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구의 삶

2019. 4. 23. 14:18사람과사람들

1933년 10월 24일 달성군 구지면에서 앞뒤짱구인 개구쟁이가 태어났다. 서너 살 때부터 어머니, 아버지의 손을 떠나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리던 이 아이가, 훗날 세계적인 수학자의 삶을 버리고 ‘남민전 사건’의 사형수가 되어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헤쳐 온 안재구다.

인물이야기 안재구

부자 공안수 안재구와 안영민



안재구의 삶은 조부 우정(于正) 안병희 선생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항일혁명가인 할아버지의 큰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일찍 신사상에 눈을 뜬 안병희 선생은 열일곱의 나이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땅문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후, 서울로 향했다. 가장 먼저 접한 것은 ‘해방’ 종교라 여긴 기독교였다. 하지만 국권을 침탈당한 이후 교회 안에서 독립운동이 금지되자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독립된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믿는 것이다. 예배당이 아니라 그 어떤 곳에서든지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항변하면서 교회를 뛰쳐나왔다.

러시아 사회주의혁명 등이 일어나자 이를 받아들여 조선의 ‘1세대 사회주의자’가 됐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후에는 청년교양사업을 맡아 진행했다. 당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이끌 생각보다 파벌다툼에 더 골몰했다. 서로 자기편으로 사람을 끌이들이다 보니 일제의 밀정까지도 조직 안에 침투해 들었다. 이에 실망한 안병희 선생은 ‘적박단’이라는 일종의 테러단체를 조직했다가 옥고를 치르는 등 좌경의 오류를 겪기도 했고, 환멸만이 남은 채 밀양으로 귀향했다. 일찌감치 일제의 눈 밖에 나서 1932년 안재구의 부친 안의환이 결혼을 할 때는 고등계 형사를 대동해 참석해야 했다.

안재구

가족사진



식민지 조선에서도 아이들은 자란다. 팽이치기, 연놀이며 자치기, 수박서리를 하면서 왁자하게 말이다. 하지만 일제의 수탈이 가혹해지고 애국인사에 대한 탄압, 공출에 징병으로 들들 볶이다보니 천진한 아이들의 마음에도 자연스럽게 민족애와 일제에 대한 반항심이 생겨났다. 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은 조선말을 쓰지 않는 법부터 배워야했다.

“소는 무어라고 우노.” “움머” “일본놈 소 울음은 ‘모오’라고 안 했나.” “왜놈 소는 조선 소하고 우는 것도 다른강?” 꼬마 안재구의 질문이었다.

1941년 안재구가 밀양제이심상소학교에 입학한 해에 할아버지는 일제에 붙들려가 중병이 걸려서야 석방이 되었다. 5, 6학년에 올라가면서 반항심이 커진 안재구는, 강제노역을 할 때면 흙에 물을 뿌려 떡이 되도록 만들거나 거름을 뿌려 똥냄새가 진동하도록 한 후 슬쩍 내빼곤 했다. 그래서 공부를 잘 해도 ‘품행 불량’으로 우등상은 한 번도 받을 수 없었다.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밤마다 마을에선 통곡 소리가 그치질 않던 시절, 안재구와 친구들의 유일한 즐거움은 독립군 얘기였다. 백두산에서 축지법을 하며 왜놈 군대를 무리죽음시킨다는 김일성 장군 얘기며 둔갑술을 한다는 김원봉 장군 얘기,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는 의열단 얘기를 하면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일제의 철저한 감시로 인해 ‘사상전향’을 거부하는 것 외에는 어떤 혁명운동도 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 안병희 선생은 해방 직전 행방이 묘연해진다. 징용과 수탈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청년들을 모아 유격대를 조직하며, 일제와의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장유격대의 힘은 갈수록 커져 철도 파괴, 파업과 폭동, 훈련소 폭동과 탈영이 이어졌다.

드디어 해방의 날이 왔다. 꽹과리소리, 징소리를 울리며 산 청년들과 함께 안병희 선생이 돌아오자, 모여 있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울렸다.

“여러분! 밀양의 우리 동포 여러분!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 했습니까.”

