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윤명

2012. 6. 20. 17:55서예가

축윤명의 서예는


조맹부(趙孟坦) 이래 1인자로 일컫지만 그의 소해(小楷, 細筆의 楷書)를 제일이라는 사람과 광초를 제일이라는 사람으로 기호에 따라 나뉘어져 있다. 그의 해서 출사표(出師表)에 붙은 옹방강(翁方綱)의 발(跋)에 ?축경조의 서는 소해로서 으뜸을 삼는다. 명나라 최대의 소해서(小楷書), …그는 진법(晉法)에 통달한 자로서 남궁생(南宮生)보다 앞서 서법의 문호를 열고, 서법의 정맥(正脈)을 얻은 이는 오직 축경조이며 그 뒤를 잇는 정통이 누자유(婁子柔)와 왕각사(王覺斯)이다.?고 말한다. 이미 언급한 남궁생은 송극(宋克)이요, 자유는 누견(婁堅)이며, 각사(覺斯)는 왕탁(王鐸)이다.

앞서 말했듯이 축윤명이 지향하던 곳은 위(魏)의 종요(鍾繇)일 것이다.

이른바 왕희지풍(王羲之風)의 유려하고 아름다운 해서보다는 함축성 있는 고아한 서풍이 축윤명다운 서법일 것이다.

악부(岳父) 이응정은 구양순(歐陽詢)과 안진경(顔眞卿)을 스승으로 하여 당시 중국에서도 으뜸의 대가로 일컬어졌지만 축윤명의 지향한 바는 한층 높은 곳에 있었으며, 장인보다 오히려 축윤명의 편이 낫다고 하는 이가 많다.

생전에는 축윤명의 서는 광초의 편이 더 우대 받았던 것 같다.

외조부 서유정은 초서의 명수로서 이름이 높았으며 그의 서예적 기반은 회소(懷素)에 있다고들 말한다.

축윤명이 분방한 광초를 보다 즐긴 데는 물론 그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성격에서 오는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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