘째로 갑골문 4,000여 자 중 해독된 것은 절반가량인 2,000여 자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설문해자?의 설명과 상충되는 것도 아니다. ?설문해자?의 풀이와 그 풀이가 다른 갑골문자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비난하려는 것 자체가 무식의 소산이다. 아마 ?설문해자?를 한 번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태반, 아니 십중팔구일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의문이 드는 것이 있다. 진나라 때에도 용도에 따라 8가지 서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1. 대전(大篆) : 사주가 만든 서체

2. 소전(小篆) : 이사가 대전을 간략히 하여 만든 중국 최초의 표준 서체.

3. 각부(刻符) : 부신에 새겼던 서체. 부신의 대표적인 것이 병부(兵符:일명 발병부)인데, 부신은 나뭇조각 등에 글자를 새긴 후 두 조각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다가 훗날 서로 맞추어 증거로 삼던 것이었다.

4. 충서(蟲書) : 중국 진나라 시대에 있던 8가지 서체의 하나. 벌레의 형태를 본떠 만든 서체를 충서라고 한다.

5. 모인(摹印) : 팔서체의 하나. 옥새(玉璽) 글자로 쓰임.

6. 서서(署書) : ()나라 때 건물 명칭에 사용하던 서체.

7. 수서(殳書) : 주로 병기(兵器)에 사용하던 서체.

8. 예서(隸書) : 주로 죄수를 다스릴 때 사용하던 서체.

그런데 갑골점이란 것은 백성을 속이던 속임수에 불과한 짓이었으니 그 성격상 더욱 비현실적인 요소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갑골점에 사용되던 갑골문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의 원형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허진웅(許進雄)이 쓴 중국고대사회라는 책에 갑골이 조작되는 방법들이 나온다. 더욱이 이 기교는 상대(商代)에 이미 있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古人들이 어떻게 복조(卜兆)의 무늬로부터 귀신의 뜻을 알게 되었는지 추측할 수가 있다. 그것은 불을 사용하여 사르기 전에 먼저 뼈의 신령에게 구두(口頭)(어떤 모양의 무늬가 나오면 어떤 뜻을 표시한다는) 약정(約定)을 한다.

예를 들어 가로무늬가 위를 향하여 나가면 해도 좋다는 표시이고, 아래로 나가면 할 수 없다는 표시라고 약정한다. 이제 뼈에 불을 사르고 무늬가 나타나면 답을 얻게 된다.

만일 복조가 파열되는 방향을 통제할 수 있다고 한다면, 파열무늬의 각도를 통제하여 점을 치는 사람이 행동하고자 하는 목적을 이룰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점을 치는 사람도 똑같은 방법을 사용하여 신령으로 하여금 자기가 원하는 대로 동의하도록 하여, 자기의 정책을 추진하므로써 신권(神權)으로 정치를 통제하는 목적을 이룰 수가 있었다.

이 기교는 상대(商代)에 이미 있었을 것이다. 1기 무정(武丁)의 복골은 장형(張形)의 착() 옆에 아주 많은 원착(圓鑿:타원형 구멍)을 파놓았다. 그것은 圓鑿의 상부에다 불을 사르면 으로 나가는 복조의 무늬가 기세를 따라 위로 향하기 쉽도록 해준다. 만일 下部에 불을 사르면 복조는 아래를 향한다. 바꾸어 말하면 복조무늬의 각도는 불을 사를 때 통제할 수 있었으므로 무축(巫祝) 등의 점복자(占卜者)는 왕의 뜻에 맞출 수가 있었다.

 

결국 무정기(武丁期) 이후에는 이렇게 하나는 길고 하나는 둥그런 착형(鑿形), 공질구조(骨質構造)가 복조의 각도를 통제하기 어려운 거북껍질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쓰이지 않았다. 뼈에는 단지 장형(長型)의 착()만 사용하였다. 이런 현상은 왕이 그 비밀을 발견하게 되자 더 이상 그 방법을 허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또한 이로 인하여 쉽게 통제할 수 없는 거북껍질의 복조가 더 영험이 있다고 여기게 되었을 것이다.”

 

전문적인 균열제조자(, 즉 귀갑점술사).

 

아직 왕권이 제대로 성립되지 못하고 많은 성읍국가가 난립하던 시기에 백성들을 쉽게 동원하기 위한 불쑈가 갑골점이었다는 말이다. 균열을 원하는 대로 조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균열전문가인 것이다. 조작된 균열이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불을 동원한 것이다. 그래서 갑골문이 사용되는 동안 왕의 뜻에 어긋난 점괘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집트의 파피루스에 적힌 문서들도 B.C.3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동양에서 문자의 역사가 1,000여 년에 불과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희한하게도 인류의 역사에서는 격리된 지역에서 서로 유사한 발명이 이루어져 왔다. 동양사람들이 발명한 것은 서양사람들도 대부분 발명했다.

더구나 상서(尙書)에는 아예 책이 있었다는 명문(明文)이 있다. 상서<周書:多士 第二>

 

惟爾知惟殷先人有冊有典, 殷革夏命.

(너희들은 () 나라 선인(先人)들의 서책과 전적(典籍)이 있음을 알 것이다. 거기에도 있듯이 옛날에 은나라도 하() 나라의 명을 개혁하였다.)”라고 했다.