사람들이 큰 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안병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해방과 동시에 청년들은 경찰서, 군청, 읍사무소 등을 접수했고 도, 읍, 면까지 인민위원회가 꾸려져 치안과 행정을 책임졌다. 안재구는 그립던 할아버지를 만나서 좋고 고향 사람들이 “애국자 우정선생의 손자”라고 알아주니까 좋고 해서, 할아버지의 도시락 보따리를 들고 신이 나서 돌아다녔다.

하지만 ‘해방’은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2~3개월 만에 꿈처럼 사라졌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파괴했고, 민중들에게는 가혹한 굶주림의 세월이 다시 돌아왔다.

안재구

졸업식



소년 빨치산에서 ‘아기선생’으로

미군정은 곧 ‘점령군’의 본색을 드러냈다. 친일 관료들을 그대로 자리에 앉혔고, 토지개혁도 실시하지 않았다. 1년 만에 물가는 5배나 폭등했다. 풍작이 들어도 시장에 쌀이 돌지 않았다. 중간에 폭리를 취하며 일본으로 빼돌리는 사람들 때문이었는데, 이들이 지금까지도 ‘재벌’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사회를 쥐락펴락 하고 있는 매판자본의 실체다.

‘해방 공간’을 잠시나마 맛봤던 어린이들은 김일성 장군과 북의 토지개혁, 노동법령 등을 사랑방에서 이야기하고 ‘김일성 장군의 유격전술’ 등을 읽으며 부러움과 함께 가슴 후련해지는 심정을 느꼈다.

안재구는 밀양중학교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시작한다. 조선공산당 산하 대중조직 민주청년동맹(민청) 청년학생부의 영향을 받아 ‘독서회’에 가담한 것이다. 이들은 1학년, 2학년 각각 10여 명으로 꾸려져 지도원 선생의 도움을 받으며 1주일에 두 차례씩 ‘사회주의 대의’와 같은 책을 학습했다.

독서회의 첫 활동은 10월 인민항쟁을 알리고 미군정의 실체를 폭로하는 ‘벽보 붙이기’였다. 10월 인민항쟁은 9월 철도노동자 4만여 명의 총파업으로 시작해 10월 11일 소강국면에 접어들 때까지 벌어진 시위였다. 민중들은 ‘쌀을 달라’ ‘미군 물러가라’고 외치며 파출소를 점거하고 불을 지르는 등 격렬한 저항을 했고, 시위군중 18명이 총에 맞아 죽기도 했다.

이 사건은 민중들의 힘을 보여준 항쟁이긴 했으나, 한편으론 해방된 나라를 이끌 지도세력의 분파행동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신민당 등의 혁명세력은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꾸리고 3당 합당을 준비했다. 박헌영 등은 이를 방해하기 위해 10월로 준비된 총파업을 9월로 앞당겼고, 민중들은 9월과 10월로 분산된 투쟁을 벌여야 했다. 갈라진 투쟁은 가슴 아픈 희생을 불렀다.

민중들의 환호 속에 귀국한 ‘국부’ 이승만도 처음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주석 취임을 고려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미군정과 연계해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는 배신의 길로 접어들었다.

‘독서회’는 벽보 붙이기 외에도 밀양중학교에 운동시설을 설치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학생자치회’를 건설했고, 1947년 5월에는 메이데이를 맞아 ‘메이데이 밀양민중대회’ 참가단을 조직했다. 안재구는 메이데이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했다. 한민당 정치활동을 하던 이주형 교장의 본색이 드러난 것이다. 독서회는 대탄압 국면을 피해 비밀스럽게 교장 배척운동을 벌였다. 벽보를 붙이거나 큰길에서 구호를 외치고 흩어지는 활동이었다. 이 때 안재구는 경찰에 체포됐다.

