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漢詩와 書藝 / 秋日偶成 - 程顥

2013. 1. 9. 11:04한시

 

秋日偶成(추일우성) 程顥(정호)

가을날 뜻하지 않게 이루어짐

 

閑來無事不從容(한래무사부종용)

睡覺東窓日已紅(수각동창일이홍)

萬物靜觀皆自得(만물정관개자득)

四時佳興與人同(사시가인여인동)

道通天地有形外(도통천지유형외)

思入風雲變態中(사입풍운변태중)

富貴不淫貧賤樂(부귀불음빈천락)

男兒到此是豪雄(남아도차시호웅)

 

한가로워진 뒤 아무 일에나 마음 차분하지 않은 일 없고

아침에 눈 떠보면 동창에는 이미 햇빛 붉게 비친다

우주만물을 고요히 살펴보면 모두 제 분수대로 편안하고

네 계절의 취향은 인간과 일체가 되어 바뀐다

우리가 믿는 도는 천지간 형체 없는 것에 까지 행해지고

모든 것 자연의 섭리 안에 있음을 알 때 내 마음 달관된다

부귀에 흐트러지는 일 없고.빈천해도 굴하지 않으매

남아 이 경지에 도달하면 참 영웅호걸이 아니겠는가

 

정호(程顥 : 1032-1085)

중국 북송 중기 유학자로 자 백순(伯淳). 호 명도(明道). 시호 순(純).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출생. 존칭으로 명도선생이라 불리고, 동생 정이(程燎:伊川)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로 알려졌다. 아버지 정향(程珦)이 남안(南安:江西省 大庾縣)의 판관이었을 때 주돈이(周敦燎:濂溪)를 한번 보고 아들 형제를 그의 제자로 입문시켰다고 한다. 26세 때 진사가 되고, 산시성[陝西省] 후셴현[且縣]의 주부(主簿)로 출발하여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그가 택주(澤州:山西省) 진청현[晉城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는 ‘視民如傷’이라는 네 글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큰 치적을 올렸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부모처럼 따랐다. 신종(神宗)의 부름을 받아 저작좌랑(著作佐郞)이 되었으나, 왕안석(王安石)과 뜻이 맞지 않았으므로 자청하여 지방관이 되었다. 철종(哲宗)이 즉위하고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이 되자, 조정에 등용될 뻔하였으나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병사하였다고 한다.

 

그의 학문적 태도는 만물일체관(萬物一體觀)에 입각하여 혼일적(渾一的)으로 천지의 생의(生意)를 체험하는 데 있었다. 그는 제자(諸子)·노장(老莊)·불교도 공부하였으나, 결국 유학으로 복귀하여 자신의 학설을 확립하였다. 그는 다양한 자연현상을 질서지우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이(理)’라 부르고, 사람은 모름지기 이를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순응하여야 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동생 정이를 거쳐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송나라 새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정주학(程朱學)의 중핵을 이루었다. 저서에《정성서(定性書)《식인편(識仁篇)》, 시에《추일우성(秋日偶成)》등이 있다. 그의 전기는 주자의《이락연원록(伊落淵源錄)》에서, 유저(遺著)는 서필달(徐必達)의 《이정전서(二程全書)》에서 볼 수 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한가로움/道 명상음악)

출처 : 紫軒流長
글쓴이 : 紫軒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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