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19. 14:28ㆍ한문상식
위나라는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시작되었으며, 위나라의 시조는 주 무왕(周 武王)의 동생인 필공고(畢公高)이다. 그의 자손 필만(畢萬)은 진(晉)나라의 헌공(獻公)으로부터 위(魏)에 봉해져 진(晉)나라의 대부(大夫)가 되었고, 위강(魏絳)은 경(卿)에 임명되어 진나라 6경의 한 사람으로서 정권을 쥐었다. 기원전 453년 위 환자(魏 桓子)가 한(韓)·조(趙)와 더불어 진나라를 3분하고, 기원전 403년 주나라 위열왕(威烈王)으로부터 제후(諸侯)로서 독립이 공인되었다.
이 편에서는 위 문후(魏 文侯), 위 혜왕(魏 惠王)과 안리왕(安釐王:안희왕)에 대해 주로 기술하였으며, 위 문후는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부국강병에 힘을 기울이고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위해 관개(灌漑)사업을 크게 벌였다. 또한 중산(中山)·대량(大梁)을 공략해서 멸망시켰으며, 초(楚)나라를 공격하는 등 전국시대 초기에는 최강국이었다. 그러나 진(秦)나라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기원전 361년 대량(大梁)으로 천도하고, 기원전 329년 상군(上郡) 15현(縣)을 진나라에 헌상하여 화의를 청하였으며, 결국 기원전 225년에 진나라 시황제(始皇帝)에 의해 멸망되었다.
16. 위 문후(魏 文侯)
文侯受子夏經藝(문후수자하경예),客段干木(객단간목),過其閭(과기려),未嘗不軾也(미상불식야)。 秦嘗欲伐魏(진상욕벌위),或曰(혹왈): 「魏君賢人是禮(위군현인시례),國人稱仁(국인칭인),上下和合(상하화합),未可圖也(미가도야)。」 文侯由此得譽於諸侯(문후유차득예어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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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 문후가 자하(子夏)에게서 경서(經書)를 배우고, 단간목(段干木)을 손님의 예로 대하면서 그의 마을을 지날 때면 수레의 가로댄 나무를 잡고 목례를 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진(秦)나라가 위(魏)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위나라의 군주는 예의로 현자를 대하여 위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인덕을 칭찬하고 상하가 화목하여 도모할 수 없습니다.”
문후가 이로 인해 제후들 사이에서 명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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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夏(자하) : 전국시대의 학자. 공자의 제자로 공문10철(孔門十哲)의 한 사람이다. 그의 학문은 시와 예에 통하였다. 또 주관적 내면성을 존중하는 증자(曾子) 등과 달리 예(禮)의 객관적 형식을 존중하는 것이 특색이다.
◯ 經藝(경예) : 경서(經書). 6경 또는 유예(六藝).
○ 段干木(단간목) : 段干生(단간생). 전국시대 초기 위(魏)나라의 학자이며 성은 단간(段干)이고 이름은 목(木)이다.。위(魏) 문후(文侯)가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閭(려) : 마을. 뒷골목.
◯ 軾(식) : 수레 앞턱에 가로 댄 나무. 수레 앞의 횡목에 의지하여 경의를 표하다
17. 서문표(西門豹)
任西門豹守鄴(임서문표수업),而河內稱治(이하내칭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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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표(西門豹)를 업(鄴)의 태수로 임용하자 하내(河內)가 잘 다스려진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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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西門豹(서문표) : 전국시대의 위(魏)나라 정치가. 12개의 수로를 파서 논으로 강물을 끌어들이는 관개사업을 하여, 농업생산 증대에 이바지하였다. 또 그 고장 사람들이 해마다 미녀를 골라 강물에 던지는 풍습의 폐습을 일소했다.
[史記列傳(사기열전)] 권126 滑稽列傳(골계열전) (7/7) ⑧서문표(西門豹)
https://blog.naver.com/swings81/221697504333
◯ 鄴(업) : 하북성(河北省) 임장현(臨漳縣) 서쪽.
◯ 河内(하내) : 춘추전국시대에 황하 이북지역을 하내(河內)라고 칭했다.
