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4. 23. 13:51ㆍ사람과사람들
공항에서 눈이 가려진 채 어디론가 실려 갔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지하실에서 나는 발가 벗겨졌습니다. 철제의자에 앉혀져서 물고문과
전기 고문, 얼굴에 물수건을 덮어씌워 질식시키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동원한 비인간적인 행위인 그 가혹한 고문은 어머니, 그리움, 우정, 사랑 등......
이런 추상명사를 잃어버리게 했습니다..... 사람은 추상명사 때문에 사는 것인데, 나는 그것들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옷을 다 벗긴 다음에 물을 뿌리고, 손가락과 발가락에 전기를 꼽아 온 몸에 전기고문을 하면서,
전기가 더 잘 통하게 하기 위하여 그 위에 물을 붓고....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지 인간이 동물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벌레가 되어 풀려 났습니다.
석방 후에 인간에 대한 혐오감이 생겼습니다.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는 글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글은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에 쓰는 것인데...... "
1981년 5월 제주에서 소설을 집필중이던 한수산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기관원들에 연행돼 여러날에 걸쳐
몸전체가 가지빛이 되도록 모진 구타와 폭행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한수산은 한때 절필을 선언하고
1988년 고국을 떠나 오랜동안 일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소위 '한수산 필화사건" 으로 알려진 이 일은 1981년 5월 중앙일보 장편소설 "욕망의 거리" 라는 연재소설
내용 가운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을 야유했다는 이유와 정부와 군을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그 소설의 내용을 옮기자면,
< 어쩌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 정부의 고위관리가 이상스레 촌스런 모자를 쓰고 탄광촌
같은 델 찾아가서 그 지방의 아낙네들과 악수를 하는 경우......>, <월남전 참전용사라는 걸 언제나
황금빛 훈장 처럼 자랑하며 사는 수위는 키가 크고 건강했다. .... 세상에 남자놈 치고 시원찮은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그런 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온 얘길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 라는 부분이다.
한수산 그에게는 잊어 버리고 싶고, 잊을 수 없는 사건 이었다.
모진 고문으로 망가진 육체는 시간이 가며 나아질 수 있었지만 정신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피폐해졌다.
이 필화사건으로 소설을 연재했던 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위시한 7명과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한수산과
대학동창이라는 이유로 연루된 시인 박정만이 당한 혹독한 고문이었다.
박정만은 놓여난 후 고문 휴유증으로 숨지고 말았다.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하에서 정치, 경제, 사회등 제부문에서 언론의 자유를 논한다는 것은 자체가
용납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역사의 희생물이 어디 한수산 뿐일까만 아무 죄없이 글쟁이가 글과
인간을 혐오할 정도로 죄없이 당했던 이 사건은 당시도 어쩌면 앞으로도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한
모두에게 치욕을 준 사건으로 기억될 것이다.
한수산은 산문시와 같은 부드러운 문체를 구사하여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바탕으로 한 생명의
가치를 탐구하는 작가로 알려진 소설가였다.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4월의 끝' 이
당선되어 소설가가 된 그는 "부초", "모래위의 집", :해빙기의 아침", "내 삶을 떨리게 하는 것들" 등에서
매우 시적인 산문으로 독자들 특히 여성 독자들에게 인기를 모았었다. 짙은 감성과 화려한 문체로
1970년대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지만, 80년 초의 끔찍했던 필화사건의 경험은 더 이상 작가로서도,
한국인 이라는 정체성도 한때나마 그져 잊고 싶은 싫은 대상일 뿐이었다. 무지막지한 압제하에서 자유롭게
내쉬고 들여마실 수 있는 호흡 마져도 허무와 절망으로 이어지고 또 짓이겨진 서러운 땅과 힘없이 당하기만
하는 백성들과 시간만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작가 한수산, 그는 7년간 절필하고 4년 넘게 일본서 생활하며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바로 원폭과 강제징용 조선인의 비극을 다룬 5부작 역사소설 "까마귀"다.
이 역사소설로 한수산은 함부로 죽지않는 무너지지 않는 한 인간, 다시 소설가로 돌아온 인간 한수산의
치열한 작가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역작이란 소위 무진 애를 쓴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텐데, 역작인 "까마귀"는 일본생활에서의 그의 시간들이
다만 필화로 인한 도피나 안정에 머무르지 않고 작품을 통해 더 높은 정신의 세계를 보여 줬다는데서
우리는 진정한 작가로서의 그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일본에서의 고통의 시간들이 온통 이 작품을 위해
쓰여져 과거시간의 역사자료 모으기와 현장성 확보를 위한 현장답사, 고증 그리고 작가의 혼을 불어넣은
소설로서의 상상력등으로 일관시킴으로서 "까마귀"라는 식민지 백성의 한어린 역사소설을 따뜻한 인간애로 풀어낸 것이었다.
전두환 긴급체포조가 1980년대말에서 1990년대에 활약했다. 그들은 어딜 갔지.
어쩐 일인지 모두들 다 과거라고 생긴 건 금시 잊어 버리는걸까 ! 용서한걸까 ?
나는 아직도 전혀 분이 풀리질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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