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곡 김득신

2022. 6. 2. 23:13한국의 글,그림,사람

柏谷 金得臣(백곡 김득신 1604-1684)의 億萬齋



예나 지금이나 학문에 공을 이룬 선비는 부지런함으로써 그를 이룩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우리나라 문장 대가로 글을 많이 읽은 분은 하나 하나 다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 전하기를, 괴애 김수온(金守溫1410-1481)은 문을 쳐닫고 글을 읽어 밖을 엿보지 않다가 뜨락에 내려와 낙엽을 보고서야 비로소 가을임을 알았고, 허백당 성현(成俔1439-1504)은 낮에는 읽고 밤에는 암송하며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뒷간에 가서도 혹은 돌아올 줄을 잊은 때도 있었으며, 김일손(濯纓1464-1498)은 ‘韓愈의 글’을 천 번이나 읽었고, 윤결(醉夫1517-1548)은 ‘맹자’를 천 번이나 읽었고, 소재 노수신(盧守愼1515-1590)은 ‘논어’와 ‘두보 시’를 이천 번이나 읽었으며, 백호 임제(林悌1549-1587)는 ‘중용’을 팔백 번이나 읽었고, 간이 최립(崔岦1539-1612)은 ‘한서’를 오천 번이나 읽되, 특히 ‘항적 전’을 일만 번이나 읽었고, 창주 차운로(車雲輅1559-1637)는 ‘주역’을 오백 번이나 읽었고, 동악 이안눌(李安訥1571-1637)은 ‘두시’를 수천 번 읽었고, 어우 유몽인(柳夢寅1559-1623)은 ‘장자’와 ‘유종원의 글’을 천 번이나 읽었고, 동명 정두경(鄭斗卿, 君平은 字임, 1597-1673)은 ‘사마천의 사기’를 수천 번이나 읽었단다.
나(柏谷 金得臣, 1604-1684, 金時敏 장군의 손자)는 본 바탕이 노둔하여 글 읽음의 공력이 남보다 갑절이 드니, ‘사기’와 ‘한서’와 ‘한유와 유종원의 글’ 같은 것은 모두 손으로 베껴가며 만여 번을 읽음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 ‘백이전’을 가장 좋아하여 일억 일만 삼천 번(1억은 10만을 말함, 11만3천 번)을 읽음에 이르러 마침내 작은 움집을 이름하여 ‘억만재’라 하고, 이어서 절구 한 수 짓기를, “漢· 宋· 唐· 秦의 글들을 골고루 들쳐가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일만 번씩 읽어 넘겼더니, 가장 좋았던 백이전의 기괴한 문체는, 날아오르는 빼어난 기운으로 구름을 뛰어넘고자 하는 듯함을 자아내었다.”고 하였다. 지난 경술년(1670년)에 가뭄을 만나 팔도에 흉년이 들고 그 이듬해에 큰 기근과 염병까지 겹쳐서 도회지와 시골을 가릴 것 없이 쌓인 시체가 그 수를 알지 못함이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일컬어 말하기를, “금년에 죽은 사람이 그대가 읽은 책의 숫자와 더불어 어느 것이 더 많은가” 라고 하였으니, 대개 나의 많이 읽음(多讀)을 희롱한 것이었다.

古今績學之士는 靡不以勤致之하니 我東文章鉅公의 多讀書者도 亦可歷數라 世傳金乖崖는 閉門讀書하고 不窺外라가 下堂見落葉하고 始知秋天하며 成虛白은 晝讀夜誦하여 手不釋卷하고 如厠에 或至忘返하며 金馹孫은 讀韓文千遍하고 尹潔은 讀孟子千周하고 盧蘇齋는 讀論語와 杜詩二千回하고 林白湖는 讀中庸八百遍하고 崔簡易는 讀漢書五千周하되 偏讀項籍傳이 至一萬回하고 車滄洲는 讀周易五百遍하고 李東岳은 讀杜詩數千周하고 柳於于는 讀莊子와 柳文千回하고 東溟鄭君平은 讀馬史數千遍하고 余는 性이 魯鈍하여 所讀之工은 倍他人하니 若馬漢韓柳는 皆抄讀至萬餘遍이라 而其中에 最喜伯夷傳하여 讀至一億一萬三千算하고 遂名小窩曰億萬齋라하고 仍作一絶曰 搜羅漢宋唐秦文하고 口沫讀過一萬番이라 最喜伯夷奇怪體는 飄飄逸氣欲凌雲이라 去庚戌에 値歲旱하여 八路凶歉하고 翌年에 大饑疫하여 都鄙積屍가 不知其數라 人有謂余者曰 今年死者는 與君讀書數로 孰多云하니 蓋戲余之多讀也라 <終南叢志, 洪萬宗의 詩話叢林> / <柏谷集 附錄의 終南叢志에도 실려있다.>

<柏谷集 附錄> 기록에는 다음과 같다.
我東文章多讀書者 金馹孫讀韓文千遍 尹潔孟子千周 盧蘇齋論語杜詩二千回 林白湖中庸八百遍 崔簡易漢書五千周 項籍傳一萬回 車滄洲周易五百遍 李東岳杜詩數千周 柳於于莊子柳文千回 東溟鄭君平馬史數千遍 余性魯鈍 讀功倍他人 若馬漢韓柳抄讀萬遍 而其中伯夷傳一億一萬八千算 遂名小齋曰億萬 仍作一絶曰 搜羅漢宋唐秦文 口沫讀過一萬番 最嗜伯夷奇怪體 飄飄逸氣欲凌雲 去庚戌 八路饑疫 積屍無數 人戲余曰 今年死者與君讀數孰多云
右玄默子洪于海萬宗 蒐輯諸家詩話 著詩話叢林一帙 終南叢志 卽其一也 撮其語關先世者 記其一二焉 <終南叢志, 柏谷集 附錄>