어느 날 밤이다.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고 한참 뒤 순사가 중학생 안재구를 끌고 섬뜩한 방으로 갔다. 고문이 시작된 것이다. 웃옷을 벗기고 벽에 세워진 고리에 포승에 꽁꽁 묶인 안재구를 끌어올렸다. 또 정신을 잃을 때까지 슬리퍼로 뺨을 때렸다. 근 열흘간 고문을 당하면서도 ‘혼자 한 짓’이라고 우기다가, 5월 하순 미소공동위원회가 속개되고 소련 측이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자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밀양경찰서장을 했던 박찬현은 이후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문교부 장관을 맡았던 인물이다.

석방 후 민애청 소년학생부 남면, 초동면 소년선전대를 맡아 농민들에게 정세 선전을 하기도 했고, 1949년 ‘2.7 구국투쟁’에 참여해 초동면 일대의 종남산 봉우리를 돌며 봉화 올리는 일을 했다. 민중들의 투쟁은 들불처럼 피어오를수록 탄압은 거세졌다. 밀양에도 백골대가 들어오고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 극우 폭력단체들이 테러를 일삼았다. 12월에는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져 대대적인 민주인사 투옥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은 경찰서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탄압을 피해 산으로 올라갔다. 전국적인 야산대(빨치산)가 만들어졌고, 이를 하나로 묶어세운 남조선인민유격대가 조직됐다. 안재구는 군사훈련을 받고 밀양군단 연락부 소속, 상동면 농민위원회 조직지도원 등의 역할을 맡았다.

48년 5~6월이 되자 신문 광고란은 ‘남로당을 탈당하고 선량한 국민이 되겠다’는 사상전향서로 도배됐다. 도당, 군당의 조직 간부가 변절해서 당원명부를 경찰에 넘기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수많은 동지들이 죽어갔다.

안재구에게 ‘마지막 날’이 왔다. 1949년 4월 7일 농민위원회에 전달할 문건을 가지고 사포리 외딴 집에 찾아가니 노인 한 분이 “젊은이, 어서 이곳을 떠나게. 그 집은 벌써 결딴났다네”라고 말했다. 문건을 입에 넣고 씹으며 마지막 아지트를 향해 내달렸지만, 그 곳도 마찬가지였다. 조직과 선이 끊어진 것이다.

그는 구지면 면장이던 외할아버지의 보호를 받기 위해 외가로 향했다. ‘목숨을 걸고 싸우자던 동지들을 버리고 내 살길을 찾아, 이탈의 길로 나아가는구나’ 라는 착잡한 마음은 묻어둔 채 말이다. 그렇게 1960년 4.19 혁명의 날까지 길고도 외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외가에 있으면서 안재구는 공부에 매진했다. 중학 1학년 퇴학 이후 학력이 없었지만 1949년 초동교원 준교사시험에 합격했다. 만 열여섯도 안 된 나이에 구지국민학교에서 ‘아기선생’이라 불리며 교원생활을 했다. 영남고등학교 졸업장을 따서 52년 경북대 사범대학 수학과에 입학했다. 정치경제학과를 지망하자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정치경제학이 있느냐, 자본주의경제학 뿐이다. 그런 거짓말 배워서 뭐 하느냐” 며 반대했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한 안재구는 은사 박정기 교수를 만났다. 고려대 수학과 교수로 서울대, 연희대 등에서도 강의를 하다가 피란을 와서 경북대 문리과학대학 수학강의를 맡고 있던 박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안재구는 “역시! 수학은 예술이야!” 라고 감탄했다. ‘도강’으로 시작한 박 교수와의 인연은 이어져 2학년이 되자 1주일에 한 번 세미나를 함께 했고, 대학원에 입학해 겨울방학이 오자 ‘해석기하학’ ‘좌표기하학’ 책의 강의노트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강의노트를 받아본 박 교수는 “내가 노트를 만들라고 한 것은 자네에게 그 강의를 맡겨도 좋을지 어떨지 알아보려고 그런 걸세. 꼭 그대로 새 학년부터 강의를 해주게” 라고 안재구의 손을 맞잡았다. 이후로도 박정기 은사의 지도로 석사학위, 박사학위를 받고 학자의 자질을 키우며 세계적인 수학자로까지 성장할 수 있었다.