18. 이극(李克)
魏文侯謂李克曰(위문후위이극왈): 「先生嘗教寡人曰(선생상교과인왈)『家貧則思良妻(가빈즉사량처),國亂則思良相(국란즉사량상)』。 今所置非成則璜(금소치비성즉황),二子何如(이자여하)?」 李克對曰(이극대왈): 「臣聞之(신문지),卑不謀尊(비불모존),疏不謀戚(소불모척)。 臣在闕門之外(신재궐문지외),不敢當命(불감당명)。」 文侯曰(문후왈):「先生臨事勿讓(선생림사물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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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후가 이극(李克)에게 말했다.
“선생께서 일찍이 과인에게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을 생각하게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재상으로 삼을만한 사람으로는 위성(魏成)이 아니면 적황(翟璜)이니 두 사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극이 대답했다.
“신이 듣기에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에 대하여 논하지 않고, 먼 사람은 친척에 대하여 논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신은 궁궐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 감히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문후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이 일에 사양을 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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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克(이극) : 진(晉)나라의 대부. 전국 시대 초기 위(魏)나라 사람. 자하(子夏)의 제자다. 위문후(魏文侯)가 중산(中山)을 멸하고 태자 격(擊)을 중산군(中山君)에 임명했을 때 적황(翟璜)이 천거해 중산상(中山相)이 되었다.
◯ 成(성) : 위 성자(魏 成子). 위 문후의 동생.
◯ 璜(황) : 적황(翟璜). 전국시대 초기의 위나라의 재상으로 위문후를 보좌했다. 중산국을 멸하는데 앞장서서 상경에 올랐다.
◯ 闕門(궐문) : 궁전을 말한다. 궐문(闕門)의 밖에 있다는 것은 소원(疎遠)함을 말한다.
李克曰(이극왈): 「君不察故也(군불찰고야)。居視其所親(거시기소친),富視其所與(부시기소여), 達視其所舉(달시기소거),窮視其所不為(궁시기소불위),貧視其所不取(빈시기소불취), 五者足以定之矣(오자족이정지의),何待克哉(하대극재)!」 文侯曰(문후왈):「先生就舍(선생취사),寡人之相定矣(과인지상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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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이 말했다.
“군주께서 살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어떤 사람과 친한가를 살피고, 부귀할 때 어떤 자와 어울리는가를 살피고, 잘 나갈 때 어떤 사람을 추천하는가를 살피고, 궁핍할 때에는 어떤 일을 하지 않는가를 살피고, 가난할 때는 어떤 것을 취하지 않는지를 살펴야 하니,
이 다섯 가지로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데 이 이극을 무엇 때문에 기다리십니까!”
문후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관사로 돌아가십시오, 과인의 재상을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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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居(거) : 평소. 보통 때.
◯ 與(여) : 교제하다. 왕래하다.
◯ 達(달) : 지위가 높고 귀하다.
李克趨而出(이극추이출),過翟璜之家(과적황지가)。 翟璜曰(적황왈): 「今者聞君召先生而卜相(금자문군소선생이복상),果誰為之(과수위지)?」 李克曰(이극왈):「魏成子為相矣(위성자위상의)。」 翟璜忿然作色曰(적황분연작색왈): 「以耳目之所睹記(이이목지소도기),臣何負於魏成子(신하부어위성자)? 西河之守(서하지수),臣之所進也(신지소진야)。 君內以鄴為憂(군내이업위우),臣進西門豹(신진서문표)。 君謀欲伐中山(군모욕벌중산),臣進樂羊(신진악양)。 中山以拔(중산이발),無使守之(무사수지),臣進先生(신진선생)。 君之子無傅(군지자무부),臣進屈侯鮒(신진굴후부)。 臣何以負於魏成子(신하이부어위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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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이 종종걸음으로 나와 적황(翟璜)의 집에 들렀다.
적황이 말했다.
“지금 듣자하니 군주께서 선생을 불러 재상을 선택하게 하였다고 들었는데 과연 누가 되었습니까?”
이극이 말했다. “위성자(魏成子)가 재상이 되었습니다.”
적황이 분노하여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귀와 눈이 보고 기억하는 바로 보아서 신이 어찌 위성자만 못합니까?
서하(西河)의 군수 오기(吳起)를 제가 추천했습니다.
