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31. 11:46ㆍ한시
登淸凉頂(등청량정)청량산 정상에 올라 周世鵬(주세붕)
我登淸凉頂
아등청량정
兩手擎靑天
양수경청천
白日正臨頭
백일정임두
銀漢流耳邊
은한유이변
俯視大瀛海
부시대영해
有懷何綿綿
유회하면면
更思駕黃鶴
갱사가황학
遊向三山嶺
유향삼산령
청량산 꼭대기에 올라
두 손으로 푸른 하늘을 떠받치니
햇빛은 머리 위에 비추고
별빛은 귓전에 흐르네.
아래로 구름바다를 굽어보니
감회가 끝이 없구나.
다시 황학을 타고
신선세계로 가고 싶네.
周世鵬(주세붕 (1495~1554).경남 칠원 .조선 중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남고(南皐)·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
1522년(중종 17) 생원시와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권지부정자로 관직생활을 시작해 홍문관의 정자·수찬, 공조좌랑·병조좌랑·강원도도사·사간원헌납을 역임했다. 1537년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피해 어머니 봉양을 이유로 곤양군수(昆陽郡守)로 나갔으나 이듬해 파직당했다. 이후 승문원교리를 거쳐 1541년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세웠다 1545년(명종 즉위) 성균관사성에 임명된 후, 홍문관직제학·도승지·호조참판을 역임했다. 1549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뒤에 대사성·동지중추부사 등에 임명되었다. 중앙에 있을 때는 주로 홍문관·성균관 등 학문기관에서 관직을 맡았고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교학(敎學) 진흥에 힘썼다. 지극한 효행과 청빈한 생활로 조야에 신망이 높았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교학진흥그는 도학(道學)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유교 이념의 보급을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시행을 건의했다. 풍기군수 재임시에는 유교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썼고 당시 향촌민의 교육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향교를 복구했다. 1542년 순흥(順興) 죽계(竹溪)에 고려말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사당인 회헌사(晦軒祠)를 설립했고, 1543년 풍기의 사림 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주자(朱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고 안향을 배향했다. 건립 때는 감사 임백령(林百齡)·이언적(李彦迪)·황빈(黃彬)의 도움을 받아 재정을 확보했고, 자주 서원에서 유생들과 강론(講論)하는 등 큰 열성을 보였다. 처음에는 사림의 호응을 크게 받지 못했으나 1550년 이황(李滉)의 건의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의 사액을 받고 공인된 교육기관이 된 후 향촌사림의 정치·사회활동 기구로 자리잡았다. 1551년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해주(海州)에 수양서원(首陽書院)을 건립하여 최충(崔)을 봉사(奉祀)했다.
저서로는 죽계지(竹溪誌)〉·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심도이훈(心圖彛訓)·심경심학도(心經心學圖) 등이 있고, 문집으로 무릉잡고(武陵雜稿)가 있다. 도동곡(道東曲)·현가(六賢歌)·엄연곡(儼然曲) 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 등 단가(短歌)가 전한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과 소수서원에 배향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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