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의 글씨

2020. 11. 24. 14:08한국의 글,그림,사람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의 글씨 - 2

 

 

10-10. 남양주 석실마을 취석비

 

*醉石(취석)

 

이곳에 있는 우암 글씨의 배경과 조선 정치사를 이해하기 위하여, 당시 안동김씨 세거지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글자 그대로 안동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던 안동김씨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병자호란 때 강경 척화파로서 서인을 이끌었던 청음 김상헌과 순결한 그의 형 김상용(楓溪 金尙容:1561~1637)의 조부조에서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하자 관직생활을 위하여 서울 북악산 서쪽 장의동(壯義洞) 일대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정국을 주도하던 서인(후에 노론)의 중추적 집안으로 가세를 넓히기 시작하였다.

 

안동에 남아 뿌리를 내리고 살던 안동김씨들은 지역적 연고인 퇴계의 영향을 받아 학문적으로는 영남학파, 정치적으로는 남인에 속하게 되었으니, 기호학파에다가 정치적으로 반대 당파인 서인에 속했던 장의동 거주 김씨들을 이들과 구분하여 장동김씨(壯洞金氏)라 불렀다.

 

남양주 석실마을에는 한양에서 뿌리를 내린 청음의 조부를 비롯하여 청음 형제, 손자인 김수증 김수항 형제의 묘를 포함하여 문중의 묘역이 있는데, 17-18세기 정국을 주도한 장동김씨(壯洞金氏)들에게 장의동이 생전의 세거지(世居地)였다면, 남양주 석실마을은 사후의 세거지 즉 세장지지(世葬之地)인 셈이다.

 

 

우암의 강력한 정치적 동지였던 김수증과 김수항 형제가 1668년 조부 김상헌의 묘가 있는 이곳에 아버지를 위하여 도산정사(陶山精舍)를 세우자 우암이 醉石(취석)’ 글씨를 써주었으며 1672년 이 글씨를 새겨 비석을 세워놓았는데 취석비(醉石碑)라 한다.

비석 뒷면에는 우암이 이 글씨를 써준 내력을 기록한 김수증의 '附書陶山精舍記後(부서도산정사기후)‘가 새겨져 있는데 내용을 풀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서인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청음 김상헌이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잡혀갔을 때 중국인 맹영광이라는 사람이 청음의 의로운 행동을 흠모하여 도연명(陶淵明)'채국도(採菊圖)'를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도산정사에 도연명의 채국도(採菊圖)와 영정을 함께 모신데서 비롯되었으며, ‘醉石은 주자와 연관된 도연명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도연명이 향리인 여산에 살 때 근처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평소 도연명은 술에 취하면 그 바위에 올라가 잠을 잤다고 하여 그 돌을 취석 혹은 도공취석((陶公醉石)이라 불렀다고 한다.

주자가 이 지역 지방관으로 있을 때, 도공취석 곁에 집을 지어 귀거래관(歸去來館)이라 이름붙이고 살면서 도공취석귀거래관(陶公醉石歸去來館)’이란 시를 남겼는데 주자를 신봉하는 유가에서는 중요한 일화로 삼아 인용하곤 한다.

 

우암은 향리에서 무위자연하며 살았던 도연명을 빗대어 청음을 그리워한 것이다.

 

 

취석비 옆에 있는 석실서원묘정비(石室書院廟庭碑)’도 우암이 글을 짓고 김수증이 글씨를 썼다.

 

같은 글씨의 醉石각자가 충남 예산 가야산 자락에도 있는데, 우암의 수제자인 권상하의 제자 병계 윤봉구(屛溪 尹鳳九:1683~1767)가 이곳에 가야구곡을 경영하면서 석실마을 것을 탁본하여 새겼다고 보아야겠다.

 

 

10-11. 충북 제천의 청풍 한벽루

 

*寒碧樓(한벽루)

 

한벽루의 터주대감은 청풍 현감을 지내기도 한 이 고장 출신 권상하인데, 권상하는 스승 우암이 2차 예송논쟁 때 남인에 패하여 유배당하는 것을 보고 청풍으로 낙향, 일체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았다.

 

언제 써주었는지, 우암의 寒碧樓(한벽루)와 항상 우암의 흔적을 따라다니는 김수증의 편액이 나란히 붙어 있다.

 

 

10-12 충북 제천 황강영당

 

*寒水齋(한수재-인터넷 자료사진)

 

 

*黃江影堂(황강영당-인터넷 자료사진)

 

 

우암의 수제자 한수재 권상하(1641~1721)가 낙향하여 후학들을 강학하던 곳에 1726년에 황강영당을 지어 권상하를 배향하였다.

이곳에 우암의 글씨라고 전하는 한수재(寒水齋)’황강영당(黃江影堂)’ 두편의 편액과 권상하 글씨의 한수재편액이 있는데, 이때는 이미 우암은 물론이고 권상하까지 별세하고 난 뒤이기 때문에 한수재(寒水齋)’는 생전에 써주었을 수도 있지만, 황강영당은 후대에 우암의 글씨를 모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10-12. 가평의 조종암

 

*日暮途遠 至通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

 

우암의 제자 이제두(李齊杜)1684년 가평군수를 지내면서 기평을 흐르는 조종천변의 암벽에 숭명배청의 이념을 상징하는 조종암(朝宗巖)을 조성하기 위하여 우암에게 자문을 구하자 화양구곡을 경영하였던 우암이 친필과 함께 어떻게 꾸밀 것인지 기본적인 구상까지 알려주었다고 한다.

우암의 글씨 日暮途遠 至通在心는 앞서 살펴보고 나왔던 충남 부여 백마강변의 대재각에 있는 우암의 글씨와 같은 글귀로서 필체는 약간 다른데, 우암의 서체이기는 하나 건조한 글씨에 우암의 글맛이 상당히 빠져있다. 꾸밈없는 우암의 필체를 꾸미려는 석공의 오류가 아닌가 한다.

조종암을 이곳에 세우게 된 이유는 가평의 옛이름인 조종(朝宗)에서 비롯된 조종천(朝宗川)이 있기 때문이다. 조종(朝宗)이란 여러 강물이 바다에 흘러 들어가 모인다는 뜻인데, 제후가 천자를 알현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기에 우암을 따르던 노론세력들에 의해 중화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새롭게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이와 같은 조종암과 우암과 관련된 내력은 1804년 후학들이 비에 새겨 조종암 가운데 세워놓아 전하게 되었다.