 

 

 

2. 막연하게 쓰고, 편한 대로 해석한다

 

한자로 작성된 문장에는 구두점이 없었다. 또는 피휘 때문에 글자를 대체하거나 생략해 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전주나 가차 때문에 다른 글자로 해석해야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거기에 또 시대를 내려오면서 슬쩍슬쩍 끼워 넣은 위작들도 있다.

그러니 애초에 원본의 뜻대로 해석하기는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애매함이 오히려 지배자에게는 몹시도 유리했다. 첫째, 시대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유력자의 해석이 그때마다 정답이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둘째, 원래 정답이 없는 애매한 것이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적반하장으로 배우는 놈이 무식해서 모르는 탓이라고 질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경전마다 다양한 주석이 나오게 된다. , 원본의 특정 부분을 해석한 것을 주()라 하고, 다시 주()의 어려운 부분을 해석한 것을 소()라 하고, 또 다시 소()의 어려운 부분을 해석한 것을 전()이라고 한다. 장구는 책 전체를 어떤 목적 하에 끼워 맞추어 해석한 것이다.

한마디로 꿈보다 해몽인데, 권력자의 의도가 기준이 된다. 같은 문장도 시대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악마도 성경을 인용한다는 식이다. 그리고 선생은 위대해진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만큼 뻔뻔스러운 것이다.

 

[원문(原文)] 의 특정 부분에 대한

[()] 注之云者, 引之有所適也. 故釋經以明其義曰注.

[()] 皆从疋者, 疋所以通也.

[()] 注詩宗毛爲主. 毛義若隱略. 則更表明. 如有不同. 卽下己意. 按注詩偁箋

[장구(章句)] ()과 구()의 해석에만 치우쳐 전체의 대의에는 통()하지 않는 학문. 중국 한대(漢代) 훈고학(訓詁學)을 일컬음.

 

3. 분서갱유의 후폭풍

 

진시황이 실행한 그 어떤 일보다도 원본을 없애버린 일이 후대의 학문에 제일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사실은 진시황이 아닌 항우다.] 그로 인해 복원을 명분으로 다량의 위작들이 만들어질 바탕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민간에 떠도는 책을 없애라고 한 것이고, 박사관 소지의 책은 분서 대상에서 제외시켰었다[便臣請史官非秦記皆燒之非博士官所職天下敢有藏詩書百家語者悉詣守尉雜燒之有敢偶語詩書棄市]. 진짜 분서는 항우가 함안궁을 불태울 때였다고 한다.

이사(李斯)의 건의로 문자가 통일되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군소리가 없어진 후 진()이 멸망하자 새로 만든다(복원한다)’는 데서 한문(漢文)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준거가 될 원본이 사라졌으므로 복원이라는 미명하에 진위를 가릴 수 없는 무한 번식이 가능해진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진시황은 참으로 기막힌 시점에서 기가 막힌 일을 한 셈이다. 그래서인지 설문해자도 역시 원본은 일찍이 사라졌다.

이사(李斯)가 문자통일을 시작하고, 진시황이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언론을 탄압한 지 300여 년, ‘례변(隸變)’으로 인한 자형의 혼란과 유자(儒者)들의 조작에 의한 사상적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쓰여진 설문해자(說文解字)도 결론적으로 말하면 문자의 권위만 확보했을 뿐이다. 문자를 활용하는 정치활동인 참위설(讖緯說)의 근거를 제거할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그 근거가 되는 모순도 있다.

 

욱이 한대(漢代)에는 복서(卜筮)와 결합된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과 천인감응사상(天人感應思想)이 유행하면서 우주의 모든 생성원리를 기로 파악하고 기-음양陰陽-오행五行의 구조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동중서의 이러한 천인감응사상을 바탕으로 무제(武帝)시기에는 천명(天命)에 근거한 군권신수설(君權神授說)이 확립되었고, 천인감응설이 점차 신비화되어 정치권력과 결탁하면서 참위설(讖緯說)로 발전하였다.

 

4. 부수의 연변

 

- ?설문?: 540부수

- ?옥편玉篇?: 542부수, 동류同類로 재배열, 설문의 체제 와해 후 214.

- ?용감수감龍龕手鑑?: 240부수로 축소, 240부수자를 4성을 기준으로 재배열.

- ?오음편해五音篇海?: 444부수자, 36자모(성모)5(순설아치후)4성으로 배열

- ?자휘字彙?: 214부수, 동일 부수자를 획수별로 배열. 오늘날의 자전형태 완비.

- ?강희자전康熙字典?: 건륭연간에 이르러, ‘왕석후라 불리는 문자학자가 그의 ?자관字貫?이라는 책에서 ?강희자전?의 적지 않은 착오를 지적했다. 건륭황제는 선왕 강희의 위엄을 유지하기 위하여 왕석후의 가족을 모두 살해해 버렸고, 아울러 ?자관?의 출판과 왕석후의 기타 서적을 모조리 없애버렸다. [到了乾隆年間一位叫王錫侯的文字學家在他著的字貫一書中指出了康熙字典的不少錯誤之處乾隆爲了維護先帝康熙的威嚴居然將王錫侯全家殺害了並將字貫的書版和王錫侯的其他著作一齊銷毀.]

