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象無形

2019. 4. 10. 08:38世說新語

漢字, 세상을 말하다] 大音希聲<대음희성>


 

대상무형(大象無形). 큰 형상은 형태가 없다는 뜻이다. 『도덕경(道德經)』 41장에 나온다. 이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올해 롯데 경영의 화두(話頭)로 던졌다.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지난달 말 경영 복귀 후 가진 첫 사장단 회의에서 신 회장은 “우리가 맞이할 미래 변화는 그 형태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무한하다”며 “기존의 틀과 형태를 무너뜨릴 정도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룹 총수가 “큰 형상은 형태가 없다”며 “기존의 틀을 무너뜨리자”라고 말한 것을 볼 때 앞으로 롯데그룹의 변신 폭이 매우 클 것으로 짐작된다. 급변하는 미래에도 살아 남으려면 그 무엇으로도 변신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갖춰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대상무형이 나오는 『도덕경』 41장은 음미할 부분이 적지 않다. ‘큰 네모는 모서리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뤄지며, 큰 음악은 소리가 없고 큰 형상은 형태가 없다(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현실에 존재하는 사각형의 모서리가 우주적으로 팽창하면 있을 수 없고, 큰 그릇은 오히려 천천히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 큰 음악은 소리가 없고 큰 형상은 형태가 없다고 한다. 지극히 철학적인 말들로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사정없이 부수는 통쾌함마저 있다.    


 

Ⅰ. 도덕경 41장

(1) 원문

上士聞道勤而行之, 中士聞道若存若亡, 下士聞道大笑之, 不笑不足以爲道.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 質眞若渝,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善貸且成.

상사문도근이행지, 중사문도약존약망, 하사문도대소지. 불소부족이위도. 고건언유지, 명도약매, 진도약퇴, 이도약뢰, 상덕약곡, 대백약욕, 광덕약부족, 건덕약투, 질진약토, 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음희성, 대상무형. 도은무명, 부유도선대차성.

-------------------------------------------------------------

근(勤) : 부지런할

건(建) : 세우다, 아뢰다. 개진(開陣)하다.

이(夷) : 오랑캐, 평탄하다.

뢰(纇) : 실마리, 맺힌 실, 어그러지다.

투() : 훔칠, 경박하다. 인정이 없다. 구차하다. 빈약하다.

투(渝) : 달라지다. 풀어지다. 넘치다. 흐려지다.

우(隅) : 모퉁이, 귀퉁이, 구석, 언덕, 벼랑

은(隱) : 숨기다. 가리다. 비밀로 하다.

대(貸) : 빌리다. 베풀다.

-------------------------------------------------------------

 

(2) 번역

높은 선비는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실행하고, 보통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낮은 선비는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을 것이니, 낮은 선비가 비웃지 않는 도는 도라 하기에 부족하다. 그런 까닭에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전진하는 도는 후퇴하는 것 같고, 평탄한 도는 울퉁불퉁한 것 같고, (산처럼) 높은 덕은 골짜기처럼 낮은 것 같고, 가장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 같고, 넓은 덕은 좁은(덕이 부족한) 것 같고, 건실한 덕은 빈약한 것 같고, 꾸밈없이 진실한 것은 변질되고 흐려지는 것 같다. 큰 네모는 모서리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져 완성품이 잘 보이지 않고,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 모양은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 도는 숨겨져 있어 이름이 없는데, 무릇 오직 도만이 잘 베풀고 또 잘 완성한다.

 

(3) 해설

41장은 40장을 일상의 예를 들어 도(道)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곳이다. 노자는 도를 들었을 때 도에 따라 실행하는 사람은 높은 선비이고, 보통의 선비는 반신반의하며, 낮은 선비는 크게 비웃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낮은 선비가 크게 비웃지 않으면 오히려 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 낮은 선비는 왜 크게 비웃는가? 낮은 선비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진리라고 믿고,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 기준에 어긋나면 크게 비웃는 것이다. 이 사람은 이분법에 함몰되어 있는 얕은 지식인으로서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모른다.

자기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아는(無知의 知) 자를 노자는 보통의 선비라고 한다. 그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半信半疑)한다. 왜냐하면 이분법을 넘어 변증법으로 진리를 찾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잘못일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는 구도자이고 학자이기 때문에 망설이지만 사고가 깊지 못해 도를 확신할 수는 없다.

여기에 비해 도를 듣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높은 선비이다. 이 사람은 깊은 사고의 사람으로 궁극적인 현묘(玄妙)의 세계(이면:裏面)를 통찰력으로 볼 수 있는 자이다. 감성적 확인이나 이성적 추리를 통해 알려고 하지 않는 무위법(無爲法)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도를 들으면 감동을 하면서 실행에 옮기는 성인(聖人)이나 현인(賢人)이다.

 

<도를 듣고 반응하는 세 종류의 선비>

선비의 단계

인식

논리

인간

높은 선비

현묘의 지(玄妙의 知)

무위법(無爲法)

성인(聖人), 현인(賢人)

보통 선비

무지의 지(無知의 知)

변증법(辨證法)

구도인(求道人), 학자(學者)

낮은 선비

유지의 지(有知의 知)

이분법(二分法)

얕은 지식인(知識人)

 

<도덕경 41장 격언 해설도>

원인

정(正)

약(若)

반(反)

결과

도은

무명

(道隱

無名)

도는 숨겨져 있어 이름이 없다.