군주께서 마음속으로 업현을 걱정하셔서 제가 서문표를 추천했습니다.
군주께서 중산을 정벌하려고 하셨으므로 제가 악양(樂羊)을 추천했습니다.
중산을 함락시키고 그곳을 지킬 사람이 없어 제가 선생을 추천했습니다.
군주의 아들에게 사부가 없어 제가 굴후부(屈侯鮒)를 추천했습니다.
신이 어찌 위성자만 못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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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趨(추) : 종종걸음치다. 존경과 예의의 표시로 잔걸음으로 빨리 걷는 것을 말한다.
◯ 卜(복) : 선택하다.
◯ 西河(서하) : 황하의 서쪽 지역. 위(魏)나라가 처음에 오기(吳起)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 吳起(오기) : 오자(吳子)로 불리우며, 전국시대 군사 지도자이며 정치가였다. 위나라 사람으로 노나라, 위나라, 초나라를 섬겼다. 위나라에서 그는 많은 큰 전투를 지휘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후에 초(楚)나라로 도주하여 도왕(悼王)에 의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李克曰(이극왈): 「且子之言克於子之君者(차자지언극어자지군자),豈將比周以求大官哉(기장비주이구대관재)? 君問而置相(군문이치상)『非成則璜(비성즉황),二子何如(이자하여)』? 克對曰(이극왈):『君不察故也(군불찰고야)。 居視其所親(거시기소친),富視其所與(부시기소여),達視其所舉(달시기소거), 窮視其所不為(궁시기소불위),貧視其所不取(빈시기소불취), 五者足以定之矣(오자족이정지의),何待克哉(하대극재)!』 是以知魏成子之為相也(시이지위성자지위상야)。 且子安得與魏成子比乎(차자안득여위성자비호)? 魏成子以食祿千鐘(위성자이식록천종),什九在外(십구재외),什一在內(십일재내), 是以東得卜子夏(시이동득복자하)、田子方(전자방)、段干木(단간목)。 此三人者(차삼인자),君皆師之(군개사지)。 子之所進五人者(자지소진오인자),君皆臣之(군개신지)。 子惡得與魏成子比也(자오득여위성자비야)?」 翟璜逡巡再拜曰(적황준순재배왈): 「璜(황),鄙人也(비인야),失對(실대),願卒為弟子(원졸위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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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이 이극을 군주께 천거한 것이 어찌 장차 한 패가 되어 큰 벼슬을 구하기 위해서였단 말입니까?
군주께서 재상을 두는 일에 대해 물으시면서 ‘위성 아니면 적황인데 두 사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이극이 ‘군주께서 살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어떤 사람과 친한가를 살피고, 부귀할 때 어떤 자와 어울리는가를 살피고, 잘 나갈 때 어떤 사람을 추천하는가를 살피고, 궁핍할 때에는 어떤 일을 하지 않는가를 살피고, 가난할 때 어떤 것을 취하지 않는지를 살펴야하니, 이 다섯 가지로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데 이 이극을 무엇 때문에 기다리십니까!’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위성자가 재상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어찌 위성자와 비교될 수 있습니까?
위성자는 녹봉 1천 종(鍾) 중에서 9/10는 밖에다 나누어 주고 1/10만 안에서 썼으며,
이 때문에 동쪽으로 복자하(卜子夏),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을 얻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군주가 모두 스승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대가 추천한 다섯 사람은 군주께서 모두 신하로 삼았습니다.
그대가 어찌 위성자와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적황이 주저하다가 두 번 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이 적황이 천박한 놈입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평생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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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比周(비주) : 한 패가 되다. 파당을 짓다. 周는 친밀하다.
◯ 千鐘(천종) : 봉록이 많음을 말한다. 鐘(종)은 고대 용량의 단위로 10부(釜)를 1종이라 하며, 1부는 6말 4되이다.
◯ 惡(오) : 어찌.
◯ 逡巡(준순) : 머뭇거리다. 주저주저하다.
19. 위 문후(魏 文侯)
二十六年(이십육년),虢山崩(괵산붕),壅河(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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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후 26년(기원전 420년)에 괵산(虢山)이 무너져 황하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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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壅(옹) : 막다.