이때부터 ?강희자전?에 대해 비평을 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광 7(1827)에 이르러, 왕인지가 비로소 도광의 명을 받들어, ?자전고증? 12권으로 ?강희자전?의 잘못 2,588을 교정했다. 그러나 왕인지가 찾아낸 잘못된 곳은 전부가 아니라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경전 역시 착오가 있으니 경전에 대해 맹목적으로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학문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반드시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自此無人對康熙字典加以批評. 直到道光七年), 王引之才奉道光之命, 字典考證12卷糾正了康熙字典引書錯誤2588. 不過, 王引之所查出的錯誤並不是全部的, 也只是部分的. 這一事實告訴我們經典的書也有錯誤, 對經典不要盲從, 這是讀書人必須注意的]

 

여기서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은 자전(字典)의 성격이다. 최초의 현대적 자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설문해자>가 쓰여진 목적은 왕정지시(王政之始)’였다. 문학의 도구가 아니라 정치적 도구였다는 말이다. 봉건제국의 지배이념에 봉사하던 유가의 경전을 제대로 이해시키기 위한 책이었다. <43>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막는 책, 다른 말로 다양한 해석을 방해하는 장본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유교국가가 아니다. ‘유가경전을 위한 자전[모든 경전에 나오는 글자들의 모든 뜻]’을 그대로 사용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한자가 국어의 확장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먼저 국어를 위한 자전[우리 국어어휘에 사용된 글자와 뜻만]’부터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영어사전이 아닌 라틴어 사전을 사용해서 영어, 프랑스어, 독어, 스페인어를 배우는 것과 같은 꼴이 된다. 그것은 중국을 등에 업고 백성을 수탈하며 소중화를 외치던 안일함에서나 나오는 것이다.

 

 

5. 고문의 재발견에 대한 의문점

 

가장 유명한 이야기로, 공자의 집 담벽에서 고문서가 쏟아져 나왔다는 이야기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집을 넓히려고 벽을 허물다 하늘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 두려워서 그만두었는데, 책을 얻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청나라 고증학자들에 의해 자작극으로 밝혀졌다. 왕망 시절이라니 더욱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벽중서(壁中書)]의 공왕이 공왕(共王), 공왕(恭王) 두 가지로 표기되어 있다. 공왕(共王)은 전한 경제(景帝: 재위 B.C. 156~141) 때 사람, 공왕(恭王)은 전한 무제(武帝: B.C. 141~B.C. 87) 때 사람이다. ?전한서?와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이 4(共王):2(恭王)로 서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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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壁中書者, 共王壞孔子宅, 而得禮記, 尚書, 春秋, 論語, 孝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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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共王, 以孝景前二年用皇子為淮陽王. 二年, 呉楚反破後, 以孝景前三年徙為魯王. 好治宮室苑囿狗馬. 季年好音, 不喜辭辯. 為人吃.] [네이버 지식백과] 경제의 후손들 (사기, 2013. 5. 1)]

 

3. [Baidu 百科] 從小有口吃, 好聲色, 養狗馬, 爲治宮室苑囿, 曾破壞孔子舊宅, 於壁中得古文尚書, 毛詩, 孝經. 劉餘在位二十六年卒, 其子劉光繼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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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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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왕이 恭王

궁실을 고치는 것을 좋아했다. 初好治宫室

공자 옛집 벽을 허물어서 壊孔子舊宅

궁을 넓히려는데 以廣其宫

종고금슬의 소리를 듣고 聞鐘磬琴瑟之聲

마침내 더 허물지 못했다. 遂不敢復壊

그 벽 중에서 於其壁中

고문경전을 얻었다. 得古文經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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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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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로공왕은 共王

궁실을 치장하는 것을 좋아했다 好治宮室,

공자 구택을 허물어서 壞孔子舊宅,

그 거처를 넓히려고 하는데 以廣其居.

그 벽 속에서 於壁中得,

조상들이 숨겨둔 先人所藏

고문으로 쓰인 우하상주의 책과 古文虞夏商周之書,

논어, 효경의 전을 얻었다 及傳論語孝經.

모두 과두문이었다. 皆科斗文字.

왕이 또 공자사당에 오르니 王又升孔子堂,

음악소리가 들렸다. 聞金石絲竹之音,

이에 더 허물 수가 없었다. 乃不壞宅.

 

 

6. 위작(僞作)들에 대하여

 

맹자(孟子; B.C. 372~289)조차 유교의 초기경전인 ?서경(書經)?을 다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라가 쿠데타를 감행하여 은나라를 정벌할 때 주()의 군대가 은나라의 남쪽을 공격하자, 북쪽에 사는 은나라 백성들이 왜 북쪽부터 공격하지 않고 남쪽부터 공격하는가?” 하며 주나라의 군대를 기다릴 만큼 가장 착한 주나라가 가장 악한 은나라를 정벌하는데 어떻게 절구공이가 피에 떠다닐 정도로 전투가 치열할 수 있겠는가?’ 하는 논리 때문이었다. 쿠데타를 천명(天命)으로 호도하다가 다다른 자충수다. 맹자가 누구인가? 말로써는 그를 당해낼 수 없다는 천하의 달변가가 아닌가? 맹자의 한계가 느껴진다. 여기서, 필요하면 사실(史實) 자체라도 부정할 수 있다는 유자들의 기본입장이 새삼 드러난다.

 

<맹자孟子: 진심장 장구 하(盡心章 章句下)>

맹자가 이르기를 孟子曰,

를 다 믿는 것은 盡信書,

가 없느니만 못하다. 則不如無書.

무성(武成)에 대해서 나는 吾於武成,

두 세 책()만 취할 뿐이다. 取二三策而已矣.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 仁人無敵於天下,

지극한 인자가 以至仁

지극한 불인자를 정벌하는데 伐至不仁,

어떻게 그런 일이, 而何其

절구공이가 피에 떠다닌단 말인가? 血之流杵也?

