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성혼졸기

2012. 3. 4. 23:25알아두면 조은글

선조실록 1584년 1월 16일자 기사


吏曹判書李珥卒。

이조 판서 李珥가 卒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84년 1월 1일자 기사


吏曹判書李珥卒。 

이조 판서 李珥가 卒하였다. 


 

珥自爲兵判, 盡瘁成疾。 

이이는 병조 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병이 생겼는데, 

至是疾甚, 上委醫救藥。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어 이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하였다. 

時, 徐益以巡撫御史, 赴關北, 

이때 徐益이 巡撫御史로 關北에 가게 되었는데, 

上令就問邊事。 

상이 이이에게 찾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하였다. 

子弟以爲: “病方少間, 不宜勞動, 請辭接應。” 

자제들은 병이 현재 조금 차도가 있으나 몸을 수고롭게 해서는 안 되니 접응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珥曰: “吾此身, 只爲國耳。 

그러나 이이는 말하기를,“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正復因此加重, 亦命也。” 

만약 이로 인해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하고, 

强起延待, 口號六條方略以授之, 

억지로 일어나 맞이하여 입으로 六條의 方略을 불러주었는데, 

書畢而氣塞, 復甦踰日而卒。 年四十九。 

이를 다 받아 쓰자 호흡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더니 하루를 넘기고 졸하였다. 향년 49세였다.


上驚悼, 發聲哀哭, 

상이 이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소리를 내어 슬피 통곡하였으며 

進素膳三日, 恤典加厚。 

3일 동안 素膳을 들었고 위문하는 은전을 더 후하게 내렸다. 

百官僚友、館學諸生、衛卒市民、

백관의 僚友와 館學의 諸生, 衛卒·市民, 

流外庶官、吏胥僕隷, 皆奔集奠哭。 

그 밖의 庶官·吏胥·僕隸들까지도 모두 달려와 모여 통곡했으며, 

窮閻小民, 往往相弔出涕曰: “民生無福矣。” 

궁벽한 마을의 일반 백성들도 더러는 서로 위로하며 눈물을 흘리며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기도 하다.’ 하였다. 

發靷之夜, 遠近會送, 炬火燭天, 數十里不絶。 

발인하는 날 밤에는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여 전송하였는데, 횃불이 하늘을 밝히며 수십 리에 끊이지 않았다. 

珥京中無宅, 居家無餘粟。 

이이는 서울에 집이 없었으며 집안에는 남은 곡식이 없었다. 

親友襚賻殮葬, 且爲買小宅, 以與其家屬, 

친우들이 襚衣와 賻儀를 거두어 염하여 장례를 치룬 뒤 조그마한 집을 사서 가족에게 주었으나 

家屬猶不能存活。 有庶子三人。

그래도 가족들은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庶子 세 사람이 있었다.

【夫人盧氏, 死於壬辰倭難, 命旌其門。】  

【부인 盧氏는 임진 왜란 때에 죽었는데 그 문에 旌表하게 했다.】


珥字叔獻, 號栗谷。 生而神異, 廓然有大志。 

이이의 자는 叔獻이고 호는 栗谷이다. 나면서부터 神異하였고 확연히 큰 뜻이 있었다. 

聰明夙慧, 七歲已能通經, 著書。 

총명하여 지혜가 숙성해 7세에 이미 經書를 통달하고 글을 잘 지었다. 

至性孝順, 十二歲父病, 刺臂出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12세 때 아버지가 병들자 팔을 찔러 피를 내어 드렸고 

泣禱先祠, 父病卽瘳。 

조상의 사당에 나아가 울면서 기도하였는데 아버지의 병이 즉시 나았다. 

爲學不事雕篆, 而文章夙成, 名聞四方。 

학문을 하면서 문장 공부에 힘쓰지 않았어도 일찍부터 글을 잘 지어 사방에 이름이 알려졌다.


因喪母悲毁, 誤染禪學,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비탄에 잠긴 나머지 禪學에 잘못 물들어 

十九歲入金剛山, 從事戒定,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佛道를 닦았는데, 

山中譁言: “生佛出矣。” 

승려들 간에 生佛이 출현했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旣而省悟其非, 反而專精正學, 

그러나 얼마 후 잘못된 행동임을 깨닫고 돌아와 正學에 전념하였는데, 

不待師承, 洞見大原, 剖析精微, 篤信力行。 

스승의 지도없이 道의 큰 근본을 환하게 알고서 정미하게 분석하여 철저한 신념으로 힘써 실행하였다.


登第之後, 屢辭淸顯,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淸顯職을 여러 번 사양하였으며, 

不欲小用其道, 退居海州山中, 講學授徒, 

그 를 작게 쓰고자 아니하여 해주의 산중으로 물러나 강학하며 후학을 가르쳤다. 

建隱屛精舍, 祠祀朱子, 配以靜菴、退溪, 以爲矜式地。 

이에 隱屛精舍를 세워 朱子를 祠祀하며 靜菴·退溪선생을 配享하고 본보기로 삼았는데, 

其出處、辭受, 一以古人自律。 

나아가고 물러남과 사양하고 받아들이는 일을 한결같이 옛 사람이 하던 대로 하는 것을 스스로의 규범으로 삼았다.


