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西 朴善長

2022. 10. 10. 18:53성리학(선비들)

1. 수서의 생애

수서水西 박선장朴善長(1555-1616)의 본관 무안務安, 자는 여인汝仁, 호는 수서水西이다. 그의 선대先代를 소급한다. 상세上世는 고려 때 국학전주國學典酒를 지낸 진승進昇이다. 이 분이 좌복야左僕射 섬暹을 낳았는데 현종顯宗이 난리를 피해 옮겨 다닐 때 시종始終 한결같은 절개를 지켰다. 오세五世를 지나 재신宰臣 문오文晤가 면성군綿城君에 봉해졌다. 조선조에 들어와 의룡義龍은 병조판서兵曹判書․호조판서 戶曹判書․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올랐다. 의룡義龍은 강綱을 낳았다. 강綱은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역임했다. 강綱이 곧 수서水西의 육대조六代祖이다.



고조高祖는 해解인데 세종 때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으나, 그 뒤 세조世祖가 조카인 단종端宗으로부터 왕위찬탈王位簒奪하는 것을 보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여주驪州로 퇴거하여 유유자적하게 일생을 마쳤다. 증조曾祖는 지몽之蒙으로 내외종內外從 간이었던 권신權臣 임사홍任士洪이 권세를 업고 방자放恣하게 행동하여 동사同仕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준연峻然히 척지斥之하여 세인世人이 칭송하였다. 후에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고 통훈대부贈通訓大夫로 증직되었다. 그는 원래 한양에서 살았는데 영해부寧海府로 장가를 들어 거기서 살게 되었다. 조부祖父는 원기元基로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역임했다. 부친 전全은 1546년(세종25)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조정랑戶曹正郞을 거쳐 북평사北評事를 역임했다. 모친은 웅천주씨熊川朱氏로 사직司直을 지낸 행幸의 따님이며 전적典籍 선림善林의 손녀이다.



수서水西는 1555년(명종10) 5월 11일에 경북 영해부 익동리翼洞里 집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수서를 잉태孕胎했을 때 꿈에 이인異人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이 지팡이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윽고 수서를 낳았다. 수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영리하여 일반 아이들과 달라 부친이 매우 기특해 하며“우리 집안은 대대로 일찍부터 덕을 쌓았더니 이제 그 보답이 있으려나보다”라는 시를 지었다. 또“자식 없으면 없는 대로 걱정하고 있으면 가르치지 못할 까 걱정스럽네”라는 시를 지었다. 수서는 자라나서 매번 이 시를 읽고 슬피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수서가 네 살(1558) 때 당시 부친은 호조정랑戶曹正郞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한양漢陽에서 별세하여 영해부 여현輿峴 오향午向 언덕에 반장返葬했다.



모친 주씨는 수서가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 교육을 받지 못해 학문을 이루지 못할 까 마음 아파했다. 남편의 삼년상을 마치고 친정인 울진蔚珍으로 이주해 오라버니에게 부탁하여 수서를 가르치게 했다. 이로부터 몇 해가 지나 수서가 10세(1564) 때 어느 날 밤에 남편이 꿈에 나타나“영천榮川 고을 남모南某가 글을 잘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아들을 가르칠 만하다. 그가 사는 마을에 산단화散丹花가 피어 있고 그 자손들이 매우 많이 살고 있으니 그를 찾아가 학업을 청하라”고 알려주었다. 이에 모친은 뜻을 굳히고 현재 구역상 경북 영주榮州인 영천榮川으로 이주했다. 이 때 삼송당三松堂 남몽오南夢鰲(1528-1591)는 그곳에서 서당을 열었고 수많은 학동學童이 몰려들었다.



이에 수서는 삼송당 문하에 나아가 가르침 받기를 시작하였다. 삼송당은 수서의 재주가 기특하여 󰡔소학󰡕을 주면서 매일 학습 과정을 독려했다. 12세(1566) 때에 삼송당이 ‘연기 연[烟]’자字로 연구聯句를 지으라고 했다. 수서는“산골 두어 집에서 연기 피네”라고 했다. 삼송당은 또 서리 상[霜] 자로 연구를 지어보라고 했다. 수서는“서리 힘으로 어찌 할 수 없어도 언덕이 절로 비네”라고 하니 삼송당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삼송당은 수서가 지은 연구를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1517-1587)에게 보여주자, 소고는“기이하도다! 시의 기상이 시원하고 시 의미가 맑고 깨끗하니 장차 크게 되리라”며 감탄했다. 소고는 이후로 수서를 이전보다 더욱 어여삐 여겨 다른 학동보다 먼저 가르쳐 주었다.



13세 때(1567)에 「지녕초指侫草」 시를 지었는데 이를 지은 계기는 일찍이 고문 「격사홀명擊蛇笏銘」을 읽다가 ‘요임금 때 지녕초가 있었다’는 대목에 이르러 감동을 받아 시를 지었다. 14세(1568)에 삼송당의 장녀長女에게 장가를 들어 화천花川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17세(1571)에 󰡔심경心經󰡕과 󰡔소학小學󰡕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시를 지었다. 당시 수서는 15세(1569)부터 사장詞章에 뜻을 두지 않고 유교 경전의 가르침을 연구하며 실천했다. 그는 삼송당을 통해 선비가 지닐 몸가짐의 큰 방도를 배웠고 모친으로부터 몸가짐과 삼가는 행동의 가르침을 받았다. 19세(1573)에 장남 경璥이 태어났다. 22세(1576) 10월에 차남 한(王/旱)이 태어났다.



23세(1577)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을 배알하며 도의로서 교유하였다. 이에 앞서 부친이 북변에서 공무를 수행할 때 관찰사 류중령柳仲郢(1515-1573)이 감군어사監軍御使로 북변을 순무巡撫했다. 부친은 매일 그와 함께 종유하면서 시를 주고받은 적이 많았다. 당시 서애는 의정부검의議政府檢議를 역임하면서 휴가를 내어 양친을 뵈러 왔기에 찾아가 뵈었다. 25세(1579)에 이산서원伊山書院에 가서 독서하고 오는 길에 백암栢巖 김륵金玏(1540-1616)․취수醉睡 박록朴漉(1542-1632)․죽유竹牖 오운吳澐(1540-1617)을 방문했다. 이 무렵 수서는 ‘위기지학爲己之學’ 공부에 충실하였다. 특히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심도 있게 연구해 전체 내용을 이해했으며 요지를 터득하는 학문 성취가 커서 동류배同類輩로부터 공인을 받았다. 백암․취수․죽유 제공도 당시 수서의 학문 경지 ‘노성老成하다’고 인정했다.