 

조종암에 있는 우암의 글씨 주위에 명나라 의종의 어필인 思無邪(사무사-생각에 사특함이 없음), 선조의 어필인 萬折必東 再造瀋邦(만절필동 재조심방),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우(朗善君 李俁)의 글씨 朝宗巖(조종암) 등이 새겨져 노론의 정치이념인 소중화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11. 강원도에 있는 우암의 글씨

 

우암은 기호학파의 영수답게 충청도를 중심으로 경기도와 호남 지역에 많은 글씨를 남겼는데 뜻밖에도 강원도에도 우암의 글씨가 적지 않다. 1674년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 윤선도 등과 치열하게 맞붙은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자 우암은 이듬해 함경도 덕원(지금의 함경남도 문천)으로 유배 갔다가 4개월 만에 다시 동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장기(지금의 포항)를 거쳐 거제로 이배되었다가 1680년 남인 정권이 숙청당하고 서인이 재집권하자 6년만에 비로소 풀려났다.

 

이때 한양에서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로 간 유배 행로를 따라 우암 글씨의 흔적들이 남겨져 있다.

 

 

11-1. 강릉 해운정

 

*海雲亭(해운정)

 

*程夫子影堂(정부자영당)

 

해운정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어촌 심언광(漁村 沈彦光:1487~1540)이 지은 별당이다. 심언광은 우암 보다 앞 세대의 인물로 우암과의 뚜렷한 연관은 보이지 않는데 유배 가는 길에 유서 깊은 집이라 묵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에 심언광이 정부자(程夫子:주자에 앞서 성리학의 기초를 다진 정이 정온 형제로서 앞서 도봉산 글씨 중 염락정파에서 등장하였다.)의 영정을 구하여 모신 사당의 편액 程夫子影堂(정부자영당)’도 우암의 글씨이다.

 

 

11-2. 삼척 해암정

 

*海岩亭(해암정)

 

우암의 글씨 오른쪽에 서인의 대 선배격인 송강 정철의 글씨 石鐘檻(석종함)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11-3. 영월 금강정

 

*錦江亭(금강정)

 

주위에 비운의 왕 단종과 관련된 유적이 있어 조선시대 대유학자들의 방문과 기록이 많이 있는데, 우암이 유배가 끝난 뒤인 1684년 금강정을 방문하여 주위에 펼쳐져 있는 절경을 바라보며 금강정기(錦江亭記)’를 썼다. 이때 편액을 남겼을 것이다.

 

 

11-4. 속초 영랑호

 

*永朗湖(영랑호-인터넷 자료사진)

()’자와 ()자 왼쪽으로 우암(尤庵)‘ 글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2016년 속초시에 있는 영랑호 주변 바위에서 우암의 글씨 영랑호(永朗湖)’가 일반인에 의하여 발견되어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랑호 각자와 관련된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문집에서 찾을 수 있는데, 우암의 제자인 검재 김유(金楺:16531719)검재집(儉齋集)’巖上刻永朗湖三字, 云是尤菴先生筆而易郞以朗(암석핵영랑호삼자, 운시우암선생필이역영이영)’라고 나오며, 이해조(李海朝:16601711)명암집(鳴巖集)’湖邊石上, 刻永郞湖三字, 尤翁筆也(호변석상, 각영랑호삼자, 우옹필야)”라고 나온다.

내용은 영랑호변의 바위 위에 영랑호 3자가 새겨져 있는데, 우암 글씨라고 기록해 놓았다. 통상적으로 영랑호의 을 쓰는데 우암이 으로 바꿔썼다는 내용으로, 이번 발견된 각자는 김유의 기록대로 永朗湖이므로 송시열 글씨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강원도에 우암의 유배길을 따라 고성 가학정, 청간정, 해산정 등에도 우암의 글씨 편액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정자와 함께 편액도 사라지고 없다. 간성 선유담(仙遊潭), 강릉 경포호의 조암(鳥巖)에는 각자가 있다고 한다.

 

 

 

12. 광주 주변 지역에 있는 우암의 글씨

 

광주를 비롯한 호남지방은 조선의 정계에 본격적으로 당파가 생기기 전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1510~1560),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1527~1572)등 당대 쟁쟁한 거유들을 배출한 바 있는데, 이들은 영남학파의 퇴계와 각별히 교류하면서 기호지방과 달리 지역적으로 강한 당파색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고봉은 퇴계의 제자로서 장장 8년에 걸쳐 퇴계와 유명한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을 통하여 서로 상대의 의견을 반영하여 자신의 견해를 수정 발전해나갔던 좋은 선례를 남긴 바 있다.

 

이 무렵, 광주 지역의 유림에 중추적 위치에 있던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1493~1582)이 면앙정을 짓고 후학들과 가사문학의 문단을 형성하였다. 여기에 김인후와 기대승을 비롯하여 임제(미수의 외할아버지), 고경명, 임억령, 양산보를 비롯하여 광주 지역 유림의 명망 있는 인사들이 출입하며 교유하게 되었는데, 그 말단에 송강 정철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1593)은 원래 왕가의 외척으로 한양 출신이지만 아버지가 을사사화(1545년 대윤과 소윤파 간의 권력투쟁)에 연루되어 집안이 풍비박산나자, 외지로 16세 때 조부의 묘가 있는 담양 청평에 정착하였으며, 앞서 거명한 호남 사림의 여러 학자들에게 학문과 시를 배우면서 지역의 유림들과 교유하는 한편으로 서인의 영수였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등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정계에 알리기 시작한 중요한 시기였다.

송강은 27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를 한 후, 당시 동서파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어 서인의 영수 지위에까지 올라 정여립 사건 때 무자비하게 동인을 숙청하는 등 정국을 이끌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러 차례 부침을 하였는데 당쟁에서 밀릴 때마다 담양으로 낙향하여 숨을 고르며 지역 유림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서인 세력이 이 지역에 점차 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권력에서 밀려나 낙향한 심정을 담은 정철의 유명한 사미인곡을 비롯하여 주옥같은 가사문학의 작품들이 이때 광주에서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이 시기보다 반세기 지난 후인 우암이 정국을 주도할 무렵, 광주지역은 우암과 같은 당파(서인-노론)로 인연이 된 인사들 덕분에 우암의 글씨가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12-1. 담양 소쇄원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는 우리나라 정원의 진수로 일컬어지는 소쇄원은 조선 정원의 백미를 즐길 수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덤으로 우암의 글씨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 중에 하나이다.

