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Sympbonic Fantasia KOREA(한국 환상곡) - 안익태 작곡,지휘

2019. 1. 18. 10:58사람과사람들

음반을 정리하다가 찾아낸 "한국 환상곡" 입니다.  가히 베토벤 교향곡 9번(합창)과,장 시벨리우스의

필란디아에  비교되는,안익태 선생님이 아니면, 누구가 이런곡을 작곡 했을까요?

이음반은 196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니" 와 "합창단"의 "헐리우드 볼" 야외 음악당 에서 '안익태선생"의 지휘로 연주된 것을 녹음한것으로, 서라벌 레코드 에서 1976년 Lp음반으로 제작된 것입니다.

 

 

 

 

 

 

 

안익태(安益泰) 작곡의 합창단·관현악과 관악기를 위한 대 환상곡. 1940년경에 작곡이 완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연주시간 약 30분 정도로 편성된 웅장한 규모의 작품이다. 독일 후기낭만파 양식이 기조가 되고 있다. 특히, 후반부의 합창 부분은 <애국가>의 가락이 중심을 이루며 ‘만세 만세’의 가사로 격앙과 고조를 이루면서 끝이 난다.

이 작품은 교향시적인 문학적 서술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고 작곡자는 해설하였다. 태고의 민족 탄생과 유구한 역사, 그리고 외적 침략에 항거하며 독립하여 광복을 이룬다는 줄거리로 일제강점기에 민족 독립을 쟁취하려는 고무적인 분위기가 작품에 담겨 있다.

핀란드의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를 방불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작곡양식은 서술적이다. 조성과 기능적 화성을 바탕으로 작품이 구성되었으나 논리적인 양식보다는 선율군의 연결선상으로 엮어져 있다.

안익태의 <애국가>는 1936년에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작품은 작곡자의 일본 및 미국 유학을 거쳐 헝가리 시대의 수학(修學)의 결과로 이루어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으며, 첼리스트와 지휘자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창작 음향 기능이 중요시되었다.

본인은 코다이와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한국환상곡>은 헝가리 작곡가의 영향이 강한 것처럼 보인다. 부분적으로 한국민요의 멜로디를 도입하고자 하였지만, 안익태 자신의 서양음악 교육의 바탕 때문에 새로운 기법을 개척하지 못하였다.

세계 첫 연주는 1958년 할리우드에서 이루어졌으며, 국내에서는 1961년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이 합동으로 처음 연주했는데, 이 음악회는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에서 당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음악회였다.

그 뒤 국내에서는 국가의 경축기념일 등에서 자주 연주되었으며, 해외에서도 일본·미국·남미 등에서 연주되면서 외국인들이 한국말로 노래하는, 한국음악의 국제적 선양이라는 선례를 남기기도 하였다. 안익태의 다른 관현악 작품으로는 <강천성악 降天聲樂>이 있으나 이 작품은 일본 아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며, <한국환상곡>이 안익태의 걸작으로 기록된다.


안익태(1906~1965)


〈애국가〉의 음악을 소재로

〈한국 환상곡〉은 역시 안익태가 작곡한 우리나라의 국가 〈애국가〉가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안익태는 1965년에 죽었기 때문에 현재의 저작권법에서 저작권이 만료되는 시점은 2035년이다. 그러나 안익태의 미망인 로리타 탈라벨라 여사가 200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애국가는 한국인 것”이라며 애국가의 저작권을 무상으로 기증했다. 최근까지도 애국가의 작사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나라 정부는 오랫동안 〈애국가〉의 작사가를 찾는 작업을 해왔고, 최근에는 6·25 동란 직후 한국 공보처가 개설한 국가기관에서 발행한 브로슈어에 영어로 번역된 애국가의 악보가 윤치호 작사, 안익태 작곡으로 표기되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작사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곡은 안익태의 곡임은 확실하다. 〈애국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의 공식 국가로 불려오고 있다.

