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한국서예사'오세창의 <근묵>

2018. 7. 20. 09:17한국의 글,그림,사람

'600년 한국서예사', 오세창의 <근묵> 완역 출간



정몽주 정도전 성삼문 이퇴계 정약용 등 1136명 서예모음

[CBS문화부 김영태 기자] 성균관대학교의 대표적 유물인 '근묵'(槿墨)>이 마침내 완역되어 출간되었다.


<근묵>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선생이 모아서 엮은 조선시대의 글씨첩이다. 선인들의 묵적(墨蹟) 중에서 서간류의 소품(小品)을 오랜 세월에 걸쳐 모아서 34첩의 첩장본(帖裝本)으로 만들었다.

고려의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조선 초기의 정도전(鄭道傳), 성삼문(成三問) 등을 위시하여 이황(李滉), 이이(李珥), 정약용(丁若鏞) 등은 물론 대한제국 말기의 민형식(閔衡植), 이도영(李道榮)에 이르기까지 모두 1,136명에 달한다.

작가를 신분별로 보면 위로 국왕과 왕후로부터 문무 관료와 학자뿐만 아니라, 승려와 중인까지 모두 망라되어 있다.


위창은 비슷한 종류의 글씨첩을 2부 만들었다. 그 1부는 <근역서휘(槿域書彙)>라고 제목을 붙여 1911년에 완성하였는데, 일찍이 박영철 씨의 손에 들어갔다가 그에 의해 당시의 경성제국대학에 기증되어 현재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또 다른 1부가 곧 이 <근묵>인데 ‘槿墨’이란 제목을 80세에 썼으므로 1943년에 첩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근묵>은 위창댁에 전해오다가 지난 1964년에 성균관대학교박물관에서 그 유족으로부터 양도받았다. 위창의 필생의 공력이 담긴 두 필첩(筆帖)은 서로 쌍벽을 이룬다. ‘근묵’이란 근역(槿域), 즉 무궁화가 피는 우리나라의 묵적이란 뜻이므로, 우리나라 조선시대 글씨의 흐름과 수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근묵>은 서예의 전문가뿐만 아니라, 전통문화를 이해하려는 분들 사이에서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에 1981년과 1995년 두 차례에 걸쳐 영인본을 발간한 바 있다. 그러나 간행부수도 적었고 여러 가지 미흡한 점들이 없지 않았다.

이번 간행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원첩 그대로 촬영하여 최대한 필묵(筆墨)의 질감을 살리려고 노력하였다는 점과 난해한 초서를 알기 쉽게 정자인 해서로 옮겨 적어 번역하였다는 점이다. 이로써 서예를 전공하는 사람은 물론 일반독자들도 내용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근묵>의 서체와 구성

<근묵>에 실린 묵적을 서체별로 보면 행서가 595점, 초서가 468점으로 행초서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해서 57점, 전서와 예서가 16점이어서 전·예·해·행·초의 구색을 모두 갖추었다.

여기에 실린 글씨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운필(運筆)한 것이다. 그 필치는 유려하고 창달(暢達)하여 보는 이의 마음과 눈을 기쁘게 하는 감동력을 가졌다.


<근묵>의 글을 문장 종류별로 분류하면 서간(書簡) 724, 시(詩) 359, 부(賦) 7, 서(序) 5, 기(記) 10, 발(跋) 2, 잠언(箴言) 1, 법어(法語) 1, 화제(畵題) 3, 제액(題額) 15, 증언(贈言) 2, 찬문(贊文) 1, 표제(表題) 1, 유지(諭旨) 1, 물목(物目) 1, 종명(鐘銘) 1, 비명(碑銘) 2점이다. 서간 곧 편지가 거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오세창, 서화 수장뿐 아니라 저술에도 많은 공적

오세창 선생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명(仲銘), 위창(葦滄)은 그의 호이다. 1864년 7월15일 서울 시동(詩洞: 청계천 2가)에서 역관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위창은 일찍부터 서화골동의 가치를 인식하여 국외로 유출되는 서화를 동분서주하며 수천 점을 구입하였다. 또한 간송 전형필이 10만 석의 사재를 헐어 골동서화를 수집하는데 감식안을 제공하였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의 고서화 명품 가운데 상당수가 오세창의 감정과 평가를 거쳐 수집된 것이다.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은 수준 높은 감식안을 더욱 발전시켜 민족문화의 유산을 지키는 데 크게 이바지 하였다.

