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선말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

2012. 1. 7. 11:50알아두면 조은글

조선말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

 

1762년(영조 38년)6월 16일, 경기도 광주 마현리에서 진주 목사 정제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처음 이름은 귀농이었으며, 호는 다산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이 바뀌어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마현리 이다) 마현리를 '마재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1770년 9세때 어머니가 돌아가심.

1776년 15세때 정조가 왕이 되자 아버지가 호조 좌랑에 올랐으며, 홍화보의 딸과 결혼하였다. 매형 이승훈의 영향으로 실학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으며, 천주교를 믿었다.

1783년 22세에 회시라는 과거에 3등으로 합격함.

1789년 28세,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 벼슬을 받았다.

1790년 29세에 예문관 검열에 올랐으나, 천주교를 믿은 죄로 충청도 해미로 귀양갔으나, 정조임금의 어명으로 열흘만에 풀려남.

1792년 31세에 영의정 체제공의 천거로 수원성 쌓는 일을 맡아 1792년에 시작하여, 1794년에 완성하였다. 우리 나라 처음으로 '유형거와 '거중기를 사용하여, 훌륭하고 튼튼한 성을 완성하였으며, 그전 방법 보다 돈도 적게 들고, 인원도 적게 동원되고, 기간도 단축되었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탐관 오리인 연천 현감 서용보를 파면시켰으며, 황해도 곡산 부사로 부임하여, 그후 병조 참지가 되어 한양으로 왔다.

1801년 40세에 신유박해 때 경상도 장기로 귀양간후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가 그때부터 18년동안 귀양살이를 하며 많은 책을 저술한다.

1817년 56세에, 40권이나 되는 <경세유표>를 비롯하여 <대학회의>, <민보의>, <맹자요의>등을 쓴다.

1818년 57세에 목민심서 48권을 쓴다. 18년간의 귀양에서 풀렸으며, 다음해 <흠흠심서> 30권을 완성하였다. 목민심서는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대하여 자세히 써 놓은 책이며, 자기가 목민관으로서 보고 느낀 것을 백성의 입장에서 정확히 기록한 책이며, 오늘날의 공무원 지침서와 같은 귀중한 내용이다.

1836년 2월 22일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일생 동안 쓴 책이 500여 권이며, 시 2,460여 편을 남겼다.

 

◈ 정약용의 성장과정

 

정식으로 이름 짓기 전에는 '귀농'이라 불렀으며, 나중에 정식으로 '약용'이라 지었다.

귀농이 자란 마재 마을 앞으로 큰 강이 흘렀으며, 이 강이 지금의 서울 한라운데로 흐르는 한강이다. 마을의 동쪽에 있는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 물이 합쳐졌으며, 합쳐진 물줄기는 마재 마을을 감싸고 휘돌아 서쪽에 있는 팔당을 거쳐 한양으로 흘러 갔다. 강은 매우 컸으며, 넓은 모래밭과 긴 강줄기가 마을과 산을 휘돌아 흘렀습니다.

귀농은 늘 강가에 나가 개구쟁이 친구들과 함께 놀았으며, 흘러드는 작은 개울에서 친구들과 멱을 감고 고기도 잡았으며, 달리기와 씨름도 하였으며, 비석 치기를 하거나 탑을 쌓으며 놀았지만 귀농이는 늘 놀기만 한것이 아니었다. 형들이 아버지로부터 글공부르 배우는 것을 보고 샘이 나서, 어깨 너머로 따라 배웠다. 서툴었지만 붓을 들고 글자 쓰는 것도 흉내 내었다.

글씨 연습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큰형인 약현, 둘째형 약전, 셋째형 약종과 함께 글을 가르쳤다. 늘 엄하게 공부한 귀농은 일곱 살이 되자 제법 한문으로 시를 지을 수 있었다. 철이 들면서 차츰 책을 가까이 했으며, 노는 것보다 집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제 이름도 '약용'으로 많이 불렀다. 아버지는 다시 벼슬길에 나가에 되었으며, 경기도 연천 현감으로 부임받아 식구들도 함께 가게 되었다. 아버지는 축하해 주러 모인 친구들에게 정약용의 글 짓는 솜씨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사랑방으로 불렀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거리의 멀고 가까운 이치로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였다. 모두들 감탄하였다. 그날부터 더욱 열심히 책을 읽고 글씨를 썼으며, 때로는 마을 앞 강가에 나가 자기가 읽은 글을 큰 소리로 외워 보기도 하였다.

정약용이 아홉살 되던해 가을 병석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해 아버지는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가족은 다시 마재로 돌아왔다.