 

소쇄옹 양산보(梁山甫: 1503~1557)의 스승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하면서 조성한 정원이 소쇄원(瀟灑園)이다. 소쇄원의 소쇄는 본래 중국의 남북조시대 시인인 공덕장(孔德璋)북산이문(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서 깨끗하고 시원함을 의미하고 있으며, 양산보는 이러한 명칭을 붙인 정원의 주인이라는 뜻에서 자신의 호를 소쇄옹(瀟灑翁)이라 하고, 정원의 이름을 자호에서 따와서 소쇄원이라 한 것이다.

 

*瀟灑處士 梁公之廬(소쇄처사양공지려-소쇄처사의 조촐한 집)

 

*五曲門(오곡문)

오곡문의 오곡이란 주변의 암반 위에 계류가 자모양으로 다섯 번을 돌아 흘러 내려간다는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위의 두 글씨는 소쇄원 뒷 담장에 새겨져 있다.

 

*霽月堂(제월당)

 

*光風閣(광풍각)

소쇄원 위 아래로 있는 정자의 편액으로서, 앞서 도봉산 글씨의 제월광풍에서 글귀의 유래를 살펴본 바 있다.

 

 

12-2. 담양 명옥헌

 

*鳴玉軒 癸丑(명옥헌 계축)

여름철 명옥헌은 배롱나무로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명옥헌 정자 좌측 작은 계곡가에 새겨져 있다.

 

우암이 제자인 명옥헌의 주인 오기석(吳祺錫 1651~1702)을 아끼는 마음에 정자의 당호를 명옥헌이라 짓고 써준 글씨 鳴玉軒 癸丑(명옥헌 계축)’이 계곡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이 글씨를 모사하여 명옥헌 정자의 편액으로 달아놓았으나 모사가 조잡하여 우암의 글맛을 살리지 못하였다. 계축(癸丑)이라니 1673년에 썼다.

 

 

12-3. 광주 환벽당

 

*環碧堂(환벽당)

 

나주목사를 지낸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낙향하여 강학하던 곳인데, 송강 정철이 처음 낙향 하였을 때 이곳에 머물면서 학문을 닦았으며, 이때의 인연으로 김윤제는 그를 외손녀와 혼인을 시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환벽(環璧)이란 푸르름이 고리를 두르듯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뜻하는 것으로 전주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 환벽정 이름을 단 정자가 많이 있다.

 

 

12-4. 광주 양과동정

 

*良瓜洞亭(양과동정)

 

제봉의 별서로 불릴 만큼 임진왜란 때 서인 출신의 대표적인 의병장인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1533~1592)이 자주 오르며 누정기를 남기는 등 자취가 남아 있는 정자라 제봉을 그리는 마음으로 우암이 편액을 써 주었다.

 

 

12-5. 장성 필암서원

 

*廓然樓(확연루)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은 하서 김인후를 배향한 서원으로서, 우암이 문루의 이름을 확연루라 짓고 편액을 썼다.

 

'확연루(廓然樓)'의 의미는 정자(程子-앞선 도봉산 글씨염락정파참고)의 말씀에 군자의 학()은 확연하여 크게 공정하고, 하서 선생은 가슴이 맑고 깨끗하여 확연히 크게 공정하므로 이에 우암이 특별히 '확연'이란 이름 짓고 편액 글씨를 썼다고 한다.

 

 

12-6. 무안 화설당

 

*花雪堂(화설당)

 

무안 화설당은 유운(柳運, 1580~1643)가 조광조를 구원하려다가 파직당한 후, 향리에 묻혀 술로 울분을 달래다 죽은 곳인데, 생전에 위로 차 찾아온 교유들이 겨울인데도 동백꽃이 있어서 화설(花雪)’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12-7. 영암 죽림정

 

1674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한 이듬해 우암은 함경도로 유배를 떠나고, 우암과 일생 정치적인 운명을 함께 한 김수항은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죽림정은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며 이순신 장군과 각별한 사이였던 희암 현덕승(希菴 玄德升,1564~1627)이 세운 취음정을 후손이 옮겨 지으면서 마침 이곳에 유배 온 김수항에게 작명을 청하자 죽림정이라 지어주었다.

 

이런 인연으로 멋들어진 우암 글씨 竹林亭(죽림정)竹林幽居(죽림유거) 두편의 편액이 달려 있다.

 

*竹林亭(죽림정-인터넷 자료사진)

 

*竹林幽居(죽림유거-인터넷 자료사진)

 

 

죽림정에는 이순신 장군의 서찰을 모각한 현판이 달려 있는데, 유명한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호남을 잃으면 국가가 무너지므로 방비를 단단히 하여야 한다)’의 내용이 들어 있는 편지다.

 

임진왜란 도중 절친한 현덕승이 위문품과 함께 위문을 다녀가자 이순신 장군이 감사의 편지를 보내면서 이 내용을 담았던 것이다. 편지는 죽림정의 현씨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원본은 현충사로 보내고 복사본을 달아 놓은 것이다.

 

 

 

이밖에도 광주지역에 永思齊(영사제), 효령동 우산정사의 편액인 '淸白傳家(청백전가), 함평 四梅堂(사매당), 화순 三溪精舍(삼계정사) 등에도 우암의 글씨가 있다는데, 한결같이 우암과 학문적으로 정치적으로 연관된 인물들의 연고지이다.

 

 

 

13. 충북 괴산의 화양구곡에 있는 우암의 글씨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화양구곡(華陽九曲)은 우암이 60세가 되는 1666년에 들어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서 은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화양(華陽)이란 중국 문화의 햇빛이라는 뜻으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화의 주역으로 등장한 명청교체기에 명나라에 대한 의리론인 대명의리(大明義理)를 주장한 우암이 이곳에 작은 중화(小中華)를 구현하고자 한 곳이다.

우암 사후에 권상하가 우암의 유지를 받들어 구곡을 정립하였으며, 이후 민진원(閔鎭遠:1664~1736)이 전서체로 구곡의 이름을 바위에 새김으로써 화양구곡이 완성되었다.