위창은 서화의 수장뿐만이 아니라, 저술에도 많은 공적을 남겼다. 문집이나 국고문헌(國故文獻)에서 인명·미술사 자료를 두루 모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1928년)을 출간하여 한국미술사의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명화(名畵) 251점을 모아 <근역화휘(槿域畵彙)>를 만들었고, 우리나라 문인화가 830여명의 도장 3,930여방을 모아 <근역인수(槿域印藪)>(1937년)를 만들었다. 위창은 이런 여러 편의 대저(大著)를 만들어 불모지인 우리 미술사학에 기초적인 공적을 남겼다.

<근묵>의 재미있는 대목


○ 창덕궁에서 담배를 재배한 정조 임금.

친척에게 물품을 하사한 정조임금의 물목(智188)은 매우 특이하다. 이때 하사한 것으로 벼 한 석, 담배 두 봉, 게장 한 항아리, 밤 한 말이다. 1792년에 상림(上林)에서 재배한 벼가 소출이 많아 예전에 말로 보내던 것을 지금은 석으로 보낸다 하였고, 내원(內苑)에서 재배한 담배가 토양이 적합하여 맛이 좋아 평안도 삼등(三登)에서 나는 질 좋은 담배에 못지않다고 자랑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상림은 왕의 농장이 있었던 창덕궁의 후원을 가리키는데, ?동궐도?를 보면 지금의 창경궁 춘당지 일대에 있던 넓은 논으로 추정된다. 내원이란 통상 옥류천 주변 깊숙한 곳을 가리킨다. 원(園)이란 새로 조성한 수원의 현륭원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內帑之印’이란 도장도 매우 보기 드물다.

○ 아내를 잃었을 땐 방랑이 최고 ―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편지


이 편지(智266)는 아내를 잃은 사람을 위로하면서 쓴 것이다. 추사는 자신이 일찍이 아내를 잃어 봐서 그 슬픔을 잘 안다고 하면서 해학 겸 위로를 하였다. 추사는 아내를 잃었을 때 마음을 안정시키고 슬픔을 삭이는 데는, ‘종려나무 삿갓을 쓰고 오동나무 나막신을 신고 산색을 보고 강물 소리를 들으며 방랑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비법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좋은 품질의 용정차(龍井茶)와 대나무 필통을 받고 종이부채에 그림을 그려 돌려보내는 등 내용은 짧으나 매우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 1897년 독립협회는 이태조 등극일을 기원절로 삼았다. ― 윤치호(尹致昊) 편지

윤치호의 편지(智485)는 지인에게 기원절(紀元節)의 약사(略史)를 묻는 편지이다. 참고로 윤치호는 당시 독립협회의 일원으로 활동중이었다. 독립협회는 1896년(고종 33) 7월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로서,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반대하여 한국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하였다. 독립협회는 1392년 음력 7월 16일에 개국한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국일을 우리나라의 기원절로 삼았고, 1897년 양력 8월 13일에 개국 505회 기원절 기념식을 독립관에서 거행한 일이 있다. 이 편지를 통해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고, 아울러 독립협회의 성격규명은 물론 정신적 지향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 헤이그에서 순절한 이준을 애도 ― 이준(李儁)의 시와 오세창의 추도사

이 작품(智470)은 오세창이 수집한 이준(李儁) 열사의 시고에 오세창이 추도사를 덧붙인 것이다. 오세창은 1907년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에 가서 순절한 이준 열사의 거사를 흠모하며 천고에 길이 추앙받으리라는 찬사를 올렸다. 이 시는 1933년에 덧붙인 것인데, ?근묵?을 두루 보면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시대의 인사들은 주로 절개가 빼어난 사람들을 위주로 편집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매국노 이완용도 글씨로 이름이 있어서 선집되었으나, 민족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거나 암흑기에 들었을 때 빼어난 절개를 보여준 인물의 필적을 뽑아 영구히 전하게 하려는 위창의 우국충정을 엿볼 수 있다.

○ 고환이 퉁퉁 부어 ― 가장 은밀한 이용백(李蓉白)의 편지

이용백(李蓉白)의 편지(智472)를 보면 편지란 두 사람 사이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유용한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이용백이 풍습(風濕)으로 인해 하초의 병이 되어, 오른쪽 고환이 북처럼 커져서 겉 거죽이 감처럼 붉고 윤기가 난다고 한 내용이 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참으로 난감한 내용을 실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선인들은 편지를 통해 소식을 묻는 것은 물론, 남에게 말 못할 크고 작은 문제도 상의하여 깊은 교유를 유지하였다.

