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2019. 4. 23. 14:07사람과사람들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 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 「금강」

“껍데기는 가라.”고, “누가 하늘을 보았다 말하는가.”라고 외친 시인 신동엽(申東曄, 1930~1969)은 죽은 지 서른 해가 넘었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현재적 의미의 시인이다. 그의 살아 있음은 오늘에 와서도 유효한 그 시에 담긴 이념적 선진성에 의해 담보된다. 신동엽은 김수영과 함께 1970년대 이후의 참여 시인들에게는 한용운, 임화를 비롯한 카프 계열의 시인들, 이육사의 맥을 잇는 하나의 전범으로 받아들여진다. 신동엽과 김수영의 시 세계는 4월혁명에 젖줄을 대고 있다는 점에서 통한다.

그러나 김수영의 참여가 모더니스트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신동엽의 참여는 소박한 민족적 정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들은 체제 비판적인 감수성으로 현실을 거부한 ‘불온한 시인’이라는 점에서 닮은꼴이지만, 출신 성분이 다른 만큼 시적 지향점은 약간 다르다. 도시 중인 계급 집안 출신인 김수영이 비판적 소시민으로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자주 노래한 시인이라면, 가난한 농민 집안의 아들로 자란 신동엽은 동학 운동과 민족의 원시 공동체에 구현된 원형적 민중 정서의 회복을 거듭 노래한 시인이다.

민중의 편에 서서 고유의 민족 정서인 한과 설움의 의지로 변혁을 꿈꾼 시인 신동엽

1960년대 중반 무렵


신동엽은 1930년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농민 신연순과 김영희 사이의 1남 4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난다. 1943년 부여국민학교를 졸업한 그는 집안이 워낙 가난해 학비를 줄이려는 마음에서 관비가 지원되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한다. 신동엽은 병영 생활과 다를 바 없는 일제 말기의 전주사범 기숙사 생활을 묵묵히 견딘다.

“그는 그 무렵 기숙사에 있었다. 그는 키가 작아 교실 앞자리에 앉았었고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학생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키가 큰 육상 선수에 외향적이었으므로 학교 시절 아주 썩 가까운 친구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기숙사와 교실을 오고갈 때 옆구리에 세계 문학 전집 같은 문학 서적을 끼고 다녔으며 우리는 서로가 문학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48년 내가 교원으로 나갈 때 조당래(시인)와 신동엽이랑 함께 사진을 찍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사진이 없다.”고 하근찬은 신동엽의 전주사범 시절을 전한다.각주1)

1948년 동맹 휴학으로 전주사범 기숙사에서 나와 귀향한 신동엽은 곧 부여 근처의 초등 학교 교사로 발령받지만 사흘 만에 그만둔다. 1949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한 신동엽은 6·25가 일어나자 바로 귀향해 9월 말까지 부여에서 민청 선전부장으로 지내다가, 수복 뒤 국민방위군에 징집된다. 1951년 국민방위군 수용소를 빠져나와 떠돌던 그는 피난지 대전과 부산의 전시 연합 학교에서 학과 공부를 계속해 1953년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한다. 그는 이어 제1차 공군 학도 간부 후보생에 지원해 합격하지만 발령을 받지 못하고 대기하다가 환도령과 함께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에서 신동엽은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거리 한 귀퉁이에 작은 가게를 세내어 헌책방을 차린다. 이 시기에 신동엽은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가지만, 그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열정은 이따금 주위 사람들을 강하게 매료시킨다. 다음은 그의 아내 인병선의 말이다.

우리 집이 그 책방 근처여서 자주 들렀는데 내가 『타임』이나 『뉴스위크』와 같은 잡지들을 사니까 유심히 보아두었던 것 같았어요. 자연히 이야기가 오고가는 사이 목까지 여민 군인 잠바에 큰 눈밖에 보이지 않는 그 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체온과 시가 다섯 살이나 연하인 나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다고 할까요.
김용성, 『한국 현대 문학사 탐방』(현암사, 1984) 재인용

농촌 경제학의 권위자로서 동국대 교수로 있다가 6·25 때 납북된 인정식(印貞植)의 딸로, 당시 이화여고 3학년생이던 인병선이 그의 책방에 드나든다. 두 사람은 이런 인연으로 가깝게 지내다가 1957년에 결혼한다. 신동엽은 군에 입대해 동두천의 6군단 공보실, 서울 육군본부, 충남 온양 등지에서 근무하다가 제대를 하고 고향에 정착한다. 결혼한 직후 그는 아내가 부여 읍내에 차린 양장점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을 이어가다가 간신히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의 교사 자리를 얻는다.