26세(1580)에 봉화현감奉化縣監을 역임하던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을 찾아뵈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릉서당杜陵書堂에 들러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을 방문하고 󰡔심경心經󰡕을 강론하며 의심나는 것을 질의했다. 28세(1582) 8월에 여현輿峴 선산에 성묘하러 가는 길에 경북 영덕군 창수면과 영양군 경계에 읍령泣嶺에 이르러 감회시를 남겼다. 33세(1587)에 󰡔심경心經󰡕을 힘써 읽었다. 일찍이 퇴계退溪도 이 󰡔심경心經󰡕을 ‘신명神明처럼 믿었으며 엄한 부친의 훈계처럼 여겨 가슴 깊이 간직하며 실천했다’고 전한다. 36세(1590)에 셋째 아들 로璐가 태어났다.



37세(1591) 봄에 향해鄕解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했다. 그해 7월에 스승 삼송당이 별세했다. 수서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으로부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가르침에 따라 삼송에게 가르침을 받은 지 20여 년이 되었는데 스승을 잃자 산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었다. 심상心喪 3년과 초하루와 보름 삭망일에 참례하여 추모의 예를 다했다. 38세(1592) 봄에 삼송당 스승의 장례를 치렀는데 수서는 「제문」과 「만사」를 지어 스승을 잃은 슬픔을 표현하며 애도하였다. 그 해 겨울에 왜구들의 침략으로 주상께서 서쪽 지방으로 파천播遷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쪽 땅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당시 수서의 재종再從 동생 병사공兵使公 박의장朴毅長(1555-1615)이 큰 고을에서 군사를 모아 동경東京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멀리서나마 격려하고 축하한다는 글을 써서 보냈다.



39세(1593)에 명나라 장군과 군사들이 길을 나누어 남쪽 지방 백성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이에 본 고을 영주를 지나게 되었는데 수서는 이산서원에 있었다. 한 장교가 수서가 단정히 앉아 꼼짝도 않고 있자 성을 발끈 내며 구리 화로를 들고 수서를 향해 던졌는데 빗나가 화로의 재와 숯덩이가 온 좌중에 쏟아졌다. 하지만 수서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태연히 앉아있으니 명나라 장교가 멍하니 바라보다가 공경의 예를 표하고 떠나갔다. 40세(1594)에 이산서원으로 가서 도내 각지로 창의倡義를 독려하는 격서檄書를 써서 보냈다. 왜구들이 닥치는 대로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러 무자비하게 성을 함락시켰다. 수서는 고을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 일으키기를 합의하고 각 고을 선비들에게 격서를 보내 의리를 들어 적개심을 일으키자 격문을 읽는 이마다 눈물을 흘렸다.



41세(1595)에 스승 삼송이 진사에 급제했던 기록의 책자를 보고 감회가 있어 시를 지었다. 42세(1596) 7월에 호여皥如 금복고琴復古(1549-1632)․공제公濟 김개국金蓋國(1548-1603)과 함께 모임을 가졌다. 당시 김개국은 영서嶺西 좌막佐幕으로 병사를 훈련시키고 병기 사용 방법 등을 교육했는데 수서는 그와 함께 왜적 무찌르는 현안을 의논하고 기획하였다. 43세(1597) 향시鄕試에서 장원을 차지했다. 44세(1598) 이산서원에 가서 향내 유생과 함께 명나라 장수에게 글을 올리는 사안을 의논하였다. 45세(1599) 에 「가학시假鶴詩」를 지었다. 당시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1535-1623)의 명성이 자자했는데 자호를 ‘야학野鶴’이라 했다. 그가 사헌부司憲府 관원으로 영주 고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수서는 단 한 번 그를 보았지만 단번에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고 이 시를 지어 풍자하였다.



47세(1601) 가을에 향해鄕解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하였다. 48세(1602)에 이산서원에 가서 임란 역사 기록물 1권과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이 사실에 근거를 두고 초안草案한 상소문上疏文을 보았다. 49세(1603) 2월 14일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1552-1617)를 찾아가 만나고 시를 지어 주었다. 이 때 망우당은 곡기穀氣를 끊은 지 넉 달째여서 얼굴 모습이 매우 수척했다. 벽에 ‘호흡呼吸’ 두 글자와 ‘오행五行의 상생 법칙’을 써서 붙여 두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곽재우 장군을 도가道家쪽 인물이라고 부르기에 수서가 이 시를 지어 주었다. 그해 5월에 이산서원에 가서 죽유竹牖 오운吳澐과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문집을 수정하였다. 이어 8월에는 병난 때 ‘사적事蹟’ 한 권을 편찬했는데 당시 경상도순찰사가 수서에게 이 책을 편찬케 했다. 9월에 둘째 아들 한(王/旱)이 과거에 급제하였다.



50세(1604) 4월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다. 당시 학관學舘 유생들이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해 줄 것을 상소했다. 이 때 조정에서 회재를 폄하貶下하여 그 여파가 퇴계退溪(1500-1570)에게까지 미치게 되어 수서는 서애西厓․월천月川에게 가서 아뢰고 소회疏會를 개설하여 상소문을 올렸다. 수서는 그 해 12월에 증광동당增廣東堂 향시鄕試에 급제하였다.



51세(1605) 봄에 증광별시增廣別試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3월 9일 복시覆試에서 「궁양달시책窮養達施策」

을 지어 올렸으며 3월 19일 정대廷對에서 「교양인재책敎養人材策」을 지어 올림으로써 합격했다. 수서가 이렇게 늦은 나이에 과거에 응거하여 급제한 이유는 본인 자신은 과거를 통해 입신출세하기를 즐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들 한이 과거에 급제한 뒤에 모친께서 “너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했지만 너 자신이 친히 급제하는 것만 같겠느냐?”라고 하시자, 수서는 부득이 과거에 응거하여 급제를 거쳐 벼슬길에 나선 것이다. 당시 모친은 88세였다. 여름에 서애를 방문했다. 5월에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을 방문하고 영해부寧海府 선영先塋에 참배했다. 7월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 11월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인 부훤負暄 허욱許頊(1548-1618)을 방문했다. 이는 허 판서의 모친께서 수서 모친과 동갑이셨기 때문이다.