대표적인 우암의 유적지이며 우암을 배향한 화양서원이 있어 우암을 따르던 노론세력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경승지답게 바위에 새겨진 선비들의 글씨도 많은데, 특히, 우암의 글씨를 비롯하여 중국 명나라 황제의 글씨들은 우암의 숭명의식을 선명하게 대변하고 있다.

 

 

13-1. 1곡 경천벽

 

*華陽洞門(화양동문)

 

화양구곡은 주차장에 들어서기 전에 있는 제1경천벽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차를 타고 곧장 들어가다가는 자칫 1곡을 놓치기 쉽다. 계곡 건너편에서 멀리 바라보는 경천벽에 희미하게 華陽洞天이 새겨져 있다.

 

 

13-2. 암서재가 있는 제4곡 금사담

 

화양구곡의 아름다움은 우암이 공부했다는 암서재(巖棲齋)가 있는 제4곡 금사담(金沙潭) 주변에서 절정을 이룬다.

 

*화양구곡의 암서재가 있는 금사담 주변

 

암서재 올라서기 전 우측 석벽에 두 줄로 새겨진 전형적인 우암의 행서체 글씨를 볼 수 있다.

 

*蒼梧雲斷 武夷山空(창오운단 무이산공)

 

蒼梧雲斷 武夷山空을 직역하면 창오산엔 구름이 끊겼고, 무이산은 텅 비어있네.’가 되지만, ‘창오는 중국의 순()임금을 일컫는 말로서 중국의 임금을 의미하는 대명사격이며, ‘무이는 주자를 상징한다. , ‘중국의 임금도 없고 주자도 없는데, 어찌 이곳에 우암인들 있을쏘냐.’라며 지독한 숭명주의와 주자절대주의자인 우암의 철학을 담고 있다하겠다.

 

암서재에는 권상하 글씨의 암서재기(岩棲齋記)’ 현판이 있으며, ‘蒼梧雲斷이 새겨진 석벽 옆에는 명태조의 서체인 忠孝絶義(충효절의)’도 있다.

 

 

13-3. 5곡 첨성대

5곡 첨성대(瞻星臺)에도 조선과 명나라 임금의 글씨를 비롯하여 많은 글씨들이 소중화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우암의 글씨도 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글씨 非禮不動(비례부동-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과 조선 선조 어필인 萬折必東(만절필동-강물이 일만 번을 꺾여 굽이쳐 흐르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임진왜란 때 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에 일종의 충성 서약 같은 것이다)이 있으며, ’非禮不動우측에 네모난 공간에 원래는 임진왜란 때 원병을 파견한 명나라 신종의 글씨인 玉藻氷壺(옥조빙호)’ 각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 연유인지 파내어지고 없다.

 

이 비어 있는 곳 바로 아래 우암의 필체로 숭명사상의 극치를 보여주는 문장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을 찾을 수 있다.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

 

이 문장은 직역하면 조선의 하늘과 땅은 명나라의 것이고, 조선의 해와 달도 명나라 의종(명나라 마지막 숭정황제)의 것이라는 뜻으로 수치스럽도록 사대주의에 빠진 문장으로 보이지만, 당시 주자절대주의 성리학자들의 의식을 조금 이해해 준다면 뜻이 다소 순화되어 조선은 오랑캐인 청나라가 아닌 명나라의 질서에 아직도 있다.’ 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13-4. 화양구곡 인근의 사담동천

 

*沙潭洞天(사담동천)

 

화양구곡의 인근에 있는 사담계곡 입구 암벽에 새겨져 있는 사담동천도 우암의 글씨이다.

 

 

 

14. 영남에 있는 우암의 글씨

우암이 청년시절 동춘당과 함께 영남지방을 유람한 적은 있지만, 출사하고 난 이후에는 급변하는 정세의 한가운데 있다 보니 유배를 떠나지 않는 한 한가롭게 유람을 다닐 여유는 없어 방문 기념 삼아 글씨를 남기 사례는 없는 것 같다. 후대에 들어와 영남에도 우암의 학문을 추종하는 노론세력이 적지 않았지만 우암의 글씨로 현판을 달거나 각자를 새겨 널리 보이기엔 쉽지 않았던지 전국적으로 그 많던 우암의 글씨가 영남지역에서는 아주 귀하다.

 

 

14-1. 합천 함벽루

 

*涵碧樓(함벽루)

 

우암의 큼지막한 글씨 涵碧樓(함벽루)’가 합천 황강변 함벽루 뒤 석벽에 새겨져 있고, 좌측 관지에 尤庵書(우암서)’라 써 놓았다. 우측에 새겨진 명문도 우암의 글씨인데, 崇禎後辛酉1681년에 함벽루를 중건한 기념으로 당시 군수 조지항(趙持恒)에게 써준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우암이 함경도로 유배되었다가 거제로 이배된 후에 1680년 단성을 거쳐 합천으로 가는 도중에 해배가 되었다. 그래서, 그 이듬해인 1681년에 합천에 머물면서 글씨를 써준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14-2. 합천 홍류동천 최치원의 제시석

 

합천 해인사로 들어가는 홍류동 초입 계곡 건너편에 최치원의 유적지로 전하는 농산정(籠山亭)으로 들어가는 다리 우측 도로변 석벽에 수많은 각자가 있는 가운데 최치원이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던 심정을 담아 지은 시를 멋들어지는 행초체로 새겨놓았다고 이 석벽을 최치원의 제시석(題詩石)’이라 전한다.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미친 듯 겹친 돌 때리어 첩첩한 산 울리니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지척간의 말소리조차 분간하기 어려워라.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늘 시비할 때 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농산) 짐짓 흐르는 물소리로 온 산을 완전히 에워싸고 있노라.

 

농산정은 이 시의 끝 두 글자를 따와 이름을 지은 것이다.