20. 위 문후(魏 文侯)
三十二年(삼십이년),伐鄭(벌정)。城酸棗(성산조)。 敗秦于注(패진우주)。 三十五年(삼십오년),齊伐取我襄陵(제벌취아양릉)。 三十六年(삼십육년),秦侵我陰晉(진침아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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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후 32년(기원전 414년)에 정나라를 정벌했다. 산조(酸棗)에 성을 쌓았다.
주성(注城)에서 진나라를 물리쳤다.
위 문후 35년(기원전 411년)에 제나라가 조나라의 양릉(襄陵)을 정벌하여 점령했다.
위 문후 36년(기원전 410년)에 진나라가 조나라의 음진(陰晉)을 침공했다.
21. 무후(武侯)
三十八年(삼십팔년),伐秦(벌진),敗我武下(패아무하),得其將識(득기장식)。 是歲(시세),文侯卒(문후졸),子擊立(자격립),是為武侯(시위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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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문후 38년(기원전 408년)에 진나라를 정벌하여 무하성(武下城)에서 패배했으나 그 장수 식(識)을 생포했다.
이해에 위나라 문후가 죽고, 아들 자격(子擊)이 즉위하니 그가 무후(武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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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子擊立(자격) : 위 무후(魏 武侯). 전국시대 위나라(魏)의 제2대 후작이다. 성은 희(姬). 씨는 위(魏). 이름은 격(撃)이다. 위 문후(魏文侯)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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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출처>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史記 -> 世家 -> 魏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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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侯受子夏經藝,客段干木,過其閭,未嘗不軾也。秦嘗欲伐魏,或曰:「魏君賢人是禮,國人稱仁,上下和合,未可圖也。」文侯由此得譽於諸侯。
위나라 문후가 자하(子夏)에게서 경서(經書)를 배우고, 단간목(段干木)을 손님의 예로 대하면서 그의 마을을 지날 때면 수레의 가로댄 나무를 잡고 목례를 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진(秦)나라가 위(魏)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위나라의 군주는 예의로 현자를 대하여 위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인덕을 칭찬하고 상하가 화목하여 도모할 수 없습니다.”
문후가 이로 인해 제후들 사이에서 명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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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西門豹守鄴,而河內稱治。
서문표(西門豹)를 업(鄴)의 태수로 임용하자 하내(河內)가 잘 다스려진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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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文侯謂李克曰:「先生嘗教寡人曰『家貧則思良妻,國亂則思良相』。今所置非成則璜,二子何如?」李克對曰:「臣聞之,卑不謀尊,疏不謀戚。臣在闕門之外,不敢當命。」文侯曰:「先生臨事勿讓。」李克曰:「君不察故也。居視其所親,富視其所與,達視其所舉,窮視其所不為,貧視其所不取,五者足以定之矣,何待克哉!」文侯曰:「先生就舍,寡人之相定矣。」李克趨而出,過翟璜之家。翟璜曰:「今者聞君召先生而卜相,果誰為之?」李克曰:「魏成子為相矣。」翟璜忿然作色曰:「以耳目之所睹記,臣何負於魏成子?西河之守,臣之所進也。君內以鄴為憂,臣進西門豹。君謀欲伐中山,臣進樂羊。中山以拔,無使守之,臣進先生。君之子無傅,臣進屈侯鮒。臣何以負於魏成子!」李克曰:「且子之言克於子之君者,豈將比周以求大官哉?君問而置相『非成則璜,二子何如』?克對曰:『君不察故也。居視其所親,富視其所與,達視其所舉,窮視其所不為,貧視其所不取,五者足以定之矣,何待克哉!』是以知魏成子之為相也。且子安得與魏成子比乎?魏成子以食祿千鐘,什九在外,什一在內,是以東得卜子夏、田子方、段干木。此三人者,君皆師之。子之所進五人者,君皆臣之。子惡得與魏成子比也?」翟璜逡巡再拜曰:「璜,鄙人也,失對,願卒為弟子。」
위 문후가 이극(李克)에게 말했다.
“선생께서 일찍이 과인에게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을 생각하게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재상으로 삼을만한 사람으로는 위성(魏成)이 아니면 적황(翟璜)이니 두 사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극이 대답했다.