52세(1606)에 󰡔하도河圖󰡕․󰡔낙서洛書󰡕․󰡔역도주해경계사易圖註解經繫辭󰡕․󰡔예경禮敬󰡕․󰡔심경心經󰡕 성리서性理書 등 여러 책을 두루 읽었다. 수서는 학문에 뜻을 둔 이래 특히 성리학 관련 서적을 많이 읽었지만 항상 공부에 전념하지 못했다고 여겼다. 급제한 이후에도 심혈을 기울여 성리 서적을 탐독했으며 시간이 넉넉하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밤이 되어도 독서를 그만 두지 않았는데 매번 마음에 닿는 문구가 있으면 거기에 맞춰 시를 지어 읊었다. 이어 「정양시靜養詩」, 「자경잠시自警箴詩」를 지었다. 스스로 기록한 ‘자기自記’를 보면 ‘성질이 편협해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가장 이겨내기 어려운 곳에 처하더라도 식욕食慾과 색욕色慾을 이겨내기는 가장 어렵기 때문에 잠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한다’고 해명했다. 이어 「욕천시浴川詩」를 지었다.



53세(1607) 6월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에게 편지를 올렸다. 이 당시 한강은 이산서원 伊山書院 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한강이 조만간 안동부사 임기를 마치게 된다는 말을 듣고 편지를 써서 소고嘯皐의 문집 발간 경비를 보조를 요청했다. 7월에 하회河回로 가서 서애西厓의 장례에 제문을 지어 조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월천月川도 조문했다.



54세(1608) 정월正月에 단산서원 丹山書院 상량문을 지었다. 5월에 예안현감禮安縣監에 제수되어 6월에 부임했다. 예안현에는 묵은 병폐病弊가 많았다. 수서는 부임 즉시 그 병폐를 조목별로 정리해 감사에게 보고하고 변통變通하여 바로잡아나갔다. 수소는 향교鄕校의 제기가 파손되고 더러워진 것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주민의 송사를 공정히 처리하여 이속吏屬이나 주민에게 인심을 얻는 등 큰 치적治積을 남겼다. 순찰사가 현에 이르러 수서에게 “부임 이후 공무를 부지런히 처리하여 큰 위안이 된다”고 칭찬했다. 10월에 월천月川의 제문을 지어 조문했으며 12월에는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가서 퇴계의 󰡔경서석의經書釋義󰡕 교정 작업에 참여했는데 순찰사가 종이․붓․먹을 보내와 이 책의 간행을 도왔다.



55세(1609) 4월에 임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6일에 말을 타고 출발했는데 예안현 주민들이 길 왼쪽에서 배웅하면서 “어진 현감께서 돌아가시니 우리에겐 복이 사라졌습니다”라고 했다. 그 때 계암溪巖 김령金坽(1577-1641)이 송별시 세 수를 지어 주었다. 수서가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의 쌀독이 비어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안현 선비들은 쌀 석 섬을 모아서 보냈다. 󰡔소학小學󰡕․󰡔주자서朱子書󰡕와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읽었다. 어떤 이가 “자네는 왜 이렇게 고생을 해가면서 책을 읽는가?”라고 묻자, 수서는 “공직에 임하면 부지런히 공무를 수행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책을 읽는 것이 나의 일인데 이것 외에 내가 어디에 힘을 쏟을 건가?”라고 답했다.



56세(1610)에 󰡔심경心經󰡕을 읽고 감회가 있어 「자도시自悼詩」와 「자서사自誓辭」를 지었다. ‘기記’에 의하면 ‘가난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지만 ‘느긋하게 살며 천명을 기다린다[居易俟命]’는 네 글자를 항상 염두에 둔 연후에야 ‘분수에 따라 편안하게 산다[安分]’는 의미를 지니게 되기에 스스로 마음을 다짐하는 글을 지었다’고 밝혔다. 57세(1611) 9월에 현 행정구역상 봉화읍 화천리인 구만龜灣 위에 서당 지을 터를 잡았다. 수서는 마을의 아이들이 배울 만한 곳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도은陶隱 권호신權虎臣․송음松陰 금복고琴復古․생원 이흥문李興門과 함께 의논하여 강당을 세워 학문을 닦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장소를 마련하고자 적합한 곳을 정하고 이 일을 운영토록 기획했다. 11월에 서당의 상량문을 지었다.



58세(1612)에 퇴계의 문집을 읽었다. 8월에는 구만서당龜灣書堂이 완공되어 「오륜가五倫歌」를 지어 어린 학동을 경계시켰다. 수서는 국문으로 시조를 지어 마을 학동들에게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을 경계하는 방침을 삼게 하였다. 이어 「십물잠十勿箴」을 지어 고을 사람들을 교화시켰다. 모친의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당시 모친의 연세는 95세였으며 둘째 아들 한이 예안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잔치 준비를 했다. 9월에 「청성서원봉안문靑城書院 奉安文」을 지었다. 당시 수서는 이산서원 원장을 역임하면서 서원의 땅이 낮고 습하여 건물이 넘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여러 유생들과 의논하여 이산서원을 현재 이산면인 임구林丘로 옮겨 지을 계획을 하고 대지를 마련했다. 10월에 서원을 세울 「개기제문開基祭文」을 지었다. 이어 단산서원의 좨주[祭酒]인 역동易東 우탁禹倬(1263-1343)의 「봉안제문奉安祭文」을 지었다. 아울러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소학󰡕을 읽었다.



59세(1613)에 󰡔심경󰡕을 읽었다. 수서는 만년에 이 책을 더욱 즐겁게 읽었으며 책의 내용대로 실천하고자 했다. 11월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는 그 무렵 수서의 모친이 연로해 수서가 매일 조석으로 모친을 보살펴드리는 일을 비울 수 없음을 알기에 본도本道 아사亞使[都事]로 천거했다. 모친은 당시 96세였다.



60세(1614) 정월에 대궐에 들어가 주상의 은혜에 감사했다. 지나는 길에 상공相公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1553-1634)을 방문했다. 오봉은 수서에게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이것은 중국의 보배로 세상에서 일컫는 ‘무당산武當山 선인녹옥장仙人綠玉杖’일세. 모친의 연세가 96세시니 공경하며 드리니 이것으로 모친께서 더욱 오래 사시기를 바라네”라고 했다. 2월에 부임하였으며 3월에 말미를 얻어 집으로 돌아와 모친을 뵈었다. 고을의 「계약문契約文」 힘쓰기를 권하고 금지해야 할 규제 조목을 고쳐 다시 정한 「약정문발문約定文跋文」을 지었다. 이와 함께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서애西厓를 봉안할 때 제기를 만들어 보냈다. 가을에 우도시右道試를 주관했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1571년-1637)이 부시관副試官이었는데 수서와 주고받은 시가 많았다. 9월에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와 모친의 장수를 빌며 잔치를 벌였다. 모친은 97세였으며 순찰사巡察使 무위당無爲堂 중명仲明 권반權盼(1564-1631)이 인근 고을 수령에게 수서 모친의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수서의 집에서 베풀게 주선하라고 했다. 이 때 경정敬亭 이민성李民宬(1570-1629)․단곡丹谷 곽진郭瑨(1568-1633)이 시와 서문을 지어 수서의 효행을 칭찬하며 모친의 장수에 대해 감탄하였다. 우도右道의 천재지변으로 인한 농사 작황의 피해를 자세히 살폈다.