 

 

한강 정구(寒岡 鄭逑:1543~1620)1579년에 이곳을 유람하고 남긴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 의하면, ‘최고운의 시 한편을 폭포 옆 바위 위에 새겨두었는데 매년 장마 때마다 거센 물결에 깎여 이젠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마멸되었다. 손으로 더듬어야 어렴풋이 한두 글자를 겨우 판별할 수 있을 따름이다.’ 라고 전했으며, 정시한(丁時翰:1625~1707)1686년 해인사를 방문한 기록을 산중일기에 남겨 놓기를, ‘최고운의 시가 새겨져 있으나 많이 마멸되어 지금은 , , , 정도만 뚜렷이 알아볼 수 있을 따름이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정시한이 방문한 이때까지의 상황은 농산정 앞 계곡의 암반에 각자가 새겨져 있었고, 각자의 마모가 심하여 알아볼 수 없는 지경임이 명확해 보인다.

 

그런데, 이때로부터 40년이 지난 1725년 명암 정식(明庵 鄭栻:1683~1746)이 가야산 일대를 유람하고 남긴 가야산록(伽倻山錄)‘에서 안내해 준 해인사 스님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글씨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쓴 것이다. 승려가 시내 가운데 돌에 최치원의 친필이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글자가 마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옮겨와 다시 새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해인사 입구 홍류동에 있는 최치원의 제시석

주변에 낙서장 같이 정체불명의 글씨들이 많은데, 가운데 세줄 행초체의 글씨이다. 이 글씨 좌측 바짝 붙여서 작은 글씨로 조잡하게 尤庵書라고 추가로 써 놓은 것이 보인다.

 

해인사 영내에 속하는 이곳에 관한 한 비교적 신빙성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해인사 스님의 증언이므로 그 사이(정시한이 방문한 이후 정식이 방문할 때까지의 기간) 계곡에서 떨어진 석벽에다 최치원의 시를 다시 새겨 놓았음은 분명하다.

이 글씨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이 글씨가 우암의 글씨라는 스님의 증언을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것이다. 유홍준 교수의 답사여행의 길잡이에 다음과 같이 의문점이 요약되어 있다.

 

시 구절을 새긴 왼쪽 아래 尤庵書’(우암 쓰다)란 음각 글씨가 선명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면 이 글씨가 송시열의 작품이란 말인가?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우선 글씨체가 우암의 진중하고 무게 실린 그것과 많이 다르다. ‘尤庵書라는 글씨도 시 구절의 글씨와는 비교할 수 없게 조악하고 새긴 수법도 서로 다르며 본문과의 간격이 너무 좁다. 때문에 오히려 시 구절의 좋은 글씨를 방해하고 있어 후세의 누군가가 덧붙인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이러니 이 시구가 꼭 우암의 필적이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좀 더 확실한 자료가 나올 때까지 글씨의 주인공을 가리려는 노력은 일단 덮어둘 수밖에 없겠다. 다만 어떤 사람의 솜씨이든 글씨가 참 멋들어진 것은 분명하고, 또 이 바위벽의 시를 통해 우리가 고운을 만날 수 있음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지금까지 보아온 우암 특유의 힘이 넘치는 행서체 글씨와는 확연히 다르기는 하지만, 서예에 일가견이 있던 우암이 행초체인들 멋들어지게 쓰지 못했을까. 원교 이광사는 천은사 일주문 편액을 쓰면서 화마를 다스리기 위하여 물 흐르듯 썼다고 했는데, 우암도 원래 이 글이 있었던 계곡암반을 생각하면서 물 흐르듯 행초체로 휘날리며 썼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명암이 해인사를 방문했을 때는 우암이 활동하던 시기와 고작 40년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아주 먼 옛날 이야기도 아니고 스님도 무슨 근거가 있었기에 우암의 글씨라고 했을 것이다. 물론, 조잡하게 쓴 尤庵書는 후대에 추가한 것으로, 노론계열에서 우암의 글씨로 전해지고 있음을 표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씨는 과천 관악산 입구인 자하동천에서도 볼 수 있다. 1900년대 초 이 지역 유림(아마도 입구에 있는 과천향교도 노론세력권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에서 홍류동에 있는 글씨를 탁본하여 이곳에도 그대로 새긴 것이다. 나름 우암의 글씨라는 믿음이 있기에 옮겨 새겼을 것이다.

 

*관악산 자하동천에 있는 최치원의 제시석

좌측 석면에 새겨놓았지만 얕아 가까이 가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계곡 건너편 암벽의 우측 상부에는 추사의 제자인 신위(申緯) 글씨의 白雲山人(백운산인)’, ‘紫霞洞天(자하동천)’이 있고, 그 좌측 중간 바위 상부에 제시석 각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나, 각자의 상태가 좋지 못해 가까이 가본들 우암의 글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고 접근도 용이하지 않아 일부러 찾아 갈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14. 지리산 자락에 있는 우암의 글씨

 

지리산 자락에 있는 우암의 글씨를 제대로 맛보기 위하여 지금까지 전국을 일주하듯 한참을 돌아왔다. 우암 스스로 도예일치(道藝一致)를 주장하였듯, 서예()는 단순히 심미적인 기준으로 볼 것이 아니라 글씨를 쓴 사람의 성품 학풍 인격 등 도()가 담겨 있으므로 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서예 글씨를 제대로 감상할 수 없기에 우암의 글씨에 담겨 있는 그의 도를 살펴보고 나오느라 돌아오는 길이 더 멀어졌던 것이다.

 

 

14-1. 지리산의 관문 산청 원지 적벽산

 

영조대의 지리지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1765)적벽은 관아의 동쪽 5리에 있다. 둔철산에서 뻗어 나와 원지촌의 주맥이 되었다.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하였다.

또한, 연재(淵齋) 송병선의 1872단진제명승기(丹晉諸名勝記)에 기록하기를 길은 적벽 아래로 나 있고, 푸른 단애와 깎아지른 절벽이 층층이 쌓여 있다. 뻗어 나간 길이가 몇 리나 이어졌고, 긴 강이 완만하게 돌아 나간다. 밖은 바로 흰 모래가 넓게 퍼져 있어 물길 가운데로 배를 띄울 만하다. 단애에 새겨진 赤壁이란 두 글자는 문정공(송시열)의 글씨다. 거기 사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전에는 열두 호접루(蝴蝶樓)가 매우 아름다웠는데 홍수가 나서 없어지고 다시 옛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하니, 매우 한스럽다.‘ <이재구>님 글에서.