애국가 악보


미국에서 작곡되어 유럽에서 초연

〈애국가〉가 〈한국 환상곡〉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곡임에도 불구하고, 작곡가 안익태의 행적은 오랫동안 베일에 감춰져 왔었다. 아직도 안익태의 유럽과 미국에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몇몇 한국 음악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새로운 것들이 밝혀지고 있을 만큼, 우리는 아직 우리나라 국가의 작곡가 안익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오랫동안 이 곡은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작곡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최근 음악학자 허영한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 환상곡〉은 안익태가 유럽으로 건너가기 전인 1935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작곡되었다고 밝혀졌다.


안익태의 친일 논란

문제는 몇몇 학자들이 안익태의 미국과 유럽에서의 활동을 조사해본 결과, 안익태가 친일행적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1930년대 중반 유럽으로 건너가면서 안익태는 일본식 이름인 ‘에키테이 안’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상태였고, 그는 법적으로 일본인으로 살아야 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2000년에 발굴된 안익태가 지휘한 베를린에서의 음악회는 사실상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 음악회였고, 그 공연에서 〈만주 환상곡〉이 연주되었음이 밝혀졌다. 학자들은 〈만주 환상곡〉과 〈한국 환상곡〉에 들어있는 비슷한 부분들을 지적했고, 이로 인해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애국가〉를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돌았다. 게다가 안익태가 유럽에서 활발하게 지휘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작품으로 연주했던 곡들은 〈한국 환상곡〉이 아니라, 〈만주 환상곡〉, 〈에텐라쿠〉, 〈교향적 환상곡 교쿠토〉 등 일본 색을 그대로 표면에 드러낸 작품이었다는 사실도 안익태의 친일 행적과 〈한국 환상곡〉, 〈애국가〉와 관련해서 오랫동안 논란의 여지가 되어왔다.

부다페스트 도시공원에 위치한 안익태 흉상


〈한국 환상곡〉의 정체성

그러나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안익태 연구를 수행해온 음악학자 허영한의 생각은 다르다. 그에 따르면 〈한국 환상곡〉은 1937년 봄 미국에서 완성되어 그곳에서 비공식 리허설 혹은 비공개 연주회를 통해 처음 연주되었다. 또한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이루어진 초연 당시 〈한국 환상곡〉의 마지막 부분은 오늘날과 달리 합창이 아니라 관현악 연주로만 구성이 되어있었다. 이후 안익태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작곡가 도흐나니 에르뇌의 지도로 이 곡의 많은 부분을 수정했다. 이 후 안익태는 유럽 여러 곳에서 자신의 지휘로 〈한국 환상곡〉을 연주한다. 하지만 1940년 9월 부다페스트 연주회를 마지막으로 안익태가 지휘하는 공연에서 〈한국 환상곡〉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친일과 애국의 이분법을 넘어

음악학자 허영한은 또한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이 일본 외교 당국의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작곡가가 작품명을 변경해서 〈쿄쿠토〉, 〈만주국〉 등으로 연주되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허영한은 안익태의 오케스트라곡 〈전원〉이 우리나라 신민요 〈방아타령〉의 선율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곡이고, 이 곡이 〈한국 환상곡〉, 〈쿄쿠토〉, 〈만주국〉 모두에서 계속 2악장에 위치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 세 곡이 사실 각각 다른 곡이 아니라, 〈한국 환상곡〉의 변형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식민지 시대에 살았던 지식인인 그가 유럽 땅에서 어떻게 지휘자로 살아갔는지를 그대로 드러낸 단면이기도 했다. 동시에 이는 그를 친일 혹은 애국의 이분법 안에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변수들이 그의 삶에 얽혀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embed/kJxBK9ZaIZc?feature=player_embedded"-클릭하시면 서울시향의 연주를 감상할수 있습니다.

출처 : 탄노이(tannoy)그리고,아날로그!
글쓴이 : chankyo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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