<근묵>의 원형복제와 완역 간행의 의미

<근묵>의 영인과 번역이 완비된 완역출간을 실현하게 되었다. 인(仁)·의(義)·예(禮)·지(智) 4권에 원본을 영인해 싣고, 신(信)권에 탈초(원본의 초서를 판독해 정자인 해서로 옮겨적은 것)와 번역문을 모아서 모두 5권으로 구성하였다. 간행을 위해 들인 시간은 6년이 걸렸고, 번역·사진촬영·간행비용을 두루 합치면 6억원을 상회한다. 성균관대 박물관은 소중한 유물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고심을 거듭한 끝에, 1:1 실물대 영인을 원칙으로 원본의 색감을 최대한 재현하고자 방침을 정했다. 실물과 동일한 크기와 색감은 이번 간행의 핵심이고, 번역과 주석을 완비함으로써 일반 대중의 요구도 만족시키고자 했다. 이번에 출간하는 <근묵>은 실물을 복제한 것이므로 실제의 원첩을 한 질 소유하는 것과 다름없다.

책 가격: <근묵> 5권 전질 1백만원.

사진 제공: 성균관대 출판부

 

 


「근묵」한국 서예사의 숨결을 느끼다

 

 

⑤ 근묵의 가치탐구

근묵이 지닌 의의와 그 가치를 탐구해보자

 

 

 

600년 조선 서예사의 진수…‘근묵(槿墨)’ 마침내 완역



[쿠키 문화]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엮은 글씨첩으로 '600년 한국 서예사의 집대성'이라는 평가를 받는 '근묵(槿墨)'이 마침내 한글로 완역돼 출간됐다.

성균관대 박물관과 출판부 측은 29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성균관대의 대표적 유물인 '근묵'을 마침내 완역했다"면서 "원첩을 그대로 촬영해 본래 필묵의 질감을 최대한 살렸으며, 난해한 초서를 알기 쉽게 우리말로 번역해 일반인들도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고 밝혔다.

'근묵'이란 근역(槿域), 즉 무궁화가 피는 우리나라의 묵적(墨蹟)이란 뜻으로 국왕과 왕후로부터 문무 관료와 재야 학자, 승려와 중인에 이르기까지 주로 조선시대 주요 인물들의 글씨를 모아 서첩으로 묶은 것이다. 고려 말 정몽주와 길재, 조선의 정도전, 성삼문, 이황, 이이, 정약용, 그리고 대한제국 말기의 민형식에 이르기까지 1136명의 서간과 시 등으로 이뤄졌다. 1인당 1점씩 총 1136점이 시대 순으로 나눠 담겼다. 연대로 보면 맨 처음의 정몽주가 1341년에 사망했고, 맨 뒤의 민형식이 1947년에 사망해 상하 600여 년에 걸친다.

위창이 거액의 사재를 들여 오랜 세월에 걸쳐 이들 선인의 글을 모아 1943년에 34권의 첩장본으로 완성했다. 그 뒤 위창 댁에 전해오다가 1964년 성균관대 박물관이 유족으로부터 양도받았다.

이 서첩은 조선시대 글씨의 흐름과 수준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로 꼽혀왔지만 일반인은 물론 서예 전공자들도 접근이 극히 어려웠다. 원본은 열람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고, 1981년과 1995년에 제작된 영인본도 열람이 매우 까다로웠다. 게다가 81년 영인본은 작은 판형에 흑백으로만 촬영된 데다 해상도도 떨어져 원본의 질감을 살리기는커녕 알아볼 수 없는 글씨들이 너무 많았다. 95년 본은 출판사 관계자의 잠적으로 1권만 나온 뒤 중단됐다. 이 두 가지 영인본은 청명 임창순(1914-1999)이 원본의 초서를 판독해 정자(正字)인 해서로 옮겨 적은 것('탈초' 또는 '성문'이라고 한다)이기는 하지만, 내용이 난해해 전공자들도 해석에 애를 먹었다.

이번에 한글로 번역된 '근묵'은 읽어서 바로 이해하기가 쉽다. 더욱이 첨단 기술로 원첩을 촬영한 덕분에 해상도가 매우 뛰어나 원첩을 직접 보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다. 성균관대 측은 "과거 영인본과 이번 완역본의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설명했다. 성균관대는 교육부특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지난 5년 간 6억 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 영인과 번역이 겸비된 완역 작업을 벌여왔다. 하영휘 가회고문서연구소장이 번역을 완성했고, 김채식 성균관대 박물관 학예사가 교열을 봤다.