 

정약용은 어머니가 생각날 때면 말없이 시를 지었다. 열 살이 되자 꽤 많은 시가 모였다. 아버지께서 '약용'이 지은 시들을 모아 한 권의 시집을 만들어 이름을 지으려 하였다. 큰 아들 약현이 '삼미집'이라고 하자고 하였다. 약용은 천연두를 앓아 눈썹이 몇 개 없는 것처럼 보여, 눈썹이 세 개밖에 없다는 뜻으로 '삼미'라고 불렸다고 한다.

'삼미집'을 읽어 본 사람들은 조선에도 중국의 두보나 이태백만큼 훌륭한 시인이 나왔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책읽기를 좋아하던 정약용은 외할머니 댁으로 책을 빌리러 다녔다. 외가는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이며 시인이었던 윤선도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보고 싶은 책이 많았다.

어느날 정약용은 읽은 책을 나귀 등에 싣고 외가에 돌려주러 가는길에 양평에 사는 이서구라는 사람을 만났다.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우의정까지 지냈던 대학자이다.

며칠 전에도 책을 나귀에 싣고 갔는데, 책을 좋아하는 것을 보니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이서구가 정약용을 불렀다. 이서구는 책 몇권을 빼서 내용을 이것저것 물었다. 정약용은 막힘 없이 모두 대답하였다.

결혼을 일찍 하는 옛날 풍습대로 열다섯 살에 장가를 갔다. 부인은 승지 홍화보의 딸이었으며, 예의바르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정약용이 장가가던 해에 52년간 나라를 다스리던 영조 임금이 돌아가시고 정조임금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 정약용의 일화

당쟁이 극에 달했던 때라 반대파는 계속 정약용을 헐뜯었다. 정조 임금은 정약용을 보호하기 휘애 황해도 곡산 부사로 내려 보냈다가 기회를 봐서 불러 올릴 생각이었다.

정약용도 임금의 마음을 잘 알기에 아무 말없이 곡산부사로 떠났다. 그의 나이 서른 여섯 살때인 1797년 이었다. 곡산은 황해도 동북쪽에 있는 산골 지방이었다

이곳은 산골이라 원래 가난하게 살고 있기도 하지만 부사들이 더 좋은 자리로 떠날 생각만 하고 나라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백성들이 더욱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고는 부임한 날부터 고을 구석구석을 살펴 잘 다스렸다.

먼젓번 사또에게 행패를 부린 죄로 한 사람이 포졸에게 끌려왔다. 그는 이계심이라는 사람으로 그동안 백성들이 당한 억울한 일을 일일이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종이에 써 왔다.

정약용은 이계심이 품속에서 꺼내 준 두루마리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곡산백성을 괴롭히는 열 가지 옳지 못한 점'이라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정약용은 이계심을 풀어주고 글에 써 있는 내용을 뒷조사해 보니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동안 곡산 현감을 지낸 사람들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백성들로 부터 세금으로 베를 거둘때는 긴 자를 썻으며, 정부에 바칠 때는 짧은 자를 써서, 남은 베는 전임 사또가 맘대로 써 버렸으며, 죽은 사람을 산 사람인 것처럼 서류를 꾸몄거나, 어린아이의 나이를 올려 장정으로 만들고, 노인의 나이를 줄여서 부역을 시켰던 것이다. 부역에 나갈 수 없으면 돈이나 쌀로 대신해 세금을 물렸던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의 생활은 세금 때문에 살기가 어려웠고, 현감과 관찰사에 대한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토지에 대한 세금도 많았으며,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산도 장부에는 농토로 되어있어 세금을 내야 했으며, 모든 일이 백성을 위하기보다 자기들 잇속에 따라 법을 만들었다.

그것을 본 정약용은 모든 아전들에게 단단히 명령하였다. 베를 거둘 때나 바칠 때, 모두 똑같은 자를 쓰게 하였으며, 다른 애매한 일도 백성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결하였다.

 

◈ 길고 긴 귀양 살이

정약용을 아끼던 정조 임금이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정조의 둘째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조선의 23대 임금 순조 임금이다.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영조의 왕비였던 증조할머니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였다. 그러나 정순황후 친정 쪽 사람들은 정약용과 반대 입장에 있어서 정약용이 속한 남인을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1801년 천주교를 믿는 자는 모조리 잡아들여 극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잡혀 가 죽거나 옥에 갇히었다. 이것을 '신유 사옥'이라고 한다.