학용품도 팔러 다니고, 학원 강사에 출판사 교정일, 수학 대학시험 문제집 만드는 일 등을 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다. 하지만 동지들을 잃고 조직에서 이탈된 데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안재구는, 돈을 버는 족족 술이나 마시고 싸움질도 하면서 향촌동 일대를 쓸고 다녔다.

대학원을 마치고 1년 간 병역생활을 하던 60년 4월 역사적인 4.19 혁명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지 12년 만인 이해 4월 26일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안재구는 민중의 힘을 똑똑히 보았다. 자신이 목숨을 부지하고자 지난날의 활동을 접고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사이, 민중들은 자신의 힘으로 정권을 무너뜨렸다. 학생운동의 4~5년 어린 후배들이 가장 앞장에 서서 총칼을 몸으로 막아 나섰다. 1960년 9월, 제대를 할 때의 안재구는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혁명가로 살아갈 결심을 세우고 돌아온 것이다.

인물이야기 안재구

꿈만 같았던 평양 방문길



평생 동지, 제자 여정남을 떠나보내며

영남고등학교 교사로 복직한 안재구는 한국교원노동조합에 가입했고, 고등학생으로 조직된 학생민족통일연맹을 지도하는 일도 시작했다. 경북 지역의 투쟁문제를 김문심 선생과 논의했고 한국노동자신문을 만들던 통혁당 김종태 선생과 교유하며 노동운동을 논의하는 등 분주하지만 뜨거운 날을 보낼 수 있었다.

4.19 혁명 이후 또 다시 ‘해방’의 기쁨을 맞봤지만,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인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안재구는 영남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동생과 함께 붙잡혀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61년 하순이다. 교원노조 투쟁으로 단식농성 일주일째를 맞아 교무실 복도에서 매트에 이불 덮고 힘없이 누워있던 안재구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안 선생, 이분은 민족일보 기자인데 우리 분회 투쟁을 취재하러 왔습니다.” 평생 동지 이재문과의 첫 만남이다. 이재문은 1964년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뜨겁던 때 학생시위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었고, 안재구는 대구 대학교수들을 조직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급속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동촌 유원지, 수성못 유원지 등에서 만나 의견을 나누기도 했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되어갔다.

이재문을 통해 또 한사람의 소중한 동지를 만났다. 바로 경북대 여정남이다. 처음 연구실로 찾아온 여정남에게 한 눈에 반한 안재구는 “우리 일이 잘되려고 그러는지 정말 좋은 사람을 얻었습니다. 조직가라기보다는 지도자로 더 클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우리 한번 멋지게 가꾸어 봅시다”라고 이재문에게 말했다.

1969년 가을에는 박정희 3선 개헌 저지 투쟁을 구상하면서, 여정남을 통해 ‘정진회’를 꾸렸다. 이재문은 대구지역 민주인사 서도원, 도예종 선생 등과 논의를 함께 했다. 1970년에는 정진회의 후신인 ‘정사회’를 조직했고 림구호 등과 함께 교련반대투쟁을 조직 지원했다. 학생운동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유신선포 이후 학생회를 해체, 학도호국단을 부활시켰다. 그렇게 운동의 터전이 사라지자 이념적 색채를 드러내지 않는 ‘한국풍토연구회’를 꾸려, 곳곳을 다니며 텐트를 치고 회의를 하거나 학습을 진행했다.

한풍회 조직이 확대되어 73년에는 유신반대 투쟁을 본격화하게 되었다. 여정남은 서울 운동과도 관계를 맺었고, 탄압으로 위축된 서울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구지역에서 한 판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자신감을 얻어가던 학생운동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겪으며 다시 시련을 맞았다. 배후로 조작된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도예종, 서동원 등 대구지역 인사들과 여정남은 사형선고 18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안재구는 아들 안영민과 함께 쓴 ‘아버지, 당신은 산입니다’에서 여정남에 대해 “그 시절 여정남 군에게 좀 더 넓은 사랑을 베풀지 못했음을 내내 후회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또 사형 선고를 받고 재판장을 향해 꾸벅 절하면서 “영광입니다!” 라고 말했던 그의 모습은 “조국의 통일을 위해 자기의 한 목숨을 바치는 것을 최고의 영광이라고 말하던 평소의 소신이 그대로 나타난 대목”이라고 회고한다. 여정남은 안재구 등을 끝까지 보호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안재구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동지들을 잃은 아픔과 함께 운동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인물이야기 안재구

