池邊剪葦看雲影

2015. 9. 19. 09:44한시

老去功名念自輕 (노거공명 염자경)

늙어가며 공명을 버렸더니 생각이 절로 가벼워지네

且將幽事送餘生 (차장유사 송여생)

앞으로 그윽한 일들로 여생 보내리

池邊剪葦看雲影 (지변전위 간운영)

호수가 갈대 베고 운영 보며

窓下移蕉聽雨聲 (창하이초 청우성)

창아래 파초 옮겨와  빗소리 들으리

 

                                     익제 이제현

 

이제현 [李齊賢, 1287~1367]


고려시대의 문신·학자. 원나라와의 관계에서 부당한 처사를 해결하는 등 활약하였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조맹부 서체를 도입, 유행시켰다. 저서는《효행록》,《익재집》,《역옹패설》등이다.

본관 경주
호 익재 ·역옹 ·실재
별칭 자 중사, 초명 지공, 시호 문충, 계림부원군
주요저서 《효행록》 《익재집)》 《역옹패설》 《익재난고》 등

본관 경주(慶州). 자 중사(仲思). 호 익재(益齋) ·역옹(櫟翁) ·실재(實齋). 초명 지공(之公). 시호 문충(文忠).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했으며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 등을 지냈다. 1308년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에 등용되고 제안부직강(齊安府直講)을 역임했다. 이듬해 사헌규정(司憲糾正), 1310년(충선왕 2) 선부산랑(選部散郞), 이듬해 전교시승(典校寺丞) ·삼사판관(三司判官) 등을 거쳐 1312년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가 되고 성균악정(成均樂正) ·풍저창사(豊儲倉使)를 지냈다. 이듬해 내부부령(內府副令) 풍저감두곡(豐儲監斗斛)을 거쳐 1314년 원나라에 가서 조맹부(趙孟) 등과 고전을 연구하였다.

13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이 되고, 1320년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같은 해 충선왕이 모함으로 유배되자 원나라에 그 부당함을 밝혀 1323년 풀려나게 하였다. 이듬해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使)에 승진, 1325년 추성양절공신(推誠亮節功臣)이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 1336년 삼중대광영예문관사(三重大匡領藝文館事)에 오르고 1339년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나라에 충숙왕을 모함하자 연경(燕京)에 가서 해명하고 돌아왔다. 1343년(충혜왕 복위 4) 원나라 사신이 왕을 잡아가자 사면을 요청했고, 이듬해 삼사판사(三司判事)에 복직,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왕이 죽자 제조경사도감(提調經史都監)으로 원나라에 가서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요청했고,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가 되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이듬해 우정승에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후 사직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로 호종,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도입하여 유행시켰다. 공민왕 묘정(廟庭)에 배향, 경주의 귀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효행록(孝行錄)》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櫟翁稗說)》 《익재난고(益齋亂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