“신이 듣기에 낮은 사람은 높은 사람에 대하여 논하지 않고, 먼 사람은 친척에 대하여 논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신은 궁궐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 감히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문후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이 일에 사양을 하지 마십시오.”
이극이 말했다.
“군주께서 살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어떤 사람과 친한가를 살피고, 부귀할 때 어떤 자와 어울리는가를 살피고, 잘 나갈 때 어떤 사람을 추천하는가를 살피고, 궁핍할 때에는 어떤 일을 하지 않는가를 살피고, 가난할 때는 어떤 것을 취하지 않는지를 살펴야 하니, 이 다섯 가지로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데 이 이극을 무엇 때문에 기다리십니까!”
문후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관사로 돌아가십시오, 과인의 재상을 결정했습니다.”
이극이 종종걸음으로 나와 적황(翟璜)의 집에 들렀다.
적황이 말했다.
“지금 듣자하니 군주께서 선생을 불러 재상을 선택하게 하였다고 들었는데 과연 누가 되었습니까?”
이극이 말했다. “위성자(魏成子)가 재상이 되었습니다.”
적황이 분노하여 안색을 바꾸며 말했다.
“귀와 눈이 보고 기억하는 바로 보아서 신이 어찌 위성자만 못합니까? 서하(西河)의 군수 오기(吳起)를 제가 추천했습니다. 군주께서 마음속으로 업현을 걱정하셔서 제가 서문표를 추천했습니다. 군주께서 중산을 정벌하려고 하셨으므로 제가 악양(樂羊)을 추천했습니다. 중산을 함락시키고 그곳을 지킬 사람이 없어 제가 선생을 추천했습니다. 군주의 아들에게 사부가 없어 제가 굴후부(屈侯鮒)를 추천했습니다. 신이 어찌 위성자만 못합니까!”
이극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이 이극을 군주께 천거한 것이 어찌 장차 한 패가 되어 큰 벼슬을 구하기 위해서였단 말입니까? 군주께서 재상을 두는 일에 대해 물으시면서 ‘위성 아니면 적황인데 두 사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이극이 ‘군주께서 살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어떤 사람과 친한가를 살피고, 부귀할 때 어떤 자와 어울리는가를 살피고, 잘 나갈 때 어떤 사람을 추천하는가를 살피고, 궁핍할 때에는 어떤 일을 하지 않는가를 살피고, 가난할 때 어떤 것을 취하지 않는지를 살펴야하니, 이 다섯 가지로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데 이 이극을 무엇 때문에 기다리십니까!’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위성자가 재상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대가 어찌 위성자와 비교될 수 있습니까? 위성자는 녹봉 1천 종(鍾) 중에서 9/10는 밖에다 나누어 주고 1/10만 안에서 썼으며, 이 때문에 동쪽으로 복자하(卜子夏),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을 얻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군주가 모두 스승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대가 추천한 다섯 사람은 군주께서 모두 신하로 삼았습니다. 그대가 어찌 위성자와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적황이 주저하다가 두 번 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이 적황이 천박한 놈입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평생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19
二十六年,虢山崩,壅河。
위 문후 26년(기원전 420년)에 괵산(虢山)이 무너져 황하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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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二年,伐鄭。城酸棗。敗秦于注。三十五年,齊伐取我襄陵。三十六年,秦侵我陰晉。
위 문후 32년(기원전 414년)에 정나라를 정벌했다. 산조(酸棗)에 성을 쌓았다. 주성(注城)에서 진나라를 물리쳤다. 위 문후 35년(기원전 411년)에 제나라가 조나라의 양릉(襄陵)을 정벌하여 점령했다. 위 문후 36년(기원전 410년)에 진나라가 조나라의 음진(陰晉)을 침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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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十八年,伐秦,敗我武下,得其將識。是歲,文侯卒,子擊立,是為武侯。
위 문후 38년(기원전 408년)에 진나라를 정벌하여 무하성(武下城)에서 패배했으나 그 장수 식(識)을 생포했다. 이해에 위나라 문후가 죽고, 아들 자격(子擊)이 즉위하니 그가 무후(武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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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44-03/13[史記(사기) 세가(世家)] 권44.위세가(魏世家) (03/13) <위 문후(魏 文侯)>|작성자 swings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