61세(1615) 봄에 임기가 끝나 집으로 돌아왔다. 󰡔심경󰡕을 읽었다. 9월에 이산서원 위패를 옮겨 모시는 「이산서원봉안제문」을 지었다. 11월에 이산서원 원장이 되어 명륜당을 세웠다.



62세(1616) 3월에 작은 병세를 감지했다가 22일에 정침에서 별세했다. 모친은 99세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문인을 보내서 조문했다. 4월 20일 도사都事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겸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수찬관修撰館․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상서원정尙瑞院正으로 추증되었다. 12월 19일에 군의 동쪽 성지동省知洞 오향午向 언덕에 장례 치렀다. 묘소는 수서가 살던 마을과 7리 정도 거리에 있고 조문객은 수백 명이었다.



수서는 슬하에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경璥으로 문장과 절행節行이 있었다. 차남 한王/旱은 문과에 급제했고 삼남 노璐는 첨추僉樞를 지냈다. 따님은 황이구黃以久에게 시집을 갔다. 경璥은 3남男을 두었는데 맏이는 휴복休復으로 장사랑將仕郞이다. 둘째는 광복光復이며 셋째는 도복道復인데 장사랑將仕郞이다. 한은 5남 2녀를 낳았는데 맏이 진복進復은 생원이며 둘째 안복安復은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급제해 좌랑佐郞을 역임했다. 셋째 내복來復은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넷째 인복仁復은 선교랑宣敎郞을 지냈으며 다섯째 견복見復은 종사랑從仕郞을 지냈다. 장녀는 정기학鄭基學에게, 차녀는 김종연金宗衍에게 시집을 갔다. 노璐는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안문安文은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했다. 차남은 안성安性이고, 삼남은 안신安臣이다. 장녀는 김상주金相周에게, 차녀는 금성琴筬에게 시집갔다. 황이구는 3녀 2남을 낳았는데 장녀는 김시직金是直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이외에 내 외 증현손 남녀 100여 명은 일일이 다 싣지 못했다. 모친 신안 주씨는 수서 사후 2년 뒤인 1618년(광해10)에 101세로 별세하여 아들 수서 묘소 뒤편에 안장되었다.



수서는 타고난 자질이 독실하고 지조와 행동거지가 단아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성리학 관련 서적에 전심전력하여 매일 독서 과정을 정해 두고 연찬 활동을 지속했다. 수서는 공직을 수행할 때를 제외하고 여가가 있을 때나 집에서 한가히 지낼 때 손에서 책을 떼지 않고 평생 성리학 공부에 치중했다. 성품 역시 어질고 효심이 깊어 모친을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으며 집안사람들과 아래 사람들을 후덕하게 대했다. 이러한 수서는 선비의 전형이라 하겠다.



1628년(인조6) 11월 5일에 차남 풍기군수 한이 소수서원 문안 편지와 함께 송묵松墨 20자루를 보냈다.

1630년(인조8) 정월에 묘소 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묘갈명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가 지었다.

1631년(인조9) 4월에 차남 풍기군수 한이 소수서원에 쌀 1석을 보냈다.

1636년(인조14) 삼남 노가 소수서원에 다녀왔다.

1638년(인조16) 부인 영양남씨가 88세로 별세하여 수서와 합장했다.

1647년(인조25) 6월에 차남 한이 수서의 묘소에 지석을 묻었다.



1676년(숙종2) 12월 19일에 사림들이 모여 구만서당에 수서의 위판을 모시고 묘호廟號는 ‘기영사 耆英祠’로 정했다. 애당초 사당은 수서가 짓고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예전에는 영천榮川 망년리 忘年里 옥봉산玉峯山 동쪽 기슭에 있었는데 지금은 순흥順興 땅이다. 묘호와 상향축문은 호옹湖翁 조정융曺挺融(1598-?)이 지었다. 수서 외에 삼송당三松堂 남몽오南夢鰲․송계松溪 금인琴軔(1510-1593)․도은陶隱 권호신權虎臣(1558-1629)을 배향하였다.



1766년(영조42) 겨울에 구만서당이 구만서원으로 승격하였다. 고유문과 봉안축문은 조은釣隱 이세택李世澤(1716-1777)이 지었다.

1774년(영조50)에 후손들이 수서와 숙인淑人 주씨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마을 뒤편 언덕에 ‘몽화각夢花閣’이라는 정자를 건립하였다.

1781년(정조5) 겨울에 구만서원을 옥봉산 동쪽으로 옮겨 짓고 묘호를 ‘상현사象賢祠’로 고쳤다. 옮길 때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0-1781)이 「환안제문還安祭文」을 짓고 묘호도 그렇게 정했다.

1885년(고종22) 4월에 도승지에서 가선대부 겸 동지의금부사․홍문관제학․동지춘추관・성균관사․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숙부인淑夫人 남씨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되었다.  



1901년(광무50 옥봉산 동쪽에 있던 구만서원이 불타 없어지고 노인봉 북쪽 남산 마을 뒤 언덕인 지금의 지리에 옮겨지었다. 이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1991년 구만서원에 배향된 네 선현의 유지를 받들어 그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인근 유림 100여 명이 뜻을 모아 ‘구정회龜情會’를 조직하여 운영해 가고 있다.





2. 문집의 체제와 내용

1) 체제

󰡔수서선생문집水西先生文集󰡕은 목판본 4권 2책으로 현손 제안齊顔 등이 1810(순조10)년에 간행하였다. 「서문」은 김굉金(土/宏)이 1810년(순조10) 썼으며 이어 「연보」가 실려 있다. 권1의 시는 5언 절구 12제題 13수首․7언 절구 40제 46수․5언 율시 4제 4수․7언 율시 11제 11수로 총 67제 74수의 시가 실렸다.



권2에 5언 절구 8제에 13수․7언 절구 26제 32수․5언 율시 18제 18수․7언 율시 12제 13수․5언 장편 14제 14수․7언 장편 5제 5수․장단구 7제 7수 등 권1과 권2의 시는 모두 157제 176수이다. 이어 권2에 「만사輓詞」 7수(金亨叔大人․金希益․河聖徵․仙槎老友金公應時․晩翠堂金公濟․黃會元兩親․郭靜叔)가 실려 있다.