남민전 사건 재판정의 안재구 (동구라미 안)



“동지는 일심동체이니 이별은 없다”

안재구는 1976년 2월 경북대 교수재임용에서 탈락했다. ‘국가관 미확립’이 이유였다. 쉽게 말해 유신 정권에 협력하지 않고, 민주화 운동을 벌인 학생들을 감싸 눈엣가시였다는 뜻이다. 심란한 마음을 안고 천황산 자락, 지리산 자락 등을 다니며 몇 시간씩 고민을 한 안재구의 마음에는 투쟁조직을 꾸려 박정희 정권과 정면 싸움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침 동국대 총장이 인편으로 연락을 해 채용 의사를 밝혀왔다. 이 일로 서울에 간 김에 이재문 동지와도 연락이 닿았다. 1976년 4월, 영등포 석굴이라는 다방이었다. 2년 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많이 늙어버린 동지의 모습을 보았다. 두 동지는 머리를 맞대고 열정적으로 앞날을 도모했다. 대중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이를 통일전선으로 묶어낼 사령부가 필요하다는 것이 일치된 고민이었다. 이재문은 ‘벌써 그런 노선에 따라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활동하고 있다’면서 가입을 권했다.

동국대 교수로 서울 생활을 시작한 1976년 9월 3일, 안재구는 남민전 가입 선서를 했다. 이재문, 신향식과 함께 중앙위원회를 구성했고, 교양선전선동부 책임자를 맡았다. 남민전 조직은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를 별도로 꾸려 가입한 성원들을 교양했고, 성원의 의식이 높아지면 남민전 준비위원회 ‘전사’로 다시 가입 선서를 받았다. 77월 11월에는 ‘청년학생위원회’를 꾸렸고 78년에는 기관지 ‘민중의 소리’를 발간했다. 이어서 ‘민주구국교원연맹’ ‘학생연맹’ ‘농민연맹’ 등도 조직됐다.

‘민주투쟁국민위원회’의 발전된 조직인 ‘국민연맹’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나갔다. 유인물을 한주먹 안에 넣어 벽에 던져 뿌리는 시위, 아파트 분양광고 애드벌룬에 유인물을 묶어 뿌리는 시위를 벌였다. 3분이면 도청이 가능한 공중전화를 3분마다 옮겨 다니며 ‘아사히신문’ 등에 연락해 강령과 선언문을 전달하기도 했다.

안재구가 학문의 터전을 숙대로 옮기고 막 졸업생 여행을 다녀온 1979년 10월, 추석 준비로 바쁜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사장이 입원했습니다.” 체포를 의미하는 암호였다. 가족들에게 둘러대고 집을 나서 신향식, 이해경과 아지트에 숨어 지냈다. 핵심간부였던 세 사람은 인천에서 밀선을 타고 외국으로 피하는 길 밖에 없다고 결정했다.

10월 27일 새벽. 방송에서는 하루 전 박정희가 사망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박정희 유신정권 치하에서 숨죽여 살던 많은 이들처럼, 그들도 영등포 시장에서 기쁘게 술을 한 잔 하면서 밀선을 알아보러 간 사람을 기다렸다. 하지만 27일 계엄령이 선포됐고 28일 새벽 2시에 아지트는 습격을 당해 체포되었다.

신문에는 “대학교수, 대학생이 포함된 도시 게릴라 조직, 지하조직 84명을 일제히 검거했다”는 뉴스가 연일 흘러나왔다. 1심 재판에서 “나는 수학자로서 학문을 하고 싶다. 민족을 사랑하고 분단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은 변함없다. 나를 희생시킨 유신정권을 바로잡고 이 땅 민주화에 기여하고 싶다”는 최후진술을 남긴 채 안재구는 이재문, 신향식, 최석진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국제수학자대회’에서 700여 명의 수학자들은 한국 정부와 재판정에 “세계적인 학자를 죽게 할 수 없다”는 탄원서를 보냈다. 덕분에 그는 최석진과 함께 2심에서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을 수 있었다.

