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맹부와관도승

2012. 6. 6. 11:52서예가

글씨의 대가로 널리 알려진 조맹부(趙孟頫)는 부부가 낚시를 좋아하였다. 그들의 고향은 호주(湖州) 오흥(吳興)(지금의 절강성 오흥)사람으로, 주변에 강과 호수가 많아 자연히 낚시를 하며 자랐을 것이다.

조맹부(1254∼1322)는 자가 자앙(子昻), 호가 송설(松雪), 별호가 구파(鷗波) 수정궁도인(水晶宮道人) 등이다. 그는 송대 황족의 혈족이지만 원대에 와서 상서성(尙書省) 병부랑중(兵部郞中) 집현전학사 한림학사승지영록대부 등 관직이 일품에 이르렀고, 만년에는 우국공(魏國公)에 봉해졌고, 관부인도 위국부인에 봉해졌다.

그의 서법은 세상에서 ‘조체(趙體)’라 불렸고, 당시에 ‘神品’이라 불렀다. 그는 회화에도 조예가 뛰어나 그림에 ‘옛스런 내용(古意)’을 담으려고 하여 화단의 영수로써 그 원대사대가는 물론 명·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조맹부의 부인 관도승(管道昇)(1262∼1319)은 재주를 갖춘 여자였다. 그녀는 자가 중희(仲姬), 원대의 저명한 서법가 화가 문학가이며, 세상에서 ‘관부인(管夫人)’이라 부른다. 그녀가 조맹부에게 시집온 뒤로 그와 이름을 나란히 하였는데, 서화예술의 성취가 시사창작의 성취를 덮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 조맹부의 글씨

그녀에게 <어부사(漁父詞)>4수가 전하는데, 문학사상 제법 명성이 있다. 그들 부부에겐 시서화 등 같은 길을 걷는 동료로서, 그들의 만남에서, <어부도(漁父圖)>를 그려서 시를 쓰며 문답하는 고사, 부부간의 애틋한 정을 노래한 고사가 있어 소개할까 한다.

관도승은 불교신자여서, 호주의 첨불사(瞻佛寺)에 가서 향을 태우곤 하는데, 절의 스님이 그녀의 명성을 듣고, 그림 한 폭을 부탁하였다. 그녀는 거절하지 못하고 절의 동쪽벽에 거대한 <수죽도(修竹圖)>를 그려주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 그림을 구경하였고, 마침내 조맹부의 귀에까지 소문이 퍼졌다.

조맹부는 “재기가 출중하고, 풍채가 훤하여 마치 신선같은 사람이었다.”(≪원사(元史≫) 직접 가서 보니, 대나무가 조밀한 가운데서도 성기고, 어린 대나무나 오래된 것이나 정말 기묘하였다. 그리하여 관도성이 28살에 조맹부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또는 집안끼리 중매로 결혼하였다는 설이 있음)

관부인은 <어부도>를 그리고, 그 그림에 시를 적었는데, 이것이 <어부사>4수 중 네 번째 사다.

人生貴極是王侯(인생귀극시왕후), 인생에 아주 귀한 것은 왕후가 되는 것이네,
浮利浮名不自由(부리부명부자유). 부질없는 명리는 자유롭지 못하다네.
爭得似․一扁舟(쟁득사․일편주). 다투어 비슷하게 얻더라도, 하나의 일엽편주,
弄月吟風歸去休(농월음풍귀거휴). 음풍농월하며 돌아가 쉬네.

조맹부가 그 시를 읽고나자,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 곧장 이 시에 화답하여,

渺渺煙波一葉舟(묘묘연파일엽주), 넓고 넓은 안개낀 파도 속 일엽편주,
西風未落五湖秋(서풍미락오호추). 서풍이 아직 불지도 않은 五湖의 가을
盟鷗鷺․傲王侯(명구로․오황후). 鷗波선생 해오라기와 짝하여, 왕후에게 오만하고.
管甚鱸魚不上鉤(관심노어불상거). 관도승은 농어에게 낚시바늘 물지 못하게 하네.
*셋째구 鷗는 조맹부의 자가 鷗波이기에 조맹부로 해석하였고(갈매기와 해오라기가 짝하여로 해석해도 무방함), 넷째구 管은 관도승으로 새김(농어를 단단히 관리하여로 새겨도 무방함)

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시는 같은 <어가자(漁歌子)>란 곡조에 사를 지었고, 비슷한 내용이기에 이 시의 작자가 관도승인지, 조맹부인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 화답사에 얽힌 또 다른 고사가 있다.