권3에는 「사辭」(暮春辭)․「부賦」(鵄述嶺․舟中講大學․三光․笏囊․宰相先務在人材)․「서書」(鄭逑․李安訥․郭瑨2)․「잠箴」(自警箴․自誓箴․十勿箴․一壺菴箴)․「명銘」(剪板銘)․「전箋」(誕日箋)․「봉안문奉安文」(丹山書院祭酒禹先生奉安文․伊山書院移安文․靑城書院權松巖好文奉安文․鶴峰金先生誠一奉安文․靈山鄕校五賢從祀祭文․伊山書院移安告廟文․伊山書院新基祭后土文․伊山書院明倫堂開基告廟文․食沙井祈雨祭文․鐵呑山祈雨祭文)․「제문祭文」(柳成龍․代伊山書院儒生․趙穆․南夢鰲․金泰時․權近․金隆․再從姪朴(王/炎)․「상량문上樑文」(伊山書院上樑文․龜灣書堂上樑文)․「책策」(問窮養達施․問敎養人才)이 실렸다.



권4에는 「잡저雜著」(洞契更約文․洞契讀法文․洞契更定約文跋)․「가歌」(薄薄田歌示璥․五倫歌)․「사우록師友錄」(郭瑨․李汝馪․權省吾作)․「제문祭文」(琴是諧․李成幹․李興門․洪(雨/陣)․裵尙益作)․「봉안문奉安文」(曹挺融作)․「상향축문常享祝文」․「고유문告由文」(權正澤․李世澤作)․「증유시贈遺詩」(李民宬․郭瑨作)․「습유拾遺」(權斗文․金(土/令)․金中淸作)․「묘표墓表」(鄭經世撰)․「행장行狀」(鄭宗魯撰)․「가장家狀」(朴齊顔撰)이 실려 있다.



2) 내용

권1의 시는 67제(5언 절구 12제․7언 절구 40제․5언 율시 4제․7언 율시11제) 74수(5언 절구 13수․7언 절구 46수․5언 율시 4수․7언 율시 11수)이다. 권2의 시는 90제(5언 절구 8제․7언 절구 26제․5언 율시 18제․7언 율시 12제․5언 장편 14제․7언 장편 5제․장단구 7제) 102수(5언 절구 13수․7언 절구 32수․5언 율시 18수․7언 율시 13수․5언 장편14수․7언 장편 5수․ 장단구 7수)이다. 시 내용을 일별하기로 한다.



첫째 수신과 근신을 통한 정심을 추구하는 시이다. 간신을 은유하며 경계하거나(「指侫草」)․ 성리학 관련 서적을 읽은 후 소회를 정리하면서 수신과 정심의 미학을 반영하거나(「讀小學」․「讀曲禮」․「讀心經有感二首」)․평소 행동거지의 수신 철학을 반영한 시(「記夢」․「偶吟二首」․「次李大中介立藏書樓韻」․「養蒙齋」․「浴川」․「靜養有作」․「呈無爲堂權公盼一絶」․「再題靜養詩後」․「寫懷」․「(王/旱)釋褐而來作此以爲戒」․「再用前雲憶克休」․「疊石樓」․「記病」)등을 들 수 있다.



둘째 애민 정서를 반영한 작품으로 가뭄이나 장마를 염려하며 농민들의 농사 작황 애로점을 동일시한 시(「七月久雨書懷二首」․「憫旱」․「五月十日不雨二首」)․일상 생활 가운데 농민들에 대한 애정 의식을 표현한 작품(「有所思」․「酌水灌園種諸葛菜記所見」․「送人昌樂求鷹」․「酌水灌園種諸葛菜」)․춘궁기를 맞아 모맥牟麥이 채 익지도 전에 베어서 배를 채워야 하는 실상을 담은 작품(「牟麥未熟刈靑而食吟成一篇」)․ 서북 지방 오랑캐의 창궐猖獗에도 무관심한 조정 관리들을 무관심을 책망하면서 애민 정신을 표현한 작품(「聞西北虜將有俱發兆有作」) 등이다.



셋째 추모심을 발휘한 작품이다. 선현이나 스승을 추모하며 유학적 유업을 지속해 나가길 다짐하거나(「敬次圃隱鄭先生韻奉呈守宰」․「八月九日泣嶺東路有感」․「十七日泣嶺西路」․「看癸酉南三松司馬榜目」․「次崔季昇晛晋州壁上韻」․「次德陽集末所附諸賢韻」․「才山歸路遇雨」․「送表叔還歸十二韻」)․거국적 의리를 실천한 분에 대한 추모 정서를 통한 의리 숭상 의식을 발휘한 작품(「贈郭兵使再佑」)․우의 수법을 차용해 추모 의식을 반영한 작품(「聞朱景顔日言成一律以寓感悵之懷」) 등이다.



넷째 소회를 담은 서정 표현의 작품은 병으로 괴롭거나 꿈에서 만난 인물을 그리워하거나(「述懷」․「病懷」․「夢中作」․「記病」․「無題」․病中有感」․流頭日病懷」․「夢得烏玉四丁白筆二尖作」)․계절감과 일상의 소회를 표현한 시(日暮有感」․「苦寒」․「秋暮有感」․「立春帖二首」․「秋風吟」․「閑居得雨」․「賞菊次權伯武韻」)․친분이 잦은 인물과 자연을 유람하기로 한 감회 서정 표현(「權陶隱伯夷虎臣以詩請玩菊花有故不赴因次其韻二首」․「南德潤衍以花時不稱貧爲歎遂吟一絶」․「待李德薰不至」)․개인적인 서정을 반영한 작품(「十五夜聞李養源棄官歸吟贈」)․「望洋亭」․「無題」․「度璥行到忠州有懷再用峽字韻」․「古意」․「才山早行」․「古人云事不如意者十常八九…」․「千梳後有騷思遂吟」․「詠野火」․「三五七言」) 등이다.



다섯째 다양한 인물과 교유한 시 작품인데 특정 인물의 부임에 전별하며 전도양양을 축원하며 지어 준 시(「送朴子澄漉赴京」․「送李生汝遠會試」․「送李德薰之碧沙」․「次黃會元汝一韻二首」․「送黃是之令公奉使天朝」․「送吳通判之蔚山」․「又贈吳通判」․「送李德薰月城提督」․「一善奉別閔佐郞赴燕京二首」․「送申將軍防禦湖南十九韻」)․화운하거나 차운하며 학문적 교류와 유학자로서 상호 수신과 권학을 강조하는 일련의 시를 통해 우의 증진과 성리학자로서 책무를 다짐하는 작품(「有懷李炊沙德薰汝馪」 ․「次李德薰韻」․「寄昌樂郵軒二首」․「連夜夢李德薰」․「權上舍士英俊臣新搆華堂…」․「次李仁伯榮門韻寄李大中二首」․「又次寄仁伯二首」․「再用前韻」․「吳竹牖澐尋遊早晩牢前計…」․「漫興」․「次五峯李相國好閔雲」․「申上舍獻之以金孝仲榮祖四韻…」․「又次前韻贈金子昷」․「次昌原壁上韻」․「聞韶館中詠五月十日雨追呈李東岳」․․「呈金亨叔會試之行」․「再呈東岳李公」․「題郭丹谷瑨幽居」․「吟贈李德薰」․「贈別金栢巖玏裵安村應褧赴天朝幷序」․「金勉飮賓琴上舍有感舊之作遂次」․「次柳塗鰲山孔巖韻」․「次柳塗題朴逍遙堂河淡仙巖韻」․「仙巖次蒼石埈韻」) 등이다.