위의 내용 속의 仍作一絶句 시는 <柏谷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題古文抄冊
杜門端坐萬番讀 漢宋唐秦以上文 最嗜伯夷奇怪體 飄飄逸氣欲凌雲
<柏谷先祖詩集 冊二>

※ 위의 번역은 通文館에서 나온 洪贊裕 선생님의 <詩話叢林>의 번역본을 참고하였다.
※ <與猶堂全書>에 ‘金柏谷讀書辨’이 있는데, 1억을 10만으로 계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이 기록은 백곡 자신의 기록이 아니라 사후에 전해 듣고서 누군가가 기록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余意讀書記非柏谷之筆 及其亡 有爲之記其傳聞者爾”

※ 又有金柏谷得臣 字子公 性糊塗魯質 惟好讀書 晝夜勤讀 凡於古文 不至萬遍不止 尤好伯夷傳 讀至一億一萬八千遍 故名其小齋曰億萬 以文章鳴 孝廟嘗見其龍湖吟一絶 古木寒烟裏 秋山白雨邊 暮江風浪起 漁子急回船之詩曰 無愧唐人 游齋李判書玄錫 銘其碣曰 無懷葛天之民 孟郊賈島之詩 行心八十年兮如一日 讀書億萬數兮奇又奇 人謂之實錄

又有鄭東溟斗卿 性坦率無拘檢 讀馬史幾至萬遍 仁孝之際 文章無出其右 余王考受學于權太學士霞溪愈 權公嘗言鄭公之爲人而笑曰 余少時聞鄭公善馬史 挾冊而請受 鄭使讀之 至疑義問之 則鄭曰 君意如何 曰似如此 鄭曰好矣 每問 必以好答之 余屈首讀至終篇 忽不知鄭所在 擧首視之 鄭於室上面張袖而舞 與余目之曰 好哉好哉 書之文義不須知 而惟多讀可矣 因而笑謂曰 書在多讀而能文章 余於此老見之 君輩唯在多讀書耳 今觀二老讀書 實無異昆侖呑棗 然能多讀而成文章 况讀聖賢之書 如二老之用工 則其進豈獨文章而止哉 <橡軒隨筆下, 順菴先生文集 卷之十三> / 昆侖呑棗 : 큰 덩어리 둥근 채(통째로) 대추를 삼킴.

※ 李玄錫(1647-1703)이 撰한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安豐君 金公墓碣銘 幷序>의 끝부분에는 다음과 같다.
銘曰 無懷葛天之民 老杜孟郊之詩 行心八十年兮如一日 讀書億萬數兮 奇之又奇 四尺之墳兮 千古之名 九原難作兮 噫


※ 安東 金氏 柏谷 金得臣(1604-1684)의 系譜 - 一名 舊安東金氏

金方慶(1212-1300. 諡號 忠烈, 父는 金孝印, 敬順王 金傅 後裔) → 金恂(1258-1321, 上洛君, 愃의 弟, 愃(瑄)은 金九容1338-1384의 曾祖父) → … … → 金益達(金方慶의 현손) → 金顧 → 金孟廉 → 金哲鈞 → 金壽亨(掌隷院司議) → 金彦默(從仕郞, 사위가 李文楗1494-1567) → 金錫(1495-1534, 進士, 己卯士禍로 은둔, 生 忠甲, 孝甲, 友甲, 悌甲, 仁甲) → 金忠甲(1515-1575, 配 昌平李氏, 持平으로서 乙巳士禍를 당하여 20년 동안 귀양삶) → 金時敏(1554-1592, 字는 勉吾, 木川 출신, 晉州牧使로 殉節, 諡號 忠武, 配 扶餘 徐彭壽之女 無子, 충북 괴산에 忠愍祠가 있다. 金方慶의 12세손으로 荷潭 金時讓1581-1643과는 4촌간) → 系 金緻(1577-1625, 慶尙道 觀察使, 配 泗川睦氏 詹之女, 生一男, 生父는 時敏의 형 時晦) → 金得臣 [ 1604-1684, 字는 子公, 號는 柏谷· 龜石山人, 어릴 때 천연두를 앓음, 1642년 사마시, 문과 급제 전에 蔭補로 參奉이 되고, 59세인 1662년(현종 3) 增廣文科에 丙科로 급제, 嘉善大夫에 올라 安豊君으로 襲封되었다. 槐山으로 낙향한 후 1684년 槐山에서 明火賊에게 살해되었다. 配 慶州 金聲發之女, 生 3남 2녀, 현재 槐山 陵村里에는 柏谷이 독서하던 醉默堂이 있고 祖父와 先代의 묘가 있다. 柏谷의 묘는 曾坪 栗里에 父親과 아들 天拄의 묘와 함께 있다. ] → 天拄, 天挺, 天揆 → 可行(1654-1731, 漣川縣監), 可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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