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23. 13:35ㆍ한국의 글,그림,사람
우리시대 한국화의 거목 '심향 박승무'
-옥천읍 하계리 샘실마을 출신, 허백련 등 당대 한국화 6대가로 손꼽혀
지금 대전시립미술관에서는 심향(深香) 박승무전이 열리고 있다. 심향 박승무 선생은 의제 허백련, 이당 김은호,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소정 변관식 등과 함께 한국화 6대가로 손꼽힌다. 이번 전시는 지난해 11월 있었던 심향 박승무 선생 추모 25주년 학술심포지움의 후속행사로 마련된 기획 전시라 할 수 있다. 심향 선생은 생애 말년(20여년)을 대전에서 보냈다.
대전에서 ‘지역예술 뿌리찾기’라는 측면에서 주목하기 시작한 심향 선생의 고향이 바로 옥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냥 흘려버릴 수가 없다. 이미 지난 1980년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선생의 발자취, 그중에서 옥천의 흔적을 찾는 것은 짧은 시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이번호에서는 이런 상황의 한계를 인식하며 미술평론가 황효순 박사의 ‘외로운 나그네-심향 박승무의 예술세계’라는 글과 심향 박승무 선생 선양위원회 기산 정명희 위원장, 대전시립미술관의 윤후영 전시담당을 통해 박승무 선생의 삶과 작품 세계를 개괄적으로 소개하려 한다. 심향 박승무전은 내년 1월20일까지 계속된다.
▲ 심향 박승무 화백의 독창적 설경은 근대화단에서 한 획을 그었다. 사진은 생전모습. 사진제공:대전시립미술관 | ||
소식을 듣고 찾아간 대전시립미술관은 평일이어서 그런지 한산했다. 정문을 지나 지하로 내려가니 꽤 넓은 면적의 5전시실이 있다. 그곳에서 심향 박승무 선생의 작품 56점과 사용하던 낙관 31점을 만날 수 있었다. 작품은 산수화분야, 화조도 분야, 석란도 분야로 나눠 전시하고 있었다. 역시 산수화 분야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산과 강, 작은 초가집과 정자, 물고기를 잡는 어부와 눈을 쓸어내리는 촌로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물론 작품마다 다른 스케일과 이미지로 각각의 작품에 펼쳐져 있었다. 그런 선생의 작품을 모두 둘러본 후 하나의 느낌이 가슴을 꽉 채웠다. ‘따뜻함’이다. 신선이 사는 듯 몽환적인 느낌의 풍경에서 현실과의 괴리감도 느꼈지만 가슴에서 일어나는 향수가 더 컸다. 선생의 작품에서 이제는 우리가 잃어버린 원시적 풍경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산과 나무, 강과 촌부를 바라보는 심향 선생의 따뜻한 시선은 내가 경험하기 한참 이전의 자연, 아니면 선생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었나 보다. 선생의 작품 속에서 옥천의 이미지를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욕심이었다. 대전에 사는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옥천에 다녀갔을 테고 그중엔 작품 구상을 위한 방문도 있었을 것이라 내심 생각했다. 지척에 고향이 있었는데 개연성이 높지 않은가.
‘이곳이 옥천의 어디’라고 딱 짚을 수는 없을 지라도 그만큼 친숙한 이미지를 보고 싶었던 게다. ‘심향 박승무’가 아닌 ‘옥천이 고향인 심향 박승무’를 만나러 갔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전쟁 시기에 머물렀던 목포에서 경험한 유달산이나 해안풍경 등이 심향 선생의 화폭에 고스란히 담겼다. 하지만 전시회장에서 옥천의 이미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심향 선생과 그에게 있어 고향 옥천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 실마리를 찾아간다면 그의 작품 속에 숨어 있을 옥천에 대한 이미지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작품도 무궁무진하다.
▲ 석란 1976년. 사진제공:대전시립미술관 | ||
▲ 설경 1959년. 사진제공:대전시립미술관 | ||
◆하계리 샘실마을이 고향
심향 선생은 옥천읍 하계리 샘실에서 1893년 태어났다. 맑고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샘이 있던 바로 그 마을이다. 심향 선생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기 전에는 선생의 고향이 서울 효자동으로 기록되었다. 태어나면서 큰아버지인 박경양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는 생부의 이름은 확인이 되지 않은 상태다.
열여섯이 되던 해, 집안의 정혼자였던 은진 송씨와 결혼하여 딸 둘을 낳았다. 이후 1930년경부터 함께 살았던 고순천씨도 역시 옥천 출신으로 창을 잘하는 예기 출신이었다고 한다. 어려서 양자로 입적이 되면서 옥천을 떠났던 심향 선생은 25살에 상해로 떠난다. 그곳에 있던 중 3.1항일독립운동으로 중국 내 한국인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고 집안일도 걱정이 되어 귀국을 결심한다.