여섯째 사실적 안목으로 자연 경물을 핍진하게 그려낸 작품(「十八日才山遇雨」․「妬花風問答」․「觀秧苗」․「英陽水邊大木偃于沙上開花」․「木/叔井次黃仲擧俊良韻」․「詠梨花」․「詠梨花帶雨」․「洞口前峯」․「東崖一角石衣正紅」․「山中雨後卽事」․「詠栗三首」․「望見小白山」․「八月初六日茂江道中」․「九日泣嶺西」․「詠楓」․「曉寒」․「次李克休雙碧堂韻」․「寄堂主金景望」․「時興二首」․「曉起」․「偶吟二首」․「次李五峯笣山壁上韻贈許使君」․「沒雲臺」․「曉雪卽事」․「卽事」․「有感」․「才山路遇雨」․「卽事」․「題仙巖六首」․「秋日卽事」․「才山遇雨」․「往權伯武家賞菊」․「詠雪」․「璥西行行過九馬遷有懷得峽字韻」․「松明花十二韻」)․시간적인 추이에 따라 삼라만상이 변화하면서 자연의 미적 자태를 발휘하는 현장을 생생하게 묘파한 작품(「驟雨」․「細雨」․「曉霜有感」․「詠雪」․「八月二十日才山道上」) 등이다.



일곱째 자연 생태나 동식물을 의인화하여 우의적으로 표현한 작품(「假鶴」․「病中吟」․「護菊花」․「秋蠅」․「有所思」․「雲霜不殺草」․「觀鶖攫雉有感」․「送友人」․「聞郭兵使被論」․「無題」․「蠅虎」․「看松」․「鷄避猫巢木末」․「老馬行」․「夢得大魚已具爲龍之狀…」․「詠匏寓意」․ 「無題」)에서 고도의 수법으로 작가 의식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경박한 세태에 대한 풍자와 유교 성리학 진작을 염원하는 작가 의식을 재치 있고 무게 있게 표현해 내었다.

여덟째 수서는 시 작품 과정에서 작시론에 대해 시를 통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作詩苦」․ 「作詩樂」․「自笑」). 시는 결코 안이한 태도에서 탄생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미적 대상을 시인의 감수성과 예리한 관찰력․ 문학 역량을 동원해 혼신의 열정으로 표현해 내야 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이러한 시인의 노력이 수반될 때 작품의 완성도가 높게 되며 감동을 주며 미학적 우수성이 제고된다고 했다. 시를 도표로 정리한다.