 

송병선의 문하에서 수학한 단성출신 이도복(李道復)우암이 (2차 예송논쟁으로 덕원-장기-거제로 귀향갔다가) 해배되어 귀향할 때 이곳에 들러 남명선생의 시구 중 孤鶴橫舟赤壁蘇(고학횡주적벽소-외로운 학이 배를 스쳐 감은 소동파의 적벽부의 구절 같네)의 뜻을 살려 손수 기록했다.’고 했다. 연재는 강누마을 안동권씨 가문의 권병구와 친분이 두터워 적벽 옆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赤壁옆에는 壬戌之秋 七月旣望(임술지추칠월기망각-1682년 가을 716)’이라고 새겨 각자한 시기를 기록해 놓았다.

 

*赤壁

적벽산 중앙부 40미터 높이에 새겨져 있다.

 

강누마을의 강변길을 따라 북쪽으로 강물을 거슬러 적벽의 중앙부 건너편 위치로 올라가면 새로 건립한 읍청정을 지나고, 이곳에서 수십미터 더 올라가면 강변 퇴적토에 어렴풋이 건물터가 남아 있는데 읍청정의 구터이다. 귀향길의 우암을 영접하고 적벽 글씨를 받아 새긴 강누마을 안동권씨 집안에서 적벽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에 세운 읍청정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적벽 글씨를 새겼던 것이다.

 

*‘赤壁글씨의 위치 *붉은색 원형으로 표시한 곳.

 

*클로즈업하면 어렴풋이 보이는 赤壁글씨

날씨도 좋지 않고 10배줌 카메라 성능으로는 한계였다.

 

 

경호강 건너편 강누마을에서 적벽을 바라보면, 육안으로 '赤壁' 글씨 찾기가 쉽지 않은데, 옛날에는 사람의 시력도 좋고 맑은 공기에 가시거리도 길어 경호강에 배 띄우고 순 한잔 하며 뚜렷이 보였을 赤壁을 바라보노라면 강물 바람결에 소동파 적벽부 구절이 한층 흥을 북돋았을 것이다.

 

적벽대전에서 인생을 걸고 한판 대결을 벌였던 영웅호걸들은 다 어디로 갔나.

적막한 강물에 달빛만 교교히 비치고 있는데, 일엽편주에 몸을 싣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인생을 돌이켜보니

천지에 하루살이가 붙어있는 것과 같고 망망대해에 한 알의 좁쌀처럼 보잘 것 없다.

인생은 참으로 덧없이 흘러가지만 장강(長江)의 강물은 끝이 없이 흐르는구나!’

 

 

오랜 세월 권력의 핵심에서 정국을 주도하다가 68세 노구에 6년 긴 세월동안 전국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비로소 해배되어 귀향하는 우암의 인생무상 심정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다.

 

 

14-2. 단성 신안정사

 

*至痛在心 日暮途遠(지통재심 일모도원)

석벽 우측에 붉은 색이 입혀 있는 작은 글씨에 부여의 대재각에 새겨진 글씨를 모각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지리산 자락 단성지역은 인조반정 이전에는 남명의 수제자 정인홍이 이끄는 집권 북인세력의 강력한 영향권에 들어있는 지역이었으나, 반정으로 정인홍 계열이 괴멸되어버린 후 집권한 서인의 핍박이 시작되자 이지역의 북인세력들은 남명학맥과 가문의 보존을 위하여 남인으로 서인으로 전향하여 각자 도생하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남인으로 전향한 세력들조차 정인홍 때문에 지역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며 정인홍의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잔존 북인세력을 배척하고 나서자, 이들은 확실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당시 집권 서인의 영수인 우암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우천 권극유(愚川 權克有:1608~1674-후에 18년간 덕천서원 원장을 지냈으며, 어천마을 입구에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로서, 단성 강누마을의 안동권씨 집안이 서인계열로 전향한 계기가 되었으며, 우암에게 赤壁글씨를 받아 새기고 관리해왔던 것이다.

 

딘상에서 안동권씨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노론이 된 성주이씨 가문이 합심하여 주변 지역 노론세력의 집결지 삼아 강누마을 뒤에 신안정사(新安精舍)를 세워 주자와 우암의 영정을 모시고 배향하였다.

19세기에는 전남 장성에서 우암의 학맥을 이어받아 노사학파를 이루고 있던 노사 기정진 (蘆沙 奇正鎭:1798~1879)이 배출한 영남 문인들이 신안정사를 거점 삼으면서 지리산 자락 영남 노론의 주요 근거지 중에 하나가 되었다.

 

신안정사에는 소중화를 정치이념으로 삼는 노론의 본거지답게 화양구곡에서 보았던 명나라 황제 의종의 필체인 非禮不動(비례부동)’ 현판이 있으며, 뒤편 암벽에 노론계의 정치적 표어와도 같은 우암의 글씨 日暮途遠 至痛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를 새겨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같은 글귀의 우암 글씨는 앞서 이미 두 차례나 보고 내려왔다. 충남 부여 대재각에 새겨진 것과 경기도 가평 조종암에 새겨진 그것들이다.

 

대재각에 새겨진 글씨와 글의 순서가 다르지만, 이 글씨가 새겨진 암벽 우측 떨어진 곳에 작은 글씨로 (:글을 쓰고 나서 글을 적은 연유 등을 기록)’을 적어 놓았는데 바로 부여 대재각에 있던 우암의 글씨 머리에 새겨진 내용과 동일하여, 대재각에 새겨진 우암의 글씨를 순서를 바꾸어 모각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14-3. 생비량 어은정사

 

*漁隱(어은)

 

어은 오국헌(漁隱 吳國獻:1599~1672)은 김장생의 문인으로서 우암과는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이후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단성의 도전에 옮겨 살면서 마을 이름을 어은동(漁隱洞)이라 고치니, 우암이 출사하지 않고 성현의 학문을 배우는 그의 은자적 삶을 칭송하여 漁隱이라는 편액을 써주었다.

 

앞서 살펴본 우천 권극유로 대표되는 단성 신안정사의 노론세력은 남명학파의 북인계열에서 인조반정 이후 전향한 세력이라면, 생비량의 어은 오국헌은 정통 기호학파의 문하에서 성장한 노론 직계라 할 수 있겠다.

