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31. 10:52ㆍ한시
寄浿妓松娘(기패기송낭)평양 기생 송랑에게 申光洙(신광수)
巫山曾不作因緣
무산증불작인연
別後前遊細可憐
별후전유세가연
綺席偸分藏果篋
기석투분장과협
紅裙笑蕩採菱船
홍군소탕채릉선
關河楚國今千里
관하초국금천리
煙月楊州又一年
연월양주우일년
浮碧練光歌舞地
부벽련광가무지
玉人能憶舊詩仙
옥인능억구시선
일찍이 무산의 인연일랑 미처 못 맺고
이별한 후 전의 놀던 일 너무 아쉬워라
잠자리에서 다투던 일, 과일 상자에 넣고
다홍치마 입고서 마름 캐는 배에서 활짝 웃던 너
우리 놀던 관서의 물가, 이제는 천리 머나먼 땅
태평한 양주에서 또 일년이 지나가네
부벽루 연광정은 가무의 고장
그대는 지금도 기억할거야 그 옛날 시 잘 짓던 이를
申光洙(신광수 1712년∼1775). 조선 영조 때의 문인.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연(聖淵), 호는 석북(石北) 또는 오악산인(五嶽山人).
집안은 남인으로 초기에는 벼슬길이 막혀 향리에서 시작에 힘쓰며, 채제공(蔡濟恭)·이헌경(李獻慶)·이동운(李東運) 등과 교유하였다.
39세 때 진사에 올라 벼슬을 시작하였으며, 49세에 영릉참봉(寧陵參奉)이 되고, 53세에 금오랑(金吾郞)으로 제주도에 갔다가 표류하여, 제주에 40여일 머무르는 동안 〈탐라록 耽羅錄〉을 지었다.
1772년 61세 때 기로과(耆老科)에 장원하여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에서는 문장의 신하를 얻었다고 하였고, 영조의 대우가 대단하였다.
그뒤 우승지·영월부사를 역임하였다. 시명이 세상에 떨쳤는데 특히 과시(科詩)에 능하였고,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歎關山戎馬)(關山戎馬로 약칭됨.)는 창(唱)으로 널리 불렸다.
악부체(樂府體)의 시로서는 〈관서악부 (關西樂府)가 유명하다.
그의 시에 대하여 교우의 한 사람이었던 채제공은 평하기를, “득의작(得意作)은 삼당(三唐)을 따를만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라도 명나라의 이반룡(李攀龍)과 왕세정(王世貞)을 능가하며 동인(東人)의 누습을 벗어났다.”고 하였다. 동방의 백낙천(白樂天)이라는 칭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 석북집(石北集) 16권 8책과 석북과시집(石北科詩集) 1책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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