연번

제목

형식

비고

1

指侫草

7언절구



2

讀小學

7언율시



3

讀曲禮

7언절구



4

敬次圃隱鄭先生韻奉呈守宰

7언율시



5

八月九日泣嶺東路有感

7언율시



6

十七日泣嶺西路

7언율시



7

十八日才山遇雨

7언율시



8

述懷

7언절구



9

看癸酉南三松司馬榜目

7언절구



10

假鶴

5언절구



11

病中吟

5언절구



12

贈郭兵使再佑

7언절구



13

記夢

5언절구



14

病懷

5언절구



15

送朴子澄漉赴京

5언절구



16

夢中作

5언절구



17

無題

5언절구



18

護菊花

5언절구



19

有懷李炊沙德薰汝馪

5언절구



20

權陶隱伯夷虎臣以詩請玩菊花有故不赴因次其韻二首

5언절구

2수

21

南德潤衍以花時不稱貧爲歎遂吟一絶

7언절구



22

妬花風問答

7언절구

2수

23

有所思

7언절구



24

五月十日不雨二首

7언절구

2수

25

觀秧苗

7언절구



26

作詩苦

7언절구



27

作詩樂

7언절구



28

流頭日病懷

7언절구



29

病中有感

7언절구



30

望洋亭

7언절구



31

送李生汝遠會試

7언절구



32

次黃會元汝一韻二首

7언절구

2수

33

英陽水邊大木偃于沙上開花

7언절구



34

秋蠅

7언절구



35

木/叔井次黃仲擧俊良韻

5언율시



36

次德陽集末所附諸賢韻

5언율시



37

次李德薰韻

5언율시



38

驟雨

7언율시



39

細雨

7언율시



40

送李德薰之碧沙

7언율시



41

送黃是之令公奉使天朝

7언율시



42

有所思

5언율시



43

雲霜不殺草

7언절구



44

偶吟二首

7언절구

2수

45

自笑

7언절구



46

觀鶖攫雉有感

7언절구



47

賞菊次權伯武韻

7언절구



48

寄昌樂郵軒二首

7언절구



49

無題

7언절구



50

日暮有感

7언절구



연번

제목

형식

비고

51

詠梨花

7언절구



52

詠梨花帶雨

7언절구



53

送友人

7언절구



54

次李大中介立藏書樓韻

7언절구



55

養蒙齋

7언절구



56

聞郭兵使被論

7언절구



57

浴川

7언절구



58

靜養有作

7언율시



59

無題

5언절구



60

連夜夢李德薰

5언절구



61

酌水灌園種諸葛菜記所見

7언절구



62

送吳通判之蔚山

7언절구



63

詠栗三首

7언절구

3수

64

望見小白山

7언절구



65

又贈吳通判

7언절구



66

送人昌樂求鷹

7언절구



67

權上舍士英俊臣新搆華堂…

7언율시

권1

68

次李仁伯榮門韻寄李大中二首

7언율시

2수

69

又次寄仁伯二首

7언율시

2수

70

再用前韻

7언율시



71

吳竹牖澐尋遊早晩牢前計…

7언율시



72

洞口前峯

7언율시



73

東崖一角石衣正紅

7언율시



74

送李德薰月城提督

7언율시



75

曉寒

5언율시



76

次李克休雙碧堂韻寄堂主金景望

5언율시



77

再用前雲憶克休

5언율시



78

聞西北虜將有俱發兆有作

5언율시



79

記病

5언율시



80

山中雨後卽事

5언율시



81

八月初六日茂江道中

5언율시



82

九日泣嶺西

5언율시



83

漫興

5언율시



84

次五峯李相國好閔雲

5언율시



85

申上舍獻之以金孝仲榮祖四韻…

5언율시



86

又次前韻贈金子昷

5언율시



87

蠅虎

7언절구



88

詠楓

7언절구



89

曉霜有感

7언절구



90

時興二首

7언절구



91

曉起

7언절구

2수

92

七月久雨書懷二首

7언절구

2수

93

偶吟二首

7언절구



94

次崔季昇晛晋州壁上韻

7언절구



95

次李五峯笣山壁上韻贈許使君

7언절구



96

次昌原壁上韻

7언절구



97

聞韶館中詠五月十日雨追呈李東岳

7언절구

2수

98

呈無爲堂權公盼一絶

7언절구



99

沒雲臺

7언절구



100

疊石樓

7언절구





연번

제목

형식

비고

101

一善奉別閔佐郞赴燕京二首

7언절구

2수

102

曉雪卽事

7언절구



103

看松

7언절구



104

待李德薰不至

7언절구



105

才山早行

7언절구



106

十五夜聞李養源棄官歸吟贈

7언절구



107

再題靜養詩後

7언절구



108

呈金亨叔會試之行

7언절구



109

聞朱景顔日言成一律以寓感悵之懷

5언율시



110

卽事

5언절구



111

有感

5언절구



112

憫旱

7언절구



113

鷄避猫巢木末

5언절구



114

苦寒

5언절구



115

秋暮有感

5언절구



116

才山路遇雨

5언절구



117

卽事

5언절구



118

讀心經有感二首

7언절구

2수

119

立春帖二首

7언절구

2수

120

再呈東岳李公

7언율시



121

題郭丹谷瑨幽居

7언율시



122

吟贈李德薰

7언율시



123

贈別金栢巖玏裵安村應褧赴天朝幷序

7언율시



124

金勉飮賓琴上舍有感舊之作遂次

5언율시



125

次柳塗鰲山孔巖韻

5언율시



126

次柳塗題朴逍遙堂河淡仙巖韻

7언율시



127

題仙巖六首

5언절구

6수

128

仙巖次蒼石埈韻

7언절구



129

寫懷

5언율시



130

記病

5언장편



131

老馬行

5언장편



132

酌水灌園種諸葛菜

5언장편



133

(王/閈)釋褐而來作此以爲戒

5언장편



134

牟麥未熟刈靑而食吟成一篇

5언장편



135

夢得大魚已具爲龍之狀…

5언장편



136

璥西行行過九馬遷有懷得峽字韻

5언장편



137

度璥行到忠州有懷再用峽字韻

5언장편



138

古意

5언율시



139

才山遇雨

5언율시



140

才山歸路遇雨

5언장편



141

古人云事不如意者十常八九…

5언장편



142

送表叔還歸十二韻

5언장편



143

送申將軍防禦湖南十九韻

5언장편



144

秋日卽事

5언장편



145

往權伯武家賞菊

5언장편



146

千梳後有騷思遂吟

7언장편



147

詠雪

7언장편



148

松明花十二韻

7언장편



149

詠雪

7언장편



150

八月二十日才山道上

7언장편





연번

제목

형식

비고

151

三五七言

장단구



152

閑居得雨

장단구



153

秋風吟

장단구



154

詠匏寓意

장단구



155

無題

장단구



156

夢得烏玉四丁白筆二尖作

장단구



157

詠野火

장단구



권3의 「모춘사暮春辭」는 저무는 봄 계절 감각에 맞춰 애틋한 서정을 집약해 표현한 작품이다. 「치술령鵄述嶺賦」은 박제상朴堤上의 의리와 충절을 기린 작품이다. 문면 행간에 작가의 의리 정신과 유가에서 지향하는 충의 정신이 각인되어 있다. 투철한 선비 정신을 구현하고픈 작가의 내면세계가 투영된 작품이다. 제상의 충성심과 부인의 제상에 대한 절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주중강대학舟中講大學」 배에서 어린 학동들에게 「대학大學」을 강론하다는 설정으로 인생행로에서 세파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가는 선비 형상의 견지를 강조하였다. 세파에 휩쓸려 선비의 본분을 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심지를 드러내었다. 교훈과 경계를 담은 글이다.



「삼광부三光賦」 해․달․별이 천리의 운행 이법에 따라 운행해 만물에 혜택을 끼치는 유익한 의미를 강조하면서 주상으로부터 어진 정치 실현과 선비 정신이 구현되고 문장과 도덕이 찬란히 빛을 발하는 시대의 도래를 염원하였다. 「홀낭부笏囊賦」에서는 홀을 차고 다니면서 행동거지를 단아하게 하고 항상 거경居敬하여 자신을 돌보는 계기를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철저한 유자 의식을 반영한 작품으로 수신과 내면세계를 바르게 하는 학문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기를 강조했다. 「재상선무재인재부宰相先務在人材賦」는 국가 발전과 백성들의 안온한 생활 보장은 군주를 어질게 보필하며 정치․행정․ 입안의 핵심 인물인 인재 선발과 공정한 관리 체계를를 구축하여 이들이 역량을 한껏 발휘하게 해야 함을 역설한 글이다.



다음 「상한강정선생구서上寒岡鄭先生逑書」는 한강이 안동부사 재직 시에 올린 글로서 일상의 안부를 묻고 소고 박승임의 문집 발간에 즈음하여 안동부에서 일정 부분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답이동악안물령공서答李東岳安訥令公書」는 동악 이안눌에게 장마철을 경과하면서 안부를 묻고 삼랑포三郞浦의 선박 운행으로 민페를 끼칠까 우려된다고 하고 지난번에 보낸 시를 고쳐 보내달라고 했다. 「답곽정보진서答郭靜甫瑨書」는 보내준 서찰을 받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학문을 권면한 글이다. 「답곽정보答郭靜甫」 역시 안부 편지글로서 제공諸公의 명시를 모아 시첩詩帖을 만들려고 하니 정서해서 보내달라고 했다.



「자경잠自警箴」은 마음이 외물에 의해 요동됨이 없어야 함을 간명히 정리한 글이다. 「자서잠自誓箴」은 빈천貧賤에 대해 거이사명居易俟命하기를 다짐한 글이다. 「일호암잠병서一壺菴箴幷序」는 암자 칭호에서 병 입구가 작은 것처럼 말조심을 해야 난세를 현명하게 살아간다는 원리를 터득했다는 글이다. 「전판명剪板銘」은 송판 자르는데 먹줄에 따라 바르게 켜지는 것처럼 사람은 경敬과 의義를 표준으로 자신을 바르게 세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한 글이다. 「탄일전誕日箋」은 주상의 탄일을 맞아 장수와 덕치 실현을 기원한 글이다.