그러나 1958년 말에 갑자기 각혈한 뒤 폐결핵인 줄 알고 학교에 사직서를 낸다. 서울 돈암동의 처가에 아내와 아이들을 보내고 홀로 부여에 남은 신동엽은 병과 가난 속에서 독서와 습작에 몰두한다. 이 시기에 그는 문명과 위선에 물든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한편 원초적인 자연과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건강한 사람들을 노래한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를 써서 1959년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한다. 이 작품이 입선되어 문단에 나온 신동엽은 『조선일보』에 「진달래 산천」, 『세계일보』에 「시로 열리는 땅」 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는다.

젊은 시절 친구들과 함께

가운데가 신동엽


1960년 건강을 되찾은 신동엽은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셋방을 얻어 가족과 합류한 뒤 ‘교육평론사’에 들어간다. 4월혁명의 열기를 체험한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교육평론사에서 『학생 혁명 시집』을 펴내며 문학 쪽에서 혁명에 동참한다.

1961년 그는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직장을 옮겨 숨질 때까지 8년 동안 교단에 선다. 그는 입시 위주의 교육이 아니라 바른 삶의 길을 가르치는 교사로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1963년 신동엽은 그 동안 발표한 시들과 신작시 「아니오」 · 「빛나는 눈동자」 · 「눈 날리는 날」 · 「산사(山死)」 · 「산에 언덕에」 · 「꽃대가리」 등을 묶어 첫 시집 『아사녀』를 펴낸다. 이어 그는 여러 잡지에 시 「주린 땅의 지도 원리」 · 「기계야」, 평론 「시와 사상성― 기교 비평에의 충언(忠言)」, 수필 「금강 잡기」 등을 발표한다. 1964년에는 『동아일보』에 시 「진이의 체온」 등을 발표한다. 이 무렵 신동엽은 자신의 시를 통해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 민족의 전통적 삶의 양식이 붕괴되는 과정과 이에 따른 현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신동엽은 시극(詩劇)에 눈길을 주기도 한다. 그가 1966년에 집필한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최일수의 연출로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다. 이렇게 시의 장르적 변용에도 관심을 보이며 열정을 분출하던 신동엽은 1967년 ‘신구문화사’가 간행한 『현대 한국 문학 전집』 제18권으로 기획된 『52인 시집』에 그 동안 발표한 시들과 신작시 「껍데기는 가라」 등 7편을 실음으로써 더욱 확고하게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다.

1984년에 나온 신동엽 평전이자 시선집인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 껍데기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 껍데기는 가라. // 그리하여, 다시 / 껍데기는 가라. /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 아사달 아사녀가 / 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 부끄럼 빛내며 / 맞절할지니 // 껍데기는 가라. /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52인 시집』(신구문화사, 1967)

신동엽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껍데기는 가라」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알맹이 / 껍데기, 흙 가슴 / 쇠붙이의 대립이다. 이 대립은 “쇠붙이 / 흙 가슴, 기계 문명 / 농경 공동체, 무기 / 보습, 전쟁 / 평화, 죽임 / 살림, 외세 / 민족, 분단 / 통일, 반민주 / 민주, 가짜 / 진짜”의 구도로 설정된다.각주2) 시인은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외친다. 그렇다면 그 ‘알맹이’란 무엇일까. 백낙청은 이 알맹이에 대해 “4·19에서 진짜 알맹이에 해당하는 것은 민중들이 외세를 배격하고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 심지어 무기까지 들고 일어섰던 동학년의 곰나루의 그 아우성, 이것이 4·19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살려야 할 알맹이”라고 말한다.각주3) 신동엽의 이념적 선진성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라는 시구에 잘 나타난다. 여기에 담긴 정치적 감각은 시대를 훨씬 앞지른 것이다.

