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20. 18:00ㆍ서예가
동기창(董其昌, 1555년 ~ 1636년)은 중국 명나라 때의 문인, 화가, 서예가, 정치가이다. 명나라 강소 화정(華亭) 사람으로 자는 원재(元宰), 호는 사백(思白)과 향광거사(香光居士)이다. 장쑤 성에서 태어났으며, 1589년에 진사가 된 후 벼슬이 남경예부상서 까지 올랐다. 그러나 정치가로서보다 문인, 화가, 서예가로 더 이름이 나 있다. 복왕(福王) 때에 문민(文敏)이라는 추시를 내렸다. 젊었을 때부터 시서화의 창작 및 감식에 뛰어났으며 명대 최고의 문인화가 및 화론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서예는 왕희지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행서, 초서에 뛰어났으며, 특히 중국 그림의 2대 유파 중 하나인 남종화를 대성함으로써 당시의 그림 경향을 남종화 일색으로 만들기도 했다.
저서로는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 《화안(畵眼)》, 《화지(畵旨)》, 《용대문집(容臺文集)》 등이 있다. 또한 그는 역대의 진귀한 범첩을 수집하고 정리해 간행했으며, 만력, 태창(泰昌), 천계(天啓) 세 왕조의 실록 편찬에도 참여하는 등 명대 학술 문화 발전에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자 현재(玄宰). 호 사백(思白) ·향광(香光) ·사옹(思翁). 시호 문민(文敏). 장쑤성[江蘇省] 화팅현[華亭縣] 출생. 1589년에 진사가 되고, 남경예부상서(南京禮部尙書)가 되었으나 환관의 횡포와 당쟁 때문에 사임하고, 1631년 옛 자리로 복귀하여 3년 후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되었다가 사임하였다. 사후에 태자태부(太子太傅)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관리로서도 명성이 높았으나 문명(文名)도 높아 시인 ·서가 ·문인화가로서 널리 알려졌고, 감식(鑑識) ·감장(鑑藏) ·임모(臨模) 등에도 업적을 남겼다.
명나라 말 제일의 인물이었으므로 당시의 화단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고 화풍이나 소론(所論)은 후세 오파(吳派) 문인화가에게 결정적 감화를 주었다. 저서인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에서 남종화(南宗畵)를 북종화(北宗畵)보다도 더 정통적인 화풍으로 한다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주창하였다.
그림은 동원(董源) ·거연(巨然)을 스승으로 모셨고 송(宋) ·원(元)의 화가들의 장점을 빠짐없이 수집하고, 심석전(沈石田) ·문징명(文徵明) 등의 오파문인화(吳派文人畵)의 남종화풍을 계승 발전시켜 근거를 원나라의 황공망(黃公望)에게서 찾았다.
스스로 고아수윤(古雅秀潤)이라고 부르던 화풍으로, 먹물 빛깔의 변화가 풍부하고 간명한 산수화를 많이 남겨 창작과 실제화업(實際畵業)을 화론(畵論)과 병행하여 전개하였다. 문학에도 능통하였고, 서가로서도 명대 제일이라고 불리며 형동(邢侗)과 어깨를 겨루어, 북형남동(北邢南董)이라 불린다.
서체는 왕희지(王羲之)를 주종으로 삼으면서도 글씨 체형보다 내용을 더 추구하여 당시 제일의 문인으로 각 방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저서로 《산수화책(山水畵册)》 《용태집(容台集)》 등이 있다.
출처 : 두산백과사전
방고산수도(仿古山水圖) 1
방고산수도(仿古山水圖) 2
설색산수도(設色山水圖)
암거도(岩居圖)
임천청유도(林泉淸幽圖)
청변도(淸弁圖)
추흥팔경도(秋興八景圖) 1
추흥팔경도(秋興八景圖) 2
추흥팔경도(秋興八景圖) 3
춘산욕우도(春山欲雨圖)
풍경방고도(葑涇仿古圖)
고일도(高逸圖)
동기창에 대해서 검색하다가 다음사이트의 한 블로거가 올린 동기창의 인물 됨됨이에 대한 글을 보고서는 실망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실컷 바이두에서 검색해서 올린 공이 아까워서 지우지는 못하고 그냥 두지만 예술작품과 인품이 따로 논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결국 그림이나 글씨는 문학작품처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인격의 결정체가 아니라 기술이나 기교에 불과한 것인가?
[출처] 남종화 감상_동기창(南宗畵 鑑賞_董其昌)|작성자 붕정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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