 

고문파 또한 금문파 못지않는 편법을 자행한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황실 도서관을 관장하던 유흠(劉歆)어느 날 좌전(左傳)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이는 훗날 청나라 고증학자들에 의해 자작한 위작임이 밝혀지게 된다.

 

?주례(周禮)?라는 서적은 전승에 문제가 있다. 그 책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유향, 유흠(劉向 劉歆)이 궁중 도서를 교정하였을 때로, 그 이전에는 서명조차 알려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유흠이 왕망의 브레인이 된 뒤로는 더욱 ?주례(周禮)?를 인증하여 정권탈취에 조력하였던 까닭에 청말의 강유위(康有爲) 등은 ?주례?가 유흠의 위작서(僞作書)라고까지 극렬하게 논하였다.”

 

[죽간(竹簡)과 목간(木簡)]

 

그런 매체들로 전승된 글들은 우리에게 점차 익숙해진 고정성이나 명확한 한계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유동성과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편 혹은 심지어 하나의 장이 독립적인 단위였다. 작품에 물리적 손상을 가하지 않고도 새로운 단위들이 추가되고, 옛 단위들이 제거되거나 혹은 순서가 재배열될 수 있었다. 에릭 매더가 기술했듯, 전국시기 텍스트들은 논문들이나 주석들을 각기 다른 필체로 삽입하고, 또 편집자의 진화하는 관심에 맞추기 위해 자료를 추가하고 제거하고 혹은 재배열하는 탈착식 바인더처럼 작용했다. 긴 텍스트 단위들은 더욱 영구적으로, 그러나 더욱 비싸게, 비단 천에 고정되었다. 현대의 학자들에게 보이는 것처럼 문제이기는 커녕, 이 텍스트 전승 수단들은 지적 계보의 형성, 집단 충성심의 규정, 그리고 변화하는 환경에 맞춘 전통의 번안을 용이하게 했다.

 

글들의 물리적 특징들 때문에, 텍스트들은 언제나 수많은 사람을 거치는 사회적 창조물이었다. 저작권 개념은 약했거나 부재했다.”[글과 권위, p.121]

 

동해대학교東海大學校 향항신아연구소香港新亞硏究所 교수를 지낸 徐復觀(1903~1982)중국경학사의 기초 서문에서 이렇게 탄식했다. 이것은 한자漢字의 태생적 우려의 결과를 표현한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경학사(經學史)는 반드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하나는 경학(經學)의 전승이고 또 하나는 서로 다른 시대에 드러나고 승인된 경학의 의의意義이다.

즉 전승의 측면에서 말하면 서한西漢 때에 이미 문호의 다툼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것이 만연되어 오류가 있게 되었다. 동한東漢 때에는 문호의 다툼이 더욱 세차져서 전승의 오류는 더욱 늘어났다.

?경전석문서록(經典釋文敍錄)??수서: 경적지(隋書: 經籍志)?는 그릇된 것을 계승하면서도 억지로 갖다 붙인 것들이 아주 심했다. 후학으로 하여금 금문파의 치우친 말과 불충분한 뜻 이외에 다시 고전을 읽을 수 있는 감각이 없도록 만들었다.

피석서(皮錫瑞)는 이들을 이어서 ?경학통론(經學通論)??경학역사(經學歷史)? 두 책을 저술하였다. 두 책에서 그는 속이고 억단하는 능력을 과시하고 이치를 숨기고 거스르는 기술을 세웠다. 료평(廖平)과 강유위(康有爲)는 그것을 따라 더욱더 속여서 마침내 이러한 문화 대통의 분쟁과 혼란을 전면적으로 이끌어 냄으로써 부정적 국면을 첨가하였다.”

 

 

7. 한자의 이데올로기(Ideology)와 헤게모니(Hegemony)

 

네이버 지식인에 따르면 두 단어는 다음처럼 정리된다. 이것이 한자가 동양을 손쉽게 지배해 온 원리다.

 

이데올로기

일반적 의미로 이데올로기는 넓은 의미로 세계관, 가치관, 사상, 기본적 사고 방식을 의미하는데, 다만 행동지향적인 신념 체계라는 점에서 위의 개념들과는 약간 다릅니다.

, 사회에 대한 특정한 관점(사회 사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사회를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할 때, 그 사회 사상은 더 이상 책 속에만 있는 사상이 아닌 하나의 살아있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는 삶의 전체적 방향을 제시해 주는 한편,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은 무엇이고, 현 사회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개인이 어떻게 행동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를 제시해 줍니다. , 이데올로기는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고, 어떠한 목표를 추구하며, 어떠한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하는지를 제시해 주는 일종의 행동지향적인 세계관(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게모니

헤게모니는 대체로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서 지배계급이 국가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방향에 대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피지배계급에 대한 직접적인 강압보다는 문화적 수단을 통해 사회적, 문화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는 능력을 의미한답니다.