안재구는 남민전 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꾸준히 연구를 계속해왔다. 특히 미분기하학과 응용해석학 분야에서 발표한 논문 10여 편은 미국의 권위 있는 수학지 ‘Mathematical Review’에 실려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학술잡지 ‘경북수학저널’도 만들었는데 한국에서 유일하게 해외로 배포된 학술잡지였다. 쉬지 않은 연구와 성취가 세계 수학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셈이다.

안재구, 최석진이 사형을 면하자 이재문은 두 사람을 붙들고 엉엉 울면서 기뻐했다. 자신은 여전히 사형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재문은 “안 선생, 우리는 서로가 신념을 온전히 간직한 채 갈라지니 이별이라고 할 수 없네요. 동지는 일심동체이니 이별은 없는 것이지요” 라는 말을 남겼다.

안재구는 1988년 12월 가석방될 때까지 만 9년 2개월 동안 징역생활을 했다. 유신체제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던 당시에 수감생활은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한 번은 최석진이 ‘급성신우염’으로 정밀검사를 받아야 했지만, 교도소 측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단식투쟁이 벌어졌다. 단식 3일째에는 이남 출신들이 가세해 ‘운동시간을 1시간으로 늘리라’고 요구했고, 단식 5일째에는 이북 출신들이 더해 ‘부식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으로 개선할 것’을 요구했다. 소장 면담을 거쳐 투쟁은 승리로 마무리됐고, 담배꽁초가 든 멀건 국을 먹던 이들은 싱싱한 김치와 무친 겉절이 등의 ‘진수성찬’을 먹게 됐다. 감옥 안도 이들에게는 투쟁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9년이 넘는 수감생활은 안재구에게 ‘수학자로서의 죽음’을 의미했고 밖에 남은 가족들에게는 ‘간첩 가족’이라는 꼬리표와 지긋지긋한 가난을 의미했다. 아내 장수향은 네 아이를 키우면서 화장품, 옷, 건강식품부터 보험 판매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안재구가 잡혀간 겨울에는 연탄이 떨어져 그의 방에 가득한 ‘창작과 비평’ ‘사상계’와 같은 책을 태워 겨울을 날 정도였다. 장수향은 이후 자서전에서 당시를 회고하면서 “아무리 햇볕이 쨍쨍하고 더운 날에도 양산을 쓰지 않았다. 침침한 그곳에서 햇볕을 그리워할 남편을 생각하면, 그 햇볕을 막는 양산이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동지 이재문은 1981년 11월 23일 옥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신향식에 대한 사형집행이 1982년 10월 8일 이뤄졌다. 쓸쓸히 이들을 떠나보낸 안재구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의 모습으로 1988년 12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석방의 기쁨은 잠시였다.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아들 안영민이 가두시위 중 구속되어 대구교도소에 갇힌 것이다. 면회소 안팎으로 서로 자리만 바뀐 채로 안재구는 “전에는 내가 그 안에 있고, 네가 밖에서 면회를 하더니만 오늘은 정반대가 되었구나” 라는 말을 전한다.

인물이야기 안재구

안재구



‘부자 공안수’ 안재구와 안영민

10여 년의 수감생활 동안 안재구는 수학자로서의 삶을 빼앗겼지만, 다방면의 책을 읽으면서 철학과 과학, 역사의 본질문제에 대한 이론을 체계화했다.

노태우 정권은 1991년 북과 만나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했다. 안재구는 남북교류가 활성화했을 때 민간 통일운동 진영이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고민을 시작했고, 통일운동 진영을 하나로 묶어내는 한편 해외 통일운동과도 연계를 맺고자 했다. 그렇게 백명민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과 만나 지원을 받기도 했다.