少慕張公藝九世同居, 常揭圖看玩。 

어려서부터 張公藝가 9대가 모여 산 것을 사모하여 항상 그림을 걸어놓고 완미하였는데, 

至是請伯嫂奉神主同居, 

이때에 맏 형수에게 함께 神主를 받들어 살기를 청하여 모시고 

大會叔仲子姪, 與同衣食, 

아우과 子姪을 모아 衣食을 함께 하면서 

歲時、朔望晨朝, 展告謁拜, 一遵《家禮》。 

歲時와 초하루 보름에는 이른 아침에 찾아 배알하는 등 한결같이 《朱子家禮》대로 하였다.


下逮婢僕, 參謁出入, 具有禮式, 

아래로 婢僕에 이르기까지 參謁하고 출입하는 데 모두 예식이 있었는데 

別作訓辭, 諺譯敎訓, 閨門如官府。 

별도로 訓辭를 만들어 한글로 번역해서 가르쳤으며 그 閨門이 마치 관청같았다. 

會食一堂, 絃歌游處, 皆有禮節。 

한 집에 모여 식사하고, 연주하고 노래하며 놀 때에도 모두 예절이 있었다. 

雖當世之號爲講禮, 致謹喪祭者, 至於家敎之禮, 皆莫能及。 

당대의 예의를 연구하여 가정 교육의 예절에 있어서는 喪禮와 祭禮에 극진하다고 이름난 사람이라도 따를 수가 없었다. 

每慟早孤, 事仲兄如事嚴父, 服勤不懈; 

매양 아버지를 일찍 여읜 것을 슬퍼하여 아버지 섬기듯 仲兄에게 성심과 성의를 다하고 게을리함이 없었다. 

事庶母如事母, 溫凊定省。 

그리고 庶母를 친어머니 섬기듯이 하여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보살폈으며 저녁과 아침마다 정성으로 문안드렸다. 

俸祿亦不自專, 

녹봉 또한 마음대로 쓰지 않았는데, 

學者規以非禮則珥曰: “我自意見如此, 不足爲法也。” 

학자들이 그것은 禮가 아니라고 하자, 이이는 말하기를, “내 의견이 그러할 뿐인데, 본보기가 될 수는 없다.”하였다.


立朝事上, 竭忠盡力, 雖退處田里, 惓惓不忘。 

조정에 나아가서는 위를 섬김에 있어 갈충 진력하였으며 시골에 물러나 있을 때에도 애타는 심정으로 잊지 못하였다. 

前後封章面奏, 切直懇惻, 

전후에 걸쳐 올린 封章과 면대하여 아뢴 말들을 보면 그 내용이 간절하고도 강직한데, 

其論治體, 規模高遠, 以挽回三代爲期。 

治體를 논함에 있어 규모가 높고 원대하여 三代의 정치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見國勢衰靡, 灼知亂兆, 

國勢가 쇠하여 난리의 조짐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는 

常以格君、正俗, 和一朝廷爲本領, 

항상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조정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고, 

而以更弊政、救生民、增修武備爲急務, 

폐정을 고치고 생민을 구제하고 武備를 닦는 것을 급무로 삼았다. 

反覆論列, 終始一意, 雖被小人、俗流排沮, 而不少恤。 

그리고 시종 일관 한 뜻으로 반복하여 이를 논계하였는데, 소인이나 속류가 배척해도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上始加裁抑, 

임금도 처음에는 견제하였으나 

晩復契合, 寵任方隆, 而遽卒矣。 

늦게나마 다시 뜻이 일치되어 은총과 신임이 바야흐로 두터워지고 있는 때에 갑자기 졸한 것이다.


珥資稟甚高, 充養益厚, 

이이는 타고난 기품이 매우 고상한데다가 수양을 잘하여 더욱 높은 경지에 나아갔는데, 

淸明和粹, 坦易英果。 

청명한 기운에 온화한 분위기가 배어나오고 활달하면서도 과감하였다. 

待人處物, 一出於誠信, 

어떤 사람이든 어떤 상황이든 한결같이 정성되고 신실하게 대하였으며, 

恩嫌愛惡, 一毫不以介意, 

은총과 사랑을 받거나 오해나 미움을 받거나 털끝만큼도 개의치 않았으므로 

人無愚智, 無不歸心。 

어리석거나 지혜있는 자를 막론하고 마음으로 그에게 귀의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由其急於濟時, 

한 시대를 구제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기 때문에 

旣退復進, 以保合士類爲己任, 

물러났다가 다시 조정에 나와서도 사림을 保合시키는 것을 임무로 삼아 

盡言無私, 左右觸忌, 

사심없이 할 말을 다하다가 주위로부터 꺼리는 대상이 되었는데, 

遂爲黨人所仇, 幾不免大禍。 

마침내 黨人에게 원수처럼 되어 큰 화를 면치 못할 뻔하였다. 