이가환, 권철신등이 고문으로 감옥에서 죽었으며, 셋째형 정약종과 그의 아들 정철상, 이승훈, 홍낙민등은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이때 좌의정이 된 서용보는 정약용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으 살려 주자고 하였다. 다행히 정약용과 둘째형 정약전은 목숨을 구했다. 천주학을 젊었을 때 믿었다가 그때는 안 믿었는데, 그런 그를 차마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귀양을 갔다. 정약전의 사위인 황사역은 충청북도 제천의 산속으로 도망을 가서 굴속에서 신도들과 숨어 살다가 주준모 신부의 입국에서부터 신유 사옥까지의 천주교 박해 내용을 명주 천에 백반으로 자세히 썻다. 백반으로 글씨를 쓰면, 그 천을 물에 넣어야 글씨가 나타난다. 황사영은 그 천을 동지인 황심을 시켜 청나라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알려 청나라의 도움을 얻으려 하였으나 중간에 발각되고 이 일로 인하여 황사영, 황심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황사영 백서'라 일컬으며 이 일이 있은 후, 한층 더 천주교 박해가 심해졌다. 황사영이 정약전의 사위이므로 정약용, 정약전에 대한 의심도 깊어졌으며, 홍락인, 이기경등은 정약용 형제를 죽여햐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정약용, 정약정 형제는 사형당하기 위해 귀양지에서 끌려왔다.

 

그때, 정일환이라는 황해도 사람이 한양에 왔다. 곡산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진정서를 내 놓으며 정약용을 죽여서는 아니 된다며 간청하였다. 정약용이 곡산부사로 있을때 백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여, 곡산 사람들은 정약용을 지금도 부모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귀양지에서 누구와도 만난 일이 없으며, 황사영이 정약용의 조카사위지만, 아무 관계가 없으니 그를 죽여서는 아니 되며, 지금 천주교를 믿지 않는데, 모든 것은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모함일 뿐이니 굽어살펴 달라며 울며 애원하였다. 그의 강력한 주장에 정약용을 죽여야 한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끌려온 지 열흘 만에 겨우 목숨만 살아 정약전은 전라도 흑산도로,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다시 귀양살이를 떠났다. 형인 정약전이 귀양지인 흑산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은 강진의 초라한 초막에서 글만 읽으며 세월을 보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가르침을 받고자 고을의 젊은이 몇 명이 찾아와 정약용에게 스승이 되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이 무슨 가르침을 주겠소."

정약용은 한 마디로 젊은이들을 거절하였으나 사람들은 물러가지 않고 계속 졸랐다. 이같은 일이 계속되자 조그만 방에 동네 사람들의 청에 따라 서당을 차렸다. 귀양살이를 사는 죄인의 몸이기에 서당이라기보다는 조그만 마을의 글방이었다.

언제 귀양살이에서 풀려날지 모르니 백성들을 위해 글이라도 가르치기로 다짐한 정약용은 열심히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으며, 동네 사람들에게는 백성으로서 할 일과 예으 범절을 가르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설득했으며, 틈만 나면 시를 짓고 책을 읽었다. 근처에 있던 조그만 절에서 빌려다 읽었다.

강진으로 온 지 8년째인 1808년, 윤박이라는 사람이 마련해 준 조그만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집은 강진군 도암면 만덕동의 다산이라는 산 밑에 있었다. 그 곳으로 이사를 온 정약용은 산의 이름을 따서 자기의 호를 다산이라고 지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무엇인가를 남기고 죽어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을 하였으며, 귀양살이를 헛되이 보내지 않고,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백성들을 다스리는 벼슬아치들에게 필요한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정약용은 아이들에게 글공부 시키는 시간을 조금씩 줄이기 시작하였으며, 시를 짓는 일을 중단하고, 책을 쓸 준비를 하였다. 밖에 나오는 일이 점점 줄었으며,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깊이 생각하고는 붓을 잡아 글을 썼다. 가끔 동네 사람들이나 전에 가르쳤던 제자들이 찾아오기도 하였으나 정약용이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방해 될까봐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정약용은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끌어내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정치와 경제에 관한 자기의 생각도 글로 적었으며, 법률과 군사에 관한 글도 썼다. 그밖에 여러 분야에 걸쳐 자기가 생각한 것을 글로 옮겼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책이 경세유표 이다.

쉰여섯 살 되던 1817년에 완성되었다. 귀양지에 온지 17년 만이었다. 이 책의 내용은 국가 제도 개혁안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분량은 모두 40권이나 되었으며, 경세유표를 쓰는 틈틈이 대학회의, 맹자요의, 민보의 등의 책을 썼다.

목민심서 쓰기에 열중하여 1년만인 1818년 목민심서 48권을 다 썻다. 1818년 8월 귀양생활에서 풀려나왔다. 길고 긴 18년의 귀양살이가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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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 마재마을로 돌아왔다. 한참 일할 나이를 귀양지에서 보냈지만, 그래도 몇 권의 책을 완성하여 헛된 세월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고향에 온 이듬해에 흠흠심서 30권을 썼다. 그가 일생에 쓴 책은 500권이 넘으며, 지은 시는 2,460편이나 된다. 고향에 온지 18년이 흐른 1836년 2월 22일, 75세로 한많은 일생을 끝냈다.

출처 : 그레이스아카데미 GRACE Academy
글쓴이 : 스마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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