백명민과 안재구를 잇던 중간 전달자의 배신으로 이들의 만남은 안기부의 귀에 들어갔고, 안기부는 주변 사람들을 모두 끌어들여 ‘구국전위 사건’을 만들어냈다. 총책 안재구, 광주 책임자 류락진(이후 영화배우 문근영의 외조부로 더욱 유명해졌다) 등이 전대협동우회, 경북대활동가조직, 남총련 산하 대학 등에 주체사상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경북대 총학생회장을 했던 차남 안영민까지 체포해서 ‘부자 간첩단’ 사건을 만들었고, 백명민을 일본 조총련 간부로 만들었다. 안재구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구국전위’ 사건은 조작된 사건임이 분명했다. 관련자들이 서로 일면식도 없었고, 각각을 별건으로 수사한 후 발표할 때 ‘조직’으로 만들었으며 뚜렷한 증거도 없었다. 김일성 주석 조문파동, 서강대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 등으로 형성된 신공안 정국과 김영삼 정권의 본질을 극명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미국 National Academy of Science 인권위원회의 항의가 시작됐고, 유엔인권위원회도 1995년 스위스 제네바 회의에서 “세계인권선언을 위반했다”는 결정을 내렸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등 각국의 인권단체들도 많은 지원을 했다. 이에 힘입어 5년여 만인 1999년 8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될 수 있었다.

감옥에서 여러 개의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특히 ‘착취와 압제의 굴레를 벗고 자유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로 시작하는 ‘5월 광주항쟁의 노래’는 5.18 기념행사 등에서 자주 불렸다. 출소를 앞둔 한 대학생에서 우유 은박지에 못으로 찍은 악보 2장을 전해주어 전파되었는데, 그 학생이 악보를 1장 잃어버린 탓에 대학생들은 ‘미완의’ 노래를 불렀다.

‘부자 공안수’가 됐던 아들 안영민이 1998년 결혼을 할 땐 12시간의 가출옥을 받아 참석했다가, 식장 바로 앞에 세워진 ‘닭장차’을 타고 다시 가족들과 생이별을 했다. 마치 아버지의 결혼식에 형사를 대동했던 할아버지 안병희 선생의 모습처럼 말이다.

석방 후 안재구는 청년학생,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강의도 하고 통일단체들의 고문 역할도 맡고 있다. ‘간첩’이었던 그가 6.15 공동선언 발표 이후에는 북한의 초청을 받아 4박5일 간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2006년 3월에는 고 김남주 시인, 임헌영, 이학영, 이수일, 박석률, 권오헌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1. 국제제국주의의 신식민지 체제와 그 앞잡이 박정희 유신독재를 타도하고 민족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권 수립 8. 평화와 중립의 자주외교 실현 9. 7?남북공동성명의 원칙과 토대 위에 조국의 평화적 통일 촉진(남조선민족해방전선 강령 중)

남민전 ‘전사’들은 80년대에야 논쟁이 불붙은 한국사회 성격문제에 대해 ‘국제제국주의의 신식민지 체제’로 규정했고, 북에 대해서는 통일을 실현해 갈 ‘동반자’로 인식했다. 너무 시대를 앞서간 것이 이들의 불운이라면 불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 치하에서 태어나 광복을 맞이하고 남과 북이 통일된 상태의 ‘해방 공간’을 경험했던 이들 세대에게, 통일을 열망하고 민중들이 주인 된 세상을 꿈꾸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76세의 안재구는 여전히 “생명이 다 할 때까지 통일운동에서 맡은 일을 다 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시대를 앞서간 까닭에 동지를 잃고 수십 년을 옥에서 보내야 했던 안재구의 삶, 안정된 교수의 자리를 버리고 양심이 가리키는 대로 혁명가로 살아온 그와 벗들의 삶이 없었다면, 역사는 올바른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올 수 있었을까.

인물이야기 안재구

98년 아들 안영민의 결혼식에 가출옥을 받아 참석했다.

'사람과사람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재준 목사  (1) 2019.04.23
천재작곡가 金順南   (0) 2019.04.23
한국의 쿠베르탱 (이상백)   (0) 2019.04.23
껍데기는 가라  (0) 2019.04.23
한수산 필화사건   (0) 2019.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