 

단성과 생비량은 당시 모두 단성현에 속해 있었으므로 권극유와 오국헌은 아주 친밀하게 교유하며 이 지역 노론세력의 뿌리가 되어, 조선조 말까지 영남의 대부분 지역이 남인이 득세를 하는 가운데 단성지역만은 마치 남인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노론세력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14-4. 남원 구룡계곡 입구 용호서원

 

용호서원은 1927년 원동향약계(源洞鄕約;1572년 남원도호부 관내에서 만들어져 현재까지 유지 계승되고 있는 향약계로서, 조선시대 양반계층이 성리학적 교화를 목적으로 조직한 사교계)에 소속된 유림의 선비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서원이다.

설립 당시에는 성리학의 종주인 주자의 영정을 봉안하고 배향하였으나 한말에는 우암의 학맥을 이어받아 연재학파를 이루었던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1836~1905)을 비롯하여 남원 지역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덕행을 펼쳤던 영송 김재홍(金在洪), 입헌 김종가(金種嘉) 등 연재의 문인들로 배향 인물이 바뀌었다.

 

그리하여, 용호서원에는 주자절대주의를 따르던 노론계열답게 주자의 목판 글씨체를 집자하여 龍虎書院(용호서원), 龍虎亭舍(용호정사), 木澗堂(목간당), 須成齋(수성재) 편액을 달아 놓았으며,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목간당의 좌측 벽에 예의 꾸밈없이 써내려간 우암의 글씨 현판이 달려있다.

 

*용호서원의 吾道付滄洲(오도부창주)

 

 

吾道付滄洲(오도부창주)는 원래는 아래와 같은 두보의 시 강창(江漲)/강물이 불어남에 나오는 구절이다.

 

輕帆好去便 가벼운 돛은 가기에 편하고

吾道付滄洲 나의 길은 창주로 향하네.

*여기서 창주는 신선이 사는 곳 또는 은자가 사는 곳을 지칭함.

 

그후 주자가 무이산(武夷山) 창주정사(滄洲精舍)에서 지은 악부시(樂府詩) 수조가두(水調歌頭)에는

 

永棄人間事 영원히 인간 세상 일을 버리고

吾道付滄洲 나의 도를 창주에 부치려 하네.

 

주자는 두보의 시구를 사용하되 두보와는 다른 뜻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水調歌頭는 시의 제목이 아니고, 당시 유행하던 의 노래곡조 중 하나를 말하는데, 같은 노래 곡에다 문인들이 거기에 맞춰 가사를 다르게 쓴 것이다.‘ <이재구>님 글에서

 

 

여기서 집어보고 가야할 인물이 용호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연재 송병선이다.

 

송병선은 연재학파를 이루며 구한말 항일운동의 뿌리인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을 이끌던 유학자이자 항일 국가유공자이다.

 

위정척사란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인데, 우암 당대 노론의 정치이념인 숭명배청의 존화양이(尊華攘夷-중국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론이 발전하여 청나라를 뜻하는 오랑캐의 개념이 구한말 조선을 넘보던 일본을 비롯한 서양오랑캐로 확대하여 배척하자는 운동이었다.

 

 

우암이 떠나고 난 후, 일부 모리배 같은 노론세력들이 왕의 외척이 되어 세도정치로 국정을 농단하며 사익추구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권력에서 떨어져 있던 남인의 개혁파는 성리학의 관념성과 경직성을 비판하며 실제로 소용되는 참된 학문을 뜻하는 실학(實學)을 발전시켰으며, 노론의 개혁적 소장파들은 시대착오적인 소중화에 갇혀있는 조선 문화의 후진성을 자각하고 청나라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자는 북학(北學) 운동을 벌이는 등 조선의 근대화를 위하여 고민하는 유학자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강호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던 노론의 보수파조차도 열강들에 둘러싸인 조선의 어려움을 해쳐나가기 위하여 노심초사하였으니, 최익현을 배출한 화서학파(화서 이항노), 정재규 등 단성을 거점으로 한 영남 노론을 배출한 노사학파(노사 기정진), 연재학파(연재 송병선)등이 위정척사론으로 항일운동의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특히, 송병선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이 조선의 국권을 강탈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고, 그의 동생 심석재 송병순(心石齋 宋秉珣:1839~1912)도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1912년 자결로써 항거하였다.

송병선은 1869, 1879년 두 차례 지리산을 유람한 후 지리산북록기(地異山北麓記)‘두류산기(頭流山記)‘ 등 두편의 지리산유람록을 남겼으며, 송병순은 19023940일간 산행과 유람을 통하여 지리산 곳곳을 둘러보고 유방장록(遊方丈錄)’을 남겼다.

두 형제는 모두 목숨으로 저항한 항일 순국 애국지사이자 지리산을 온 몸으로 사랑한 지조 높은 유학자였다.

 

용호서원에 배향된 김재홍, 김종가 등도 연재의 문하에서 공부한 유림들로, 용호서원은 결국 항일운동의 뿌리가 된 위정척사 운동을 벌였던 연재학파의 근거지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침략에 죽음으로 항거할 만큼 애국심이 투철했던 송병선, 송병순 형제가 바로 우암의 직계 9세손으로서, 우암의 선비정신이 녹아 있는 가풍 속에서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지리산 자락 용호서원에서 우암의 기교 없이 우직한 글씨를 바라보면서, 파쟁의 와중에 자파의 패권주의를 주도한 우암의 독선이 조선에 끼친 악영향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곳에 배향된 선비가 우암의 직계 후손인 연재 송병선임을 생각한다면, 우암에게 책임을 조금 들어주고 싶다.

일부 모리배를 제외한 명망 있던 조선의 선비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았다. 때로는 시대착오적인 신념에 매몰되어 답답하도록 고집스러웠지만 죽음 앞에도 자신이 세웠던 명분을 버리지 않았다. 명분만을 따지다가 실리를 잃을 수 있지만 눈앞의 실리만을 쫓다가 대의를 거스르지는 않았던 선비정신을 남겼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그나마 신뢰의 사회적 인프라를 이만큼 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댓쪽 같이 신념을 버리지 않고 명분을 생명같이 여겼던 우암의 선비정신이 가풍으로 연재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15. 우암의 마지막 글씨

 

1680년 우암이 유배에서 복귀한 이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을 하는 사태가 벌어지긴 했지만 비교적 소강상태였던 정국에 먹구름이 드리워졌으니,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의 등장이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은 외척의 발호를 막고 정치적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국혼물실(國婚勿失-왕비는 반듯이 서인집안에서 낸다.) 원칙을 철저하게 고수해왔다. 이 원칙대로 서인은 줄곧 숙종의 비를 배출하였으나 정비인 인경왕후는 후사 없이 일찍 죽고, 계비로 들어온 인현왕후는 결혼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들이 없었다. 그러니 장희빈이 아들을 낳자 숙종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으니, 태어난 지 3개월도 안된 왕자를 원자로 삼아 장차 세자가 될 지위를 확고히 하고 싶어 했다.

