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인로(쌍명재)선생 시

2011. 12. 31. 19:27알아두면 조은글

 

 

春去花猶在(춘거화유재)

天晴谷自陰(천청곡자음)

杜鵑啼白晝(두견제백주)

始覺卜居深(시각복거심)

     

    봄은 지났는데 꽃은 아직 남아 있고

    하늘은 개었어도 골짜기는 어둑하구나.

    두견새 한낮에도 구슬피 우니

    비로소 깨달았소, 내가 깊은 산에 사는 것을.

     

     

     

    [이해와 감상]

    이 시의 작가 이인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절에서 스님의 부양으로 성장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환속하여 당시의 문인인 오세재, 임춘 등과 함께 활동하게 된다. 무신의 난인 정중부의 난(1170년)이 일어나자 다시 절에서 난을 피한 후, 환속하여 118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다. 그는 시와 글씨로 이름을 남겼다.

    이 작품은 제1, 2구에서 아직도 꽃이 남아 있는 늦봄의 깊은 골짜기라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설정하고 있다. 3, 4구에서는 화자가 있는 이 곳이 낯설고 새삼스럽기만 하다고 한다. 즉, 이인로는 조실부모하여 스님에게 양육되는 성장기를 거치고는 어떠한 인연으로 세상살이를 하게 되었고, 세상에 나온 그는 문자를 알고 과거 시험에 대한 야망을 가졌을 텐데 정중부의 난으로 인해 이러한 목표는 좌절되고 다시 산 속에 숨어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좌절된 꿈을 확인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두견새 소리였던 것이다. 화자의 현실은 '세상에서 도망 온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산속 생활이란 지루하다. 특히 세상살이를 경험한 사람에게 산속 생활이란 정말 단순하고 지리한지도 모른다. 특히 세상적인 욕심과 목표를 가진 사람에게는 지옥과 같을지도 모른다. 매일 하는 일이란 것이 봉우리와 봉우리를 오가고, 사방 푸른 나무와 풀, 몇 날이 지나도 사람 만나기 어려운 단순하고 지루한 생활이다.

    이러한 한적한 생활에서 늦게 핀 꽃에도 관심이 가고, 골짜기의 그늘에도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이런 일상이 반복되면 때로는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두견새 소리는 갑자기 잊어 버린 지난 세상살이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좌절된 뼈아픈 자신의 처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둑한 골짜기 그늘을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자신의 근심을, 봄 늦도록 남겨진 봄꽃을 좌절되었지만 포기하지 못한 자신의 꿈과 동일시하는 무의식의 끈을 언어로 표출한 것이다. 그는 마지막 구절에서, 그 자신이 세상과 너무나 먼 깊은 산골에 와 있다고 표현한다. 그렇다. 어쩌면 산속이 깊어 하늘이 맑아도 골짜기의 그늘이 깊다고 표현한 그만큼 이인로의 좌절된 꿈이 높았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이 시는 '현실 참여가 좌절된 지식인의 내면 의식이 자연을 소재로 표현된 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그 시대 지식인의 대표적 정서이다. 마음 속에 걱정이 있는 사람은 잠을 자도 잠들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에 미련이 있는 사람은 산에 살아도 이미 산사람이 아닌 것이다.

     

     [요점정리]

    형식 : 5언 절구의 한시, 서정시

    주제 : 표면적 → 세상을 잊고 자연에 묻혀 지내는 적적한 심정

                  이면적 → 현실 참여가 좌절된 지식인의 내면 풍경

    소재(두견새) : 망국의 한이나 사랑을 잃은 사람의 심정을 내포하는 문학적 소재로, 세상에서 밀려나거나 도망해 온 화자의 불우한 처지를 환기시키는 소재로 볼 수 있음

     

     

    이인로 (고려 문신)  [李仁老]

    1152(의종 6)~1220(고종 7).고려 중기 무신집권기의 문인.
    본관은 인주(仁州).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 호는 쌍명재(雙明齋). 평장사 오()의 증손으로 문벌귀족의 가문 출신이지만,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화엄승통(華嚴僧統) 요일(寥一) 밑에서 자랐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의 난을 피해 승려가 되기도 했다. 환속하여 1180년(명종 10) 문과에 급제한 뒤 문극겸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14년간 사국과 한림원에 출입했다. 당시의 이름난 선비인 오세재·임춘 등과 죽림고회를 만들고 시와 술을 즐겼는데, 중국의 죽림7현(竹林七賢)을 흠모한 문학 모임이었다.
    그의 문학세계는 선명한 회화성을 통하여 탈속의 경지를 모색했으며, 문은 한유의 고문을 따랐고 시는 소식을 숭상했다. 최초의 시화집인 〈파한집 破閑集〉을 저술하여 한국문학사에 본격적인 비평문학의 길을 열었다. 이 책에는 자작시가 많이 들어 있는데, 자작시만 들어 있는 것도 13화(話)에 이르고 있다. 또한 그는 용사(用事) 위주의 시론을 전개했다. 즉 시를 지음에 있어서 용사의 정묘함을 제일로 쳤으나, 그에 상응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험벽(險辟 : 뜻이 어렵고 잘 쓰지 않는 글자로, 이런 글자가 들어 있으면 시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함)한 용사는 배격했으며, 남의 문장을 본떠서 형식을 바꾸어도 새로운 뜻을 낼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좋은 시란 표현기교가 뜻을 따라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갈고 닦는 공을 더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역시도 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천연미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저서로 〈은대집 銀臺集〉 20권, 〈후집 後集〉 4권, 〈쌍명재집〉 3권, 〈파한집〉 3권을 저술했다고 하나, 현재 〈파한집〉만 전하며, 〈동문선〉과 〈보한집〉에 120여 편의 시문이 남아 있다.

출처 : 권춘강
글쓴이 : 권춘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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