헤게모니는 계급 이데올로기를 자연화하며 이를 상식의 형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권력이 강요가 아닌 '권위'로서 행사될 수 있으며 생활의 '문화적' 국면이 탈정치화 된다는 것입니다. <네이버 지식인> 완전제일(sbngchl)

 

다시 말하면 성공적인 헤게모니는 지배계급의 이해(利害)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종속집단인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이것을 자연스러운 것, 또는 상식적이며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헤게모니의 기초는 단지 경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회의 문화생활 속에 존재하는 통합적 관계망이라고 생각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헤게모니 [hegemony] (두산백과)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王候將相寧有種乎?]”하는 생각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그래서 지배 이데올로기가 하느님 말씀으로 느껴지게 되면 봉건적 헤게모니가 완성된다. 옛 중국에서는 이것을 위하여 한자를 배우는 과정에서 효()라는 이데올로기를 형성시키고, 이 이데올로기를 오랜 세월 가공하며 필요한 개념요소들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몰아주기로, 모두 첨부해서 의인화하여, 요순(堯舜)과 같은 성현(聖賢)을 창조한 후 그처럼 훌륭한 성현의 후예답게 살아야 한다는 헤게모니를 손쉬운 이야기로 만들어서 일반화시켰다. 사실상 성현은 백성이 실천해야할 실천규범의 틀, 법규, 행동의 외적규제의 틀을 의인화 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상대를 공격할 때는 항상 성현의 말씀이 제일 먼저 동원된다.

인간에 대한 우열과 그것에 따른 지배와 피지배를 당연한 태생적(胎生的)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봉건제국 통치의 원천이다. 허신이 말하는 왕정지시(王政之始)”경예지본(經藝之本)”이다. 일일이 법령을 만들어 강요하려면 힘이 들고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옛 중국에서는 글자 속에다 이 법령들을 내재시켜 놓았다. 그러면 글자를 배우는 사람들은 잠재된 이데올로기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이 정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도 모르게 봉건체제에 길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 지배 집단이 제시하는 세계관을 하늘이 내린 진리로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결국에는 자신의 신념으로까지 여기게 된다. 이렇게 손쉽게(?) 사회 구성원들의 내면적인 합의를 획득하는 지적·도덕적 지도력을 헤게모니라고 한다.

그렇게 문자도, 제왕도 다 하늘이 내린 것으로 의미를 부여해서 가르치고 배우면 그렇다고 믿게 되고, 그렇다고 믿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믿음을 바탕으로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역대 왕조마다 자서(字書)나 운서(韻書)의 편찬에 그렇게 열을 올렸던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사람으로 태어난 자로서 부모가 없을 수는 없으니 부모에 대한 효()를 이데올로기화 한 후 인간의 도리로 천래의 것처럼 강조하여 헤게모니를 만든 다음, 제왕을 만백성의 아버지[爲民父母]로 가르치면 한 순간에 효()는 충()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소위 이효위충(移孝爲忠:효를 충으로 옮김)”이라는 것이다. 이미 효()가 이데올로기화 되었다면 이것은 하느님 말씀으로 도저히 거슬릴 수 없는 것이 된다. 한 마디로 글자의 의미에다 이데올로기를 심어두었으니 글자를 배우면 배울수록 헤게모니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 종교적이고 교조적으로 변질유술(儒術)이 바로 한 대(漢代)에 극성한 금문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진실된 의미에서 유가(儒家)라고 할 수 없다. …… 이들 제왕들을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한 신으로 격상시키고 의 절대적인 옹호를 받는 신국(神國)으로 격상시키는데, 그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사람들이 바로 금문학자들이다. …… 왕조의 정당성을 홍보한 권력 지향적인 인물들이다. ”

 

 

8. 결론

 

중국은 일찌기 문화대혁명과 5·4운동 등을 통해서 봉건잔재를 씻어 내리고 문자도 간화자로 개혁해버렸다. 그래서 이제 중국에서는 남존여비나 반상(班常), 장유유서(長幼有序) 따위의 구별은 존재하지 못한다.

그런데 알량한 지식으로 중국을 등에 업고 소중화를 꿈꾸며 민중을 수탈하며 자신만 안일하게 살던 그 유학찌꺼기가 아직도 난무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중국보다 더 유교적이라는 말이 비웃는 말인지도 모르고, 대국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고 기뻐하거나 공자의 몇 십대 자손이 찾아왔다고 난리를 피우기도 한다.

각설하고 중세의 마녀사냥이 가능했던 것은 교회의 수도사들만이 라틴어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다는 말은 곧 거역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통했기 때문이다. 곧 라틴어가 하느님의 권위를 대신한 셈이었다.

 

중세 마녀사냥이 성행할 때, 성서(聖書)는 신부(神父)만 볼 수 있었다. 라틴어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부가 누구를 마녀로 지목하면서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하면 마녀로 몰려 사형되었다. 그러나 루터가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영주들도 실제 성서에 어떻게 서술되어 있는지 알게 되었다. 진정한 종교혁명의 시작이다.

