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 05:42ㆍ간찰용어
安稅(안탈) : 무사히 잘 돌아감(도착함).
여행에서 편히 돌아온 것
內行久無聲息 政以爲菀 六日之夕始到 得承手狀 深慰遠思 第聞顔色瘦敗 飮食減少 未有所勝 悲苦何言 近服何藥 曾所訪求 久思之別 無所見 不得奉報 可歎
慈堂行次 能得安稅 伏幸 滿帋苦語 不禁愴然 但家貧官弊 無物可副孝思 爲愧耳
不宣 藥物謹荷
六月七日 文欽
<추신>
令愛紅疹 果已安過否 憂念憂念
나. 번역
아내의 행차가 오래도록 소식이 없어 정히 울적하게 여겼더니, 6일의 저녁에야 비로소 도착해서 손수 쓴 서신을 얻으니, 멀리서 그리워하던 마음에 심히 위안이 되었습니다.
다만 듣건대, 얼굴빛이 파리하고 쇠약해져서 마시고 먹는 것이 줄어들어 이길 수 있는 바가 있지 않다고 하니, 비통하고 괴로움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근래 무슨 약을 복용하는가?
일찍이 방문하여 구하던 바였으니,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이별에 본 바가 없어서 받들어서 보답할 수 없으니, 가히 탄식스럽습니다.
자당(慈堂)의 행차는 능히 무사히 잘 도착하였으니, 삼가 다행입니다. 종이에 가득 괴로운 말들은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집안이 가난하고 관아의 폐단으로 물품으로 효심어린 마음에 가히 부응할 수 없으니, 부끄럽게 여길 뿐입니다. 약물(藥物)은 삼가 받았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6월 7일에 문흠
<추신>
딸내미는 홍역에서 과연 이미 편안하게 지나갔는가? 근심하고 염려되며 근심하고 염려됩니다
<인물> 송문흠(宋文欽, 1710 ~ 1752)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호는 한정당(閑靜堂), 자는 사행(士行),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송준길(宋浚吉)의 현손이다. 부친은 송요좌(宋堯佐)로 군수를 지냈으며, 모친은 파평 윤씨, 외조부는 호조정랑을 지낸 윤부(尹扶)이다. 조부는 상주목사를 지낸 송병익(宋炳益)이었으나 부친이 송병원(宋炳遠)의 후사로 들어가면서 송병원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다. 형은 송명흠(宋明欽)이다. 1733년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이후 대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관직은 종부시주부 · 형조좌랑 등을 거쳐 문의 현감을 지냈다. 1710년 12월 11일에 부친의 임소였던 경상도 의성에서 태어났고, 유년기의 대부분을 부친의 임지에서 보냈다. 14세에 부친을 여의고 난 뒤로는 5년 터울의 형인 송명흠과 함께 수학하며 자랐다. 이 시기 송문흠의 독서는 주로 경전에 기울어 있었는데, 특히 역(易)에 심취하였다. 송명흠과 주고받은 편지의 대부분이 역을 주제로 한 토론이며 이는 현재 전하는 문집 『한정당집(閑靜堂集)』에 실려 있다. 이재(李縡)의 문인으로 형 송명흠과 함께 수학했으며 당대의 노론 명문가 자제들과 교유했다. 송문흠이 교유한 인물들로는 김원행 · 김조행 형제, 이인상, 황경원, 이윤영 · 이운영 형제, 임매 · 임과 형제, 김무택, 김순택, 신소, 신사보, 오찬, 김상숙 등이 대표적이다. 명문가 출신에다 수려한 외모와 교양을 겸비하여 당시의 사류(士類)들로부터 당대 '팔미인(八美人)'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러나 마흔셋 되던 1752년 12월 15일에 병으로 요절하여 당대와 후세에 큰 아쉬움을 남겼다. 이듬해 1753년 2월에 공주 장동리에 안장되었다. 문집인 『한정당집(閑靜堂集)』은 1788년에 사위였던 김광묵(金光默)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조카 송시연(宋時淵)과 함께 간행한 것인데 판본이 현재까지 전한다. 송문흠과 가장 가까웠던 벗은 이인상 · 신소 · 이윤영을 들 수 있다. 셋집을 전전하던 이인상에게 집을 구해 준 일화는 매우 유명하며, 이인상의 '능호관'이라는 호도 지어 주었다. 신소와도 막역한 관계였으며, 외사촌 김원행 · 김조행과는 동학했던 동문으로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오찬과도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여 1749년 겨울에 오찬의 집에서 진행된 독서회에 참여하였다. 한 세대 뒤에 활동한 문인 이규상(李奎象)은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서 "팔분서와 전서를 잘 썼는데, 팔분서는 굳세고 아름다워 근세의 으뜸이다.…팔분서는 글자 배열이 신묘했으며 획이 풍다하였지만 풍골(風骨)을 방해하지는 않았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