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7. 11:53ㆍ알아두면 조은글
독립운동가ㆍ유학자 김창숙
독립운동가ㆍ유학자. 자 문우(文佑). 호 심산(心山). 본관 문소(聞韶). 경북 성주(星州) 출생. 호림(頀林)의 아들이다. 곽종석(郭鍾錫)ㆍ이승희(李承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유학을 배워 조예가 깊었으며, 1909년에 성명학교(星明學校) 설립, 을사오원흉매국성토(乙巳五元兇賣國聲討) 상소사건(上疏事件)으로 체포되었으며,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해외망명을 결심하고 유림(儒林) 대표들이 서명한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유림단(儒林團) 진정서를 가지고 생해로 건너가 우송(郵送)한 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1921년 국내에서 광복운동 자금을 모으다가 경찰에 피체(被逮), 1922년에 북경에서 신채호(申采浩)와 같이 독립운동지 [천고(天鼓)]를 발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 손문(孫文)으로부터 광복운동 기금을 원조 받았고, 1925년에는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는 등 광복운동에 분투하다가 1927년 상해 일본 영사 관원에게 체포되어 14년 형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8ㆍ15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議員)을 지내는 한편 유도회(儒道會)를 조직, 재단법인 성균관(成均館)과 성균관대학을 창립, 초대 학장에 취임하여 사학(私學) 육성에도 힘썼고, 6ㆍ25 후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 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 국제구락부 사건으로 이시영(李始榮)ㆍ조병옥(趙炳玉) 등과 같이 테러를 당하기도 하며 끝끝내 이승만 정부와 투쟁하였다.
노병(老病)으로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병사, 사회장(社會葬)으로 장사지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받았다. (이홍직 : <국사대사전>)
【합방당시의 처신】
조선의 멸망에 대한 원인규명을 하다보면 ‘노론’이라는 당파가 나라를 망하게 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을사조약을 살펴보면 일본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들은 모조리 노론계열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노론 출신 중에서 역사의 체면을 살려준 이가 심산 김창숙이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없었다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서 유교는 지배적 사상이었으나 유학자였던 양반 사대부들은 국망(國亡)에 무심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한 76명의 한국인들은 모두 양반 유학자였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는 이완용·송병준 등과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李載完), 순종의 장인 윤택영(尹澤榮), 명성황후의 동생 민영린(閔泳璘) 등이 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전한다. 이때 일제는 1700여만원의 임시은사금을 지배층들에게 내려주었는데, 김창숙은 <자서전-벽옹(躄翁·앉은뱅이 노인) 73년 회상기>에서 “그때에 왜정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창숙은 유림으로서 독립운동에 나선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리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일진회가 한일합병론을 제창할 때는 동지를 규합하여 중추원에 그들을 토역(討逆)하는 글을 보내는 한편,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여 계급타파를 부르짖고, 단연회(斷煙會)의 기금으로 1909년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창립, 신교육을 시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어머니의 교훈에 따라 유학에 정진하였다. 유학적 소양과 한학의 조예는 주로 이 시기에 기반이 닦여졌다.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130여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제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유림단사건’이다.
【독립운동】
1924년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에 황무지를 조차(租借)개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기지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그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조달문제로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운동을 전개하다가 탄로 나자, 거듭 출국하는 이른바 ‘제2차유림단사건’을 일으켰다. 그 기간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그 내부의 파쟁조정에도 힘썼다. 자신의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손문(孫文)을 비롯한 중국 국민당의 인사들과 교류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한국독립후원회와 한중호조회(韓中互助會)를 결성하게 하는 데 공헌하였다.
특히, 망명한 한국청년들의 교육에 힘써 능월(凌越)·오산(吳山) 등의 도움을 받아 50여명의 학생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영어·중국어 강습을 받도록 주선하였다. 독립운동을 고양하기 위하여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를 발행하였고,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협력하여 [사민일보(四民日報)]도 발간하였다. 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1927년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의 영국인 병원에서 일본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어, 그 뒤 14년의 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옥중투쟁과 일본경찰의 고문에 의한 두 다리 마비로 형집행정지를 받아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에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유림활동과 반독재운동】
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의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여부의 문제 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썼다.
1946년 봄 전국유림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유도회(儒道會)총본부위원장으로 선출되고, 성균관장을 겸임하였다. 이어 유교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실시하고자 성균관대학기성회를 결성하였다.
이석구(李錫九)로부터 재단법인 학린회의 토지재산을 기부 받고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병합하여 1946년 9월 25일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인가받았다. 초대학장에 취임하여 타 대학에서는 볼 수 없는 유학개론을 교양필수과목으로 선정하였다. 또한,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고, 김구(金九)와 함께 민족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승만 정권 때는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6ㆍ25남침 이후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된 적이 있고, 1952년 부산의 정치파동 때에는 이시영(李始榮)ㆍ조병옥(趙炳玉)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끝끝내 이승만 정권과 투쟁하였다.
1953년 2월 6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5년 재단 내 분규로 사임하였다.
1962년에 사망하자,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 김창숙의 생가. 그는 말년에 집 한 칸도 없이 여관과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사진/ 권태균)
【시문집】<심산만초><벽옹만초>
【자서전】<심산유고(心山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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