전체 글 가운데 서간이 3분의 2를 차지하는 한글 완역본은 당시 생활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출간 의미가 크다. 흥미로운 글들이 여럿 눈에 띄는데, 이를테면 정조(1752-1800)가 1792년 9월2일 친척에게 보낸 선물 목록을 보면 쌀과 밤, 게장에 특히 창덕궁에서 재배한 담배까지 등장한다. 정조는 "내원(內苑·궁궐 정원)의 담배 두 봉. 토양이 적합하고 맛이 좋아 삼등(三登·평안남도 삼등에서 나는 질 좋은 담배)에 못지않다"고 선물로 하사하는 담배 두 봉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아내를 잃은 지인에게 보낸 위로 편지에서 "(아내를 잃었을 때) 마음을 안정시키고 슬픔을 삭이는 데는, 종려나무 삿갓을 쓰고

오동나무 나막신을 신고 산색을 보고 강물 소리를 들으며 방랑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한번 시험해 보시지 않겠습니까"라고 권한다.

조선후기 문인 이용백(1859-?)의 편지는 개인적으로 매우 곤혹스럽고 은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풍습(風濕)으로 인해 하초의 병이 되어, 오른쪽 고환이 북처럼 커져서 겉 거죽이 감처럼 붉고 윤기가 난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한글 번역 이전에 '근묵'은 본래 걸출한 서예가들의 진작(眞作)을 집대성한 서첩으로서 '조선 서예사의 기준작'을 제시하는 교과서 역할을 해왔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간첩류(簡帖類)는 그 수가 수 천에 달하긴 하지만, 그 내용이 풍부하고 역대 주요 인물이 거의 빠짐없이 망라된 것으로는 오세창의 컬렉션에 비견할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 조선 전기의 명필로 특히 초서를 잘 써 초성(草聖)이라고까지 불렸던 황기로(1508-?)의 작품은 21세기 조형미술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살아 꿈틀거리는 듯 유려한 필세와 그윽한 깊이를 보여준다. 고향에 은거하며 여러 번 벼슬에 임명됐음에도 나아가지 않았던 황기로의 필적은 목판본 외에는 전해지는 것이 극히 드물다. '근묵'에 실린 황기로의 득의작 내용은 이렇다. "소매 속에 시권(詩券)을 넣고 형주로 올라가니/달빛과 갈대꽃이 한결같이 수심에 잠겼네./만약 광문(廣文·청빈하고 한가한 학자)을 만나면 나를 물을 것이니/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조각배에 가득하다 말하게."

이번 완역본은 모두 5권으로 구성됐다. 4권에 원첩 작품들을 그 순서 그대로 영인해 싣고 마지막 1권에 탈초와 번역문을 모았다. 총 1000질을 찍었다는데, 5권 한질 가격이 100만원이다. 성균관대 측은 "소중한 유물을 박물관 수장고에 잠재우기 보다는 국민들과 향유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판단에 따라 막대한 시간과 물력을 들여 원가 정도 수준에서 간행했다"라며 "원첩 실물과 동일한 크기 및 색감을 재현한 것이 이번 간행의 핵심이고, 번역과 주석까지 완비해 일반 대중의 요구도 만족시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근묵'을 엮은 위창 오세창은 1864년 7월15일 서울 시동(현 청계천 2가)에서 역관 오경석(1831-1879)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오경석은 중인 출신으로 역관이 돼 청나라를 왕래하며 신학문에 일찍 개명했고,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소장 정치인들을 지도해 개화파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글씨와 그림에 능했고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위창은 넉넉한 집한 형편과 고고한 학문적 분위기 속에 자라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비서관이 됐으며, 이어 농상공부 참서관, 통신원 국장 등을 역임했다. 1906년 손병희와 함께 '만세보'를 창간해 사장에 취임했고,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을 한 사람으로 활약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6·25 동란 중 피난지 대구에서 사망해 사회장이 거행됐다.

그는 일찍부터 서화골동의 가치를 인식해 국외로 유출되는 서화를 동분서주하며 수천 점 구입했다. 간송 전형필이 10만 석의 재산을 헐어 골동서화를 수집하는 데 위창이 감식안을 제공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위창 스스로가 막대한 사재를 투입해 민족문화의 유산을 지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는 사실은 간송의 업적에 가려져 있는 게 사실이다. 위창은 불세출의 감식안으로 한국미술사의 초석인 '근역서화징'(1928)을 저술했고, 이어 우리나라의 명화 251점을 모은 '근역화휘', 문인화가 830여 명의 도장 3930여 방을 모은 '근역인수' 등 여러 대작을 남겼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