 

이렇게 루터가 쉬운 말로 성경을 번역해서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이때부터 무지막지한 수도사와 성경의 권위는 사라졌다. 마녀사냥에서 성경의 권위는 사실상 문자를 독점한 수도사들의 협잡에 불과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한자는 상위(上位)로의 신분변동을 가로막는 진입 장벽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애써 문자를 익히더라도 또한 저들이 미리 규정해 놓은 개념 설정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한편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봉건체제는 몇 천 년을 버티어 왔다. 한자가 이룩해 놓은 이 봉건 프레임을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인민일보] 1974625

東漢許愼이 지은설문해자는 고래로 우리나라 문자학의 권위있는 저작으로 지적되어 왔다. 동시에 그것은 모든 복고후퇴를 주장하는 존공독경의 완고파로부터 모범으로 숭상받았다. 그것은 인민대중이 실천하는 가운데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간화자를 매도했다. 문자개혁에 반대하는 근거로 활용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입장, 관점, 방법을 운용해서설문해자중의 존공복고 사상과 유심주의의 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한다. 한자의 간화를 지속시키고 문자개혁을 촉진하는 것은 물론 고문자학의 개조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시황제는 간소화한 새로운 글자를 이용해서 문자를 통일시켰다. 반면 유가는 고자의 통일로 사람들을 영원히 노예귀족의 옛 원칙에 따라 글자를 쓰도록 했다. 고자를 어떻게 쓰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 혹은 고자가 없는 경우 차라리 그것을 공백으로 두더라도 새로운 글자를 창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새로운 글자를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문자의 발전 변화를 적대시하는 것이다.

 

[광명일보] 19731025

우리나라 역사 중 반동통치계급이 창힐작자의 신화를 선전했다. 한자는 창힐이라는 한 사람의 성인이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들은 더욱 문자를 자기의 전리품으로 보고 인민대중이 쓴 글자를 속자파체등이라고 배척했다. 인민대중은 한자의 파괴자로 매도되었다. 역사의 사실이 증명하듯이 확실히 인민대중이 한자를 창조 개량해왔다. 반동통치계급의 터무니 없는 불평이나 멸시 중상은 철저히 숙청하지 않으면 안된다. <裘錫圭 著, 李鴻鎭 譯, 중국문자학> p.157 - 158.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설문해자를 신성시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 심지어 아무나 하면 안 된다는 소리까지 한다. 거의 중세 마녀사냥에 지침서로 사용되었던 책,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생각된다. ?설문해자?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아주 전문적인 책이며, 설상가상으로 꽤나 어려워서, 그 결과 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오히려 함량 미달의 교수와 관변단체에서 인성계발을 내세우는 사이비들이 전문가로 행세할 수 있는 권위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 가야 한다고 했다. 이제 힘에 부치기는 하지만 봉건신분제 차별법 시행령 조례집의 원형과도 같은 이 책을 통째로 완역하여 누구나 읽어볼 수 있는 책으로 만들고자 한다. 아무런 사전 예비지식이 없어도 볼 수 있는 책, 중국음운학을 배우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책, 본래는 어떤 뜻이었는지 찾아볼 수 있는 책, 초등학생일지라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면 엉터리 사이비들이 설 자리도 좁아지고, 쓸데없는 권위의 백그라운드로 이용되지도 못할 것이다. ‘한자의 신화적인 힘이라는 것은 어려움, 사전의 예비지식이 없으면 볼 수도 없는 것으로 허세 부리며 난해한 척 꾸며서 쌓아 올린 담장 너머의 허상에 불과했다.

 

노신(魯迅;1881-1936)은 그의 <문외문담(門外文談)>이라는 글에서 중국문자의 유래와 특성을 이야기 하면서 한자가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면서 尊嚴性(존엄성)神秘性(신비성)이 부여돼 더욱 어렵고 모호해졌다고 지적하였다. 즉 문자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일반대중에게 제한하기 위해서 고의로 만들어낸 문턱이 어려움이라는 설명이다.”

 

문자는 의사소통의 도구로 족하다. 백성을 지배하던 도구 이상의 이데올로기는 이제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 그래서 세종도 해례본에서 일상에 편히 쓰고자 할 뿐이다(便於日用耳)”라고 다른 정치적 의도는 없다는 것을 단언하려고 단정을 뜻하는 ()를 썼다. 나도 한마디 하고 싶다.

 

이제 문자학에 더 이상의 권위는 필요 없다!!!”

 

 

<說文譯註 誤譯考>

설문역주 오역고

 

A교수 오역

 

[2-242] 2번 논문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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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反祏

[오역] 신주를 돌려놓았다.

[수정] 돌아가서 신주를 가져오게 했다.

○ 《통전: 후한 허신(許愼)?좌씨전?을 근거로 하여 말하기를, “‘위나라 공회(孔悝)가 서포(西圃)에 보내 조상의 신주를 가지고 오도록 했다고 했는데, ()은 석주(石主)이다. 대부는 돌로 신주를 만든다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정현(鄭玄)이 논박하여 말했다.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는 대부의 제사인데, 비단을 묶어[束帛] 신이 빙의하고, 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는 사()의 제사인데 띠를 묶어[束茅] ()를 만든다.” ()는 측()과 우()의 반절이다. (한국고전 디비)

 

[3-130] 3번 논문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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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不撓而折

[오역] 굽히려고 하지 않아도 굽어지니

[수정] 부러지기()는 해도 휘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구부러지지 않는다(它不彎曲), 차라리 절단될 수는 있다(寧有折斷)]

[3-132] 3번 논문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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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一則理勝

[오역] 첫째는 모두 이치에 맞고,

[수정] 옥의 결[무늬]이 보통을 넘는다(아주 뛰어나다).

徐鍇<繫傳>: 謂文理也. : 超過 ex. 경승지(景勝地), 명승지(名勝地)

 

[원문] ,孚勝

[오역] 둘째는 언제나 믿음이 간다.

[수정] 옥의 빛깔이 뛰어나다.

ex. 경승지(景勝地), 명승지(名勝地)

서개(徐鍇)?계전(繫傳)?의 음은 . 옥의 광채를 말한다. 지금은 부채(符彩)라고도 한다라고 했다(孚音符, 謂玉之光彩也. 今亦言符彩).

