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20. 08:36ㆍ서예가
중국 북송(北宋)시대 정치가·서예가. 자는 군모(君謨). 푸젠성[福建省] 셴유[仙遊] 출신. 1030년 진사에 합격하고, 인종(仁宗)을 섬겨 신임이 두터웠으며, 한림학사(翰林學士)·삼사사(三司使)가 되었고, 한때 송나라 재정을 총괄하였다. 65년 영종(英宗)의 오해를 받아 항저우지사[杭州知事]로 좌천되었다가 병사하였다. 문학에 능했고 서예에서는 북송양식의 선구자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소식·황정견(黃庭堅)·미불과 함께 <북송 4 대가>라 불렸다. 그의 필체는 당(唐)나라 안진경(顔眞卿)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후(肥厚)한 속에 골력(骨力)을 내포하고 있다. 특히 행서(行書)·해서(楷書)에 능했고, 소식은 그를 송나라에서 으뜸이라고 평하였다. 사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으로 추증되었다. <만안교비(萬安橋碑)> <사사어서시표권(謝賜御書詩表卷)> <안진경자서고신발(顔眞卿自書告身跋)> 등의 유묵(遺墨)과 《다록(茶錄)》 《채충혜공집(蔡忠惠公集)》 등의 저서가 있다.
舊拓渤海藏眞
宋代 서예가 蔡襄(1012-1067)과 蘇軾 (1037-1101)의 遺墨을 탁본한 책. 編者와 제작연대는 미상이다. ≪奎章閣圖書韓國本綜合目錄≫에는 書名이 ‘舊拓渤海藏直’이라 되어 있으나 ‘舊拓渤海藏眞’의 잘못이므로 바로잡는다. ‘渤海藏眞’이라는 서명은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의 眞墨을 소장하였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겉표지의 서명 아래 ‘李盦高印’이라 적혀 있어 李盦高가 편자이거나 소장자로 추정되나 자세하지 않다.앞 부분에는 채양의 書簡文과 詩文 등이 탁본되어 있다. 각 시문은 초서·행서·해서 등 다양한 서체로 쓰여져 있어 채양의 서법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채양의 글씨 뒤에는 元代 문인화가인 倪瓚(1301-1374)이 蔡襄과 米芾의 글씨를 평한 題文이 실려 있다. 題文에 따르면 채양의 서법은 六朝와 唐人의 풍취가 있으나 조탁을 가한 측면이 있고‚ 미불은 晋人의 서체를 따랐으나 그 필력이 웅건한 것이 子路가 공자를 만나기 전의 모습 같다고 하였다. 후반부에는 소식의 글씨가 탁본되어 있는데 <致長官董候尺牘>‚ <致季常尺牘> 등의 書簡文과 書畵에 대해 논한 문장 등이 있다.채양의 자는 君謨이며 시호는 忠惠이다. 端明殿學士를 지냈기에 蔡端明이라고도 불린다. 1030년에 進士가 되어 館閣校勘‚ 樞密院 直學士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서법은 해서·행서·초서의 각체를 구비하여 당시 一家를 이루었다. 특히 채양은 散筆로 초서를 쓰는 독특한 서법인 散草‚ 즉 飛白體를 창시하여 서예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소식은 채양에 대해 천품제일이라고 평한 바 있다. 저서로는 ≪蔡忠惠集≫‚ ≪茶錄≫‚ ≪荔枝譜≫가 있고‚ 遺墨으로는 ≪扈從帖≫‚ ≪謝賜御書詩帖≫‚ ≪尺牘≫ 등이 전한다.소식의 字는 子瞻 혹은 仲和‚ 號는 東坡居士‚ 시호는 文忠이며 眉州 眉山 사람이다. 소식은 당시 문학의 거장으로 文·詩·詞·書·畵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唐宋八大家 중의 한 사람으로 부친인 蘇洵‚ 아우 蘇轍과 함께 문장으로 이름을 떨쳐 ‘三蘇’라 일컬어진다. 그의 문장은 縱橫奔放하였으며‚ 그의 시는 飄逸하여 얽매이지 않았고‚ 그의 詞는 호방하여 一家를 이루었다. 특히 그의 書法은 晋人의 글씨를 따라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로 가늘고 힘찬 기상을 지녀 淸新한 맛이 있다고 한다. 저서로 ≪東坡全集≫이 있고‚ 遺墨으로 <黃州寒食詩帖>‚ <致季常尺牘>‚ <赤壁賦>‚ <李白詩> 등이 있다.채양과 소식은 米芾‚ 黃庭堅과 더불어 宋四家로 일컬어 지는 당대 제일의 서예가들이다. 따라서 이 책은 송대 뛰어난 서예가 채양과 소식의 서체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노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