귀국 중 부산에서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여운형 등 독립지사와의 접촉을 추궁 받고 조부가 낙향해 있던 옥천으로 주거지역 제한을 받는다. 주거제한이 풀린 서른 살에 다시 서울로 이주한다. 1919년에서 1922년까지 4년 가까이를 옥천에서 보낸 것이다. 출생하자마자 양자로 입적해 큰아버지 집에 보내진 것을 고려해 볼 때 옥천에서 거주한 기록으로는 유일하다.
황효순 평론가도 위에서 밝힌 글을 통해 심향 선생이 연고가 전혀 없던 대전에 정착을 하게 된 것도 고향 옥천에 대한 향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한국전쟁 직후부터 대전에 거주한 20년 동안 고향과 어떤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도 이후 확인해야 할 과제다.
◆철저한 야인화가 박승무
심향 박승무 선생 선양위원회 정명희 위원장은 심향에 대한 재조명이 너무 늦었다는 아쉬움부터 얘기한다. 주류든 비주류든 미술계와 어떤 인연도 맺지 않고 철저하게 야인화가로서 지내며 제자를 양성하지 않은 것도 조명이 늦어진 이유 중 하나다.
양부가 승정원 부승지를 지낼 정도로 부유한 집안 덕분에 혼란한 시대에도 YMCA 중학부 수료 후 YMCA 영어반에 들어가 미국유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그러던 중 소림 조석진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던 김창환의 영향으로 묵화를 시작했고 재능을 인정해 준 양부의 배려로 서화미술원에 입학하게 된다.
어린 시절과 그림을 배우던 시절까지 어려움 없이 집안의 뒷바라지를 통해 공부했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군사독재정권시절 등 격랑의 시대를 살아가며 심향 선생은 철저하게 초야에 묻히는 길을 선택했다. 상해와 만주, 옥천, 경기도 가평, 목포, 광주 등 그의 행적에서 시대의 아픔을 견뎌야 했던 예술가의 고단함이 충분히 읽힌다. 격랑의 시대는 예술가에게 순수한 예술행위 이외의 것을 요구한다. 예술가 스스로가 권력을 쥐기 위한 암투를 벌이게 만들거나 권력을 쥔 자들의 통치강화 수단으로 악용될 상황을 만들어 놓는다.
낭만적인 방랑자적 기질을 갖추고 예술가적 고집이 대단했던 것으로 회자되는 심향 선생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말년에 서울신문사에서 기획한 한국화 6대가전에 초대되면서 국민화가의 반열에 오르지만 이미 그의 나이 79세 때 일이다. 60년 예술인생의 대부분은 철저하게 야인화가로서 중심무대에 서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 화조도(가리개) 1960년대. 사진제공:대전시립미술관 | ||
▲ 화조도(가리개) 1960년대. 사진제공:대전시립미술관 | ||
◆심향 선생에 대한 평가
황효순 평론가는 그의 위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한 작가가 60년 이상 그림을 그릴 때 그의 작품 세계는 다양하고 작품에 대한 평가는 일률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심향의 작품에도 온화한 미점의 세계와 강한 필선의 세계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 있듯이 여러 평가가 공존할 수 있다.(중략) 어떤 상황에서도 외풍에 흔들리지 않고 전통미술의 위상을 지켜 온 그의 작가적 의지와 그가 이룬 독창적 설경의 세계는 근대한국 화단에서 한 페이지를 차분하게 기록하고 갔다고 할 수 있는 만큼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그의 스승이었던 조석진과 안중식은 오원 장승업 이후 조선말기로부터 근대 한국화를 이어주는 중요화가로 설정하고 이들에게서 그림을 배운 심향 선생을 비롯한 한국화6대가가 근대한국화의 서막을 열었다는 측면에서 미술사적 의미가 크다고 평가한다.
우리 미술사에서 결코 작지 않은 위치에 놓여 있으면서도 지금껏 관심에서 빗겨 있던 심향 선생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면서 이후 활발한 활동이 계획되고 있다. 당장 내년에는 심향 미술상이 제정될 것으로 보이며 미 발굴 작품들을 찾아 후속 전시회도 다양하게 기획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지용 시인의 이웃마을에서 10년 먼저 태어나 동시대를 살다가 떠난 우리시대의 한국화가 심향 박승무 선생을 옥천에서는 어떻게 조명해야 할지 진지한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출처:옥천군 향우회
'한국의 글,그림,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江上釣魚圖 (0) | 2018.08.24 |
---|---|
어부사(漁父詞) - 장지화(張志和) (0) | 2018.08.24 |
'600년 한국서예사'오세창의 <근묵> (0) | 2018.07.20 |
동양화에 나오는 그림의 뜻 (0) | 2018.07.13 |
부채문구 (0) | 2018.0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