 

여기까지는 조선시대 왕가에서 흔히 있었던 일로서, 목숨을 건 정쟁을 벌일 일은 전혀 아니었다. 문제는 장희빈 어머니가 종으로 살았던 집안이 남인이라는 하찮은 인연으로 정권에 밀려나 있던 남인으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원자를 지지하고 나섰고, 같은 이유로 서인은 극력 반대하면서 남인과 노론 간에 치열할 정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화양동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우암이 아직 정비인 인현왕후의 나이가 젊은데 후궁의 아들을 섣불리 원자로 삼는 일은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숙종은 귀한 아들을 얻어 흐뭇해하고 있는데 노론들이 끊임없이 찬물을 끼얹고 있으니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숙종은 화를 억누르고 우암을 설득해보지만 신념을 목숨같이 여기는 우암도 칼 같은 성품답게 한 치 흔들림이 없었다.

 

결국, 숙종은 장희빈을 위하여 인현왕후를 폐서인 시켜버리고, 눈엣가시 같은 83세의 우암은 제주도로 귀양 보냈으며 노론세력을 숙청해버린 뒤 다시 정국이 바뀌어 남인 정권이 들어섰으니, 1689년 숙종대 일어났던 두 번째 환국인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우암은 간신히 노구를 이끌고 제주도로 귀향을 가다가 배가 풍랑을 만나 보길도에 몇일 머물러 있는 동안 자신의 심정을 읊은 시를 남겼다.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팔십삼세옹 창파만리중)

一言胡大罪 三黜亦云窮(일언호대죄 삼출역운궁)

北極空膽日 南暝但信風(북극공담일 남명단신풍)

貂裘舊恩在 感激泣孤在(초구구은재 감격읍고재)

 

팔십삼세 늙은 몸이 거친 만리길을 가노라.

한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세 번이나 쫓겨나니 신세만 궁하구나.

북녘하늘 해를 바라보며 끝없이 넓은 남쪽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뿐이네.

초구(임금이 하사한 옷)에는 옛 은혜 서려 있어 감격하여 외로이 눈물 흘리네.

 

풍량이 잦아들어 우암이 시를 남기고 떠난 후, 언제인가 이 시를 보길도 바닷가 석벽에 새겨놓았다.

 

*보길도 글씐바위(인터넷 자료사진)

하도 탁본을 많이 떠서 글씨를 분별하기 쉽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착참한 마음이 담긴 우암의 필체를 알아볼 수 있다.

 

 

우암은 제주도에 위리안치 되었으나, 아무래도 남인은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우암을 그냥 귀양 보낼 것이 아니라 아예 국문을 하여 죽음으로 몰고 가기 위하여 상소를 해대니 숙종은 다시 한양으로 압송하여 국문을 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우암이 한양으로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노론들이 궐기라도 할 듯 떠들썩하자 남인들의 입장이 다시 긴박하게 바꿨다. 우암을 국문장에 불러 문초하다가는 자칫 우암과 노론들에게 역공의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염려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노회한 우암과 노론세력에게 질리도록 염증을 느끼고 있던 숙종에게 남인들은 우암이 한양에 도착하기 전에 처형을 하라고 강력히 상소를 하였다.

 

재기를 모색하며 제주도에서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오던 우암이 정읍에 도착했을 때 사사하라는 어명과 함께 사약을 든 사홍관(痧澒官)도 도착하여 수제자 권상하가 손을 잡아주는 가운데 우암은 사약을 마시고 객지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리하여, 보길도에 남긴 글씨가 우암의 생애 마지막 글씨가 되었다.

 

 

16. 우암이 세상을 떠나간 이후

 

문제는 숙종의 변덕이었다. 숙종이 장희빈에 빠져 인현왕후를 폐서인 시켜 내쫓고 왕비 자리에 앉히느라 기사환국을 일으켜 우암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선비들의 목숨을 앗아갔나. 그러다가 불과 5년이 지나자 이제는 장희빈에게 슬슬 싫증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장희빈에게 눈이 멀어 쫓아낸 인현왕후에게 미안하고 그리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서 극렬 반대하는 남인들을 실각시켜버리고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시켰다. 소론을 중심으로 서인들에게 정권을 넘겨주자 재집권한 노론은 우암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남인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복수에 나서서 몰살에 가깝게 제거해버렸으니 1694년 숙종대 세 번째 환국인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이 참화이후 남인세력은 궤멸되다시피 피해를 입어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더 이상 변변한 집권 한번 해보지 못하고 노론의 장기집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암 사후에도 우암을 추종하는 노론세력이 집권을 이어갔기 때문에 우암에 대한 예우와 평가는 지극히 노론의 기준일 수밖에 없었다. 우암은 중국의 성현들과 같은 반열에 오른 인물이라고 송자(宋子)로 불렸으며, 1756년에는 유학자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조선실록에 가히 기록적인 3,000번 이상 등장할 만큼 생전은 말할 것도 없고 사후에도 끊임 없이 조정의 관심인물이 되었던 바, 정치적으로 바쁜 와중에도 우암의 문장력과 정치력에 기대기 위하여 묘지문 부탁을 받으면 인심 좋게 써주어 600편 이상 전해지고 있다.

 

미수의 글씨는 같은 당파인 남인 집안을 방문한 기념으로 간단한 당호나 혹은 공자 시대의 기본적인 유교의 격언 정도를 남겼을 뿐이며, 미수 사후에 남인 세력이 정치적으로 크게 부흥을 하지 못한 탓에 후세대에서 미수의 글씨를 모각하거나 각자로 새긴 경우는 많지 않다.

반면에, 우암의 글씨는 노론세력의 확대를 위하여 하사하듯 많이 써 주었으며, 유교적 이념이 담긴 문구가 많아 후대에서 막강한 노론세력들이 자파의 정치표어로 널리 새겨놓아 오늘날까지 우암을 글씨가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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