1960년대에 이미 그는 냉전 체제의 변경에 위치한 한반도가 처해 있는 국제 정치학적인 역학 구도 속에서 중립을 통해 민족 자주의 삶을 구현하자고 말한다. 물론 ‘중립’이라는 낱말에 지나치게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의 시에 대한 이해를 편협하게 만들 여지가 있다. 그러나 신동엽의 여러 시편에 나타난 ‘완충 지대’, ‘완충’, ‘중립’, ‘중립국’이라는 말을 보건대, 이미 그의 머릿속에 ‘중립화 통일론’이 들어 있던 게 아닌가 유추되기도 한다. 이 시에 나오는 ‘중립’을 평자들은 조금씩 다르게 이해하는데, 이를테면 백낙청은 “어떤 궁극적인 덕성과 진리의 길”로 파악하고, 조태일은 “모든 사물의 본질을 뜻하기도 하고 근원을 뜻하기도 하고 사방으로 펼쳐 나아가려는 긴장된 현장 확보의 응집 상태를 뜻”한다고 본다.

「껍데기는 가라」에서 선보인 ‘알맹이’, 동학혁명과 3·1운동과 4·19혁명을 통해 잉태된 그 ‘알맹이’는 조국의 향그러운 흙 가슴 속에 묻혀 있다가, 「금강」에서 찬란하게 부화한다. 「금강」은 4800여 행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장편 서사시인데, 1967년 ‘펜클럽 작가 기금’을 지원받아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한국 현대 신작 전집』 5권 『3인 시집』에 실린다.

신동엽이 장편 서사시의 배경으로 삼은 금강의 일각


우리들의 / 어렸을 적 / 황토 벗은 고갯마을 / 할머니 등에 업혀 / 누님과 난, 곧잘 / 파랑새 노랠 배웠다. / 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 / 밭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 / 어디서라 없이 새 보는 소리가 들린다. // 우이여! 훠어이! // 쇠방울 소리 뿌리면서 / 순사의 자전거가 아득한 길을 사라지고 / 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 / 가슴 두근 거리며 / 노래 배워주던 그 양품 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신동엽, 「금강」 서두, 『3인 시집』(을유문화사, 1967)

「금강」은 배다른 누나와 함께 파랑새 노래를 배우기 위해 양품 장수 할머니를 기다리던 시인의 애절한 회상에서 발원한다. 그 물줄기는 4·19혁명에서 1919년의 기미 독립 운동으로, 다시 1894년의 동학혁명으로 거슬러오르며 구비구비 장강으로 펼쳐진다. 총 26장으로 구성된 이 서사시는 사건을 차례대로 늘어놓지 않고 현재와 과거를 빈번히 오가거나 병치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시간의 차이를 두고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금강」에서 신동엽은 농민들의 분노와 저항으로 불타오른 1894년 동학혁명 얘기를 할 때 실존 인물인 전봉준 · 최제우 · 최시형 등과 함께 시인 자신의 분신으로 여겨지는 가상 인물 ‘신하늬’를 등장시켜 시적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이어 동학혁명의 실패와 4·19혁명의 실패를 겹쳐놓고 “오늘, 얼마나 달라졌는가.”각주4) 라며 세월이 흘러도 여전한 현실의 비리와 폭력, 모순과 불합리를 통탄하면서도, “맑은 하늘”을 쳐다보는 “빛나는 눈동자”를 통해 사그라들지 않는 혁명의 의지를 노래한다. 김우창은 「금강」에 대해 “오늘날의 상황에 대응하는 과거”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4·19혁명에서 기미 독립 운동, 다시 1894년 동학혁명으로 이어지는 장편 서사시 〈금강〉
4·19혁명에서 기미 독립 운동, 다시 1894년 동학혁명으로 이어지는 장편 서사시 〈금강〉


시인은 이 시에서, 연민을 느끼는 데 주저앉아 버리지 않고 연민의 근원을 생각하고 연민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불의(不義)에 대하여 맹렬한 분노를 폭발시킨다. 동학(東學)의 이야기는 오늘날 작자가 느끼는 연민과 분노의 뜨거운 열 속에서 직관적으로 파악된다. 그는 동학(東學)의 이야기에서 오늘날의 상황에 대응하는 과거를 발견한 것이다.
김우창, 「신동엽(申東曄)의 ‘금강(錦江)’에 대하여」, 『궁핍한 시대의 시인』(민음사, 1977)