其論薦人物, 必以學問、名檢爲主, 

이이는 인물을 논하고 추천할 때 반드시 학문과 명망과 품행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故飾僞偸合者, 後多背貳。 

진실되지 못하면서 빌붙으려는 자들은 나중에 많이 배반하였다. 

以此, 流俗之論, 指爲疎闊, 

그래서 세속의 여론은 그가 현실에 너무 어둡다고 지목하였다.


然珥沒後, 偏黨大勝, 克去一邊, 謂爲朝廷已正, 

그러나 이이가 죽은 뒤에 편당이 크게 기세를 부려 한쪽을 제거하고는 조정을 바로잡았다고들 하였는데, 

而中自睽乖, 四分五裂, 竟爲國家無窮之禍。 

다시 그 내부에서 알력이 생겨 사분 오열되어 마침내 나라의 무궁한 화근이 되었다. 

至于壬辰之亂, 封疆自潰, 國遂以傾, 

그리하여 임진 왜란 때에 이르러 강토가 무너지고 마침내는 나라가 기울어지고 말았는데, 

凡珥平日預慮而先言者, 無不符驗。 

앞서 이이가 미리 염려하여 평소에 말했던 것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其所建請便宜之策, 頗見追思, 採用國論, 

그래서 그가 건의했던 각종 便宜策들이 추후에 다시 채택되었는데, 

民言皆誦: “其道德忠義之實, 有不可枉者矣。” 

민언(民言)이 모두 ‘이이는 도덕과 충의의 정신으로 꽉 차 있어 흠잡을 수 없다.’고 칭송하였다.


所著有《文集》及《聖學輯要》、《擊蒙要訣》、《小學集註改本》, 行于世。

저서로 문집과 《聖學輯要》·《擊蒙要訣》·《小學集注》 개정본이 세상에 전해 온다.


선조실록 1598년 6월 7일기사


前贊成事成渾卒。

전 贊成事 成渾이 卒하였다. 

【早有隱士之名, 而晩醉功名。 

【일찍이 隱士라는 명성이 있었으나 만년에는 공명에 빠졌다. 

至於己丑之變, 不救李潑、李洁、白惟讓之獄, 

기축년의 변고에는 李潑·李洁, 白惟讓의 獄事를 구해주지 않았으며, 

又坐視崔永慶之死而不救。 

또 崔永慶의 죽음도 그대로 보기만 하고 구해주지 않았다. 

一時之人皆惡之, 以其與奸澈同惡故也。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미워하였는데, 그것은 간사한 鄭澈과 나쁜 일을 함께 하였기 때문이었다. 

嗚呼, 惜哉!】

아, 애석한 일이다. 】


선조수정실록 1598년 6월 1일기사


前議政府右參贊成渾卒。 

전 議政府右參贊 成渾이 졸하였다. 

渾字浩原, 守琛之子也。 

성혼의 字는 浩原이니 成守琛의 아들이다. 

守琛有高世之操, 隱居講道, 世稱聽松先生。 

수침은 세상에 높이 빼어난 지조가 있어 은거하면서 道를 강론하여 세상에서 聽松先生이라고 일컬었다. 

渾天分甚高, 德器早成, 自童幼時, 服膺庭訓, 

혼은 천성이 매우 고매하여 일찍 德器를 이루어 어릴 때부터 가정의 교훈을 익혔고, 

又嘗尊慕李滉, 而私淑焉。 

또 일찍이 李滉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私淑하였었다.


其爲學, 以考亭爲準, 

그의 학문은 고정(考亭)을 기준으로 하여, 


則講明踐履, 交致其功, 而於本源之地, 尤慥慥焉。 

아울러 강론하여 밝히고 실천하는 데에 힘써 本源의 바탕에 더욱 독실하였다. 

與李珥論四端七情, 理氣先後之說, 往復累千萬言, 

李珥와 더불어 四端七情과 理氣의 先後에 대한 설을 수천 마디 주고 받았는데, 

多有儒先所未發者。 

先儒들이 밝히지 못했던 것이 많았다. 

李珥嘗稱曰: “若論見解所到, 吾差有寸長, 

이이가 일찍이 ‘만약 견해의 우월을 논하자면 내가 약간 나을 것이나 

操履敦確, 吾所不及。” 云。 

행실이 돈독하고 확고한 것은 내가 따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初以學行被蔦, 屢以職召, 皆不就, 

처음에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되어 여러 번 관직을 내려 불렀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으니, 

上眷遇愈重, 召之不已。 

상의 후대함이 더욱 중하여 부르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었다. 

渾力辭不獲, 雖間或赴都, 

혼은 힘써 사양하여도 되지 않아 간혹 서울에 왔으나 

恒無久意, 歷計立朝日月, 不滿一歲。 

항상 오래 머물 뜻이 없어 조정에 있는 날짜를 합하여도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壬辰之亂, 爲李弘老所構陷, 上眷寢衰, 遂不復赴召。 

임진년 난리 때 李弘老의 모함을 받아 상의 우대가 쇠미해지자 드디어 다시는 부름에 응하지 않다가 

至是卒于坡山舊居, 學者稱爲牛溪先生。

이때에 이르러 坡山의 옛 집에서 졸하였다. 학자들이 牛溪先生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