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58. 동년첩(宋ㆍ李建中)

2012. 6. 7. 09:42서예일반

 

58. 同年帖(宋ㆍ李建中)

 

이 첩은 송나라 이건중(李建中)이 쓴 것이다.

이건중(李建中, 945-1013)의 자는 득중(得中)이고 호는 암부민백(岩夫民伯)이며, 경조(京兆, 지금의 陝西省 西安) 사람이다. 태평흥국 8년(983)에 진사 갑과에 합격하여 태상박사(太常博士)ㆍ직집현원(直集賢院)을 지냈다가 전부원외랑(全部員外郞)ㆍ공부랑중(工部郞中)에 올랐다. 성정이 조용하고 풍신이 우아하고 수려했으며 영리에 담담했다. 일찍이 서경유수어사대(西京留守御史臺)를 지냈기 때문에 역사에서 ‘이서대(李西臺)’라 부른다. 낙양 풍토를 좋아하여 정원과 연못을 만들어 서재의 이름을 ‘정거(靜居)’라 했고, 시를 즐겨 읊어 ‘암부민백(岩夫民伯)’이라 했다. 글씨를 잘 썼고 모든 체에 능했으며 특히 행서에 뛰어났다. 일찍이 곽충서(郭忠恕)에게 『한간집(汗簡集)』을 과두문자로 써서 바쳐 조서로 칭찬을 받았다.

<동년첩(同年帖)>은 행서 묵적본인 서찰로 15행에다 134자를 썼다. ‘항자경가진장(項子京家珍藏)’ㆍ‘동산(東山)’ㆍ‘무양(無恙)’이라는 감장인이 있으며 『이서대육첩권(李西臺六帖卷)』의 하나이다.

이 첩을 보고 송조(宋曹)는 『서법약언(書法約言)』에서 “포치는 마음을 운용하는 데에서 근본하고, 신채는 운필에서 나온다[布置本乎運心, 神采生于運筆].”라고 개괄했다. 이서대는 구양순 필의를 얻었기 때문에 이 첩의 용필은 웅장하고 착실하면서 두텁고 힘이 굳세며 밖은 둥글고 안은 모나며 신채가 생동하다. 자형으로 보면, 먹이 방종하면서 남음이 있고 살찌기고 파리함이 조화를 이루며, 가볍고 무거움이 마땅함을 얻었다. 기운으로 보면, 글자가 연결되지 않으면서도 기맥이 서로 통하고 필세가 유창하고 둥글게 전환하여 모든 것이 자연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조용하고 서두르지 않으면서 교만과 사납거나 바쁜 자태가 없이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아 스스로 얻은 형상이 있다고 하겠다. 고삽(苦澁)과 농담이 매우 천진난만하나 평담한 가운데 오히려 순수하고 예스러운 맛을 함축하고 있어 가히 ‘중화’와 ‘자연’의 미를 얻었다고 하겠다. 송나라 사람은 행서로 뛰어났고 개성이 선명하나 때때로 습기를 띠기도 했다. 그러나 이서대는 기울고 쏠린 형태가 없기 때문에 조맹부는 그의 글씨를 “이서대의 글씨는 당나라에서 떨어짐이 아직 멀지 않아 오히려 당나라 사람이 남은 풍격이 있다[西臺書去唐未遠, 猶有唐人餘風].”라고 했다.

이서대의 글씨에 대해 소식은 조금 낮은 평가를 하며 “격과 운치가 낮고 탁하다[格韻卑濁].”라고 했으나, 이 첩을 자세히 보면 소식의 평가는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이보다는 오히려 황정견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더욱 공정한 것 같다.

 

이건중은 무리에서 뛰어난 사람으로 글씨는 살쪘으나, 군더더기가 없어 마치 세상의 미녀가 살이 통통하면서도 기운은 맑고 빼어난 것과 같다.……이건중은 마치 참선을 하는 승려와 같다. 그의 글씨에는 필의가 있어 마치 선가의 경전 중에 규율이 있는 것과 같다.

西臺生群拔萃, 肥不剩肉, 如世間美女, 豊肌而神氣淸秀者也.……建中如講僧參禪. 其字中有筆, 如禪家句中有律.

 

이를 보면, 행서의 발전은 이건중 때에도 아직 위ㆍ진의 맥락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서대 글씨에 대해 폄하하는 사람은 ‘상비(傷肥)’를 지적하는데, 황정견도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첩과 <토모첩(土母帖)>을 보면, 실제 ‘상비’라는 평가가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글씨와 행간에서 그 사람의 우아하고, 평화롭고, 중후하고, 온유한 풍격이 흘러 나옴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소식이 “짧고 길고 살찌고 파리함이 각각 자태가 있으니, 양귀비의 살찜과 조비연의 파리함에 누가 감히 염증을 내겠는가[短長肥瘦各有態, 玉環飛燕誰敢憎]?”라고 한 말로 그의 글씨를 총결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그의 글씨를 좋아하는 것으로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감상은 천년의 검증을 거쳐야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이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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