「단산서원제주우선생봉안문丹山書院祭酒禹先生奉安文」은 역동 우탁의 강직한 면모와 한국 유학사상 그의 업적을 언급하면서 단산서원에 봉안하게 된 의의를 설명한 글이다. 「이산서원이안문伊山書院移安文」은 이산서원이 오래되어 낡아 안전한 곳으로 옮기면서 위패를 봉안하며 지은 글이다. 「청성서원권송암호문봉안문靑城書院權松巖好文奉安文」은 청성서원에 산림처사 송암 권호문(1532-1587)의 위패를 봉안하며 지은 글이다. 「학봉김선생성일봉안문鶴峰金先生誠一奉安文」은 청성서원에 학봉 김성일(1538-1593) 송암 권호문의 위패를 봉안하려는 애당초 사림의 발의에 따라 지은 것인데 뒤에 송암의 위패만 배향했다.



「영산향교오현종사제문靈山鄕校五賢從祀祭文」은 영산향교에 오현五賢을 추모하며 지은 제문이다. 「이산서원이건고묘문伊山書院移建告廟文」은 이산서원을 이건하면서 올린 고묘문告廟文이다. 「이산서원신기제후토문伊山書院新基祭后土文」은 이산서원의 새 터를 잡고 토지 신에게 올린 제문이다. 「이산서원명륜당개기고묘문伊山書院開基告廟文」은 이산서원 명륜당 새 터를 잡고 올린 고묘문이다. 「식사정기우제문食沙井祈雨祭文」은 부석사에 있는 식사정에서 비 내려 주기를 기원하며 태수를 대신해 지은 제문이다. 「철탄산기우제문鐵呑山祈雨祭文」은 철탄산에서 비 내려주기를 기원한 제문이다.



「제서애류선생성룡문祭西厓柳先生成龍文」은 서애 류성룡(1542-1607)을 추모하며 지은 제문이다. 이어지는 제문 역시 이산서원 유생을 대신해 서애 류성룡을 추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제외구남삼송선생문祭外舅南三松文」은 스승이며 장인인 삼송당三松堂 남몽오南夢鰲(1528-1591)를 추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제망우김상사형숙태시문祭亡友金上舍亨叔泰時文」은 벗인 김태시를 추모하며 지은 제문이다. 「제김물암도성륭문祭金勿巖道盛隆文」은 물암 김융(1549-1594)을 추도하며 지은 제문이다. 「제재종질수재염문祭再從姪秀才琰文」은 재종질 박염문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제문이다. 「단산서원상량문丹山書院上樑文」은 단산서원을 건립하면서 지은 상량문이다.



「구만서당상량문龜灣書堂上樑文」은 수서가 향리 후학의 양성을 위해 동지들과 힘을 모아 지은 구만서당을 건립하면서 지은 상량문이다. 이는 후일 구만서원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이어 책문策文 두 편이 있는데 「문궁양달시問窮養達施」에서 선비로서 정주 성리학에 튼실한 기반을 두어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고 그 학문과 실천을 올바르게 이어갈 때 경륜의 학문을 실천해 나갈 수 있다고 했다. 「문교양인재問敎養人才」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기반은 심득지학心得之學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글에서 수서는 ‘육덕六德’․‘육행六行’․‘육예六藝’로 인재를 양성하여 국정에 참여시킬 것을 역설하였다.



권4는 잡저雜著이다. 「동계갱정약문洞稧更定約文」은 동계 조직 및 독서 규약과 준행 법도를 조정한 약정문이다. 「동계독법문洞稧讀法文」은 준행할 법도 권면과 위약한 자에 대한 징계 등을 명문화한 글이다. 「동계갱정약문발洞稧更定約文跋」은 동계를 다시 정한 글에 대한 발문이다. 「박박전가시경가薄薄田歌示璥歌」는 척박한 땅을 옥토로 만든 성과를 들어 심성 수양을 은유한 한시이다. 「오륜가五倫歌」는 부자父子․군신君臣․부부夫婦․형제兄弟․붕우朋友 사이에 지킬 도리를 정리한 국문 시조 8편이다.



이 작품에 오륜 강상의 정립과 실천을 강조하고 성리 질서 확립을 위한 교훈적 내용을 담고 있다. 국문 시조를 창작해서 한문을 해득하지 못한 일반인을 위해 지은 것이다. 「사우록師友錄」은 단곡丹谷 곽진郭瑨․취사炊沙 이여빈李汝馪․권성오權省吾가 수서의 행적을 간략히 정리한 글이다. 「구만서당유생제문龜灣書堂儒生祭文」은 금시해琴是諧가 구만서당 창건의 내력을 언급하며 수서를 추모한 제문이다. 「동중유생제문洞中儒生祭文」은 이성한李成雗이 수서의 행적을 추모하며 애도한 제문이다. 이어 이와 같은 이흥문李興門․배상익裵尙益의 제문이 실렸다.



이어지는 「봉안문奉安文」․「상향축문常享祝文」은 조정융曹挺融이 수서의 유학자적 행적을 회고하며 후학들에게 끼친 영향력을 강조하며 지은 글이다. 「이건시환안고유문移建時還安告由文」은 권정택權正宅이 구만서당을 이건하면서 수서의 행적을 추모해 지은 글이다. 「승원시고유문陞院時告由文」․「승호축문陞號祝文」은 이세택李世澤이 구만서당이 구만서원으로 승격됨에 따라 지은 글이다. 「이건환안제문移建還安祭文文」은 대산大山 이상정李相靖이 구만서당 이건 때 수서의 위패를 옮겨 배향하며 지은 제문이다. 「선인장가봉증박수서선배仙人杖歌奉贈朴水西先輩」는 이민성李民宬이 수서의 효행과 전형적인 선비의 형상을 추모하며 지은 시이다.



「경증박도사자부인수석시병서敬贈朴都事慈夫人壽席詩並序」는 단곡丹谷 곽진郭瑨이 수서 모친의 장수와 수서 가문의 효행을 칭송하며 지은 시이다. 이어 권두문權斗文이 수서에게 지어 준 증별시와 수서가 예안현감 직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에 김령金坽이 수서의 치덕을 칭송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시가 있다. 다음 김중청金中淸이 수서와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지은 시 한 수가 있다. 말미에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묘표墓表」와 정종로鄭宗魯가 지은 「행장 行狀」 및 박제안朴齊顔이 지은 「가장家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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