조맹부가 일품관직에 오른 뒤, 한번 낚시를 다녀온 뒤에 <어부도>를 그리고서, 이 시를 지었다. 관도승이 그림과 시를 감상하고, <어부사>4수를 지었다고도 한다. 또 다른 고사는 조맹부는 송대 황족의 혈통이면서 관직을 거부하지 않았기에, 원(元)에 항거한 많은 사대부들에게 무시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관부인은 원의 황실에 초청을 받았는데, 황후와 비빈들이 그녀에게 가르침을 구하여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강의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지금의 현실생활이 황당하고 바보스럽다고 느껴, 단숨에 <어부사>4수를 지었다고 한다.

그들의 화답시 만큼이나 부부의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고사가 또 있다. 조맹부가 대도(大都)(지금의 북경)에서 퇴근을 하는데, 마침 가마가 없어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어떤 가마 속에 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자는 바로 최운영(崔雲英)으로, 얼마전 잔치자리에서 노래를 잘못 불러 낭패를 당한 것을 조맹부가 모면하도록 도와 주었고, 새 노래까지 주어서 명성을 얻게 된 가희(歌姬)였다. 그녀는 그를 자신의 집으로 모셔서, 옛날의 은혜를 갚았고, 이로 인해 연정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는 결혼한지 10년이 지난 시점으로, 젊었을 때 조맹부가 “천부적인 자태는 명랑하고, 덕스런 말과 아름다운 용모를 하나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평했던 관도승도 차츰 미모를 잃어가고, 신혼의 열정도 식어가는 무렵이었다. 아울러 당시 전통사대부는 축첩을 당연한 일로 여겼고, 부인은 이를 시기해서는 안되는 시절이었지만 조맹부는 부인에게 차마 함부로 이 일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를 지어 “나는 학사고 당신은 부인이오. (王)학사에게 도엽(桃葉) 도근(桃根)이 있고, 소(蘇)학사에게는 조운(朝雲) 모운(暮雲)이 있다는 소리를 어찌 못들었겠소? 나는 곧 몇 명의 오희(吳姬) 월녀(越女)를 얻을 것이오. 당신은 이미 나이가 40이 넘었으니 나의 심신을 독점하려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왕학사는 왕안석을, 소학사는 소동파를 넌지시 빗대어 말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관도승은 그 속이 어떠했겠는가? 그렇지만 당시로선 약하기 그지없는 여자의 신분이었고, 당시 삼처사첩(三妻四妾)하는 사회환경에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자신의 심정을 읊은 <아농사(我儂詞)>를 지어서 보여주었다. “당신과 저, 대단히 정이 많아, 정이 많은 곳엔, 열정이 불붙지. 한줌 진흙으로 당신하나 빚고, 저하나 만드네. 갑자기 즐겁구나, 앞으로 우리 둘이 함께 허물어지겠지. 다시 새롭게 물을 부어, 다시 이기고, 다시 반죽하고, 다시 조화를 만드네. 다시 당신하나 빚고, 다시 저 하나 만드네. 내 진흙 속에 당신이 있고, 당신 진흙 속에 내가 있고, 저와 당신 살았생전 한 이불을 덮었으니, 죽어서도 같이 하나의 관속에 들어갔으면.” 이 사를 읽고난 조맹부는 자신을 기다리며 <有所思>를 지어 보낸 최운영에게 어쩔 수 없는 단절의 회신을 보냈다.

관도승이 58세때 그들 부부는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배를 타고 임청(臨淸)에 이르렀을 때, 관도승은 각기병이 도져서 죽었다. 조맹부는 겨우 그녀의 관을 끌고 호주의 고향에 돌아왔고, 그 또한 3년 뒤에 죽어서 절강성 덕청현(德淸縣) 동형산(東衡山) 남쪽 기슭에 합장되었으니, 그녀가 말한 ‘죽어서도 같이 하나의 관속에 들어갔으면’이라던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진 셈이다.

조맹부와 관도승의 아름다운 고사는 부부로서 같은 취미를 가지고 수준높은 능력을 지녔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여기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넌지시 애둘러 말하는 그들의 행동에서 그들의 작품만큼 인품 또한 높았음을 느낄 수 있다.

글씨와 그림 또한 손끝에서만 나오는 것보다야 깊은 인품이나 학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더욱 높은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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