「금강」의 ‘서화(序話)’에서 시인은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 1960년 4월 /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짱을 찢고 /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라고 자유에 대한 뜨거운 갈망을 새겨놓는다. 동학혁명과 겹쳐 떠오르는 이 4월혁명의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민중의 염원은 다름아니라 인간 본연의 삶, 민족 고유의 신명과 덕성이 어우러진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시에 나오는 “맑은 하늘”이 표상하는 것은 바로 외세의 짓누름으로부터 벗어난 우리 민족의 자주적이면서도 주체적인 삶이다. 그것은 이미 「껍데기는 가라」에서 노래한 바 있는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 아사달 아사녀”의 삶이기도 하다.

「금강」은 역사성과 서사적 골격을 갖추고 있으며, 또 시인 스스로 서사시라고 밝히지만, 이야기가 있다는 점을 빼놓고는 서정시를 길게 늘여놓은 작품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김주연은 「금강」을 평하면서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대한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인 묘사가 결여되어 있으며, 유기적 관련성 없이 작가의 주관이나 감정이 불쑥불쑥 끼여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문제점을 안게 된 것은 역사 의식이나 지식의 뒷받침 없이 시작(詩作)에 임했기 때문이라고 본 그는 「금강」이 “역사를 상대하면서도 역사가 시적 대상이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김우창 역시 「금강」을 평하며 “우리의 현실에 대하여 질문하여 마지않는 뜨거운 관심으로 역사를 용해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연속적인 역사적 현실로 이해하게” 만든다고 말하면서도 “역사적 사고가 얕고 단순화된”각주5) 면을 지적한다. 「금강」은 당대의 뛰어난 시적 업적으로 평가받지만 한편으로는 체념주의와 허무주의, 토속적인 샤머니즘에 근거한 운명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작품이다.

1968년 신동엽은 장편 서사시 「임진강」의 집필을 계획하고 자료 준비를 위해 임진강변의 문산 등을 답사하지만 그 계획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는 대신에 전 5집으로 구성된 오페레타 「석가탑」을 써서 드라마센터 무대에 올린다. 같은 해 6월 16일 김수영이 불의의 교통 사고로 숨지자 그는 『한국일보』에 「지맥(地脈) 속의 분수」라는 추모의 글을 싣는다. 그는 이 글에서 “한반도는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 그의 죽음은 민족의 손실, 이 손실은 서양의 어느 일개 대통령 입후보자의 죽음보다 앞서 5천만 배는 더 가슴 아픈 손실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 김수영은 죽지 않았다.”며 깊은 슬픔을 나타낸다. 김수영의 갑작스런 죽음을 몹시 슬퍼한 그도 이듬해인 1969년 4월 7일, 간암을 선고받은 지 불과 한 달 만에 서울 성북구 동선동 집에서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뒤 미처 활자화되지 못한 유작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조국」 · 「영(影)」 · 「서울」 등이 『고대문화』 · 『월간문학』 · 『현대문학』 · 『상황』 등에 발표된다. 1970년에는 『사상계』와 『창작과 비평』에 「좋은 언어」 · 「봄의 소식」 · 「강」 · 「살덩이」 · 「만지(蠻地)의 음악」 등이 실리고, 부여읍 군수리 나성터 금강 기슭에 그의 시업을 기리는 빗돌이 세워진다. 197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신동엽 전집』이 나온 이래, 1979년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983년 『신동엽―그의 삶과 문학』, 1984년 『껍데기는 가라―신동엽 평전 · 시선집』, 1989년 시집 『금강』이 잇달아 간행된다. 역사 의식과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자주와 해방을 알기 쉬운 언어로 노래한 민족 시인 신동엽에 대한 관심과 호응은 그가 숨진 뒤 오히려 높아진다.

  • 1979년에 발간된 신동엽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 실린 〈껍데기는 가라〉2
    • 11979년에 발간된 신동엽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2〈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에 실린 〈껍데기는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