부채(符彩)는 아름다운 옥의 무늬와 결의 색채다(美玉的文理色彩).

※ 【부채(符采, 符彩)

아름다운 옥의 무늬와 결의 색채(美玉的文理色彩)

사람의 겉모습의 비유(比喩人的外表儀容)

문예적 재능(指文藝才華)

 

[3-136] 3번 논문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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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鄭云, 公侯四玉一石, 則記文不當公侯分別異名. 許說爲長.

[오역] 허신은 이를 약간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수정] 허신의 설이 더 낫다.

[3-148] 3번 논문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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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璱 玉英華相帶如瑟弦. 從玉, 瑟聲.

[오역] 거문고의 현처럼 지니고 다닌다.

[수정] 옥에 나타난 꽃무늬가 서로 연결되고 얽힌 것이 악기의 줄과 같다.

옥의 꽃무늬가 악기줄처럼 둘러 있다(玉英華相帶如瑟弦).

英華(영화): 옥의 꽃무늬[옥 위의 꽃무늬를 가리킨다(指玉上的花紋)].

如瑟弦(여슬현): 옥의 가로 결이 많고 빽빽한 것. [옥의 가로 결이 많고 빽빽한 것을 말한다(謂玉之橫理多而密也)].

(): 띠고 있다. 두르고 있다[둘러싼 것을 가리킨다(指索繞)].

옥 위의 화문(花紋)이 서로 얽힌 것이 악기의 현과 같다.(玉上的花紋 相互索繞連結 像琴瑟上的弦).

색요이반(索繞耳畔; 귓가를 맴돈다): 아름다운 소리가 귀 주변에 있다는 비유(比喻美妙的声音等在耳边回).

 

[3-149] 3번 논문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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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瑮 玉英華羅列秩秩. 從玉, 栗聲.

[오역] 줄줄이 늘어 놓는다.

[수정] 옥석의 무늬가 늘어진 모습이 질서정연하다,

옥석의 꽃무늬의 배열이 질서가 있다(玉石的花紋排列有序).

秩秩(질질): 반듯하여 질서가 있는 모양(井然有序貌).

질질(秩秩)은 순서가 있는 모양(順序之貌)이다.

 

 

 

B교수 오역

 

1. 女待人. 婦義事也.

[오역] 는 사람을 기다리고, 는 함께 일을 의논할 만하다.

[고침] 는 명령을 대기하고, 의 뜻은 모신다, 섬긴다는 것이다.

 

허신이 설명한 자를 보면 服也. 從女持帚, 灑掃也(복종하는 것이다. 여자가 빗자루를 들고 있는 것을 따랐다. 물 뿌리고 쓰는 것이다라고 했고 그 풀이에 , 主服事人也(부인의 주된 일은 복종하여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설마 여기의 가 사대주의(事大主義), 사군이충(事君以忠)와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대례: 본명(大戴禮: 本命에 이르기를

여자(女子)란 것은 남자의 가르침을 따라 女子者, 言如男子之敎

그 의리를 기르는 사람을 말한다. 長其義理者也

그러므로 부인(婦人)이라고 하는 것이다. 故謂之婦人.

부인(婦人)은 사람에게 복종한다. 婦人, 伏於人也.

그러므로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 없다. 故無專制之義.

삼종지도(三從之道)가 있다라고 했다. 有三從之道.

 

훨씬 후대의 단옥재(段玉裁)도 안()자의 풀이에서 婦從夫則安(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편안하다)”라고 했다

미국의 여자들이 선거권을 획득한 것도 1950년대의 일이다 허신이 살던 시대에 이런 일(함께 일을 의논)이 있었다면 거의 기적같은 일이 아니었을까?

 

나아가 자의 해설에서도 女子從人者也(여자는 사람을 따르는 자다). 幼從父兄(어려서는 부형을 따르고), 嫁從夫(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夫死從子(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른다).”라고 했다. ?백호통(白虎通)?에서 (女者, 如也). 뜻이 확대되어(引伸之) 비슷한 것도 (凡相似曰如), 따르는 것도 (凡有所往曰如). 모두 따른다는 뜻이다(皆從隨之引伸也).”라고 했다. , 의 입 구()는 아버지, 남편, 아들의 입이다. ()에서 말하는 대()는 이 입에서 떨어지는 명()을 기다리는 것이다.

 

2. 象人有規榘. <直中繩. 二平中準. 是規榘也.>

[오역] ()자는 가운데 곧은 줄로 두 평행선의 가운데를 맞추었다.

이것이 규구(規矩)”.

[고침] 수직선은 먹줄에 맞고, 두 수평선은 수준기에 맞는 것 이것이 법도다.

?중정형음의 대사전?

소전 자 상하의 두 가로 획은 평평하여 수준기에 들어맞고(小篆工上下二橫平象準),

중간의 수직선은 극히 똑발라서 꼭 먹줄로 본뜬 것 같다(中間一直極直正象繩).

사람의 행동이 능히 평평하기는 수준기에 맞고, 바르기는 먹줄과 같은 것을 공()이라고 한다(人之行事能平準而直如繩者爲工).

그 본래의 뜻은 사람이 규구처럼 되는 것을 본뜬 것이다(其本意作象人能規榘).

 

()자와 규구(規矩)의 쓰임에 대해 <주례:고공기:동관:장인(周禮:考工記:冬官:匠人)>에 자세히 나와 있다.