 

1천136명의 옛글씨 묶은 '근묵' 완역



(서울=연합뉴스) = 정몽주, 길재, 정도전, 성삼문, 이황, 정약용 등1천136명의 글씨를 서화 감식의 대가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엮은 글씨첩 '근묵(槿墨)'이 66년 만에 완역돼 출간됐다. 2009.6.29. <<문화부 기사 참조, 성균관대 제공>>
 
 

'근묵(槿墨)'에 실린 고종의 편지글



【서울=뉴시스】

성균관대 박물관과 출판부는 29일 조선시대 서예사를 집대성한 글씨모음집 '근묵(槿墨)'을 고해상도 영인 및 탈초 완역해 5권으로 출간했다.

사진은 고종이 쓴 편지글. /김선아기자 avatar73@newsis.com
 
 
 

'근묵(槿墨)'에 실린 정조의 글씨 



【서울=뉴시스】

성균관대 박물관과 출판부는 29일 조선시대 서예사를 집대성한 글씨모음집 '근묵(槿墨)'을 고해상도 영인 및 탈초 완역해 5권으로 출간했다.

사진은 정조의 글씨. 친척에게 보낸 선물목록을 적은 것이다. /김선아기자 avatar73@newsis.com
 

'근묵(槿墨)'에 실린 이황의 시문



【서울=뉴시스】

성균관대 박물관과 출판부는 29일 조선시대 서예사를 집대성한 글씨모음집 '근묵(槿墨)'을 고해상도 영인 및 탈초 완역해 5권으로 출간했다.

사진은 이황이 쓴 시문. /김선아기자 avatar73@newsis.com
 

'근묵(槿墨)'에 실린 황기로의 시문



【서울=뉴시스】

성균관대 박물관과 출판부는 29일 조선시대 서예사를 집대성한 글씨모음집 '근묵(槿墨)'을 고해상도 영인 및 탈초 완역해 5권으로 출간했다.

사진은 황기로가 쓴 시문. /김선아기자 avatar73@newsis.com
 
 
 

'근묵(槿墨)'에 실린 윤선도의 편지


 
 

'근묵(槿墨)'에 실린 김상용의 시문


 
 
 

(서울=연합뉴스) 정몽주, 길재, 정도전, 성삼문, 이황, 정약용 등1천136명의 글씨를 서화 감식의 대가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엮은 글씨첩 '근묵(槿墨)'이 66년 만에 완역돼 출간됐다. 사진은 김굉필의 시. 2009.6.29. <<문화부 기사 참조, 성균관대 제공>>
 
 

'근묵(槿墨)'에 실린 성삼문의 편지글



【서울=뉴시스】
 
 
 

'근묵(槿墨)'에 실린 이정구의 시문



【서울=뉴시스】
 

'근묵(槿墨)'에 실린 정약용의 시문



【서울=뉴시스】

성균관대 박물관과 출판부는 29일 조선시대 서예사를 집대성한 글씨모음집 '근묵(槿墨)'을 고해상도 영인 및 탈초 완역해 5권으로 출간했다.
 
 

'근묵(槿墨)'에 실린 이한진의 시문



【서울=뉴시스】

성균관대 박물관과 출판부는 29일 조선시대 서예사를 집대성한 글씨모음집 '근묵(槿墨)'을 고해상도 영인 및 탈초 완역해 5권으로 출간했다.

'근묵(槿墨)'에 실린 정도전의 편지글


 
 
 
 

(서울=연합뉴스) 정몽주, 길재, 정도전, 성삼문, 이황, 정약용 등1천136명의 글씨를 서화 감식의 대가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엮은 글씨첩 '근묵(槿墨)'이 66년 만에 완역돼 출간됐다. 사진은 정도전의 편지. 2009.6.29. <<문화부 기사 참조, 성균관대 제공>>
 


(서울=연합뉴스) 정몽주, 길재, 정도전, 성삼문, 이황, 정약용 등1천136명의 글씨를 서화 감식의 대가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엮은 글씨첩 '근묵(槿墨)'이 66년 만에 완역돼 출간됐다. 사진은 정약용의 시. 2009.6.29. <<문화부 기사 참조, 성균관대 제공>>
 
 


(서울=연합뉴스) 정몽주, 길재, 정도전, 성삼문, 이황, 정약용 등1천136명의 글씨를 서화 감식의 대가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엮은 글씨첩 '근묵(槿墨)'이 66년 만에 완역돼 출간됐다. 사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의 편지. 2009.6.29. <<문화부 기사 참조, 성균관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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