양(陽)

명(明) : 밝음

매(昧) : 어두움

음(陰)

(음처럼 보임)

도선

대차성

(道善

貸且成)

도는 잘 베풀고 완성시킨다.

진(進) : 나아감

퇴(退) : 물러섬

이(夷) : 평탄함

뢰(纇) : 굽음

상덕(上德) : 높음

곡(谷) : 낮음

대백(大白) : 깨끗함

욕(辱) : 더러움

광덕(廣德) : 넓음

부족(不足) : 좁음

건덕(建德) : 튼튼함

투(偸) : 빈약함

질진(質眞) : 질박함

투(渝) : 변덕스러움

대(大)

대방(大方) : 큰 네모

무우(無隅) : 모서리가 안보임

거의 인식되지 않음

대기(大器) : 큰 그릇

만성(晩成) : 완성이 잘 안보임

대음(大音) : 큰 소리

희성(希聲) : 잘 듣기지 않음

대상(大象) : 큰 모양

무형(無形) : 잘 보이지 않음

 

 

일반적으로 41장의 격언은 13개로 말한다. 그렇지만 필자는 13번째 격언이 전체를 아우르는 말(원인과 결과)로 해석하여 격언에서 제외시켰다. 그리고 12개 격언 중에 앞의 8개는 약(若 : ~같다, 그대로)이라는 용어로 앞 뒤 단어를 연결하고 있고, 나머지 4개는 약(若, ~같다)이라는 용어 없이 앞 뒤 단어가 연결되어 있어 구분하였다. 구분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앞의 약(若)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8개의 문장을 음양이론으로 해설하여 앞 글자는 양(陽)으로, 뒤의 글자는 음(陰)으로 대응시킬 수 있는데 비해 뒤의 4개 문장은 음양으로 대응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세 종류의 선비를 구분할 때 사용한 방식(무위법 : 無爲法)에 따라, 약(若)을 ‘같다’는 의미 외에 ‘그대로’라는 의미로도 해석하였다. 즉 ‘A약B’일 경우 인위적인 이분법과 변증법을 사용하지 않고 무위법에 따라 ‘A그대로 B’ 방식으로 해석가능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해석하면 격언 중 첫 번째 문장은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다’는 해석 외에 ‘밝은 도는 그대로 어둡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장은 ‘전진하는 도는 후퇴하는 것 같다’는 해석 외에 ‘전진하는 도는 그대로 후퇴한다’가 된다. 그리고 나머지 문장에서 평탄함과 굽음, 높음은 낮음, 깨끗함과 더러움, 넓음과 좁음, 튼튼함과 빈약함, 질박함과 변덕스러움 등은 반대말인데, 반대말을 그대로 동일하다는 의미로 해석가능하다.

이렇게 반대말을 그대로 동일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두고 크게 비웃지 않으면 어찌 지식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때 크게 비웃는 지식인은 자신이 진리를 인식하는 기준을 이분법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분법은 사물을 구분하는데 유용하게 쓰이는 인식방법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현상(現象, appearance)을 인식하는 방식이지 실재(實在, reality)를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얕은 지식인은 낮은 등급의 선비이며, 이들이 크게 비웃지 않으면 실재를 지칭하는 도(道)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약(若)이 들어가지 않은 4개의 문장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작은 것들은 인식되지만 그 작은 것들도 크게 확장해서 극(極)에 이르게 하면 거의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4개의 문장(大方隅, 大器成, 大音聲, 大象形)에서 무(無)와 만(晩), 희(希)는 ‘거의 ~하지 않다’(rarely)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다. 그러면 이들이 왜 거의 인식되지 않는가? 극에 이른 큰 것들은 인간의 감각지각에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감각지각에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유와 무의 단순한 이분법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41장 격언의 논리는 정(正)은 정(正)이고 반(反)은 반(反)인 이분법(二分法)이 아니다. 동양식의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양(陽)은 양(陽)이고 음(陰)은 음(陰)인 이분법이 아니다. 그리고 정(正)과 반(反)이 지양(止揚)하여 합(合)에 이르는 변증법의 방식도 아니다. 양(陽)과 음(陰)이 지양(止揚)하여 양(陽)도 아니고 음(陰)도 아니면서 양과 음을 모두 포함하는 제3의 용어인 유(有) 등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양(陽)이 그대로 음(陰)과 같다. 그리고 작은 양(陽)이 파악되는데 비해 큰 양(陽)은 파악되지 않는 무위법(無爲法)이다. 우리가 무위법(無爲法)으로 도를 파악한다고 해서 도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위로 보아서는 안된다. 도는 모든 존재자로 하여금 존재하겠금 끊임없이 베풀어서 그들이 완성되도록 하는 창조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도(道)는 화이트헤드가 궁극자로 보는 창조성(創造性, Creativity)과 유사하다.

'世說新語' 카테고리의 다른 글

寒來暑往  (0) 2019.04.10
辰宿列張  (0) 2019.04.10
日月盈昃  (0) 2019.04.10
天地玄黃  (0) 2019.04.10
知足保身  (0) 2019.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