장인이 나라를 건설할 때, 수준기를 매달아 높낮이를 측량한다. 말뚝을 박아 수준기를 매달고 그림자를 살펴서 규()로 삼는다. 해 뜰 때의 그림자와 해 질 때의 그림자를 기록하고 한 낮의 그림자를 참조한다. 밤에는 북극성을 고려하여 아침저녁을 바로 한다.”라고 했다.

[匠人建國, 水地以縣. 置槷以縣. 眡以景. 爲規. 識日出之景與日入之景, 晝參諸日中之景, 夜考之極星, 以正朝夕.]

수지이현(水地以縣)은 사각틀을 세우고 수준기를 달아매어서 땅의 고저(高低)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수지(水地)는 수평기로 땅의 높낮이를 측량하고, 높낮이가 이미 정해지고 나면 위치를 잡아서 땅을 평평하게 한다.[以水平之法量地高下, 高下旣定, 乃爲位而平地].

<주례:고공기:동관:장인> <정현-(鄭玄)>

“4각 기둥을 세우고 수준기를 달아매어 그 높낮이를 바라본다[於四角立植以縣以水, 望其高下].”라고 했다.

<주례:고공기:동관:장인> <손이양-정의(-正義)>

나라를 세우고자 할 때, 먼저 수준기로 땅을 평평하게 하는데 측량의 기본으로 삼는다.[水地以縣者, 將建國, 必先以水平地, 以爲測量之本].”라고 했다.”

 

 

나무가 먹줄을 따르면 정확해지고, 惟木從繩則正,

제후가 간언을 따르면 성인(聖人)이 된다. 后從諫則聖.

 

규구(規榘) 직각자와 컴퍼스(規和矩. 校正圓形和方形的兩種工具).

올바른 법도(禮法; 法度).

일정한 표준(一定的標准).

직승(直繩)먹줄처럼 곧고 바르다(正直如繩墨).

승묵(繩墨): 대목이 나무를 바로잡는 먹줄인데, 사람의 행동하는 바를 준칙에 비유한 것이다.

규구승묵(規矩繩墨), 校正圓形方形的兩種工具繩墨, 木匠畫直線所用的工具. 多比喩標准法度.

중준(中準)符合水准. 莊子·天道》:水靜則明燭鬚眉, 平中準, 大匠取法焉.” 王先謙集解其平與準相中, 故匠人取法焉, 謂之水平.”

 

3. 자의 풀이에서 長毛之末筆. 非中有人字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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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 아래로 내려온 것은 긴 털의 끝 부분을 그린 것이며, ‘()’의 전문 가운데 ()’자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로 번역했다.

[고침] ()의 끝 획을 길게 늘렸는데, 그 중[자 속]에는 인()자가 없다.

긴 털의 끝부분이 아니라 마지막 획(末筆)을 길게 늘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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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있으나 일단은 이 세 개만 들겠다. 나머지는 따로 모아서 논문으로 써도 두터운 논문이 될 것이다.

 

각설하고, 설문해자(說文解字)의 목적은 분명하다. 허신이 ?설문해자? 서문에서 밝혔듯이 왕정지시(王政之始: 왕정의 시작), 경예지본(經藝之本: 경예의 근본)”이다. 허신은 오경무쌍허숙중(五經無雙許叔重)”이라고 할 만큼 오경(五經)에 능통했다. , 오경을 제대로 이해시키려고 ?설문해자?를 썼다는 말이다. 유교 경전의 바른 이해. ‘바르다는 것은 옳다는 것과 개념이 다르다. 그것은 성인(聖人)으로 지칭되는 앞 사람의 의도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노골적으로 말해 놓은 것이 술이부작(述而不作: 서술만 하고 새로이 짓지는 않는다)”이다.

이 전통은 ?강희자전?은 물론 요즘에 발간된 ?한어대자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따라서 ?강희자전?이나, ?옥편?이나, 현대에 발간된 ?한어대자전?은 우리 국어와 무관하다. 우리의 국어는 유가 경전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유교는 기껏해야 이조 500년을 풍미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국어에 사용되는 한자를 위한 자전은 따로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성(當爲性)이 여기서 제시된다. ?옥편(玉篇)?이나 ?강희자전(康熙字典)? 같은 것은 쳐다볼 필요도 없고, 유가 경전과는 무관하게 국어에 사용된 한자말만을 골라내고, 그렇게 선정된 한자의 뜻도 전주, 가차, 피휘 등으로 인해 수십 가지 뜻을 갖는, 복잡해진 뜻들은 버리고 오롯이 국어단어에 사용된 뜻만 찾아서 많아야 3~5개로 정리해야 된다.

차제에 이름 또한 한자(漢字)가 아닌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 아예 훈민정음 이전의 문자였으므로 전훈문(前訓文)이나 전훈자(前訓字), 아예 줄여서 전문(前文)이나 전자(前字)로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가 다 독립한 것처럼 독립해야 한다.

 

아울러 경제성을 담보할 수 없는 방대한 원고의 출판을, 앞뒤 가리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결정해 주신 자유문고의 김시열 대표님의 용기와 임직원 여러 분들의 성원에 감사드리고 싶다.

이것이 함량 미달의 인간들에게 쓸데없는 권위를 부여하는, 유교에 쩔은 한자프레임을 이해하고, 유교의 도구에서 벗어나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라는 문자 본연의 기능을 확립하는데 일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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